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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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약력
2. 국공내전 시기
3. 만주 시절
5. 마오쩌둥 사후
6. 상하이 시장 시기
7. 후야오방 사후
8. 집권 기간
9. 퇴임 후
10. 사망


1. 초기 약력[편집]



파일:JZM1947.jpg

대학 졸업사진.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출신. 본적은 장시 성이라고 한다.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장상칭은 중일전쟁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런데 친아버지 장시쥔은 왕징웨이 정권에서 복무한 한간이라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난징대학살을 직접 겪었다고 한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처음에 국립중앙대학[1][2]에 들어갔다가 일본군 지배 치하에 있던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전학을 했다.


2. 국공내전 시기[편집]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상하이의 한 회사에 전기 기술자로 취직하였다.

장쩌민 스스로는 대학 시절 당시 불법 지하조직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1949년 중공 정권이 성립하기 전에 입당한 것은 확실하다. 국공 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기울고 1949년 상하이를 점령하자 그는 당에 의해 발탁되어 여러 기술직 공무원을 한다. 1949년 왕즈핑과 결혼을 하게 된다.


3. 만주 시절[편집]



파일:Jiang_Zemin_in_Moscow.jpg

모스크바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모자와 안경을 모두 쓴 인물이 장쩌민이다.

1954년 만주 창춘에 있는 디이자동차회사(第一汽车)에 부임했다. 이 회사는 소련과 기술 제휴를 맺고 있었고, 1955년 장쩌민 및 여러 기술자들은 모스크바의 자동차 회사에 파견 연수를 받고 1956년 돌아왔다. 디이자동차는 중국 최초로 소련 ZIS 트럭을 라이센스 생산했고, 장쩌민은 이 공로로 공장의 고위직에 오른다.

1956년 백화제방 박가쟁명의 반동으로 실시된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 또는 "반동"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도 공장 내의 반동을 솎아내라는 중앙의 지시에 소극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1958년 대약진운동 당시에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연료를 빼앗긴 데다가, 중소결렬로 소련의 기술 지원이 끊겨 자동차 생산이 반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4. 문화대혁명[편집]



파일:JZM1962.jpg

1962년 당시.

1962년, 만주에서 본거지인 상해로 전근되어서 상해 전기과학연구원의 부소장으로 부임했다. 1965년에는 우한에 있는 열기관 연구소의 소장 및 당 부서기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부인은 이사를 허가받지 못해서[3] 20년 간 별거 상태로 지냈다. 이 때문인지 중국에서는 부부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소문이 많으며, 장쩌민이 여러 애인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그 중 한 루머로는 마음에 든 유부녀 가수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벌어지자, 우한은 홍위병에 의해 점령되었고, 홍위병은 장쩌민을 여러 번 비판했다. 그리하여 2년간 57간교라는 수용소에서 죽어라 삽질을 했다.

1970년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제1 기계공작부에 대외 담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당시 중국은 몇 안 되는 우방이었던 루마니아[4]에 공장 건설을 원조를 해주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 년간 파견되었다. 여기서 루마니아어를 익혔다고 한다.


5. 마오쩌둥 사후[편집]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국정을 농단하던 4인방은 마오 사후의 권력 투쟁에 대비하여 본거지인 상하이에 군 부대 및 지지자들로 하여금 농성 준비를 시켰는데,[5] 장쩌민을 비롯한 여러 상하이 출신 고위 인사들은 중앙정부의 명령을 받고 상하이에 파견되어 이런 4인방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켰고, 상하이 지역의 소요 사태는 무산되었다. 이후 장쩌민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79년 화궈펑을 축출하고 집권한 덩샤오핑은 여러 산업 개발 시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1983년 3월 장쩌민을 새로 성립된 전자공업부 부부장에 임명했다. 장쩌민은 이 해 6월에는 이 부서의 부장이 되었고, 여러 전자 공업 진흥책을 펼치게 되었다. 장쩌민 아래에서 1984년 중국 최초의 정지궤도의 통신 위성을 실은 창정 3호의 발사에 성공하였고, 그는 이 공로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원로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6. 상하이 시장 시기[편집]


