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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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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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1] Kennedy


출생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라인 빌즈 가 83
사망
1963년 11월 22일 (향년 46세)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재임기간
제35대 대통령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서명
파일:존 F. 케네디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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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시니어[1]
어머니 로즈 케네디[2]
형제자매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1915~1944)
여동생 로즈 케네디(1918~2005)
여동생 하딩턴 후작부인 캐슬린 케네디(1920~1948)
여동생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1921~2009)[3]
여동생 패트리샤 헬렌 케네디 (1924~2006)
남동생 로버트 케네디(1925~1968)
여동생 진 케네디 스미스(1928~2020)[[[빌]
남동생 에드워드 케네디(1932~2009)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929~1994)
자녀
장녀 아라벨라 케네디(1956~1956)
차녀 캐롤라인 케네디(1957~)
장남 존 F. 케네디 주니어(1960~1999)
차남 패트릭 케네디(1963~1963)
학력
초우트 로즈마리 홀 (졸업)
프린스턴 대학교 (중퇴)[4]
하버드 대학교 (B.A.)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병역
파일:미국 해군기.png 미합중국 해군 중위 전역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신체
185cm[5], O형[6]
정당

의원 선수
2 (상원)
3 (하원)
의원 대수
80, 81, 82 (하원)
83, 86 (상원)



파일:John_F_Kennedy_Official_Portrai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2]

1. 개요
2. 약력
6. 선거 이력
7. 케네디와 닉슨
8. 가족과 개인사
9. 어록
10. 한국과의 관계
11. 기타
1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3. 둘러보기





제35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본격적인 TV 이미지 정치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자 정식 선거로는 최연소 미국 대통령,[3] 최초의 가톨릭 신자인 미국 대통령[4]이자, 8명[5]하버드 대학교 출신 미국 대통령 중 하나이며 비 WASP 대통령이다.[6] 미국 최초의 20세기 출생 대통령이다.[7] 초선 2년 10개월 만에 텍사스에서 암살됐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등과 함께 미국 민주당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미국 진보층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대통령이다. 3차 대전이 될 수 있었던 쿠바 위기를 해결했으며,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켜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절대우위를 갖게 했다. "국가가 당신에게 뭘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으라.."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을 주장해 미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줬다. 레이건과 함께 진영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대통령이다.


2. 약력[편집]


  • 1947. 제80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 1949. 제81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 1951. 제82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 1953. 제83대 상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부)
  • 1959. 제86대 상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부)
  • 1961. 1. 제35대 미국 대통령
  • 1963.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서훈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갑작스러운 죽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3년 11월 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쯤, 케네디는 유세지인 텍사스댈러스 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갑작스런 총탄에 목과 머리를 저격당해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살해되는 장면이 TV로 전국에 방송되며 세계 사람들에게 또다른 의미의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1월 25일, 장례식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자 케네디의 유해는 버지니아 주 알링턴 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4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11구


69,093 (71.87%)
당선 (1위)
초선
194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6,366 (100.00%)
당선 (1위)
재선
195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7,699 (82.28%)
당선 (1위)
3선
195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1,211,984 (51.35%)
당선 (1위)
초선
195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62,926 (73.20%)
당선 (1위)
재선
1960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34,220,984 (49.72%, 303명)
당선 (1위)
초선[8]


7. 케네디와 닉슨[편집]


파일:케네디 닉슨.jpg}}}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토론회에서 맞붙은 케네디와 닉슨.
현대에 들어서 케네디는 양당의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많이 비교되지만,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레이건보다 닉슨을 케네디와 더 많이 비교하는 편이다.

케네디는 어마어마한 부자 가문인 케네디 가문 출신인 반면, 리처드 닉슨은 서민층의 자녀로 태어났다. 두명 다 하버드 대학교를 지망하였으며, 케네디는 공부를 못했는데도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과 친구 사이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입학한 반면 닉슨은 자신의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하버드에 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등록금을 낼 수 없어 결국 입학을 포기했던 과거가 있었다. 케네디는 2차 세계 대전 시절 해군에서의 활약과, 자신의 언론플레이로 태평양전쟁의 영웅 이미지를 메이킹하였지만 닉슨은 비전투 병력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저도 2차 대전에 참전했었습니다"라는 초라한 슬로건을 내걸 수 밖에 없었다. 또 닉슨은 자신과 달리 젊고, 잘생긴데다가 언변도 화려한 케네디에게 엄청난 열등감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닉슨의 열등감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무리수를 저지르는데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세세히 파고 든다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둘의 악연은 길다. 닉슨과 케네디는 같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47년 초선 의원끼리의 친목회에서 초선 의원들이 가벼운 정책 토론을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케네디의 상대로 맞붙은 사람이 닉슨이었다. 게다가 하원 의원 시절 닉슨의 의원 사무실은 361호실이었는데, 바로 옆방인 362호실은 케네디의 방이었다.

