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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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빌리아
라틴어: Servilia
생몰년도
기원전 100년경 ~ 기원전 42년 이후
출생지
로마 공화국
사망지
미상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버지)
리비아(어머니)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남자 형제)
세르빌리아(여자 형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첫번째 남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두번째 남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유니아 프리마(딸)
유니아 세쿤다(딸)
유니아 테르티아(딸)

1. 개요
2. 생애
3. 매체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연인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저명한 귀족 집안인 세르빌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며 기원전 91년 법무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에서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를 토벌하려다 전사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이다. 어머니 리비아는 기원전 112년 집정관을 역임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딸이자 기원전 91년 호민관을 역임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누이였다. 리비아는 나중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결혼해서 소 카토와 포르키아를 낳았다.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100년 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 형제로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를 두었고, 여자 형제로 세르빌리아를 두었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제3차 노예 전쟁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군에 맞섰다. 동명이인인 여자 형제 세르빌리아는 기원전 66년경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다 로마로 돌아온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결혼했으나, 남편의 정적인 가이우스 멤미우스와 불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이혼했다.

그녀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남편은 기원전 83년 호민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낳았다. 기원전 8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사망한 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1]가 술라 체제에 반기를 들었을 때, 남편 브루투스는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봉기는 곧 진압되었고, 브루투스는 무티나에서 반란을 진압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항복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로마로 안전하게 귀환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곧 약속을 어기고 반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브루투스를 처형했다.

그녀는 첫 남편과 사별한 뒤 기원전 62년 집정관을 역임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결혼해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유니아 프리마, 유니아 세쿤다, 유니아 테르티아를 낳았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이부 형제 브루투스와는 달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일했고,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유니아 프리마는 기원전 48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와 결혼했고, 유니아 세쿤다는 훗날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 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으며, 유니아 테르티아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카틸리나 음모가 발발한 기원전 63년 이전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사랑을 나눴던 것으로 추정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전한다. 카틸리나 반란 모의 사건 당시, 소 카토는 카이사르가 이 반란의 배후 중 하나라 주장하며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이때 시종이 들어와서 카이사르에게 밀서를 건넸다. 이 모습을 본 카토는 그 편지가 바로 내통의 증거라며 당장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개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라며 거부했지만, 카토가 당장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면 죄목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편지를 건넸다. 그 편지를 읽어본 카토는 얼굴이 잔뜩 새빨개진 채 카이사르를 향해 편지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가져가, 이 바람둥이야!"[2]

그 편지는 다름아닌 자신의 이부 남매인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에게 사랑을 속삭인 연애 편지였다. 당시 무척 심각한 분위기였던 원로원 회의장은 그 순간만큼은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여러 유부녀 및 미망인과 사랑을 나눴지만, 대개 관계를 일찍 청산하곤 했다. 그러나 세르빌리아만은 유독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관계를 맺은 고귀한 부인들을 나열하면서, 카이사르가 다른 누구보다도 세르빌리아를 사랑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59년 집정관을 맡은 카이사르가 그녀에게 6백만 세스테르티우스의 가치가 있는 진주를 선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세르빌리아가 자신의 딸 테르티아를 카이사르의 정부로 보냈다는 소문도 돌았다. 몇몇 고대 사료에서는 두 사람의 깊은 관계에 주목해, 카이사르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친부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유독 아낀 건 분명하다.

하지만 브루투스는 외삼촌인 소 카토에 깊은 영향을 받아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내전 때 아버지를 살해했던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서 카이사르에 대적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가했다가 사로잡힌 뒤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고 로마에 돌아갔다. 이후 카토가 탑수스 전투 패전 후 우티카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첫번째 부인 클라우디아 풀케르와 이혼하고, 카토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포르키아와 재혼했다. 그녀는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는 카이사르와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아들로부터 암살 계획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암살에 관여한 아들과 친척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기원전 44년 여름 자신의 집에 키케로와 암살자들을 초청해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신경질적인 숙녀"의 태도를 보였다고 묘사했다. 그해 7월 초 브루투스가 로마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이룩한 먼 조상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기념하는 경기를 개최했을 때, 그녀는 이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원로원 인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된 뒤 공모자 및 그들과 관련있는 자들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지만, 그녀는 키케로의 친구 아티쿠스의 보호로 신변에 위협을 받지 않았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패한 브루투스가 자살한 뒤, 안토니우스는 그의 유해를 화장한 뒤 유골함에 담아서 그녀에게 보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매체[편집]


파일:Rome.Servillia.jpg

ROME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진 캐릭터로 묘사되지만, 행적은 전혀 다르게 묘사되었다. 실존 인물인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가 죽는 순간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한 반면, 해당 작품에서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에게 버림받은 후 복수귀가 되어 카이사르를 파멸시키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들인 브루투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실제 역사와는 정반대다. 실제 역사에서는 세르빌리아가 브루투스의 카이사르 암살을 말린 반면 작중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를 죽이기 위해 아들을 충동질하여 결국 아들이 카이사르를 죽이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행적은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지원하고 돕는 것으로 비슷해진다. 물론 그 동기는 자신과 의견이 다르긴 했어도 어쨌든 아들이니까 지켜주려 한 정도인 실제 역사와 달리 원래부터 아들을 지원했던 것으로 판이하게 다르긴 하다. 하지만 끝내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패하고 사망하자 작중 앙숙지간으로 설정된 아티아의 집 앞에서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고 단검으로 자결해 생을 마감한다. 이 충격적인 장면을 아티아 옆에서 멍하니 함께 지켜보던 안토니우스의 반응이 걸작인데, '퇴장 한번 화끈하게 하네(Now that's an exit)'라며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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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2] 판본에 따라서는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이 주정뱅이 같으니!"라고 소리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