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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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용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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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8
2000
2003
2004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10번
장덕영
(1992~1993)

이숭용
(1994~2007)


팀 해체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10번
팀 창단

이숭용
(2008~2011)


오재일
(2012~2012.7.8.)
kt wiz 등번호 71번
팀 창단

이숭용
(2014~2018)


이강철
(2019~)
SSG 랜더스 등번호 71번
손지환
(2021~2023)

이숭용
(2024~)


현역




SSG 랜더스 No.71 [[감독#s-2|

]]
이숭용
李崇勇 | Lee Soongyong

출생
1971년 3월 10일 (5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용암초[1] - 중앙중 - 중앙고 - 경희대[2]
포지션
1루수, 외야수[3]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4년 2차 1라운드 (전체 1번,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4~2007)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1)
[4]
지도자
kt wiz 타격코치 (2014)
kt wiz 1군 타격코치 (2015~2016)
kt wiz 2군 타격코치 (2017~2018)[5]
kt wiz 1군 타격코치 (2018)[6]
SSG 랜더스 감독 (2024~)
프런트
kt wiz 단장 (2019~2022)
kt wiz 육성 총괄 (2022~2023)
해설위원
XTM 야구 해설위원 (2012~2013)
계약
2024 - 2025 / 9억원[7]
연봉
2024 / 3억원
응원가
핵폭탄과 유도탄들 - 라면과 구공탄[8]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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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김윤아(2004년 ~ 현재)
자녀
장남 이승빈(2006년 8월 11일생)[1]
차남 이서빈(2010년 9월 29일생)
형제자매
남동생 이든[2]
1. 개요
2.1. 평가
3. 지도자 경력
3.1. kt wiz 1·2군 타격코치
3.2.1. 2024 시즌
4. 프런트 경력 (2018~2020)
4.1. 2021 시즌
4.2. 2022 시즌
5. 해설자 경력
5.1. 사사구 진행자
6. 연도별 주요 성적
7. 논란
8. 여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야구인, 現 SSG 랜더스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1루수, 외야수.

선수 시절엔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의 주전으로 활약했고, 팀 해체 후 창단한 히어로즈의 정신적 지주이자 캡틴을 맡으며 17년 간 활동했다. 은퇴 후 2012년부터 2013년까지는 XTM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2014년부터 kt wiz의 타격코치로 부임했으며, 2018년 10월 18일에 kt wiz의 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2022년 2월 8일, 단장에서 물러나 육성 총괄로 보직을 옮겼다가 2023년 10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2023 시즌 종료 후, 경질된 김원형 감독의 뒤를 이어 2024년부터 SSG 랜더스의 제 9대 감독에 선임되었다.

KBO 리그에서 양상문과 더불어 선수, 코치, 감독, 단장, 해설위원을 모두 역임한 인물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평가[편집]


매우 꾸준한 타자이며[9] 현대 시절부터 뛰어온 팀 내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베테랑 중의 베테랑. 성적뿐만 아니라 팀 분위기를 이끄는 히어로즈의 캡틴으로서 팀의 정신적 지주이다. 코칭스태프 들이 선수들을 결집시켜 준다면, 이숭용은 선수로서 후배들을 껴안아준 셈. 잇다른 선수팔이로 분위기가 개판이 된 히어로즈에게는 명실상부한 대들보였다.

통산 성적으로 따진다면 안타나 홈런이나 모두 순위권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숭용의 최대 포인트는 바로 주장으로서의 존재감이다.[10] 주장이자 팀의 최고참으로 후배들을 잘 뭉치게 하여 히어로즈 구단의 수난 역사에서 가장 비참했던 시절이이던 2008~2010년에 꼴찌 부근에서 맴돌 것이라던 모두의 우려를 깨고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가 6~7위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전력난이 심했던 2008, 2010년에 그의 역할은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의 꾸준함을 증명하듯 역대 출장 7위, 안타 13위에 올라있다.

이숭용의 앞뒤에 있는 선수는 장종훈, 김재현, 박재홍 등 이름만 대도 누구나 다 아는 스타 플레이어들인데, 유명세도 덜하고 특급 시즌을 보낸 적도 없는 이숭용이 이들 사이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꾸준하고 성실한 선수였는지 증명해 준다.'

다만 그 꾸준함에 비해서 임팩트가 있던 시즌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 사실상 야구라는 스포츠는 꾸준함보다는 한 시즌의 임팩트에 더 가치를 두는 스포츠이기도 하다.[11] 또한 시즌 초의 활약보다는 시즌 말의 활약이 더 조명될 수 밖에 없는데, 아래 봄숭용 문서에 서술된 것처럼 이숭용이 봄에 강한 타자였던 것도 한몫한다. 다만 한국시리즈에선 임팩트가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 안타, 득점 기록을 세웠다.[12]


3. 지도자 경력[편집]



3.1. kt wiz 1·2군 타격코치[편집]


이후 2013년 10월 18일 이숭용이 kt wiz의 타격코치로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2015 시즌 중 황병일 2군 감독이 1군으로 콜업되어 1군 타격코치와 수석코치를 겸임함에 따라, 이숭용은 1군 타격보조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상술한 이유 때문일 수 있고, 지도자 경험이 짧은 것도 요인이 된 듯하다.