이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1953년 케네디의 결혼식에 닉슨이 하객으로 참석했을 정도. 둘은 점심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고, 1959년에는 케네디가 만약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면 닉슨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경선에서 승리해 본선에 나서 닉슨과 붙게 되었다.

이렇듯 출신 성분부터 소속 정당, 생애, 정치 성향까지 모든 면에서 반대인 두 사람이었지만 정작 두명 다 대통령 임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는 점이 미국 현대사의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8. 가족과 개인사[편집]


어릴 적 식탐이 장난 아니어서 식사 전 기도하는 시간에도 뭔가를 몰래 집어먹곤 했다고 한다. 형인 조지프의 음식까지 집어먹어서 조지프가 때리려 했는데, 입에 파이를 가득 물고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또는 조지프의 파이를 낚아채서 달아났는데, 쫓아가 잡고 나니 얼굴이 파이 소로 범벅이 돼있었다고 한다. 달아나는 와중에도 파이를 입 안에 아귀아귀 쑤셔넣었는데 조준을 잘못했던 것. 어느 쪽이든 존의 꼬라지가 하도 웃겨서 조지프가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신사정장에는 당연히 중절모, 실크 해트가 따라오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케네디는 맨머리로 대중 앞에 나섰다.[9] 그 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대중에 나설 때 모자를 대부분 쓰지 않게 되었고, 그 풍조는 전 세계로 퍼져서 모자는 지금도 드레스 코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유난히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당시 케네디의 패션 코드는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아마도 정치가가 디자이너를 제치고 패션 아이콘이 된 사례는 에드워드 8세를 빼면 케네디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케네디도 전통을 완전히 단절시킨 건 아니고 실크 해트를 쓴 케네디 사진은 생각보다 꽤 많이 나온다. 이 전통의 종지부를 완전히 찍은 것은 후임인 린든 B. 존슨.

다만 사생활적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편이다. 원앙 부부 같은 이미지와 달리 재클린 케네디(1929~1994)[10]와의 부부 사이는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케네디가 바람둥이였다는 말도 있으며[11], 그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이 없어 그 심리적 반동으로 성을 지나치게 탐닉했으며 아내 몰래 비밀 검열삭제 파티를 열었다는 주장도 있다. 마릴린 먼로와의 썸싱은 유명한 일화. 이 때문에 먼로와 이혼한 먼로의 전 남편인 조 디마지오는 케네디 일가가 마릴린 먼로를 죽게 한 배후 인물이라고 의심해서 평생을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상대로 매일 야구방망이를 사용해서 폭행을 일삼은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12] 그 밖에도 백악관에서 아내가 외출만 하면 수영장에서 여비서 2명[13]과 검열삭제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묘사에 대해 케네디가나 케네디 행정부 당시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하는걸 보면 루머나 부풀려진 측면도 어느정도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에디슨 증후군 등의 이야기는 선거 당시에도 논란이 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상의 문제는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건강 상태를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정계 은퇴까지도 갈 정도였고, 평생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14] 대학 시절 사고로 척추 수술을 받았고, 엄청난 재활 훈련을 받았지만 그 후유증이 평생 남아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뢰정의 침몰 후 구사일생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허리 부상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선거 당시에는 하루 종일 유세를 뛰고 나면 등(허리)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저녁에 한 시간씩 목욕탕에서 뜨거운 탕 안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그의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사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악관 집무실에서도 거의 흔들 의자에 앉아 국정을 보았던 듯 하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케네디를 다룬 영화에서는 그가 각료들과 오벌 오피스에서 회의를 할 때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크레인에 실려서 비행기를 타는 사진도 사후 공개된 바 있다. 하여튼 이런저런 건강상 문제로 케네디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해서 체중을 불리려 했고 남성 호르몬도 투여했다고 한다.[15] 스테로이드 복용 때문에 얼굴색이 거무튀튀해졌는데,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구리빛 피부로 인식되어 그의 인기를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니 아이러니.

아내 재클린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인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63년 당시 3살의 나이로 아버지 장례식에서 경례하던 모습으로 세계를 울렸으나, 그 역시 커가면서 데릴 해나와의 관계 등으로 여러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1999년 7월 타고 다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갑자기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나면서 한동안 음모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차남인 패트릭 부비어 케네디는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아버지가 죽기 수 개월 전 1963년 생후 2일만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미숙아에 관한 의학 지식이 부족하여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대통령의 아들인 그의 죽음은 이후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과 각종 미숙아 관련 질환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일:Caroline_Kennedy_US_State_Dept_photo.jpg

케네디와 재클린의 아이 중 지금도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첫째인 딸 캐롤라인(1957년 생) 뿐이다. 캐롤라인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2009년 타계)과 함께 버락 후세인 오바마 후보를 공개 지지하여 그의 당선에 기여했다. 2013년 후반기부터 2017년 1월까진 주일 미국대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런 가족사와는 달리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장수했는데, 1890년에 태어나서 무려 100세를 훌쩍 넘긴 1995년에 사망했다. 막내여동생 진 앤도 92세까지 장수하고 2020년에 사망했다.