1985년 새로운 임기가 시작되는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었다.[6] 개혁 개방 이전부터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던 상하이에서 여러 발전 시책을 내놓았고, 상하이는 여러 경제 개방 특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986년부터 중국 공산당 독재에 항의하는 여러 운동이 중국 전역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나, 장쩌민은 자기 지역인 상하이 내에서의 저항 운동을 유혈 사태나 소요 사태 없이 진정시켜 중앙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상하이 동제대학, 상하이 과기대를 비롯하여 상하이로 학생시위가 번지기 시작하자 장쩌민은 학생운동에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모교인 상하이교통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당의 영도의 필요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 위해 방문했다. 이에 학생들이 흥분하여 야유를 시작하자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서 자신 있으면 나와서 이름 까보라고 학생들에게 대놓고 호통을 쳤다. 이에 학생운동 지도자 한 사람이 좌중을 진정시키자 장쩌민은 다시 강연을 시작하였다. 장쩌민은 상하이교통대학에 들어오면서 본 대자보에 게티즈버그 연설이 인용된 것을 언급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는데 다른 학생이 그의 강연을 끊으면서 게티즈버그 연설이 누가 한 연설인지는 아냐고 공격하자 이중에서 게티즈버그 연설을 영문으로 읊을 수 있는 놈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반격한 후, 게티즈버그 연설 전문을 영어로 즉석에서 외치고 서방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너희 애송이들보다는 내가 더 잘 안다, 너희들은 서방 민주주의의 겉모습만 알고 그 안에 담긴 실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좌중을 제압해버렸다. 이 때문에 상하이 학생시위는 며칠 주춤했지만 12월 19일 이후에 복단대학, 동제대학의 시위가 격화되고 상하이교통대학도 여기에 합류했다.

하지만 당 중앙에서는 “폴란드에서 야루젤스키바웬사를 때려잡은 것처럼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조져야 한다!”와 같은 강경론이 득세하였고, 이들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에 비해서[7] 1986년의 위기는 상당히 부드럽게 넘어가게 된다.

장쩌민이 보여준 '경정치, 연경제' 성향은 덩샤오핑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지방에 오래 내려가 있던 것은 역으로 리펑이나 양상쿤과 달리 인민들의 미움을 받을 악역을 한 일이 없다는 점에서 장쩌민 입장에서 민심 수습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이 때문에 장쩌민은 베이징 서기 리시밍, 텐진 서기 리루이환 같은 지방의 경쟁자들은 물론이고 중앙의 차오스, 쑹핑, 야오이린 등을 다 제치고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발탁될 수 있었다.[8]


7. 후야오방 사후[편집]


1989년 4월 15일, 개혁파의 거두로 학생시위의 책임을 추궁당해 총서기 및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나 정치국 위원으로만 남았던 후야오방이 정치국 회의 중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중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민주화와 부패청산 등을 외치면서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갔는데 인원이 수십만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5월달이 되자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후야오방을 추모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장쩌민은 언론인들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야오방의 총서기 해임을 비판하는 보도를 한 상하이 일간지 세계경제보도를 가차없이 폐간하고 편집장 친번웨이를 해임해버렸다. 장쩌민의 단호한 조치에 공산당 원로들은 매우 흡족해했다. 천윈과 리셴녠은 장쩌민을 매우 크게 칭찬했고 덩샤오핑은 양상쿤을 불러 장쩌민을 높이 평가했다. 양상쿤도 동의하면서 그가 시위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마르크스 구절들을 영어로 읊을 수도 있을 정도라고 칭찬했다. 특히 휴가를 상하이에서 보내곤 했던 상하이 출신 천윈과 역시 겨울 휴가를 상하이에서 보냈던 리셴녠을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매우 극진하게 우대했는데, 덕분에 천윈과 리셴녠이 강력하게 장쩌민을 후임 총서기로 추천했다. 한편 왕전은 리펑을 총서기로 추천했으나 리펑은 전국민의 증오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원로들이 반대했다. 양상쿤은 차오스를 총서기로, 펑전은 완리를 총서기로 추천했으나 천윈은 완리가 너무 늙어서 어렵다고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원로들의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은 장쩌민으로 발탁되었다.

5월 27일, 덩샤오핑은 양상쿤, 천윈, 리셴녠, 펑전, 덩잉차오, 왕전, 보이보 등 원로들을 소집하여 이미 사표를 집어던지고 광장에 나가 시위대의 편에 선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누구를 총서기로 선출할지를 논의했다. 모두가 덩샤오핑의 의견을 요구하자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가장 적절한 선택인 것 같다고 했다. 원로들은 모두 동의하였고, 장쩌민은 베이징으로 긴급호출돼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에게 당 총서기를 맡으라는 지시를 듣는다. 이는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것처럼 리펑을 지지한 강경파 왕전도 다른 원로들이 일관되게 장쩌민을 지지하자 다음과 같은 말로 찬성을 표했다.

