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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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코칭스태프>
72 박승민 · 73 이희근 · 74 최윤석 · 77 정현석
· 80 고동진 · 86 김남형 · 90 김정민 · 92 최원호 [[감독|

]]
· 88 박재상 · # 김재걸 · # 정경배 · # 김우석'''
<퓨처스 코칭스태프>
71 이대진 · 75 박정진 · 79 마일영 · 81 김성갑
· 82 박윤 · 83 남원호 · 87 추승우 · 89 정범모

<잔류/재활군 코칭스태프>
57 정우람 · 70 강동우 · 76 윤규진 · 91 이상훈

<트레이닝 파트>
84 이지풍 · 김형욱 · 김연규 · 최우성
김재민 · 서진영 · 배민규 · 김소중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군입대선수등록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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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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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1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1번
김민우
(1994~1995)

정경배
(1996)


정회선
(1997~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번
이중화
(1996)

정경배
(1997~2001)


김승권
(2002)
SK 와이번스 등번호 6번
김동건
(2001)

정경배
(2002~2006)


김태균
(2007)
SK 와이번스 등번호 9번
조영민
(2005.6.3.~2006)

정경배
(2007~2009)


임훈
(2010~2013)
SK 와이번스 등번호 99번
박연수
(2007~2008)

정경배
(2010~2018)


강지광
(2019~2021)
두산 베어스 등번호 89번
고토
(2018)

정경배
(2019)


공필성
(2020~2021)
한화 이글스 등번호 83번
송구홍
(2019)

정경배
(2020~2021)


남원호
(2022~)
SSG 랜더스 등번호 72번
홍세완
(2021)

정경배
(2022~2023)


결번
한화 이글스 등번호 번


정경배
(2024~)


현역



한화 이글스 No.
정경배
鄭慶培 | Chung Kyoungbae

출생
1974년 2월 20일 (50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창영초 - 대헌중 - 인천고 - 홍익대[1]
신체
176cm, 84kg
포지션
주포지션 2루수
서브포지션 3루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2차 5라운드 (전체 37번,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6~2001)
SK 와이번스 (2002~2009)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0)
SK 와이번스 2군 수비코치 (2011)[2]
SK 와이번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11~2013)[3]
SK 와이번스 1군 타격보조코치 (2014~2015)[4]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15~2018)[5]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9)[6]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19)[7]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20)[8]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20)[9]
한화 이글스 1군 수석·타격코치 (2020)[10]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21)
SSG 랜더스 1군 타격코치 (2022)[11]
SSG 랜더스 1군 QC코치 (2023)[12]
SSG 랜더스 1군 타격코치 (2023)[13]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24~)
응원가
드보르작 - 교향곡 9번 4악장[14][15][16]
등장곡
봄여름가을겨울 - Bravo, My Life[17]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5. 연도별 주요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現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2루수.


2. 선수 경력[편집]



2.1. 삼성 라이온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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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901212221107A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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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113000007720.jpg


인천창영초, 대헌중, 인천고, 홍익대 무역학과[18]를 졸업하고 1996년 2차 5라운드로[19]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 이동수가 수비 불안으로 자리를 옮긴 3루수 자리를 꿰차면서 백인천의 팀 리빌딩 주축 중 하나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듬해부턴 김한수가 3루수에 자리잡게 되며 정경배는 붙박이 2루수로 고정, 백인천 감독이 밀어주던 리빌딩 주축들과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승엽-정경배-김한수-김태균으로 대표되는 삼성의 철벽 내야진을 구성하기도 하였다.[20] 타순은 주로 6~7번으로 하위 타순이었지만, 1999년에는 훌륭한 성적과 빌리 홀의 막장 출루율로 인해 1번 타자로 뛰기도 했었다.[21]

