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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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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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철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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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gles_Champion_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파일: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8 자카르타 • 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18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4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4, 1997 KBO 리그 탈삼진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3 KBO 리그 승률왕



보유 기록
최연소 100승
27세 3개월 2일


정민철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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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빙그레 이글스|빙그레]]
/
[[한화 이글스|
한화 이글스]] 등번호 55번}}}
김태민

정민철
(1992~1999)


조규수
(2000~2001)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30번
타미미네 노부노리
(1999)

정민철
(2000~2001)


타케다 카즈히로
(2002)
한화 이글스 등번호 55번
조규수
(2000~2001)

정민철
(2002~2004)


윤규진
(2005~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23번
엔젤
(2004)

정민철
(2005~2009)


KBO 영구 결번
한화 이글스 등번호 71번
유지훤
(2005~2009)

정민철
(2010~2012)


김성한
(2013~2014)
한화 이글스 등번호 88번
후쿠하라
(2012)

정민철
(2013~2014)


다테이시
(2015)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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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BC 로고 화이트.svg · 파일:MBC SPORTS+ 로고.svg 해설위원
한화 이글스 No.23
정민철
鄭珉哲 | Jung Minchul

출생
1972년 3월 28일 (52세)
충청남도 대전시 신흥동
(現 대전광역시 동구 신흥동)[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전신흥초 - 충남중[2] - 대전고
신체
187cm, 95kg[3], AB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2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92~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1)
한화 이글스 (2002~2009)
지도자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0~2011)[4]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1~2012)[5]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2~2013)[6]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3~2014)[7]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17~2019)
프런트
한화 이글스 단장 (2019~2022)
경력
KBO 전력강화위원 (2023~)
해설위원
MBC /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5~2019, 2023~)
병역
방위병 (1993)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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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김경아 (1977년생, 1999년 3월 14일 결혼 ~ 현재)[1]
자녀
아들 정우영(2004년생)[2][3],아들 정우제(2008년생)
부모
아버지[4], 어머니
형제자매
3남 중 막내[5]
종교
불교

1. 개요
3. 피칭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4.1. 2010 ~ 2011년
4.2. 2012년
4.3. 2013년
4.4. 2014년
5. MBC SPORTS+ 해설위원 1기
7. MBC SPORTS+ 해설위원 2기
8. 여담
8.1. 선수 시절 관련 일화들
8.2. 입담
8.3. 팬 서비스
9. 수상 내역
10. 연도별 주요 성적
11.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날 있게 해준 기반이다. 다이빙으로 치면 도약대고, 육상으로 치면 스타트 지지대 같은. 내 삶을 지켜준 발판이었다. 난 지금도 방송 부스를 나가면 한화 이글스 영구 결번자다. 그런 자긍심 하나로 살고 있다.

- 정민철에게 한화란.


한화 이글스 소속 우완 투수이자 前 한화 이글스의 단장. 등번호는 55→23번.

송진우, 구대성과 함께 1999년 한화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현역 시절 통산 다승 3위(161승)를 비롯하여[8]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승 이상, 평균자책점 2.80, 연당 평균 투구 이닝 188이닝을 기록했다.[9]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다승왕을 못했고, 이래저래 상복 또한 없었던 무관이미지의 에이스[10]이기도 하다.[11]

2. 선수 경력[편집]



내가 받아 본 직구[12]

중 최고는 정민철

- 박경완

선수 시절 정민철은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우완 정통파 투수였다.


3. 피칭 스타일[편집]




141km/h 포심 패스트볼[13]


'108번뇌 커브'라 불리던 커브

간간히 던지던 서클 체인지업[14]

전성기 시절 주무기는 빠른 공. 훗날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성기 시절 최고 구속은 152km/h였다고 하나, 실제 경기에서 찍히는 최고 구속은 145~8km 정도로, 강속구 투수였다.

사실 전성기 정민철의 강점은 구속보다도 구위 자체였다. 테일링이 좋은, 소위 말해서 공 끝이 좋은 타입. 즉, 원조 돌직구. 동시대 선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구위로 평가 받는다. 당시 심판들이 꼽은 가장 좋은 구위의 선수로 김상진과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박경완이종범이 본인이 경험한 최고의 공으로 정민철의 공을 꼽았고, 전성기 정민철의 볼끝은 임창용오승환보다 더 좋다고 평가하였다.

전성기 슬라이더와 커브[15], 포크볼 등 당시 언론에서 언급되었던 변화구의 레퍼토리 자체는 다양했으나, 커브를 제외하면 어느 하나 주 무기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빠른 공 위주로 던지되 유인구로 커브를 써먹던 전형적인 투피치 스타일. 제구력이 탁월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칠 테면 쳐보라고 가운데로 팡팡 꽂아 넣었던 탓에 볼넷이 상당히 적었다.[16]스태미너도 좋아서 완투를 밥 먹듯이 한 전형적인 우완 정통파 파이어볼러 이닝이터 선발투수.

커브볼러로 유명한 김원형과 비교를 하자면, 김원형은 패스트볼과 커브의 구속-궤적이 비슷한 것을 이용했다면 정민철은 확실한 패스트볼과 그 패스트볼을 뒷받침할 수 있는 커브를 사용했다는 것.

다만 2000년대 이후로 패스트볼 구속과 구위가 급격히 떨어진 탓에 변화구와 커맨드(제구력) 위주의 기교파 투수로 폼을 바꿔야 했다. 커터 슬라이더 체인지업 포크볼 등등 온갖 변화구란 변화구는 다 던지며 말년을 보냈다. 선수 시절 후반기에 사용한 주 무기는 커브였는데, 본인 스스로가 너클커브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탓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2010 ~ 2011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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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코치 시절

은퇴 이후 2010년 한대화 감독 체제에서 바로 코치진으로 이동했으며 코치로서 한화 이글스 마운드를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2010년 당시엔 불펜코치인 데다가 별다른 언급도 없어서 그냥 평범한 투코로 1년을 보냈으나, 특이한 투구폼으로 10여 년간 코치들에게 투구폼을 변경해야 한다는 강요와 투구폼을 변경하면 오는 어깨의 통증 때문에 투구폼을 바꿔야 하나 하는 고뇌와 자괴감에 빠져있던 박정진에게 네가 정말 던지고 싶은 투구폼으로 던져라라는 조언과 신뢰를 보내줘서 2010년 그의 각성을 이끌어내 한화 이글스 불펜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2011년 1군 서브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한용덕 코치와 함께 장민재, 안승민을 성장시키고 양훈을 부활시켰다! 2011년 5월 2군으로 내려간 한용덕 코치 대신 1군 메인코치가 되었다.

