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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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시절
2. 제2차 세계대전 참전
3.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
4. 재임기


1. 젊은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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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부친 조셉 P. 케네디.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Brookline)에서 당시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인 조셉 패트릭 케네디[1](1888년 ~ 1969년)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인 존(John)은 외할아버지인 존 F. 피츠제럴드에게서, 중간 이름인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케네디의 어머니인 로즈 케네디(역시 아일랜드계다.)의 결혼 전 성(maiden name)이다.[2]

사실상 조셉 케네디는 케네디 전설의 시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문을 환골탈태 시켜 미동북부의 귀족 집안으로 만든다. 케네디 가문은 원래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그러하듯이 형편이 어려웠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사정이 나아져서 그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는데, 조셉은 출세욕과 야망이 대단하여 학창시절부터 이미 인맥을 다지는데 공을 들였다.[3]

조셉 케네디는 대학 졸업 후에는 투자, 영화 사업, 밀주 사업 등으로 엄청난 부호가 되었고, 그후 정계 진출을 시도하여 영국 주재 대사가 된 나름 입지전적스런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월가 은행 인수[4]와 내부거래 주식 투자로 큰 돈을 벌었고, 세계 대공황 직전인 1928년 헐리우드에 진출해 영화사 M&A 사업으로 성공[5]을 이어갔으며, 심지어 알 카포네가 활약하던 금주령 시대에 밀주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미 이 때에 포브스 전미 10대 부호에 들을 정도로 성장해 보스턴의 귀족 가문으로 인정 받는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가에서 소위 작전을 세운 원조격인 인물이며, 한때는 영화체인 M&A로 할리우드를 좌지우지하기도 했고, 소문이 아닌 실제로 밀주사업에 뛰어들어 마피아들과 관계를 맺은 명암을 초월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6]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다진 조셉 패트릭 케네디는 자신의 야망이었던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 하나쯤은 나와야지'라는 방침에 따라 자신의 9명 자녀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며 어릴 적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게 하였다.[7]

조셉 패트릭 케네디의 이런 태도는 "인간 성공의 척도는 돈이 아니고, 그가 만드는 가문(가정)의 종류이다."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에겐 돈을 떠나 어떤 가문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고 돈이 안 중요하다는 건 아니라, 일례로 케네디의 자녀들은 보스턴 시내 어느 상점이든 외상으로 물건 구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집안을 모르는 시민들이 없었기 때문. 당연히 가문빨로 떼먹거나 상납받은 건 아니고, 케네디가의 비서가 수시로 외상값을 지불해 신용을 지켰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존 F. 케네디 뿐만 아니라 형제였던 로버트 F.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등도 훗날 같이 정계에 입문하였다. 사실 집안에서 가장 기대를 한 인물은 차남 존이 아니라 장남 조 케네디였다. 조 케네디는 운동과 공부 다 만능이었지만, 차남인 잭 케네디(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는 어려서부터 좀 왜소하고 잔병 치레도 많이 했으며 공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보딩스쿨인 초트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좋지 않았고, 반항아로 악명을 떨쳤다.[8] 이 시기 그의 가장 잘 알려진 탈선 행위 중 하나로 룸메이트와 함께 화장실 변기를 폭발시켜버린 적이 있었는데, 제대로 노한 교장이 채플 시간에 그를 가리켜 망나니(mucker)라고 지칭하자 망나니 클럽을 만들어버리는 대범함을 보여주기도(…)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타고난 자질이 급우들에게도 엿보였는지, 졸업 교지에서는 ‘가장 성공할 거 같은 인재’로 꼽히기도.[10]

고등학교 졸업 후 정계 유력 인사이자 하버드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에 역시 명문가였던 친척들의 신원 보증을 얻어 프린스턴 대학교[11]을 그만 두고 하버드에 입학했다. 사실 이때 본인은 프린스턴을 계속 다니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차갑게 "형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냐?"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조셉 케네디가 신임하던 장남 조셉 패트릭 케네디 주니어제 2차 세계대전 도중이던 1944년 군용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아프로디테 계획 참조.