1997년 5월 4일 대구에서 열린 LG 트윈스전에서 장문석(1회말)과 차동철(2회말)을 상대로 연타석 만루홈런을 쳐낸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이때 세운 1경기 8타점 또한 2015년 9월 20일 박석민이 9타점으로 경신하기까지 한국야구에서 한 선수가 올린 한 경기 최다타점 기록이기도 했다. 정경배 이후로 12차례의 타이 기록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이용규, 강민호, 최정, 최주환 등이 있었다. 그리고 LG의 천보성 감독은 이 경기 후 삼성이 부정 배트를 사용했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백인천 삼성 감독도 그에 맞대응하며 한동안 LG와 감정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게 3연전에서 홈런 17개 포함 49점이나 두들겨 맞았으니…. 게다가 정경배의 방망이는 톱으로 잘려지는 비운을 당했다. 하지만 배트 제조사인 미즈노에 검사를 의뢰한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5월 24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배트의 정밀검사를 의뢰했고 X레이검사와 도료검사까지 거친 뒤 6월 16일 이상이 없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즉 결론을 내리면 당시 정경배는 그냥 갑자기 필을 받아서 방망이가 잘 맞았다는 것밖에...... 정경배 만루홈런

또, 그해 6월 27일 강인권의 전무후무한 끝내기 타격방해때 타격방해를 받은 타자였다.

커리어 하이는 1999년. 주전 2루수로 105경기에 출장해 타율 0.312, 18홈런, 16도루, OPS 0.870을 기록하며, 홈런 2개, 도루 4개 차이로 아쉽게 20-20을 놓쳤을 정도로 여러모로 인상깊은 활약을 보냈다.


2.2. SK 와이번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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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1년 부진하면서 박정환에게 주전 자리에서 밀렸고[22], 시즌 종료 뒤 6:2 현금 트레이드(오상민, 틸슨 브리또김기태, 김동수, 김태한, 김상진, 정경배, 이용훈)로 고향팀인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23]

고향팀인 SK로 온 뒤 첫 해인 2002년에는 75경기 출장에 그치면서 부진했지만, 2003년부터 노쇠화가 뚜렷해진 최태원을 밀어내고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24] 타격은 2004~2005 시즌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2003년 12홈런, 2005년 11홈런으로 두 자릿수 홈런 역시 2번이나 기록했고, 수비에서는 변함없이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2005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3년 총 16억에 SK와 재계약하기도 했다.

SK 초기에는 똑같은 이적생 출신인 김민재[25], 말년에는 신인 정근우와 각각 호흡을 맞추었고, 2007년에는 주전 2루수로 뛰면서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다만 2006년 이후 타격에서의 하락세가 지속됐고, 노쇠화가 겹침에 따라 2008년부터는 사실상 1군에서 전력 외로 밀려났다.[26]

2009 시즌 종료 후 SK에서 방출됐고, 당초 현역 생활 연장을 희망했으나 불러주는 팀이 없자, 결국 SK의 코치직 제의를 받아들이고 은퇴했다. 2010년 3월 28일 조웅천과 함께 문학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파일:20170326133643_11.jpg


오랜 기간 뛰지는 않았지만 인천 출신에다가 SK 이적 이후 쏠쏠한 활약을 한 것을 인정받아 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배트가 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위치한 L's 갤러리[27]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2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

