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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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조 카무니치 작, <카이사르의 죽음>

1. 개요
2. 배경
3. 해방자들
4. 암살 계획
5. 3월 15일
6. 암살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해방자'를 자처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한 사건. 3월 15일에 벌어졌기 때문에 '3월의 이데스(Ides)' 사건으로도 일컬어진다.


2. 배경[편집]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옵티마테스파를 무너뜨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뒤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제공하고, 도시 빈민들에게 곡물을 싼 가격에 배분했으며, 아나톨리아, 그리스, 카르타고 등 여러 곳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빈민들을 이주시켰다. 또한 원로원의 규모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고 자신의 사람들을 대거 의원에 발탁했으며, 총독의 임기를 제한했다.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고 검투 경기와 연회를 오락으로 제공했으며, 공공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로마 시의 거리를 정돈했다.

평민들은 이러한 카이사르의 개혁에 열광했지만, 많은 귀족들은 마음 속으로 깊은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고귀한' 가문 출신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고위 관직을 맡으며 명예를 얻는 것이 공화국의 철칙이라고 여겼는데, 카이사르 혼자서 모든 명예를 독차지하고 자신들은 그저 들러리나 서야 하는 걸 한스러워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오만과 허영심을 극도로 보여준다고 여겼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많은 로마인이 가장 위대한 로마인 중 한 사람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자녀와 가족을 파괴한 걸 기념하려고 개선식을 벌이는 것에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한다. 호민관 폰티우스 아퀼라는 이날 카이사르가 백마를 몰고 지나갈 때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일어나서 경의를 보내는 걸 거부했다. 그걸 본 카이사르는 그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봐, 아퀼라! 내게서 공화국을 되찾아보지 그래?"

그 후에도 카이사르는 아퀼라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아, 누군가에게 약속할 때 냉소적으로 이런 말을 꼭 덧붙였다고 한다.

"폰티우스 아퀼라가 허락한다면 말이지.(Sitamen per Pontium Aquilam licuerit.)"


그 후 카이사르는 수많은 영예를 수여받았다. 그의 생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탄생월인 퀸틸리스(Quinctilis)는 그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Julius)로 개명되었다. 또한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상아 조각상은 로마 신전의 조각상들과 함께 세워졌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참석하는 동안 특별히 제작된 황금 의자에 앉았고, 고대 로마 왕들의 자주색 예복을 입었으며, 월계관을 항상 쓰고 다녔다. 한편, 카이사르는 이 시기에 오만한 언행을 여러 차례 보였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영예를 수여하기로 결정한 후 의원 대표단이 카이사르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려 했다. 앉은 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카이사르는 의원들이 찾아왔다고 알렸는데도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고, 영예를 높이는 게 아니라 줄여야 한다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기원전 44년 1월 어느날, 호민관 가이우스 에피디우스 마룰루스와 루키우스 카세티우스 플라부스는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 신전에 세워진 카이사르 동상 머리 위에 왕관이 씌워진 걸 발견하고 당장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카이사르가 말을 타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향하고 있을 때 몇몇 사람이 그를 향해 "렉스(Rex: 왕)"라고 외치자, 카이사르는 "나는 렉스가 아니라 카이사르입니다."라고 답했다. 마룰루스와 플라부스는 처음으로 렉스라고 외친 자를 체포해 엄벌에 처하려 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두 호민관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 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자기 동상 위에 왕관을 씌우는 등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두 사람을 호민관에서 제명하고 원로원 의원 직을 박탈했다.

기원전 44년 2월 15일, 로마에서 열린 루페르칼리아(Lupercalia)에 참여한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행사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씌우며 "백성이 이것을 나를 통해 독재관에게 바칩니다."라고 외쳤다. 일부 군중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지만, 대다수는 침묵했다. 카이사르는 분위기를 읽고 안토니우스에게 왕관을 돌려줬다. 안토니우스가 재차 권유했지만 역시 거절하면서, "유피테르야말로 이 왕관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군중은 이에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카이사르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가 시민들이 카이사르가 왕이 되는 걸 원하는지를 알아보려고 연기한 거라 의심했다.[1]

이렇듯 카이사르가 절대권력을 구가하면서 수많은 영예를 얻고 언행도 갈수록 오만해지자,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에게 맞서 싸웠던 정적 뿐만 아니라 동지들까지도 카이사르의 언행에 두려움과 반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최강의 권력을 확보하고 수많은 로마군을 사병처럼 부리는 그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물리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3. 해방자들[편집]


