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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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910. 교동보통소학교 졸업
- 1910. 충무로 일출소학교(現 서울일신초등학교) 5학년 편입
- 1912. 일출소학교 졸업
- 1913. 일본 정칙 영어 학교(現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입학
- 1915.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 중퇴 (2학년)
- 1917. 신아동제사 회원[6]
- 1919.3.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경기도 지역구, 21세, 최연소)
- 1919.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재선 의원
- 1922. 영국 우드블록 대학 영문학 과정 중퇴
- 1922. 영국 글래스고 스캘리쉬 학교 입학
- 1923. 영국 버밍엄 퀘이커 학교 입학
- 1924.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 1930.12.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 졸업
- 1945.8.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위원
- 1945.9.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 1945.9.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위원, 중앙집행위원,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45.10.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 겸 행정자문위원 겸 금융경제위원회 고문
- 1946. 《민중신문》 사장
- 1946.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
- 1946.6. 민족통일총본부 위원, 협의원
- 1947.2. 남조선과도정부 농림부, 상공부 고문
- 1947.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
- 1947.10. 한영협회 회장
- 1948.5. 제헌 국회의원 선거 후보 (충남 아산, 한국민주당, 낙선)
- 1948.5.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비서실장
- 1948.12.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발기인
- 1948.12. 제2대 서울특별자유시장 (1948.12.15 ~ 1949.6.5)
- 1949.2. 민주국민당 창당발기인,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49.3.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 1949.3. 고려역도구락부 고문
- 1949.6. 제2대 상공부장관 (1949.6.6 ~ 1950.5.9)
- 1950.5. 민주국민당 원내총무
- 1950.5. 제2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충남 아산, 민주국민당, 낙선)
- 1950.6.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 1950.11.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 1950.12. 대한적십자사 총재, 피난민구조대책협의회 부회장
- 1951. 상이군인신생회 회장
- 1952. 한정협회 회장
- 1952. 한국-덴마크 문화협회 이사장
- 1954.5.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후보 (서울 종로 갑, 민주국민당)
- 1954.5. 제3대 민의원 (초선)
- 1955.9. 민주당 중앙위원, 중앙당 의원부장
- 1955.11.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56.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58.5.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후보 (서울 종로 갑, 민주당)
- 1958.5. 제4대 민의원 (재선)
- 1959. 민주당 상임위원
- 1959.9. 민의원 외교위원회 상임위원
- 1959.11.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최고위원
- 1959.12. 민주당 원내최고위원
- 1960.7.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후보 (서울 종로 갑, 민주당)
- 1960.8. 제5대 민의원 (3선)
- 1960.8.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60.8.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63.7.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정당, 낙선)
- 1963.11. 제6대 국회의원 (민정당, 전국구)
- 1966.2. 신한당 창당발기인, 운영위원회 위원장
- 1966.3. 신한당 총재
- 1967.2.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신민당, 낙선)
- 1971. 국민당 창당발기인, 총재
- 1971.2.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사퇴)
- 1980. 국정자문회의 위원 (전두환 정부)
- 1981.4. 국정자문회의 위원 (재선)
- 1985.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 1985.3.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85.12. 미국 US 국제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86.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 1988.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
- 1989.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
- 1990.7. 인촌문화상 수상 (사후)
3. 일생[편집]
자세한 내용은 윤보선/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떠나 에든버러 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7] 1932년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칩거하다가,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신문사를 운영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맡기도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4.19 혁명 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8]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9]
이후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제1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정면대결하여 15만여 표 차이로 석패하였고,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다시 야당을 이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를 상대로 다시 대결하였으나 2위에 그친 뒤, 유신정권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고,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80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3.1. 장면 내각[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면 내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보통 최규하와 함께 존재감 없는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아무래도 2공화국이 1년밖에 유지하지 못한 단명한 정부인데다, 2공화국이 의원내각제 체제이다보니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인지도가 밀릴수밖에 없고, 윤보선 본인은 상징적 국가원수로 즉위했으니 '실권없는 대통령'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윤보선 대통령을 빼고 장면 국무총리를 넣는 경우가 많다.[10]
긍정적 평가로는 도덕성, 민주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박정희 정권에 맞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등, 활발하게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때와는 달리 전두환 정권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변절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또한 부정적 평가 에 경우 에는 결단력 이 떨어진다는 것 이였다.
