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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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8세]] ||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 ||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8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8세
Ptolemy VIII Physcon


이름
프톨레마이오스 8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출생
기원전 18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망
기원전 116년 6월 28일 (향년 68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1차
기원전 169년 ~ 기원전 164년[1]
기원전 164년 ~ 기원전 163년[2]
(약 6년)
이집트 파라오 2차
기원전 144년 ~ 기원전 132년[3]
(약 12년)
이집트 파라오 3차
기원전 126년 ~ 기원전 116년[4]
(약 10년)
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
클레오파트라 2세
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
클레오파트라 3세
부모
아버지 : 프톨레마이오스 5세
어머니 : 클레오파트라 1세
배우자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클레오파트라 4세, 트뤼파이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8대 파라오. 생애 전반기엔 프톨레마이오스 6세, 생애 후반기엔 클레오파트라 2세와 치열한 정쟁을 벌인 끝에 파라오를 쟁취하고 자신의 자식들이 대를 잇게 하였다.


2. 생애[편집]


기원전 184년경 프톨레마이오스 5세클레오파트라 1세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프톨레마이오스 6세, 클레오파트라 2세를 두었다. 기원전 180년 9월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급사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가 공동 파라오로 등극했다. 기원전 176년 클레오파트라 1세가 사망한 뒤,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가 섭정을 맡았고, 기원전 170년 10월 클레오파트라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결혼하면서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이 당시 그는 신격화되긴 했지만 형제들과 동격의 위치로 대접받지 못했다.

기원전 170년 또는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군이 이집트의 국경 요새 펠루시움 근처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격멸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는 나일강 삼각주로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을 평정했다. 에우라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에게 해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코마누스와 시네아스가 정변을 일으켜 왕궁을 장악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4세가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이집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보호국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격분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의 주인인 그들이 하루아침에 타국에 복종하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셀레우코스군 장병들이 신전을 약탈하기까지 하자,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코마누스와 시네아스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에 대응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원전 169년 9월 이집트에서 철수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협약을 맺었을 뿐 진심이 아니었다고 호소했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이에 설득되어 그를 다시 파라오로 모셨다.

이집트가 협정을 거부하고 그리스에 사람을 보내 새로운 용병대를 모집하기 시작하자,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8년 봄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멤피스를 장악한 뒤 이집트의 왕을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한편 셀레우코스 함대는 키프로스로 항해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곧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로마 공화국이 개입했다.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안티오코스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통치를 하였지만, 두 형제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자신을 쫓아내고 동생을 단독 파라오로 선출하려 했던 일을 뼈저리게 기억하며 동생을 경계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역시 야심을 이루기 위해 형을 몰아낼 때를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165년, 궁정관 디오니시오스 페토사라피스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암살하려 했다고 선동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즉시 동생을 찾아가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밝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를 믿고 형게 함께 경기장에 공개적으로 함께 나타나 자신들의 관계에 문제가 없음을 대중에 과시했다.

디오니시오스 페토사라피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한 뒤 병사들을 설득하여 피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테베에서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두 반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농장이 파괴되어 정부의 농업 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기원전 165년 가을, 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사유지를 몰수하여 국영지로 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대토시 소유자들은 분노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를 활용하여 정권을 탈취하기로 작정했다.

기원전 164년 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를 축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환관과 세 명의 신하와 함께 로마로 망명해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시 키프로스로 가서 그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선조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호칭이었던 '에우에르게테스(Euergetes: 후원자)'를 본따서 자신의 호칭으로 삼았다. 그의 심복 티메테오스는 정적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들어 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기원전 163년 여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봉기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몰아내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소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클레오파트라 2세와 함께 집권하였지만, 로마 대사들이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화해하라고 설득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키레나이카의 지배권을 그에게 주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레나이카에 만족하지 못했고, 기원전 163년 말 또는 162년 초에 로마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프로스를 받아야 했는데 분할이 불공평하게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쿠아투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단으로 보내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키프로스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주저하면서 쉽사리 넘기려 하지 않자, 사절단은 그해 162년 말 로마로 돌아와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장악하는 걸 도우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타국의 권력 분쟁에 병력을 보내 주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겨서 결정을 미뤘다. 그는 단독으로 용병들을 끌어모아 키프로스로 쳐들어갔지만, 격려한 저항에 부딪치자 1년만에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154년 형이 보낸 암살자의 공격을 가까스로 모면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원로원에 출석해 암살 시도로 입은 상처를 보이면서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5척의 로마 선박과 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가 이끄는 두 번째 사절을 그와 함께 하게 하였고, 그리스로 가서 용병을 자유롭게 고용할 수 있는 권한도 줬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그리스에 들러 용병을 고용한 뒤 키프로스를 점령하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군대에 붙잡혔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 사절까지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마가 분노할 걸 두려워해, 동생을 용서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동생과 약혼시키고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레네의 왕으로서 헬레니즘 왕실의 미덕인 트리페(tryphe: 사치)를 보여주려 노력했다.[5] 그는 아폴로 신전의 제사장을 겸임하면서, 대규모 연회를 자주 벌였다. 또한 키레네에서 광범위한 건설 작업을 지도하였는데, 특히 프톨레마이스 서쪽에 큰 무덤을 지어서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으려 하였다. 형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약속을 어기고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셀레우코스 왕조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 데메트리오스 2세와 잇따라 결혼시켰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152년 대 그라쿠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이며 로마 공화국에서 현숙하기로 이름난 코르넬리아[6]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셀레우코스 내전에 참여하여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물리치고 데메트리오스 2세를 왕위에 세운 뒤 귀환하던 중 전장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자신의 7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아내 클레오파트라 2세와 함께 공동 파라오로 집권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어린 군주보다는 전 파라오의 동생을 모시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한달 만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사절을 보내 이곳에 와서 파라오가 되어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해달라고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즉시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여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144년 두 사람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태어나자, 그는 사람을 시켜 조카 프톨레마이오스 7세를 죽였다. 한편, 그는 에게 해에 마지막으로 남은 해군 기지인 이타노스, 테라, 메타나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역은 이집트, 키프로스, 키레네에 한정되었다.