본인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출세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나 그의 가문은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바로 밑의 여동생 로즈는 가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뒤 평생 병원에서 살아야만 했으며 형 조지프.Jr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전사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녀들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장녀 캐롤라인 뿐이다. 아마도 가문의 모든 운이 존 혼자에게 몰빵된 모양이다.

다만 케네디 본인을 포함하여 몇몇 가문 일원들의 말년이나 개인사가 영 좋지 않다보니, 일명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급의 이야기도 나올 정도인데,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동생 로버트 F. 케네디1968년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 Sirhan Bishara Sirhan (Sirhan Sirhan)}의 총에 맞아 사망.
2. 둘째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도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로 영영 미국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형들과는 달리 장수했다는 것을 위안으로라도 삼아야 할까?
3. 아내 재클린은 케네디 암살 이후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4.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99년 여름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2남
이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결혼
이름
재클린 리 케네디 오나시스 (Jacqueline Lee Kennedy Onassis)
1929년 7월 28일 ~ 1994년 5월 19일
결혼
1953년 9월 12일
자녀
1녀
이름
아라벨라 케네디 (Arabella Kennedy)
1956년 8월 ~ 1956년 8월
2녀
이름
캐롤라인 부비에 케네디 (Caroline Bouvier Kennedy)
1957년 11월 27일 ~ 현재
남편
에드윈 아서 슐로스버그 (Edwin Arthur Schlossberg)
1945년 7월 19일 ~ 현재
자녀
1녀
이름
로즈 케네디 슐로스버그 (Rose Kennedy Schlossberg)
1988년 6월 25일 ~ 현재
2녀
이름
타티아나 셀리아 케네디 슐로스버그 (Tatiana Celia Kennedy Schlossberg)
1990년 ~ 현재
1남
이름
존 부비에 케네디 슐로스버그 (John Bouvier Kennedy Schlossberg)
1993년 1월 19일 ~ 현재
1남
이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주니어 (John Fitzgerald Kennedy Jr.)
1960년 11월 25일 ~ 1999년 7월 16일
아내
캐럴린 잔 버셋 (Carolyn Jeanne Bessette)
1966년 1월 7일 ~ 1999년 7월 16일
2남
이름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 (Patrick Bouvier Kennedy)
1963년 8월 7일 ~ 1963년 8월 9일


9. 어록[편집]


연설에도 상당히 능해서 유명한 연설이 많다. 연설 외에도 다양한 어록이 존재한다.


케네디의 대통령의 취임 영상. 잘 보면 이 동영상에는 전후 미국 대통령이 5명이나 등장한다.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그리고 케네디 본인. 다만 대통령에 재직한 순서가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이라서 촬영된 시점 기준으로 따질 경우 이 영상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은 총 3명.[16] 이 5명의 재임 기간은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8년에 달한다.[17]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자,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18]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19][20]



연설문 풀버전, 한영자막.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21]


동독 한복판에 있는 관계로 '냉전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던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연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동독의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 구축 후 위기감이 고조되던 당시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 동독소련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는데, 케네디는 린든 존슨 부통령을 먼저 보낸 이후 자신이 직접 왔다. 그리고 보다시피 케네디는 명연설로 동독과 소련에 맞서 서베를린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날 무려 5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설이 있었던 시청 주변으로 쏟아져나와 케네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죽했으면 자타가 공인하는 달변가인 케네디가 연설 도중 터져나오는 환호성에 눌려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을 정도였는데, 미국 대통령이 유럽에서 이런 환대를 받은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외에도 자유주의, 세계시민주의, 군축, 도전정신 등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이 묻어나는 어록들이 상당히 많다.

"전쟁은 오늘날 군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 특권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는데 정부끼리는 잘 지내기 어렵더라도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길을 건넬 의지만 있다면 국경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22]


"Those who make peaceful revolution impossible, make violent revolution inevitable."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폭력적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Mankind must put an end to war, or war will put an end to mankind."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Domestic policy can only defeat us; foreign policy can kill us."