시즌이 지날수록 평가가 좋아지고 있다. 여름 들어서면서 KT 타선이 불이 붙더니 순위 경쟁하는 팀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면서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리고 다니는 중. 심지어 빠따의 팀이라는 넥센 상대로도 맞불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말은 실천되었다. 819 대첩 그것도 친정팀 상대로.

그리고 결국 2018 시즌 중에 1군 타격코치로 돌아왔는데, 이숭용이 복귀하자마자 타격 사이클이 귀신같이 살아나면서 또다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잇따른 주축 선수의 줄부상에는 숭용매직도 어쩔 수 없는 모양.

타격코치로서 타자가 삼진을 선채로 당하는 것에 부정적이지 않으며, 항상 자기 스윙을 자신있게 가져가라고 지시한다. 기사 이에 대해서는“서서 삼진 당할 때에는 주로 꽉 찬 공이다. 빠른 공이든 변화구든 보더라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공은 건드려도 파울이다. 상대 투수가 던진 잘 제구된 공을 어설픈 스윙으로 갖다 대다 아웃당하느니 볼 궤적을 지켜보며 삼진을 먹는 게 다음 타석을 위해 전략적으로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상대가 잘 던진 공은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공은 적극적인 스윙으로 공략하라는 게 타자들에게 하는 얘기다. 투수가 완벽한 공을 던지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라고 밝혔으며, 타자가 타석을 마친 뒤 들어올 땐 항상 "어땠어?" 라는 단 석 자만 건넨다고 할 정도.

3.2. SSG 랜더스 감독[편집]


2023년 11월 17일, 계약기간 2년, 계약금 3억원, 연봉 3억 등 총액 9억원의 계약조건으로 SSG 랜더스의 제 9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의 전 소속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가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며 인천을 떠난 지 24년 만에 SSG의 감독으로 인천에 돌아오게 되었으며 이숭용 개인적으로는 인천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팬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사가 선임된것에 대해 당황하는 반응이 대다수. 아무래도 면접을 본 후보에 이숭용이 있었다는 기사나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지만[14] 형식상 면접을 거쳐 이호준 코치가 선임될 것처럼 기사들이 나오다가 갑자기 예상 밖의 인물을 선임했으니 전혀 상상도 못했다는 여론이 많다.

팬들의 반응은 반반이다. 선수 시절 보여줬던 강력한 카리스마 바탕의 '형님 리더십'을 선수들에게 아낌없이 보여주길 바라는 기대감이 있는가 하면[15] "이러려고 김원형을 자른 것이냐", "구단주의 입김에 놀아나는 바지 감독 아니냐" 등의 비판도 공존하고 있다.

이로써 이숭용 감독은 박종훈, 염경엽, 양상문, 장정석, 손혁에 이어 KBO리그 역대 6번째로 단장과 감독을 모두 경험한 야구인이 되었다.[16]


3.2.1. 2024 시즌[편집]


2023년 11월 21일 송도국제도시의 홀리데이 인 인천송도 호텔에서 취임식을 갖고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감독 취임식 이전에는 강화 SSG 퓨처스필드를 방문해 마무리 캠프에 참여 중인 선수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선수들에게 "감독 눈치를 보지 말라. 감독에게 잘 보이는 선수만 편애해서 경기에 기용하지 않는다. 공정하게 선수를 평가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를 기용하겠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아울러 코칭스태프와 만나서는 "코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코치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는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감독 취임식에서는 "1994년에 프로야구 선수 유니폼을 처음 입은 도시가 바로 인천이다. 그동안 내 야구 인생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나 생각했는데 인천 연고팀인 SSG의 감독이 되면서 인천에서 내 야구 인생의 뿌리를 찾았다"고[17] 말했다. 이 '뿌리 발언' 때문에 감독 생활 첫 별명은 "뿌동님"이 됐다.

이어 "좋은 성적을 내면서 유망주 육성에도 동시에 성공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야수 출신 감독이기 때문에 투수 출신 수석코치를 둘 생각이며 수석코치를 필두로 투수 파트 코칭스태프에게 세부적인 투수 운용을 전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kt에서 단장과 육성총괄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선수단의 육성이 잘 되려면 1군 경기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시헌 2군 감독과 꾸준히 소통해서 2군에서 절박하게 열심히 하는 선수, 기량 발전이 눈에 보이는 선수를 추천 받으면 1군 경기에 아낌없이 기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동안 2군 내지는 1.5군급 선수로 분류됐던 선수들이 자주 1군 경기에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랜더스 구단의 최대 당면 과제인 세대교체 문제에 대해서도 계획을 밝혔는데 "41세까지 현역으로 뛰면서 느낀 바로는 베테랑 선수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주면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18] 사실을 깨달았다"며 "물리적으로 나이가 많아진 만큼 고참 선수들의 체력을 어떻게 아끼고 비축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최고령 선수인 추신수·김강민의 기용 문제에 대해 "두 선수와 대화해보지 못했는데 선수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취임식 다음 날 충격적이게도 SK-SSG의 최장수 원 클럽 플레이어였던 김강민이 2차 드래프트를 통해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보호 명단 제출은 11월 12일에 이루어졌고 이숭용 감독 선임은 11월 17일에 발표됐으니 이숭용 감독이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내년 시즌을 구상하고 준비해야하는 입장으로써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다.

