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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7년 롯데 순위"
2008년 3월 31일 KBS 뉴스 9의 스포츠 뉴스의 한 장면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유사한 사례
5. 원인
6. 관련 어록
7. 여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의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성적.


2. 상세[편집]


KBO 리그를 넘어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비밀번호'라는 표현이 발생한 사례이다. 실제 비밀번호 사례는 물론 과거부터 존재해왔으나 비밀번호라는 용어와 사용 용례가 시작된 것은 이 8888577이 최초이다.

그 시절 동안 올린 패배 수는 무려 538패이다. 참고로 7년간 치렀던 경기 횟수는 총 910회다. 특히 4연속 최하위를 기록한 2001년부터 2004년 때는 무려 532전 183승 19무 330패. 한 시즌 평균 패배수가 80패를 넘긴다. 사실 80패를 넘긴 시즌은 2002년, 2003년밖에 없지만 저 두 시즌은 90패도 넘겼기 때문에 평균 성적이 저렇게 된 것이다.

2000년 성적까지 합치면 58888577비밀번호가 여덟자리 수가 되지만 사실 양대 리그가 시행되었던 2000년에는 매직리그 2위로 KBO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드림리그 3위였던 삼성 라이온즈보다 승률이 낮아 지금의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과 살짝 비슷한 준플레이오프를 치렀고 여기서 삼성에 패배, 바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8구단 순위로 최종 환산 시 5위로 된 것.

공교롭게도 한국프로야구의 관중 성적이 이시기 롯데의 성적과 거의 흡사했다. 2005 시즌에 5위로 시즌을 마쳤을 때는 평균 10,357명으로 8888시절보다 확실히 좋았고, 실제 총 관중도 3,387,843명이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200만 관중이었다. 06 시즌에 평균 7,000명대였다가 다시 07 시즌에 12,000명대로 늘었다. 2007년은 총 관중 400만대를 기록함으로서 한국프로야구의 중흥기가 다시 온 것이다. 참고로 2004 시즌의 롯데 관중은 평균 4,590명이다. 뭐 2004 시즌은 사실 LG를 제외하면 다들 성적이 폭망이긴 하였지만 우승팀 현대가 평균 1,955명, 준우승팀 삼성이 평균 2,923명이었다.

롯빠의 마지막 보루이자 타 팀들의 영원한 놀림거리. 불명예스럽지만 롯데를 대표하는 별명인 꼴데가 KBO에 유일무이한 이 4연속 꼴찌에서 비롯했다. 실제로 타팀 팬, 그 중에서도 KIA처럼 상위권과 하위권을 왔다갔다하는 팀들의 입장에서는 롯데빠들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 성적이 나쁘다며 웃을 때 옆에서 조용히 8888577의 주문을 외우면 닥버하게 되는 참 신비로운 힘이 있다. 3연속 꼴찌를 기록한 팀이자 드래프트 순위 쓰리핏을 기록한 팀도 롯데를 제외하면 2014 시즌에 899로 3연속 꼴찌를 달성했고, 2022시즌에 다시 AAA를 달성한 한화와 창단 직후 AAA를 기록한 kt밖에 없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인 한화를 제외한 어떤 팀에서도 깨기 힘들 것이 확실한 기록이다.

여담으로 2018년 kt의 탈꼴찌는 시즌 최종전에 결정되었다. NC 승리, kt 패배일 경우 kt가 꼴찌가 되는 상황인데 kt가 최종전을 승리하며 자력으로 탈꼴찌에 성공했다. 2023 시즌 한화의 경우에도 이정후, 안우진의 부상으로 나가떨어져버려 탱킹을 선언한 키움 히어로즈를 1게임 반차로 따돌리며 탈꼴지에 성공했다.

심지어 2019~2022년 4년간 한화의 승률은 2001~2004년 롯데가 4연꼴을 한 기간동안의 승률보다도 낮지만[1] 정작 2019년에는 8888577의 주인공 롯데가 온갖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통해 꼴찌를 해 버리는 바람에 4연속 꼴찌는 하지 못했다.

NPB에서는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가 2008년부터 5년 연속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그 전인 1954년부터 1959년에도 6년 연속 최하위를 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4연속 꼴지는 하지 않았지만 치바 롯데 마린즈1995년을 제외한[2] 1986년부터 2004년까지 B클래스를 기록했다.

당시 롯데 팬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짤방[3] 과거에 삼성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라 불리던 6위도 사실은 백인천 재임 시절이긴 한데 다만 삼성은 백인천이 취임하기 전 2년 동안 55를 찍으며 나름대로는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백인천은 결국 KBO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리빌딩으로 팀을 1997년 KBO 포스트시즌으로 이끌고 이 리빌딩이 2000년대 삼성의 토대가 되었기에 그때를 본 삼성빠들에겐 여전히 백인천의 평이 좋기도 하고 2016년 9위를 하면서 기록은 갈아치워졌기에 근래 들어선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뒤에서 세도 당시 6위는 끝에서 3등, 2016년 9위는 끝에서 2등이다.


3. 역사[편집]



3.1. 2000년[편집]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한 뒤[4], 2000시즌 시작전 롯데는 매직리그로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의 주인공인 삼성은 드림리그로 옮겨졌다.

맹활약을 보여준 펠릭스 호세는 다시 MLB로 떠나고 마해영박정태선수협 파동 때문에 훈련 부족으로 1999년에 막강했던 타선이 식어버렸다. 그래도 2000년에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SK한화의 부진과[5] 롯데 투수진들의 분전, 양대리그 덕택에 강팀들과의 순위 싸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 시즌 초부터 매직리그 1위를 달리다가 막판 부진과 LG의 연승으로 1위 자리를 내주고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인 KBO 준플레이오프/2000년에서 1승 2패로 KBO 플레이오프/2000년에 진출 실패하였다.[6] 그래도 20세기 마지막 해에 가을야구에 초대를 받아서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임수혁이 시즌 초 부정맥으로 쓰러져 그라운드에 복귀하지 못했고 시즌이 끝난 후, 롯데의 운명을 가른 첫 번째 일이었던 마해영 트레이드 사건이 일어난다. 선수협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마해영은 롯데 프런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결국 2000 시즌 종료 후 김주찬, 이계성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다.[7] 하지만 문제는 지난 6년간 성장해와서 롯데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거포라고 불릴 만한 선수는 당시에는 마해영 뿐이었다는 것. 그리고 삼성으로 간 마해영은 3년 연속 30홈런을 치는 등 삼성에서 중심타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줬고, 중심을 잡아줄 리더가 없어진 롯데는 이후 야수진을 꾸리는 데 애를 먹게 된다. 이 시즌 이후 01시즌에 조경환의 재능이 만개하여 잠시 반등한걸 제외하면 비밀번호 기간동안 롯데 타선은 심각한 빈타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투수쪽은 손민한이 에이스급으로 성장하며 활력을 불어넣었다. 원조 에이스였던 주형광, 박석진 등도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무너질거라는 예측은 많지 않았다.

