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스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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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탄생, 부모, 유년기
2.1.1. 외모와 신체적 특징
2.2. 칼리스트라투스의 연설에 감명받아 웅변을 배우다
2.3. 웅변을 위한 노력
2.4. 필리포스 2세와의 전쟁을 주장하다
2.5. 아테네에서 몰락하다
2.6. 죽음
3. 평가
3.1. 고독한 자유의 수호자
3.2. 중립론: 올바른 철학, 무능한 정책
3.3. 부정평가: 진보에 대한 터무니 없는 반대자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일:demos.jpg
Demosthenes(Δημοσθένης)
(BC 385/384 ~ BC 322)

기원전 4세기 중반 고대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정치가(Statesman)이다.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3세 치하의 마케도니아에 맞서 아테네 민주정을 수호하는데 평생을 바친 정치가이다. 그의 연설 능력은 당대에도 이합집산해 분열된 아테네 민중을 휘어 잡았다. 데모스테네스는 후대에 그리스 최고의 연설가 지위에 올랐을 정도로 존경받았으며 그의 연설문들은 당장 고대부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2. 생애[편집]


데모스테네스의 생애에 대한 주요한 출전은 플루타르코스『비교열전』이다. 그 외에도 데모스테네스 자신의 연설문, 인생의 정적 아이스키네스의 연설문에서 생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나, 자기 자신 및 정적의 왜곡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깊게 참조해야 한다. 그 외에도 당대의 동료 정치인 휘페레이데스, 로마 제국의 역사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데모스테네스에 대해 쓴 두 주요 논문 등에서 얻을 수 있다.


2.1. 탄생, 부모, 유년기[편집]


역사적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난 384년아테네 파이아니아 구에서 데모스테네스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데모스테네스[1], 어머니는 스키타이 피가 섞인 클레오불레[2]였다. 데모스테네스의 아버지는 도검 공장 주인이었고, 귀족 신분이었기에, 데모스테네스는 부유한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0세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급사하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으로 약 15탈란톤, 약 30명의 기술자 노예, 무기 공장, 가구 공장과 노예 인부도 남겨주었다고 한다.[3]


2.1.1. 외모와 신체적 특징[편집]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체가 병약하고 깡말랐다. 어머니는 이런 아들을 걱정해 힘든 운동[4]에 내보내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의 체력과 신장을 또 약화시켰다. 또한 그는 연설가로서 비교적 치명적으로 ρ과 λ발음을 잘 구분하지 못 했다고 한다.


2.2. 칼리스트라투스의 연설에 감명받아 웅변을 배우다[편집]


아버지가 죽자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후견인이 재산을 횡령하고 관리를 소홀히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했으며, 데모스테네스는 몸이 허약하고 연약한 기질이라 주변에서 공부를 권하지 못했다.

여위고 행색이 병자와 같아 그의 외모를 보고 일설에 따르면 힘 없는 피리 연주자로 그의 이름을 따서 바탈루스라고 불렀으며, 그의 거동이 야만적이고 악랄하다고 해서 일설에 따르면 뱀을 시적으로 부르거나 행동이 굉장히 난폭한 시인의 이름을 따 아르가스라고도 불렀다.

오로포스 시의 문제로 공개 재판이 열려 칼리스트라투스가 변론을 하게 되었을 때, 가정교사에게 부탁해 재판을 구경하러 그곳으로 갔으며 칼리스트라투스가 한 웅변에 감동을 받았고 이사이우스에게서 웅변을 배웠다.


2.3. 웅변을 위한 노력[편집]


데모스테네스는 자라서 자신의 후견인들과 법정에서 싸워 달변으로 횡령당한 재산의 일부를 되찾았으나 그 때뿐이었다. 막상 정식 공청회에 나서 웅변을 처음 했을 때는 앞뒤 안 맞는 논리, 작은 목소리, 더듬는 버릇 때문에 "돈 찾는 웅변만 잘하는 거냐?"는 비난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고 한다. 그 때 유명한 배우이자 친구인 사티루스의 도움으로 자신의 단점을 알아내 고쳐나가기 위해 지하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발성을 연습하거나 머리를 일부러 깎아 2, 3개월 동안 지하실에서 연습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헤어진 후에 만나서 한 이야기에 대해 되풀이하고 여기에 반대할 말을 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말, 자신이 남에게 한 말을 고치거나 변화시켜 보기도 했다. 발음이 바르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버릇이 있어 입에 조약돌을 물고 연설하는 것으로 고쳤고 음성은 평지를 오르거나 가파른 비탈을 달리면서 숨이 찼을 때 연설하거나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고쳤으며, 커다란 거울을 집에 걸어놓고 그 앞에 서서 연설하면서 적절한 제스처를 취하거나 행동을 바르게 하는 연습을 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얌전하지 못하고 온화하지도 않았으며, 의지가 강해 원한은 반드시 갚으려고 했고 32세 때 미디아스를 고소했다가 뇌물을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2.4. 필리포스 2세와의 전쟁을 주장하다[편집]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해 무엇이든지 비난하거나 공격했고 아테네 사람들을 선동했으며, 그 이름은 필리포스 2세에게까지 알려졌고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선동해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했다. 그 당시에 마케도니아군이 공격한 비잔티온[5], 페린티아를 구원하기 위해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고 데모스테네스가 직접 사절이 되어 그리스 각지에 필리포스 2세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넣었으며, 일부의 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게서 1,7000명의 용병들에게 줄 돈을 거두었다.