한편 존 케네디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학창 시절 유럽 여러 나라들을 탐방하면서 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대필 의혹으로 논란이 된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1940)를 출간하여 정치 서적으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아돌프 히틀러독일 제3제국에 대해 펼쳤던 유화정책을 비판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교수들은 이 논문이 굉장히 장황하고 내용이 반복된다고 하면서도 그 깊이는 인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아버지인 조셉 패트릭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대사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막 경제 대공황을 지나 온 미국이 또 다시 커다란 소용돌이인 유럽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네디는 주영 대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생의 신분으로 구할 수 없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 문서들을 탐독하고, 전속 속기사와 타이피스트를 고용하여 3개월만에 학위 논문을 써냈다.[12] 당시 케네디의 논문은 문장력 등과는 별개로 깊은 통찰력을 인정받았는데 케네디 가문 정도 되면 논문 내용도 사실 본인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지 않을까 싶지만 훗날 보여준 외교 역량을 생각해보면 이 때부터 싹수가 있었던 듯하다.


2. 제2차 세계대전 참전[편집]


원래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 이상인 애디슨씨병[13]을 앓고 있었고,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 등을 크게 다쳐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악화되었다. 이 때 입은 등의 부상은 평생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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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합중국 해군 사관후보생 과정에 지원해 임관, 항해 병과 대위전역했다. 원랜 에디슨병, 성병 등의 문제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신체 조건이었지만[14] 세계대전에 참가해야 향후 정치 활동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입대했다. 하지만 건강이 건강이다 보니, 처음 받은 보직은 해군 정보국 참모장교였다. 그래서인지, 일부 국내판 위인전에서는 이 시기 케네디가 "군사 신문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기도 하다.

이런 보직으로는 장래 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아버지를 설득해 후방이 아닌 전선에 배치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참전용사라는 경력은 케네디가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부각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사족으로 항간에 나오는 노르웨이 출신의 나치주의자와의 만남 때문에 군으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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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시절, 어뢰정 PT-109정장(艇長)으로 근무했는데, 1943년 8월 2일 솔로몬 제도 콜롬방가라 섬 인근에서 작전중 격침되었다. 전날인 8월 1일 존 케네디를 포함한 15척의 어뢰정은 일본 해군의 병력 운반 발동선을 찾아 기관총으로 잡기 위해 흩어져서 작전중이었는데 존 케네디가 소속된 B편대 4정은 야간에 일본 해군 구축함 4척을 정면으로 맞닥뜨려 4 vs 4 드림매치를 벌인다. 여기에 더해 일본 수상기 4대가 날아와 조명탄을 투하하고 기총 소사를 했지만 젊은 위관급 어뢰정장들은 과감하게 돌격하여 어뢰를 쏘고 빠지며 치열하게 싸웠다. 단 명중탄은 내지 못했고, 전투가 끝나고 인근 해변에 터지지 않은 MK8 어뢰 5발이 발견 되었다. 정면에서 발사했지만 40노트 까지 가능한 일본의 구축함들이 다 피해버린 것이다. 다음날 새벽 2시 15분에 어뢰정들은 전날 전투한 곳을 수색하라는 명을 받고 정찰중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15] 함을 발견하지 못해 구축함에 들이받히고 PT-109는 격침되었다. 아마기리측에서도 PT-109의 발견이 늦었고, 어설프게 피하는 것보다는 똑바로 들이받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으로 충각전술을 사용했다. 전날의 4 vs 4 전투때도 야간이라 구축함인지 모르고 돌격했다가 피봤는데, 이번 역시 야간이라 바로 앞에 올 때까지 발견 못한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갖다 박을 때까지 몰랐냐며 작전 중에 전원 자느라고 어둠 속에서 미처 발견 못했다는 설도 있다.