그대들 세 사람이 동의했으면 정해졌소. 나는 장저민을 잘 모르지만 샤오핑 동지의 눈은 틀리지 않는다고 믿소.


여기에 더해 후야오방과 같이 숙청된 후치리를 대신하여 천윈의 추천으로 조직부장 쑹핑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양상쿤은 톈진시 제1서기 리루이환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추천, 역시 보선되었다. 장쩌민은 부임 준비를 위해 일단 상하이로 되돌아갔다가 5월 29일 베이징으로 돌아오는데, 덩샤오핑은 이미 시위대의 유혈 진압을 결정해 놓고 있었고, 6월 4일 군 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게 된다.[9] 이 와중에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 이외의 후계자로 낙점해 놓았던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이 시위대에 동정적인 발언을 했다가 실각했고, 장쩌민이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장쩌민 후임 시장이 바로 주룽지인데 주룽지는 장쩌민과 1980년대 상하이에서 초반부터 같이 일해 왔으며, 호흡이 잘 맞아서 나중에 장쩌민은 그를 총리로 불러들인다.

장쩌민은 1989년 6월 23일에 열린 13기 5중전회에서 숙청된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당 총서기에 선출, 중군위 주석에 선출되었으며 당연히 정치국 상무위원에 보선되었다. 기껏 개혁파 자오쯔양을 조졌더니 상하이에서 갑툭튀한 장쩌민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에 대해서 리펑, 쑹핑, 야오이린 등은 불만을 토로했고 중군위 주석에 장쩌민이 선출된 것에 대해서는 양상쿤이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에 총서기 자리를 빼앗긴 리펑도 가세했다. 덩샤오핑은 이들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 양상쿤을 중군위 제1부주석에 선출하고, 상무부주석에 류화칭, 중군위 비서장으로 양상쿤의 동생인 총정치부 주임 양바이빙을 선출하였다. 보수파들은 장쩌민이 경험이 없는 인물이니 역으로 그를 조종하는 것도 쉬울 것이라 여겨 최종적으로 장쩌민의 총서기 및 중군위 주석 선출에 동의하였다. 8월에는 자신을 상하이에서 보좌했던 여러 부하들을 중앙에 불러들여 여러 중요 자리를 맡기면서 자신의 사단으로 삼는데, 이들을 속칭으로 "상하이방(上海幇, 상하이 마피아)"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는 장쩌민 밑에서 총리를 지낸 주룽지가 있다. 상하이 인사인 장쩌민은 여러가지로 다른 계파의 견제를 받았지만, 상하이방이라고 불린 이 사단에 상당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미 장쩌민을 후계자로 결정해 놓은 덩샤오핑은 다른 원로들에 비해 발언권이 컸기 때문에, 다른 계파의 여러 경쟁자들을 찍어 누르고 덩샤오핑의 후계자 자리를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1993년에는 양상쿤의 뒤를 이어 국가원수국가주석 자리에 오르고, 1997년 후견인인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실질적인 중국 최고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


8. 집권 기간[편집]


전반적으로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었고, 1997년부터는 자신감을 얻어 "대국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를 가진다"라는 식의 '유소작위(有所作爲)', 즉, 필요한 역할은 한다로 나아갔다.#[10]

최고직인 국가주석(政)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黨)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軍)까지 겸임한 최초의 인물. 이전의 국가 주석은 상징적인 자리로 리셴녠, 양상쿤이라는 당 원로가 맡았고[11], 총 서기는 당의 최고 직함이 된게 공산당 중앙위 주석이 폐지되며 분리되어 나온 1982년부터이므로 후야오방자오쯔양을 계승한 셈이며[12], 군사적 자리인 군사위 주석만 덩샤오핑을 계승한 셈이다. 이 자리는 모두 후진타오에게 계승된다.

