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문/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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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롯데 자이언츠 코치 1기 시절
2.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
3.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시절
4.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
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시절
6. 롯데 자이언츠 코치 2기 시절
7. 야인 시절
8. LG 트윈스 감독 시절
9. 롯데 자이언츠 감독 2기 시절
11. 지도 스타일


1. 롯데 자이언츠 코치 1기 시절[편집]


태평양에서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직후 8년 만에 고향팀 롯데로 다시 돌아와 1군 투수코치로 재직하다 1997년 시즌 후에 한번 잘리고[1] 1998년 한 해를 백수로 지낸다. 그러다 1999년에 다시 롯데로 돌아와서 2001년까지 투수코치를 했다. 이 시기에 신고선수 출신의 박지철과 삼성에서 이적한 박석진을 전천후 스윙맨으로 키워내고 에밀리아노 기론의 투구폼을 약간 보정해 주면서 롯데의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소소하게나마 기여한다.

참고로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중 펠릭스 호세 퇴장 사태 당시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선수단 철수를 주도했던 박정태를 뜯어말린 사람이 바로 양상문 코치였다. 구단 직원까지 막무가내로 밀쳐내며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외야 출입구로 나가려던[2] 박정태를 홀로 막아섰다. 박정태가 훗날 이 상황을 회상했는데 "당시에 아무 것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는데 옆을 보니 양상문 코치님이 계셨다"고 말했다. 양상문의 설득에 넘어간 박정태와 롯데 선수단은 결국 덕아웃으로 발길을 돌렸고 선수들에게 "오늘은 무조건 이겨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2.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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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LG 트윈스 코치시절

그 후 2002년 LG 트윈스로 팀을 옮겨 김성근 감독 밑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 전 시즌 팀 방어율이 5점대를 넘으며 막장이 된 LG 투수진을 개선시켜 팀 방어율을 3점대 중반으로 낮췄고, 이동현(1983)의 포텐을 터뜨렸고 류택현큰 승호, 심지어 엘팬 모두가 포기했던 김민기, 경헌호까지 각성시키며 LG의 좌투수난, 불펜투수난을 해소시킨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2002~2003년에는 뛰어난 투수코치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 당시 김성근 감독도 투수코치로서 양상문의 능력을 거듭 높이 평가했으며 투수 관련 권한은 모두 양상문에게 일임했었다. 지금도 김성근 감독은 의외로 양상문의 코칭 능력을 준수하게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훗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아직 병역을 필하지 못해 해외 전지훈련에 가지 못한 고효준의 전담 인스트럭터로 양상문을 붙여준 적도 있다.


3.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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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롯데 자이언츠 감독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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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대학 후배 선동열과 함께.

2003년 시즌 종료 후, 백인천의 후임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취임 당시 나이가 불과 42세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LG 트윈스의 신임 감독에 부임한 1961년생 동갑내기 이순철과 더불어 현직 최연소 감독이었다.[3]

참고로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부산고 출신 감독이다. 그 전까지는 경남고와 부산상고 출신만 감독을 역임했다. 당시 롯데는 8888577의 절정기로 전년도 성적이 딱 3할을 간신히 찍었던 막장의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2004년 시즌에 팀을 맡았던 양상문 감독 체제 하에서 롯데는 그 해도 꼴찌로 끝마치긴 하였지만, 막장이었던 전년도에 비해 50승을 기록했고 승률을 4할대로 끌어올리며 나름 고무적으로 마무리했다. 이어 2005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4년 연속 꼴지의 사슬을 끊고 5위를 기록, 재계약이 유력해 보였으나 구단의 새로운 투자계획이 발표되면서 재계약이 무산되었다. 후임자로는 강병철 감독이 부임했다.[4]

사실 이 시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투수코치 양상문과는 달리 상당히 호의적인 편인데, 일단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던 팀을 이듬해 5위로 끌어올렸고, 백인천 시절 트레이드당할 뻔하는 등 부진에 빠져 있던 에이스 손민한을 다시 일으켜 세워 2005년 MVP를[5] 타게 하기도 했으며, 이대호, 박기혁, 강민호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는 등 리빌딩에 꽤 공헌했다는 평가다. 여하튼 그의 재임기간에 롯데가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막장팀에서 그래도 미래가 존재하는 팀으로 바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로이스터 시절에 롯데가 상위권으로 도약한 데는 양상문 감독 재임 시절의 리빌딩이 기여한 바가 분명히 있다. 그의 뒤를 이은 강병철 감독이 다시 77을 기록한 것도 고평가에 한몫했다.