카이사르를 암살하자는 음모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키케로필리피카이에서 기원전 45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나르본에 있을 때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로부터 카이사르 암살 계획을 전해듣고 계획에 참여하겠다고 밝혔으며, 카이사르가 이베리아 전쟁을 마치고 귀환할 때 마중나왔으나 음모를 밝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필리피카이는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신빙성은 높지 않다. 실제로 트레보니우스는 안토니우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음모에 가담할 가망이 없다면서 안토니우스를 가담시키는 계획에 반대했다. 학자들은 적어도 기원전 45년 말부터 음모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카이사르 암살 음모의 주동자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그리고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였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정부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확고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오랜 정적이었던 소 카토가 우티카에서 자살하자 그를 찬양하는 추도사를 썼고 카토의 딸 포르키아와 결혼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브루투스를 몹시 총애했고, 명예로운 관직을 연이어 맡아서 훗날 집정관으로 선출될 기회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한다고 여기고 고심하다가 매제인 카시우스의 설득을 받고 암살 계획을 주도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카르헤 전투 당시 기병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패배가 명백해지자 기병 500기를 이끌고 시리아로 탈출한 뒤 1만 가량의 패잔병을 수습한 후 파르티아의 침공을 막아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옵티마테스파를 따라 해군을 지휘하여 여러 번 승리했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참패하자 더 이상 항전하지 않고 로마로 귀환해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고 원로원 의원직을 유지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유년기 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 파우스투스가 아버지의 통치를 찬양하자, 카시우스는 "네 아버지는 잔혹한 독재자였다"라며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렇듯 독재를 혐오했던 그의 입장에서 내전 승리 후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카이사르는 마땅히 척결해야 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갈리아 전쟁 때 맹활약하여 카이사르로부터 "젊은 브루투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카이사르의 내전 때도 해군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브루투스를 법무관 중에서도 군사 지휘권을 가지는 요직인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로 임명했고, 기원전 44년에는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내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암살 계획에 참여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이사르의 '꼭두각시' 취급을 받느니 그를 제거한 후 실권자로 우뚝 설 야심을 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갈리아 전쟁 때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 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전선을 지휘하여 승리에 일조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마실리아 공방전 때 육군을 이끌고 마실리아를 장기간 공격한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에도 카이사르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기원전 45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기원전 44년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카이사르에게 반감을 품고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 그는 암살 계획에 참여한 이들 중 유일하게 집정관을 역임했기 때문에, 지도자격 인사로 대접받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60명 가량의 인사들이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다수는 암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서야 음모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료는 위에서 서술한 네 명 외에도 16명의 암살자를 추가로 전한다.

  •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버르: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기원전 44년 비티니아와 폰토스 속주의 총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일찍이 카이사르에 맞서다가 추방당한 형제 푸블리우스 때문에 음모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세네카는 그가 권력을 탐하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 롱구스: 카이사르의 소꿉친구로 전해진다. 기원전 44년 당시 호민관을 맡고 있었다. 형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와 함께 암살에 가담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갈리아 전쟁 때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활약했으나,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땐 별다른 활약을 못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와 갈바는 빚 문제로 줄곧 논쟁을 벌였으며, 카이사르가 갈바의 아내 포스투미아와 불륜을 맺자 갈바가 분노했다고 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 밑에서 집정관에 선출될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홀대받은 건 분명하다.
  • 폰티우스 아퀼라: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 승리 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유일하게 경의를 표하지 않은 인물이다.
  • 퀸투스 리가리우스: 아프리카 총독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휘하에서 카이사르에 맞섰지만 탑수스 전투 패전 후 하드루메툼에서 사로잡혀 추방형에 처해졌다. 이후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공모한 혐의로 재차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키케로의 변호로 무죄 판결을 받고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관용을 베푼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갈리아 전쟁과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활약했다. 그러나 기원전 45년 법무관을 역임한 뒤 카이사르로부터 속주를 배정받지 못하고 거액의 돈만 받자 자신을 모욕한 것으로 여기고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 가이우스 카시우스 파르멘시스: 여러 편의 비극, 풍자문, 비문 등을 집필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암살에 가담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파쿠비우스 라베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저명한 법학자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의 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친구로서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 카이킬리우스
  • 부실리아누스: 카이킬리우스의 형제였다.
  • 루브리우스 루가
  • 마르쿠스 스푸리우스
  • 푸블리우스 섹스티우스 나소
  • 페트로니우스
  • 콘스탄티누스 스피로풀로스
  • 푸블리우스 투룰리우스

암살에 가담한 자들의 동기는 다양했지만, 한 사람이 엄청난 권력을 영원히 소유하는 건 공화국에서 있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그들은 일정한 임기를 가진 선출된 행정관들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고 여겼는데, 카이사르가 몇몇 측근과 논의해서 임의로 결정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기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방식의 적용을 미룰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시적이어야 했다. 술라의 치세는 카이사르보다 훨씬 잔인했지만, 그는 독재관을 2년만에 사임했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취임해 술라를 따를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하게 드러냈다. 카이사르가 집권하는 한, 그들은 카이사르의 추천을 받아야만 출세할 수 있었다. 이런 굴욕을 참을 수 없었던 그들은 카이사르 한 사람만 죽이면 공화국이 회복되리라 보고 계획을 밀어붙였다.