취임 이후 1군 코칭스태프 인선을 본격화했는데 롯데 자이언츠에서 일본 해외 스카우트로 활동하면서 지도자 연수를 받을 예정이던 배영수를 코치로 영입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두 구단이 합의함에 따라 배영수를 감독 취임 후 처음 영입한 코치로 맞아들였다. 아울러 이숭용 감독의 요청에 따라 히어로즈에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송신영강병식을 각각 1군 수석코치와 1군 타격코치로 영입하기로 했다.

4. 프런트 경력 (2018~2020)[편집]


2018년 10월 18일 임종택 단장과 김진욱 감독이 2018시즌 성적 부진을 통해 사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kt의 신임 단장으로 부임했다. 구단 체질을 개선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성 있는 육성 운영 시스템 정착을 위해 창단 뒤 처음으로 야구인 출신인 이숭용 단장을 선임했다고 설명했다. 기사

이후 2018년 10월 20일 두산 베어스 이강철 수석코치를 새 감독으로 낙점하며 본격적으로 단장직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선임 발표 시기 때문에 또 논란이 되었다. 이건 이강철 항목 참고. 두산 베어스 팬들에게는 확실히 비호감 인사가 되었다.

이후 이강철 감독 취임식에서 "이강철 감독의 재계약을 위해서 열심히 뛰겠다."라는 말을 했다가 여러모로 네티즌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임기를 시작하는 감독에게 재계약 운운하는 것은 예의에서 어긋났다는 반응. 더군다나 kt 2군의 열악한 환경까지 베댓에서 언급되었다. 그나마 2019년 이강철 감독 첫 시즌에선 최하위권에서 중위권으로 오르며 5강의 희망이 보이고 소통을 중요시하겠다는 목표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2020시즌에는 창단 첫 포스트시즌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며 가을야구에 성공했다. 하지만 첫 가을야구에 긴장했는지 그 동안 가을야구 단골손님 두산베어스가 큰 경험의 바탕으로 총 스코어 3:1로 패배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팀이 하위권에서 5강을 넘어 상위권으로 가는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4.1. 2021 시즌[편집]


2020 시즌 종료 후 윈나우로 달리겠다고 밝혔고, FA시장에 나온 최주환 영입설이 나왔으나 SSG로 이적했다. 이후 몸값이 올라가며 손을 뗐다고 밝혔으나 팬들의 여론은 좋지 못하다.[19]

FA시장에서 철수하면서 11월 말 한화에서 방출된 안영명의 영입, 2020년 12월 4일에 진행된 롯데 자이언츠와의 신본기, 박시영최건, 2022년 2차 3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트레이드를 끝으로 선수 보강이 마무리되었다.
그 후 주권과 3천만원 차이로 연봉조정 신청까지 가고, 지난시즌 활약 후 잔류를 위해 FA 신청도 하지 않았던 유원상의 연봉 삭감으로 인해 팬들의 스토브리그 평가는 부정적.

시즌 개막 후에는 박경수의 노쇠화. 조일로 알몬테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다 방출당했고, 지난시즌 팀의 허리를 맡았던 유원상과 이보근이 부진하는 등 투타에서 악재가 여럿 터졌지만 고영표의 복귀로 완성된 리그 최고의 선발진과, 전혀 기대도 없었던 박시영이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는 등 불펜진도 안정되면서 투수의 힘을 바탕으로 팀은 7월 리그 중단 전까지 선두를 달리며 순항하고 있다. 그런데 리그 중단 사태 때 중단에 찬성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이에 대해서 kt 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7월 31일에 롯데와 오윤석, 김준태이강준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9월 들어서 시즌 전 타선 보강에 실패했던 여파가 터지면서 팀 타격이 완전히 침체. 삼성에게 완전히 따라잡혔다가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두 팀 모두 승리하면서 타이브레이커까지 간 끝에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두산을 상대로 4:0 완승을 거두면서 단장으로서의 첫 우승을 기록했다. 시즌 전 스토브리그나 리그 중단 관련 등으로 팬들의 여론이 그리 좋지 않지만 우승을 했으니 괜찮다는 반응도 있는 편.


4.2. 2022 시즌[편집]


2021 시즌 종료 후 유한준의 은퇴로 타선이 더 약화되었고, 이강철 감독도 외부 영입을 언급하면서 FA 시장에 참전하겠다고 밝혔으나, 올해에도 합리적인 가격으로만 영입하겠다는 말이 나온지라 kt 팬들은 해탈하는 중.

실제로 외야 FA가 대거 시장에 나왔지만 모두 잔류하거나 타팀으로 이적했고[20], 12월 20일에 장성우와 4년 42억 재계약을 맺었고, 12월 27일에는 황재균과 4년 60억에 재계약하며 내부 FA는 허도환만 남았다.

그러던 중 한번씩 영입설이 나오던 박병호와 29일에 3년 30억 계약을 맺으며 2017년 황재균 영입 이후 약 4년만의 외부 FA영입을 했다. C등급이라 보상선수가 없고, 노쇠화가 오는 상황에서도 20홈런을 기록했기에 팀의 약점인 장타력을 확실하게 보강해 줄 수 있다며 반기는 팬들도 있지만 지난 2시즌동안 에이징커브를 직격탄으로 맞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부정적인 팬들도 있는 등 의견은 갈리고 있다.[21]

12월 30일에는 마지막 내부 FA였던 허도환이 LG와 2년 4억 계약을 맺으며 팀을 떠나면서 2022 시즌 FA계약을 마무리했다.[22]

2022년 2월 8일, 육성 총괄 담당으로 보직이 바뀌었으며, 나도현에게 단장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는 본인이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2023 시즌 후 팀을 떠났다.

