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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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Treaty of Versailles / Traité de Versailles / Friedensvertrag von Versailles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국이 제1차 세계 대전 후인 1919년 6월 28일에 조인하고 1920년 1월 10일에 발효되어, 독일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시행하게 만든 강화조약이다.
파리 강화 회의 도중에 완료되었으며[2] 협정은 1919년 6월 28일 11시 11분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했고, 1920년 1월 10일 공포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연맹의 탄생과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제재 규정을 포함한다. 이로 인해 변화된 세계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제재에 관한 내용은 승전국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이 패전국인 독일 제국에서 이어진 바이마르 공화국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무자비하게 뜯어내려 한 조항들로 들어차 있었다. 그 조항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엄청난 양의 전쟁 보상금 요구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장해제[3] 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1차 대전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은 영국과 프랑스 등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유약한 조약은 독일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버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나, 실상은 독일인들의 엄청난 분노와 증오를 촉발시키고 또 다른 끔찍한 전쟁의 원인만을 초래하였을 뿐이었다. 이 조약에 이를 갈던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독일을 수립한 뒤 1935년 베르사유 조약 파기 선언 및 대대적인 독일의 군 재무장을 추진하였고 조약으로 인해 강제로 비무장지대화되었던 라인란트에는 훗날 독일 국방군이 입성하게 된다.
2. 발단[편집]
1918년 9월 독일 제국 군부가 사실상 패전을 내각에 알리고 11월 11일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협상국은 독일의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간주하고 독일 제국군을 뒤쫓아 독일 국경을 돌파해 라인 강 지역까지 추격하고 영국 해군은 휴전 후 협상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독일 항구에 기뢰를 부설했다. 1919년 초부터 본격적인 협상인 줄 알았는데 거짓이고 사실상 항복 후 요구조건을 명령하고 관철시킨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반발했지만 이미 반항할 여건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수용한다.[4] 승리한 협상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씨가 마를 때까지' 쥐어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원래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은 전장이 되었던 벨기에와 프랑스의 주민들에 대한 피해 배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협상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에 대해서도 배상할 것.'이라고 나서면서 300억 마르크가 2,000억 마르크 대로 치솟게 되었다. 한편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이상인 국제연맹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엿보았고, 결국 조약의 첫 조항은 국제연맹에 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의 바람과는 달리 국제연맹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국제기구로 전락하고 만다.
3. 내용과 회피방법[편집]
-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독일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황제와 군부 핵심 인사를 포함한 전범 800여 명을 인도할 것.[7][8]
-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할양할 것, 모든 식민지를 포기할 것.[9]
- 벨기에에 오이펜-말메디, 폴란드에 포젠, 서프로이센을 할양할 것,[10] 덴마크 접경 슐레스비히 북부,[11] 폴란드 접경 상슐레지엔 및 동프로이센 남부는 주민 투표로 귀속을 정할 것. 프-독 접경지대 자르 분지 지역의 탄광권을 15년 동안 프랑스에 넘기고 국제 연맹의 보호령으로 만들고 15년 후 국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할 것, 독일계 주민이 많은 단치히는 국제연맹 자유도시로 정할 것(단치히 자유시),[12] 동프로이센 동북부 메멜은 추후에 주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할 때까지 국제연맹 관리 하로 둘 것.[13]
- 라인 강 이서(以西) 지역 전부와 라인 강 동쪽 50km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여 모든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신규 군사시설의 건설을 금지, 이 지역에 병력 배치 역시 금지[14] 헬골란트 또한 군사시설을 철거한 후 비무장화한다.
-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을 기준으로' 배상.[15][16]
- 육군의 규모를 7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 총 100,000명으로 제한한다. 징병 역시 금지한다.[17]
- 사관학교와 참모본부를 폐지하고 장교용 군사학교는 3개로 제한한다.[18]
- 기존에 독일군이 가지고 있던 대포 5,000문을 양도하며 전차, 중기관총과 기관단총 등 최신 무기의 보유와 제작을 일체 금지한다. 각종 무기의 수출과 수입 역시 금지한다.[19][20]
- 해군의 병력은 15,000명, 군함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6척, 배수량 6천톤 이하의 경순양함 6척, 배수량 8백톤 이하의 구축함 12척, 배수량 2백톤 이하의 어뢰정 12척으로 제한한다. 덤으로 잠수함도 금지.