한화 이글스 투수들에게 자신이 현역시절 즐겨 던졌던 슬로커브[17]를 전수했으며 실제로 2010 시즌에 유원상이 슬로커브를 장착하면서 꽤나 재미를 봤다.

2011 시즌이 지나가면서, 투수 교체가 서툰 한대화 감독을 대신해 투수교체 전권을 잡았다.[18]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람돌이, 정간신. 선발 투수를 한계 투구수까지 던지게 하면서 최대한 긴 이닝을 먹게 했다. 이런 방향성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투수가 양훈. 조금 투구수를 많이 가져가게 하면서 완봉승을 하게 된 뒤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10이닝 연장전에서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사 2루의 위기를 처하게 되었음에도 한대화 감독을 설득해 양훈 스스로 이닝을 끝내게 하였고, 이후 양훈은 기복이 심했지만 2경기에 한 경기 꼴로 류현진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주게 되었다.

다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어지간한 상황은 선발 투수에게 맡긴 탓에 투수 교체가 계속 한 타이밍씩 늦어져 결국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날려먹은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민철의 투수 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팬들도 다수.

그래도 이 때까지는 박정진, 양훈, 김혁민,[19] 안승민을 키워낸 명코치라고 찬양받았다.


4.2. 2012년[편집]


2012년 들어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교체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줄줄이 말아먹으며 돌민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선수 시절 그를 사랑하던 팬들도 한대화와 세트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게 현실이 되었다.

5월이 되자 2년 동안 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던졌던 박정진을 5월 25일에 2군 가기 전까지 21경기 중 14경기에 올리는 백정질을 하였다. 박정진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콜업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때마다 두들겨 맞으며 몸과 멘탈이 함께 붕괴되었고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6월 7일 류현진 선발 경기에서는 7: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불펜 정민혁이 흔들려 연속 안타를 맞았는데도 바꾸지 않고 기어이 무사 만루를 만들어 3점을 내주고 볼넷머신으로 전락한 바티스타를 9회에 올려 결국 경기를 내지고 에이스의 승리까지 날려먹는 최악의 투수교체를 보여주었다.

2012년의 정민철의 투수 기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원칙이라 할 수 있으며, 필승조 역할을 하는 선수를 대패하는 경기에 무조건 연투시켜 정작 이기고 있는 경기에 내보낼 필승조가 없거나 지친 상태로 내보내게 하여 망친 사례가 끝도 없다.

또한 김인식 감독 밑에서 배웠는지 불펜투수를 무조건 혹사시키는 것에 재미를 들려 박정진, 정민혁, 안승민, 마일영한화 이글스에서 얼마 남지 않은 쓸만한 불펜들이 모두 맛이 갔다.

결국 7월 6일 자로 2군으로 내려가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은 이는 다름아닌 송진우.


4.3. 2013년[편집]


전반적으로 투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실전에서 굴리는 데에는 서투른 듯. 2013년 조지훈, 송창현, 이태양 등의 신인투수들이 2군을 다녀온 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육성능력을 다시금 주목받았다.

전반기가 종료된 7월 18일 자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 팀의 전면 리빌딩, 그리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과 2군 코치간의 보직이 맞바뀐 것. 이로서 1년 전 보직을 맞바꿨던 송진우 코치와 다시 한 번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


4.4. 2014년[편집]


1군 투수코치직을 맡게 되긴 했지만 경기 중 잠깐잠깐 보여지는 덕아웃 광경으로는 실제 실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5이닝 63구밖에 안 던진 앤드류 앨버스를 강판시킨 경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민철은 퀵후크를 좋아하는 투수코치가 아니다. 선발투수를 조금이라도 더 믿고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는 스타일. 팬들은 투수 교체는 김응용 감독이 실질적으로 다 하고 있으며 정민철은 불펜에 전화거는 셔틀에 불과하다고 대체로 생각하고 있다.

5월 8일에는 선발투수 송창현이 7이닝 2실점 호투를 이어가고 있던 터라 8회에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감독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던 송창현을 돌려보내고 어깨를 툭툭 쳐 주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를 탔다. 이로써 투수교체에 관해 투수 코치가 전혀 권한이 없음을 인증했다. 사실상 투수교체에 있어 전권을 쥔 한대화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기에 현재 본인에게 향하는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는 셈.

그리고 밑에 나오는, 그의 선수시절 등번호인 55번을 달 정도로 그를 존경하는 이태양윤규진. 속칭 "정민철 키즈"가 이번 시즌 각성해 각자 팀의 에이스와 마무리로 자리잡음에 따라. 정민철의 대한 평가와 기대치가 올라갔다. 송창현유창식의 볼질까지 잡는 데 성공한다면 투수코치로의 역량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즌이 흘러감에 따라 정민철 역시 팬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한화의 투수진이 리그 최악인 관계로 투수코치인 정민철이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투수교체 절대 만능론을 펼치는 대다수의 팬들은 2014년도의 투수교체의 책임자가 정민철이라는 논리로 극렬 비판하고 있는 상황.

그나마 일부 코어팬들에게선 "그래도 엉망징찬 수준의 한화 코치진 중에서 정민철만은 그럭저럭 쓸만하지는 않냐?"라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그래도 성실함과 선수들과의 인간 관계, 선수 관리 측면에서 정민철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프런트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신생 김성근 체제 출범 하에서 수많은 코치들이 옷을 벗게 된 와중에도 이상군, 장종훈과 함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레전드 출신 코치가 되었고, 29일 마무리 훈련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10월 30일 결국 자진사퇴하였다. 팀에서 물러나 좀 더 경험을 쌓을 계획이라고. 정민철의 코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절친한 박찬호가 직접 해외에 자리를 알아봐주고 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는 등 해외연수를 가능성이 타진되었으나.