5. 해설자 경력[편집]


당초 은퇴 후 계획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해외 지도자 연수 후 넥센의 코치로 복귀한다고 알려졌지만, 본인이 제 3자의 시각에서 야구를 보면서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이유로 2012년부터 XTM의 해설을 맡은 이후 2013 시즌에도 계속 해설로 활약하고 있다. 현역 시절에 입담이 꽤 좋았기에 해설 시작 전에는 그의 해설에 대해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해설 시작 후의 평가는 역시 실전은 다르다란 평.

밑에서 언급되는 인터넷 방송 사사구에서 하차한 뒤 해설에만 집중하는지 웅얼거리는 발음이나 위에서 언급 된 말 끝이 징징거리며 늘어지는 어투가 상당히 말끔해졌다.


5.1. 사사구 진행자[편집]


코리아볼닷컴에서 진행하는 사사구란 채널에 이병훈, 이용균 기자, 임용수와 함께 출연했다. 점점 막장으로 흘러가는 사사구 진행자[23] 중 그나마 상식적인 말을 한다는 평을 받았지만[24] 2013년 5월 이병훈 해설과 함께 김광현은 에이스가 아니다. 박진만이 늙어서 힘이 떨어졌다. 최정 그거 인터뷰 더럽게 못 한다라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발언을 하는 바람에 SK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인 적이 있다.[25][26]
그러던 중 5월 27일 방송에서는 논란이 터졌었다. 자세한 건 후술.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태평양-현대
84
210
.229
48
19
1
3
16
27
3
32
.371
.328
1995
83
267
.255
68
16
4
11
45
37
5
28
.468
.328
1996
124
371
.280
104
18
4
12
47
45
5
67
.447
.389
1997
121
341
.311
106
28
3
9
61
41
3
68
.490
.419
(5위)
1998
107
363
.280
101
26
1
10
45
39
6
43
.438
.351
1999
109
307
.264
81
12
2
14
39
43
2
58
.453
.380
2000
104
281
.285
80
14
0
15
50
49
2
42
.495
.377
2001
124
430
.300
129
29
1
10
64
53
4
56
.442
.378
2002
125
422
.284
120
18
2
19
76
63
7
52
.472
.361
2003
133
511
(3위)
.294
150
25
0
18
76
70
4
51
.448
.355
2004
133
468
.293
137
29
(5위)
0
9
85
60
0
71
.412
.382
2005
105
330
.252
83
13
0
14
55
45
1
55
.418
.357
2006
119
370
.286
106
12
0
7
43
44
3
66
.376
.389
2007
95
299
.301
90
19
1
2
34
39
2
44
.391
.39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우리-서울-넥센
109
333
.270
90
10
0
3
27
37
1
41
.327
.349
2009
114
362
.296
107
20
3
4
52
47
8
50
.401
.376
2010
124
328
.270
90
15
0
2
30
37
5
39
.338
.350
2011
88
146
.253
37
7
0
0
12
7
1
19
.301
.337
KBO 통산
(18시즌)
2001
6139
.281
1727
330
22
162
857
783
62
880
.421
.369

7. 논란[편집]


2013년 5월 27일 사사구 방영분에서 고농축 카페인. 각성제를 복용했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숭용이 언급한 고농축 카페인은 1999년 IOC에서 공식 금지약물로 지정했었다가 2003년 이후로 제외되었는데[27], 추가 인터뷰에서 복용 시기는 1998년 한국시리즈였다고 밝혀서 시기 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제외 시기와 상관없이 약물을 복용한다는 것 자체가 도의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당장 법적으로 무죄인 로저 클레멘스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보면. 하물며 저렇게 약물을 복용한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방송에서 대놓고 말한다는 거 자체가 이숭용 본인이 약물에 대한 별 다른 자각이 없다는 것과 약물 청정리그라는 KBO 리그의 현주소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다음 회에 본인이 사과했고, 당시 임찬규 물벼락 사건으로 야구계가 난리났었던지라 큰 논란 없이 일단락 되었다.

이후 2년 뒤에 송진우가 해설 도중 바셀린을 활용한 부정투구 논란이 터지면서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이숭용의 논란도 다시 언급되면서 과거 야구인들이 약물이나 부정투구에 대해 경각심이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8. 여담[편집]


  • 선수 시절, 태평양-현대를 거쳐 우리-서울-넥센에서 지냈다. 사실 히어로즈는 삼청태현의 역사를 계승한 팀이 아니지만,KBO도 공인한 원클럽맨으로 대우받고 있다.[28]

  • 별명은 캡틴, 그리고 이름과 합친 숭캡이 가장 유명하며, 이 밖에도 미스터 쾌남[29], 유니콘스의 마지막 황태자, 숭늉, 물밥 등등의 별명도 있다.

  • 적극적인 팬 서비스와 선행에 앞장섰던 인물 중 하나다. 선수 시절은 물론 은퇴 이후에도 팬들의 사인 요청은 물론 사진 촬영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주는 편이다. 현대 시절에는 당시 안타 하나당 만원씩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적립해서 시즌 종료 후 기부하는 한편 아동복지시설 등에도 정기 후원을 했다고 한다.