3.2. 2001년[편집]


2001년은 롯데에 있어 너무나도 불운한 해였다. 먼저 전 시즌에 2000년에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했던 임수혁이 심장마비로 식물인간이 되었고,[8] 다음 시즌에 마해영은 트레이드로 삼성에 이적했으며[9], 주형광도 신인 시절부터 지속됐던 무리한 투구 혹사 탓에 시즌 아웃됐다.[10]

게다가 2001년은 유례 없는 중하위권 팀들의 치열한 순위 싸움이 벌어진 해였는데, 이 치열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던 김명성 감독이 시즌 도중 7월 24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상 유례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당연히 선수단이 동요하게 되었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던[11] 우용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에 올라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고, 후반기에 김주찬이 톱 타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해 시즌 막판까지 4강 싸움을 벌였다. 01시즌 출루율 5할 호세가 맹활약을 하며 팀 타격이 나름 분전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 마산 야구장에서 삼성과 1999년 플레이오프의 악연이 있던 펠릭스 호세가 배영수의 빈볼성 투구를 참다 못해[12]폭력을 행사, 잔여 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으며 팀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2001년/9월/18일 참조.

시즌 막판까지 4강 진입에 실날같은 가능성이 남아있었지만 10월 2일과 3일에 열린 LG와의 최종 2연전에서 모두 패배하면서 최하위로 추락했고, 결국 LG의 최종전이 열린 10월 4일 LG의 승리로 3년만에 최하위가 확정되고 말았다. 결국 한화는 물론 LG, SK에게마저 역전당해 득실차가 +를 기록하고도[13] 4위와 2게임 차이, 그리고 창단 2년 차이자 승차가 동률인 SK에게 승률 0.001차로 8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호세의 출장 정지 이후, 1군에 갓 올라온 선수가 바로 이대호였다.

이해 롯데는 팀타율 1위에 원정승률 5할 이상, 그리고 8개구단 중 전체 3위에 해당하는 득실차를 기록했다. 개인 기록도 화려했는데 출루율+장타율 1위에 징계 전까지 홈런 1위를 기록했던 호세의 활약상은 물론이고 조경환이 타율 3할 이상에 26홈런 102타점으로 맹활약했다. 유격수 김민재와 2년차 고졸신인 김주찬은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타율 3할을 넘겼고, 주전포수 최기문도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선발진은 평타를 쳐줬지만 구원진이 불안했다. 00년부터 10승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활약한 손민한은 에이스 모드로 15승을 기록해 LG 신윤호와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14] 박지철도 중간계투로 시작했지만 선발로 전환해 4년만에 10승을 거두며 활약해줬다. 시즌 중반에 컴백한 염종석도 선발로테에 합류해 6승 9패의 성적을 올렸다. 부상에서 자유로워져 향후 팀을 이끄는 투수가 된다. 악재도 있었는데 주형광과 문동환이 일찌감치 부상으로 아웃된 데 이어 5선발 김영수는 초반에 기회를 받았지만 전년대비 크게 부진하며 후반기엔 중간계투로 강등당한다. 3년차 용병 기론도 부상으로 웨이버 공시되었고 대체자였던 레이는 없으니만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구원진은 2.98의 방어율로 방어율 1위에 오른 박석진을 제외하고 3점대 투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불안했다.


3.3. 2002년[편집]


2001년에 기록한 8위는 그래도 괜찮았다. 2001년 시즌에서의 4위 한화와 8위 롯데간 성적은 단 2게임 차로, 격차가 좁았기 때문에 꼴지를 한 그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2002년 김민재의 FA 이적, 펠릭스 호세의 이중 계약 파동, 그리고 박석진[15]과 박지철의 시즌 아웃이라는 악재를 맞았다. 특히 호세는 2002년에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되었으나, 휴식을 한다면서 스프링 캠프에 오지 않다가 갑자기 애리조나와의 계약을 하면서 이중 계약으로 프로야구 최초 외국인 선수 영구 제명을 받게 된다.[16] 물론 KBO와 롯데 구단이 항의를 안 한 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항의 팩스를 몇 번 보냈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 후 2004년에 겨우 투자를 시작한 롯데에선 부상으로 약간 안 좋았던 이시온을 포기하고 호세를 다시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반영해서 호세 영입을 강력하게 원했던 롯데는 호세만 무조건 영입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노력했으나, 이중 파동으로 당시 KBO 영구 제명을 당하고 있던 호세는 오지 못했다. 물론 나중에 제명이 풀려서 2006년에 돌아오긴 한다.

4월, 5월에는 이대호가 끝내기 쓰리런을 치기도 하고 타격 3위에도 오르는 등 어느 정도 버텨냈으나 이렇게 전년도의 주축 전력들이 이탈을 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6월 월드컵이 시작과 동시에 롯데는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대행에서 승격한 우용득 감독은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16연패를 하고 중도 사퇴했다.[17][18] 6월 1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막에 승리를 거둔 롯데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폐막이 가까운 6월 27일[19]에 되어서야 다시 승리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경질된 우용득 감독의 후임으로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는데, 백인천 감독은 고의 태업 논란 등을 일으키는 등 거하게 폭망하며, 본격적으로 롯데 7년 암흑기의 시대를 열었다.

백인천은 왕년에 명감독으로 평가받았지만 삼성 시절에 뇌출혈로 쓰러진 이력이 있어 불안하다는 평이 많았었는데[20], 여튼 부임하자마자 시즌 포기와 리빌딩을 선언하게 된다. 이 시즌 포기 선언이 백인천의 암흑군주 등극 시발점이라는 인식이 많지만, 백인천이 부임한 시점에서 팀은 무려 15연패 에 빠져 있었고, 성적은 17승 1무 44패 승률 0.279로 누가 봐도 처참했기 때문에 백골퍼의 시즌 포기 선언 자체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의 백인천의 행보는 모든 사람이 알듯 역대 최악의 감독이자 밈으로 남을 정도였지만 이외에도 백골퍼는 그나마 남은 전력인 조경환[21]과 매기를 트레이드로 넘겨버리며 사실상 시즌 포기 형태로 잔여시즌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트레이드로 보낸 조경환과 매기가 SK에서 완전히 망가지며 젊은 유망주를 받아온 롯데가 더 낫다는 평도 받았지만, 그 선수들이 딱히 보여준 건 없어서... 하여간 2002년 롯데는 구단 역사상 최악+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3위[22]이라는 찬란한 성적인 35승 1무 97패, 승률 0.265를 내면서 독보적인 최하위를 한다. 7위 한화의 승률인 0.461와도 2할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2002년 시즌은 역대 최악의 승률 인플레를 자랑했다. 아니, 당시에 1위와 7위 한화의 승차보다 7위와 8위 롯데의 승차가 더 벌어졌다. 순위 경쟁이 치열하면 페넌트레이스 1위와 최하위의 승률 차이가 2할도 안 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바로 전 해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과 리그 꼴찌 팀이 1할도 차이 안 났었는데 참고로 이 때 롯데는 청보 핀토스 시절 허구연의 감독시절 승률 기록인 0.273을 깼다.