4. 암살 계획[편집]


기원전 44년 초,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 계획을 발표하고 대규모 병력을 마케도니아 속주에 집결시켰다. 이에 음모자들은 암살을 서둘러야 한다고 여겼다. 만약 카이사르가 이대로 원정을 떠나서 또다시 큰 승리를 거둔다면, 시민들이 이에 열광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카이사르를 죽일 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아피아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쳐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었고, 비아 사크라(성스러운 도로)에서 습격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으며, 그가 검투 경기를 관람하고 있을 때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카이사르가 3월 18일에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예정된 3월 15일을 결행일로 잡았다.

음모자들은 키케로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음모에 추가할지 숙고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통치가 압제적이라고 여겼고, 두터운 지지층이 있었으며 인맥도 상당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당시 60세가 넘었고,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는 성향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가 암살에 가담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배제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진지하게 고려되었지만 트레보니우스가 "안토니우스는 음모에 가담할 생각이 없다"라고 하자 역시 배제되었다.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음모에서 제외시킬 거면 아예 죽여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장병들과 무척 친하니, 병사들을 선동하여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신들을 공격하려 들 거라는 것이었다. 이에 동조한 이들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포함한 주변인들을 전부 죽이고 카이사르의 개혁을 되돌리자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그러다가 대혼란이 일어난다면서, 안토니우스만 죽이고 카이사르의 정책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두 의견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왕이 되려는 카이사르만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 암살은 폭군을 처단하는 정당한 행위지만, 그의 지지자들을 살해한다면 정치적 숙청으로만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개혁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카이사르의 병사들과 다른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대의를 이해해줄 거라고 덧붙였다. 그의 논리는 음모자들을 설복시켰고, 안토니우스는 암살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음모자들은 3월 15일 당일에 약 8인치 길이의 단검인 푸지오(pugio)를 토가에 숨긴 채 카이사르에게 접근하기로 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검투사들을 미리 섭외해서 암살이 성공한 뒤에 카이사르 지지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도록 했다.


5. 3월 15일[편집]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3월 14일 밤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가 집의 벽이 무너지는 꿈 또는 카이사르의 시신을 안고 있는 꿈을 꿨다고 한다. 또한 스푸린나(Spurinna)라는 이름의 예언자가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까지는 위험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카이사르는 3월 15일 아침에 희생 제물 공양 의식을 몇 차례 반복했지만 매번 징조가 좋지 않았고, 미신을 믿지 않던 아내가 오늘은 집에 있어달라고 애원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결국 원로원에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전갈을 보넀다.

그러자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찾아와서 카이사르를 설득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예언자 스푸린나를 조롱하면서, 원로원이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지역의 왕권을 줄 것이라며 카이사르를 유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세의 조작된 이야기로 추정된다. 다른 사료에 따르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데키무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많은 군중이 그를 따라갔는데,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극장에 들어설 때 아르테미도로스라는 사람이 그의 손에 작은 두루마리를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임박한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토가 안에 집어넣기만 할 뿐 읽지 않았다. 예언자 스푸린나를 길에서 마주친 카이사르는 "오늘이 3월 15일인데 아무 일도 없지 않나?"하고 물었고 스푸린나는 "아직 3월 15일이 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카이사르는 그대로 갈 길을 갔다. 한편 카이사르가 집을 떠난 뒤 노예 하나가 도착하여 독재관에게 전할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알렸다. 카이사르의 가족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노예를 집에 머물게 했다.

한편,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제외한 음모자들은 카시우스의 아들이 성인이 되어 보통 토가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아침 일찍 모였다가 신전으로 가서 카이사르가 도착하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 극장 주변에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검투사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며칠 후 그곳에서 검투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사람들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얼마 후 카이사르가 막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렸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다. 음모자들은 음모가 노출된 게 아닌가 싶어 긴장했지만, 실은 특별할 것 없는 탄원을 한 것일 뿐이었다.