다만 중국에서 최초로 당-정-군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인물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데, 일단 장쩌민은 정부의 최고위직인 국무원 총리를 겸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이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3], 국무원 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타이틀은 장쩌민이 아닌 화궈펑이 된다. 어차피 덩샤오핑은 저런 공식 감투가 없어도 충분한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차오스(喬石, 중앙 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 - 1980년대 이래 당시 당내 권력 3위)가 그의 권력에 맞섰으나 1998년 이미 그는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차오스를 은퇴[14]시켰다.[15] 이는 쩡칭훙(曾慶紅)을 영입했던 게 절묘했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리펑과 연대하고 캐스팅 보터 리루이환을 지지시키며 후진타오기의 리커창 후임도 막아버렸던 "장쩌민의 제갈량"이었다.

집권 기간이 의외로 매우 긴데, 마오쩌둥(27년) 다음으로 2위(15년)을 집권했다. (시진핑이 실버크로스 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물론 기간 차이는 넘사벽. 이건 덩샤오핑이 81년에야 주석이 되어 8년 만에 자리를 물려준 탓이 크다. 거꾸로 말하면 천안문 사태가 아니었으면 이런 승계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임기 기간 대부분 동안 넘사벽 덩샤오핑이 배후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계자로 세운 후로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지위를 은퇴하고 평당원으로만 머물러 있었으며, 언론 노출도 거의 없이 모든 정무를 장쩌민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막후에서는 엄청난 권위로 다른 보수파 당 원로들 및 장쩌민의 경쟁자들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장쩌민을 밀어주었다.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이 결실을 맺어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방중해서 장쩌민만 회동한 것을 가지고, 일부 한국 언론이 왜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을 만나지 못했냐고 비판 기사를 썼는데, 당시 덩샤오핑은 형식상 아무 직함 없는 평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상과 만나는 것은 격이 안맞는 일이었고,[16] 노태우뿐 아니라 다른 외국 인사들도 덩샤오핑이 아니라 장쩌민을 만났으며 이후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쩌민이 진정한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이 1992년 "개혁 개방만이 살길이다"라고 강조한 남순 강화를 할 정도로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공산당 내의 보수파의 반발이 심했고, 마오쩌둥의 유산이 중국 사회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장쩌민 시절에는 완전히 이를 청산하고 중국이 개국되었다. 즉 확실하게 개국된 중국은 바로 이 장쩌민의 시대에 열렸다. 주식시장코카콜라, NBA 중계,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개방. 한국과의 수교도 그의 시대에 있었다(1992년). 최초 방한(김영삼), 중국의 실권자로서는 두 번째 방미[17](빌 클린턴),[18] 최초 방일(오부치 게이조와 함께 # 당시 기사) 등 진기록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집권 당시에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이 덕에 당시 재임 중이었던 빌 클린턴과 사이좋게 지낸 편이였다.

2000년 8월 말에 중국의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미국 CBS의 시사프로 '60분'에 출연해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러스와 인터뷰를 했는데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 기자와 대화할 정도로 능통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스스로는 중학교 때 영어를 배웠다면서 자신의 영어 실력에 대해 겸손해 하지만, 통역이 되기도 전에 직접 기자의 말을 알아듣고 즉흥적으로 답하며 때론 직접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결코 영어 실력이 보통은 아니다.[19] 게다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상황을 추궁하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멘탈도 매우 강단 있는데, 특히 천안문 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하는 발언까지 나와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기사

여하간 천안문 항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은 직후 집권한 장쩌민에게 있어 사회 안정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필수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공안 이외에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확대 개편하였다. 사실상 한국의 전경 내지는 의경과 비슷한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중국 내부의 사상과 자유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장쩌민의 임기 중에 파룬궁 신도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는 정책 역시 시작되었다.

임기 중 러닝 메이트인 국무원 총리리펑(李鹏, 전반기 5년)과 주룽지(朱镕基, 후반기 5년)[20] 참고로 이들 모두 이과다. 이른바 삼개 대표 사상을 "주요 전략 사상", 쉽게 말하면 핵심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대강 정리하면 경제 성장, 문화 진보, 민생. 뒤에 보면 알겠지만 후진타오도 한 건 했다.

강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유는 姜씨고 장쩌민(江澤民, 강택민)은 江씨다. 한국어 위키 백과에만 있던 말로 지금은 사라졌다. 여담으로 전임자 덩샤오핑도 비슷하게 등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장쩌민과 달리 덩샤오핑은 진짜로 등애의 후손이 맞다.