이 해 롯데의 홈 최종전이었던 2002년 10월 19일[23] 한화전의 유료 관중은 겨우 69명이었다. 롯데 모자와 셔츠 등을 입고 오면 무료 입장 가능했는데 무료 입장 관객들을 합쳐도 200명 남짓이었다. 그리고 이날 롯데는 한화에 패배하며 97패 타이를 기록하였다.

이 당시 관중 동원이 얼마나 적었는지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2년 9월 14일,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참가국들을 응원하는 시민 서포터즈가 결성되었는데, 원래 주경기장에서 발대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3만 명 이상의 서포터즈가 모이고 행정자치부 장관, 부산시장, 각국 대사가 참가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롯데는 침체된 프로야구붐을 되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야구장으로 장소를 변경하길 요청했고, 행사 이후에 서포터즈가 그대로 공짜 야구 경기를 관람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5년만의 만원 관중 예상이라며 보도자료를 돌렸다. 관련 기사. 그리고 야구장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붐볐는데 # 하지만 그 날 관중 수는 514명. 행사가 끝나고 야구 경기 시작시간이 되자 귀신 같이 관중들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 당시 운영팀장은 "사람들이 돈 받는 줄 알고 다 갔나봐요."라며 씁쓸해 했다. 한마디로 공짜 야구도 소용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시즌 후인 2002년 11월, 박용오 KBO 총재는 롯데 구단을 겨냥하여 내년 시즌부터 수준 이하의 경기 내용으로 관중 동원력을 상실한 프로야구단의 경우 구단주 총회의 의견을 모아 강제 퇴출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비공식 경고를 하게 된다.

3.4. 2003년[편집]


2003 시즌이 되며 유니폼을 새롭게 바꾸었다.

롯데는 스토브리그부터 흔들렸다. 우선 1라운드 지명을 받은 김대우가 구단과의 계약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고[24] 12년간 팀을 위해 헌신한 박정태와의 FA 협상을 포기해버리는 작태[25]를 저질러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자 롯데 팬들 뿐만 아니라 타팀 팬들도 합세해 롯데 프런트를 성토했고[26] 결국 롯데는 겨우겨우 박정태와 계약한다.

백인천이 직접 영입한 용병인 모리 가즈마와 보이 로드리게스는 각각 시범경기 후 퇴출, 7경기만에 퇴출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그에 더불어 팀은 2003시즌 개막 후 13경기 동안 1무 12패를 서막으로 충격적인 시즌이 시작된다. 잠실 LG전에서는 시리즈 내내 무득점이라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5월에는 5할 승률에 근접한 성적으로 의외로 선전하며 같이 최악의 초반 부진을 겪은 두산 베어스에 무려 7경기차로 앞선 7위에 올랐었다.[27] 게다가 5월말에 모리 가즈마와 보이 로드리게서의 대체자로 용병타자인 페레즈와 이시온이 가동되어 그래도 3년 연속 최하위는 면할 수 있을 거라고 약간의 기대를 했다. 이 때 홈경기에 웬일로 7000명이 넘게 들어온 경기도 있었다. 6월 초에는 LG를 상대로 잠실에서 2001년 이후 첫 스윕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시작된 백인천의 온갖 무리수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하며 안 좋은 결과들을 쏟아내어 6월부터 팀은 제대로 풍비박산나버린다. 야구팬들은 흔히 보직 파괴/불펜 혹사의 대명사로 김성근을 지목하지만, 이 시기의 백골퍼 역시 투수 운용 역시도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강상수, 임경완, 김사율, 이정훈 등이 선발과 불펜으로 마구잡이로 기용되었고 심지어는 전날 불펜으로 나오고 선발투수로 출전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6월 초 무려 7경기로 앞섰던 두산한테 6월이 끝나기도 전에 따라잡혔고 8위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위엄 넘치는 금지어 백인천은 책임은 고사하고 아예 감독직 수행을 거의 포기하고 배째모드로 들어갔다. 전반기를 3연패로 마쳤던 롯데는 후반기에 12경기를 연속으로 더 지며 15연패라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15연패 기간이 껴 있던 7월에는 한 달간 단 1승밖에 하지 못했다.

이렇듯 팀이 만신창이가 되자 롯데는 결국 8월 백인천을 해임한다. 다만 해고 당일에는 1점차 뒤진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4연속 안타로 극적으로 15연패가 끝났다. 감독대행으로 부임한 김용철 수석코치가 그나마 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승률을 끌어올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39승 3무 91패, 승률 3할로 전년도에 이어서 압도적인 꼴찌를 차지했다.[28]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3년 연속 최하위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작성했고 KBO 역사상 유일하게 두 시즌 연속 90패를 기록했다는 점이 뼈아픈 기억이다.

2003년 롯데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조정방어율(ERA+)을 기록하였고, 더불어 프로야구 역사상 뒤에서 다섯 번째의 WRC+를 기록하였다.[29] 투타가 전부 붕괴해버렸으니 압도적 최하위를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정규시즌 1,2,3위인 현대/KIA/삼성을 상대로 3팀한테 합쳐서 고작 7승이라는 극악의 상대전적을 기록하였다. 그마저도 5승은 백골퍼의 경질 이후 김용철 감독대행 휘하에서 거둔 것이다. KIA전 1승 1무 17패[30], 현대전 2승 17패, 삼성전 4승 15패를 기록했다.

거기에다가 관중 수가 2년 연속으로 엄청난 삽을 푸다가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56호 홈런공을 잡겠다는 부산 야구 팬들의 일념에 사직구장이 갑자기 만원 구장이 됐다가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내보냈다는 이유로 홈 관중들로부터 오물 세례를 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즉 팀의 승리보다 상대 팀 슈퍼스타의 홈런에 관중들이 열광했다는 것은 그만큼 롯데구단이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많이 저질렀고 팬심 이반 역시 심각했다는 것을 상징한다.[31][32]


3.5. 2004년, 2005년[편집]


3년 연속으로 꼴찌를 한 후 2004년부터 양상문 체제로 들어서면서 롯데의 본격적인 리빌딩 행보가 시작된다.