원래 PT - 109의 인원은 정장 케네디 중위, 부장 로럴드 톰 소위[16] 포함 12명이였는데, 조지 로스 소위[17]가 편승해 총 13명이 승선해 있었다. 하지만 충돌 직후 두 명이 실종 되었고 케네디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승조원 본인 포함 10명을 이끌고 6km를 헤엄쳐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에 상륙했다가 구출되었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케네디는, 구사일생 끝에 살아온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다. 케네디가 조난되었을 때 100여년 정도 되는 플레이페어로 암호를 보냈는데, 일본군은 이를 해독도 못했다가 정설이다.

다만, 애초에 들이받히지 않고 구축함을 격파하는 게 어뢰정의 진짜 임무 아니냐는 비판도 있으며, 이 사건은 군인으로서 케네디가 무능했다는 걸 드러낸다는 주장도 있다.[18] 어뢰정의 빠른 가속력을 생각할 때, 구축함을 못 피한 건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긴 하다. 때문에 이미 아버지 대에 거물이 된 케네디 가문빨로 인해 징계감인 사건이 훈장 수여로 뒤바뀐거 아니냐는 의심어린 시각도 있다.

물론 격침까지 몰고 간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그의 사후 대처가 훌륭했다는 것은 인정하기에, 훈장 수여도 이 점이 감안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좌초 직후 케네디 일행은 근처에 있는 카솔로 섬이라는 손바닥 만한 섬까지 헤엄쳐 갔는데 맥마혼 수병이 충돌로 화상을 입어 수영할 수 없어 자신을 두고 가라고 했지만 케네디는 그를 등에 업는 식으로 구명조끼를 연결해 평형으로 4시간을 수영해서 데려 간다. 이후 홀로 3~4km를 더 헤엄쳐가 지나가던 아군 어뢰정을 기다렸지만 실패하였다. 침몰시 들고 온 랜턴이 있었는데 아군 PT정들이 야간 순찰을 하는 해역까지 헤엄쳐 가 구명조끼에 기대 떠 있다가 아군 순찰정이 나타나면 랜턴으로 구조 요청을 한다는 계획이였다. 첫날엔 케네디가 다음날엔 로즈 소위가 나섰지만 실패하였고 랜턴도 고장이나 버렸다고 한다. 카솔로섬은 동서로 약 60m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섬으로 흔한 코코넛 나무도 없었기에 이틀 뒤 코코넛 너무가 많이 보이는 2km 떨어진 올라사나 섬으로 이동하는데 이때도 맥마흔 수병을 등에 지고 수영해서 갔다. 다음날 로스 소위만 데리고 1km 떨어진 좀 더 큰 섬인 나루 섬으로 헤엄쳐 갔다가 연안감시대 소속 현지인 정찰대 원주민 가사와 쿠마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먹을 것은 커녕 마실 조차 없어 탈진한 상황에서, 부하들을 위해 상어의 위험을 무릅쓰고 먼 바다까지 헤엄쳐간 것은 케네디의 투철한 군인 정신과 부하들을 위한 희생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일본 구축함과의 연속되는 전투 중 어뢰정을 잃은 것은 공과가 있어도 사후 대처만 놓고 레전드급 활약을 한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PT정 모항인 렌도바 기지엔 AP통신과 UP통신의 종군기자들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거물급 인사인 조셉 케네디 아들 구출작전이 있다는 소식에 직접 구출정에 탑승해 이를 기사화했고 전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각자의 시점과 이해 관계에 따라 증언과 해석이 판이하게 다르며, 후대에 첨언되거나 뒤섞인 내용도 많다보니 결국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하여튼 존은 전역 후 사망한 형을 대신해 아버지의 꿈도 안고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케네디를 구출한 솔로몬 제도 원주민인 비우쿠 가사(Biuku Gasa)와 에로니 쿠마나(Eroni Kumana)는 케네디 가문,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으로부터 사례금을 받았다. 1961년 케네디가 당선되고 나서는 케네디가 취임식에 그들을 초청했지만, 당시 솔로몬 제도를 통치하던 영국이 발가벗은 원주민들이 잘 차려입지 않았다며 거절해 결국 재회는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200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인 맥스 케네디를 보내 케네디의 흉상을 전달하여 60년만에 재회가 성사되게 되었다.# 케네디가 그 때 당시 적은 구출메세지가 담긴 코코넛 껍질은 현재 케네디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과달카날 전투 50주년 기념 우표에도 이 사건이 표현되었는데, 95센트 짜리에는 그 두사람이 카누를 타는 모습과 코코넛 껍질이 그려져 있고, 50센트 짜리에는 두사람이 케네디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케네디가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 했을 때, 가는 곳마다 솔로몬 제도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아마기리함 하나미 고헤이 퇴역 해군 소좌가 케네디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PT109와 충돌한 구축함 함장임을 밝히고 케네디의 용감성을 격려하며 그가 당선되기 바란다고 하였다. 신이 난 케네디가 이 편지를 선거 기간 활용 한 것은 물론이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3년대에 'PT-109' 라는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상영 되었다.