매우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나,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제외한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직을 2003년 후진타오에 넘기고 퇴임하였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를 남겼는데, 중공 중앙군사위 주석은 2004년까지 1년간 더 유지하면서 바로 군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밀당인 셈인데, 상하이방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설이 많다. 상하이방은 주로 처음부터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공청단 파와는 달리, 여러 국영 기업체에서 실적을 올려서 관리로 전직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장쩌민 자신도 국영 자동차 회사가 출세의 시발점이었다.), 이재에 밝은 면이 있지만 그만큼 비리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반 부패 단속에서 걸리는 인물들이 많았다.

9. 퇴임 후[편집]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121108151112684.jpg

후진타오 옆자리를 차지한 장쩌민이 현임 지도자 같은 인상을 보여준다.

2011년 7월 6일, 사망설이 나돌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바로 오보였다고 공식 발표했고, 이 방송을 낸 aTV 사장은 사임했다. 병원입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퇴원했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진타오 주석 바로 옆 자리를 배정받아 차기 지도자 시진핑보다도 높은 의전서열로 그의 권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주었으며, 실제 전국대표대회 결과 구성된 신임 중국 지도부도 그가 이끄는 상하이방과 협력 관계인 태자당 소속 시진핑이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직도 대부분 상하이방과 태자당 소속 인물들이 물려받았다. 도올 김용옥의 견해에 의하면,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장쩌민이 워낙 권력 의지가 강하고, 주위에 패거리를 잘 만드는 경향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언가 제어책이 없으면 종신 집권을 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자기 생전에 이미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임으로 못박아 놓았다고 한다. 사실 후진타오는 재임 내내 장쩌민 또는 장쩌민 일파와 권력 다툼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치고받는 동안 태자당에서 말석 시진핑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시진핑은 사실 태자당 내에서도 보시라이에 밀렸으나, 보시라이가 권력을 남용하다가 몰락하면서 태자당에서 선두에 나서고 결과적으로 집권까지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장쩌민의 후계자이자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정치생명이 끝나기 전까지 이야기다. 장쩌민에게 군사위 주석을 물려받은 후에도 파워게임에서 밀리던 후진타오지만 천량위를 부정부패 문제로 정치생명을 끊은 것을 기점으로 여러 상하이방 인물들을 몰아내며 최고지도자다운 파워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군사위 주석직을 바로 넘겨주는 대가로 장쩌민과 동시에 정치에서 물러나는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이 거래가 성사하자, 시진핑은 5세대 1기 상무위원들 7명중 4명이나 상하이방이었지만 이들을 집요하고 철저히 몰아냈다. 특히 상하이방의 중추이자 중국에서도 손에 꼽는 막강한 권력자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를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보내 텃밭에서 채소나 기르는 신세로 만들며 시진핑이 장쩌민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한마디로 시진핑 시대에서 장쩌민은 실질적 영향력이 없다고 봐도 좋다. 게다가 상하이방은 본질적으로 1970-80년대 장쩌민과 상하이 지역에서 일한 사람들이 주축이며, 장쩌민이 주석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신진 세력들이 충원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노장화되어 은퇴하자 당내 세력이 약화되었다. 상하이방의 가장 젊은 세대가 시진핑과 비슷한 1950년대생이다. 여기에 기업체 출신이 많아서 부패 단속에 걸리는 자들이 많았고, 시진핑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반부패운동을 벌여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들을 상당수 축출했다. 젊은 세대가 없는 계파 특성상 시진핑 이후에는 소멸되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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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4일, 해외의 반중 화교 언론 보쉰[21]파룬궁 계열 대기원시보에서 장쩌민이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전격 체포되었다는 가짜뉴스# 보도했으나, 승전 70주년 전승절 열병식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함께 참석한 것이 생중계로 잡히면서 거짓임이 드러났다. 아들 장몐헝의 체포설도 반중언론이 지어낸 가짜뉴스며, 정부가 검열하는 바이두 백과에 멀쩡히 현재 상하이 과기대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다고 나오고 있다. #

2019년 10월 1일 70주년 국경절(건국 기념일) 기념 열병식에도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시진핑, 후진타오와 함께 천안문 망루의 주석단에 나왔다. 후진타오가 집권시기보다 나이가 많이 들고 백발이 되어서 조금 덜 드러났지만, 90대의 나이 때문인지 혼자 걸을 수 없을 만큼 심히 노쇠해진 모습을 보였다. 열병식 직후 실시된 대규모 민간 퍼레이드에서 자신의 대형 초상화가 지나가고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지도자 시절 모습이 비춰질 때도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도 염색의 힘을 빌려서 그런지 90이 훌쩍 넘은 사람치고는 아주 동안인데, 염색을 안한 후진타오보다 젊어 보인다는 평도 있을 정도다. 2021년 7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 행사에 후진타오 전 주석은 참석했지만, 장쩌민은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에 2022년 96세 생일잔치를 맞아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홍콩 명보에 올라왔는데, 확실히 노쇠함과 연로함이 드러난다.#