이상목, 정수근을 FA 영입하며 전력 보강을 꾀했고 20대 초반의 유망주인 이대호, 박기혁, 김주찬 등을 중용하며 새로운 주축 전력들을 키워내려 애썼다. 그 결과 승률이 전년도에 비해 1할 넘게 올랐으나 후유증이 워낙 컸던 탓에 50승 11무 72패로 다시 한 번, 4년 연속으로 8위를 하게 되었다.[33][34]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그로 인해 꼴데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한화를 상대로 절대우세, 두산-SK에 근소우세를 기록했으나 삼성과 LG에 압살을 당한 점이 꼴찌의 원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8 시즌과 승패가 정확히 동일하다. 무승부만 딱 7번 더 많다.

그렇게 리빌딩 행보를 밟아나간 양상문호는 2005년 초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1위까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후 팍 죽어버리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만에 9연패를 당하며 또 다시 나락으로 추락했다.[35]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재활공장장 버프를 받은 한화에 밀려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3.6. 2006년, 2007년[편집]


그리고 2006년이 되어 팬들은 2년만에 팀을 5위까지 끌어올린 양상문 감독이 계속 감독을 맡을 거라 생각했다. 투수 코치로서의 양상문은 크보 최악의 투수 코치로 욕 먹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만년 꼴찌 롯데의 성적을 단기간에 향상시켜서 감독으로서의 평판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36] 그러나 롯데는 양상문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구단주가 갑작스레 발표한 롯데 투자 계획에 따라 새롭게 들어온 감독은 바로 강병철. 1984년 최동원, 1992년 염종석의 전성기와 그 후를 아는 팬들은 큰 우려와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으로 그를 지켜봤지만 성적은 역시나 2년 연속 7위라는 기록과 함께 또 다시 시궁창으로 빠지게 되고, 대망의 8888577이 완성된다. 동시에 팬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던 강병철 감독은 주구장창 까이며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 08년 히어로즈 2군 감독직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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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데팬이라고 놀림 받는 것도 지겹다
구단의 특단의 조치를 요구한다. -DC야갤 롯데팬 일동-
이시기 강병철 감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있어서, 잠실 구장에서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고 사직 야구장에서도 "편파적인 강감독의 선수기용 반대한다"라는 플랜카드를 걸기도 했다. 이 짤방만 봐도 이 시절 롯데 팬들의 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2006년 초반에는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한화로 이적한 문동환하고 다승 경쟁을 하는 처지였다. 이에 더불어 한화에서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문동환이 롯데 시절은 기억조차 하기 싫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오죽하면 2006년 롯데가 엘꼴라시코에서 9회말에만 6점을 내주며 9:4 경기를 9:10으로 패하자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강병철이 부산상고(현 개성고) 동문이라는 점 때문에 어떤 초등학생이 강병철 감독 퇴진에 힘써달라는 글을 청와대 열린마당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기사.

2006년에는 호세, 이대호 말고는 그야말로 물빠따 타선이어서 그야말로 상대팀에게는 이대호만 거르면 별거 아니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특히 물빠따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FA 영입타자 정수근이 매우 욕을 먹었다.[37] 브라이언 마이로우가 시즌 초반에 많은 홈런을 치면서 비교적 선전했으나 마이로우가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5월 이후부터는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롯데는 새로운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투수진도 손민한 말고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고, 전에 FA로 영입한 이상목의 성적은 처참했다. 그나마 이대호가 잠재력을 폭발시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거뒀고, 롯데팬들은 김용희, 김용철, 김민호, 박정태, 마해영 이후 오랫동안 씨가 말랐던 롯데의 중심 타자가 전면에 등장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류현진을 거르고 뽑았던 나승현이 첫 시즌부터 16세이브를 기록하며 희망이 되었던 것 외에는 의미가 없었다.

2007 시즌에는 전 시즌에 22홈런으로 홈런 2위를 기록했던 펠릭스 호세와 재계약했고, 마무리로 카브레라를 데려왔는데, 호세가 확실하게 노쇠화되며 형편없는 성적을 내고 퇴출되었다. 초반에 이대호 등의 활약에 고무되어 4월 2~3위권을 유지하던 롯데는 5월부터 귀신같은 추락을 경험하면서 환장하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꼴지를 깔아주고 있던 KIA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그래서 시즌 중반 이후부터는 그 유명한 이대호와 여덟 난쟁이라는 드립이 성행했다. 이대호 말고는 홈런을 쳐줄 타자가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올스타전 이후에 성적을 끌어올렸던 정수근,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주전 포수의 입지를 완벽하게 다진 강민호, 그리고 새로운 롯데 내야수로 이원석, 정보명 정도가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박현승도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물론 엇박자가 심해 이들이 한꺼번에 잘한 경기는 많지 않았고 심지어 번병두라는 병맛나는 기록을 남긴 경기도 있었다. 롯데는 그렇게 희망이 사라져가나 했다. 이 시즌은 우천 취소도 많아서 시즌 최종전이 10월에야 치러졌고, 거기서 나온 말이 우째도 가을에 야구하네였다.[38]


3.7. 2008년,2009년,2010년.2011년,2012년: 5연속 가을야구 진출[편집]


2008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영입하여 시즌 최종순위 3위로 8년만에 가을야구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비밀번호에 종지부를 찍었다. 롯데의 호성적과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전승 우승 금메달 영향이 맞물려서 사직 야구장은 연일 만원관중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간 동안의 성적을 간단히 보자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시작한 2008년에는 3위를 하고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3연패로 스윕당했고, 2009년에는 4위로 진출한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게 1승 후 3연패로 역스윕당해 탈락했으며, 2010년 4위로 진출한 준 플레이오프에서도 두산에 2연승을 거뒀다가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2승 3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8888577이 아니라 BNK부산은행 8888577-03-1323[39] 예금주 : 로이스터라는 말이 나왔었다.

결국 로이스터 감독은 포스트시즌 성적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고 말았으며, 다시 비밀번호 시대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롯데 팬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한편 2010년 7월 장병수 당시 롯데 자이언츠 대표이사는 OSEN와의 인터뷰에서 "20년간 우승하지 못하면 프로 구단의 존재 이유가 없다" 엘롯한 광역딜 라는 발언을 했는데, 2012년에도 플레이오프에 탈락해 우승을 못 하면서 졸렬하다는 평가와 함께 롯데 해체 드립이 돌았다. 기사[40]. 이 이후에도 프로야구 신생구단 관련 발언과 갖가지 행보로 인해 프로야구 팬들에게 비판받았다.

그 이후 양승호 감독이 선임되어서 2011년엔 단독 2위로 올라서서 PO로 직행했지만 4위 KIA를 3승 1패로 꺾은 3위 SK 상대로 2승 3패로 업셋당했고, 2012년엔 막판에 4위를 해서 3위 두산을 3승 1패로 눌러서 PO로 갔지만 또 SK 상대로 2승 3패로 패했다.