물론 어두운 면도 있다. 가장 큰 것은 리빌딩 과정에서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고참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더구나 그 본보기가 공교롭게도 박정태였던지라 당시 일부 롯데 팬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욕을 얻어먹었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쾌조의 컨디션이었던 박정태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개막 엔트리에서 빼버리고 롯데 2루수급 자원들이 돌아가면서 줄부상을 당해도 끝끝내 박정태를 올려서 쓰지 않고 외면했다. 당시 롯데 주전 2루수였던 조성환이 4월 24일 LG전에서 사구를 맞고 손등 골절로 시즌 아웃되고 난 후, 대체 자원인 신명철박준서까지 죄다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져 2루수 자원이 바닥인 상태에서마저도 끝끝내 박정태를 올려 쓰지 않고 그 해 입단한 대졸 신인 박진환을 올렸고, 또다른 베테랑 박현승 또한 양상문 감독 재임기간 중에는 거의 전력 외 취급을 받았다. 꾸준히 1할대의 타율을 마크하던 박기혁은 전 경기를 선발로 기용하면서도 고참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자, 롯데팬들이 참다참다 5월달부터는 롯데 구단 홈페이지 갈매기 마당에 '박정태 1군 등록 릴레이'를 펼치고 심지어 홈경기 외야석에 '우리는 악바리 박정태를 원한다' 는 플랜카드를 걸고 시위까지 벌이며 농성을 벌였다. 결국 박정태는 8월 초에야 1군으로 콜업될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양상문은 어쩌다가 한 타석씩 대타로만 기용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6] 그러나 당시 팀을 장기적인 계획하에 리빌딩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노장 박정태를 배제하고 신진 선수들을 기용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팬들의 수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상문은 이 기조를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특히 감독 첫 해인 2004년 당시 아직 포텐이 터지지 못한 이대호, 김주찬, 박기혁 셋은 거의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양상문과 더불어 죽도록 까였다. 당시 이대호 기용에 대한 롯데팬들의 울분

다만 상술했듯이 의도적으로 박정태박현승 등 베테랑들을 배제한 것이 이듬해 패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욕을 먹어가며 키운 어린 선수들이 시즌 초반 선전해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5월부터 연패를 거듭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양상문 체제 하에 베테랑들이 정리되거나 부진한 롯데로서는 위기에서 중심을 잡고 이끌어 줄 리더십이 부재했다. 결국 다시는 상위권으로 올라갈 탄력을 받지 못하고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4강 탈락이 확정된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선 선수단 분위기가 감독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해졌고, 그 와중에 투수조의 모 고참선수와는 기자 등 외부인들이 지켜보는데서마저 서로 언성을 높이는 불미스러운 모습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4년 연속 꼴찌팀을 5위로 끌어올린 소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양상문과 재계약하지 않고 신임으로 강병철 감독을 재영입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덤으로 후임 강병철 또한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편이라,[7] 강민호를 전 경기 선발출전시키며 밀어줬고, 전역한 김주찬 또한 죽도록 욕을 먹어가며까지 끝까지 기용했으며, 정보명이나 이승화, 이인구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 기회를 주면서도, 전임 양상문과는 달리 고참을 기준없이 홀대하지 않고 최소한 공정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양상문 재임 기간 동안 경기를 거의 뛰지 못해 은퇴 위기에 내몰렸던 노장 박현승은 강병철 감독 밑에서 다시 기회를 얻어 2007년 0.325의 타율을 기록하며 가까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비록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팀 성적을 전년도 꼴찌에서 5위로 끌어 올리는 등 리빌딩의 성과가 보이자 프런트는 상위권 전력이라고 오판을 하게 되었고, 양상문 감독과의 재계약 대신 롯데의 2회 우승을 이뤄낸 강병철을 다시 데려 오게 된다. 당시 야구인들은 양상문의 재계약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었고 실제로 2005시즌 종료 후 팀의 마무리훈련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 급작스럽게 강병철로 교체되는 바람에 롯데구단은 전임 감독에 대한 예의도 없다고 언론에서 두들겨맞기도 했다.