필리포스 2세가 암피사에서 승리를 거두고 엘라테아를 습격해 포키스를 점령하자 데모스테네스는 테베와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했으며, 테베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필리포스 2세는 이에 전령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으며,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 테베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

데모스테네스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하려고 했으며, 기원전 338년에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참전했지만 전투가 벌어지자 도망쳤고, 그리스 연합군은 마케도니아에게 패했다. 전투에 패배하자 그의 반대파들이 고발하는 등 비난했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고소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존중해 국사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데모스테네스는 카이로네이아에서 전사한 사람들에 대한 추도 연설을 했다.


2.5. 아테네에서 몰락하다[편집]


필리포스 2세가 죽자 화관을 쓰고 여러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좋아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그리스의 여러 도시와 동맹을 맺어 테베가 마케도니아군을 공격했고 데모스테네스는 페르시아의 장군들에게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것을 권유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보이오티아에 침공하고 테베 등을 빼앗는데, 알렉산드로스 3세는 사람을 보내 열 사람의 웅변가를 요구했고 데모스테네스는 사절로 임명되었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의 노여움이 두려워 키타이론 산까지 갔다가 도중에 되돌아가서 사절의 직위를 반납했다.

이 일로 인해 데모스테네스는 실각했고 마케도니아에서 도망쳐 온 하르팔로스에게 매수당하면서 고발당해 50탈렌트의 벌금을 물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감옥에 도망쳐 트로이젠, 아이기나 등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다.


2.6. 죽음[편집]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자 아테네에서 찾아온 사절들과 협력해서 마케도니아를 공격해 그리스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권유했고 이로 인해 헬레닉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아테네에서 그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면서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가 벌금으로 내기로 한 50탈렌트는 면제되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가 크라논에서 헬레닉 동맹을 격파하고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무니키아에 침공하자 데모스테네스는 당연히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할 처지가 되었고, 결국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아테네에서는 반(反) 마케도니아 운동의 선동가인 데모스테네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티파트로스는 여러 사람을 파견해 데모스테네스와 히페레이데스를 포함한 일파들을 잡아들이도록 했는데, 데모스테네스는 칼라우리아 섬의 포세이돈 신전에서 숨어있었다.

그가 숨어있는 위치가 발견되어 안티파트로스의 측근이자 친우인 아르키아스[6]가 추적했고 아르키아스와 그의 병사들이 신전에 들이닥쳐 데모스테네스를 잡으러 왔다. 데모스테네스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면서 신전 안으로 들어가 편지를 쓰는 척 하면서 독약이 든 병에 갈대로 만든 붓을 넣어 거기서 흘러나온 독약을 마셨고, 신전 밖으로 나가면서 쓰러져 사망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아르키아스가 데모스테네스에게 "해는 끼치지 않을 테니 같이 가시죠."라고 구슬리자 데모스테네스는 짐짓 웃으면서 "나는 자네의 연극에는 관심 없다네."라며 받아쳤고, 아르키아스가 화를 내며 창을 겨누자 데모스테네스는 오히려 웃으면서 "자네는 그렇게 난폭한 게 어울리지, 예의바른 건 어울리지 않아. 유서를 쓸 테니 잠시 기다리게."라고 하고는 독약을 바른 붓을 입에 물고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르키아스가 병사들에게 "죽음이 두려워 울고있다."고 말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도 데모스테네스가 움직이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아르키아스가 다가가 그를 흔들었는데, 그제서야 간신히 일어난 데모스테네스는 옆에 있는 포세이돈 신상을 향해 "이곳에서 죽어 신전을 더럽히기 전에 신전에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는 일어나 걷다가 결국 신전을 나가지 못 하고 신상 앞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3. 평가[편집]


데모스테네스의 연설들은 그의 사후 곧바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평가 받았으며, 키케로는 그를 고대 최고의 연설가로 평했다. 데모스테네스를 둘러싼 고대의 논의는 플라톤같은 전설적 작가들 만큼이나 풍부했고 비잔티움 시대에는 연설의 모범이자 교과서로 활용되었다. 한편으론 데모스테네스는 부족한 4세기 중반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정치사의 주요 출처로 사용되었다. 당대 역사서의 부족은 데모스테네스의 문체나 정치적 평가를 떠나 계속해서 수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상이 데모스테네스에 대한 공통적 평가이며, 그의 당대 정책은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평을 받는다. 마케도니아 헤게모니 이전 복잡다단했던 그리스사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데모스테네스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중세 이후부터 지속되어온 현상이었다.