11월 6일 MBC SPORTS+ 해설위원 확정. 같은 팀 주루코치였던 이종범 코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솔직담백한 인터뷰로 코치로서의 실패와는 별개로 훈훈한 반응을 얻고 있다.


5. MBC SPORTS+ 해설위원 1기[편집]


파일:external/thumb.mtstarnews.com/2015030808551931939_1.jpg

2014 시즌 종료 후 MBC SPORTS+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다.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성공 가능성을 높게 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전부터 선수 출신 가운데 외모와 언변이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탓에, 꽤 오래전부터 방송계나 팬들로부터 해설가로 전향해도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왔기 때문. 실제로 정민철이 코치직에서 물러나자 방송 3사 모두에게서 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2015년 3월 7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LG 트윈스의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이종범과 함께 해설위원 데뷔를 했다. 3월 2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한화 이글스의 개막전에서 첫 중계를 맡았다. 대체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 젊은 선수 출신 해설자 중에서는 박재홍 위원의 뒤를 이어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친정팀이었던 한화 이글스는 12회말 서건창에게 끝내기를 얻어맞고 5:4로 패배하고 말았다.

같은 해에 함께 해설위원 활동을 시작한 송진우가 구설수에 오르고, 친정팀으로부터 거부받은 것과는 달리 다행히 선방하고 있다. 현재 네이버 스포츠에서 송출 중인 라디오볼에서도 해설을 맡고 있다. 주로 박재홍과 함께 해설을 맡는데 퀄리티 높은 해설로 호평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데이터에 기반한 해설을 하고 선출 특유의 볼배합, 투수의 심리전에 대한 해설에 능하며, 투구이론에 능통한 모습을 보인다. 구위가 떨어지거나 제구에 난조를 보이는 선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코치때 욕먹은걸 생각해보면,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알려진 바 대로 기본적으로 언변이 좋아서인지 한번 말을 시작하면 더듬거나 비문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톤과 억양이 좋다. 지방 출신임에도 특유의 사투리 억양이 없는것이 다른 선출 해설들과 비교된다.[20] 중계 도중 가끔 깨알같은 개드립을 시전할 때가 있다. 김인식 감독과의 공동해설 때는 성대모사로 터뜨리거나 박지영 아나운서가 벌에 습격당했을 때 양봉드립을 친다던가...

경기중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 역시 좋은 편이다. 공수교대 중 한명재 캐스터가 화장실을 갔다가 볼일이 늦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는데 "지금 한명재 캐스터가 없어서 제가 캐스터를 해야겠네요... (허겁지겁 들어온 한명재에게) 한명재 위원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넘어간 적이 있다.

다만 한화 이글스와 타팀간의 경기의 해설을 맡을 때는 친한화 성향의 해설을 하는 경향이 종종 있어서 그 경우에는 까인다. 초창기에는 한화 이글스 투수들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비교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는 듯하다. 해설위원이 되기 직전까지 한화 이글스맨으로 있었다 보니 5강 후보로 매년 한화 이글스의 우승 예측을 계속 점쳐왔다. 그래도 2018 시즌에는 11년만에 준플레이오프 티켓을 받았으니 잘된 듯.

2015년 5월 30일 울산에서 치렀던 경기에 MBC의 지상파 야구중계 해설로 처음 투입됐다. 이후 2017년까지 이종범과 번갈아가면서 서브 멤버로 활약하다가 2018년 이종범LG 트윈스 코치로 영입되어 하차하면서 사실상 허구연 해설과 같이 KBO 리그 지상파 중계 고정 멤버가 되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해설도 하고 있는데 2016년에는 올스타전 중계를 위해 정용검 캐스터와 함께 샌디에이고로 가게 되었다. 지상파 MBC에서는 류현진 등판일에 손혁 해설과 번갈아 참여했고 최근에는 김선우, 김병현과 번갈아가며 출연해 해설에 참여한다. 또 2019년 클리블랜드에서 올스타전 중계 해설을 맡아서 미국으로 출국했다. 두 번째 MLB 올스타전 중계이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2019년 7월 4일 열린 류현진의 시즌 10승 경기를 관전했다. 201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 해설을 맡았는데,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취재차 MBC팀과 함께 미국 현지로 가서 MBC 김나진 아나운서와 함께 류현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21]

2018년 4월에는 한화 이글스 경기를 해설하면서 선수 시절 같이 활약한 한용덕 감독, 송진우 코치 등을 보면서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가 해설자로서 배운 것 을 활용해 지도자 시절 못했던 것을 만회하고 싶다" 등의 멘트를 날리며 한화 투수코치시절을 회상하며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올 것을 희망하였다.

2019년 10월 6일 LG 트윈스키움 히어로즈간의 준플레이오프 경기서 김하성의 보크 판정 여부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대부분 보크로 봤는데 보크가 아니라고 발언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보크는 투수 출신이 가장 잘 안다며 확신에 차서 말했던 것. 다만 김하성이 당시에 어깨에 대한 어필을 강하게 했었기 때문에, 정민철 또한 어깨 위주로 보느라 다리를 미처 못 봤을 가능성은 있다. 다음날 김하성이 정확하게 봤을거라며 정정하며 자신의 발언에서 한 발 물러났다.