총평을 하자면 비록 연차가 많은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과정 가운데서 잡음이 있었고 선수단 관리에도 헛점을 드러내어 본의 아니게 롯데 감독 생활을 일찍 마무리하긴 했지만, 전임 백인천에 의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롯데를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5위로 끌어올리며 미래가 기대되는 팀으로 만들었던 부분은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 평가들은 LG 감독 시절에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4.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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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LG 트윈스 코치시절

2007년부터 2008년까지 LG 트윈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첫 해인 2007년에는 2년 연속 꼴찌를 달리던 팀 방어율을 6위로 끌어올렸으나, 2008년 도로 꼴찌[8]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사실 이 시기는 이순철이 팜부터 1군까지 팀을 싸그리 초토화시킨 이후 후폭풍을 맞고 있던 시기라 코치 입장에서 뭘 어찌할 도리조차 있었을 리 만무하고 2007년만 해도 제대로 된 선발은 봉중근[9], FA로 데려온 박명환[10] 외에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정찬헌, 정재복만 건지는데 만족해야 했다.


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시절[편집]



2009년에는 정영기 감독을 이어 롯데 2군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정영기 감독시절에 비해 2군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신 영화에 출연했다.[11] 박정태로 감독이 교체된 이듬해인 2010 시즌에도 롯데 2군은 퓨처스(구 2군) 남부리그 4위를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과연 2군 성적이 양상문 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을지만은 의문이다.


6. 롯데 자이언츠 코치 2기 시절[편집]


2010년에는 페르난도 아로요 코치의 뒤를 이어 롯데의 1군 투수코치를 지냈다. 2010년 양상문 코치 하에서 롯데 투수진이 폭망했다고 평하는 팬들도 있지만 이전 시즌 혹사로 인해 조정훈, 손민한 두 에이스가 동시에 이탈한 점을 감안하면 아로요 시절보다 2단계 떨어진 팀방어율 6위를 기록했던 2010년이 객관적으로 나빴다고 보긴 어렵다.

2010년 양상문 투수코치 시절을 비판하는 이들에 따르면 2007 시즌에 팀 세이브 최하위였다가 아로요 투수코치 하에서 2008, 2009 시즌을 거치며 안정적으로 변해왔던 불펜진의 경우 2010 시즌 들어서 양상문 코치가 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사망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2010년 롯데 투수진 자원 자체가 썩 좋지 않았고 부상이 많았다. 특히 손민한조정훈 두 에이스의 동시 이탈은 뼈아펐다. 이는 선발야구를 하고 있던 롯데에게는 엄청난 악재였다. 2009년 다승왕을 차지하며 맹활약했던 조정훈은 급격한 이닝 증가로 부상의 우려가 컸었는데, 역시나 2010년 초부터 부상으로 고전하더니 결국 이탈하여 이듬해에 공익으로 훈련소에 입대하고 말았다. 전국구 에이스 손민한의 이탈 역시 타격이 컸다. 부상으로 2009년 WBC에서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던 손민한은 부상 와중에도 2009년 14경기에 등판하며 팀에 기여했다. 그러나 손민한은 2010~2012 세 시즌 동안은 아예 한 경기도 나오지 못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또한 외국인 용병 두 명 모두 투수인 경우가 많았던 당시 타 팀에 비해서, 투수 사도스키와 타자 가르시아를 용병으로 쓰던 롯데는 상대적으로 투수력에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2010년에는 선발진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빠지다보니 불펜 투수들의 출장 수가 늘어나며 혹사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전반적으로 투수 운영에 큰 어려움에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선수보는 눈이 없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 주장은 다소 편파적이다. 조정훈을 뽑은 스카우터진에게 왜 쟤를 뽑았냐고 조정훈이 보는 앞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근데 양상문의 말도 틀린 게 아닌 게, 당시 타팀에서는 윤석민, 오승환 등을 뽑았던 것 비해 롯데는 상위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훈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정훈 선택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롯데 팬들 사이에 말이 말았다. 조정훈이 2009년 팬들과 전문가들의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포크볼을 뿌려대며 공동 다승왕[12]을 차지할 때는 롯데의 선택이 옳고 양상문의 판단이 틀린 듯 하기도 했으나... 김수완은 원래 양상문이 2군에 있을 시절 방출하려고 했었으나 박정태를 위시한 2군 코칭스탭들이 뜯어말려서 방출은 면했다.[13] 이후 김수완이 잠깐 반짝했을 때 김수완을 방출하려 했던 양상문이 까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시즌 초 양상문이 직접 선발후보가 될 수 있다라고 했던 진명호의 경우 2009년 3경기 선발로 나와 3경기 동안 7⅓이닝 동안 16실점 하면서 평균자책점 19.64라는 아름다운 성적을 기록하면서 진명호를 추천한 양상문까지 같이 까였지만, 2011년에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오히려 팬들로부터 혹사 걱정을 받고 있다.