대통령이 된 미국쪽에서는 PT 보트가 성유물적인 가치가 있어 이를 구해서 기념관에 전시하려 했지만, 위의 일화에서도 나왔듯이 워낙 공방능력이 빈약한 물건이라 2차대전이 끝나고 전량 폐기 되었다. 그런데 자유진영골동품 창고 대한민국 해군에 무려 3척이나 대여중인 게 알려져, 미 해군의 중고 건보트와 바꿔먹었다는 훈훈한 일화가 전해진다.[19]

지금도 솔로몬 제도에 가면 현지인들이 만든 케네디 박물관, 케네디 운동장, PT109 식당 등이 있다. 최초 피난한 섬인 플럼푸딩 섬도 케네디 섬으로 개명됐다.

훗날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당시 안보투쟁과 전공투 등으로 흔들리던 미일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한 퍼포먼스로 본인이 직접 일본을 찾아 아마기리 함의 승조원들과 재회하는 행사를 구상했다. 만일 이 구상이 이루어졌다면 케네디는 최초로 방일한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지만, 케네디의 비극적 암살으로 이 극적인 재회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최초로 방일한 대통령 타이틀은 제럴드 포드에게 넘어간다.



3.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편집]



대선 당시 광고(1960년). 풀버전(컬러).
광고 초반에 자세히 보면 당시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 후보였던 린든 B. 존슨도 보인다.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당신을 위한 케, 네, 디!

세상을 알기엔 충분히 원숙하면서도, 무엇이든 해내기에 충분히 젊은 사람!


1946년, 보스턴 시장 선거 출마로 인해 자리가 빈 매사추세츠 제11지역구에 출마, 73%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하원의원으로서 정치를 시작했다. 교육/노동 위원회와 재향군인 권익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대외적으로는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했다. 이 시절부터 이민법 완화, 공공주택 건설, 노조 권한 축소 저지에 힘 썼다. 3선 후 1952년에는 무려 3선 현직 상원의원이자 미국에서 제일가는 정치 명문가 캐벗 로지 가문 출신인 헨리 캐벗 로지를 7만여 표 차이로 간신히 누르고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중진급으로 성장했다. 그 다음 해인 1953년에는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하였다.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유무역 확대에 찬성하는 상원의원이었으며[20], 선거인단 폐지 반대 및 노동 개혁 운동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민권법 제정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해외 원조도 적극 지지했다. 이런 활동들을 바탕으로 1956년 대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 지명 연설을 맡았고, 대선 후보였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뜻대로 당 대회에서 선출하게 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2위로 낙선, 대신 인지도는 높였다. 그러나 현직 아이젠하워의 인기가 좋았던 만큼 이 실패는 도리어 약이 되었다. 특히 아버지 조셉가 그의 부통령 출마를 극구 반대했는데, 질게 100% 뻔한 선거에서 구태여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가, 이게 다 가톨릭신자를 부통령 후보로 둬서 그렇다!라는 소리를 듣고 정치생명이 끝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

1957년《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21][22] 1958년에는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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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 케네디