2019년 10월 7일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선 허구연 해설위원과 시너지를 이룬 편파 중계에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22] 그리고 바로 다음날 한화 이글스의 단장으로 선임되며 이 경기가 정민철의 마지막 해설 경기가 되었다. 다만, 원래 정민철은 본인의 현역 시절 경험을 토대로 한 투수 위주의 해설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술한대로 타자 입장에서 해설하는 박재홍과의 합이 3사 최고라는 평을 받아왔던 것인데, 이날도 본인은 항상 하던대로 투수 위주의 해설을 하는데 함께 합을 맞추는 허구연이 대놓고 LG 트윈스 편파 해설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정민철까지 LG 트윈스 편파 해설을 하는 것 처럼 보인 셈이다.[23]


6. 프런트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민철/프런트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정단장 사진.jpg

정민철의 프런트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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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한화 이글스 단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민철/프런트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순수 성적상으로는 최악이었는데, 부임하자마자 3년 연속 10-10-10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두번째 3년 연속 최하위 기간의 단장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24]

다만, 계획없이 리빌딩과 윈나우를 오가던 팀의 오랜 방향성 부재를 해소해가는 시기였기에 단순한 승률, 순위만으로 평가 받긴 무리가 있다. 훗날 리빌딩 기간 동안 기회를 준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모은 특급 유망주들이 성장하여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재평가 받을 여지도 남아있다.

또한, 팀레전드 출신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기에 기대가 높았던 만큼 팀 상황을 차치하고 성적과 선수 영입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현하는 팬들도 많다.

7. MBC SPORTS+ 해설위원 2기[편집]


단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다시 MBC SPORTS+의 해설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해설위원으로써 호평이 많았던 만큼, 팬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해설로써 첫 일정으로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애리조나로 가서 각 팀들을 취재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바로 직전 시즌 단장이었던 한화 이글스도 애리조나에서 훈련을 하다 보니 한화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면서 후임 단장인 손혁과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25]

그러나 막상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삼성 라이온즈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로 편파해설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시즌 내내 삼성에 대해 부정적인 논조를 드러냈으나, 선수 출신 해설위원들이 특정 팀에 대해 편파적인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삼성 팬들 사이에서나 소소한 비판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KBO리그가 아닌, 2023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예선 대만전에서 원태인의 투구를 두고 "국대를 3번이나 나갔지만 막상 이전 국제대회에서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없기 때문에 이번 대회에서 설욕해야한다." 라 말한 것에서 삼성 팬들의 큰 비판을 받았다. 엄연히 국제전 해설을 맡아놓고선 국가대표, 그것도 당일 선발을 1회부터 덮어놓고 비난한 것.

당연하게도 원태인은 총 3번[26]의 국제대회에서 첫 국대 출전인 도쿄 올림픽의 이스라엘전, 미국전. 다만 미국전의 경우 원래 불펜으론 최악인 원태인을 불펜으로 내보낸 감독의 판단미스가 더 큰 원인이었고, WBC에서는 심각한 혹사에도 불구하고 제 몫을 다했고,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선발로 나선 두 경기 모두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8. 여담[편집]


파일:/listimglink/6/2013113014462244960_1.jpg
2013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슈퍼 매치에서 한국 대표로 역투하는 모습.

  • 충남중학교 재학 시절 또래보다 키가 늦게 자라서[27] 중학교 3학년때 원하던 대전고등학교 진학을 못하는 상황[28]이 왔고, 재도전을 위해서 1년 유급을 선택했다. 동기가 선배가 되고, 후배가 친구가 되는 생활을 대학에서 몇 해 더해야 돼서 자연스럽게 프로로 직행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한 동기(1972년생)보다 3년 빨리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고3 시절 황금사자기에서 활약한 이후로 고려대학교 입학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 1년 유급으로 인해 같은 학년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유인지 1973년생과 친구로 지내는 듯 하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시절에 1973년생인 박찬호와 합동 인터뷰에서 둘이 친구로 지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신의 한화 이글스 후임 단장인 1973년생 손혁과 편하게 반말을 하면서 친구로 지낸다. 이러한 이유로 1973년생 92학번 세대에 비공식적으로 정민철도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 한화 구단이 영구 결번한 등번호는 23번. 그러나 정민철이 전성기 동안 달았고 가장 오랜 기간 달았던 등번호는 55번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29] 23번의 경우, 2004년 부진한 성적 탓에 다음 해인 2005년 기분 전환으로 바꾼 번호[30]였다. 그런데 정작 전성기 시절 포함, 선수 생활 내내 달다시피했던 55번이 아닌 23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다보니 팬들 사이에서 아쉽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오고 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프런트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윤규진에게 등번호를 물려준 것이 정민철 본인의 의사였기 때문. 윤규진은 정민철의 초-중-고 직속 후배로 어렸을 때부터 55번을 달았다고 한다. 은퇴 당시 프런트에서 영구 결번으로 55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지만, 그 경우 후배가 사용 중인 등번호를 뺏는 셈이 되기 때문에 정민철 스스로 포기, 결국 23번을 선택했다. 어찌 되었건 정민철 본인의 선택이기에 존중해야 한다. 그 후 55번은 2021년부터 강재민이 사용하고 있다.

  • 서울 삼성 썬더스이상민 감독과는 대전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홍대부고 재학중이던 이상민이 매년 대전고로 전지훈련을 오게 되면서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 한화 이글스의 열혈 팬으로 유명한 개그맨 남희석과도 친분이 있으며 사석에서는 서로 형동생 할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본인에 의하면 남희석은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한 형"이라고 한다.


  • 특이하게도 결혼식(1999년 3월 14일)을 계룡대 내의 한 군인회관에서 올렸다고 한다. 장인어른이 군장교라서 그런 듯. 직속 상관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인 김경아와의 만남은 극적인데, 1993년 군부대에서 단기사병(방위)으로 근무할 때 한 여고생이 매일 위병소 앞을 지나가서 안면이 있었다가 5년뒤인 1998년, 대전에서 포켓볼 치는데 누가 다가와서 "아저씨, 나 몰라요?" 하길래 봤더니 그때 그 여고생이었다고. 유튜브 채널 서경석TV에선 방위 때는 말도 못 걸고 있다가 우연히 커피숍에 만나서 열심히 대쉬했다고 한다. 당시에 정민철은 팔꿈치 부상으로 6,7월을 날리고 재활 중이었는데 낮에 재활을 마치고 저녁엔 시간이 나서 자주 만나다가 복귀 후 후반기에만 9승을 거두며 7년 연속 10승을 달성했고, 이듬해 스프링캠프 다녀오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 2005년 결혼식을 올린지 무려 6년만에 첫 득남했고, 그후 3년 뒤인 2008년 둘째를 득남했다. 2009년 9월 12일 대전 구장에서 열린 정민철의 은퇴 행사에 큰아들 우영군이 특별 시구를 맡았다.# 두 아들들에게는 운동을 권유하진 않았다고. 이유는 만일 이정후처럼 했다면 시켰겠지라고.#

  • 모난 데 없는 순한 성격에 특유의 눈웃음과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선남형 인데다 대전 최고의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에 연고지에서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은퇴 직전인 2009년에 살이 엄청 불어버렸지만 코치 선임 이후 다시 살이 빠져 예전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허구연의 말로는 선수 시절 잘 생겼었기 때문에 정민철이 젊었을 때 TV에서 전 경기를 중계했었다면 여성팬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여성 팬덤으로 유명한 정수빈보다 더 많았을 거라고.

