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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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45년 3월 19일 또는 20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히스파니아 속주 코르도바를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편집]


기원전 45년 3월 17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문다 전투에서 옵티마테스파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카이사르의 내전 발발 이래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전 아프리카 속주 총독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의 수급을 확인하여 매장하게 한 뒤,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적 잔당이 도망친 문다 시 공략을 맡기고, 자신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머무는 코르도바로 향했다.

당시 2만 장병을 거느리고 코르도바에 주둔하고 있던 섹스투스는 문다 전투 소식을 전해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뒤이어 카이사르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추가 소식이 들어오자, 부관 안니오 스카풀라에게 코르도바를 맡기고 자신은 100명의 기병과 함께 루시타니아 속주로 도주했다. 3월 19일 또는 20일에 코르도바 근처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베티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적군에게 격퇴되었다. 이에 새 다리를 건설하기로 했고, 다리를 새로 만든 직후 전군을 동원하여 강을 건넜다. 이후 코르도바 시 근처에 도착하여 숙영지를 세웠다.

카이사르는 포위망을 구축하여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여 방벽을 건설해, 지원군이나 보급품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때 돌이 부족하자 문다 전투 때 전사한 적병의 시체를 말뚝에 박은 채 쌓아서 대체하게 했다. 이 광경을 목도한 스카풀라는 카이사르가 자비를 베출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푼 뒤, 뒤에 있던 노예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게 했다. 이후 도시 내부에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자는 파벌과 끝까지 싸우자는 파벌이 마찰을 빛은 끝에 시가전을 벌였다.

얼마 후 카이사르 파벌이 성문 하나를 장악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카이사르에게 보내자,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성문을 통해 도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수비대는 최후의 발악으로 여러 건물에 불을 질렀다. 카이사르군은 불을 끄는 동시에 수비대를 죽였는데, 그 과정에서 광란에 사로잡히면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시체가 너무 많아 기병대가 지나갈 수 없었고, 베티스 강물이 도시에서 흘려나오는 피로 인해 붉게 변했다고 한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이날 2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성내에서 학살당했고, 성벽 밖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폐허가 된 코르도바 시에 머물렀다가 남하하여 히스팔리스, 아스타 레기아를 공략했다. 얼마 후 하데스를 공략했지만, 곧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카이사르가 남겨둔 장병과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재차 공격해 함락시킨 뒤 집단 학살을 자행하여 보복했다. 그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하데스에서 함선을 타고 로마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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