3.8. 이후[편집]


그 이후 상황은 롯데 자이언츠/역사롯데 자이언츠/암흑기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4. 유사한 사례[편집]


가장 비슷한 예로 LG 트윈스의 2003년~2012년 암흑기인 6668587667이 언급되기도 한다. 다행히 LG는 2013 시즌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이전에 비해 크게 개선된 모습을 보였고, 4강 경쟁권 팀들이 추락하여 사실상 재기불능의 상태였기에 2013년 9월 22일에 가을야구를 확정지었다.[41]

이 외에 이와 비슷한 비밀번호를 찍기 시작한 팀으로는 한화 이글스넥센 히어로즈가 있다. 이 중에서 한화의 경우 2008년부터 4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실패 및 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지나치게 약화된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선수조차 잡지 않고(혹은 못하거나) 리빌딩만을 외치며 전력 증강에 실패하여 2010년 시즌까지만 해도 롯데나 LG를 뛰어넘는 비밀번호[42]의 서막을 알리는 듯 싶었다. 여기에는 리빌딩에 대한 의지가 전무한 프론트의 투자 부족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2011년 프런트가 물갈이 되고, 한대화 감독 또한 승부사의 포텐셜이 터지면서 약한 전력으로도 끈끈하고 포기하지 않는 팀 컬러를 보여주며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카림 가르시아를 영입하는 등 타선도 더욱 강해졌다. 몇 년 더 봐야 알겠지만 롯데나 LG의 비밀번호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을 듯. 자세한 것은 한화 이글스 항목 참조. 어쨌든 2011 시즌을 6위[43]로 마감함으로써 일단은 비밀번호가 5886이 되었다.

2011 시즌이 끝나고 한화는 더욱 희망적이었던 일이, 박찬호김태균이 복귀한 데다가 골든글러브 유격수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대화의 삽질과 투타 양쪽에서 몇몇 선수가 말아먹는 분위기로 인해 이러한 트레이딩도 소용이 없어서 한화는 2012년 내내 꼴찌를 했고, 시즌 도중에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2년 시즌 후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며 잠시나마 기대를 갖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 류현진은 포스팅으로 해외 진출, 박찬호는 은퇴, 장성호는 트레이드로 나가면서[44]

2011년에 한화 이글스가 이른바 '야왕 신드롬'으로 분위기가 좋았던데 비해, 빌리장석이 있는 넥센은 선수 팔아 연명하고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무난하게 꿈도 희망도 없다고 믿었던 상황이었다. 넥센 히어로즈는 한화 이글스와 달리 경제적 여력 자체가 열악하여 선수층이 얇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팀의 재정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고 타 구단에서 주축 선수를 대거 영입하기 전까지는 비밀번호 시대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넥센은 새로 영입한 선수들의 포텐이 터지면서 2012년에 6위를 찍더니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적이 좋아져서 2014년에 2위까지 찍었고 그 가운데 두번이나 한국시리즈에 갔다. 2017년을 제외하면 매년 가을야구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한화는 2017년까지도 가을야구 진출을 실패하다가 2018년에 비밀번호를 종료시켰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난카이 호크스 시절에 20년 연속 B클래스(4~6위)를 기록했다. 미국에서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39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시카고 컵스38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의 기록이 있었지만,[45] 2016년에 우승했다. 다만 한신 타이거스는 이 팀이 암흑기를 겪기 직전인 1990년대 후반에 4466566664라는 암흑기를 겪었고, 주니치 드래곤즈는 비교적 최근인 2013년부터 2019년까지 4456555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 외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6466666556,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5554555로 시작하는 15자리 비밀번호 등이 있다.


5. 원인[편집]


백인천이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만악의 근원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열했던 1999시즌 이후 연이어 터진 유망주 유출, 주축 선수 이탈, 구단의 소극적인 투자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인 선수들의 경우 부산 팜에는 백차승, 이승학, 송승준, 추신수, 채태인이라는 걸출한 신인들이 등장했지만 이 선수들은 전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떠나버리고 롯데는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46]

또한 선수협 파동이 터지며 롯데의 중심 선수였던 마해영이 괘씸죄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며 타선의 무게가 상당히 가벼워졌다는 것도 한 몫 했는데, 당시 전성기였던 마해영이 떠나고 펠릭스 호세도 떠나버린 상황에서 중심타선으로 쓸 수 있는 선수가 전무했던 상황. 박정태김응국은 노쇠화로 중심 타선으로서의 활약을 해주지 못했다.

그나마 조경환이 2001 시즌에 마해영의 공백을 메우는가 싶었는데, 우산효과가 빠진 탓인지 2002년 크게 부진했고 당해 백인천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아예 SK로 보내버려서 타선이 더 약화되었다. 다만 조경환은 트레이드 이후에도 2003년을 제외하면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문동환 입단을 위해 계약/위약금을 포함해 현대 피닉스에 줘야 할 위약금 5억 원이 아까워서 팀의 테이블세터인 전준호를 넘기는 실책을 범했고, 그렇게 데려온 문동환은 1998, 1999시즌에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얼마 안 가 부상으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47][48] 또한 부산고 에이스 출신의 염종석주형광이 부상 여파로 2000년~2001년 활약을 거의 하지 못하며 투수진에 큰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롯데는 좌완투수가 없어서, 가득염을 빼면 1군에서 뛴 좌완은 김영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설의 2승 18패만 남기고 조용히 SK행. 그나마 있던 가득염도 불을 지르고 있었는데, 부상에서 복귀한 주형광이 합세하여 같이 불을 지르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다. 한술 더 떠 롯데의 고질적인 마무리 부재로 선발투수감이었던 강상수마저 마무리로 구르다 퍼져버리고 말았으며 거기다가 외부 선수 영입은 꿈도 꾸지 못했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2001 시즌 막판 김명성 감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선수단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백인천이 부임했고, 결과적으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어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 2002~2003 시즌에는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름에도 구단측에서는 2003년 시즌 중 백인천을 경질해버린 걸 제외하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처참한 관중 동원과 그룹 이미지 손상되고 안팎에서 구단 해체 여론까지 떠오르자 FA 시장에서 이상목정수근을 둘이 합쳐 7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49] 선수 보강을 했지만 선수 두 명 가지고 팀이 바뀔 리가 없다. 거기다가 이상목은 그럭저럭 결과를 내 주긴 했지만 노쇠화가 급격히 오면서 몸값에 비해선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고[50] 정수근은 이미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기에[51] 팀 성적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이후 양상문강병철이 감독을 맡으면서 어린 선수들에게 경험치를 몰빵, 비록 성적은 밑바닥이었지만 선수들의 실력을 향상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고, 이후 제리 로이스터이 암흑기를 깨게 되었다.


