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성

덤프버전 :

파일:중앙선거관리위원회 휘장.svg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펼치기 · 접기 ]
중앙선거심사위원회 위원장
초대
김용무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초대
노진설
제2대
조용순
제3대
김두일
제4대
고재호
제5대
이갑성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초대
사광욱
제2-4대
주재황
제5대
김중서
제6대
강우영
제7대
윤일영
제8대
이회창
제9대
윤관
제10대
김석수
제11대
최종영
제12대
이용훈
제13대
유지담
제14대
손지열
제15대
고현철
제16대
양승태
제17대
김능환
제18대
이인복
제19대
김용덕
제20대
권순일
제21대
노정희
제22대
노태악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제5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이갑성[1]
李甲成 | Lee Gap-sung


파일:이갑성.png

출생
1889년[2] 10월 2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서내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
사망
1981년 3월 25일 (향년 91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83호
본관
경주 이씨[3]

연당(硏堂)
재임기간
제5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1962년 10월 24일 ~ 1963년 1월 19일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이기덕, 어머니 파평 윤씨
자녀
아들 이태희, 이용희
학력
경신학교 (졸업)
세브란스의학교 (약학 / 졸업)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의학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단국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
약력
제2대 국회의원 (대구시 병)
제5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서훈
건국공로훈장 복장[1] 수훈

1. 개요
2. 생애
2.1. 친일 의혹 제기와 종결
3. 선거 이력
4. 참고 자료
5. 기타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약사, 정치인. 민족대표 33인의 최연소 인물이자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889년 10월 23일 경상도 대구부 수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배움의 뜻을 두고 서울로 상경해 1906년부터 4년간 경신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난 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5년 동안 약학을 배워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해왔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이 넘게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1990년대에 유행했던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한국 생활을 오래 한 일본인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이갑성은 일본제국 경찰에게 손톱, 발톱을 모두 뽑히는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런데 이갑성 선생은 일본 사람들에게 손톱, 발톱 20개를 뽑히는 고문을 당한 분이다. 같은 일본 사람인 내가 생각해도 정말 너무하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당장 나부터도 내 아버지가 한국 사람에게 손톱 발톱 20개를 남김 없이 뽑혔다면 치가 떨릴 것이다." 물론 이갑성의 사위와 이케하라 마모루는 친분이 있던 관계라는 것(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은 감안하여 생각할 부분도 있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의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상하이에 망명하여 제중약국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여 일생 중 도합 12년 8개월을 감옥이나 유치장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로는 창씨개명을 한 흑역사가 있다.

해방 이후로는 우익계열 정치인으로 활약하여 1945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시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민주국민당 백남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우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해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1969년부터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매년 삼일절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해왔다.

1981년에 사망한 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이갑성의 사회장 영상)

유족으로는 아들 이용희국토통일원장관과 손자 이재명, 손자 필립 리, 이재현 조양국제종합물류 창업주 등이 있다.


2.1. 친일 의혹 제기와 종결[편집]


하지만 생애 설명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일제 말기에 변절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인물이기도 하다. 1967년, 독립운동가이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인 조경한은 대한일보 기고문에서 "이갑성은 친일파"라고 공격했다. 이갑성은 즉각 대한일보를 통해 반박 기고를 하면서 법정공방까지 갔다. 결과는 유야무야로 끝났지만, 1981년 3월 이번엔 이갑성의 사후에 잡지인 <월간자유>[4]에서 1930년대 창씨개명을 하여 밀정활동을 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는 이갑성의 친일 사실 여부와는 별도로 그를 변절자로 단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임헌영 역시 "연구소에서 철저하게 조사하여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갑성의 유족 측은 이런 친일 의혹 공격에 대해 소송이라도 하려니, 정작 친일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A란 사람이 그랬다” “A는 어디갔냐” “B란 사람이 그랬다” “B는 어디 갔냐” “C란 사람이 그랬다” “C는 어디 갔냐” “C는 죽었다” 식으로 귀결되어 최초 의혹을 제기한 사람을 특정할 방법이 없어 소송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에서 심층취재한 결과, 오히려 이갑성은 일본에서 항상 주시하였던 요시찰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30년대까지의 그의 행적은 우익 독립운동가로서 부족함이 없음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다만 뉴스추적은 1930년대까지의 그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변절 여부가 본격적으로 의심되는 1940년대의 행적을 다루고 있지 않다. 옥살이를 하고 창씨개명한 이후인 1940년대의 이갑성의 다소 불투명한 활동에 대해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그가 변절했다고 단정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논란의 이유이다.