  • 중앙고와 경희대 시절은 물론 프로 데뷔 시절까지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대림아파트에서 거주했다. 이를 고려하면 프로 데뷔 첫 해인 1994년부터 결혼 직전인 2002년까지 무려 8년간 서울과 인천, 서울과 수원을 출퇴근하며 선수 생활을 한 셈이 된다. 그러다 2003년 CF 모델 출신이었던 김윤아 씨와 결혼한 뒤 당시 홈구장과 가까운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한일타운 아파트에서 신접생활을 차린 후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야구인으로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생활 반경이 수도권을 벗어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에서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까지 졸업했으며[30] 인천광역시 연고팀인 태평양의 지명을 받아 인천에서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태평양의 후신인 현대가 수원시로 홈구장을 옮기자 수원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현대의 해체 이후 히어로즈가 서울 목동에 터를 잡자 비로소 고향에서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말년 생활을 하게 됐다. 은퇴 이후에는 수원 연고팀인 kt에서 코치, 단장, 육성 총괄을 역임했고 1999년 이후 24년 만에 인천으로 돌아와 SSG의 감독을 맡게 됐다.

  • 히어로즈가 창단 초 재정 위기에 몰렸을 때[31] 김용달 LG 타격코치가 이숭용, 송지만을 데려오고 싶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타격의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어 밀어치고 당겨치는, 거기에 인내심이 더해진 타격 기술을 LG 트윈스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하는데….[32]SK 와이번스이호준박정권의 연쇄 부상 여파로 1루 공백이 생겼을 때[33] SK로부터 현금 1억원과 정상호를 받는 조건으로 트레이드될 뻔한 충공깽스러운 일도 있었다.[34] 훗날 그는 트레이드 될 뻔했던 팀의 후신 구단인 SSG에서 감독을 맡게 됐다.

  • 넥센 히어로즈의 1루 주루코치인 홍원기보다 두 살이 많은 탓에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홍원기 코치에게 절대 "코치님"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인지 이숭용이 1루로 출루하고 홍원기 코치가 이숭용의 장비를 받아줄 때 농담섞인 욕설도 자주 했다고. 뭐 그래도 둘이 친하니 그랬겠지만. 그 예로 2009년 어느 날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이숭용이 출루한 후 홍원기 코치와 나누었다던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숭용 : "야, 장비."
홍원기 코치 : ….
이숭용 : "안 받고 뭐해~ X바~"
홍원기 코치 : "아 형, X바가 뭐에요…. 그래도 명색이 제가 코치인데…."
이숭용 : (수비하는 김주찬을 힐끗 보며) "야, 니가 듣는 건 안 괜찮고, 뒤에 주찬이가 듣는 건 괜찮냐?"
김주찬은 이 상황을 계속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홍원기는 무한도전 타인의 삶에서 제대로 보복한다. 이숭용과 바꾼 정준하가 타격이 기대에 못 미치자 옆에서 한소리 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온다.

  • 동갑내기 정준하와는 꽤나 친분이 있는 사이다.[35] 위에 언급된 대로 현역 시절 무한도전 타인의 삶 편에 출연해 하루동안 정준하와 역할을 바꿔 야무지게 방송 분량을 뽑았다. 준비해온 아줌마 가발을 쓰고 무한도전에서 정준하의 빈자리를 메꾼 건 덤. 이후 이숭용의 은퇴식 때도 정준하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 컬투와도 친분이 있다. 지금의 아내를 컬투의 김태균에게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김C와도 친분이 있는 등 연예계 인사들과 두루두루 친한 편이다.


  • 선수생활 내내 몸담은 팀인 만큼 넥센에 여전히 애정이 큰 모양이다. 넥센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잠깐 출연했는데 코치 일을 마치고 바로 넥센의 포스트시즌 중계를 시청하면서 응원했다. 근데 아쉽게도 역전패해서 탈락했다.

  • 마구마구에서 타석에 등장 시 꾸준함의 대명사라는 소개가 자주 언급되어 나온다. 이효봉 위원은 특히 캡틴의 부재가 큰 2012년 넥센의 성장이 기대된다고 멘트를 날렸는데 후임 1루수인 박병호가 완벽하게 그 빈자리를 메웠다.

  • 벤치 클리어링의 숨은 강자이기도 하다. 가정적인 면모와 신사적 이미지로 부각이 잘 안 되지만 보스턴 시절부터 싸움에 자신있고 벤치 클리어링에 적극적으로 나선 김선우가 맥을 못춘 상대가 이숭용이다. 2010년 넥센과 두산의 벤치 클리어링 당시 김선우를 질질 끌고간 것은 유명하다.

  • 서울을 거쳐 넥센 히어로즈가 되었을 때는 이미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KBO에서 이숭용을 짬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벤치 클리어링이 났을때 양팀 선수단의 가운데에 서서 중재하는 모습도 종종 보이곤 했다. 현대 시절 날고 기던 선수단을 하나로 묶을수 있던 카리스마란 이런것이었다.

