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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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6대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2세
Cleopatra II


파일:클레오파트라 2세.png

이름
클레오파트라 2세
Κλεοπάτρα | Cleopatra
출생
기원전 185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망
기원전 116년 (향년 69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1차
기원전 175년 ~ 기원전 164년[1] (약 11년)
이집트 파라오 2차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27년[2] (약 36년)
이집트 파라오 3차
기원전 124년 ~ 기원전 116년[3] (약 8년)
부모
아버지 : 프톨레마이오스 5세
어머니 : 클레오파트라 1세
배우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자녀
클레오파트라 테아, 클레오파트라 3세, 프톨레마이오스 7세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6대 파라오. 기원전 175년 형제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공동 파라오가 된 이래 60년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정국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기원전 185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클레오파트라 1세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프톨레마이오스 6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두었다. 기원전 17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두 섭정인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는 그녀를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는 섭정을 맡은 두 사람의 낮은 신분[4]과 파라오가 10살의 소년인 점 등으로 정권이 불안정했기에, 왕조의 존속력을 강화하고 인기가 많았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1세의 위상을 물려받으려면 이 결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죽은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의 '필로마토르(Philometor)'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정세는 갈수록 암울해졌다. 기원전 170년 또는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군이 이집트의 국경 요새 펠루시움 근처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격멸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는 나일 강 삼각주로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을 평정했다. 에우라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에게 해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코마누스와 시네아스가 정변을 일으켜 왕궁을 장악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4세가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이집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보호국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격분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의 주인인 그들이 하루아침에 타국에 복종하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셀레우코스군 장병들이 신전을 약탈하기까지 하자,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코마누스와 시네아스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에 대응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원전 169년 9월 이집트에서 철수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협약을 맺었을 뿐 진심이 아니었다고 호소했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이에 설득되어 그를 다시 파라오로 모셨다.

안티오코스 4세가 다시 공격해올 것을 우려한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는 로마에 사절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로마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안티오코스 4세가 행동에 나섰다. 기원전 168년 봄,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멤피스를 장악한 뒤 이집트의 왕을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한편 셀레우코스 함대는 키프로스로 항해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곧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듯 했다. 이때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안티오코스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셀레우코스군이 물러간 뒤, 로마는 이집트를 안정시키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6세, 클레오파트라 2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파라오로써 통치하도록 제안했고 세 사람 모두 동의했다. 이전의 여성 파라오들이 '형식상' 동격의 파라오로 취급될 뿐 실권은 남편 파라오에게 내줘야 했던 반면에, 그녀는 실제로 두 파라오와 대등한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기원전 164년 말,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그녀를 축출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함께 키프로스로 피신하여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 대항했다. 기원전 163년 여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몰아내고 두 사람을 소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동생과 화해하기로 하고, 키레나이카의 지배권을 그에게 주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레나이카에 만족하지 못했고, 기원전 163년 말 또는 162년 초에 로마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프로스를 받아야 했는데 분할이 불공평하게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사절을 보내 키프로스를 동생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쉽사리 들어주지 않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기원전 154년 원로원을 설득해 자신이 키프로스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응답을 받아낸 뒤 그리스에 들러 용병을 고용한 후 키프로스로 향했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군대에 붙잡혔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의 눈치를 봐서 동생을 용서해주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동생과 약혼시키고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형제간의 갈등이 종식된 뒤, 클레오파트라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10년간 평화롭게 통치했다. 그러다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내전에 참여했다가 전투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 부부는 프톨레마이오스 유파토르, 클레오파트라 3세, 클레오파트라 테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7세를 두었다. 이 중 유파토르는 기원전 152년에 사망했고,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오스 2세와 결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기원전 146년 클레오파트라 3세를 신격화하여 어머니와 동격의 위치에 두었다. 이는 클레오파트라 2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 모녀가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7세를 보호하길 희망하는 의미가 담긴 조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어린 군주보다는 전 파라오의 동생을 모시는 게 낫다고 보고, 키레나이카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추대했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이러한 민심을 읽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기원전 144년 클레오파트라 2세가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를 낳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조카 프톨레마이오스 7세를 제거했다. 얼마 후, 그는 클레오파트라 3세와도 결혼했고, 기원전 142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낳았다. 이렇게 되자 궁정은 두 패로 나뉘었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후계자가 되길 원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신의 아들들이 뒤를 잇기를 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3세 쪽으로 기울었고, 멤피테스를 파라오로 세우라는 클레오파트라 2세의 요구를 무시했다.

결국 기원전 132년 말, 양자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집트 각지에서 양자를 따르는 무리가 전투를 벌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131년 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켜 왕궁에 불을 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키프로스로 탈출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단독 파라오로 즉위하여 '테아 필로마토르 소테이라(Thea Philometor Soteir 구원자 여신)'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지배권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그리스계가 몰려 사는 도시들에 한정되었고, 이집트 원주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를 더 지지했다. 상이집트에선 이러한 혼란을 틈타 하르시에시(Harsiesi)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31년 8월이나 9월에 테베를 장악하고 파라오를 자칭했다. 하지만 2개월만에 테베의 스트라테고스인 파오스에게 쫓겨났다.

기원전 130년 초,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키프로스에서 이집트로 들어와 멤피스에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파오스를 상이집트 전체의 스트라테고스로 승진시켜 지지를 얻어냈고, 병사들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도시의 수비가 워낙 강력해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전국 곳곳에 설치된 요새들의 지배권을 여전히 간직했다. 그녀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여 파라오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멤피테스는 도중에 붙잡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일부러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에 멤피테스의 온몸을 조각낸 뒤 그녀에게 돌려보냈다.

아들의 끔찍한 죽음에 분노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기원전 129년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이집트로 와서 구원해달라. 파라오로 세우겠다."라고 부탁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이집트로 진군하다가 이집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펠루시움 요새 밖에 진을 쳤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군대가 굳건히 버틴 데다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자신을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해야 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군의 원조마저 끊기면서, 그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기원전 127년, 클레오파트라 2세는 국고 대부분을 챙겨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126년 데메트리오스 2세가 패망하자, 그녀는 수년간 은거하다가 기원전 124년 이집트로 돌아왔다. 당시 상이집트의 주요 지역들은 클레오파트라 2세에게 충성하였고, 그녀가 이집트의 국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녀를 '환영'하고 파라오로 복귀하게 해줬다. 그 후 그녀는 조용히 지냈고, 기원전 116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사망한 뒤에는 클레오파트라 3세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함께 공동 파라오를 맡았다. 기원전 116년 10월경에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녀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는데,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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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전 175년 ~ 기원전 168년(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협치)
기원전 168년 ~ 기원전 164년(프톨레마이오스 6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협치)
[2]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45년(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협치)
기원전 145년 ~ 131년(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협치)
기원전 131년 ~ 기원전 127년(단독 통치)
[3] 기원전 124년 ~ 기원전 116년(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협치)
기원전 116년(프톨레마이오스 9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협치)
[4] 에우라이오스는 환관이었고, 레네오스는 해방노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