가장 간단하게 납득하고 싶다면 LG와 롯데의 경기를 보자. 양상문이 투수코치를 넘어 감독까지 하는 곳투수코치를 넘어 감독까지 했던 곳의 대결을 보면 확연히 이해가 될 것이다.

2010년 8월 13일 라이언 사도스키가 볼넷으로 만루를 채웠을 때 양상문이 올라왔었는데, 그 후 이종범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았다. 그러자 인터넷에서는 양상문 디버프, 양상문 왜 올라왔냐!면서 까댔다. 사도스키는 결국 퀄리티 스타트를 했으니 까일 여지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 연임 지지 광고가 팬들에 의해 올라왔는데, 고작 사흘만에 천만 원을 찍었다. 이에 롯데 프런트는 당혹감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팬들은 '계획이 들통나서 당황했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름아닌 양상문이 로이스터의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설이 퍼진 이후였기 때문이다. 2010년 롯데의 성적을 보면 문제는 불펜진인데 롯데의 블론세이브가 2010년 16개인데[14] 이 중 절반만 세이브 했어도 시즌 2, 3, 4위 싸움은 혼전이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롯데의 엄청난 공격력을 고려해본다면 1위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임을 첫 번째가 감독이 져야 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는 투수코치다. 그런데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감독을 잘라 놓고 역시 책임을 져야 할 투수코치가 차기 감독이 된다면... 이 광고는 롯데 팬들이 구단을 얼마나 불신하는지 잘 보여주며 만약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얼마나 많은 팬을 잃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결국 롯데 구단이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3년 연속 고배를 마신 제리 로이스터 감독, 박영태 수석코치, 한문연 배터리코치와 함께 세트로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함에 따라 롯데에서의 코치 생활을 마감했다. 로이스터 연임 찬성과 반대를 떠나서 롯데에 관심있는 이들은 대체로 박영태, 양상문 해임에 한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환호하는 모습을 보였다.[15]

양상문의 최대 업적은 롯데에서 방출당한 것이다. 이 문장이 어디에도 있는 것 같지만 넘어가자


7. 야인 시절[편집]


퇴진이 발표된 후인 2010년 10월 6일, 롯데 자이언츠 사이트의 팬 게시판인 갈매기 마당에 작별 편지(?)를 올렸다. 투수코치에서 물러남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한 마디로 간추리면 자기는 다 잘했고 실패는 전부 다 제리 로이스터 때문이라는 자기변명이다.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일개 코치가 공개적으로 상관인 감독을 비판한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사례로 이 당시 야구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고, 언론으로부터도 적절치 못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같이 짤린 박영태 前 수석코치가 그나마 허심탄회하게 소감을 밝히고 쿨하게 물러나는 인터뷰를 한 것과 대비되어 더더욱 까였다.[16]