5. 선거 이력[편집]
6. 소속 정당[편집]
7. 어록[편집]
7.1. 제4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영예의 당선을 얻은 이제 나의 감격이 선서식을 거행하는 오늘에는 영광된 의무감과 무거운 책임감으로 변해졌읍니다.
비록 엄숙해야 할 선서식 전이기는 하나 감격과 책임감이 교착되는 이 순간에 있어 벅차오르는 소회의 일단을 간단히 말씀드리려는 덧을 허물치 마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첫째, 나같이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을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회의원제공에게 송구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아울러 올리는 바입니다.
둘째, 내가 사랑하여 마지않는 국민제위에게 방금 정중하게 선서한 바와 같이 국민의 복리를 위해서는 내 신명을 걸기로 했거니와 이제부터는 국민을 위한 정부라기보다도 진실로 국민의 정부이오니 현명하신 국민의 건설적인 비판과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오늘의 난국을 타개할 도리가 없는가 합니다. 오늘날 정치의 책임이 행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인 국민에게도 분담되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셋째, 앞으로 구성되는 정부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정책을 수행해야만하겠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해서라도 먼저 적재적소의 인물본위로 내각의 자세를 갖추고 슬기로운 지혜와 향기로운 인화로써 혼연일체의 행정의 미를 거두어야 하겠읍니다.
거룩한 4월 혁명이 1개 정당의 집권의 전리품이 아니요 다대수 국민의 민권탈환의 금자탑이요 빈곤해방의 기점이라 할 것인데 오고가는 집권보다는 하나는 둘로 그리고 셋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정당이나 단체보다도 오직 하나밖에 다시 없는 국민과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국가를 위해서 그 모두를 다 바치는 것이 젊은 학도들이 흘린 고귀한 피값을 보상하는 길인가 합니다.
4월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 정부는 이제는 국민이 다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령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경제적 자유에 뿌리를 박지 않는 정치적 자유는 마치 꽃병에 XX꽃 힌 같이 곧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피를 무서워했던 독재는 정명코 물러났기에 오늘 우리의 정치활동은 자유로웠읍니다. 그러나 독재에 따라다니던 경제부패는 아직도 그대로 남았어야 소탕작업도 노정이 요원하고도 험준한 데다가 어제는 탕진될대로 탕진된 나라살림에 누란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읍니다.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 못하는 날에는 한날 내각의 수명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운명이 또한 여기에 달려있다 하겠읍니다.
정부의 시책은 무엇보다도 경제제일주의로 나가야하겠고 현명한 국민에게는 인핍과 절제 그리고 창의와 노력이 요청되는 바입니다. 행정부는 족재가 뿌렸던 반민주성과 부패독소를 조속히 제거하고 민주주의 원치학에서 과감한 혁신행정을 수행해야 하겠읍니다.
자유 진영의 두통거리라는 낙인까지 찍힌 이 정권 외교는 무정견·무정책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세계 우방으로부터 고아취급을 받아왔던 것은 가슴 아팠던 사실입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보아 항상 주변 강대국 사이의 세력관계에 따라 국가 운명이 좌우되게 마령인 처지에다가 설상가상격으로 국내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힘의 진공상태를 빚어낸 까닭에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른 한국의 자태는 우리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북아 국제평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을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국민경제에 직결되는 외교행정면에 까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적 특징을 발휘하여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 독재적 정책을 합리화하고 국내의 불평불만을 외우로 돌려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낡은 방법만을 상요했던 기만적 외교로 일관하여 왔읍니다.
