김동수(야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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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
2. KBO 리그 시절
2.1.1. 1990~1991 시즌
2.1.2. 1992~1993 시즌
2.1.3. 1994 시즌
2.1.4. 1995 시즌
2.1.5. 1996 시즌
2.1.6. 1997 시즌
2.1.7. 1998 시즌
2.1.8. 1999 시즌
2.1.9. FA
2.2.1. 2000 시즌
2.2.2. 2001 시즌
2.4.1. 2003 시즌
2.4.2. 2004 시즌
2.4.3. 2005 시즌
2.4.4. 2006~2007 시즌
2.5.1. 2008 시즌
2.5.2. 2009 시즌
2.5.3. 은퇴
2.6. 총평
3. 연도별 주요 성적


1. 아마추어 시절[편집]


한양대 재학시절(1986~1989)에는 우완 정민태(88학번)와 좌완 구대성(89학번)을 리드했고, 서울올림픽에도 출전했다. 당시에는 대학생 선수들이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의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시기라서 국가대표 주전 포수로 타대학의 국대급 투수를 다양하게 리드한 경험이 많다.


2. KBO 리그 시절[편집]



2.1. LG 트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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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차 지명을 받아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2.1.1. 1990~1991 시즌[편집]


1990년 데뷔 시즌에 심재원, 서효인 등 쟁쟁했던 선배들을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했고, 한국시리즈 직행이 걸린 OB 베어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기홈런을 터뜨리며(1대0 승리) LG 트윈스의 창단 첫 페넌트레이스 1위를 이끌었다. LG 트윈스는 그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룩했고, 김동수는 포수 출신, 우승 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KBO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프로야구 사상 포수로는 처음으로 데뷔 첫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LG는 MBC 청룡 시절부터 팀의 핵심 포수였던 심재원을 은퇴시키며 김동수 원탑 체제로 개편을 단행하였으나 정작 김동수는 1991년 시즌에 2년차 징크스와 허리 부상까지 겹쳐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1.2. 1992~1993 시즌[편집]


1991 시즌 종료 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고 1992 시즌 20홈런을 때려내며 부활, 1993 시즌 역시 투고타저시대에 비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2번째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1], 이 때 부터 이만수, 장채근, 김동기 등을 제치고 최고의 포수 반열에 오른다.[2]


2.1.3. 1994 시즌[편집]


1994년 시즌은 방위 복무로 인해 홈 경기와 인근 수도권 원정 경기밖에 출전[3]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두번째 우승반지와 3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저 때의 골글은 태평양의 김동기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단 2표 차이로 결과가 갈렸다. [4][5]


2.1.4. 1995 시즌[편집]


1995 시즌 중 방위병 소집 해제로 복귀하였고 이상훈-김기범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팀을 전반기 1위로 이끄나 8월부터 시작된 OB 베어스의 대약진과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환 감독의 전략미스[6]등의 악재가 겹치며 시즌을 2위로 마감, 이어진 포스트 시즌에서 공포의 소총부대를 구성한 롯데 자이언츠에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하며 2연속 우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고 김동수는 4번째 골든 글러브 수상에 만족해야 했다.


2.1.5. 1996 시즌[편집]


1996년에는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득점권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8월 초에 50타점을 기록하며 전체 타점 순위 상위권에 들었을 정도였으나 8월 초반 이후 시즌 종료까지 타점을 기록하지 못하는 엄청난 부진을 보였고 팀은 7위[7]에, 골든글러브 역시 포도대장으로 불리며 주가를 올린 박경완에게 빼앗기며 체면을 구겼다.[8][9]


2.1.6. 1997 시즌[편집]


1997년에는 임선동, 전승남, 손혁 등 신인급들이 많은 투수진을 훌륭하게 리드하고 시즌 초반 심재학의 부상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 주는 타격까지 선보이며 공수 양면에서 활약,[10]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본인도 1996년에 박경완에게 빼앗겼던 골든글러브를 다시 탈환하며 5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 타격은 타율은 낮았지만 17홈런을 때리며 맹활약


2.1.7. 1998 시즌[편집]