카이사르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또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뒤를 따라가던 안토니우스를 잡아끌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의장 안에 있던 의원들은 카이사르의 등장에 모두 일어섰고, 독재관은 황금 의자에 앉았다. 회의가 정식으로 열리기 전에 음모자들이 카이사르 주위로 모여들었다.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버르가 열렬한 폼페이우스파였던 형제 푸블리우스의 추방형을 해제시켜달라고 탄원했다. 다른 사람들도 카이사르의 주위를 둘러싼 채 탄원에 합세했고,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 롱구스는 카이사르의 의자 뒤에 슬며시 섰다. 카이사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의 탄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드라마 ROME에서 묘사한 카이사르 암살

그때, 킴버르가 카이사르의 토가를 잡고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것이 암살을 결행하라는 신호였다. 카이사르는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이것은 독재관에 대한 폭력이다!"


그 직후, 카스카가 단검을 꺼내 카이사르를 찔렀지만 카이사르의 목 또는 어깨를 스치는 데 그쳤다. 카이사르는 뒤돌아서서 카스카의 팔을 비틀어 단검을 떨어뜨리며 외쳤다.

"카스카, 대체 무슨 짓인가?"


카스카가 동지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형제들이여, 도와주시오!"


이에 음모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베었고, 부실리아누스는 등을 찔렀으며, 데키무스는 허벅지를 베었다. 카스카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카이사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카이사르는 반격을 시도했다가 걸려 넘어져 현관의 낮은 계단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을 때 암살자들의 연이은 공격을 받았다. 그는 23차례의 검상을 받았는데, 그의 갈비뼈에 발생한 두 번째 상처 만이 치명적이었다. 사후 보고서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검에 찔린 상처로 인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브루투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같은 편의 칼에 찔러 부상을 입었다.

원로원 회의장에는 카이사르의 동지들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카이사르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오직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가 잠시 저항했다가 중과부적으로 도망쳤고, 나머지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카이사르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그의 사타구니를 찌르자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2],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보는 순간 "아이야, 너마저도?"라고 말했다고 하는 몇몇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당대의 황색언론 정도로 평가받아, 현대에는 크게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진다. 다른 사료들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사망했다고 기술했다.[3][4]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머리 위에 토가를 두른 채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동상 받침대 옆에 쓰러졌다.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에게 포위당한 채로 몸을 20군데가 넘게 찔렸는데, 20군데가 넘는 상처 중 실제로 치명상을 입힌 건 네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암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암살자들은 동료들을 찌르기도 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실제로 다가올 로마 혼돈의 전조이기도 하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하면 저절로 카이사르파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해 암살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 암살 이후[편집]


수백 명의 원로원 의원들은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암살자들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채 서 있었고, 그들의 옷에는 피가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일부는 서로 찔러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브루투스는 키케로를 돌아보며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키케로를 포함한 모든 의원이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회의장 앞에서 카이사르가 죽는 걸 보고 자기까지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집정관 복장 대신 노예 옷으로 갈아입고 집으로 도망친 후 집 주위에 견고한 방어벽을 쳤다.

원로원 회의장이 텅 비어버리자, 암살자들은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검투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그들은 해방 노예가 전통적으로 쓰던 모자를 매단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국가에 자유를 찾아주었다는 의미였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일부 의원들은 폼페이우스 극장에 돌아와서 카이사르의 피를 토가에 묻힌 뒤 암살자들에 가세했으며, 그 중 몇몇은 카이사르의 시신을 조롱했다고 한다. 그들은 시내를 행진하며 "로마인이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유로워졌습니다!"라고 선언했지만, 다들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기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자,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카이사르의 노예 3명이 회의장으로 몰래 들어와서 카이사르의 시신을 가마에 싣고 집으로 운반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집결한 이들은 스스로 '해방자'를 자처하면서, 앞으로 어찌할 지 논의했다. 그러던 중 키케로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나타나 암살자들을 치하하며 하루속히 안토니우스도 죽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우린 폭군만 죽일 것이오."라고 답하며 단호히 거부했다. 얼마 후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 뒤 집정관에 선임될 예정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찾아와 그들의 행위를 칭송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포로 로마노로 내려와서 인민에게 상황 보고를 하라고 권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돌라벨라는 카이사르를 죽인 암살자들의 입장에 동의를 표하며 폭군을 죽인 것에 찬사를 보내는 연설을 공개적으로 했다고 한다.

