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로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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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로스 왕국
Bosporan Kingdom
Βασίλειον τοῦ Βοσπόρο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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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38년 ~ C.E. 370년
위치
흑해 크림 반도, 타만 반도
정치체제
참주정
국가원수
참주
언어
고대 그리스어
종족
그리스인, 스키타이 등등
성립 이전
고대 그리스 흑해 식민도시
스키타이
멸망 이후
훈족, 고트족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아르치에낙스 ~ 스파르토코스 왕조
3.2. 미트리다테스 왕조
3.3. 티베리우스 - 율리우스 왕조
3.4. 이후의 왕국
4. 역대 군주
5. 여담




1. 개요[편집]


보스포로스 왕국은 고대 흑해 북동부 크림 반도와 타만 반도 해안 지대에 기원전 438년부터 기원후 370년까지 존속했던 고대 왕국이다. 기원전 7세기 건설된 흑해의 그리스 식민 폴리스들과 우크라이나 초원 지대의 스키타이 부족들이 연합해 세운 왕국으로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는 보스포루스 왕국을 자국 역사로 가르친다.

2. 상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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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로스 왕국은 기원전 7세기부터 건설된 고대 그리스 흑해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상공업이 발달했으나 곡물이 부족하던 그리스 반도에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서 수확한 곡물을 수출했으며 대신 도기에 담긴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수입했다.[1] 당시 식품 보관 기술과 향신료 등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포도주와 올리브유는 보관이 용이한 식자재로 가치가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도 보스포루스 왕국은 고대 로마의 동맹국으로 존속하던 기간 동안[2] 번영을 지속하였으며, 서기 2세기 내내 이어진 이웃한 스키타이계 유목민의 침입을 자체적으로 격퇴할 정도로 강성한 국가였다.

보스포로스 왕국의 문화는 스키타이와 그리스 문화의 혼합이었다. 스키타이는 그리스로부터 금속 세공 기술을 배우고, 그리스는 사르마트와 스키타이 유목민을 소재 삼아 아마존[3] 및 영웅이 켄타우로스로부터 교육을 받는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보스포루스 왕국은 그리스인과 스키타이, 사르마트인 외에도 고대 킴메르족 유목민, 트라키아 출신 이주민 및 고대 캅카스의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으며,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그리스인 역사가들은 이 지역에서 전해진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스키타이 유목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3. 역사[편집]



3.1. 아르치에낙스 ~ 스파르토코스 왕조[편집]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인들은 흑해 북부의 보스포로스 해협 일대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크림 반도에는 판티카파에움(오늘날 케르치 시), 님파에움, 그리고 마르메키온을 건설했고, 타만 반도에는 파라고니아, 케포이, 헤르모나사, 포르투스 신디쿠스, 그리고 고르기피아를 건설했다. 이중 파라고니아는 테오스의 식민도시였고, 님파이움은 아테네의 식민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도시 국가들은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과 상업 활동을 이어가며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부터 스키타이인들의 공세로 여러 도시가 멸망하거나 굴복하자, 그리스인들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스키타이에 맞설 통일 국가를 수립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르치에낙스였다. 그의 조상은 밀레투스 또는 미틸렌(레스보스) 출신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밀레투스의 저명한 가문인 아르치에 가문이 여러 기록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밀레투스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선조는 밀레투스에서 흑해 연안으로 이주해 보스포로스 해협에 정착하여 상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헤로모나사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던 세만데로스라고 하며, 그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일찍이 헤르모나사 시의 지도자가 되었고 아폴로 신전의 사제로도 활동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80년경 헤르모나사, 티리타카, 코로콘다마, 판타파에움, 파나고리아, 미르메키, 케파, 포르프미야 시를 규합해 군사 연합을 형성하고 그들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주변의 유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입지를 굳힌 뒤, 수도를 판타파에움으로 옮기고 왕국의 발전을 도모했다. 한편 크림 반도의 스키타이인들의 위협에 맞서 서부 신드 족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그는 아폴로 신을 기리는 은화를 주조했으며 델로스 동맹과 동맹과 손을 잡아 보스포로스 상선들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무역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보스포로스 왕국의 기반을 닦은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사후에 왕위를 물려받은 후계자에 대한 정보도 남아있지 았다. 다만 그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던 기원전 438년, 스파르토코스 1세가 아르치에낙스 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를 개창했다. 이 인물의 기원에 대해 그리스 귀족 가문, 스키타이, 신즈인, 트라키아인 출신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스파르토코스"라는 이름이 트라키아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이기에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설이 대체로 우세한데, 오드뤼사이 왕국 초대 군주 테레스 1세의 아들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신빙성은 높지 않다. 그는 아르치에낙스 왕조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거나 용병대를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7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디오도로스는 스파르토코스가 즉위한 해가 아테네에서 테오도로스가 정권을 잡은 438년이었다고 기술했으며 그가 사망한 해는 기원전 433년이었다고 서술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5년간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는 아테네인들과 무역 협정을 맺었고, 유목민족과의 전쟁을 꾸준히 벌여서 왕국의 영역을 확장했다.