  • 김선우하고는 또다른 인연이 있는데, 김선우가 KBO 역사상 처음으로 12초 룰을 어기게 한 타자라고 한다. 김선우가 7회까지 역투를 하고 있자 이숭용이 타석에 빠르게 들어서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싸인을 교환하는 도중 12초 룰을 어기게 됐다고. 이숭용의 말로는 이후 김선우가 흔들리며 완봉도 날아갔다고 한다.(이숭용의 기억으로는 김선우의 승리도 날아간 것 같다고. 확인 결과 2010년 6월 20일 경기이다. 8회말 2-3상황에서 김선우가 12초룰을 어겨 이숭용이 볼넷으로 1루 출루. 그 후 투수 앞 땅볼 때 김선우의 송구실책으로 1사 2루 상황에서 송지만의 안타로 1:1동점. 추후 장기영의 우중간 적시타로 승리투수와 더불어 패전의 멍에까지 씌웠었다.) #


8.1. 봄숭용?[편집]


은퇴한 뒤에는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별명으로 봄숭용이 있다. 이유는 4~5월에는 불꽃타를 휘두르며 팬들을 설레게 하지만, 막상 시즌이 끝나고 보면 그냥 평범한 성적을 찍었기 때문. 사실 활약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이유도 매년 시즌 초에는 맹활약하며 언론에 이름이 자주 언급되다가, 여름 이후에 극도로 부진하며 언론은커녕 경기에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2012년 9월 26일 해설에서 자신도 그 별명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선수들이 해도 안 될 때가 있으니 욕하기보다는 격려를 달라고 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풀타임 첫해인 1996년 5월에만 타율 .333에 5홈런 20타점으로 맹활약. 그런데 시즌 끝날 때 성적은 타율 .281에 홈런 12개 47타점으로 5월 이후에 달랑 7홈런 27타점 추가.

사실 풀타임 1년차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준수한 성적이고, 이 시즌은 극악한 투고타저였기 때문에 지금 보면 별 거 아닌 12홈런만으로도 홈런 13위를 기록했다.[36] 어쨌건 이 당시 구 현대 팬들은 이숭용이 아주 대단한 타자가 되리라 믿었는데, 그리고 전설이 시작되었다.

  • 1998년 5월까지 홈런 5개. 그런데 시즌 전체 홈런수는 10개.
  • 1999년 5월까지 홈런 6개. 그런데 시즌 전체 홈런수는 14개.

이런 식으로 매년 초 팬들에게 성장할듯 말듯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성장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는 양반이고, 30살을 넘어가는 2000년대부터는 더 극단적으로 변한다.

  • 2002년 5월까지 무려 11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남은 시즌 동안 추가된 홈런은 달랑 8개.[37]
  • 2005년은 봄숭용 전설의 시즌이었다. 5월까지 13개의 홈런을 치며 홈런 단독 1위에 오르지만, 남은 시즌 동안 추가된 홈런은 단 1개.[38][39]
  • 2006년 5월까지 타율 3할 1리[40] 5홈런 20타점이었는데, 시즌 종료시 성적은 2할8푼7리에 7홈런 43타점이었다. 그러니까 여름 이후에 단 2홈런 23타점만을 추가했다. 물론 특별한 부상 따윈 없었다.
  • 2007년 여름까지 3할 4~5푼으로 타격왕 경쟁을 했다. 2005년 초반과 마찬가지로(이때는 홈런왕) 언론에서도 노장이 생애 첫 타이틀에 도전한다며 설레발을 쳤지만, 후반기에 부상으로 공백기가 있었고 복귀 후에는 가을에 타율이 급하락했다. 이 시즌은 다른 때와는 달리 부상이 아쉬운 시즌이었다.

아쉽게도 2007년 이전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진짜 봄숭용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2007년 이후 4년간 전후반기 성적만 요약해서 보자면, 다음과 같이 엄청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2007년~2010년 이후 전후반기 성적
    • 전반기: 299경기 281안타 10홈런 타율 .305, 출루율 .390, 장타율 .397
    • 후반기: 124경기 90안타 1홈런 타율 .237, 출루율 .309, 장타율 .290

이 때문에 보기와 달리[41] 장타율이 낮은 편이다. 통산 성적만 보면 늘 2할 8푼대의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치는 매우 꾸준한 타자였지만, 실상은 봄에 좀 많이 타올랐다가 여름을 버티지 못했던 타자.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난히 마구마구[42] 프로야구매니저 등의 야구 게임에서 능력치를 짜게 주는 감이 있다. 마구마구에서는 이름 있는 선수는 누구나 하나쯤 있는 레어카드도 오랜시간 동안 없었다. 아마도 너무 꾸준하다 못해 몬스터 시즌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은퇴 1년 전에 한 인터뷰를 보면 왜 봄숭용이었는지 알 수 있다. 팀에서는 시즌 초반인 4~6월이 성적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숭용 자신도 4~6월에 페이스를 끌어올려서 모든 걸 쏟아부었고, 후배 선수들도 자신처럼 초반에 몰아쳐서 팀 성적을 우선 올려야 개인 기록이든 뭐든 가치가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숭용의 야구관을 알 수 있는 발언.


