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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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원래 광주 일대는 백제통일신라, 후삼국시대까지 무진군(武珍郡), 무진주(武珍州), 무주(武州)[1]로 불렸다. 이두에서 珍의 새김(훈)은 돌, 들로서 우리말로 무돌, 또는 무들이 되며 '물(水)' + '들(野)'의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광주에서 가까운 나주 영산포에도 이두로 水入伊(무들이)라고 읽는 지명이 남아 있다. 광주의 유명한 산인 무등(無等)산 역시 우리말 '무들'을 한자로 옮겨 적은 여러 다른 표기 가운데 하나이며, 무주는 그 약칭인 셈이다. 오늘날 쓰이는 광주(光州)란 이름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그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이다. 왜 광주라 바꾼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이 '석서정기'라는 책에서 광주를 가리켜 "光之州"라 언급한 것으로 미뤄볼 때 빛의 고을이란 의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다시 우리말로 푼 빛고을이란 이름도 많이 쓴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면 견훤이 처음에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완산주(지금의 전주시)를 얻자마자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면 1,100년 전쯤에는 전주가 광주보다 번화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사실 조선시대만 해도 전주는 부였고 광주는 목이었다.


2. 선사시대[편집]


광주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영산강 유역을 따라 구석기 유물들이 출토되는데 광주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상무지구의 치평동, 첨단지구 산월동, 철도이설 구간인 매월동 등의 구릉상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어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 본다. 또한 매월동과 풍암지구 등에선 고인돌의 존재가 확인되어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삼한시대[편집]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는데[2], 광산구 첨단지구에는 일본전방후원분이 있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양국의 교류가 삼한의 성립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주로 서강대), 반도 일본어설[3]을 인정하는 학교(주로 서울대)에서는 야요이인의 조상 중 다른 후손이 건설했다는 견해도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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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일본식 전방후원분, 장고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4. 삼국시대[편집]


이후 백제가 마한을 복속해 나가면서 광주 역시 백제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백제 3주의 하나인 무진주(武珍州)라 불렸다. 무진주는 그 직할에 미동부리현(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했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완전히 직접 지배로 편입시키기 위해 키운 곳이 다름아닌 이 무진주, 즉 오늘날의 광주 일대였다. 이미 침미다례 내부에선 친백제 세력인 나주 일대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였으나, 백제의 진정한 의도는 침미다례 세력 자체의 해체 및 직접 지배화였기에 무진주를 별도로 지원한 걸로 보인다. 천안 청당동의 옛 목지국 세력을 무력화할 때 용원리 세력을 지원하면서, 그와는 별도로 청주 일대를 전략적으로 키워주었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5. 통일신라 ~ 후삼국시대[편집]


통일신라 역시 서남해 일대의 중요 거점으로 무진주를 인식하여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이름을 개칭하고, 도독부를 설치하여 오늘날 전남 일대인 15군 34현을 관할하는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통일신라 입장에선 백제 시절의 행정망 계승이었지만 나주 세력 입장에선 영 재미 없는 결말이었다. 고려의 한반도 재통일 이래로 나주와 광주는 광역행정 구역상 거의 한덩이로 묶여 취급되었고 이는 천 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기에, 현대 한국인들 입장에선 이런 광주 VS 나주 구도가 영 생소하겠지만 적어도 이 시대에 두 지역은 수백 년 동안 대립 중인 관계였다. 장보고의 청해진에서도 염장이 무진주 출신이었기에, 주로 나주 및 그 근처 사람들로 구성된 나머지 청해진 사람들과 관계에 어색한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지적이 있을 정도.[5]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의 혼란한 말기에 서남해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고 온 견훤은 서남해 일대 해적과 해상호족들을 장악한 후 진성여왕 6년에 무진주를 점거한 뒤, 완산주(오늘날의 전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무진주를 기반으로 후백제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광주 VS 나주의 오랜 대립은 왕건과 견훤이라는 매개를 통해 아예 전쟁까지 치르는 뜨거운 결말로 치닫게 된다.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다만 이러다보니 얄궂게도, 후백제는 오늘날 나주시의 동쪽 절반을 깊이 장악한 반면, 고려는 오늘날 광주광역시의 서쪽 절반을 내내 석권하여 서로 중요 지역을 절반씩 사이좋게 교환한 형국이 형성되었다. 물론 서로 협정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 하도 무력으로 치고박고 하다보니 자연적으로 국경이 그렇게 형성되고 만 것. 이후 고려의 후삼국 재통일로, 마한 시절로까지 소급되는 나주와 광주 사이의 오랜 대립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광산구 지역은 이때까진 동부(무진주)와 별개 고을로 쳐서 여황현(艅艎縣, 운수동 일대), 용산현(龍山縣, 복룡동 일대)이 따로 설치되었다.