사후 두 아들 사티로스 1세셀레우코스가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리다가 셀레쿠오스가 4년만에 죽으면서 사티로스 1세가 단독으로 통치했다. 기원전 405년, 사티로스 1세는 아테네의 식민도시 님파에움을 그곳의 수비대장 겔론[4]이 넘겨준 덕분에 공략했다. 이로 인해 겔론은 아테네로 소환된 뒤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유죄 판결을 받을 게 확실시되자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피신한 뒤 그로부터 케파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보스포로스 왕국은 이후에도 아테네에게 빵을 공급했기 때문에, 양자간의 관계는 악화되지 않았다.

폴리아에노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딸을 신디족의 왕 헤카테오스에게 시집보내면서, 헤카테오스의 본처인 티르가타오를 죽이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헤카테오스는 티르가타오를 죽이는 대신 탑에 가두었고, 티르가타오는 탑을 탈출한 뒤 자신의 부족인 익소마타이 족으로 피신해 부족의 왕이자 아버지의 후계자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부족민들을 선동해 보스포로스 왕국과 신디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크게 황폐화시켰다. 결국 그는 티르가타오에게 사죄하고 공물을 바치면서 막내아들 메트로도로스를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얼마 후, 티르가타오가 괴한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여기고 메트로도로스를 죽이고 보스포로스 왕국과 다시 전쟁을 벌였다.

한편, 그는 님파에옴의 뒤를 이어 파나고리아 시를 확보한 뒤 테오도시아 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함락할 수 있으리란 예상과는 달리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애먹고 있었는데, 아들이 살해되었고 테르가타오가 왕국으로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절망에 빠져 죽었다. 사후 두 아들 레우콘 1세고르기포스가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두 왕은 티르가타오에게 막대한 선물을 제공하고 평화를 요청했고, 티르가타오는 이를 받아들여 물러났다. 이후 신디족의 지도자 헤카테오스가 티르가타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옥타마사드에게 추방당하자, 레우콘 1세는 즉시 개입하여 옥타마사드를 몰아내고 헤카테오스를 왕위에 복위시켰다. 몇년 후 헤카테오스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은 그는 자신을 "신디인의 왕"이라 칭했고, 신디인들의 중심도시인 신드스카야를 형제의 이름을 딴 고르기피아로 개명했다.

이후 레우콘 1세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테오도시아 시 공략을 이어갔다. 첫번째 공성전은 헤라클레아 폰티카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파견한 장군 틴니코스에게 격퇴되었지만, 기원전 360년에 이뤄진 두 번째 공격은 성공했다. 그 결과 보스포로스 왕국은 테오도시아의 비옥한 땅과 물고기가 많은 바다를 점유할 수 있었고, 자연히 아테네로의 곡물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데모스테네스는 한 연설에서 매년 1,000 부셀의 곡물이 아테네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레우콘은 아테네 인들의 칭송을 받았고, 그와 아들들에게 명예 시민권이 수여되었고 동상도 세워졌다. 레우콘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테네 선박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특혜를 줬다.

폴리아에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라클레아 폰티카는 테오도시아 시를 되찾기 위해 당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가 자신을 고용한 사트라프가 패하자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로도스의 멤논을 고용했다. 멤논은 탈영병으로 위장한 부하를 보스포로스 왕국군에게 보내 자신의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고 있다고 거짓말하게 한 뒤, 언덕 위에 절반의 병력만 보내고 나머지는 숨겨뒀다. 이에 보스포로스군이 방심하고 언덕으로 이동하자, 숨어있던 장병들이 뛰쳐나와 그들을 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페르시아군에 귀순한 뒤 이집트 정벌에 참여했고, 헤라클레아 폰티카는 테오도시아 탈환에 실패했다.

레우콘 1세는 기원전 349년 형제 고르기포스와 함께 사망했으며, 사후 그의 아들 파이리사데스 1세스파르토코스 2세가 공동 통치자로 등극했다. 스파르토코스 2세가 기원전 344년 사망한 뒤에는 파이리사데스 1세가 단독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삼촌 고르기포스의 딸 코모사리예와 결혼했으며, 파테예프 족 등 보스포로스 해협의 거의 모든 종족을 복종시키고 자신을 "만물의 제왕"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기원전 328년 스키타이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경제가 파괴되는 걸 막지 못했다. 데모스테네스는 한 연설에서 판티카파에움에 도착한 아테네의 포르미오가 주민들이 매우 가난해져서 상품을 팔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코모사리예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 사티로스 2세, 에우멜로스, 프리타니스, 고르기포스, 그리고 딸 아키스를 낳았다. 기원전 310년 파이리사데스 1세가 사망한 뒤, 사티로스 2세가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그러자 에우멜로스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에우멜로스는 사르마티아 부족으로부터 시라크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아 총 42,000명의 전사를 모았다. 사티로스 2세는 이에 맞서 스키타이 인들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아 34,000명의 병력을 모아 에우멜로스를 향해 진격했다.