그리고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서 거물 정치인이던 린든 B. 존슨을 꺾고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화당리처드 닉슨을 누르며 마침내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권자 전체 득표는 0.2~0.6%, 10~40만표의 신승이었지만, 선거인단에서는 303:219로 닉슨을 여유있게 따돌렸다.[23] 이때 대선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오하이오는 물론 캘리포니아(닉슨의 고향)가 닉슨에게 넘어갔으며, 15명의 남부 선거인단이 가톨릭 교도나 다른 이유를 핑계 삼아 투표 사기(즉 반란표)를 쳐버렸음에도 이 정도였다. 이는 50개 주를 다 방문하겠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무리한 계획을 고수하다가 지친 닉슨의 컨디션 + 서투른 메이크업(...) 탓도 있었다.[24]

여담으로 닉슨 역시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 참전 군인(해군 항해 병과 장교) 출신이었다. 하지만 끗발이 많이 약했는데 닉슨은 해군 항공대 소속 창고와 같은 비전투 임무에 주로 종사해서 전투 경험에다 훈장까지 받은 케네디에 비하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 본인도 닉슨을 향해 "내가 사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저 사람은 후방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었다"라는 식의 흑색선전을 가하기도 했다.

당시 TV 토론에서 케네디가 이겨서 케네디가 당선되는 데 결정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토론을 라디오로 들은 시민들과 언론인들은 닉슨이 케네디보다 토론을 잘했다고 여겼다.[25] 라디오로 토론을 청취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9%의 청취자들이 닉슨이 승리했고 응답한 반면, 케네디의 경우에는 21%에 불과했다고 한다.

해당 여론조사 기관은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시행했는데, 여기서도 케네디 30% 닉슨 29%로 나와, 케네디가 거의 우위를 나타내지 못했다. 때문에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토론을 시청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닉슨이 승리했다는 여론이 분명히 우세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다만 여론조사가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도 일단 TV 토론에선 케네디가 우세를 가져갔다. 어찌됐든 케네디는 당시 점점 멀어지던 남부 민주당의 뒤통수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승리한다.

한편 조셉 케네디는 아들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꿈을 이루는 듯 싶었으나, 아들의 취임 11개월 만에 뇌경색으로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고, 2년 후 존에 이어 몇 년 후 역시 대선에 출마한 로버트마저 피살당한 이듬해인 1969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거동이 불편해진 것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거나 이루어줄 아들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냈다는 점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셈. 거기에 넷째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마저 조셉 케네디의 사망 직전에 여비서의 사망 사건(차파퀴딕 스캔들)[26]에 연루되면서 대권 가도에서 멀어진다.


4. 재임기[편집]


취임사에서 케네디는 우방국들에 변하지 않을 우정을 약속하며, 식민지 통치 등에서 갓 벗어나 자유 진영에 편입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원조와 빈곤 문제 퇴치를 언급하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그 일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그들의 지지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당위론을 내세웠다. 다만 세계인들이 미국에 바라는만큼 세계인들 스스로도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고 역설한다. 소련에 대해서도 역지사지하자며 대화를 제안한다.[27]

특히 중남미 우방 외교에 신경써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취임 두 달만에 CIA 뻥카말만 믿고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그만 침공 작전 실행을 승인했다가 거하게 실패하며 외교적으로 큰 부담을 지게 된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큰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사실 이 일은 신임 대통령이던 케네디가 기세등등하던 CIA와 군부 등쌀에 밀려 떠밀리듯 승인해준 것도 있어서[28] 발 빠른 대국민 사과와 함께 비교적 조용히 넘어간다.

그리고 베를린 위기를 통해 미숙한 자신을 테스트하는듯하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위협을 전면전으로 가지 않고도 적절하게 선방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여론을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고[29], 피그만 침공 여파가 이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즈음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흐루쇼프 정권과 대결한 결과,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 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며 대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핵 위기의 반성으로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을 제창하여 이를 성사시켜 후일의 수많은 핵제한/감축 협정의 초석을 세운 것도 고평가를 받는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면서 미국을 추월한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계획한 것도 이 무렵.[30]