다만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 불참하게 되면서 자신의 후임인 후진타오불명예 퇴장은 보지 않게 되었다. 여담으로 자신의 계파인 상하이방 및 후임자 계파인 공청단 소속의 국무위원은 7인방에서 배제되면서 시진핑 주석 중심의 시자쥔 독주가 확실해져 정치 권력의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10. 사망[편집]



파일:장쩌민 영정.webp

'''{{{#ffff00
공식 영정[22] }}}'''


파일:강택민사망뉴스속보.jpg

'''{{{#ffff00
CCTV가 전하는 장쩌민의 사망 소식. 공산권 특유의 조문 표현인, '장쩌민 동지는 영원불멸할 것(永垂不朽)이다.' 라고 쓰여있다.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30일 오후 12시 13분, 상하이시 징안구에 위치한 화둥의원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향년 96세. # 사망 원인은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 부전이라고 한다. # 실로 오랜만에 장의위원회에 해당하는 치상위원회(治丧委员会)가 구성되었으며, 시진핑이 장의위원장에 해당하는 주임위원을 맡았다. 명단은 여기로.

전근대의 군주들을 포함해 역대 중국 대륙의 지도자들 중에서 덩샤오핑을 넘어 가장 장수한 인물이 되었다.[23] 따라서 공산화 이후 중국 지도자 중에서는 최장수가 된다.

사망 보도 이후 신화사, 중국중앙전시대 등 공공기관 및 바이두 같은 민간 웹사이트들이 메인 페이지를 일주일동안 흑백으로 갈아끼웠다. 관영 및 홍콩마카오의 지상파 방송사도 방송 로고를 흑백으로 바꿨다.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 신화문,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에 조기가 걸렸다. 12월 6일 추도식 묵념시간에 맞춰 베이징, 상하이, 선전증권거래소가 3분간 매매정지되었다. 온라인 게임도 이날 일시적으로 서비스를 중지하였다.

추도대회를 하루 앞둔 5일 영결식이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에서 엄수됐다.#