양자는 쿠반 강의 지류 중 하나인 팟 강 유역에서 조우했다. 사티로스는 강을 건너 진영을 세우고 수레로 사망을 에워쌌다. 이후 전투를 위해 군대를 정렬하고 자신은 전투 진형의 중심에 섰다. 에우멜로스는 이에 맞서 군대를 편성하고 우익에 섰다. 이윽고 벌어진 전투에서, 사티로스는 적의 중앙 부대를 격파했고, 에우멜로스는 좌익 부대를 격파했다. 이후 사티로스가 스키타이 기병을 친히 이끌고 에우멜로스를 측면에서 공격해 도주하게 만들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에우멜로스는 잔여 병력과 함께 아리판 요새로 도주했다. 이 요새는 강으로 둘러 싸였고 높은 절벽과 숲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사티로스는 요새 주변의 모든 정착촌을 파괴한 뒤 숲을 모조리 베어내서 길을 뚫었다. 요새 수비대는 나무를 베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사티로스는 이를 무릅쓰고 계속 밀어붙인 끝에 4일째 되던 날에 숲을 돌파하여 아리판 요새에 당도했다.

사티로스가 고용한 용병 사령관 메니스코스가 첫번째 공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하자, 사티로스 본인이 두번째 공성전을 벌였으나 격퇴당했고, 그 과정에서 팔이 창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사티로스는 천막으로 옮겨진 뒤 치료받았으나 부상이 악화되는 걸 막지 못하고 밤중에 사망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이 때가 사티로스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째 되던 날이었다고 서술했다. 이후 사티로스의 형제 프리타니스가 군대 지휘권을 물려받은 뒤 군대를 철수시킨 후 왕실 금고가 보관되어 있는 가르가자로 이동하여 사티로스 2세의 장례식을 장엄하게 치른 후 왕위에 올랐다.

에우멜로스는 프리타니스에게 왕국의 지분 일부를 자신에게 양도하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프리타니스가 가르가자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판티카파에움으로 이동하자, 에우멜로스는 사르마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북상해 가르가자와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다. 프리타니스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마에오틱 호수 인근에서 에우멜로스와 교전했으나 크게 패하고 계곡에 갇혀 며칠간 굶주린 끝에 항복했다. 프리타니스는 잔여 병력을 에우멜로스에게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려났다. 하지만 프리타니스는 포기하지 않고 판티카파에움으로 돌아가 재차 왕위를 되찾으려고 반란을 꾀했으나 발각당하자 '가르단'이라는 곳으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에우멜로스는 판티카파에움에 도착한 뒤 사티로스 2세와 프리타니스의 일가족과 친구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 왕위에 올랐다. 다만 사티로스 2세의 아들 파이리사데스 2세만은 가까스로 빠져나가 스키타이인들의 영역으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보스포로스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에우멜로스는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뒤 영토 확장 정책을 단행했다. 함대를 동원해 흑해에 횡행하는 해적들을 제압하고 판티카파에움의 경제를 되살렸다.

또한 대부분이 사르마티아인으로 구성된 군대에 더 많은 그리스인을 모집한 뒤, 주변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리시마코스에게 쫓겨난 뒤 정처없이 떠돌던 1,000명의 피난민들에게 토지를 제공했다. 그리고 유목민족에게 여러차례 공격당한 후 버려졌던 타나이스를 탈환하여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보소포로스 해협을 둘러싼 모든 부족을 정복할 야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우멜로스는 기원전 304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희생제를 준비하고자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몰고 가던 중 말들이 갑자기 날뛰면서 전차가 전복될 위기에 몰리자, 급히 뛰어내렸다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바퀴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마차에 질질 끌려가다가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아들 스파르토코스 3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전반적인 치세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히 알기 어렵지만, 아버지가 생전에 정복한 부족들을 확실히 복종시키고 내정을 다지는 데 주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아테네와의 관계를 대폭 개선했다. 기원전 286년, 아테네는 그를 기리는 법령을 체택하고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아테네는 이전까지 보스포로스의 군주들을 참주라고 기록했지만, 그에게는 바실레프스 호칭을 사용했으며, 외적이 그를 칠 경우 아테네는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그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에게 황금 왕관을 수여했으며, 두 개의 동상을 아크로폴리스와 그의 조상들의 동상 앞에 세웠다.

기원전 284년 스파르토코스 3세가 사망한 뒤, 지난날 에우멜로스의 학살을 피해 가까스로 빠져나와 스키타이인들의 영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파이리사데스 2세가 조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고 안티고노스 2세와 함께 델로스 신전에 은잔을 제물로 바치는 등, 디아도코이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벌였다. 기원전 245년경 파이리사데스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스파르토코스 4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약 5년 만에 동생 레우콘 2세에게 피살당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레우콘 2세는 형의 아내 알카토에를 사랑한 나머지 자기 아내로 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다고 한다.