브루투스는 이에 고무되어 3월 16일 포로 로마노로 내려가 군중 앞에서 진상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군중은 그의 행동에 지지도, 반박도 하지 않고 무관심한 반응만 보였다. 이에 브루투스는 다시 카피톨리누스 신전으로 가서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한편, 기병장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가 주둔해 있던 테베레 강 중앙에 있는 섬으로 가서 군대를 마르스 광장으로 이동시키고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카이사르의 원수를 갚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한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돌라벨라에게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찾아가 어렵게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평화 협상을 제의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이사르 암살은 카이사르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위이니, 상호 간에 사적인 증오심을 공익을 위해 묻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자기 집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레피두스는 당장 암살자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43년 집정관으로 지명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는 협상을 통해 안정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레피두스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며, 그의 동료였던 자들에게도 안전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다른 자들은 평화로운 타협을 하고 암살자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안토니우스는 고심 끝에 히르티우스의 제안을 지지하고 암살자들을 살려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3월 17일 새벽, 안토니우스는 텔루스 신전에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키케로를 비롯한 공화정파 세력과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정국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논의했다. 키케로는 독재관 카이사르를 제거한 것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적대행위를 금하자고 제안했다. 해방자들은 카이사르의 공문서들의 효력을 공적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에 동의를 표했고, 합의안이 곧 마련되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행위에 대한 해방자들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카이사르가 권좌에 있을 때 취한 조치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3월 18일에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승인되고,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3월 18일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다. 안토니우스는 최근 독재관에게 부여되었던 명예와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의 목숨을 지키기로 맹세했다는 내용이 담은 공보를 사람들 앞에서 읽게 한 뒤 고인의 업적을 치하하는 짧은 연설을 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도 읽었다. 유언장에는 카이사르가 테베레 강 인근의 광대한 정원을 로마 시민들에게 기증했으며, 시민 개개인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기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그의 자줏빛 로브가 사람들 앞에 공개되었다. 한 사료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밀랍인형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동안 상황을 관망하던 군중들이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군중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처참하게 죽여버린 자들을 복수하길 갈망했다. 광장에서 카이사르를 화장하고 고인의 유품을 모조리 태운 뒤, 군중은 횃불을 들고 암살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의 집을 습격해 모조리 불태웠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였던 가이우스 헬비우스 킨나는 그를 카이사르의 비판자로 알려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로 오인한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장례식과 이어진 며칠 동안 밤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카이사르를 애도했는데, 특히 유대인들이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5]

이리하여 희대의 풍운아였던 카이사르는 죽었다. 해방자들은 이것으로 로마 공화국이 복원되었다고 확신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민중은 그들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폭군을 죽인 게 아니라 과거에 귀족들이 평민 대표들을 무참하게 죽이던 일을 반복한 거라 여기고 분노했다.[6] 민심을 얻지 못한 그들은 수년 안에 몰락했고, 카이사르가 유언장에서 입양 의사를 밝히며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한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해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로마 제국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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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눈밖에 났을 때 카이사르를 암살하려는 마음을 먹고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이미 암살을 공모하고 있었으며, 이 퍼포먼스도 카이사르는 전혀 몰랐는데 안토니우스가 마치 카이사르가 시킨 것처럼 꾸며서 카이사르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기 위한 짓이었다고 묘사했다.[2] 수에토니우스도 일단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못한채 죽었다고 서술했는데 바로 뒷문장에 몇몇 작가들의 기록이라며 이설을 실어놓았다.[3] ROME,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아무 말도 안했다는 설을 따랐다.[4] 실제로 심장이나 폐 같은 급소에 치명상을 입으면 매체에서 나오는 것과 달리 바람 새는 소리나 가래 끓는 소리에 가까운 신음 정도밖에 낼 수 없기 때문에, 흔히 영화 같은데서 묘사되는 것처럼 죽기 직전에 브루투스를 마주보고 유언을 남기는 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5] 카이사르는 생전에 유대인들에게 무려 종교의 자유와 자유무역이라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들을 약속했다.[6] 이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이미 그라쿠스 형제 때부터 원로원 및 기득권층은 '공화정의 수호'를 빌미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들을 불법적으로 죽이는 만행을 수차례 저질렀다는 것으로 인해 카이사르 암살은 술라의 숙청같은 테러와 겹쳐보일 공산이 컸다. 거기다가 민중파만 죽이고 끝나는게 아니라 그들의 지지자까지 모두 죽이는 짓까지 저질렀고 이 짓을 할 때마다 수천명씩 죽어나갔다. 그리고 문제는 카이사르가 민중파였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민중파 입장에서는 해방자들이 뭐라 떠들든 그라쿠스 형제 때부터 이어진 민중파 테러로 보일 여지가 충분했다. 그들을 믿어주기에는 원로원을 위시한 기득권층이 공화국을 위협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편에 선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을 죽이는 테러를 너무 봐왔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양치기 소년과 비슷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