이후 롯데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물러난 양승호 감독의 빈 자리를 찾고 있는 모교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갈 거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고려대에서는 일단 길홍규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승격시킨 채 대학리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창원시를 연고로 한 제9구단 엔씨소프트의 감독 선호도 조사에서 선동열, 제리 로이스터 다음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가을의 전설 최동원보다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기사 롯데 감독 시절 4년 연속 꼴찌였던 막장팀을 일으켜 세워 리빌딩을 하면서 동시에 성적도 어느정도 냈던 감독으로써의 역량이 크게 반영된 듯 하다. 반면 최동원 감독은 한화 2군 감독 시절의 성적 때문에 감독으로써의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2011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SK 와이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합류, 병역 문제로 인해 해외 출국 가능 나이를 넘겨 스프링캠프에 가지 못하고 국내에 잔류하게 된 고효준을 전담 지도하게 되었다.

김성근 SK 감독은 양상문의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했으나, 3월 17일 시범경기에서 놀라운 양상문 매직의 힘, 월미도 바이킹 제구! 하지만 이때 임팩트가 엄청나서 그렇지, 막상 정규 시즌에 들어왔을 때는 고효준은 전년에 비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탈삼진과 승수가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좌완 롱맨 보직도 꾸준히 등판했고, 스프링캠프를 못 간 것치고는 준수한 시즌을 보낸 편이었다.


8. LG 트윈스 감독 시절[편집]



파일:양상문 LG 감독 주문.jp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감독시절


8.1. 2014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상문/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2. 2015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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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016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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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17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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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롯데 자이언츠 감독 2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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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18~2022).svg 롯데 자이언츠 감독시절

2018년 10월 19일 LG 트윈스 단장직에서 사임 의사를 밝힌지 불과 몇분 뒤 롯데 자이언츠의 신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17] 이로써 2010년 이후 9년만에 고향팀으로 돌아왔으며, 감독으로는 2005년 이후 14년만에 돌아온 셈. 다만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환영과 비판이 엇갈리고 있으며, LG의 팬들은 양상문이 아예 LG에서 나가게 됐다며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 미묘한 분위기이다.

양상문은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애정이 확실한 사람이고, 리빌딩을 병행하면서도 나름 5위라는 성적을 이끌어내며 롯데의 암흑기를 끝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투수 조련 능력이 좋으니 취약한 불펜에 힘을 채워 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유망주에게도 기회가 많이 갈 것이라는 전망. 롯데에서도, LG에서도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많이 줬던 만큼 리빌딩에 적합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2018시즌 LG 투수의 몰락에 양상문이 감독 시절 행한 이닝 쪼개기와 이른바 '출첵야구'도 한 몫을 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18] 또한 '투수는 몰라도 타선 운영에는 별 재능이 없다, 공격에서 구시대적 스몰볼을 선호했다[19], 베테랑들과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도 꽤나 존재하는 편. 다만 팀 내 최고참인 이대호부터 양상문의 양아들이었으며, 주장인 손아섭 또한 2009년 2군에 있을 당시 양상문 밑에서 지도를 받아 이후 롯데를 대표하는 타자로 자리잡은 것을 감안하면 이전 롯데나 LG 감독 시절 같은 베테랑 배척이 일어날 확률은 훨씬 낮다.

우선 감독이 되고 나서 NC에서 짤린 최기문 코치와 야인으로 있던 윤재국 코치를 영입하고[20] 그 이후 경찰청에서 투수코치를 맡고 있던 강영식 코치와 개성고에서 코치를 하던 이우민 코치, 두산에서 작전코치를 하던 공필성 코치를 다시 롯데로 불러들였다. LG에서 엄청난 욕을 먹던 강상수를 데려오지 않았고[21] 예전에 강민호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최기문 배터리코치를 다시 영입해오며 평가가 조금 올라갔다. 그 외 강영식과 이우민도 현역 시절부터 성실성이 높다는 호평을 많이 받아 왔기에 이 부분 역시 평가가 좋다.

그리고 2019년 다시 감독이 되면서 10개 구단 감독 중 최고령 감독(만 58세)이 되었다.[22] 사실 감독 치고는 비교적 평균에 속하는 나이긴 한데, 전반적으로 10개 팀들의 감독 연령이 높지 않으므로 그런 듯 하다.