내치에서의 실수는 선거에서 지면 그만이지만, 외교에서의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and the moon and the planets are there, and new hopes for knowledge and peace are there. And, therefore, as we set sail we ask God's blessing on the most hazardous and dangerous and greatest adventure on which man has ever embarked. Thank you."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에 오릅니다. 달과 행성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지식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축복을 빌며 항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지금껏 인류가 승선한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위험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단테가 언젠가 말하기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23]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

"우리들(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연계고리는 이 작은 행성의 주민이며, 모두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모두 자손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며,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963년 6월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행한 평화에 관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 바로 전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은지 약 반 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한 연설이다. 비핵화 또는 핵 감축, 핵실험 금지에 대한 첫 걸음을 뗄 수 있게 된 시초가 된 연설로 평가받는다.[24]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원제: Thirteen Days)의 마지막에 케네디 대통령의 실제 연설이 전문 중 일부가 편집된 상태로[25] 육성으로 삽입되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슷하게 러시아와의 가상의 핵전쟁 위기를 다룬 톰 클랜시의 동명의 소설 원작의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마지막에 러시아 대통령이 미 대통령과 합동 연설을 하며 그대로 인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10. 한국과의 관계[편집]


케네디가 1961년 1월 취임한 후, 케네디 행정부 안에선 4.19 혁명의 여파로 1960년 6월 들어선 장면 내각이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져 민중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디 행정부는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장면 총리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2차대전 직후 일본에서의 GHQ 방식을 연상시키는 사실상의 신탁 통치도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5.16이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벌어진 후 이를 보고받은 케네디는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냈다.#[26]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취임사에서도 보이듯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그의 가치관 및 노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케네디는 정치적 혼란, 빈곤에 허덕이던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둘까 고민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북한이 또 남침하기라도 하면, 냉전 당시 진영 싸움에서 밀릴까 우려한 케네디는 1963년 조기 대선을 치르겠다는 당시 군사정부의 타협책 등을 반영해서[27]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한다.[28] 이보다 앞선 1961년 11월, 그러니까 5.16으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케네디는 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를 백악관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의 상황이 지긋지긋했는지, 1962년에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소설가 펄 벅을 만난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펄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오.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벅이 "그건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처럼 영국 지배로 돌아가라는 소리와 같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하자 그도 농담이라는 투로 물러났다고 한다. 카더라성 일화일 수도 있지만, 피터 콘이 저술한 펄 벅 평전에서도 나온다는 걸 보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


11. 기타[편집]


미 역사상 최초의 해군 출신 대통령으로, 그 뒤를 이어 취임한 4명(존슨, 닉슨, 포드, 카터)의 대통령이 모두 해군 출신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기일이 한국의 제14대 대통령 김영삼과 같다. 차이라면 '현직 도중'과 '전직'이라는 것이다. 또 신기하게 김영삼 대통령이 존경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첫번째 천주교 신자인데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정적들의 공격을 제법 받았다. 대통령제가 세계 최초로 시작되어 상당히 많은 수의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서도 천주교 신자 대통령은 이 사람과 조 바이든 단둘밖에 없을 정도로 그리 취급이 좋은 편이 아닌데 그는 처음이기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입담에 위트가 있는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난 대통령이 되어야만 했어요. 아이들 받아주는 아파트 구하기가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란 농담을 한 일도 있고,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인 케네디보다 그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더 집중하여 취재를 벌였는데, 이를 본 케네디는 "저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당시엔 트루먼과 논쟁을 하다 불같은 성격의 트루먼에게 개새끼란 말을 듣기도 했는데[29] 이후 트루먼에게 사과하며 한 말도 나름 유명하다. 자세한 건 해리 S. 트루먼 항목 참고.

에이브러햄 링컨과 여러 면에서 연관이 있다고 호사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다만, 이 항목에서 보듯이 케네디는 태어날 때부터 비교적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링컨은 영 그랬지 못했기에, 즉 차이점도 꽤 있기에 그냥 이런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정도로만 알면 될듯. 그래도 둘 다 네임드 대통령들이다 보니 1991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조사에선 링컨과 함께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20세기 현대(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중 평균 지지율이 가장 높은 대통령이기도 했다. 최고 79%, 최하 56%, 평균 71%.[30] 물론 이는 그의 집권기가 상대적으로 짧았던 영향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높은 수준이긴 했다.

케네디 시점으로 당시 한국은 장면 내각, 국가재건최고회의 때였다.[31] 그리고 북쪽최용건, 김일성.

케네디는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인기가 꽤 좋아, 당시 백악관엔 대통령에게 보내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편지가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케네디 역시 가능한 한 직접 이들의 편지에 답장을 써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난 세계적 유명인사가 2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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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악수하는 이 소년은 훗날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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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원 안에 있는 소년이 바로 반기문UN 사무총장.