고인의 유언대로 화장된 유해는 본인의 출신지에서 이름을 딴 장카이급 호위함 양저우함에 실려 상하이 근해에 뿌려졌다.# 류샤오치(칭다오 근해), 덩샤오핑(남중국해)에 이어 유해가 바다에 뿌려진 세 번째 중국 지도자가 되었다. 범위를 넓혀보면 저우언라이 초대 총리 겸 외교부장도 중국 전역에 유해가 뿌려진 바가 있다.
[1] 금릉대학(金陵大學)과 더불어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공내전 이후 난징대학과 동남대학의 일부로 쪼개졌으며 대만의 국립중앙대학 또한 이 학교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 이 대학은 현재도 명문대이지만, 장제스 집권 당시에는 수도가 난징이었기 때문에 현재보다 위상이 훨씬 높은 중국 제1의 공과대학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난징대와 샹하이교통대는 중국의 SKY로 불리우는 6대 대학교(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상하이교통대학, 푸단대학, 난징대학, 저장대학)에 들어간다. 현재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 위치한 베이징대와 칭화대가 1, 2위로 굳어져 있고 샹하이에 위치한 상하이교통대와 푸단대가 3, 4위를 경쟁하는 구도이지만, 장쩌민이 다니던 시절에는 국립중앙대학이 명문대들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국내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대학이었다.[2] 여담으로 우리에게는 한국광복군으로 유명한 김준엽고려대학교 총장도 광복 이후 이 학교의 역사학 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3] 당시 중국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식량 배급제였기 때문에, 허가 받지 않으면 식량을 구할 수 없어서 굶어죽기 딱 알맞았다.[4] 차우셰스쿠가 소련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가까웠다.[5] 화궈펑이 사인방을 기습 체포한 후에도 이런 지지자들은 남아 있었다.[6] 상하이 시장의 임기는 2년이었다.[7] 부주석 왕전은 자신에겐 300만 해방군이 있다면서 4인방도 조진 우리가 그까짓 교수와 학생 나부랭이들이 무서울 줄 아느냐고 폭언, 까부는 놈들은 자기가 관제묘의 주창처럼 직접 모가지를 날려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총으로 쏘고 구덩이에 파묻는 ‘화끈한 처리’ 아니면 냉동고에 처박아서 열려죽이는 '냉정한 처리' 저 둘 중 하나만이 필요할 뿐이라며 냉정하게 사태를 처리해야 한다는 총서기 후야오방에게 대놓고 빈정거릴 정도였다.[8] 물론 그가 장상칭의 양자로, 혁명 2세대라서 보수파들의 지지를 추가로 받을 수 있다는 점 역시 그의 장점이었다. 쉽게 말해 혈통빨 꿀 좀 빨았다[9] 일부 반중 인사들이 장쩌민을 천안문 학살의 책임자로 놓기는 하지만, 이렇게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장쩌민은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의 대부분을 상하이에서 보냈고, 사건 당시에는 인수 인계 때문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진압 결정이나 유혈 사태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10] 그 뒤가 후진타오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우뚝 섬)며, 후진타오 후반은 돌돌핍인(咄咄逼人, 기세등등한 힘의 외교)이라는 말도 나온다. 여하간 도광양회의 기조 속에 슬슬 유소작위를 갖추는건 지금까지도 중국 패권의 기본 원리다.[11] 이건 북한도 그래서 김일성이 주석으로 전면에 나선 건 1970년대고 그 이전엔 주석제가 아예 없었고, 북한 헌법상 국가 원수는 김두봉 같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았다.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었고 이는 행정 수반에 해당한다. 물론 조선 노동당 총 비서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노동당에 장악된 최고 인민 회의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2] 당 주석은 군사위 주석보다 서열이 높아서 실제 서열과 모순이 컸으므로 총서기를 따로 분리하여 덩샤오핑이 후계자를 기르는 직위로 이용했다.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 회의란 기형적 회의체를 통해 참석권이 없는 덩샤오핑의 말을 들었다. 여러모로 실권자와 당직이 모순이 된 건 사실이었던 셈이다.[13] 당시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는 없었다.[14] 73세로, 70세 이상이 넘어 은퇴.[15] 차오스는 장쩌민과의 대립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룬궁(무해백익이라고도 말했다.)에 긍정적이고 인권을 강조하던 면이 있던 인물인지라 서구 측에서는 안타깝게 여기던 감이 있었다. 물론 최근 나온 그의 회고록에서도 천안문 사태는 빠져있다.[16] 전직 국가 원수 자격으로 만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중국 주석 직함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전직 국가 원수로 대우하기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17] 중국 주석 직함을 달고 방미한 걸로 따지면 최초로 볼 수 있다.[18] 최초 방미의 기록은 덩샤오핑지미 카터 대통령 재임 시절 기록했다. 여담으로 최초로 방중한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다.[19] 실제로 장쩌민은 1990년 미국 ABC의 유명 앵커 바바라 월터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천안문 항쟁 당시 탱크를 막아섰던 화제 인물인 왕웨이린의 생사를 의심스러워 하는 서방 측을 향해 어느 정도 실마리가 되는 답을 직접 영어로 미국 기자에게 전하기도 했다.[20] 이름 가지고 농담이 많긴 했지만 현대판 포청천으로 "100개의 을 준비해라. 99개의 관은 그들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것이다"라며 죽기 살기로 부패와 싸워 온 이미지의 인물. 이 이미지는 원자바오가 계승했다. 리펑은 자오쯔양 때부터 러닝메이트로 자오쯔양보다 덩사오핑의 지지로 실권이 강했으며, 주룽지 역시 실권이 강한 편이라서 얼굴 마담들은 아니었다.[21] https://boxun.com/으로서 미국에 서버를 둔 반중 언론이다. 장쯔이보시라이 성상납설을 보도했다가, 장쯔이의 고소미에 걸려 거액을 물어주고 정정 보도를 했다.[22] 나무위키의 프로필 사진보다 색조가 조금 더 밝다.[23] 중화권 전체로 본다면 리덩후이대만 총통이 향년 97세로 가장 장수했다. 또한 군주로 한정한다면 춘추시대 위나라위무공이 약 94세로 가장 장수했다.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라 상무위원단이 곧 지도자인 시절도 있어서 상무위원까지 확대하면 13기 상무위원 쑹핑106세로 생존중이며 다른 80~90대 원로들보다도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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