9.1. 2019년[편집]


해당 문서로. 약 13년만에 고향으로 금의환향했지만 창단 최초 10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취임 272일인 2019년 7월 19일 이윤원 단장과 함께 동반 사임했다. 올시즌 불명예 최초 기록을 여러번 쓴 롯데 자이언츠는 감독 부임 첫 해 중도 사퇴라는 기록 또한 쓰게 됐다.[23][24]

고향팀인 롯데에서 마지막으로 불명예 퇴진을 하면서 추후 타 팀에서도 감독은 되기 어려운 전망이 지배적이다.[25]

1년 뒤 롯데 자이언츠는 202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투수,야수,포수 각각 최대어인 김진욱나승엽 그리고 손성빈을 지명을 할 수 있었고, 나승엽은 메이저리그행을 포기하고 롯데에 입단하여 롯데가 2021 KBO 신인 드래프트의 승리자가 되며 양상문 감독의 유산이라며 재평가가 되고있다.양크나이트기사


10.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편집]


이후 SPOTV 해설위원으로 지내다가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선임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SPOTV 해설위원 명단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해설위원과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11. 지도 스타일[편집]


롯데와 LG 시절 모두 투수 코치로서의 평가가 박한 편인데 양상문의 투수 코칭은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변화구는 슬라이더로 통일하고 스트라이드는 무조건 좁혀서 상체위주의 투구를 한다. 양상문의 투구 철학은 스트라이드를 좁혀 각을 날카롭게 한 횡 슬라이더와 포심 패스트 볼의 투 피치. 한마디로 박명환 스타일의 투수를 만들려고 했다.[26][27]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양상문의 투구 이론은 일단 스트라이드 되는 오른발의 내딛는 위치를 조정해 축이되는 왼발과 스트라이드되어 뻗는 오른발의 위치를 좁게해서 상체의 반발력과 회전 반경을 크게 해서 공의 구력을 높이고 적절하게 릴리스 포인트를 조절해 즉시전력으로 만들어 써먹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릴리스 포인트를 전혀 못잡아 탄착군 형성이 불완전한데다 이를 획일적으로 뜯어 고치는 방식이다보니 투수들이 제대로 적응을 못한다.

게다가 이런 투구폼은 당장 급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동양인의 체구적 특성에는 맞지 않는다. 일단 하체 힘의 전달력이 좋지 못하니 상체의, 특히 어깨의 반발력에 기대는 점이 커서 온 몸을 이용해서 던질 때보다 어깨에 충격이 더해져 장기적으로는 부상을 야기시킨다.[28]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투수들의 신체적 특성이나 스타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투구폼을 획일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나마 상체 위주 투구폼이 맞았던 선수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투수들은 해맨다. 롯데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장원준의 투구폼을 제대로 못 가르쳐서 4번이나 폼을 바꿔가며 해맨 일화가 있다.

LG 트윈스 투수코치로 있던 시절 봉중근, 이범준, 정찬헌의 투구폼을 전부 똑같이 뜯어고쳤고 2010년 롯데 투수코치로 부임하자마자 송승준, 장원준 등 롯데 투수들의 스트라이드가 전부 좁아졌다. 더구나 2009년 롯데 2군 감독으로 있는 동안 2군 투수진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해 결국 선발 대체 요원들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직접 찾아낸 이재곤김수완.[29]

구질 면에서도 현대 야구에서 중시되는 종으로 떨어지는 구질이나 옆구리 투수에게 필수적인 잠기는 구질을 못 가르친다. 양상문이 자신의 장기인 슬라이더 외의 브레이킹 볼에 대해 얼마나 이해도가 떨어지는지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해설 중 했던 한마디로 드러난다. 이날 클레이튼 커쇼의 커브를 보고 양상문은 커브는 안 좋은데 패스트 볼이 좋아서 커브도 먹힌다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를 한 적이 있으며, 투수코치로서 현대야구에 대한 공부가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은근히 투수 혹사 논란도 있는데, 롯데 감독 부임 첫 해인 2004년 임경완은 한 경기 84구를 던지는 등 시즌 내내 혹사당하다 허리가 부러진 채로 군에 입대한 뒤 언더핸드 수준으로 스트라이드를 내리고 나서야 간신히 재기할 수 있었고, 신인이었던 조정훈을 고교 시절 혹사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급하게 올렸다가 강병철 감독 2년 내내 2군에 머물게 만들었다.