6. 관련 어록[편집]


파일:attachment/사리/sarimaking.jpg
사리가 만들어지는 과정

"롯데는 와 그리 못 이기는 겁니까?"

가수 올라이즈 밴드, 무릎팍도사양준혁 편(2007년 11월 21일 방송분)에서. 방송 당시 양준혁 본인이 "롯데 자이언츠가 잘해야 프로야구가 산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예컨대 롯데야구단이 프로야구에서 우승한다고 해서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자기의 삶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 아닙니까."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제14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한겨레신문이 실시한 대선 순회좌담회에서 문재인 당시 법무법인 부산 소속 변호사의 발언.[52]

이 말은 "지역보다는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정책과 공약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2017년 대선에서 발굴되어 롯데 자이언츠의 처참한 성적에 초탈해진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많이 써먹고 있다. 그런데 정작 발언 당사자부산광역시 출신 및 롯데의 팬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 된 이유는 최동원 선수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을 만들 때 자신이 법에 대해 무지해서 관련 노동법에 대해 법률자문을 받으려고 지역 법률사무소를 찾던 중 "노동법에 대해 정통한 법률사무소가 무료상담을 해준다더라."라며, 지인이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를 소개해줬고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과 상담한 계기로 롯데 자이언츠의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부산 유세 때 악바리로 유명한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박정태와 같이 자이언츠 대표 응원가 중 하나인 '부산 갈매기'를 완창하기도 했다. 당시 영상 사실 이미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부산 유세에서도 노무현 후보와 함께 이 부산 갈매기를 완창했다. 당시 영상



7. 여담[편집]



  • 롯데 자이언츠가 이 비밀번호를 찍은 타이밍도 영 좋지 않았다. 롯데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7년, 특히 8위를 도맡았던 초기 4년의 경우는 세계적으로 초고속망 인터넷이 보급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53] 국내에서도 인터넷 문화가 막 활성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인터넷 문화는 기본적으로 익명성으로 인해 매사에 비판적인 "3류 감성"이 주류가 되기 쉬운 환경이고, 이런 게 세계적으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타이밍에 최하위를 독점하면서 롯데 팬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롯데 이전에 비밀번호를 찍은 팀은 삼청태와 MBC[54]가 있었으나 2000년대 초반에는 그들의 후신인 현대와 LG가 롯데보다 잘 나갔고[55] 팀명이 달라져 부각되지 못한 면도 있다.

파일:8UIvBgW.png
  • 이 시기에 한화 이글스한테 유독 약했다. 항상 상위권만 있다가도 한화에게 덜미를 잡혔었던 시절이 이때였다. 한화의 5시멀티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특히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는 한화한테 철저하게 밟해서 이 시기 한화가 가을야구 즐기는 걸 구경만 해야 했다.[56] 이러다 보니 이때 통합야갤시절, 한화팬들이 "칰키워"라고 불릴 정도로 굉장히 강세였고 롯데 팬들만 보면 냄새 난다고 욕을 했었다.[57] 그래서 생겨난 게 바로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 이 암흑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1990년 이후 출생한 아이돌들은 방탄소년단지민정국처럼 본인이 롯데보다 먼저 1위를 찍고 상을 타게 되었으며, 롯데 팬인 타 종목 프로선수들은 팀보다 자기가 훨씬 더 빨리 우승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담원 게이밍 출신 신정현 선수, 샌프란시스코 쇼크 소속 이선창 선수였다.

  • 2010년 11월 19일[58] 이말년[59]이말년씨리즈 '수능특공대' 편에서 패러디되었다. 링크.

  • 2013년 이후 2차 비밀번호 시기에 롯데팬들의 열정이 식어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는 윗동네의 4연패 광폭 행보와 옆동네의 선전도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롯데마트의 어느 알바 이야기도 화제가 되었다. "야구 우승 못하면 이거라도 1위 해야죠." # 그리고 막줄의 이마트 로고송은 2021년 SK 와이번스신세계그룹에 진짜로 팔리면서 이 에피소드는 다시 화제가 되었다.

  • 스포츠동아 이재국 야구전문 기자에 따르면 관중석에서 자전거를 타도 될 정도로 관중들이 없었다고. 또한, 롯데 구단에서 팬서비스 차원으로 아이스크림 천 개 분량을 준비했으나 워낙 관중이 없어 남은 아이스크림을 기자들에게 나눠줬는데 두 개씩 집어가라고 했다는 웃픈 에피소드도 있다.

  • 정수근박명환야구TV에서 밝히길 관중들이 워낙 없어 이재국 기자가 말한대로 관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고 관객들의 전화 통화 소리가 선수들에게까지 다 들렸다고 한다.


  • 오죽했으면 정신의학신문에 롯데 팬인 정신과 의사롯데 자이언츠 유발성 우울증이라는 칼럼을 쓰기에 이르렀다. #원문

  • 장원준은 FA 때 롯데의 88억 제안을 거절하고 두산과 84억에 계약한 후 역대급 성적을 찍고 우승반지를 거머쥔다.

  • KNN 파워FM현승훈 캐스터가 이 기간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2017년 당시의 이성득 해설위원과, 그리고 2021년 현재의 허형범 캐스터가 'KNN 파워토크'(출처)에 출연하였을때 (허캐)그를 부러워한 이유[60]로서, 11년동안 중계해온 현승훈 캐스터의 KBO 포스트시즌 중계 횟수가 불과 '3시즌' 밖에 되지 못했다고 하소연하였다.