  • 지역의(정민철-대전, 김원형-전주) 프랜차이즈에 커브가 주무기[31]인 미남 투수라는 점에서 김원형과 비견되는 경우도 꽤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1972년생 동갑내기다.

파일:attachment/정민철/2014-04-12-17-22-51-1.jpg
  • 마구마구 2015의 정민철(가명: 윤지현) 레전드 카드는 유니폼은 빙그레인데 한화 소속 선수로 적용되는(...) 오류가 있었으나 2014년 4월 20일 현재는 제대로 한화 유니폼 착용 상태. 그리고 커리어 하이는 1999년인데 1994년이 엘리트카드로 되어 있다.[32][33]

  • 2000년대 초중반에, 1972년생이라 다른 팀 가면 최고참 급이지만 소속팀이 한화 이글스라서. 커피 심부름을 했던 사진도 있다. 물론 기자들 앞에서 장난 삼아 한 것. 정민철 이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수혈한 최영필이 이러한 설정을 물려받기도 했었다.

  • 리그 구조상 프랜차이즈가 많은 한국 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은 한화 이글스지만, 대전광역시만으로 따졌을 때 한화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 사람.[34] 그런 걸 떠나서 2014년까지 평생 동안 대전을 벗어나 살아본 것은 단 2년뿐이다. 요미우리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2000년, 2001년을 제외하고는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느라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코치 연수한다고 외국으로 나가 생활한 적도 없다.

  • 199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여자아이돌 SPEED의 팬이라고.

  • 위에도 언급했지만 방위병 출신인데 32사단에 입소해서 훈련 받았었다고 한다.

  • 요상하게도 과의 악연이 조금 있다. 2016 시즌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중계 당시 똥을 발에 묻히고 중계석에 들어온 적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했던 박재홍은 이를 회상하며 "해설 4년 하면서 똥을 밟고 중계실에 와서 중계실 바닥에 묻힌 사람은 정민철이 처음일 거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서 골프 치던 도중에 똥을 밟아서 잔디에다 똥을 닦아낸 적도 있다고.

  • '선수가 없다면 키워서 쓰면 된다',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며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한다', '투수마다 체력이 다르니 코칭스태프가 잘 판단하여 기용해야 한다' 등의 발언으로 김성근의 투수 운용을 정면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35][36] 이 때 시범으로 양쪽 팔을 모두 굽혔는데, 공을 계속 던졌던 오른쪽 팔이 완전히는 구부러지지 않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감독 팬들이야 '정민철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이글스 팬으로서 감독님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팬 게시판에서 하며 난동을 부렸지만...

  • 2017년 5월 21일, 1박 2일에 출연해서 "이 방송 보시는 10개 구단 단장님들, 제 눈 살아있습니다" 라고 본인을 어필하였다. 현직 복귀를 꿈꾸고 있는 듯. 이 날 야구공으로 인형 맞히기 게임에서 25구를 던진 끝에 인형을 맞혔으나, 뒤이은 이향 아나운서가 단 1구만에 인형을 뽑으며 비교가 되었다.

  • 나 혼자 산다에 한때 팀 후배였던 윤현민이 고정으로 합류하면서, 준레귤러 멤버 수준으로 자주 등장했다. 상기의 1박 2일 촬영 당시에도 1박 2일 스케쥴이 끝난 후 곧바로 나 혼자 산다 촬영을 소화했을 정도. 단순히 같은 팀의 대선배였던 점도 있겠지만 마침 정민철이 MBC SPORTS+의 해설위원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 류현진배지현 아나운서의 중매자가 되었다. 본인 말로는 차분한 두 사람 성격이 잘 맞을거 같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둘은 얼마 안되어 결혼했다.

  • 2019년 3월 서경석TV에 출연하여 2019시즌 한화 이글스의 전망을 했다. 끝에 서경석과 손바닥 크기 비교도 했다. 서경석 TV 영상

  • 차명석 LG 트윈스 단장과 친하다. 둘 다 92년 신인이고 그 해 데뷔했다). 한화가 2020년에 18연패를 달릴 때는 단장직이 너무 힘들다고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서 하소연했던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다고, 차명석 단장이 스톡킹에 출연해 밝힌 적이 있다.

  • 컴투스 프로야구라는 게임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인데, 게임 내에서 매우 얻기 어려운 레전드 등급의 카드를 정민철만 공짜로 주기 때문이다. 유저들에게는 주로 '레민철', '모두의 민철' 등으로 불린다.