외교란 원래 협상과 거래를 사명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한 국가의 실질적 이익을 중심으로 타국과의 대립되는 이익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외교라 하겠읍니다. 우리는 새로운 외교정책과 새로운 외교체제를 갖추어 새로운 외교활동으로 재출발해야 하겠읍니다. 이외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 너무도 많습니다만, 오늘은 간단히 인사 말씀으로 대신하겠읍니다.
1960년 8월 13일 대통령 윤보선
8. 각종 타이틀[편집]
- 최장수 대통령, 연령이 검증이 되는 한국사 지도자들 중 장수 2위. 향년 92세.[25]
- 유일하게 기념우표에 새겨지지 않은 대통령.[26]
- 유일한 충청도 출신 대통령.
- 유일한 상징적 국가원수[27]
- 유일한 의원내각제 대통령
-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28]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한 영국 대학교 출신.
- 역대 대통령 중 최고 순위의 대학교 학사 출신 (에든버러 대학교[29] ).
- 최초의 광역자치단체장(서울시장)[30]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국무위원(상공부장관) 출신 대통령
- 유일하게 대통령 퇴임 후에도 현역 정치인으로 계속 활동한 대통령[31][32]
- 최초이자 김대중과 함께 둘뿐인, 사별 이후 재혼 경험이 있는 대통령[33]
- 유일하게 조선시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 임시정부, 제1공화국~제6 공화국을 모두 체험한 대통령
- 이승만과 함께 둘 뿐인 19세기에 출생한 대통령
- 20세기에 사망한 대통령 중 가장 나중에 사망한 대통령[34]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서 지낸 기간이 세 번째로 긴 대통령(28년 4개월)[35][36]
9. 기타[편집]
-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쓴 글씨 중에서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이며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
-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다. YS와 DJ의 대결구도는 사실상 윤보선과 장면[37] 세력, 즉 신구파의 갈등에서 기원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김영삼이 정계에 뛰어들게 한 '정치적 아버지'는 6.25 전쟁 때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이며, 이후 조병옥을 거쳐 유진산의 정치적 적자가 되었다. 윤보선과 친해져 민주당 구파의 후계자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나, 윤보선보다는 유진산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 YS가 장면과는 초면부터 확실히 선을 그은 것은 맞다.
- 1980년대 들어서 민주화운동에서 멀어지고, 군사정권에 협조적인 태도로 돌아서면서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38] 의 일원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다른 3명과 마찬가지로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 성향이 큰 영향을 끼쳤을 꺼라는 추측이 많다.
- 재임 기간 및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 문서로.
- 직계 가족으로는 배우자 2명(전처 여흥 민씨[39] , 후처 공덕귀)와 2남 2녀가 있다. 이중 딸들은 여흥 민씨와의 사이에서, 아들들은 공덕귀와의 사이에서 제각기 태어난 자녀들이다.
- 음악인 겸 방송인인 남궁연이 윤보선의 외손자라는 설이 한때 나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남궁연은 윤보선의 동생인 윤완선의 외손자이다. 고로 남궁연에게는 윤보선이 외종조부(外從祖父)가 된다.
-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고택은 고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며,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야외 음악연주를 비롯한 문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 윤보선 대통령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를 경험한 유일한 대통령이다.[40]
- 출생년도가 19세기인 마지막 대통령이다.
- 그의 퇴임 이후 60년 만에 윤씨 대통령이 두번째로 나오게 됐다. 따라서 각종 정치 커뮤니티에서는 노태우를 원조 노짱 혹은 1대 노짱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 처럼 윤보선을 원조 윤카, 1대 윤카라는 식으로 간혹 부르기도 한다.[42]
10. 저서[편집]
- 구국의 가시밭길: 나의 회고록 - 한국정경사. 1967.
- 외로운 선택의 나날: 윤보선 회고록 - 동아일보사. 1991. 2012년 해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가 복간했다.
11. 참고/관련 문헌[편집]
- 해위 윤보선: 생애와 사상 - 김명구 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1.
12. 관련 단체[편집]
- (사)해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1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9년 KBS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선 배우 원근희가 연기했다.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과 1993년 제3공화국,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1998년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 배우 이순재가 윤보선 역할을 4번 소화하였다. 특히 제2공화국의 경우 윤보선의 생전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소감을 물으니 '연기를 점잖게 잘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 1994년 4월 17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최명수가 연기했다.