자신이 점찍은 유망주는 얼만큼 욕을 먹더라도 터질 때까지 꾸준히 기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롯데의 이대호, 강민호, 장원준, 그리고 LG의 채은성이 있다. 그리고 롯데에서는 부산고 후배인 윤성빈을 KBO 최초로 시즌중 해외연수를 보내면서까지 키우려 하고 있다.

LG 감독 부임 후 임정우에게 스플리터를 가르쳤는데, 과연 양상문이 그간의 오해와 달리 종 변화구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인가의 평가 척도가 될 확률이 높았다.그리고 임정우는 이 스플리터를 제1 변화구인 커브에 이어 제 2~3 구종으로 쓰고 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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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IMF 외환 위기의 여파로 다수의 구단들이 인력 구조조정을 하던 시기였다. 코치로 이름을 알린 야구인들 중에 1997~1999년에 프로팀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외환 위기의 불똥으로 본의 아니게 구단을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도 이 부분에 대한 고증이 잘 되어 있는데 부산 갈매기 코치였던 성동일은 연봉이 반토막났고 서울 쌍둥이 코치였던 성동일은 아예 코치를 그만 둬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2]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은 경기장 구조상 1루 외야석 뒤에 원정팀 버스를 대놨다. 그래서 원정팀이 퇴근할 때는 항상 1루측 파울지역을 걸어서 외야 출입구로 나갔다.[3] 다만 양상문이 학교를 1년 조기입학하는 바람에 고려대 79학번으로 60년생들과 동기고, 반대로 이순철은 고교 시절 1년 유급해 62년생-81학번과 동기기 때문에(덕분에 이순철은 빠른 63년생인 선동열과 친구로 지낸다) 실질적으로는 2학번 차이난다.[4] 당시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는 팀을 상위권 전력이라고 오판해서 우승을 내부목표로 정하고 순조롭게 리빌딩을 진행중이던 양상문을 짜르고 우승 경험이 있는 강병철을 영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5] 프로야구 역사상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팀에서 시즌 MVP가 나온 것은 2005년의 손민한과 2012년의 박병호 단 두 명뿐이다.[6] 당시 롯데의 베스트 라인업 가운데 2할 5푼 이상을 치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음에도, 타격감 유지가 힘든 대타 포지션에서도 출루율이 5할을 넘을 정도로 감이 좋았던 박정태를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한 점에서 어떻게 보면 선동열양준혁에게 했던 짓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7] 롯데 감독 2기 시절 김시진이나 장효조 등의 노장을 배제하고 전준호, 박정태, 김응국 등의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한화 감독 시절에도 욕을 먹어가며 이정훈, 이강돈 등을 정리하고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를 신인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밀었다. SK 감독 시절에도 무수한 욕을 먹어가며 채종범, 이호준, 이진영을 밀어주었다. 자세한 건 강병철의 양아들 항목 참조.[8] 시즌 성적은 46승 80패로 8위 6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666858)로 망신 당하고 또 떨어져서 옷을 벗어서 망신당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9] 메이저에서 선발로 뛴 기간은 얼마없지만, 중간계투로 뛴 경험이 꽤 있다. 마이너에서는 선발로 많이 뛰었다고[10] 박명환이 유튜브에서 밝히는 바에 팔꿈치가 탈이나서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무시하고 계속 투수 로테이션을 짜고 있었다고... 그렇게 양상문에 의해 부랴부랴 복귀한 박명환은 이듬해 부활은 커녕 퇴물로 전략해 버린다. 근데 양상문 스타일에 근접한 선수가 박명환 이였다고 한다. 근데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11] 당시 서울 히어로즈의 2군 구장이었던 고양시 원당구장에서 어깨 통증으로 힘들어하던 손민한을 갈구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이 시기는 2009년 초였고 손민한이 어깨 통증으로 2군에서 재활하던 시기였다.