8.1. 선수 시절 관련 일화들[편집]


  • 손가락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파일:/image/020/2010/09/04/30966740.1.jpg
데뷔 때부터 화제가 되었을 정도. 당장 이 문서 개요에 있는 젊었을 적 사진을 보라. 손이 본인 얼굴만 하다. 특히 선동열이 "내 손가락이 정민철만큼 길었으면 슬라이더를 더 잘 던질 수 있었을텐데..."라며 부러워한 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거기서 슬라이더를 더 잘 던진다고?이 때문에 손가락이 길어서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변화구를 잘 던질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선수 생활 내내 들어야 했다. 물론 손가락이 길다고 변화구를 잘 던질 것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야구계 일각에 존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편견. 정민철 본인은 코치 시절에 이런 견해를 밝혔다. 기사[37]

  • 선동열의 후계자라는 별명답게 선동열이 아끼는 선수였다. 정민철이 결혼을 전후로 해서 체격이 불자[38] 타팀 선배인 선동열이 따로 불러 몸 관리 안 하냐고 타박을 주었다.[39]

  • 박경완이 평생에 잡아본 최고의 직구로 꼽았다. 기사 선동열의 직구가 돌덩어리를 잡는 느낌이라면 정민철의 직구는 공을 잡아도 그 안으로 파고드는 독수리 같다고... 역시 이글스의 상징다운 독수리 직구. 사실 박경완의 발언이 2000년대 후반의 팬들에게 유독 널리 알려졌을 뿐, 애초에 정민철은 90년대 초중반부터 계속해서 이런 식의 평가를 받아왔다. 포수 바로 뒤에서 공을 보는 심판들이 뽑은 최고의 직구로 정민철과 당시 OB 베어스의 김상진을 꼽는 기사도 있었고, 이종범 역시 최고 직구로 정민철의 공을 뽑으며, 오승환, 임창용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기사

  • 선수 생활 동안 맞은 홈런 중 본인에게나 당시 팬들에게나 가장 임팩트가 컸던 홈런은, 1996년 8월 23일 이종범에게 바깥 높은 공을 던져 허용한 홈런. 9회초 2사 만루 4대 1로 앞서던 중 맞은 역전 만루 홈런이었기 때문. 이날 정민철은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혼자서 2병이나 깠다고. 기사 한편 이 홈런이 나온 경기가 바로 이종범이 9회말에 포수마스크를 쓴 경기이다. 즉, 9회초에 총력전을 펼치느라 포수가 교체 되었는데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9회말에 포수가 없어서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갔다. 사실 이런 역전패의 결과가 나오게 만든 최고 원흉은 다름 아닌 감독 강병철이다. 애초에 정민철은 이 경기 선발이 아니었다. 송진우가 8회까지 1실점으로 던지고, 9회에 힘이 떨어져 연속해서 주자를 내보내자 갑자기 정민철을 구원 등판시켰던 것. 그리고 구원 등판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이 경기에 패한 후 강병철의 인터뷰가 그야말로 걸작. "정민철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알아서 거를 줄 알았다"라나 뭐라나. 정민철은 통산 BB/9가 2.81에 불과할 정도로 볼넷을 꺼리는 타입으로 유명했으며, 1996년은 패스트볼 구위가 하늘을 찌르는 전성기 때였다. 그런 정민철이, 아무리 상대가 전성기 이종범이라고 해도 밀어내기를 감수하며 2사 만루에서 유인구로 승부한다?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정말로 강병철이 2사 만루에서 이종범을 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명확하게 사인을 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경기 끝난 후에 선수탓으로 돌리며 입을 털어서는 안 되었던 일. 하지만 이후 정민철 위원의 인터뷰에서 해당 경기에서의 등판이 자원등판이었음을 밝혔다.

  • 야구 대표팀과 별로 인연이 없었다.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전무. 처음으로 프로가 아시안 게임 등에 출전하게 된 것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인데 이 때는 엔트리가 100% 미필자로만 채워졌었고, 2000 시드니 올림픽은 일본 진출 첫 해라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2007년 추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 전부. 다만 시드니 올림픽의 경우, 올림픽 예선전인 1999 서울 아시아 선수권 대표로 출전했었다. 또한 한일 슈퍼게임에도 1995년과 1999년 2회에 걸쳐 출전하여 호투했다.

  • 상복하고도 담을 쌓았다. 신인 시절 염종석에게 신인상에서 밀린 것은 유명하지만, 그 이후로도 KBO 골든글러브 수상을 한 적이 없다. 두 자리 숫자 패전 때문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기 때문.


8.2. 입담[편집]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송진우에 따르면,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웃긴 사람이 바로 정민철이라고. 안타깝게도 팬들이 이런 정민철의 면모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2008년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해서 프로 선수가 던진 몸에 맞는 공이 얼마나 아프냐는 질문에 김태균이 "민철이 형 공은 맞아도 안 아프다"라는 말을 하자 정민철은 "태균이는 살이 쪄서 공에 맞아도 괜찮다"라고 받아쳤다. 은퇴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은 정민철의 성격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도자로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2018년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 입니다 에서는 DJ인 김신영에 "삼성 중계 때 해설 한 번 하시겠냐?"는 말에 "욕 없이 화 없이 깔끔하게 중립한다는 장담을 못 한다"고 말했음에도 ''워낙 바쁘신 분이란 걸 알지만, 만약 삼성 라이온즈 경기를 중계하시면 시청률이 대박 날 것 같다"며 욕심을 드러냈다.[40][41]

MBC 스포츠플러스 엠스플 텔레비전에 출연해, 현역시절 어느 외국인 선수와 이종범을 상대로 뽕커브를 던졌을 때 일화를 소개했다. 외국인 선수의 입에서는 "fuck"이 나왔고, 이종범은 힘없이 투수앞 땅볼로 물러난 뒤 정민철에게 "아야? 실업야구냐? 실업야구선수여?"라고 따졌다고 한다.[42]

쉘힐릭스에서 주최하는 사회인야구 트레이닝캠프에서도 자폭성 유머를 날렸는데, 일본야구에 대해 조금 아는 듯한 사회인 선수가 "코치님한테 푸대접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지금까지 싫어한다."고 말하자, "에이, 저라도 저 안써요."라고 자폭한다던가, 선수들을 지도하며 시범을 보이다가 "힘들어서 못하겠다"며 주저 앉아버리는 등 털털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8.3. 팬 서비스[편집]


팬 서비스 관련 미담이 많은 편이다. 팬서비스와 관련해서 역대 최고의 수준이다.
신인 시절부터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며, 늘 친절하고 웃는 낯으로 대했다고 한다. 단순히 팬들에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신인 선수, 볼보이 같은 사람들에게도 신사적이며, 인품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그밖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훈훈한 일화들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 2010년대 후반 한국 프로야구의 저질 팬서비스 수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지자, 이런 정민철의 투철한 팬서비스가 인터넷 상에서 새삼스레 화제가 되었다.관련기사 한 때 야구를 했던 김기무 배우가 푼 정민철의 일화 #

  • 한화 볼보이 출신의 증언
  • 정민철에게 무등 탄 일화 출처
  • 생크림 케이크 받은 일화[43]
  • 정민철과 할머니 팬
  • 90년대 초반에 데뷔하던 시절에도 팬서비스가 좋았다. 전주구장에서 쌍방울에게 져서 패전투수가 되어 나오는 길에도 쌍방울 어린이 팬과 대화를 하면서 나오는 일까지 있었다.