- 해군 항공대를 비롯한 공군의 보유를 일체 금지한다. 기존에 갖고 있던 전투기 25,000기를 비롯해 항공기와 관련된 모든 자재를 양도하고 조약 체결 후 6개월 동안 항공기 및 항공기와 관련된 모든 자재의 생산 및 수입을 금지한다.[21][22]
-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들과 다시는 연합하지 말 것.[23]
- 패전국에서 독립한 국가에서 패전국으로 수출하는 물건에 대해서, 패전국은 그 물건의 수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무관세로 수입해야 한다. 반대로 패전국이 독립한 국가로 물건을 수출할 때는 독립국은 패전국산 물건에 대해서 수입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 이 조항에 반발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1925년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킨다.
사실 이 조약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또한 그 당시에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토론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 GCSE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대단원 하나를 "Was Treaty of Versailles Fair?"(베르사유 조약은 공평했는가?)라는 문장으로 대표하고 있다.
다른 패전국 사이에서도
이 줄지어 체결되었다. 모두 비슷하게 영토 할양과 제국 해체, 군비 제한 등의 내용이다.
1,320억 마르크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으로,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 20억 달러(= 약 100억 마르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기 불능을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전쟁으로 인한 부채 상환과도 관련이 있다.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 부채, 특히 미국으로부터 진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쥐어짜려 한 것이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을 영원히 구제금융 국가, 부채국가로 만들겠다는 속셈인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약을 강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탄 군부가 아니라 냉철해야 할 정치인들이었다. 케인스는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에 못 받고 영국과 프랑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받아봤자 미국에 도로 전쟁 때 얻은 빚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증오와 정치적 혼란만을 일으킬 바에 아예 배상금을 탕감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혼자 귀국해버리고 그 길로 재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베르사유 조약과 협상국 정치인들을 비판했다.[24]
군대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통제해야 하므로 세세한 항목까지 설정했다. 그러나 위와같은 꼼수로 매우 철저하고 정교하게 피해갔고, 효과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협상국의 제한은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은 현역 병력은 많으나 예비 병력의 경우 그 숫자도 적고 기초 훈련도 안돼서 노역자 이외에는 써먹을 수 없는데, 이는 군대의 장기간 소규모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수 공업도 상당기간 묶여 있어서 화포나 전차의 수준도 연합국에 비해 낮았다. 해군의 경우에도 공산 정권이 들어선 소련과 과도한 배상 및 군비 제한을 요구하는 프랑스에 질린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2선으로 물러난 나사우급 전함과 헬골란트급 전함 8척 보유 정도로 끝낼 것을 생각했다. 허나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화가 난 영국이[25]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보유를 금지하고 해군 규모 역시 대폭 축소하면서 독일 해군은 대형함의 건조가 10년간 끊어졌고 이후 해군을 재건할 때 설계한 군함마다 대부분 1차대전 시의 물건에 약간의 개수를 한 형태일 정도로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다. 결국 독일 해군은 건조가 빠르고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 위주로 해군을 재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치가 집권해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근간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분노한 독일 국민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침공 같은 삽질이 없었더라도 다시 한 번 1차대전급 대전쟁을 만들었을,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피를 불러온 엉터리 조약이었다.
4. 반응 및 평가[편집]
그 조약은 확실히 공개적이었다. 여러 서명국에서 비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조약 내용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 자체는 결코 ‘공개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역사상 그 어떤 협상도 그처럼 철저한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과정이 아니었다.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밀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동안 완전무장한 미군은 각국의 전문가, 외교관, 심지어 대통령 외의 미국 대표단까지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 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해럴드 조지 니컬슨 남작(Sir Harold George Nicolson, 1886~1968)[26]
화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징벌적이었고,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관대했다(Too punitive for conciliation, too lenient to keep Germany from recovering).