[12] 두 명도 아니고 로페즈, 윤성환과 3인 공동 다승왕이었다.[13] 김수완은 인터뷰 때 유독 양상문에게는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단이 그 건 이후 언론플레이까지 했으니...[14] 주자가 루상에 있는 상태에서 블론세이브되는 터브 블론세이브는 절반인 8개.[15] 다만 한문연 코치 해임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호불호가 갈렸다. 그래도 박영태, 양상문이 잘린 것에 대해 대부분 기뻐한 것은 사실이다.[16] 하지만 로이스터 안티 성향인 갈매기 마당의 일부 팬들은 글 내용에서 보다시피 투수코치 말도 안 듣는 로이스터야말로 막장 감독이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양상문을 무능한 감독 덕에 함께 휩쓸린 희생양으로 몰았다.[17] 양상문, LG 단장 사임 먼저? 롯데 감독 선임 먼저?[18] 투수코치였던 강상수의 합작도 있었지만. 그래도 강상수 코치는 KIA 타이거즈 투수총괄로 갔다가 5월 김기태 경질과 함께 강등되었다.[19] 이는 2019 시즌에 구시대적 레벨스윙 및 스몰볼을 고수하는 1군 타격코치 김승관을 그대로 선임하는 행보로 현실화되었다. 당장 두산 베어스정경배 코치도 메이저리그를 벤치마킹하고 공부하려는 자세와 대조되는 부분.[20] 그러나, 윤재국 코치는 김성근 사단으로 분류되어 능력에 의문표가 붙고 있다. 김성근이 2017년 경질된 이후로 김성근 사단의 코치들은 재취직이 힘든 상황.[21] 정작 강상수는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고 KIA 타이거즈 코치로 갔다.[22]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감독 1기 시절에는 부임 당시 만 42세로 리그 최연소 감독이였다. 물론 며칠 뒤 1961년생 동갑내기이자 생일이 더 늦은 이순철이 LG 감독으로 부임하며 기록이 깨졌지만.[23] 다만 사임이 본인의 의사가 아닌 구단 고위층에 의한 경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 따진다면 롯데에서 부임 첫해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세 번째 감독이다. 양상문 이전 부임 첫 해 도중 경질된 감독은 성기영우용득[24] 그리고 2020년에는 손혁이 부임 첫 해 중도 경질된 감독이 되고 말았다.[25] 김재박의 경우 현대 유니콘스에서 한국시리즈 4번 우승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LG 트윈스 감독 재임시절 팀을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감독직을 다시 맡기는 커녕 야인으로 떠돌고 있다. 하지만, SK 와이번스의 인스트럭터 출신으로 민경삼 단장 겸 대표이사로 인해 가능성이 아에 없지는 않다.[26] 박명환야구TV에서 술회하길 정작 박명환은 양상문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는데, 부상으로 신음하던 2008년에 당시 LG 투수코치였던 양상문은 박명환이 시즌아웃을 하고 수술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등판 스케줄을 잡아놓아서 박명환이 여러모로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결국 5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나서야 비로소 수술대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FA 계약 후 부진한 상황이라 쉽게 하소연하지도 못했으나 박명환은 LG 팬들에게 늘 죄송한 마음이 있다고 한다.[27] 아이러니하게도 양상문 재임기 LG는 수준급 커브볼러들을 대량으로 찍어내며 재미를 보았다. 양상문 이전부터 커브를 장착한 봉중근과 류제국은 차치하더라도 신정락, 임정우, 임찬규, 정찬헌은 리그 최상위권의 구종 가치를 뽐냈으며 진해수 역시 좌타자의 몸쪽과 바깥쪽 모두를 공략하는 제3구종으로 커브를 사용해 좋은 성과를 냈다.[28] 실제 김시진은 2000년대 들어서 매년 즉시전력감 수준급 우완불펜을 찍어내서 명성을 얻었지만, 이 선수들은 하나같이 짦은 전성기 뒤에 부상으로 사라졌다.[29] 특히 김수완의 경우 케이블로 롯데의 퓨처스 리그 경기를 본 로이스터 감독이 왜 이런 투수가 있다는 것을 여태 보고 안 했냐고 심하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제리 로이스터 항목 참조.[30] 슬라이더와 간혹 체인지업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