9. 수상 내역[편집]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1999)
평균자책점 1위 (1994)
탈삼진 1위 2회 (1994, 1997)
승률 1위 (1993)


10.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2
빙그레-한화
33
195⅔
(5위)
14
4
7
-
0.778
(3위)
2.48
(2위)
141
15
71
145
(2위)
61
54
1.07
1993
18
148⅓
13
3
1
-
0.813
(1위)
2.24
(5위)
117
10
46
110
40
37
1.06
1994
28
218
(1위)
14
10
0
-
0.583
2.15
(1위)
156
6
63
196
(1위)
59
52
0.97
1995
22
162⅔
13
7
0
-
0.650
3.21
152
12
50
127
65
58
1.18
1996
32
219⅔
(1위)
13
12
1
-
0.520
3.03
173
16
57
203
(2위)
81
74
1.01
1997
31
208⅔
(2위)
14
(3위)
11
0
-
0.560
2.46
(4위)
172
11
49
160
(1위)
69
57
1.04
1998
23
148⅓
10
7
0
-
0.588
3.16
133
12
37
97
55
52
1.13
1999
32
201⅔
(2위)
18
(2위)
8
1
-
0.692
3.75
179
22
69
151
(5위)
92
84
1.1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요미우리
4
18⅔
2
0
0
-
1.000
4.82
21
4
4
16
10
10
1.29
2001
8
40⅔
1
2
0
-
0.333
4.65
43
8
18
28
22
21
1.4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2
한화
26
138
7
13
0
0
0.350
5.35
144
19
48
116
83
82
1.33
2003
26
139⅔
11
10
0
0
0.524
4.00
132
18
55
73
65
62
1.31
2004
13
54
0
6
0
0
0.000
7.67
76
11
21
22
50
46
1.74
2005
25
115⅔
9
3
0
0
0.750
4.82
124
14
32
56
70
62
1.30
2006
25
130⅔
7
13
0
0
0.350
3.93
142
18
47
62
68
57
1.41
2007
26
155⅓
12
(5위)
5
0
0
0.706
(4위)
2.90
(3위)
155
11
40
66
58
50
1.20
2008
25
127⅓
6
10
0
0
0.375
5.23
144
13
45
56
78
74
1.45
2009
8
31
0
6
0
0
0.000
9.87
54
7
18
21
36
34
2.32
KBO 통산
(16시즌)
393
2394⅔
(2위)
161
(3위)
128
(4위)
10
0
0.557
3.51
2194
(4위)
215
(4위)
748
1661
1030
935
1.19
NPB 통산
(2시즌)
12
59⅓
3
2
0
-
0.600
4.70
64
12
22
44
32
31
1.40
개인 통산
(18시즌)
405
2454
164
130
10
0
0.558
3.54
2258
227
770
1705
1062
966
1.20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2년
11완투
(5위)
3완봉
(1위)
1993년
10완투
(4위)
0완봉
1994년
9완투
(3위)
4완봉
(2위)
1995년
8완투
(5위)
2완봉
(6위)
1996년
9완투
(3위)
4완봉
(1위)
1997년
10완투
(1위)
4완봉
(1위)
1998년
2완투
0완봉
1999년
2완투
1완봉
(2위)
2000년
1완투
1완봉
2001년
1완투
0완봉
2007년
1완투
(5위)
1완봉
(2위)
KBO 통산
61완투
20완봉
(2위)
NPB 통산
2완투
1완봉

11. 관련 문서[편집]