8.2. 미스터 옥토버[편집]


그러나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봄숭용 모드와는 달리, 진짜 괴물같이 활약했다! 현대의 한국시리즈 경기를 보면 이숭용이 정규시즌에 비해 정반대의 활약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는 통산 한국시리즈 최다안타, 최다득점을 기록했으며, 4번 중 3번의 우승 확정 아웃카운트를 본인의 손으로 만들어냈다! 그 진가가 드러난 순간은 팀의 첫 우승 시즌인 1998년 한국시리즈이었는데, 해당 시리즈 기간 동안 홈런 2개를 포함해서 OPS 1.128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특히 홈런 2개중 1개는 우승을 결정지은 6차전에서 나온 선취포이자 결승포였다. 그 이후로 2000년200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3할대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다. 다만 2004년에는 34타수 5안타, OPS .422로 크게 부진했다.

비록 세월이 흐르고, 선수 수명이 길어지면서 이숭용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시리즈 관련 기록은 후배 선수들에 의해 깨졌지만[43], 이숭용의 정규시즌 성적과 한국시리즈 성적을 비교해 보면 이숭용이 얼마나 한국시리즈에서 날아다녔는지 알 수 있다.

9. 관련 문서[편집]


[1] 이후 출신 선수가 단 1명 뿐인데 현재는 야구부가 해체된 상태이다.[2] 체육학과 90학번[3] 2003 시즌까지 주로 중견수로 많이 나온 편이고 1996 시즌엔 좌익수로 활약했던 적도 있다.[4] 이숭용은 본인의 자의였건 타의였건 팀을 이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현대 유니콘스와 히어로즈는 해체 후 재창단이라는 절차를 거쳐 이어진 역사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역사가 이어지는 구단이 아니다. 다만 유니콘스의 해체 후 대부분 선수들의 고용이 히어로즈로 승계됐기 때문에 유니콘스의 정신적 후속작을 꼽는다면 히어로즈라고 볼 수 있다. 선수단 구성만 놓고 본다면 태평양부터 히어로즈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 맞지만 엄밀히 따졌을 때 삼청태현과 히어로즈는 서로 단절된 구단이기에 경력을 따로 서술한다.[5] ~6월 17일[6] 6월 18일~[7] 계약금 3억원 / 연봉 총액 6억원[8] 날려버려 날려버려 안타 이숭용[9] 봄에만 반짝했든 뭐했든 간에 15년 가까이 매년 비슷한 성적을 찍어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같은 팀에서 활약한 송지만도 비슷한 유형의 선수이다.[10] 특히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을 때는 흥분한 히어로즈 선수들을 그만해. 라는 한 마디로 잠재웠다.[11] 그라제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10년간 매년 15개 이상의 홈런을 친 타자와 8년까지 별게 없다가 2년을 30개 씩 친 타자가 있으면 꾸준함으로 봤을때는 전자가 잘하는 것이지만 연봉은 후자가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클로저 이상용에서도 김상덕 감독이 선수들 집합에서, 10년 동안 15홈런을 꾸준히 친 타자 A와, 8년 동안 1개도 못치다가 2년 동안 40홈런을 친 타자 B의 경우, 통산 홈런은 A가 훨씬 많지만 FA시장에서의 평가는 B가 훨씬 높다는 말로 임팩트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12] 이후 2010년대에 꾸준히 한국시리즈에 출전한 박한이에 의해 갱신되었다. 이숭용도 한국시리즈에 6번이나 나갔지만 박한이는 무려 10번 나갔다.[13] 2012년에 KBS N SPORTS가 제작한 스포츠 다큐멘터리 '인천야구의 추억'에 출연해서 "현대가 인천에 있던 시절 인천 팬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인천은 행복한 추억이 많았고 고마운 도시였다"고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14] 이호준 외에도 "수도권 구단에서 지도자와 프런트로 일했던 야구인이 면접을 봤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야인으로 지내는 사람 중 수도권 팀에서 지도자와 프런트를 동시에 지낸 야구인은 장정석과 이숭용이 있다. 다만 장정석은 '박동원 뒷돈 요구 사건'의 여파로 사실상 야구판에서 매장됐기에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이숭용이 유일했다.[15] 이숭용이 인천팀 유니폼을 입고 숭의야구장에서 뛰던 시절을 직접 보고 기억하는 30대 후반~40대 이상의 팬들은 이숭용을 좋은 이미지의 선수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연령대의 팬들 중에는 이숭용의 SSG 감독 선임을 환영하는 여론도 있다.[16] 이중에서 해설 경험까지 있는 야구인으로 따지면 5번째로 박종훈을 제외한 염경엽, 양상문, 장정석, 손혁은 케이블 방송사 해설을 역임한바 있다.[17] 2012년 다큐멘터리 '인천야구의 추억'에서 "한 팀에서 2000경기 이상 뛰고 명예롭게 은퇴했지만 제 야구 인생의 뿌리는 어디에 있나요? 서울? 인천? 수원? 찾아보니 없더라구요. 그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코멘트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얘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18] 이숭용 본인도 현대 구단 해체 후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던 현역 말년 시절 히어로즈 구단 프런트와 불화를 겪은 경험이 있다.