  • 2019 시즌에 꼴찌인 10위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꼴데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제는 비밀번호에 알파벳(A)[61]이 들어가게 되는 7A7887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즌 도중 감독과 단장이 동시에 사퇴하고 특히 감독의 경우 KBO 역사상 감독 부임 첫 해 사퇴라는 최초의 기록까지 달성하였다. 15년만의 꼴찌, KBO 최초 원년팀 10위, [62] 그리고 또 KBO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90패를 세번이나 기록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63]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개 구단 체재 이후 50승[* 참고로 2017년 상상이상의 DTD로 폭망했던 그 kt도 딱 50승을 거뒀다.]을 거두지 못한 첫번째 팀이라는 불명예까지 기록하였다. 결국 이 시즌의 여파로 인해 다음 시즌 감독은 외국인 감독으로 정했으며 그 후보군으로 제리 로이스터, 스캇 쿨바, 래리 서튼을 공개했다. 그런데 후보군 중 래리 서튼으로 결정되긴 했는데 2군 감독으로 결정됐으며 1군은 정작 내국인인 허문회가 선임되었다. 그 후 2021 시즌 도중 허문회가 경질되면서 래리 서튼이 1군 감독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2023 시즌엔 서튼 감독이 도중에 건강 문제로 사임해 버려 7A7887을 기록하게 되었다.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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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에서 언급했듯 4연꼴 기간 동안 롯데의 성적은 532전 183승 19무 33패 승률 0.3567, 2019~2022년 한화의 승률은 576전 199승 17무 360패 승률 0.3560[2] 당해 2위를 기록했다.[3] 사진에 없는 12번과 13번은 현재 사진을 찾을 순 없지만 남은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선동열이 TV에 나오면...반사적으로 TV를 끈다.(은퇴한지가 언젠데...)', '마찬가지로 삼성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오면 괜히 그 사람이 공을 던질 것 같다.'[4]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플레이오프를 무려 7차전까지 갔다. 여기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한국시리즈에서 힘을 못 쓴 것.[5] SK는 1999시즌의 쌍방울 전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거라 못할 수밖에 없었고, 한화는 에이스 정민철의 해외 진출 등으로 투수진이 폭망해서 시즌 초부터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다.[6] 만일 단일리그였다면 5위였기 때문에 2000년부터 비밀번호를 찍었을것이다.[7] 김주찬은 삼성의 유격수 유망주였고, 이계성은 그저 그런 백업 외야수였다. 사실상 타격왕까지 했던 중심타자와 특급 유망주를 바꾼 셈.[8] 심지어 롯데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임수혁의 지원을 끊어버리는 등의 행보를 펼치며 야구계의 비난을 한 몸에 샀다.[9] 익히 알려진 대로 선수협 사태의 주동자로 찍혀 트레이드 됐다. 1988년 최동원김용철의 유사 사례가 또 나온 셈.[10] 이후 주형광은 100승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결국 부상이 발목을 잡아 2002년부터는 그저 그런 투수로 전락하며 7년간 10승 25패 2세이브 22홀드에 그쳤다. 그러면서 지바 롯데 마린즈 이적도 물거품이 되었다. 빠른 76년생이어서 겨우 26살밖에 안 된 나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11] 93년에는 무려 준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다만 94~95년에는 6-6을 거두고 재계약에 실패했다.[12] 이 때 호세가 배영수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면서 참교육이라는 드립을 탄생시키게 된다.[13] 한편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은 732득점 733실점으로 득실차가 -1이었다.[14] 더군다나 신윤호는 김성근 LG 감독대행이 비정상적인 혹사를 시켜서 거둔 성적이며 손민한은 순수 선발투수로 거둔 성적이다.[15] 특히 01시즌에는 구원투수임에도 규정이닝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던졌다. [16] 사실 이중 계약 파동으로 논란을 겪은 건 롯데만이 아니었다. 한화도 2002년 프란시스코 캄포스라는 투수 용병을 영입했으나 밀워키로 뒤통수 치고 가버렸다. 그리고 대체 선수가 바로 레닌 피코타이다.[17] 우용득 감독은 13연패를 한 날 경질되었다. 사퇴 이후 수석코치이자 이전에 롯데 감독이었던 김용희가 삼성전에 대행을 맡았지만 두 경기 전부 패배해 15연패. 백인천 부임 후 한 경기를 더 져 16연패까지 이어진다.[18] 후일 KIA 타이거즈가 2010년 6월 18일부터 7월 8일까지 져 16연패 타이기록을 세운다. 그 유명한 잠실 KIA팬의 난이 이것 때문에 터졌다. 이를 뛰어넘는 기록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8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17연패와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18연패, 한화 이글스의 2020년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의 18연패.[19] 6월 30일 폐막.[20] 이 분이 분이 각각 한 번씩 백인천을 쓰러뜨렸고, 심지어 앞에 열거되신 분은 전병호가 마운드에 있을 때 선발포수였다.[21] 심지어 이 선수. 전 해에는 중심타자였고, 당시에는 주장이었다. 주장을 시즌 중에 팔아버린 셈이다.[22] 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1등은 프로야구 원년 1982년의 승률 0.188을 찍은 삼미 슈퍼스타즈, 2위는 모기업 부도로 주전을 모조리 팔아치우고 이듬해 해체된 승률 0.224의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즉 원년과 모기업 부도라는 특이사례를 제외하면 승률 꼴찌이며 패배 수로는 1999년 쌍방울과 타이기록이다.[23] 심지어 그 날은 일주일 중에 제일 많은 관중수를 기록하는 토요일이었다.[24] 김대우는 롯데에게 5억을 요구, 롯데는 김대우에게 4.5억을 계약금으로 제시했고 결국 협상이 결렬되어 김대우는 고려대에 진학한다. 결과적으로 김대우는 대만 진출도 포기하고 2008년이 되서야 1억을 받고 입단한다.[25] 이 때 롯데는 단년계약만 주장하면서 협상을 진행했고, 이후 조건을 수정했는데 2년 6억(보장 4억 + 옵션 2억)으로 그 옵션이 한 시즌 130경기 이상 출전에 .320의 타율과 80타점 이상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다는 것. 당연히 박정태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이상구 체제의 롯데가 박정태를 FA 미아로 만들겠다고 언플을 저지른 것.[26] 박정태의 끝이 이렇게 된다면 결국 자신들의 프랜차이즈 스타들도 토사구팽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얼마 있지 않아 류지현, 이상훈이 팀에서 사실상 쫓겨나 LG 팬들도 부침이 많았다.[27] 2003년 6월 5일 기준 롯데도 18승 2무 30패로 썩 좋은 성적은 아니었는데, 두산 쪽은 11승 39패였다. 8경기차가 아니라 7경기차인 이유는 2003년은 다승제를(무승부=패 제도와 거의 비슷하다.) 썼기 때문이다. 참고로 2003년 롯데의 가장 승률이 높았던 날이 저 날이다. 즉 시즌 중 단 하루도 4할 승률을 넘긴 날이 없는 셈.[28] 예전에는 승률 0.291로 기록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는 다승제로 승률을 무승부=패로 계산하는 착오가 있었다.