항상 입에 시가를 물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시가 애호가였으며, 쿠바와 교역을 끊는 문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H. 우프만사의 시가 1,200개비를 마지막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이것과 관련되어서 나온 이야기 중에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지만 체 게바라는 쿠바까지 사랑했다."라고 비유한 말도 있었다. 케네디가 선호했던 시가는 2002년도에 단종된 H. 우프만사의 머신메이드 시가인 쁘띠 우프만이었다.

닉슨은 재임기 국세청을 동원해 정적들의 약점을 잡고 도감청을 하는 등 온갖 정치공작을 벌였는데, 본인만 욕을 바가지로 먹자 좀 억울했는지 "케네디도 했는데..." 라고 물타기성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일부는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디는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부유층들을 압박하려고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 극우단체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막기 위해 철강업체들 주요 임원들의 자산에 대한 세무조사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정적들에 대한 도감청과 대화의 비밀 녹음도 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후버의 감시를 몰래 알려준 것도 케네디였다고 한다. 킹 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단 둘이서 백악관 정원을 산책하면서 알려줬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대머리[32]라 묻히는 사실인데, 이 사람도 집안 내력으로 탈모가 좀 있었다. 당장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가 그렇고 존의 형제들 역시 모두 M자 탈모가 좀 심한 편이었다. 존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정계에 입문할 때 즈음부터 가르마를 2:8로 바꾸어 앞머리를 앞으로 내렸다가 올리는 스타일로 바꾸면서 앞머리를 이용해 탈모를 요령껏 가렸다. 꽤 먼 후임인 도널드 트럼프의 헤어스타일과 원리가 유사하다. 다만 트럼프의 경우 탈모가 없음에도 그런 스타일을 고수했다. 어쨌든 이런 요령있는 헤어스타일 덕분에 형 조지프나 동생 로버트, 에드워드보다 M자 탈모가 덜 심해보인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머리를 올린 사진을 보면 2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존 탈모는 다른 형제들 못지 않았다. 다만 존과 그의 형제들은 M자가 심하긴 했지만 정수리 탈모 증상은 나타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탈모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1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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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 가(家)>(The Kennedys)에서 그렉 키니어가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대체적으로 역사상의 모습을 잘 묘사했지만, 스캔들과 잔병치레에 시달리는 어두운 모습들도 등장한다. 본 드라마는 그동안 케네디 가를 두고 떠돌던 스캔들, 루머의 상당수를 기정 사실로 묘사하였고,[33] 때문에 방영을 전후로 케네디 가와 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잠깐 등장한다. 검프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로 출전하여 혁혁한 역할을 한 후에 올 아메리칸 팀에 엔트리가 올라가 백악관에 초청되어 케네디를 만난다. 그런데 만찬장에서 닥터페퍼[34] 15병이나 마셔버리는 바람에 케네디와 악수를 할 때 케네디가 "축하하네. 올 아메리칸 팀에 들어간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검프는 오줌이 마려워서 "쌀 것 같아요(I got to pee)"라고 말해버린다. 케네디는 웃으면서 "이 친구가 오줌이 마려운가 보군."이라고 주위에 말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검프는 "그 젊고 멋진 대통령은 차 안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저격당해 죽었다"고 암살 사실을 언급하며, 그 동생 역시 호텔 부엌에서 총 맞아 죽었다(1968년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말한다)며 "역시 형제는 힘든가 봐요"라고 회상한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에게 암살 임무를 주며 특유의 연설하는 어투로 명대사를 뽑아내신다. 그런데 블랙 옵스의 세계관에서는 바로 그 주인공이 케네디를 암살했다. #

좀비 모드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부터 포스를 뿜어내더니 좀비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명언 한 마디씩 외치는 게 장관이다. 음침해야 하는 좀비 모드가 이 사람 덕분에 유쾌해졌다. 근데 대사들을 다 들어보면 반 이상이 피델 카스트로를 까는 내용이다.(...)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고 재클린과 이혼한 뒤 메릴린 먼로와 재혼했다고 언급된다.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 시즌 1의 49번째 에피소드 Profile in Silver에서는 케네디가의 후손 한 사람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서 암살을 막았으나, 그 결과로 제3차 세계 대전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다시 과거로 가서 자신이 케네디 자리에 있음으로서 암살을 성공시키고, 진짜 케네디는 미래로 보내버리는 결말.[35] 보려면 여기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 영국령 북미연방[36]을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계 백인우월주의자 단체의 수장으로 나온다. 초반에 기념물인 두 명의 조지 그림을 훔치고 북미연방의 사업가 정직한 리처드 닉슨을 암살한 범인.

같은 작가의 월드 워 시리즈에서는 얼 워런에게 대선에서 발린다.

영국 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에서는 쿠바 위기 당시 강경책으로 핵전쟁을 일으켜서 미국을 말아먹은 대통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실제 역사대로 온건파였고,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독단적인 핵전쟁 결정 후 막료들이 전멸하자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비밀이 있다.