6. 고려시대[편집]


고려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 태조는 940년, 통일된 영토의 행정체제를 개편하면서 무진주의 이름을 광주로 고치고 그곳에 도독부를 설치했다. 그후 고려 성종 14년에 관제개혁으로 전국을 3경 4도호부 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했다. 이 개혁으로 오늘날의 전남 일대를 해양도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현재 영암군)에 설치했고 광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이때 광주의 이름을 해양현이라 개칭했다. 고려 고종 때는 기주라 칭하다가 충렬왕 때 다시 무주로 개칭하는가 하면 충선왕 때에 화평부, 공민왕 때에 무진부, 다시 공민왕 22년인 1373년에는 광주목 등으로 지명과 행정 지위가 자꾸 바뀌었다.


7. 조선시대[편집]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전라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했다. 그런데 세종 12년 노홍준이라는 자가 광주목사 신보안을 구타했다는 이유로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문종 1년에 광주목으로 다시 회복되었지만 비슷한 사건 등으로 성종 20년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연산군 1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회복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조대와 숙종대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고종 32년인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나주부에 속한 광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전라남도청을 나주가 아닌 광주에 둠으로서 전라도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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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광주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위쪽의 담양군 대전면 일대는 원래 광주 땅이었다가(대치면, 갈전면), 1914년 담양군으로 넘어갔다.


8. 일제강점기[편집]




일본어로는 코슈(Kōshū)라고 독음되었다.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그나마 조용한 동네였으나 1896년 나주[7]를 대신해 전라남도청이 들어서게 되면서 성벽을 부수고 확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본정(光州本町, 현재의 금남로)이 들어서고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구한말 의병 또한 많았는데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지방제도를 발표하고, 이에 따라 광주읍성 안쪽인 성내면(충장로, 금남로 일대[8])과 성밖의 기례방(오늘날의 대인동 일대)·공수방(오늘날의 수기동 일대)·부동방(오늘날의 서석동 일대)의 3방을 합해 광주면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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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광주군의 행정구역 상황

이후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15개 면으로 재편했다.

이후 1923년 서방면[9], 효천면, 지한면의 각 일부를 광주면에 편입하여 시가지를 확장한 후, 1931년 읍(邑)제 실시에 따라 광주면은 광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운동의 여파로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가 동맹휴학을 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1931년 우치면과 본촌면이 지산면으로 통합되었다.

1935년 서방면, 효촌면, 지한면, 극락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었으며[10], 효천면과 지한면이 효지면으로 통합되고, 광주군의 잔여지역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1937년 광산군 송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9. 8.15 광복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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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 당시 광주부와 광산군의 행정구역 상황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 194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부는 광주시로 개칭되었고, 나주군 본량면, 삼도면, 평동면이 광산군에 편입되고 광산군청을 광주 시내(현 동구 대의동)에서 송정읍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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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광산군 극락면, 서방면, 석곡면[11], 효지면이, 1957년 11월 지산면, 서창면[12], 대촌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어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한다. 그러나 1963년 서창면과 대촌면은 다시 광산군으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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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서창면, 대촌면이 광산군으로 환원된 이후의 행정구역 상황