1998년 역시, 공수양면에서 활약하였는데, 7월 25일 경기에서는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였던 정민철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뽑아내어 대기록 작성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타율 2할 8푼, 홈런 20개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누수가 많았던 투수진을 잘 이끌어 코리안 시리즈 진출까지 시키는 등의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골든글러브의 영광은 당시 제1차 현대왕조를 세운 박경완에게 밀려 연속 수상에는 실패하였다.[11]


2.1.8. 1999 시즌[편집]


그리고 1998년 이후 김동수가 신인 시절 때 선배 포수 심재원 등을 밀어냈던 것처럼 당시 신인이었던 조인성을 차기 주전 포수로 밀어주려는 LG 구단과 김동수 간의 신경전이 펼쳐지게 된다. 이 때 틀어졌던 양자간의 관계는 1999년 시즌 중 트레이드 문제[12]가 터지면서 끝장이 나게 되는데, 이런 어수선한 상황과 팀에서 의도적으로 출전을 줄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동수는 1999년 6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1.9. FA[편집]


1999년 시즌 종료 후 첫 FA 제도가 시작되었고 조인성을 밀어주긴 하되, 안정된 베테랑 백업으로서 당장은 김동수가 필요했던 LG는 김동수와 계약을 맺기 위해 그에게 연락하였으나 김동수는 우선협상 기간 동안 하와이로 출국하여 연락을 끊고 만다. 이에 당황한 LG 구단은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KBO 이사회를 소집하여 FA제도의 폐지를 시도하였으나 나머지 구단의 반발로 무산되고 LG구단은 이 자리에서 포수가 필요했던 삼성 구단에서 김동수와 계약하기 위해 일부러 김동수에게 잠적을 권유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삼성 구단과 언쟁을 벌이게 된다.[13][14] 이런 논란 속에 원소속팀 우선협상기간이 끝난 바로 다음날 귀국 후 삼성과의 계약이 발표되었다. 이때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LG 팬들에게는 배신자의 이미지가 남게 되었고, LG 프런트는 보복으로 투수 김상엽을 보상선수로 지명했다. LG팬 입장에서는 우선협상 기간동안 내내 아예 한국에 없었고 타구단 협상기간이 되자마자 돌아온 당일 삼성과 계약했으니 썩 좋게 보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15]

배신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지만, LG 시절 김동수의 전성기는 이만수의 뒤를 이은 유일무이한 포수 본좌였다. 그의 독주체제가 구축된 1993년을 기점으로 이만수, 장채근, 김동기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임수혁이도형은 잠시 반짝하다가 주저앉았다. 1990년대 말에 두각을 나타낸 박경완이나 진갑용은 전성기가 2000년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최고의 포수는 김동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16] 또한 2023년 현재까지 LG의 우타자들 중 가장 뛰어난 성적을 올린 타자로, 그를 능가할 만한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7]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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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식에서.


2.2.1. 2000 시즌[편집]


2000년 시즌, 의욕적으로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서 첫 시즌을 맞이하게 되나 부상과 부진, 그리고 조범현 당시 배터리코치와의 불화 등으로 인해 타율 0.205, 11홈런 30타점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며 FA로 영입된 포수였음에도 진갑용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된다.


2.2.2. 2001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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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역시 다를 게 없어서 서브 포수로 완전히 전락하고 말았으며, 같은 FA 선수였던 홍현우, 이강철, 김기태 등도 함께 부진하면서 한때 FA 무용론까지 일었을 정도였다. 진갑용이 시즌 후반 부상을 당하며 한국시리즈에 주전 포수로 출장하였지만,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한국시리즈 패배를 막지 못했다.


2.3.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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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즌 후 6:2 현금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기게 된다.[18]

이 해 SK에서 메인 포수 자리를 맡긴 했으나 타율 .243으로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고(OPS .732) 출전 경기 역시 95경기에 불과했다. 강성우, 양용모 등 타 포수들의 성적이 OPS .5 언저리로 워낙 처참해 그에 비하면 괜찮은 성적이긴 했지만...

2002년 시즌이 끝난 후 SK의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조범현 감독은 FA 최대어인 박경완을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김동수를 방출하였다.# 박경완의 FA 이적으로 포수진에 공백이 생긴 현대 유니콘스가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고, 곧바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다. 결과적으로 박경완과 팀을 맞바꾼 셈.


