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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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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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신규식
申圭植[* 申植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파일:신규식.png[1]

이명
신정(申檉)·신성(申誠)·신목성(申木聖)

공집(公執)

예관(睨觀)[2]·여서(余胥)
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본관
고령 신씨[3]
출생
1879년[4] 1월 13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 인차리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5]#
사망
1922년 9월 25일 (향년 43세)
중화민국 상하이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8호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79년 1월 13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 1845 ~ 1918. 6. 2)와 어머니 전주 최씨(? ~ ?. 9. 30)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6]

1895년 상경하여 한성부 중서 정선방 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거주하였으며, 1896년 4월 20일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고 1900년 9월 14일에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2년 7월 6일 대한제국군 육군 보병 참위(參尉)에 임관하여 1903년 3월 22일 대한제국군 진위대 제4연대 제2대대에서 견습하였으며 1903년 9월 20일 졸업하였다. 1904년 4월 26일에는 진위대 제4연대 제1대대에서 견습하였고 1904년 10월 4일에는 육군무관학교에서 견습하였다. 1905년 3월 2일 6품에 승륙(陞六)되었고 4월 5일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3대대에서 견습했다. 1906년 1월 23일 정3품에 올랐고 4월 22일 시위대 제3대대에 보임되었다.#

부위(副尉)로 승진하여 재직하던 중 1905년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음독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목숨은 건졌고 대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 대한협회 등 애국 계몽 단체에 참가하였고 중동학교·청동학교(淸東學校)·문동학교(文東學校) 등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 대종교에 귀의하며 광산을 경영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 자살을 기도했으나 나철의 만류로 재차 목숨을 건졌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후 쑨원, 쑹자오런, 천두슈, 천치메이[7] 등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한국인으로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에서 줄곧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쑨원의 호법 정부와 그를 계승한 장제스중국국민당이 지지하게 된다. 군사 교육도 장려하여 한국 청년들을 중국 각지의 군사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는데 독립운동가 이범석을 쑨원에 소개해 운남육군강무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신규식이다.

파일:신규식_1920.jpg
1920년의 신규식.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앞서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14개조의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한 이후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으며 이에 병상에서 25일간 절식을 하다가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얼마 뒤 병세가 악화되어 1922년 9월 25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별세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10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68년작 영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배우 박경주가 연기했다.
  • 1982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에서는 배우 김무생이 연기했다.
  •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김해권이 연기했다.


4. 여담[편집]



  • 독립유공자 신건식은 그의 동생이며 슬하에 딸 신창희[8] 독립유공자 석린 민필호는 사위, 독립유공자 민영주 지사는 외손녀이다. 독립유공자 신형호는 그의 조카이다. 동생 신건식의 딸 신순호도 독립유공자이며 신순호의 남편이자 조카사위인 박영준은 독립유공자이자 초대 한국전력공사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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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른쪽 눈의 초점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데, 후술하듯 음독자살 시도의 여파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2] 흘겨보다 라는 뜻으로, 자신의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겨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 예관이라고 하였다.[3] 소안공파 25세 식(植) 항렬.[4] 1878년 또는 1880년으로 기재된 정보가 존재한다.[5] 인근의 청용리·행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6] 아버지 신용우는 총 5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 안동 김씨 김병기(金炳箕)의 딸 사이에는 장남인 신정식(申廷植)과 1녀를 두었고, 둘째 부인 영산 신씨 신인모(辛獜模)의 딸과 셋째 부인 연안 이씨 이철익(李哲翼)의 딸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넷째 부인이 바로 전주 최씨로 슬하에 차남 신규식과 셋째 아들 신건식과 1녀를 두었고 다섯째 부인 전주 이씨 이춘식(李春植)의 딸 사이에 넷째 아들 신동식(申東植)과 2녀를 두었다.[7] 천치메이는 장제스가 쑨원 다음으로 존경하는 혁명가이자 친구였다.[8] 아명은 명호이며, 1962, 63년 신문에는 명호로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