[19] 박경수가 직전시즌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언제 노쇠화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 지라 최주환의 영입을 원하는 팬들이 많았고, 랜더스에서 4년 42억으로 영입했기에 대체 얼마나 낮은 가격을 생각했던 거냐는 의견도 많다.[20] 이후 야구부장 유투브에서 kt에서 4년 80억의 금액으로 선수 영입을 노렸으나 해당 선수가 타팀과 100억 이상의 계약을 맺었다고 밝혀서 영입 시도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하지만 22시즌을 거의 다 마친 시점에서 박병호 영입은 최고의 영입이 되었다. 주전 1루수 강백호가 부상으로 장기간 이탈하면서 그 자리를 잘 메꿔준 수준을 넘어 완벽히 부활하며 팀 타선을 지탱했다.[22] 이후 허도환이 심수창의 유튜브에 출연해서 KT와는 2번 만났지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금액을 제시했다고 밝혔다.[23] 이병훈이 사사구를 그만둘때까지 사사구가 올라온 날이면 이병훈이 한 발언으로 각종 야구커뮤니티가 난리가 났었다. 특히 자주 무시당하던 LG 트윈스 팬들과 한화 이글스한테는 더더욱.[24] 다만 이숭용도 말이 너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25] SK 팬들을 그 무엇보다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은 바로 김광현은 에이스가 아니다 라는 발언이었다. 또한 최정이 인터뷰을 못하는 것도 SK 팬이라면 모두 알고 있지만 그거라고 표현한 것에 분노한 것.[26] 팬들의 감정과는 별개로 추후 SK 와이번스를 인수한 SSG 랜더스의 감독이 되었다.[27] 다만 제외 사유는 해당 물질에 문제가 없어서가 아닌 검사 신뢰도 문제로 인한 것이다.[28] 해체 후 재창단이라는 절차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어진 유니콘스-히어로즈의 역사는 본인의 의지로 쓰여진 것이 아닐 뿐더러 선수 본인은 현역 동안 한 번도 이적한 적이 없었기 때문. 이러한 이숭용의 처지는 키움 히어로즈(현대 선수단 승계)와 SSG 랜더스(인천 야구 계승)간 삼청태현 후계 논쟁에서 키움의 손을 들어주는 논거로 활용되고 있다. 유사사례로 오주원의 경우도 존재한다. 더군다나 선수 본인 또한 스스로 원클럽맨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담으로 2023년, SSG 랜더스의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두 팀 모두를 거치게 되었다.[29] 도원아재 한정으로 지어진 별명. 유래는 태평양화학이 당시 생산·판매하던 남성 화장품 '쾌남' 시리즈다.[30] 경희대학교 야구부의 합숙소가 과거에는 회기동 캠퍼스에 있었다고 한다.[31] 그 외에 프런트이광환 감독 vs 고참 선수들 이렇게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32] 송지만의 경우는 우타거포가 없는 LG 트윈스에게 이숭용+송지만 ↔ 무명신인+ 25억 틀드 설이 있다. 이것보다 더 유명한 설은 2008시즌 중 이성열+심수창+현금을 받고 송지만을 LG에 넘기려 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취소되었고, 이성열과 심수창은 넥센에 왔다?![33] 팀 내에 1루수를 맡을 선수가 마땅치 않아 외야수였던 이진영이 1루수로 매번 기용되던 시기였다.[34] 당시 김성근 SK 감독과 이광환 히어로즈 감독이 직접 만나서 정상호 ↔ 이숭용 맞트레이드에 합의하였으나, 발표 직전 히어로즈 프런트가 현금 1억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무산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히어로즈 이광환 감독은 이숭용 등 히어로즈 고참선수들과 극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SK 와이번스는 줄부상과 부진으로 1루수 포지션에 공백이 생긴 상태에, 정상호는 아직 그저 그런 백업 포수였다.[35] 실제 정준하는 야구를 매우 좋아하고, 이숭용 외에도 이종범, 이대호 등 야구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기로 유명하다. 정준하 역시 취미로 야구 하는것도 좋아하는데 둘 다 장신의 왼손잡이 1루수인 공통점도 있다.[36] 특히 그 해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이 가관이었는데, 타율이 2할 5푼도 못되는 박재용이 수상했다. 타격이 좀 되는 선수들은 다른 포지션에서 주전으로 주로 나오다보니 현대 유니콘스윤덕규(0.267의 타율을 기록)와 박재용이 대결하다가 우승 버프를 받은 박재용이 수상했을 정도였다.[37] 이숭용이 홈런을 제일 많이 쳐낸 시즌이다. 주전 1루수였음에도 20홈런을 넘긴 적은 없다.[38] 다만 2004년 시즌 후 무릎부상이 있었다고 한다.[39] 이때 이숭용 뒤로 송지만, 래리 서튼이 줄줄이 붙어 있어서 현대가 홈런 1, 2, 3위를 독식하는 게 아니냐는 설레발도 있었다.[40] 사실 5월 중순까지는 타율이 3할 1푼대로 타격 10위 안에 랭크되어 있었지만 이 해는 예년보다 추락이 일찍 시작됐다.[41] 186센티에 85킬로그램으로 신체조건만 보면 홈런타자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승엽과 타격자세가 비슷했으니…. 어떤 팬은 "이승엽과 이숭용의 공통점은 타격자세와 4월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42] 2011년 9월 28일 업데이트로 레전드카드가 추가되었고 현재는 여러번 재평가 하면서 레어카드 2장이 출시되었다. 소속팀은 현대 유니콘스.[43] 특히 이숭용의 선수 생활 말년부터 현재까지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 등 특정 팀이 꾸준히 한국시리즈에 나가는 현상이 잦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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