심슨 가족에서는 에이브 심슨이 제2차 세계대전 때 PT-109라는 함정에서 케네디와 같이 근무했는데,[37] 케네디가 "Ich bin ein Berliner"를 말하자 심슨이 케네디를 나치라고 하면서 동료 수병들과 함께 케네디를 구타한다.[38]

스티븐 킹의 11/22/63에서는 주인공 커플의 활약으로 암살을 모면하지만, 이후 인권 운동에서의 미온적 대처와 극우 세력과의 준내전 및 자연재해[39]로 인해 미국을 말아먹는 초석을 세운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퇴임 후 80년대에 사망했다고. 스티븐 킹은 이 소설 후기에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설이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는 결론이 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에덴의 조각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주적인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려다가 템플 기사단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암살당했다는 설정이다. 리 하비 오즈월드(미끼 역), 린든 B. 존슨,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우연히 케네디 암살 장면을 찍은 위의 에이브러햄 자프루더(진짜 암살범.(!) 브라더 후드의 퍼즐에선 "Z"라고 명명됨.) 전부 성전기사단의 일원.

브라이언 싱어의 시리즈 영화 엑스맨 2에서 오프닝 부분 백악관에 잠입한 나이트 크롤러가 백악관의 보디가드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위에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가 비춰진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사실을 아는 관객들은 나이트 크롤러가(본인의 의도가 아닌 세뇌당했지만)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할 인물이라는 복선을 보여주는 약간의 영화적인 장치. 또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선 뮤턴트(!)였음이 밝혀졌다. 그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눈치챈 에릭이 동족인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암살범 누명을 뒤집어쓰고 펜타곤 비밀감옥에 10년간 갇히게 되었다. 케네디의 능력을 묻는 질문에 각본가는 아마도 자신의 말을 남들이 따르게 하거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능력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이터널시티 세계관에서 흑막이나 다름없는 외계인(게스트)의 존재를 발표하려다가 암살당한 걸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버틀러:대통령의 집사'에서는 제임스 마스던이 해당 역할로 출연했다. 몸이 약해서 몰래 거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버틀러와 대화를 하기도 한다.

보드게임 1960: 대통령 만들기를 통해 역사를 재현해볼 수도 있다. 케네디의 대선 승리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TV 토론회와 각종 이벤트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게임.

게임 배틀스테이션 미드웨이의 미국 캠페인 2번째 미션인 필리핀 방어전에서 주인공인 헨리 워커의 작전 파트너로 등장한다. 당연히 그가 정장으로 근무했던 'PT-109'를 타고 나오며 일본군의 병력 수송선 하나를 격침시키고 해안 방어를 하기 위해 본진으로 귀환한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워커의 불평을 들으며 대화를 나눈다. 게임 내내 데미지를 한 대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적 판정을 가진 듯 하다.

리부트 이후로 대체역사물 게임이 된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그를 레퍼런스한 프롭스트 와이어트 3세라는 캐릭터가 있다. 출생지나 집안 배경을 보면 노린 캐릭터다.

프레이(2017)에서는 케네디 암살이 실패한 덕분에 케네디는 천수를 누리다 못해 2031년 까지 살았다.[40]