2.4.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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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_동수.jpg


2002년 시즌을 마치고 SK에서 방출되어 은퇴위기를 맞은 김동수는 선수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팀을 찾던 중 2003년 1월 현대 유니콘스의 영입 제의를 받고 연봉 1억에 계약을 맺으며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2.4.1. 2003 시즌[편집]


# 2003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박경완의 공백을 강귀태와 대학리그 포수 최대어였던 이택근으로 메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김동수는 백업포수, 그리고 대타 요원으로 쓰여질 계획이었고, 실제로 시범경기와 시즌 시작 후 4월까지 김동수는 벤치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전 포수였던 강귀태가 개막 후 2경기만에 부상을 당하고 이택근의 포수 수비가 시망 수준으로 드러나자, 바로 주전 포수로 복귀했다. 5월부터 안정된 수비는 물론 높은 타율을 기록하면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을 방출한 SK를 상대로 활약하며 현대 유니콘스의 3번째 우승을 견인하였다. 유일하게 3할을 친 것과 마지막으로 골든글러브를 받은 것도 이 시즌의 일.


2.4.2. 2004 시즌[편집]


2004년 시즌, 초반에는 극도로 부진에 빠진적이 있었으나. 시즌 중반 무렵부터 서서히 치고 오르기 시작하여 팀의 주전포수로 역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팀의 한국시리즈 2연패에 공헌하였다. 타석 수에 시합 수가 적었던 것은 체력 안배 차원에서 강귀태와 7:3 비율로 출장하였기 때문.

2004년 시즌이 끝난 후 FA 권리를 행사하여 2번째 FA가 되었다. 원소속팀 현대에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며 2년 10억을 요구하였으나 현대 쪽에서는 김동수의 나이를 고려하여 2년 계약을 거부, 우선협상이 결렬되어 시장이 나가게 되었다. 당시 포수난에 시달리고 있었던[19] 롯데 자이언츠쪽에서 김동수 영입에 나설 계획이라는 보도가 있었으나 롯데 측에서도 김동수의 나이와 영입 시 보상 선수를 내줘야하는 점에 부담을 느껴 영입을 포기했다. 1월 중순까지 팀을 찾지 못하며 FA 미아가 되어버렸고 결국 현대와의 기나긴 협상 끝에 2년 6억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마친다.


2.4.3. 2005 시즌[편집]


2005년 시즌 안정된 수비와 5월 22일 경기에서 3연타석 홈런을 때려낼 정도로 죽지 않은 장타력을 과시하였으나 시즌 중반 부상으로 이탈하여 타율 0.219에 10홈런을 기록하여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2.4.4. 2006~2007 시즌[편집]


2006년 시즌에선 작년의 부진을 만회하며 작년 7위였던 팀을 2위로 이끄는데 공헌하였고, 2007년 시즌 역시 구단 매각설로 팀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도 동요없이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어찌보면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 시절 부터 신바람 LG의 주역으로 태-현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LG맨이었지만 현대의 마지막 황혼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2.5. 히어로즈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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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2008 시즌[편집]


히어로즈로 팀명이 바뀐 이후 2008년 9월 23일에 두산 베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3번째이자 포수로는 최초로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포수로는 최초로 1500안타를 달성하였다.


2.5.2. 2009 시즌[편집]


2009 시즌부터는 플레잉코치가 된다. 2009년엔 한 때 4할을 치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 후 타격감이 좀 떨어졌고 노쇠화와 더불어 선수로 뛰기는 하지만 사실상 코치와 다름없는 플레잉코치라는 자리에 있다는 점 등 출장 자체가 많지 않았다.[20]


2.5.3. 은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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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0일 은퇴식에서.[21][22]

결국 2010년부터는 선수 생활을 접고 코치로 완전히 전향. 5월 30일 목동 LG[23]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은퇴식을 가졌다.

2.6. 총평[편집]


통산 성적은 2,039경기 6,940타석 5,915타수 1,556안타 202홈런 871타점 56도루 타율 .263 출루율 .346 장타율 .423이다. 공수 양면에서 수준급의 기량을 지녔고 삼성 시절의 부진을 제외하면 수비부담이 큰 포수 치고는 상당히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역대 최고의 포수를 꼽을 때면 빠짐없이 거론된다. 한마디로 1990년대를 대표하는 포수.