14. 둘러보기[편집]
1962.3.23 대통령 하야.[15] 1965.08.05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16] 정확히는 출마 선언은 하였지만 박기출 후보에게 양보하는 모양새로 결론이 났고 최종 후보로 박기출 후보가 등록이 됐으니 공식적으로 후보 등록 후에 사퇴를 한 것은 아니다.[17] 조선민족당과 신설 합당[18] 대한국민당과 신설 합당[19] 민주당에 흡수 합당[20] 대통령 취임으로 인한 탈당[21] 민주당과 신설 합당[22] 당내 노선 차이[23] 민중당과 신설 합당[24] 당내 노선 차이[25] 연령이 확실히 검증되는 인물 중 윤보선보다 장수한 한국사의 지도자는 고구려의 장수왕 밖에 없다.[26]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표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취임기념우표에 쓸 사진을 제공하지 않았고 결국 4대 대통령 취임기념우표 대신에 새정부수립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27] 다만, 북한을 국가로 본다면 한반도 최초로는 북한이 먼저 김두봉, 최용건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둔 적이 있다. 김일성이 국가주석이 되어 폐지되었으나, 김일성 사후 다시 김영남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다가 현재는 완전 폐지된 상태다. 더 앞서서는 대한제국 시기에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한 바 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8] 단, 헌법에 따라 임기 중에는 무소속이었다.[29] 에든버러 대는 옥스브릿지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는 학교이다.[30] 윤보선이 서울시장을 할 때는 관선이었고,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 출신은 이명박이다.[31] 대통령 사임 후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5대 대선, 6대 대선에도 도전했다.[32] 사실 어떻게 보면 윤보선이 유일한 게 당연하다. 윤보선은 역대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상징적 대통령이었고 임기도 짧았기 때문에 하야 후에도 정치를 계속할 틈이 있었다. 전임자 이승만은 4.19로 하야하고 하와이에서 은둔하다가 죽어서야 고국에 돌아왔고 하야할 당시 85세의 고령이라 더 하기도 힘든 나이었으며, 후임자 박정희는 소원대로 종신 대통령을 했다. 최규하는 원래부터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평범한 외교관 출신이었으나 국무총리 재임기와 10.26이 겹치면서 우연히 대통령이 된 케이스라 임기기간동안 대통령보다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고있었으며 5.17 내란으로 하야한 후에도 정치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퇴임이후 권력행사를 시도했다가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를가고 이후 노태우가 퇴임한 이후 김영삼에 의해 손잡고 깜빵에 들어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70세, 79세의 고령이라 퇴임 후에도 정치를 할 여력이 없었다. 노무현, 이명박은 임기 말에 레임덕에 걸려 퇴임 후 말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전자는 총선 재출마도 생각했었으나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후자는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박근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며 문재인 역시 70세를 바라보는 고령인데다가 본인부터 남은생을 조용히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33] 이승만과 박정희는 이혼 이후 재혼이다.[34] 20세기에 사망한 대통령은 윤보선, 이승만, 박정희이다.[35] 1위는 33년 8개월의 전두환, 2위는 28년 8개월의 노태우. 그러나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지 않은 대통령 중에서는 윤보선이 가장 길다.[36] 다만 예우에 관한 법이 1969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예우 자체는 최규하가 윤보선보다 오래받았다.[37]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38]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용.[39] 민영철(閔泳喆)의 딸이다. 본명은 불명.[40]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허정 총리도 조선시대에 태어나 6공까지 생존했다. 그래서 허 총리의 별명이 國老일 정도.[41] 더군다나 그 당시엔 지금과 비교하면 나이에 비해 훨씬 들어보였다는 걸 가정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42] 이 외에 특기할 점이 있다면 윤석열의 부친이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이라, 본인이 충청권 출신인 윤보선과 함께 둘 다 충청권에 연고가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