한편 SK 시절에는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 4악장에서 가져온 "정경배 정경배~ 안타 정경배~"라는 응원가를 사용했는데, 이종범 또한 이 곡을 응원가로 사용하면서 SK 와이번스KIA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다. 먼저 사용한 쪽은 정경배 쪽이지만 워낙 이종범 쪽이 유명해서 네임밸류에서 밀렸다. 그런데 이 응원가의 원조가 태평양 돌핀스라고 한다. 1994년 한국시리즈 영상에 나온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한국시리즈 영상에서 종종 들렸는데 다른 팀도 사용했던 모양이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나름의 장타력을 지닌 2루수로, 전성기에는 꾸준히 10홈런 정도를 쳐줄 수 있는 타자였으며 KBO 리그 최초 연타석 만루홈런을 기록한 선수이다. 통산 100홈런을 기록하며 2루수로만 커리어를 보낸 선수 중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타자였으나 현재는 안치홍에 밀려 2위에 랭크되어 있다.[28] 클린업 트리오에 들기엔 다소 모자랐으나 준수한 타격 능력을 바탕으로 주로 6-7번 타순에서 출장했으며, 작전 수행 능력도 나쁘지 않아 가끔씩 테이블 세터로도 모습을 비췄다. 다만 주자로서의 능력은 평범하거나 그 이하인 수준이었고, 삼성 시절 기록했던 도루 갯수도 발이 빨라서라기보단 20대 초반의 운동 신경을 바탕으로 한 도루였다. 수비력에 있어서는 리그 정상급으로 안정적인 포구와 좋은 송구 능력을 갖췄다. 다만 상술했듯 발이 느린 편이어서 수비 범위는 평범했고, 경험이 쌓이며 이 부분을 좋은 수비 위치 선정으로 커버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경배/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삼성
75
134
.247
48
7
2
1
19
21
4
15
.320
.296
1997
123
420
.274
115
25
3
13
72
(10위)
66
13
42
.440
.335
1998
123
357
.235
84
17
1
11
55
36
9
28
.381
.287
1999
105
398
.312
124
15
0
18
53
75
16
48
.485
.385
2000
102
374
.289
108
25
1
12
38
60
5
42
.457
.358
2001
105
279
.247
69
19
0
3
30
34
2
37
.348
.33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2
SK
75
153
.281
43
11
1
2
14
19
0
15
.405
.341
2003
119
372
.272
101
16
0
12
51
55
9
38
.411
.337
2004
105
362
.296
107
23
0
9
47
51
2
43
.434
.368
2005
126
427
.286
122
16
1
11
63
49
7
54
.405
.361
2006
84
205
.210
43
10
0
3
21
19
0
21
.302
.279
2007
116
333
.225
75
16
1
4
50
30
3
34
.315
.295
2008
33
80
.200
16
1
0
1
6
7
0
8
.250
.273
2009
31
37
.189
7
2
0
0
3
3
0
7
.243
.318
KBO 리그 통산
(14시즌)
1322
3991
.266
1062
203
10
100
522
525
70
432
.397
.335

6. 여담[편집]



  • 별명은 똘배, 수염을 기른 외모 탓에 (유머1번지에 나올 법한)포졸2, 형저인[29].

  • 성품에 관해서는 주위 선수들의 평이 좋았다. 삼성 시절 후배였던 이승엽은 정경배가 한번도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하였고, 또 경기에 안 나가더라도 팀이 이긴다면 만족하다고도 말했다. 일례로 2006년 SK와 FA 계약 당시 50타점 이상 달성 시 5000만원 지급이라는 플러스 옵션 조항을 넣었는데, 2007년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딱 2타점이 모자랐다. 이 때 다른 선수들 같으면 옵션 채우겠다고 반드시 선발로 내보내 달라고 감독에게 간청했겠지만, 정경배는 "난 오늘 시합에 나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했다고. 물론 시즌 최종전에서 김성근 감독의 배려[30]로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한 뒤 1회와 6회 각각 적시타를 치면서 옵션을 채웠다.

  • 강정호크리스 코글란의 치명적인 태클로 나머지 시즌을 출장 못하는 부상을 입고 나서, 정경배의 선수 시절 수비 플레이가 재평가받기도 했다.

  • 줄곧 2루수로만 출장했던 선수들 중에서는 박정태, 박종호 다음으로 통산 성적이 좋지만[33] 이들 두 선수보다는 유명세가 낮다보니 언급이 잘 안 된다. 이래 봬도 박정태도 박종호도 강기웅도 못해본 2루수 통산 세자리수 홈런(딱 100개) 기록자며 박정태, 박종호에 이어 2루수 통산 3번째로 500타점을 넘긴 타자다.[34] 무엇보다 정말 보기 드문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자이기도 하고.