기원전 142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이며 자신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고 그를 공동 파라오로 삼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클레오파트라 4세, 트뤼파이나,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태어났다. 이렇게 되자 궁정은 두 패로 나뉘었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후계자가 되길 원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기 자식들이 뒤를 잇기를 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3세 쪽으로 기울었고, 멤피테스를 파라오로 세우라는 클레오파트라 2세의 요구를 무시했다.

기원전 139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신하였다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집권 후 추방당했던 갈라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어린 아들을 돌보고 있다며, 소년을 파라오에 앉히려고 이집트를 침공헀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부리던 용병들은 급료가 자꾸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에 가담하려 했지만, 그들의 사령관 히에락스가 자비를 들여 봉급을 지불해서 이를 막았다. 갈라스테스는 곧 패배한 뒤 잡혀 죽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집트 사제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계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같은 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사절단과 접견하여 후한 대접을 해줬다. 당시 그는 무척 뚱뚱해서, 로마인들로부터 피스콘(Physcon: 뚱뚱한 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기원전 132년 말, 클레오파트라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9세-클레오파트라 3세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집트 각지에서 양자를 따르는 무리가 전투를 벌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131년 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켜 왕궁에 불을 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키프로스로 탈출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단독 파라오로 즉위하여 '테아 필로마토르 소테이라(Thea Philometor Soteir 구원자 여신)'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지배권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그리스계가 몰려 사는 도시들에 한정되었고, 이집트 원주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를 더 지지했다. 상이집트에선 이러한 혼란을 틈타 하르시에시(Harsiesi)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31년 8월이나 9월에 테베를 장악하고 파라오를 자칭했다. 하지만 2개월만에 테베의 스트라테고스인 파오스에게 쫓겨났다.

기원전 130년 초,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키프로스에서 이집트로 들어와 멤피스에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파오스를 상이집트 전체의 스트라테고스로 승진시켜 지지를 얻어냈고, 병사들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도시의 수비가 워낙 강력해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전국 곳곳에 설치된 요새들의 지배권을 여전히 간직했다. 그녀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여 파라오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멤피테스는 도중에 붙잡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일부러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에 멤피테스의 온몸을 조각낸 뒤 그녀에게 돌려보냈다.

아들의 끔찍한 죽음에 분노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기원전 129년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이집트로 와서 구원해달라. 파라오로 세우겠다."라고 부탁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이집트로 진군하다가 이집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펠루시움 요새 밖에 진을 쳤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군대가 굳건히 버틴 데다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원조를 받고 자신을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해야 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군의 원조마저 끊기면서, 그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기원전 127년, 클레오파트라 2세는 국고 대부분을 챙겨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뒤 클레오파트라 2세 지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에 대한 지지를 취소하고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8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는 딸인 트뤼파이나와 안티오코스 8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가 이집트로 돌아오는 걸 허락했으며, 공동 파라오로 들어오는 것도 허용했다. 기원전 118년 4월,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는 공동으로 사면령을 발표했다. 이 법령은 기원전 118년 이전에 자행된 살인과 절 강도 이외의 모든 범죄를 사면하고, 피난민들의 귀향과 재산 환수를 장려하며, 모든 밀린 세금을 면제하고, 내전 당시 군인들에게 지급된 토지 증여를 확인하고, 절의 토지 보유와 세금 특권을 확인하고, 세무관료들에게 표준화된 무게를 사용하도록 했다.

기원전 116년 6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붕어했다. 당시 궁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9세보다는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선호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세우라고 요구하자 받아들이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러나 곧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9세 모자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왕조는 또다시 심각한 내란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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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톨레마이오스 6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협치)[2] (단독 통치)[3]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협치)[4]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협치)[5] 사치가 미덕이라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의 사치는 연회나 축제, 선물, 건설 사업 등으로 군주의 부와 배포, 관대함을 자랑하는 것으로 다른 미덕인 에우르게시아(euergesia: 자선)과 연관되어 있다.[6]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