1973년 구(區)제가 실시되어 동구서구의 2개 구가 설치되고, 1980년에는 동구와 서구의 각각 일부를 떼어 북구를 신설했다.[13]


10. 5.18 민주화운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5.18 민주화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주의 역사 중 현대사 부분은 5.18 민주화운동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980년 5월 27일을 기해서 완전히 시민군과 계엄군 간의 전투는 중지되었으나, 이미 광주는 희생자들의 시신들을 화장하고 장례를 치르느라 여유있는 날이 없었고 현재는 최소 40대 중반[14] 이상의 광주 시민들에게는 큰 아픔을 남겼다. 이후 1986년까지 정부와 방송, 언론기관은 보도지침 때문에 광주에 대한 일상을 평화롭다고 선전하며 실체를 은폐하려 들었다. 그러나 광주와 전남 일대에서 일어난 일련의 학살 소동에 대한 소식은 민주화 운동가들, 천주교 재단과 1982년 광주 5.18 유가족들의 국회의사당 앞 집회로 인하여 전국의 대학교 및 국민들에게 그 실체가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는 서독 기자였던 위르겐 힌츠페터가 목숨까지도 걸고 광주에 잠입하여 5.18 당시의 상황을 취재하는데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전 세계로 광주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사실상 전두환 정부는 대외적으로도 빼도박도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오죽하면 1980년대 미국 반공정책의 대명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마저도 전두환 대통령에게 5.18의 원인 중 하나인 김대중 구속을 이유로 들며 김대중을 석방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한미간 정상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어쨌든 그 이후 1986년까지 재빠른 재건을 거듭하며 직할시로의 승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1. 5.18 민주화운동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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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인사 · 통일주체국민회의
여당
민주정의당
정책 및 방향
3S 정책 · 2기 지하철 계획 · 언론통폐합 · 삼청교육대 · 녹화사업 · 서울 올림픽 유치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타임라인
1980년
12.12 군사반란 · 서울의 봄 · 사북사건 · 5.17 내란 · 5.18 민주화운동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 동명목재 공중분해 사건 · 미스유니버스대회 폭파음모사건 · 사회정화운동 실시 · 공직자 숙정계획 원풍모방 노조사수투쟁 · 노동계 정화조치 계엄포고 제13호(삼청교육대) · 방송자율정화방안 발표 · 중화학공업 1차 투자조정 조치 · 만화정화방안 발표 · 중화학공업 2차 투자조정 조치 · 10.27 법난 ·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 언론통폐합 ·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 ·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림 사건 ·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 · 대청댐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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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당구장 여주인 피살사건 · 전국민주학생연맹 결성 ·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 한수산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 · 아침방송 시간대 부활 · 국풍81 개최 · 학림 사건 · 아람회 사건 · 윤경화 보살 피살사건 · 전민노련/전민학련 사건 · 교정시설경비교도대 창설 · 해외여행 자유화 첫 실시 · 부마고속도로 개통 · 학사장교 도입 · 학력고사 시행 · 야간자율학습 시행 · 대구/인천 직할시 승격, 부림사건 · 무림파천황 사건 · 박상은 여대생 피살사건 · 서울올림픽 개최 확정 · 금강회 사건 ·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 확정 · 대학생불교연합회 노동야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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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자율화 조치· 야간통행금지 해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 · 한국콘트롤데이타 노동쟁의 · 제주 C-123 추락사고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한국프로야구 개막 · 의령 총기난사 사건 ·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제1차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 정부 제2청사 개청 · 녹화사업 · 오송회 사건
1983년