레우콘 2세의 치세는 약 20년간 이어졌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행적을 파악하기 어렵다. 화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전반부에 보스포로스 왕국에서 통화 위기가 발생해서 왕국의 수도 판티카파에움에서 금화와 은화 주조를 중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3/4분기인 그의 시기에 해외 시장 상황이 나아지면서 무역 거래가 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은화 주조가 재개되었고, 바실레프스라는 칭호가 박힌 구리 동전이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주조되었다. 또한 화폐학자들은 선왕인 스파르토코스 4세 때에 주로 독수리와 돌고래 문양이 동전에 쓰였지만, 그의 시대에는 방패, 검, 창 등 전쟁 무기가 주로 쓰였다며, 이는 그의 시기에 스키타이인과의 전쟁이 자주 벌어지면서 백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내렸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오비디우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레우콘 2세는 형을 죽인 뒤 형의 아내 알케토에를 취했다. 그녀는 전 남편을 살해한 그를 마음 속으로 증오했고, 결국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죽음이 갑작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집권한 에기에논은 기존까지 집권자의 호칭으로 사용하던 바실레프스가 아니라 아르콘(Archon)을 사용했다. 일각에서는 이 점을 주목해 그는 스파르토코스 왕가 출신이 아니며, 전임 왕 레우콘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후계자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기에 그가 통치를 대행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200년경 에기에논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스파르토코스 5세는 기원전 180년경에 사망했고, 그의 딸 카마사리에와 동생 파이리사데스 3세가 결혼하고 왕국을 공동 통치했다. 기원전 17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델포이의 명예 칙령이 적힌 비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델포이 신전에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고 한다.

기원전 160년경 파이리사데스 3세가 사망한 뒤, 카마사리에는 아들 파이리사데스 4세에게 양위한 뒤 스키타이 족장 아르고테스와 결혼했다. 파이리사데스 4세의 전반적인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수 없지만, 그의 시대에 주조된 주화는 남아있다. 통치 초기 10년 동안 왕관에 수염을 기른 얼굴을 앞면에 새기고 아테나 여신을 뒷면에 새긴 주화가 발행되었다. 이후에는 앞면에 아폴로 신의 머리가 새겨지고 뒷면에 말, 검 등의 다양한 이미지가 새겨진 주화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소량의 은화만 주조된 것을 볼 때, 그 시기에 보스포로스 왕국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60년경부터 기원전 140년경까지 파이리사데스 4세의 아들로 추정되는 스파르토코스 6세의 동전도 함께 주조되었다. 기원전 125년경에 더이상 그의 화폐가 주조되지 않은 걸 볼 때 이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이며, 아들로 추정되는 파이리사데스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키타이인들의 연이은 침략으로 인해 국가가 황폐해지자 폰토스 왕국의 군주였던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110년 디오판토스 장군을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파견했다. 디오판토스는 스키타이인들로부터 지켜줄 테니 미트리다테스 6세를 군주로 섬기라고 요구했고, 파이리사데스 5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국권을 폰토스 왕국에 넘기는 것에 반발한 무리가 기원전 109년 사우마코스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고, 파이리사데스 5세는 피살당했다. 이리하여 스파르토코스 왕조는 370여년 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3.2. 미트리다테스 왕조[편집]


사우마코스는 파이리사데스 5세를 타도하고 디오판토스 장군을 내쫓은 뒤 보스포로스 국왕을 칭했다. 그는 크림 반도 등 서부 일대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타만 반도 등 동부 일대는 폰토스 왕국을 지지했다. 디오판토스는 체르소네소스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기원전 107년 초 크림 반도로 진군해 테오도시아를 공략하고 뒤이어 보스포로스 왕국의 수도 판티카파에움을 공략했다. 그는 사로잡힌 뒤 폰토스 왕국으로 보내졌고, 폰토스군은 주요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고 왕국 내 스키타이 지도자들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보스포로스 왕국의 군주를 겸임하게 된 미트리다테스 6세(보스포로스 왕으로는 '미트리다테스 1세')는 스키타이 왕 필라쿠스을 상대로 크림 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스키타이인들은 크림 반도를 여러 차례 침공했지만 미르리다테스는 그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결국 스키타이족은 미트리다테스의 패권을 인정했다. 여기에 흑해 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올비아와 아폴로니아로부터 트라키아인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트라키아인을 격파한 뒤, 그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코카서스의 산악 해안과 비티니아 해안, 헤라클레이아 폰타케를 제외한 흑해 해안 전역이 그의 통치에 귀속되었다. 이로서 흑해 무역을 독점하게 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를 발판삼아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의 패권을 놓고 로마 공화국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로마군에게 잇따라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급기야 폰토스 본토를 빼앗기자 크림 반도로 도망친 뒤 거기서 항전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민중은 더 이상 왕을 따르려 하지 않았고, 아들 파르나케스는 이런 민심을 등에 업고 기원전 63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미트리다테스가 머물고 있던 판티카파에움 성채로 몰려들고 장수들 마저 더 이상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는 절망에 빠져 자살했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로부터 미트리다테스의 시신을 접수받은 뒤 폰토스의 옛 수도 야마사(아마시아)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무덤에 묻었고, 파르나케스가 파르나케스 2세로서 폰토스와 보스포로스 국왕으로 군림하는 걸 허락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한동안 로마의 봉신으로서 조용히 지냈지만 내심 소아시아의 패권을 다시 확보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다른 소아시아 군주들과 함께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완패한 뒤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살해당하고 뒤이어 이집트로 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는 이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그는 콜키스를 확보한 뒤 소아르메니아와 비티니아, 카파도키아를 잇따라 공략하여 영역을 확장했다. 카이사르에 의해 소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를 막으려 했지만, 파르나케스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칼비누스를 격파했다.