[1] 한화 이글스가 배출한 KBO 영구 결번 선수 중에 유일한 대전광역시 출신.[2] 충남중 시절 1년을 유급했다. #[3] 선수시절에는 81kg이였으나, 은퇴 후에는 살이 불어서 그런지 95kg라고 언급했다. #[4] ~5월 5일[5] 2011년 5월 6일~2012년 7월 5일[6] 2012년 7월 6일~2013년 7월 17일[7] 7월 18일~[8] 우완 투수 중에선 통산 1위다.[9] 1990년대 선발 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 완투 1위(59), 완봉승 1위(19)이며, 정민철이 데뷔한 1992년도부터 1999년까지 다승, 탈삼진, 이닝, 평균자책점, WHIP, 완투, 완봉승 모두 정민철이 1위이다.[10] 하지만 진짜 무관은 아니다. 투수 최고의 명예인 방어율왕과 탈삼진왕을 했었으며, 정민철과 비슷한 위상이지만 다승왕을 많이 해서 반대이미지인 정민태는, 전성기 다승왕을 한창 할때 탈삼진 능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탈삼진왕 정민철 때문에 탈삼진 1위를 못해서 탈삼진 2위만 하고 끝났다. [11] 비슷한 사례로 KBO 리그 통산 홈런 4위(351)의 양준혁도 MVP와 홈런왕을 못해봤다. 대신, 반대로 동시대에 MVP를 해본 라이벌 이종범은 양준혁이 수상한 신인왕을 못했다.[12] 포심 패스트볼[13] 상대 타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14] 위 영상은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영상인데, 이후 방송에서 본인이 밝히길 다음해 일본 진출을 목적으로 조금씩 연습을 했었으나 자신이 없어서 정규시즌에는 봉인하고 있었는데,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포심, 커브 투피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이때 꺼내들게 되었다고 한다.[15] '백팔번뇌 커브'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150Km/h에 육박하는 패스트볼을 던진 후 낙차폭이 큰 100km/h대의 슬로커브를 던져서 타자들을 많이 고뇌시켰다. 이 슬로커브 말고도 12시에서 6시로 낙차 크게 떨어지는 파워커브도 보유했다.[16] 이 때문인지 은퇴해서도 칠테면 쳐봐라 라는 식의 투구를 하는 투수들 선호하는 듯하다. 김혁민을 두고 "얘는 털려도 정면승부 하잖아. 얘좀 보고 배워."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별로 혼내지도 않았다고 한다.[17] 현역시절 정민철의 커브는 '백팔번뇌 커브'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를 던진 후 낙차폭이 큰 100km/h대의 슬로커브를 던져서 타자들을 많이 고뇌시켰다. 이 슬로커브 말고도 12시에서 6시로 낙차 크게 떨어지는 파워커브도 보유했다.[18] 표면상으로만 한대화 감독이 투수 교체 타이밍을 정민철 코치에게 물어보고, 대게 그의 의견을 거의 따랐다.[19] 김혁민은 2군에서 갑자기 달라져서 돌아와서 당시 2군 코치였던 송진우의 공이라는 말이 많았다.[20] 참고로 대전광역시는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는 지역 중 하나이다. "~겨", "~여" 같은 충청도 사투리가 잔재하긴 하지만, 도시로서의 역사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시작할 정도로 역사가 짧다는 점과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특징 때문에 표준어 구사율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21] 류현진은 2019년 올스타전 선발 투수에 발탁되었다. 류현진의 2019시즌 하위문서 중 해당 항목 참조.[22] 박병호가 팀이 3점 차로 뒤지고 있던 8회 말에 천금 같은 홈런을 날린 장면을 보고서 정말 뜬금없이 이미 내려간 LG 트윈스 선발 투수 차우찬을 칭찬했다. LG 트윈스의 득점 땐 소리를 지르며 기뻐한 허구연 해설위원이 이 홈런을 보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 이제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다들 그러려니 했는데 키움 히어로즈 선수의 홈런을 보고 LG 트윈스 선발 투수를 칭찬하는 신개념 편파 해설에 팬들은 어이없다는 반응.[23] 물론 아무리 투수 위주의 해설이더라도 그런 극적인 홈런이 나왔다면 그 홈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맞고, 그 부분은 정민철의 미스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다만 그 해설들을 정민철이 LG 트윈스 편파 해설한다고 한다면 본인 입장에선 다소 억울할지도 모를 일이다.[24] 2012~2014년 8-9-9위로 리그 최하위를 하던 당시보다 10-10-10위로 최하위를 기록한 정민철의 3년 승률이 더 나쁘다.[25] 같이 엠스플에서 한솥밥으로 해설한 적이 있다.[26] 2020 도쿄 올림픽,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다.[27] 훗날 21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을때도 겨우 180 근처의 키였다고 한다. 만 20세가(21살)이 되어서야 프로에 왔음에도 그때부터 성인의 나이로도 키가 쑥쑥 컸다고 한다. 확실히 늦는 체질인듯.[28]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부터 중3때까지 주전선수로 정식 대회를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이 키도 작고 많이 왜소했었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참고로 똑같은 케이스가 박철순인데, 이쪽은 유급을 두번이나 해서 고등학교를 22살에 졸업했다. 근데 하필 정민철이 야구선수를 결심한 계기도 박철순이다. 초등학교 4학년때 프로야구가 생겨서 부친에 의해 야구장에 갔다가 박철순(당시 OB는 대전팀이었다)의 등판 경기를 보고 그의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바로 다음주에 학교 야구부를 신청했다고 한다.[29] 1992년 입단할 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를 좋아해서 달았다고 전해진다.[30] 본인이 마이클 조던을 좋아해서 그의 등번호인 23번으로 했다고 한다.[31] 전성기 정민철의 커브는 주무기였던 돌 같은 직구를 받혀주기 위한 부무기였고 전성기 김원형의 커브는 희대의 마구인 주무기였던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32] 다승을 기준으로 하면 1999년이 커리어 하이이나, 1994년의 평균자책점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1999시즌은 심각한 타고투저시즌 이였기에, 1999년을 커리어 하이로 뽑아도 무방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94년 이닝, 평균자책점, 탈삼진 1위에 WAR도 1999시즌인 5.9보다 2.8높은 8.7이지만 정명원의 KBO 최초 40세이브 때문에 골든글러브 수상 실패 등으로 1994년이 가려져 1999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33] 1994시즌 WAR 1위는 이종범(11.7), 3위는 정명원(8.0)[34] 한화의 레전드 중 대전 출생은 정민철과 강석천, 구대성 세 명뿐이다.[35] #[36] 그런데 정민철의 저 발언들은 김성근 감독이 야인으로 있을 때 "한화 투수들은 지옥에서 던지는 것이다."는 평과 함께 한화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했던 발언과 거의 비슷하다.[37] 다만 포크볼 등의 일부 체인지 오브 페이스 계열 구종구사에 있어서 긴 손가락은 대단한 메리트를 가지는 건 사실이다. 짧은 손가락으로는 구사 자체가 힘들기 때문. 실제로 불미스러운 일로 야구계를 떠난 사이드암 투수 박현준은 일반인들에 비해 손가락이 마디 하나 정도 더 길어서 포크볼 구사가 힘든 사이드암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포크볼을 선보인 바 있다.[38] 솔직히 배가 나오기 시작.[39]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볼때 선동열은 팀을 가리지 않고 좋은 투수가 나오면 애착을 갖는 듯하다. 인터뷰를 봐도 자기와 같은 케이스인 직구-슬라이더를 잘쓰는 김광현, 심지어 같은 팀 후배 겸 제자인 윤석민보다 타팀 에이스 류현진을 더 아끼는 발언이 있다.[40] 김신영은 삼성 라이온즈 팬임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밝히기도 했다.[41] 그러나 정민철은 삼성 경기 중계때 다소 안좋은 말을 해 삼성 팬들에게 이미지가 좋지는 않은 편이다.[42] 출처[43] 이에 대해 정민철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잘 안나지만 해당 일화에서 언급된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어느 한화 레전드가 어린 팬들에 한 만행(?)',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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