실제로 sWAR(스탯티즈 WAR)로 포수 누적 성적을 나열해보면 2022년 1월 기준 박경완(67.63)-이만수(65.29)-강민호(57.58)에 이은 4위권. 5위는 현역인 양의지(53.84)이므로 김동수가 곧 5위가 될 확률이 높지만, 이후 위치한 선수들이 홍성흔, 진갑용, 김동기, 조인성 등 은퇴선수들이고, 양의지와 강민호를 제외하면 2022년 현역선수들 중 김동수를 역전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도 사실상 없다시피한 수준이라 5위권은 앞으로도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지켜낼 확률이 높다.[24]

이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한 덕분에 LG와 현대에서 4개의 우승반지도 수집하는 등 소속팀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성적만큼이나 상복도 많아서 신인왕(1990년)에다 7차례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1990년에는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동시에 수상하기도 했으며, 신인 포수의 골든글러브 수상은 이 때가 최초이다. 또한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7회 수상은 김동수가 유일하며[25] 다른 레전드급 포수인 박경완(4회), 이만수(5회), 강민호(6회), 양의지(6회)도 해본 적 없는 대기록이다.[26]

이 중 현역인 강민호 양의지가 최고참급 선수임을 감안하면 김동수가 포수부문 최다 수상자 기록을 오랜 기간 더 유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강민호와 양의지는 2022년 현재 포수로 출장은 하지만,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앞으로의 포수 출장 기록 또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으면서 골든글러브 후보로 지명타자 부문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대단한 사실은 SK에서 방출된 후 은퇴까지(2003년~2009년) 쌓은 sWAR가 무려 12.5나 된다는 것이다. 연 평균 1.79나 되는 수치인데, 방출과 재취업 과정을 겪고 나서도 이정도로 화려한 말년을 보낸 KBO리그 내국인 선수는 김동수가 유일하다. 젊은 주전포수(이택근)를 백업으로 밀어내고 36살의 베테랑이 주전으로 마스크를 쓰는 경우도 거의 없다.[27] 팀 후배 포수 박동원이 데뷔 후 2021년까지 10시즌을 뛰며 쌓은 WAR가 12.63이니 간접적인 비교가 될 것이다.

이 와중에 2003년에는 아예 포수부문 골든글러브까지 받았다. 포수로서는 최고령 골든글러브. 물론 최형우, 서건창, 정훈, 이종욱 등도 방출 이적 신화로 유명하며 엄청난 누적을 쌓았지만, 이들은 신인급 시절에 방출된 뒤 새 팀 또는 재영입된 팀에서 전성기를 보낸 것이라 이미 이룰 것 다 이룬 상태에서 방출됐던 김동수와는 다르다.

레전드급 스탯을 이미 찍어놓고 느즈막히 새출발한 후 또다시 평범한 선수들의 커리어 WAR마저도 훌쩍 뛰어넘는 업적을 쌓은 경우는 김동수 외에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굳이 꼽자면 노익장의 대명사 최향남(방출 후 누적 sWAR 5.21)이나 최영필(방출 후 누적 sWAR 4.93) 등을 들 수 있지만, 전성기 시절 활약은 물론 자유이적 후에도 김동수와 비교될 정도까지는 아니다.