얼마 후, 파르나케스 2세가 보스포로스 해협의 방비를 맡겨뒀던 사위 아산드로스가 기원전 47년 반란을 일으켜 파르나케스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뒤나미스와 함께 보스포로스 왕위에 올랐다. 파르나케스 2세는 이를 진압하러 이동하던 중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수습한 뒤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첩보를 접하자 먼저 카이사르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파르나케스 2세는 젤라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완패했고, 로마군을 피해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달아난 뒤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테오도시아와 판티카파에움을 공략했다가 아산드로스의 반격으로 피살당했다.

아산드로스는 카이사르에게 파르나케스 2세의 수급을 바치며 자신을 보스포로스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주군을 배신한 자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알렉산드리아 전쟁 때 자신을 구해준 트로코니 부족의 왕자이자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생아인 미트리다테스 2세를 보스포로스 왕으로 세우고 아산드로스를 축출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보스포로스에 진군하자, 아산드로스와 뒤나미스 부부는 스키타이인의 영역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미트리다테스가 기댈 구석이 사라지자, 아산드로스와 뒤나미스 부부는 스키타이인들과 함께 반격에 나서 미트리다테스를 살해하고 보스포로스 왕위에 복귀했다. 이후 기원전 27년에서 기원전 17년 사이에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보스포로스 왕으로 인정받았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아산드로스는 마이오트 호수 근처의 체르소네소스 지협에 360스타티아(53km) 길이의 성벽을 세우고 10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성벽은 그 지역의 조지아인들이 해적 행위를 일삼는 걸 막고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7년 스크리보니우스라는 인물이 자신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인정을 받았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산드로스는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전투 전날에 스크리보니우스에게 귀순하자 자살했다. 스크리보니우스는 보스포로스 귀족들이 뒤나미스를 지지하는 걸 감안해 그녀를 축출하는 대신 결혼하고 공동 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스크리보니우스를 보스포로스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기원전 15년, 아우구스투스는 폰토스 왕국의 군주 폴레몬 1세에게 찬탈자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폴레몬 1세가 함대를 이끌고 흑해를 가로질러 쳐들어오자, 보스포로스인들은 강대한 로마 제국과 싸우길 원치 않았기에 스크리보니우스를 살해하고 로마군의 입성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폴로몬 1세를 보스포로스 왕으로 내세우는 건 받아들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5] 이에 폴로몬 1세가 구원을 요청하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기원전 14년 로마 함대를 이끌고 보스포로스로 진군해 반란군을 제압했다.

폴레몬 1세는 주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뒤나미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13년, 뒤나미스는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남편과 불화를 벌인 끝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족들이 있는 크림 반도 내륙으로 도주했다. 이에 폴레몬 1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외손녀인 피토도리다와 결혼했다. 기원전 8년, 폴레몬 1세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크림 반도 내륙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돈 강 어귀에 있는 타나이스 시를 파괴한 뒤 아스푸르기아노이(Aspurgianoi) 족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여 생포된 뒤 피살당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뒤나미스가 보스포로스 여왕으로 복위하는 걸 인정했다. 그녀는 이에 보답하고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를 기리는 비문을 세웠다.


3.3. 티베리우스 - 율리우스 왕조[편집]


서기 8년 뒤나미스가 사망한 뒤, 아스푸르고스가 보스포로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폴레몬 1세를 전사시킨 아스푸리기아노이 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뒤나미스의 남편 또는 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의 공주 게파이피리스와 결혼했다. 서기 10년 로마에 방문해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보스포로스 왕위를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의 성인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스푸르고스"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를 성으로 사용했다.

보스포로스 왕국은 아스푸르고스의 통치하에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고르기피아에 잘 짜여진 수도관과 배수로가 건설되었으며, 그리스 전통을 따른 건물이 잇따라 건설되었다. 또한 체르소네소스 반도가 이 시기에 왕국에 편입되면서, 왕국은 흑해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이 시기에 주조된 금화와 구리 주화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입증되었다. 한편, 그는 판티카파에움에 자신을 신격화한 사원을 세움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했다.

서기 38년 아스푸르고스가 사망하자, 칼리굴라 황제는 폰토스 왕국의 군주 폴레몬 2세를 보스포로스 왕위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보스포로스 주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아스푸르고스의 아내 게파이피리스를 여왕으로 추대했다. 게파이피리스가 1년 후 사망하자, 다시 아스푸르고스와 게파이피리스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3세가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기 44/45년경 알 수 없는 이유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에게 폐위당했고, 동생 코티스 1세가 새 왕으로 옹립되었다.