7. 관련 문서[편집]


[1] 경영대학 무역학과(현 경영학과와 통합)(92학번)[2] ~7월 3일[3] 7월 4일~[4] ~6월 4일[5] 6월 5일~[6] ~5월 27일[7] 5월 28일~[8] ~6월 5일[9] 6월 6일~6월 7일[10] 6월 8일~[11] 우타자 전담. 9월 21일부터는 엔트리에서 말소되어 미등록 코치였다.[12] ~9월 2일[13] 9월 3일~[14] 정경배~ 정경배~ 안타 정경배~(안타!)[15] 이종범과 동일[16] 여담으로, 해당 곡은 이전부터 삼성 라이온즈태평양 돌핀스 등 여러 팀에서 응원가로 사용해 왔었다.[17] SK 와이번스 현역 시절[18] 92학번 ~ 96년 졸업 진학 당시 경영대학 무역학과(현 경영학과와 통합)[19] 사실 상위픽은 아니다. 다만 1996년은 이례적으로 2차 지명에서 한계가 없던 마지막 해였기 때문에 삼성은 무려 25명을 2차 지명에서 지명했고 이 중 16명이 입단했다. 1차 지명과 고졸우선지명을 합치면 29명 지명, 20명 입단이었다.[20] 그 과정에서 타격이 시원찮던 김재걸은 대수비 - 대주자로 밀려나게 된다. 1995년에 2차 2라운드로 영입된 선수였지만 이 시기 리빌딩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덕목은 공격력이었다.[21] 1루는 훔칠 수 없다는 명언도 있듯이 발이 아무리 빨라도 1루에 나가질 못하면 리드오프로 뛸 수는 없다.[22] 게다가 김재걸김승권의 존재도 있었다.[23] 정경배의 이적 후 빈 2루수 자리는 박정환, 김재걸, 고지행이 돌아가며 맡았다. 하지만 박정환이나 김재걸은 공격에서 부진했고, 고지행은 공격은 좋았지만 안정감이 떨어지고 악동기질이 있었기에 결국 삼성은 현대에서 FA로 풀린 박종호를 영입한다.[24] 이 때 경쟁에서 밀린 최태원은 연속경기출장 기록을 경신하지 못 했고 결국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25] 롯데에서 FA를 신청했고 2002년부터 SK에서 활동했다. 정근우가 대두하자 FA를 신청하여 한화 이글스로 다시 이적했다.[26]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박정환과 함께 김성근의 펑고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1개도 잡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이 나온다. '정경배 스피드 더 붙여 스피드', '못따라가~이거', '정경배!', '완전 구멍이야' 등 김성근 감독의 멘트는 덤. 펑고 훈련 후 발바닥에 큰 물집이 잡혀 트레이너가 반창고를 붙여주는 장면도 나온다.[27]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저 오는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로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28] 2루수로 주로 출장한 선수들 중에선 7위.[29] 최희섭의 별명 형저메의 파생별명으로 '형 저 인천고예요'의 줄임말. SK에서 뛰던 선수생활 말년에 성적이 부진해도 계속 출전하자 인천고 지연, 학연으로 출전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 섞인 별명. 굳이 따지자면 2007년까지는 다른 내야 유망주들이 아직 성장중인 가운데 우수한 2루 수비 능력을 기반으로 주전으로 나설 수 있었고, 벤치로 밀린 2008년부터는 김성근 감독의 베테랑 선호 경향의 덕을 어느정도 보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30] 김성근이 선수를 백정처럼 굴려도 나름 평가가 좋았던 것은 이런 식으로 선수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기 때문이다.[31] 3루수로 출전한 경기가 가장 많아서 주포지션은 3루수로 분류된다. 다만 2루수로 뛴 기간도 못지 않기에 3루수와 2루수 양쪽으로 분류된다.[32] 2루수로 가장 많이 출전했기에 주로 2루수로 분류된다. 다만 3루수로도 못지 않게 출전했기에 2루수와 3루수 양쪽으로 분류된다.[33] 홍현우, 김성래, 안경현2루수가 아닌 포지션으로도 못지 않게 출전했었다. 김성래는 1989년 강기웅의 등장 후에는 주로 1루수로 출장했다. 홍현우는 데뷔 4년차까지와 1999년부터 2000까지 2루수였고 나머지는 주로 3루수로 출전했다.[31] 안경현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진 3루수를 주로 보다 김동주 입단 후 3루에 자리를 잡은 1999년부터 2루수로 정착했고 2005년까지 2루수 였으며, 말년에는 1루수로 뛰었다.[32] 박종호도 2루수 고정 이전에 유격수, 3루수를 보기도 했다.[34] 4번째로 500타점 넘기고 두번째로 세자리수 홈런을 친 타자가 정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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