물론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2002 시즌 후 박경완을 영입하고 싶어한 SK의 특수상황 때문에 기량에 비해 일찍 방출되었다고 볼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으나, 당시 김동수의 나이는 이미 만 35세가 넘었으며, 전성기가 꺾인 뒤 은퇴를 거부하고 이적한 선수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머지않아 선수 생활을 마감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유니콘스 입단 당시의 연봉이 1억원으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는 부분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놓고 당시 sWAR를 4 넘게 찍고 골든글러브를 탄 것이다!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이용규가 키움 히어로즈 이적 후 외야수부문 골든글러브를 탔다고 상상해보면 어느 정도 비교가 될 것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빛나는 선수 시절을 보낸 선수이긴 하지만, 이만수와 박경완 등의 업적이 워낙 뚜렷하기에 김동수가 KBO 리그 역대 최고의 포수라고 하기까진 힘들 수 있다. 그래도 앞서 언급된 선수들과 더불어 시대를 상징한 최상급 포수 중 한 명으로 불리기에는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3.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LG
110
352
.290
102
20
1
13
62
46
15
55
.463
.379
1991
90
255
.196
50
8
3
5
24
29
5
34
.310
.288
1992
121
381
.257
98
15
4
20
69
47
3
50
.475
.343
1993
115
372
.274
102
16
3
16
(4위)
56
47
7
47
.462
(5위)
.351
1994
95
316
.288
91
20
3
6
42
45
4
48
.427
.381
1995
108
334
.260
87
15
2
10
35
40
4
44
.407
.343
1996
108
330
.245
81
11
0
12
50
43
0
43
.388
.330
1997
121
394
.236
93
26
0
17
66
54
2
63
.431
.335
1998
118
408
.284
116
28
2
20
66
67
2
53
.510
.362
1999
104
334
.287
96
22
1
16
65
55
1
49
.503
.37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삼성
90
200
.205
41
9
1
11
30
23
0
35
.425
.319
2001
89
181
.276
50
11
0
5
30
18
0
26
.420
.36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2
SK
95
251
.243
61
10
2
11
32
28
1
31
.430
.323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현대
117
367
.308
113
15
1
16
68
48
3
53
.485
.390
2004
113
311
.251
78
13
1
2
31
38
2
45
.318
.342
2005
96
274
.219
60
4
2
10
30
24
2
25
.358
.283
2006
115
333
.279
93
12
0
5
40
38
3
37
.360
.348
2007
111
306
.278
85
18
0
4
39
22
2
27
.376
.329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우리-서울
94
159
.239
38
7
2
1
23
15
0
16
.327
.305
2009
29
57
.368
21
6
0
2
13
14
0
10
.579
.456
KBO 통산
(20시즌)
2039
5915
.263
1556
286
28
202
871
741
56
791
.423
.346
[1] 어느 정도였냐면 팀 내 최고 OPS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타자 중 최다 홈런(16개)을 기록한다. 이종범이 타이인 홈런 16개를 기록했지만, 잠실을 홈으로 쓰는 선수와 광주를 홈으로 쓰는 선수를 같이 보기는 좀 무리.[2] 이만수는 1993년부터 포수보다는 1루수, 지명타자로 출전을 많이 하였다.[3] 방위병이 홈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95년의 일이며, 장거리 원정을 나가지 못했던 김동수의 공백은 김정민이 메웠다.[4] 김동수는 골든글러브 수상후보 기준은 통과했으나 규정타석 미달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세이버매트릭스라는 개념보다는 타율, 홈런 그리고 규정타석 등이 중요한 척도였다. 김동수는 규정타수 미달이고 타격 성적이 김동기에 못 미침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여 우승 프리미엄의 대표적 예가 되었던 것이다.[5] 물론 이러한 평가는 당시의 반응으로 봐야한다. 지금에 와서는 방위병으로 경기나 타석수가 적은 것 홈런이나 타점에서 김동기에 밀리기는 하지만 타율과 출루율은 더 좋았고 장타율 정도만 아주 근소하게 낮다. WRC+나 WAR도 김동기에 비해 높다. 즉 당대에는 김동수가 성적이나 출장 정도가 김동기에 비해 낮은 것을 우승 프리미엄으로 넘겼다고 봤겠으나 지금에선 성적도 김동수가 더 좋은데 우승프리미엄도 있네? 이정도면 김동수가 받을만 하지 정도의 반응일 것이다. [6] 롯데에 호구잡힘 + 9월에 너무 낙관을 한 나머지 1.5군급 라인업으로 자주 게임을 치루거나 이해 못할 배치를 많이 하였으며 이 때문에 9월 성적이 좋지 못하였다.