[29] 지난 시즌인 2002년이 뒤에서 세 번째였다.[30] 그 1승조차도 19차전, 즉 마지막 경기에서 겨우 거둔 1승이다.[31]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 때 김용철 감독대행은 1루를 채우기 위해 고의사구를 지시했고 이 장면을 본 관중들은 물병, 잠자리채는 물론 쓰레기통까지 손에 집히는 물건은 그라운드로 냅다 던져버리며 강력히 불만을 표출한다. 결국 김용철 감독대행이 그라운드로 불려나와 마운드에서 마이크를 잡고 공개 사과를 하고서야 사태가 다소 진정됐다. 훗날 이승엽의 은퇴 투어때, 롯데는 이 날의 일화로 순금 잠자리채를 주었다.[32] 이정민은 이승엽의 56호 홈런날 본인의 데뷔 첫 승을 기록했음에도 묻히고, 허용투수라는 오명을 낳게 된다.[33] 한화 이글스와 KT 위즈가 3년연속 꼴지를 한것이 다음 기록이다. 단 KT는 신생팀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34] 승률 산정 기준이 다승제라서 11무는 승률 계산에서 11패나 다름없었다.[35] 반면, 비슷한 시점에서 한화가 9연승을 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다.[36] 2014년 양상문 감독이 승패마진 -16의 LG를 4강에 올려놓자, 8888577의 5가 양상문 업적이었다는 게 재발견되기도 했다.[37] 이 시기 정수근은 강병철 감독과 타선 등 기용문제로 갈등을 빚던 선수였다. 그러면서 사고는 다 치고 연봉과 계약금은 비쌌으니 팬들에게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38] 어쨌든 가을에 야구하네라는 뜻으로, 정규시즌이지만 어쨌든 경기가 계절상 가을에 치러져서 당시 롯데 팬들이 현수막을 만들어 간 것이 화면에 잡힌 것. 여기에서 함께 현수막을 들고 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가스파드였다.[39] 잘못된 계좌번호 표기. 실제 BNK부산은행의 계좌번호 체계와는 좀 다른 게, 지방은행들은 대개 지점 번호가 계좌번호 앞에 붙는다. 롯데 스폰서 중 하나가 BNK부산은행이라 이런 이야기가 나온 듯. 실제 체계를 따르려면 888-8577-0313-23이 되어야 한다.[40] 이 기사에 나온 이재곤, 김수완은 2018년 시점에서 죄다 망했다.[41] LG는 저런 성적으로도 관중동원하나는 정말 꾸준했고 프로야구 암흑기에도 평균 10000명 이상이 들어올정도로 충성심이 매우 강하다.[42] 하지만 쌍방울68788찍고 포스트시즌으로 갔다. 하지만 1999년의 포스가 워낙 강했다.[43] LG의 비밀번호 보고 갸우뚱한 사람이 있을 텐데, 4강 탈락팀의 경우 승률이 동률이면 그냥 공동순위 처리한다. 2011년 시즌 이전에는 1991년 LG와 쌍방울이 공동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신인 드래프트 등 순위 판가름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호간의 전적 등을 참조하여 순위를 결정한다.[44] 막상 2013년에는 트레이드로 내보낸 장성호보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송창현이 더 잘했다.[45] 다만 이 시절에는 리그 1위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었던 시절이라(NPB, MLB 모두 해당) 절반 안에만 들면 가을야구 티켓을 쥐어주는 KBO나 2000년대 중반 이후의 NPB하고 동급으로 봐서는 안 된다. 사실 리그 1위만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이면 롯데는 이미 39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로 컵스를 뛰어넘고 오클랜드와 동률이며 2023년까지 정규시즌 우승에 실패하면 전 세계 신기록 경신이다. 비교 상대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1903년 월드시리즈가 열린 이래 장장 41년간 단 한 번도 리그 1위가 없어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월시 간 1944년도 다른 팀이 2차대전 때문에 전력 공백이 컸던 시기였다. 굳이 메이저리그하고 비교하자면 1932~1970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하고 1946~1983년 시카고 컵스보다 1916~194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더 맞을 듯. 이쪽은 문자 그대로 8888577을 다섯 번 연속으로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다.[46] 다만 백차승과 추신수 등 부산고 출신들의 경우 롯데 OB이자 부산고 감독이었던 조성옥이 롯데 입단 대신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조성옥이 1997년 시즌 후 롯데 코치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롯데 프런트와 충돌이 있었고 여기서 생긴 악감정을 잊지 않았던 조성옥의 복수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조성옥은 우수한 제자들이 일부러 롯데로 가지 못하게끔 해외 진출을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47] 이후 문동환이 2006년 한화에서 뛰던 당시 선발투수로 7승 1패를 기록 중이었던 문동환과 당시 8승 23패를 기록한 롯데를 비교한 캡쳐가 짤방으로 돌기도 했다.[48] 아이러니하게도 문동환은 2003년 말 FA 정수근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롯데를 떠난다. 톱타자를 버려가면서 투수를 데리고 왔는데, 또 다른 톱타자를 데려오기 위해 그 투수를 버린 셈이다.[49] 다만 둘 다 옵션을 못 채워서 실제로는 60억도 안썼다는게 함정이었다. 정수근이 6년 40.6억에 계약했지만 실제로는 옵션을 못 채운데다가 사고쳐서 출장이 줄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30억도 못 받았다고 한다.[50] 2006년 12승을 거둔 걸 빼면 나머지 3시즌은 10승을 올리지 못했고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서 선발로테이션에서 종종 빠졌기에 출전 경기수도 적었던 편이었다.[51] 다만 정수근은 주루와 수비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타격지표는 오히려 두산 시절보다 소폭 상승했다. 다만 정수근이 롯데에 있던 시절이 KBO 역사상 최악의 투고시즌이라 묻힐 뿐이었다. 하지만 술 먹고서 사고를 친데다가 강병철 감독과의 불화를 겪으면서 자연스레 출장경기가 줄었기 때문에 성적도 하락세를 타게 된 것이다.[52] 그리고 당시 같이 등장한 김석준은 2014년부터 2022년까지 부산광역시교육청 교육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구단과 부산광역시교육청의 협력으로 사직 야구장에 자주 초대받게 된다.[53] 인터넷 자체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보급되었으나, 전 세계를 연결하는 초고속망이 보급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54] 다만 삼청태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55] 물론 2000년대 중후반 들어서는 현대는 해체됐고 LG는 롯데와 엘롯기로 묶여 하위권을 전전한다.[56] 저 자료 화면은 한화 로고가 바뀐 직후이므로 2007 시즌이다. 저 화면에서 첫 3연패를 한 주말 3연전 중 일요일 경기에서는 잘 버티다가 홈런 한 방을 맞고 피스윕을 확정지었는데, 그 홈런을 친 선수는 조원우.[57] 당시 꼴빠들 사이에서 "갈매기들은 독수리로 위장하고 한화 응원이나 하자"라는 자조적 드립도 있었다. [58] 이날은 2011학년도 수능 다음날이었다.[59] 쌍방울 레이더스-SK 와이번스 팬이다. 문서 참고.[60] 데뷔 첫해인 2017년에 준플옵 중계를 맡았다. 이는 이적 2년차인 손승락의 활약과 8월 반등으로 3위로 준플옵에 진출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61] 16진법으로 10을 의미.[62] 이제까지 10위는 신생팀인 kt와 NC만이 기록한 순위이다.[63] 2002년(97패)과 2003년(9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