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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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교육 과정
4. 동문


1. 개요[편집]


陸軍武官學校. 대한제국에서 신식 군대의 장교를 교육하던 양성 기관. 사관학교이다. 임시 정부 같은 경우에도 육군무관학교를 두긴 했다.

통제영학당을 대한 제국의 해군사관학교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통제영학당은 근대적인 사관 양성 학교이긴 했지만 1893년에 생겨 1894년에 사라졌으므로 대한제국 해군의 사관학교는 아니었다. 즉, 대한제국에 해군사관학교는 없었다.

2. 역사[편집]


1881년 창설된 별기군의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1]는 장교 양성을 위해 사관 생도대를 설치할 것을 조선 왕실에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881년 9월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사관생도를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2월 즈음에는 140명의 사관생도가 교육 중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일어난 구식군의 저항인 임오군란으로 사관생도대는 해체된다.

1883년 조미 수호 조약에 의거 조선 정부는 미국에 군사 교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청나라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1886년 톈진 조약으로 양 군이 물러가자 1888년 미국은 윌리엄 다이(William McEntyre Dye) 준장[2] 등 4인의 퇴역 장교로 구성된 군사 교관단을 파견하였다. 다만 이들 중에 다이 준장만이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커민즈 대령과 닌스테드 대령, 리 소령[3]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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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다이 준장. 이집트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DC에서 경찰청장으로 일했는데 1888년 셰리던 장군이 그를 고종에게 교관으로 추천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교관들이 입국하자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여 다시 사관생도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문제는 근대식 편제 및 장교 계급 체계에 정부 각료와 조선군 내에서 일본식이라며 도입에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근대식 군대 체계가 갑신정변을 이끈 급진개화파들이 일본을 통해 주도적으로 들여온 제도다 보니 갑신정변의 여파로 조선에서 도입을 꺼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연무 공원은 1894년에 일본군청일전쟁 중에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폐지된다. 다만 다이는 1899년까지 고종의 측근에서 군사 업무를 보좌했고 그 해에 미국으로 돌아가 죽었다.

연무 공원이 해체되면서 남은 것은 훈련대의 사관 양성소 뿐이었다. 청일 전쟁 중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기 위해 한성에 주둔하던 친군영과 교전을 벌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 후 김홍집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을 실시하고 일본군 주도하에 새로 군을 편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훈련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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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대는 일본군 중령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 幸彦, 1858년 - 1927년)[4]를 교관으로 두었다. 일본식 교육 제도로 훈련대는 기존의 3군영에서 인원을 징발하여 훈련을 시켰는데 1895년 말까지 6개 대대 7,800명 규모의 상비군을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못 가고 을미사변으로 폐지된다.

1896년 1월 11일에야 육군무관학교의 전신 무관학교가 세워진다. 사실 대한제국군이란 이름은 아직 아니었지만 일단 신식군의 장교를 양성한다. 아관파천이 일어나 한동안은 유명무실했지만 고종이 환궁한 뒤에 타군의 개입을 받지 않도록 운영한다. 비록 러일전쟁으로 곧 실패하지만 말이다. 이 무관학교는 다섯 명을 임관시켰다. 사관생도는 무관학도라 불렸다. 1898년에 정비하여 육군무관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교직원 숫자는 교장 1인에 교관 4명, 조교 10명, 번역관 및 주사 등으로 총 20명 수준으로 사관학교라기엔 다소 작은 규모였다. 1898년 6월에 1기 200명을 모집했는데 1,700명이 지원하였다. 입교일은 다들 며칠씩 차이가 났는데 1기의 임관일이 1900년 1월 19일로 정해진 걸 볼 때 1년 6개월 정도의 교육 기간으로 현재의 3사관학교보다 짧았다.

1899년 11월엔 다시 법령이 바뀌어 교직원이 39명으로 늘어났으며 응시 연령도 낮아졌다. 그리고 현재의 생도대에 준하는 학도대(學徒隊)를 설치하였다. 1900년 1월 19일에 장연창 등 128명의 무관 학교 1기가 졸업 시험을 통과하여 참위로 임관하였다.

1900년 9월에는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교직원을 70명으로 늘렸으며 학도대 밑에 중대 몇 개를 추가해 인원을 늘릴 것을 시사했다. 오늘날의 교육을 맡은 교수부와 훈육을 맡은 생도대처럼 무관 학교의 교육 체계를 교관단과 학도대로 이원화하였다. 교장도 초기에는 영관급이 맡았으나 이 즈음에 가서는 참장[5]까지 상승한다. 다만 국운이 흔들리는 탓인지 무관학교를 이탈하는 인원도 자주 나와 1900년 9월엔 학도 집단 이탈로 학교장 대리인 백성기 참장, 학도대장 이희두 참령, 학도대 중대장 신우균, 민영재, 조의범 정위, 당직 사관 김성계 참위 등이 직위 해제되었다.