내정 면에서는 일종의 도전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뉴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개혁 법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작 여대야소였는데[31] 의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법안이 많았다. 군사비도 증가했음에도 상기했듯 되려 군부와의 마찰은 심화되어 쿠데타설이 떠돌기도 하는 등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으로 촉발된 흑인민권운동에 대해서는 호응하여 정권 기간 중 연방재판소에 최초의 흑인 판사가 취임하고, 흑인 검사를 10명에서 70명으로 늘리고, 오랜 악습이던 투표세를 없애 흑인은 물론 푸어 화이트 계층의 선거 참여율을 높여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이런 행보에 엇나간 보수파의 공격은 더 거세졌고, 일각에선 너무 급격한 변화로 중산층의 여론이 갈라지며 사회 분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실제로 베트남전의 계기를 어느 정도는 제공했으며, 주변의 매파 때문이라고 해도 냉전을 축소시키려는 행동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미사일 격차 논쟁은 케네디가 촉발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복지 등 각종 개혁은 케네디 재임 중 입안됐지만, 그의 재임 중에는 예산 문제로 의회에서 난항을 겪었고, 그가 죽은 후 의회에서 잔뼈가 굵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의회를 거듭 협박설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통과시켜 그의 공헌도가 더 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베트남전 관련해선 케네디 자신은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전임 아이젠하워프랑스의 직접 개입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지원은 장비와 자금 등 물자 지원에 한정한데 반해, 케네디 정부 시절엔 군사고문만 1만명 가까이 파견하는[32]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었다.[33] 실제로 베트남에 대해서 케네디는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일단 재선을 한 다음에 베트남 철수를 다룰 예정이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와 연관이 있던 로버트 케네디, 로버트 맥나마라, 아서 슐레신저 주니어, 시오도어 소랜센, 마이크 멘스필드 등이 케네디에게 미군 철수의지가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했다. 펜타곤 페이퍼 유출로 유명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1967년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인터뷰를 했는데, "지상군 파병은 안 한다는 형의 결심은 확고했다"고 얘기했다 한다.[34]

1962년 초 케네디는 해리먼과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클 포레스털에게 어떤 계기라도 잡아서 우리의 개입 정도를 축소하라라고 지시했으며, 당시 국방장관이던 맥나마라는 남베트남 미군사고문단 총사령관인 폴 하킨스에게 남베트남 정부군에 대한 군사 훈련 지원을 종료하고 1965년 말까지 군사고문단을 철수하는 계획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1963년 5월부터 만들어진 계획에 따르면, 1단계는 그해 말까지 1,000명이 철수하고, 그 시점부터 본격전인 철수를 시작해서 1965년 말까지 완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케네디는 1963년 10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 비망록 263호(NSAM 263)에 서명하는 것으로 철수 의지를 표현했다.

허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2년 사이 남베트남의 군사고문단 숫자는 900명에서 16,000명까지 증가했고, 이는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사례가 된다. 제네바 협정 위반일 수 밖에 없는것이 당시 미군이 파병한 고문단의 활동범위가 단순히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 북베트남 국경지대를 아울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네디 정부가 고문단을 보내 도왔던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공주의적 정책과 군사작전은 과거 그리스 내전 시기와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고문단이 했던 역할과 비슷했고, 실제로 여기서 비롯된 백색테러로 인한 민간인 학살이 빈번했다는 사실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집권 시기부터 민중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면서, 과거 항불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베트민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자행했는데, 케네디 정부는 이러한 학살적인 군사작전을 돕는 가교역할을 했다. 케네디가 고문단 파병형식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베트남 전쟁은 1963년 그가 지원하던 응오딘지엠과 그가 암살되면서 본격화 된다. 케네디의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와의 차별화를 위해 베트남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이라는 희대의 무리수를 벌였으며, 1965년 부터는 말 그대로 지상병력까지 대규모 단위로 파병하면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다.