함주명 간첩조작 사건 · 북한 공군 이웅평 귀순 · 천하장사 씨름대회 개막 ·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 K리그 개막 ·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 김영삼 보름달 사건 · 명성그룹 사건 · 야학연합회 사건 · 영동개발진흥 사건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농구대잔치 개막 · 삼성전자 64K D램 개발 · 학원자율화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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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아호텔 화재사고 ·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개막 · 정치활동 규제자 2차 해금 · 청계피복 노조 합법화 투쟁 ·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결성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 대우어패럴 노조 탄압 · 정래혁 투서 사건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결성 · 목동주민 철거 반대투쟁 · 전두환 방일 반대투쟁 · 1984년 한강 대홍수 · 함평 무안 농민대회 · 청량리경찰서 여대생 성추행 사건 · 전두환 대통령 방일 ·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개장 · 민주화추진위원회 결성 · 박영두 의문사 사건 · 민주통일국민회의 결성 · 망원동 수재 사건 · 학생의 날 부활 ·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농성 · 전국학생총연맹 결성 · 판문점 총격사건 · 박종만 노동자 분신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
1985년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 김대중 귀국 · 국제그룹 해체 사건 · 고려대 김준엽 총장 사퇴파동 ·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출범 ·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 민중교육지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 <말>지 창간 · 구로동맹파업 · 삼민투위 사건 · '힘'전 탄압 사태 · 대구교도소 양심수 집단구타 사건 · 학원안정법 파동 · 홍기일 노동자 분신 ·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 63빌딩 개장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지하철 3호선 개통 · 서울 지하철 4호선 개통 ·부산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충주댐 준공 · 우종원 의문사 사건 ·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점거 농성 ·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
1986년
KBS 시청료 거부 운동 · 개헌 서명운동 개시 · 서울대 졸업식 집단퇴장 사건 · 박영진 노동자 분신 ·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 · 구국학생연맹 사건 · 전방입소 거부투쟁 ·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 인천 5.3 운동 · 서노련 사건 · <교육민주화 선언> 발표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 신호수 의문사 사건 ·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결성 · 김성수 의문사 사건 ·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 ·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결성 · 보도지침 폭로 사건 · 한강종합개발사업 완료 ·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 화성 연쇄살인 사건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 광주 직할시 승격 · 서울대 대자보 사건 · 유성환 국시론 파동 · 전국노동자연맹 추진위원회(이하 전노추) 사건 · 마르크스 레닌주의당(이하 ML당) 결성기도 사건 · 10.28 건국대 항쟁 · 금강산댐 사건 및 평화의 댐 모금 운동 · 반제동맹당(이하 AILG당) 사건 및 민통련 사무실 폐쇄 ·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 서울개헌대회 봉쇄 · 이민우 구상 · 대한민국 사상 첫 무역수지 흑자
1987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 안산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건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사건 · 제헌의회그룹 사건 · 대전 성지원 사건 · 김만철 일가족 귀순 · 한국민중사 사건 · 한국여성단체연합 결성 · 평화의 댐 착공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서울 택시기사 연대파업 · 4.13 호헌조치 ·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 서울남부지역 노동자연맹 사건 · 서대협 결성 · 서머타임제 실시 · 광양종합제철소 준공 · 공기업 민영화방안 확정 · 강우확률예보제 실시 ·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 6월 민주항쟁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 6.29 선언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문화예술 자율화 대책 · 금지곡 186곡 해금 · 영화 시나리오 사전심의 폐지 · 출판활성화조치 실시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 독립기념관 개관 ·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 장의균 간첩조작 사건 · 한국여성민우회 결성 · 민족문학작가회의 출범 · 전교협 결성 · 신민주공화당 창당 · 평화민주당 창당 · 언론기본법 폐지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 KBS 별관 점거농성 사건 · 제13대 대통령 선거 · 중부고속도로 개통 ·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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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광주직할시 및 송정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파일:광주직할시 휘장(1986-1987).svg
광주직할시 승격 직후 1년 동안 사용한 휘장

파일:전라남도 광산군 휘장(광주편입 전까지 사용).jpg
광주직할시 편입 전까지 사용한 전라남도 광산군 휘장[15]