마피아 3에서 존 도노반이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대상을 찾는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High Hopes'라는 케네디를 위한 캠페인 음악을 불렀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2시즌에 재클린 케네디와 영국에 방문하는 것으로 2시즌에 잠깐 등장한다. 덱스터에서 연쇄살인마 주인공으로 열연했던 마이클 C. 홀이 해당 역할로 출연했다. 일반적인 매체에서 그려지는 케네디의 체격보다 배우의 체격이 매우 커서 스테로이드제 등으로 몸집을 불린 케네디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창작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제36대 부통령으로 등장한다.[41][42] 그후 닉슨이 실제 역사 처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케네디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후 사회안정과 정치적 통합등 미국 사회를 진정 시킬려는 정책을 펼치다가 실제 역사처럼 암살당한다.
그후 하원의장인 존 W. 매코맥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1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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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간 이름인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당시 보스턴의 시장이었던 존 F. 피츠제럴드의 딸이자 존 F. 케네디의 어머니인 로즈 케네디(역시 아일랜드계다.)의 결혼 전 성(maiden name)이다. 케네디 외에도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을 중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리처드 닉슨, 린든 B. 존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등이 있다.[2] 그림을 그린 화가는 케네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길 원했다고 한다.[3] 당시 만 43세 6개월. 역대 최연소 대통령은 미국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당시 만 42세 11개월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4] 케네디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가톨릭 신자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 등장했다.[5] 8명 하버드 출신 미국 대통령 명단: 존 애덤스(2대), 존 퀸시 애덤스(6대), 러더포드 B. 헤이즈(19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조지 W. 부시,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이 중 부쉬와 오바마는 각각 비지니스 스쿨과 로스쿨을 다녀 학부 출신은 아니다.[6]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다.[7] 전임자들인 해리 S. 트루먼(1884년)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890년)보다 한 세대 가까이 젊었다.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888년생이다.[8] 1963.11.22 피살[9] 전임 대통령들 가운데도 대중들 앞에서 중절모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언론 매체를 위한 부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미국 정치인들에게 중절모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케네디의 대선 라이벌인 리처드 닉슨도 당시에는 중절모를 썼다.[10] 덧붙이자면 재클린은 나중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11]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의 이중생활 영향을 받아 이런 성생활이 생겼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때 영화 제작자인 조지프는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염문을 일으키곤 하였다.[12] 이 여성 편력 문제는 케네디가 형제들한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3] 속칭 fiddle과 faddle.[14] 가톨릭 교도로서 병자성사 받는다는 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좀 심하게 아프면 받을 수 있는 게 병자성사지만, 저 시기 병자성사는 종부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려 그야말로 죽기 전에 받는 의식이었다. 그는 자기 수명이 45세를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만 46세에 암살로 죽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15] 이런 류의 소문이 신빙성 있게 돌기만 해도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에게 슬슬 기었다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였다.[16] 닉슨은 전직 부통령, 존슨은 현직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17] 이 영상에 등장하는 5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임기의 시작 또는 끝이 순탄치 않았다. 트루먼과 존슨은 전임 대통령의 급서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례이며, 케네디는 첫 임기를 끝마치기도 전에 암살당했고, 닉슨은 재선까지는 성공했으나 2번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그나마 예외였던 아이젠하워조차 예전 직장 문제인종 갈등으로 인해 여러 모로 골치를 앓았다.[18] 케네디의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로, 사실 이 말을 처음 쓴건 클리블랜드 대통령이라고 한다. 다만 이 문장의 경우 한국에서는 국가주의의 표본처럼 인용되는 경우도 많은데, 정작 뒷 문장을 보면 그야말로 문맥을 무시한 인용이다.[19] 결국 이 문장의 앞 내용은 '우리 세대는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자유를 지킬 역할을 부여받았고, 우리는 그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생략된 이 문장의 뒷 내용은 "여러분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만큼 우리 정부에게도 요구하라. 우리 정부는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내용이다. 즉, 핵심은 "미국 국민, 정부, 전세계인들 모두 실천하여 자유를 지키자."라는 내용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을 전제로 실천하고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국민(주인)들을 국가가 얼마든지 뒷바라지 해주겠다는 내용을 정반대로 국가주의라고 이해하면 일종의 악마의 편집이라 볼 수 있다. 연설문 전문(한국어 번역).[20] 다만 본래 의미대로 이해하더라도 비판거리는 있는 연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케네디가 당선되어 취임하는 그 순간에도 당시 징병제를 운용하던(1973년 폐지) 미국 정부는 젊은이들을 베트남 정글이란 사지에 소모품처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란 주장은 완전 연도를 잘못 맞춘 해석이다. 케네디가 재임중일때 이미 베트남전쟁의 확전의 기운이 보이는건 사실이었지만 케네디 본인은 본 항목에 나온 그대로 오히려 베트남 확전을 경계하고 발을 빼려고 했다는 증거가 많으며, 무엇보다 케네디 생전 베트남은 미국이 개입중인 여러 냉전기 분쟁지역 중 하나에 불과했고, 미군의 개입도 간접적 지원에 머물렀지 후임자 존슨, 닉슨 시절 처럼 대규모 지상군 파병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따라서 베트남전 시기 흔히 생각하는 파월장병의 사회적 처우 문제도 아직 부각되지 않았던 시절이다.