[7] 진갑용에 대한 쟁탈을 위한 의도적인 져주기였다. 김동수 역시 9월 이후부터는 출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작 꼴찌를 한 팀은 전년도 우승팀인 OB였지만...[8] 쌍방울이 그해 페넌트레이스 2위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쌍방울이 만년 하위권이었으나 2위로 올라선 것에 주전포수 박경완의 지분이 크다고 본 것.[9] 이것도 당대의 평가로 봐야 하는 것이 당시엔 박경완이 홈런은 좀 많아도 타율이 0.218에 불과해서 성적은 김동수보다 별로라고 생각해도 지금에 와선 타율만 낮았지 성적 자체는 출루율 장타율 WRC+ WAR 모두 좋다. 별개로 포수 중에 제일 성적이 좋은 선수는 롯데 임수혁이긴 했다. [10] 다만 타격 부분은 7월 이후 급격하게 하락하였다.[11] 박경완 왈 "이게 우승 프리미엄이란 거에요 형!" 그런데 박경완도 업보(?)였는지 훗날 홍성흔에 밀려 골든글러브 수상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12] 부족한 선발투수 보강을 시도했다.[13] 이 사건으로 원래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LG와 삼성 구단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어 트레이드 논의는 커녕 사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이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겨우 해빙되었고, 2012년 말 LG가 FA 시장에 나온 투수 정현욱을 영입하고 3-3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완전히 풀렸다.[14] FA제도 도입 자체가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이 전력보강을 위해서 밀어붙인 결과였다.[15] 김동수가 LG에 남았다면 LG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곤 하나, 조인성도 있고 포수보다 다른 포지션이 암흑기 때 문제였기 때문에...[16] 마구마구에서 김동수의 레전드 카드가 현대-히어로즈가 아닌 LG로 나온것은 1990년대 그의 업적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14년 듀얼 레전드가 적용되면서 현대 버전 카드도 나왔다.[17] 스탯티즈 기준 WAR 역대 LG 선수 3위이자 전체 21위. 1위는 투수 김용수이며 2위가 좌타자 박용택, 참고로 4위도 좌타자인 이병규이다. 채은성의 경우 LG에 쭉 남았다면 김동수를 능가했을 것이라고 평가받으나, FA로 한화로 이적하면서...[18] 삼성 - 김동수, 김기태, 정경배, 이용훈, 김상진, 김태한 ↔ SK - 틸슨 브리또, 오상민. 지금 보면 꽤나 메가톤급 트레이드처럼 보이지만 당시는 생각보다는 파급효과가 크지 않은 트레이드였다. SK는 빈약한 뎁스를 보강하는 차원에서 삼성의 잉여자원들을 대거 영입했고, 삼성은 이미 국내리그에서 검증된 외국인 타자 브리또를 영입하며 동시에 유격수 자리를 메꿨고, 유독 삼성 전에서 강했던 좌완 오상민까지 얻었다.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삼성의 승리가 됐다.[19] 당시 롯데의 주전포수는 최기문이었지만,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다음 시즌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포수라고 있는게 최준석과 신인 강민호가 전부였다.[20] 2009 시즌이 끝나고 LG 트윈스의 1군 배터리 코치 제의를 받았고 사실상 영입 분위기까지 갔는데 김시진 히어로즈 감독이 송별회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수는 김시진 감독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결국 히어로즈에 남았다. 물론 LG 트윈스를 떠날 당시 LG 구단과 불화가 생겨 좋지않게 떠난것도 작용했지만.[21] 사진 속의 김동수의 부인, 아들 딸 등 가족들을 제외하면 왼쪽부터 이숭용, 송구홍, 조인성, 서용빈, 유지현, 이병규이다.[22] 여담이지만 전광판에 올라와 있는 두 선발투수 김광삼고원준은 나란히 8이닝 무실점 호투로 예상치 못한 투수전을 이끌었고 이날 경기는 연장 접전 끝에 박병호(당시 LG)의 적시타로 LG의 1대0 승리로 끝났다.[23] 히어로즈 구단이 LG의 레전드인 김동수 코치를 배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일정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24] 강민호와 양의지 그 다음급으로 평가받는 유강남, 최재훈, 박동원은 모두 30대에 접어든 나이가 꽤 있는 선수들이고, 전성기를 꽤 늦게 맞이해 누적에서 불리한데다가 가장 좋았던 시즌의 파괴력마저 5위권 포수 중 가장 공격력이 떨어지는 김동수보다 좋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강민호처럼 20대부터 전성기를 맞이하는 포수가 등장해 강민호와 양의지처럼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역전하기 힘든 차이이다.[25] 참고로 골든글러브 전체 최다수상은 1루수-지명타자에서 장갑 10개를 쓸어담은 이승엽이다.[26] 양의지의 수상 중 1회는 지명타자로 수상한 것이다.[27] 물론 다른 포지션까지 한정한다면 김재호를 밀어낸 손시헌이 있는데 이 쪽은 둘 다 신인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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