1909년 폐지될 때까지 2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500명을 배출했다는 곳도 있다. 이 중 14명은 한일합방 당시에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

이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중 일부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참가하여 독립군양성에 활약하였으며, 여기서 나온 졸업생들이 나중에 광복군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제국군의 연결성을 찾을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폐교될 당시 무관학교 교육생들은 일본육군 유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 26~27기로 들어갔다. 홍사익 중장, 이응준 대좌, 유승렬 대좌, 안병범 대좌, 신태영 중좌, 박승훈 소좌(만주군 중교),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등 13명은 일본육사 26기,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위 등 20명이 일본육사 27기로 총 33명이다. 33명 거의 대부분이 일본군 장교로 임관하였고 이들이 해방후 창군 작업을 담당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미군 군사 고문이 자격으로 한국군 창설 작업에 직접 관여한 구일본군 최선임이었던 이응준 대좌가 대표적이다. 당시 군사영어학교에는 일본군 출신 1명, 만주군 출신 1명, 광복군 출신 1명씩이 학생들을 추천하기로 했다. 일본군 최선임 자격으로 참가한 이응준 대좌는 이때 사위인 이형근 일본군 대위에게 군번1번을 부여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통위부장에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동열을 추천하여 관철 시켰고, 이응준 본인은 대한민국 초대육군참모 총장이 되기도 하는등 창군의 실질적인 주역이 되었다.

광복군 출신들은 미군정의 정책에 불참하던 상태라 창군 작업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육군사관학교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이 창군 멤버가 되었는데, 이들을 미군정에 추천하여 선발한 것이 바로 이응준이다.(만군계는 최선임인 구만주군 원용덕 중령이 담당) 결국 창군의 대표적 주역 이응준을 통해 대한제국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연결된 셈이다.

신흥무관학교 -> 일본육사 26~27기로 간 사람중에서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경우는 26기의 지청천, 김경천, 27기의 이종혁등 3인이다.(전역 후 국내에서 민족운동 한 사람도 약간명 존재)

즉, 한국군 창군 과정을 따지고 들어가면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한게 맞다. 하지만 이들 중 일본육사 26~27기로 졸업했던 이들의 상당수(이응준 포함)가 일본 제국주의의 장교였던 점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았다.

3. 교육 과정[편집]


대한제국군 밑에는 교육 기관으로 육군무관학교, 육군유년학교, 육군연성학교 등이 있었다.무관학교는 양성 교육을 담당했고 유년학교는 일종의 JROTC 같은 예비 학교였으며 연성학교는 장교나 부사관의 보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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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훈련대가 폐지되면서 장교 양성 기능은 1896년 11월 11일에 육군무관학교로 넘어갔다. 학도는 18세에서 27세 사이의 청년을 천거(추천)로 선발했다. 교육부가 1904년 2월에 세워지자 교육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에 교육부가 폐지되자 군부에서 지휘 감독했다. 교육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1904년에 육군유년학교가 생기면서 유년학교를 거쳐 무관학교에 들어온 경우는 6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초기에는 한국어로 된 교재가 없어 외국어로 공부했으며 전술학과 화기학, 학술학[6]을 가르쳤다.

4. 동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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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 실록에도 등장한다. 高宗 18卷, 18年(1881 辛巳 / 청 광서(光緖) 7年) 6月 20日(庚戌) 2번째 기사 일본인 호리모도 레이조가 우리 군사들의 교사가 된 것을 일본 외무성에 통지할 것을 윤허하다 統理機務衙門啓: “日本敎師堀本禮造, 向因公使所懇, 方留敎場, 鍊習兵士, 而此合有往復於該國外務省。 請撰出書契, 下送萊館。” 允之。[2] 1831년 - 1899.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고 미군을 전역한 뒤에 이집트군에서 대령을 지내기도 했다.[3] 주일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인물이었다.[4] 을미사변 연루자. 뒷날 초대 가라후토청 장관, 일본군 중장까지 지냈다. 육군대신, 즉 육군 장관을 맡기도 했다.[5] 대한 제국군은 지금의 한국군처럼 장성급이 대 - 중 - 소 - 준 4단계가 아니라 정 - 부 - 참 3단계였다. 준장이 존재하지 않았다.[6] 독도술을 배우는 지형학이나 기초적인 의학, 승마법 등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