파일:광주광역시 휘장(1987~2000).svg
1987년 이후 2000년까지 사용한 휘장[16]

1986년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광산군 송정읍 역시 송정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88년 광산군과 송정시 전역을 광주직할시에 편입하고 광산구를 설치함으로서 송정시는 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7]

1995년 직할시광역시로 이름이 변경되면서 광주직할시가 광주광역시로 개칭되고, 서구에서 남구를 분리했으며, 광산구 서창출장소(구 광산군 서창면)를 서구에, 대촌출장소(구 광산군 대촌면)를 남구에 편입했다.[18] 2011년 10월 북구 동림동과 운암동 중 하남대로 이남 지역이 서구에 편입되어 동천동이 되었으며, 이외에도 각 구마다 자잘한 경계조정이 있었다.

2016년 현재 5자치구 90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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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북도에 있는 무주군과는 한자가 다르다. 여기는 한자가 茂朱로, 무주(武州)가 이미 광주로 바뀐 후에 무풍현(茂豊縣)과 주계현(朱溪縣)의 무와 주를 따서 만들었다.[2] 구사오단국, 또는 불미국이라고도 한다.[3] 가야지역에도 일본 이름같은 나라들도 있다.[4]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 이 야요이인이다. 그러니까 일본인의 조상 중 일부 후손은 열도로 건너가게 되었고, 다른 후손은 한반도에 남아 야요이식 고분, 즉 일본식 고분을 건설했을 것이란 견해이다. 하지만 전방후원분은 일본 기나이 지방에 초기부터 그 발전 과정의 드러나 있는 반면 전남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후기의 것들이 대부분이다.[5] 문안식 교수의 호남인의 기원과 문화원형 참조.[6] 정확한 과정을 설명하자면, 단발령으로 인해 의병이 봉기하고 나주군수를 살해하면서 관찰사가 광주로 피신갔으며, 차후 의병이 없어져도 나주로 안 돌아갔기에 광주에 도청이 생긴 것이다.[7] 나주는 고려 혜종의 외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대읍이었고 양반이 많아 일제에 잘 순응하지 않았다.[8] 지금의 충장로1~3가, 금남로1~3가, 궁동, 대의동, 광산동, 황금동이 해당된다.[9] 여담으로 김태촌으로 유명한 조직폭력배 이름인 '서방파'는 이 면의 이름을 딴 것이다. 김태촌이 이 곳 출신이기 때문.[10] 다만 전라남도 내에서는 목포보다 부 승격이 늦다. (목포는 일찌감치 부로 승격) 물론 이거는 초창기의 부(府)가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개항장 위주로 지정되어서 그런 것이다.[11] 덕의리, 충효리, 금곡리는 담양군 남면(현 가사문학면) 소재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따로 그쪽에 편입되었다가, 2년 후인 1957년 11월 다시 광주시에 편입되었다.[12] 단, 송대리는 광주시에 편입되지 않고 동곡면으로 편입되었다.[13] 이와 동시에 양림동, 방림동, 봉선동이 동구에서 서구로 넘어갔다.[14] 43~46세[15] 광주직할시로 편입 이후에도 광산구 휘장으로 한동안 사용했다.[16] 2000년 10월 31일까지 사용했다. 2000년 11월 1일부터 현재의 휘장을 사용 중이다. 이 휘장은 직할시 시절 동구의 휘장과 같다.[17] 그로부터 광산구 농어촌 지역은 6년 후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에 따라 지원된 각종 혜택이 중단되고 주민들의 세금 부담마저 가중됐다며 1994년1999년 두 차례 광산군 환원 운동이 있었지만 광산군으로 환원에 대한 방식이 다르고 광주광역시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행동으로 끝내 무산되면서 부산, 대구, 인천, 울산, 세종과 달리 행정구역적으로까지 도농복합시로 이루지 못했다.[18] 이들 지역은 이미 1957년에 광주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광산군으로 환원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