율리우스 아퀼라가 이끄는 로마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장악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삼자, 미트리다테스 3세는 내륙지대로 피신하여 사르마티아 부족들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아퀼라의 로마군이 철수하자, 미트리다테스 3세는 군대를 모아 코티스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미트리다테스 3세는 먼저 다르다네스 부족의 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뒤, 여세를 몰아 보스포로스 해협을 침공하려 했다. 이에 로마군의 방식으로 무장한 보스포로스군이 코티스 1세의 지휘하에 출진하자, 미트리다테스 3세는 이에 맞서다 패배한 뒤 다르다네스 부족의 수도 소자로 후퇴했다. 그러나 곧 수비대를 남겨두고 우스파 족의 도시인 시라크스로 후퇴했다.

로마-보스포로스 연합군은 소자를 함락하고 시라크스로 진격해 그곳을 포위하고 주변 지역에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결국 우스파 족 역시 항복했고, 미트리다테스 3세는 에우노네스 족에게 도주했다. 에우노네스 족은 미트리다테스 3세와 로마 사이를 중재했고, 결국 미트리다테스 3세는 로마군에 항복한 뒤 로마로 끌려갔다. 그리하여 왕위를 굳힌 코티스 1세는 에우니케라는 그리스 귀족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코티스 1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의 군주 코티스 3세의 삼촌인 레스쿠포리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레스쿠포리스로 지었다.

63년, 로마 황제 네로는 코티스 1세를 폐위시키고 보스포로스 왕국을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일부로 병합시켰다. 네로는 자신에게 군사적 위업이 없는 걸 부담스럽게 여겼고, 언젠가 머나먼 이방인의 땅을 정복하여 명성을 날리고 싶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보스포로스 왕국을 속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야심의 발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조만간 크림 반도로 원정가서 아직 로마에 복속되지 않은 내륙 지대의 야만족을 복속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64년 로마 대화재, 65년 피소 음모,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등 여러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실행을 미루다가 68년 갈바의 반란으로 실각하자 자결했다.

그 후 갈바는 보스포로스 왕국을 부활시키고 코티스 1세의 아들 레스쿠포리스를 새 군주로 선임했다. 레스쿠포리스 1세는 갈바 사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크리미아의 티라, 오비아, 체르소네소스 반도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다키아 왕국과 이아지게스 족, 록솔라니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병력과 물자 지원을 했으며, 유목 민족들이 흑해 연안지대를 습격하는 걸 저지했다. 93년 레스쿠포리스 1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사우로마테스 1세는 그동안 왕국의 수도로 삼았던 판티카파에움을 떠나 파라고리아를 새 수도로 삼고 헤르모니사 신전의 사제를 관리로 임명하고 헤르모니사 신전의 화랑을 복원하는 걸 감독하게 했다. 또한 110년 고르기피아에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니케아에서 발견된 그에게 헌정된 명예 비문에서, 그는 크리스티스(Κτίστη: 후원자)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 이는 그가 보스포로스 해협과 소아시아 전역에 상당한 기부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23년 사우로마테스 1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코티스 2세타만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사수하기 위해 유목민족과 연이어 전쟁을 벌였다. 또한 스키타이 및 타우루스 해적들을 상대로 흑해 일대에서 전쟁을 치렀다. 이 시기 여러 해안 요새와 마을이 해적의 습격으로 파괴되었고, 많은 주민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129년, 그는 승리를 기리기 위해 로마 양식을 본따 개선문을 세웠다. 그러나 왕국의 서쪽 지역인 테오도시아 시와 아테네온 항구는 버려졌다. 132년 코티스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로메탈케스는 136년 카파도키아와 아시아 일대를 침략한 알란 족과의 전쟁에서 로마군을 도왔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부름을 받고 로마에 방문했다. 이는 그와 폰토스의 로마 총독과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황제는 회의가 끝난 뒤 그를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153년 로메탈케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우파토르의 통치 기간 동안 사르마티아인들이 왕국을 주기적으로 침략해 메오티아 호수 북쪽에 있는 주요 도시인 타나이스가 파괴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원군을 얻어내려 애썼지만, 두 황제 모두 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루키아누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 속주인 비티니아와 폰토스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170년 사르마티아인들이 타나이스를 넘어 왕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에 맞서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보스포로스 왕국의 주화는 172년까지 발행이 중단되었는데, 이로 볼 때 사르마티아인들이 왕국 전체를 휩쓸었던 것으로 보인다.