[21]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뜻으로 말하려면 부정관사 ein을 빼고 말해야 하고, Berliner는 젤리가 든 도넛의 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ein을 넣고 말하면서 실제 뜻은 '나는 베를리너 도넛입니다'가 되므로 독일어 어법상 틀렸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부정관사 ein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말할 때에는 생략하지만, 이 연설에서 케네디는 실제로 베를린 출신이 아님에도 베를린과의 강한 유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로 문장을 구성하면 'Ich bin ein Berliner'는 문법적으로 옳을 뿐더러, 케네디의 취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문맥상 "나 역시 한 명의 자유인인 서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의미이므로. 영어로 치면, 'I am (also) one of Berlin citizens'라고 말한 셈이다.[22]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백악관에 방문했을 때 한 얘기. 그리고 이 학생들 중엔 반기문도 있었는데, 그는 UN 사무총장이 된 후 이 얘기를 전하는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23] 보통 잘못된 형태의 양비론이나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하는 발언이다. 케네디는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인디애나 주 유세 도중 이 발언을 처음 하였다. 이후 1963년 평화봉사단(Peace Corps) 행사 때 다시 이 발언을 꺼냈다. 그런데, 이 발언을 케네디가 한 것은 맞지만 정작 단테는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지옥편에는 이런 구절이 없다.[24] 원문: "What kind of peace do I mean and what kind of a peace do we seek? Not a Pax Americana enforced on the world by American weapons of war. Not the peace of the grave or the security of the slave. I am talking about genuine peace, the kind of peace that makes life on earth worth living, and the kind that enables men and nations to grow, and to hope, and build a better life for their children -- not merely peace for Americans but peace for all men and women, not merely peace in our time but peace in all time...I speak of peace, therefore, as the necessary, rational end of rational men. I realize the pursuit of peace is not as dramatic as the pursuit of war, and frequently the words of the pursuers fall on deaf ears. But we have no more urgent task...Our problems are manmade; therefore, they can be solved by man. And man can be as big as he wants. No problem of human destiny is beyond human beings. Man's reason and spirit have often solved the seemingly unsolvable, and we believe they can do it again...And if we cannot end now our differences, at least we can help make the world safe for diversity. For in the final analysis,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s. And we are all mortal."[25] 생략된 부분은 5부분으로 다음과 같다. 'Not a Pax Americana enforced on the world by American weapons of war. Not the peace of the grave or the security of the slave.', ' and the kind that enables men and nations to grow, and to hope, and build a better life for their children', 'but peace for all men and women', 'I speak of peace, therefore, as the necessary, rational end of rational men. I realize the pursuit of peace is not as dramatic as the pursuit of war, and frequently the words of the pursuers fall on deaf ears. But we have no more urgent task...', 'And man can be as big as he wants. No problem of human destiny is beyond human beings. Man's reason and spirit have often solved the seemingly unsolvable, and we believe they can do it again...And if we cannot end now our differences, at least we can help make the world safe for diversity.'[26] 5.16 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당시 (장면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윤보선 대통령은 오히려 이를 말리는 포지션을 취했고, 장면 총리와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포기한 사실이 있다.[27] 베트남 파병도 미국에 잘보이기 위해 이때 군사정부가 먼저 거론하는데, 케네디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후임인 린든 존슨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군 파병이 결정된다.[28] 케네디 정부와 군사정부가 겹치던 시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3%대로, 개도국 시절임을 감안해도 매우 저조했다. 이를 보면 미국의 지원이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29] 그래도 트루먼은 존 케네디를 지지했다.[30] 출처: 위대한 대통령은 무엇이 다른가(2000).[31] 재밌게도 케네디는 박정희와 서로 동갑이었다. 그리고 둘 다 암살되었다. 한명은 리 하비 오즈월드, 한명은 김재규.[32] 그것도 아이젠하워 이후로 확실히 대머리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없다. 그나마 케네디의 후임자인 존슨이나 먼 훗날의 포드와 오바마도 대머리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갈수록 머리카락이 자라나서 완전 대머리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33] 예컨대 케네디의 복잡한 여성 관계(마릴린 먼로도 등장한다), 부모인 조지프 1세와 로즈 여사의 불화, 심지어는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 사이의 불편한 모습까지 나올 정도. 다만 케네디의 암살은 별다른 음모론 없이 오스왈드의 범행으로 묘사.[34] 국내 자막에는 콜라라고 번역되었다. 영화 개봉 당시만 해도 국내에 닥터페퍼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35] 마지막 부분의 대사 등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케네디 암살 미스터리는 사실 이런 바꿔치기 때문에 벌어진 음모라는 설정이다.[36] 소설의 배경이 미국 독립 전쟁이 조지 워싱턴과 조지왕의 화해로 끝나서 미국이 영연방에 통합된 후 200년이 지난 1980년대이다.[37] 실제로 케네디는 2차 대전 때 PT-109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했다.[38] 엄밀히 말해 케네디가 실제로 저 대사를 말할 때는 2차 세계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 시기였으므로, 2차대전 당시 "내가 바로 (미국의 적국)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하면 미군에 맞아도 싸긴 하다. 일종의 말장난.[39] 사실 이 자연재해는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했고 과거를 바꾸는 바람에 벌어진 인재이다.[40] 무려 124세이다.[41] 이 세계에서는 2차대전때 추축국이 승리한 세상이고, 미국은 2차대전때 패배 했지만 본토는 공격당하지 않았다. 그후 미국은 엄청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 잔존 민주당과 공화당이 합당해 '공화민주당'을 창당한다.[42]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