5. 갑작스러운 죽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3년 11월 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쯤, 케네디는 유세지인 텍사스댈러스 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갑작스런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살해되는 장면이 TV로 전국에 방송되며 세계 사람들에게 또다른 의미의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1월 25일, 장례식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자 케네디의 유해는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 케네디를 알려면 부친인 조셉 케네디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들에게 이래저래 많은 영향을 끼쳤다.[2] 케네디 외에도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을 중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리처드 닉슨, 린든 B. 존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등이 있다.[3] 자기 집과 하버드 대학 모두 보스턴에 있어서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기숙사에 들어갔다. 하버드 재학생 상당수가 상류층 집안 자제라서 그들과 친분을 쌓기 위함이었다.[4] 친지들로부터 4만 5천 달러를 모아서 파산위기의 콜럼비아 트러스트 은행을 인수하고 행장으로 선출되었다.[5] RKO라는 영화사를 설립해 극장체인까지 인수하며 헐리우드의 거물이 되었다.[6] JFK와 RFK 암살에 마피아 음모론이 빠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7] 자신이 한가하여 식구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되면, 어린 자식들에게 국내외의 정치 현안에 대해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게 하여 시사문제에 익숙해지게 했다. 그래서 케네디 가문 자식들은 자신들이 미국 정계는 물론이고 국제 정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케네디 가문의 교육은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어 인기를 끌던 시절에는 미국 상류 가정의 모범적인 교육 방식으로 알려졌지만, 훗날에는 오히려 비판을 받게 되었다. "1등을 해라. 2등 이하는 필요없다."라며 어린 자식들에게 출세지향적인 사상을 심어주었고, 자식들 간에도 경쟁을 부추겼다는 점 때문이다.[8]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앞서 언급된 친형 조 케네디도 해당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우등생인 형과 비교되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반항의 주된 배경으로 꼽힌다.[9] 학교 측에서 꼭지가 제대로 돌아버려서 아버지 조셉 케네디까지 호출되고, 퇴학직전까지 몰렸지만 간신히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10]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장 위대한 졸업생으로 학교측에 의해 선정되었는데, 본인조차 이에 대해 어이없어했다는 후문.[11] 프린스턴 대학도 성적은 모자랐지만 거액의 기부금과 아버지의 영향력 덕분으로 합격했다.[12] 여담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커티스 르메이는 존 케네디 면전에서 대놓고 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케네디의 쿠바에 대한 유화 정책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허나 커티스의 의견과는 달리 쿠바의 미사일 발사라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케네디의 선구안은 빛을 발하게 된다.[13] 우리나라 병역판정 신체검사 등 검사규칙에서도 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바로 5급 전시근로역이 나올 정도니 꽤 심각한 병이라고 볼 수 있다.[14] 이 때문에 미합중국 육군 장교에 한 번 지원했다 떨어졌다. 일례로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모기가 잭의 피를 빤다면 잭이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모기가 감염될 것이다'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으로 건강이 안 좋았다.[15] 후부키급 구축함 15번함.[16]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전후인 1946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케네디가 직접 괸을 운구 했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17] PT - 166의 부장으로 당시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배가 침몰 된 상황이라 작전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작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케네디에게 탑승을 요청하였다고 한다.[18] 그럼 구축함 아마기리도 못 피하고 박았으니 똑같이 한심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구축함 등 호위함들이 잠수함이나 어뢰정 등 (당시 기준으로)쪽배들을 고속으로 들이받아 격침시키는 전술은 교범에도 나와 있는 정규 전술이다. 