172년 로메탈케스의 아들이자 에우파토르의 조카인 사우로마테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사르마티아인과의 전쟁을 지속하는 한편 186년 화폐 개혁을 실시해 금화의 유통을 늘리면서 화페에 들어간 금 함유량을 30%에서 15%로 줄였다. 이와 동시에 구리로 제주된 데나리우스 동전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이미지로 주조했다. 192-193년, 쿠반 강 유역에서 사르마티아인들의 일족인 시라크 족을 물리치고 지배하에 두었다. 그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타나이스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비문을 세웠다. 193년에서 194년 사이에 로마 제국과 타우리카 일대를 분할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알마 강과 살루스타 강에서 체르소네소스 해협까지 이어지는 크림 반도 남서부는 로마인들이 관장하고, 람파다와 카락스(현재 아이도르) 일대는 보스포로스 왕국이 관장하기로 했다. 한편, 그는 바다에서 해적과 싸우기 위해 함대를 육성하기로 하고, 해적의 습격으로 파괴되었던 테오도시아 시와 항구를 재건했다. 해적과의 전쟁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메오티아 호수와 크림 해안, 흑해 북부 일대의 경비가 강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록솔라니 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타프란 요새를 강화했다.

210년 사우로마테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스쿠포리스 2세는 아버지가 추진했던 군사 작전을 지속하여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물리쳤다. 218/219년경, 승리의 여신 니케와 트로피, 포로 등을 묘사한 동전을 주조했다. 그는 이 동전에서 "보스포로스와 타우루스, 스키타이인의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225년 또는 226년에 외아들 로메탈케스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웠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비티니아와 폰토스 해안을 크게 약탈하던 해적들과 맞섰다.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스트리스 주민들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대리석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경제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통치 말기에 주화에 들어간 금 함유량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 화폐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동방 일대가 224년 건국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으로 위축되면서 무역 활동이 이전보다 약화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레스쿠포리스 2세와 로메탈케스의 동전은 228년을 끝으로 더 이상 주조되지 않았고, 동생 코티스 3세가 왕위에 올라 자신의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코티스 3세가 두 사람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코티스 3세는 즉위 후 알란 족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사르마티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사르마티아 여인과 결혼했다. 또한 아들로 추정되는 사우로마테스 3세를 229년 공동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사우로마테스 3세의 주화가 232년을 끝으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은 걸 볼 때, 그 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33~234년에는 레스쿠포리스 3세의 주화가 주조되었고, 1913년 헤르손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언급된 체도스비오스 왕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와 레스쿠포리스 3세, 체도스비오스의 관계는 밝혀진 바 없다. 한편, 보스포로스 왕국의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서 금화에 사용되는 금 함유량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코티스 3세의 통치 말년에는 아예 금화 주조가 중단되었고 은화와 청동 화폐로 전환되었다.

234년 코티스 3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인닌티마이오스는 통치 초기부터 알란, 사르마티아, 고트족 등 여러 외세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판티카파에움에 일루라톤 요새를 추가로 건설하는 등 여러 요새를 세웠다. 또한 경제 사정이 악화된 점을 감안해 금화 주조를 완저히 중단하고 아프로디테 또는 이슈타르 여신의 초상을 담은 은화와 청동화를 주조했다. 그러나 238년에서 240년 사이에 알란족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크림 반도 전역이 파괴되는 걸 막지 못했으며, 수도 고르기피아는 239년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는 이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40년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스쿠포리스 4세는 여러 곳에 비문을 세워 자신이 "왕의 후손"이라고 기술해,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에 속하는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이후 로마군의 협조를 받아 알란 족이 크림 반도 산악 지역과 케르치 반도에 도달하는 걸 저지했다.

그러나 244년경 로마 황제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타우리카에서 로마군을 빼내서 다뉴브 전선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보스포로스 해협은 고트족, 헤룰리 족의 공세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후 왕국은 고트족, 헤룰리족, 사르마티아인, 알란족 등의 연이은 침공에 시달렸고, 급기야 251년 알란족이 타나이스를 공략하고 철저히 파괴해 보스포로스 북쪽 방어선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그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파르산제스라는 인물이 이때를 틈타 253년 왕을 칭하며 화폐를 주조하다가 254년 진압되었다.