2009년에 최종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갑성이 빠진 것으로 보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혹을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그가 변절했다는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병[A]

[[무소속|
무소속
]]

8,263 (23.1%)
당선 (1위)
초선[5]
1951
제2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73 (48.03%)[6]
낙선 (2위)
[7][8][9]
1952
제3대 부통령 선거


500,972 (7.02%)
낙선 (4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대구시 병[A]
17,182 (33.3%)
낙선 (2위)



4. 참고 자료[편집]




5. 기타[편집]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원로배우 이일웅이 연기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존재감은 없으며 그의 호위를 맡았던 김상도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오래 생존한 인물이다. 정부가 주관하는 3.1절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대통령 축사가 있기 전에 독립선언문을 읽었다. 이때 아나운서가 "이갑성 옹(翁)"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만87세인 1977년 3.1절 기념식까지도 참석하였다.


6. 둘러보기[편집]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width=9%><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fff><bgcolor=#d60026> 권동진 ||<width=9%><bgcolor=#d60026> 권병덕 ||<width=9%><bgcolor=#ba4160> 길선주 ||<width=9%><bgcolor=#ba4160> 김병조 ||<width=9%><bgcolor=#d60026> 김완규 ||<width=9%><bgcolor=#ba4160> 김창준 ||<width=9%><bgcolor=#d60026> 나용환 ||<width=9%><bgcolor=#d60026> 나인협 ||<width=9%><bgcolor=#ba4160> 박동완 ||<width=9%><bgcolor=#ba4160> 박희도(日) ||<width=9%><bgcolor=#ff8c00> 백용성 ||
||<bgcolor=#d60026> 박준승 ||<bgcolor=#d60026> 손병희 ||<bgcolor=#ba4160> 신석구 ||<bgcolor=#ba4160> 신홍식 ||<bgcolor=#ba4160> 양전백 ||<bgcolor=#d60026> 양한묵 ||<bgcolor=#d60026> 오세창 ||<bgcolor=#ba4160> 오화영 ||<bgcolor=#ba4160> 유여대 ||<bgcolor=#ba4160> 이갑성 ||<bgcolor=#ba4160> 이명룡 ||
||<bgcolor=#ba4160> 이승훈 ||<bgcolor=#d60026> 이종일 ||<bgcolor=#d60026> 이종훈 ||<bgcolor=#ba4160> 이필주 ||<bgcolor=#d60026> 임예환 ||<bgcolor=#ba4160> 정춘수(日) ||<bgcolor=#d60026> 최린(日) ||<bgcolor=#ba4160> 최성모 ||<bgcolor=#ff8c00> 한용운 ||<bgcolor=#d60026> 홍기조 ||<bgcolor=#d60026> 홍병기 ||
||<-11> ※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인물은 (日)로 표기.
||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1:48:24에 나무위키 이갑성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명은 이상천(李相天). 창씨명은 이와모토 마사이치(岩本正一).[2] 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39세 상(相) 항렬.[4] 박창암에 의해서 창간되었으며 반공을 강조했던 우익계열의 잡지이다.[A] A B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전역 및 중구, 수성구 일부[5] 과도입법위원 경력 있음[6] 결선 투표에서의 결과[7] 제2대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8] 1차 투표 53표 35.10%로 2위[9] 2차 투표 65표 43.05%로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