아마기리의 견시는 PT-109를 제때 발견했고, 아마기리의 함장은 PT-109를 함포로 해치우기엔 거리가 가까워 충돌로 해치우기로 하고 돌진했다. 다만, 아마기리는 PT-109를 격침시킨 후 좀 당황했다고 하는데, 어뢰정이 그 거리에서 구축함을 피하지 못할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마기리도 일단 시도는 하되, PT-109가 자신들을 회피하면서 도주해 버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19] 사실 미국 정부에서는 '빌려준 거니 지금 회수해갑니다.'라고 했는데 한국 정부에서 줬다 뺏는 게 세상 천지에 어디 있냐면서 펄펄 뛰어서 교환 형식으로 바꿔준 거다. 참고로 한국 정부는 미군이 대여해준 무기를 회수할 때 순순히 내준 적이 없다... 좀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F-5 전투기를 남베트남에 주려고 한국에 대여해준 걸 회수하려 하자 한국 정부가 '한국 영토에 있는 전투기니 한국 것'이라는 억지를 쓴 끝에 F-4로 바꿔줘야 했다. 그마저도 성능상 F-15나 16과 F-22나 35 정도의 격차가 있는 염가 전투기인 F-5와 미제 최신기인 F-4를 1대 1로 교환해달라는 요구를 하다가 간신히 2대 1로 타협한 일도 있다. 그마저도 선불이라서 한국군은 팬텀이 한국에 도착한 날에야 F-5를 돌려줬다...[20] 근 20년간 매사추세츠 주의 상/하원을 통틀어 케네디가 유일했다고 한다.[21] 미국 상원의원들 가운데 소신 있는 활동을 벌인 이들을 선정해 쓴 전기집이다. 다만 이 책의 저술에서 케네디 본인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는 편인데, 부정론자들은 원고의 대부분을 케네디의 연설문 작성자 테오도르 소렌슨이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2]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후반부 엄석대에게 보복당한 아이들이 대항하자, 김 선생이 이 책을 선물했다.[23] 승패를 가린 최소 격차 지역구는 하와이(3), 일리노이(23), 미주리(11), 뉴저지(16), 미네소타(11) 등의 중부권 주였다. 단 2%의 격차로 텍사스(존슨의 고향)를 수성한 것도 이득이었다.[24] FDR 이후로 독자 출마나 팀킬도 서슴지 않던 남부가 60 ~ 70년대 공화당의 남부 전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공화당의 텃밭으로 변하게 된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거짓이다. 미국 남부가 전후부터 대통령 선거에서는 카터 대통령의 초선 선거를 제외하고는 공화당을 지지했을지언정, 주지사, 상 · 하 의원 선거에서는 80년대까지도 계속 민주당을 지지했다. 60 ~ 70년대에 남부가 공화당에 넘어갔다는 말은 현재의 정치 상황과 남부의 성향만 보고 판단한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란표'가 발생했지만, 텍사스, 아칸소, 조지아, 루이지애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와 같은 대부분의 남부 주에서는 케네디가 승리했다.[25] 라디오로 들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린든 B. 존슨인데, 그는 당시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쟤(케네디) 토론 완전 망쳤구먼!(The boy's blown it!)"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근데 존슨은 원래 그런 스타일이라[26] 여비서를 집에 데려다주다가 차가 강에 빠졌는데, 자기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여비서가 그대로 익사하고 만다. 사실 여비서의 사망보다도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나도록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게 크게 문제시됐다. 세계 초강대국의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양반의 사고 후 상황 판단이 엉망이었으니... 덕분에 이 사건도 여러가지 음모론과 루머가 상당히 많긴 하다.[27] 케네디는 명분론적 우위 속에서 친미 국가의 경제 발전을 돕는다면 굳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봤다.[28] 이 사건으로 케네디는 CIA와 군을 불신하게 된다.[29] 이때 나온 말이 후술되어있는 유명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이다.[30] 다만 비판론자들에겐 군산복합체에 숨통을 틔워주는 사업이었다는 비판도 받는다.[31] 이당시 남부를 지역기반으로 두고있던 민주당에선 인종분리주의자들의 수가 상당했고, 의회에는 민권법 통과 저지를 위해 공화당과 민주당을 아우르는 초당적 연합(...)참 좋은거 뭉쳐서 한다.이 존재했다. 실제로 1964년 민권법 통과당시 찬성률을 보면 민주당보다 공화당 찬성률이 더 높다.[32] 이들은 말로만 고문이지 실제로 전투에 참가했으며, 베트남 중부고원지대를 포함한 남베트남 전역,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 호치민 루트와 DMZ를 넘나들며 사보타주 밑 비밀작전을 전개했다.[33]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 → 친미 자본주의 국가 베트남 공화국. 즉, 굳이 확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망하지는 않게 지원할 필요는 있었던 것.[34]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19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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