결국 그는 고트족, 헤룰리족, 알란인들에게 굴종해야 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고트족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함대를 대거 확보한 뒤 흑해를 가로질러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넘어 지중해 각지에서 횡행했다고 한다. 그들은 257년, 258년, 262~264년, 266~270년, 275년에 걸쳐 보스포로스 함대를 이용한 해상 원정을 감행했다. 이 당시 보스포로스 왕국은 고트족의 봉신으로서 이들의 침략을 거들어줘야 했다. 276년에 테이라네스사우로마테스 4세를 공동 왕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그의 화폐가 더 이상 주조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 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우로마테스 4세의 주화는 276년 이후 더 이상 주조되지 않은 걸 볼 때 병사했거나 테이라네스에게 축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테이라네스는 고트족이나 보라니 족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고 케르치에 지상의 신인 제우스헤라에게 바치는 기념비를 세웠으나 재위 2년만인 278년에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토토르시스 시기에 주조된 주화의 품질은 매우 조잡하며 특히 마지막 5년 동안의 주화는 초기보다 훨씬 희귀하다. 이는 왕국 내 갈등 또는 로마 제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주화를 주조하는데 쓰이는 구리 수입이 원할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92/293년에 테오도시아 총독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소고스가 세운 비문에 따르면, 이 시기에 테오도시아 시가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이는 로마 제국이 보스포로스 왕국과 전쟁을 벌여 테오도시아 시를 자국의 영역으로 편입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문헌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에 정확한 진행 과정은 파악하기 어렵다. 309년 이후 그의 주화가 더이상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토토르시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라담사데스가 왕위에 올랐고, 314년에 라담사데스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레스쿠포리스 5세가 뒤따라 왕위에 올랐다. 조시무스콘스탄티노스 7세의 기록에 따르면, 사르마티아인과 마에오티아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322년 라우시모드 왕의 지휘하에 판노니아를 침공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크게 패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마침 라담사데스의 주화도 322년을 끝으로 더 이상 주조되지 않았기에 라우시모드가 그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가설의 영역에 그치고 있다. 이후 단독 군주로서 보스포로스를 다스리던 레스쿠포리스 5세는 토토르시스 치세 때 로마 제국에 빼앗겼던 테오도시아 시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걸 감안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수용하고 공물을 바치면서, 로마 제국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해주길 희망했다. 그의 통치 말기에 주조된 주화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초상이 새겨졌는데, 이는 로마에 대한 종속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335년 타만 반도에 성벽을 쌓아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 사망 후 정국 혼란과 게르만족, 사산 왕조의 침략에 시달려서 보스포로스 왕국을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341년 고트족의 침략으로 판티카파에움과 파라고리아 등 보스포로스 해협의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고, 그의 화폐는 더이상 주조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의 군주들의 초상을 담은 주화는 더 이상 주조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의 역사가 리처드 가넷은 이후에도 왕조가 이어졌을 거라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 7세의 저작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보스포로스 왕 '사우로마테스'와 로마의 전쟁이 묘사되고 이후에 "사우로마테스의 왕권이 끝났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왕조가 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가 로마에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고 몇 안 되는 문헌 기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도출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3.4. 이후의 왕국[편집]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보스포로스 왕국의 도시들은 레스쿠포리스 5세가 몰락한 뒤에도 시민들이 삶을 영위했으며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가 회복되면서 사치품 사용이 늘어났다고 한다. 학계는 고트족이 왕국을 정복한 후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회복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고트족의 지배가 있었다는 것은 4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고트족의 왕으로부터 보스포로스 해협에 새로운 주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받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469년 훈족이 동고트족과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 훈족의 일부였던 우티구르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크림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고트족과 전쟁을 벌였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우티구르족은 크림 반도에서 고트족을 크게 격파해 쿠반 지역으로 후퇴시켰다고 한다.

1888년 크림 반도 동부의 케르치 시에서 발견된 비문에 등장하는 도우토노스 왕이 이 시기에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그가 훈족 출신이며 케르치 반도의 동부와 타만 반도를 차지했을 것으로 본다. 그는 티베리우스-율리우스 왕조의 군주들이 대대로 사용했던 '필로카이사르 필로로마이오스 에우세베스(Philocaesar Philoromaios Eusebes)'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일각에서는 그가 옛 왕조의 후손이라는 걸 강조하고자 일부러 그 호칭을 썼다는 설을 제기한다. 아마도 동로마 제국과의 교역을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호칭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우토노스가 언제까지 왕위를 이어갔으며, 그의 후손이 왕조를 세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528년, 크림 반도를 지배하는 훈족의 왕 그로도스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된 뒤 막대한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 훈족이 숭배하는 모든 우상을 압수하고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훈족 귀족들이 반발하여 그를 시해하고 형제인 무겔을 왕으로 추대했다. 무겔은 동로마 제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킴메리아 시를 파괴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0년 요한네스, 바두아리우스 등을 보내 그를 공격하게 했고, 그는 이내 격파되어 크림 반도 내륙 지대로 도피했다.

그 후 크림 반도의 남부 지역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직할 통치를 받았고, 반도 중북부는 볼가 불가르, 하자르 칸국이 지배하다가 10세기에 키예프 공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키예프 공국과 동로마 제국은 흑해의 패권을 놓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지만, 나중에 블라디미르 1세정교회로 개종한 뒤 동로마 제국의 앞선 문화 및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우호 관계를 맺었다.


4.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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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파견한 동로마 제국 함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5. 여담[편집]


왕국의 이름 '보스포로스'는 아조프 해의 관문인 케르치 해협의 옛 이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온 것이다. 유명한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과 유래는 동일한데, 뜻은 "가축 통로"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이 압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킴메르인의 보스포루스'(Cimmerian Bosporus)라고 구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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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종 고대 그리스 반도 내 폴리스에 곡물 외에도 스키타이인 전쟁포로들이 노예로 수입되어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 스키타이인들의 피부가 유달리 희다고 기록하였다. 이들은 아테네에서 주로 경찰 병력으로 활용되었다.[2] 서기 63년에서 68년까지 잠시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3] 아마존 여전사 자체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세트인, 사르마티아 문서 참조[4] 크세노폰의 친척이다.[5] 이때 '아산드로스 2세'로 알려진 뒤나미스의 아들을 추대했다는 설도 있다.[6] 실존 여부가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