3.1. 고독한 자유의 수호자[편집]


역사를 논하면 늘상 있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당대를 판단한다. 데모스테네스의 아테네 중심주의를 앞으로 다가올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정복과 비교하면서, 그의 정책을 시대에 뒤떨어진 아집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에 대한 외교 정책의 군사적 실패는 데모스테네스의 잘못된 근본 이념에 대한 증거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당시 마케도니아의 군사력은 모든 정치적 고려를 분쇄시킬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수백년간 흐릿한 안개 속에 있다가 등장한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넘어 페르시아-인도를 정복할 것을 예상할 만한 사람은 델포이의 무녀를 제외하고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3.2. 중립론: 올바른 철학, 무능한 정책[편집]


자유에 대한 그의 헌신이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 할만 하나, 방법 및 그의 정책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적합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데모스테네스당의 정책은 도시의 권력과 독립을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3.3. 부정평가: 진보에 대한 터무니 없는 반대자 [편집]


데모스테네스는 부패한 반대파들의 정책을 모조리 비판하는 데 집착해, 당시의 진짜 문제인 그리스를 통합하는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북부 전선에서 아테네의 모든 군사 자원을 투입하려는 데모스테네스의 결정에 대한 반대는 이유없는 반대가 아니었다. 아테네만 이득을 보고 동맹국은 큰 이득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테네가 장기적인 제국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신망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더도 덜도 아닌 치킨 호크 그 자체. 특히 자신이 열렬히 주장하던 전쟁이 실제로 발발하자 홀로 전장에서 탈주하는 모습은 이 인물의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의 정적 아이스키네스의 주장으로 강한 워딩은 다소 감안해 들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전쟁에서 탈주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지지한 전쟁에서 본인이 도망쳤다는 점이다. 이 탈주 일화는 데모스테네스에게 그의 연설에서 보여준 강력한 의지만큼이나 강력한 비판거리가 되었다.


4. 대중매체[편집]


히스토리에》에선 유려하며 가열한 언변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웅변술을 가진 우수한 웅변가라고 한다. 말수는 적으나 정확하게 사물의 핵심을 찌르는 가장 강력한 웅변가인 포키온과는 여러 모로 반대되는 캐릭터. 정치적 성향도 달라서 포키온이 전쟁을 아는 평화파인 반면에 데모스테네스는 전쟁을 모르는 주전파로 묘사된다. 마케도니아 주전파로 필리포스 2세가 원정 도중 다쳤다는 소식에 득세한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는 장군이나 부관이 아닌 아테네를 고무할 일개 병졸로 참가하였으며 안전한 후군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틈새 찌르기로 후군을 몰살시키고 데모스테네스는 왕자의 검이 옆의 병졸의 목을 치다 부러저셔 간신히 살아남는다. 데모스테네스는 죽은 병졸의 입에 박힌 칼날을 빼내다 전쟁의 공포에 도망쳐버린다.
[1]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이름이다.[2] 어머니의 아버지, 즉 데모스테네스의 외할아버지는 '귈론'이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405년 크림반도 부근의 뉨파이움 공방전에서 뉨파이움시를 버렸다는 혐의로 아테네의 시민권을 잃고 추방되었다. 이후 귈론이 스키타이 여성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 중 하나가 데모스테네스의 어머니인 '클레오불레'이다. 그러나 이 정보의 출처는 당대 데모스테네스의 정적이었던 아이스키네스와 위작으로 의심받는 데모스테네스의 『장례연설』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정보의 정확성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아테네의 비방법에 따르면, 그 비방의 내용이 거짓이라도 처벌할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정보가 심심치 않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설사 데모스테네스의 어머니가 스키타이 혈통이라 하더라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시민권 법률에 따르면 403년 전까지 태어났다면 아테네인이었기 때문이다.[3] 『아포보스 고발 연설문』 1.9[4] 레슬링, 사냥.[5] 당시는 그리스의 도시였으므로 라틴어 발음인 비잔티움으로 불리우지 않았다.[6] 투리(Thurii) 출신으로, 원래 연극 배우였는데 마케도니아로 오면서 군인이 되었다. 도망자 혹은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군인이라 그런지 별명이 도망자 사냥꾼으로 불렸다.[7] 한국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간도의 조선족이 군사적 지도자를 위시하여 한반도를 점령하고 만주땅을 넘어 시베리아까지 점령하는 환빠들이 반길만한 시나리오를 누가 그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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