1882년 한미조약을 체결할 때에 누가 휴지로 쓸 생각이나 하였겠냐마는 왜놈이 휴지로 썼고, 1856년 파리조약 할 때에 누가 휴지로 쓸 꿈이나 꾸었으리오마는 러시아가 휴지로 썼은즉, 소위 평화조약은 일변 휴지로 쓰며 일변 만드는 것이요, 억만세 무궁토록 두어두고 쓰는 것은 아니로다.
1919년 7월 8일, 한인신문 신한민보에 익명으로 투고된 사설 "세계평화에 대하야, 조약을 휴지로 쓰려…"[28]
만평 # : 우는 아이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보고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석과, 제목인 "peace and future cannon fodder"(평화와 미래의 총알받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장래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 어정쩡한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벽에 기댄 채 우는 아이 위에 '1940 CLASS'라 쓰여 있는데,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고 베르사유 조약 당시 어린 아이였거나 청소년기를 보냈던 이 당시의 독일인 대다수가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후에 나치 독일군이 되어 침략전쟁과 학살의 주역을 맡았다.
참고로 저기 서 있는 세 명은 각각 영국 대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총리,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그리고 프랑스 대표 조르주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 총리이다. 이 3명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 시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3인으로, 영미권 역사 교과서 등 문서에는 "The Big Three"라는 칭호로 불린다. 이 "The Big Three"라는 칭호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비슷하게 재연되는데, 2차대전의 전황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었을 때 각각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서 만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또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 때 두 명과 만났으나 포츠담 회담 전에 사망하였고, 그 자리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가져갔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중간에 정권이 바뀌어 얄타 회담 때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자리는 클레멘트 애틀리가 매꿨다.
당시 맨 앞에 서 있는 조르주 클레망소는 본국에서도 "The Tiger", 즉 호랑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릴 정도로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강했던 정치인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는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프로이센 왕국 이전으로, 즉 독일이라는 나라를 17세기처럼 여러 조그만한 게르만계 소국들로 해체해서 연합하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하려 했으나, 여러 측근들의 반대와 설득 끝에 그 생각을 철회했다. 하지만 클레망소 자신도 꽤나 강경한 요구를 들고 나왔는데, 그 중 결국 비무장지대가 된 라인 주위 80-100km 영역에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프랑스와 독일의 직접적인 국경을 없애려는 요구, 단치히를 폴란드에 귀속시키려는 요구 등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없었고 독일을 전략적으로 써먹고 싶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에 의해 제지되었다. 프랑스는 국민적 감정에 좌우되어 자국 정치인들에게 강경한 요구를 한 것인데, 애초에 복수심으로 협상을 하면 안 된다. 정치가는 정치를 감정으로 하면 안된다는 기본적인 상식은 물론 이를 강제하려면 민족감정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적대지역에 군대를 장기간 파견하며 통치해야 하는데 승전국이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치는 아니었다. 훗날 배상금을 둘러싼 루르 점령에서도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 뒤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서 있는데, 당시 영국 여론 역시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할 정도로 아무리 험악했다고 해도 지리적으로 도서국가인데다 국토와 국민들이 입은 피해가 대륙국가인 프랑스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적은 이상 로이드 조지는 클레망소처럼 아주 강경한 조약은 내세우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 수뇌부는 독일을 어느 정도 복구시켜 영국 경제 회복에 이바지해 주기를 바랬다는 설도 있다. 일단 전쟁 전에 독일은 영국의 2번째로 중요한 무역국이었고, 그런 국가가 망하면 안 그래도 전쟁으로 여러 문제가 발생한 영국 경제에 도움을 주긴커녕 전쟁 전보다도 못할 정도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29] 또한, 로이드 조지는 한창 불안해지고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와 근접한 독일을 경제적으로 살려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방패로 쓴다는 계획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모두가 알다시피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앙숙이었다.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엄청난 보상을 받을 터인데 영국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강력해지는 것도 딱히 바랄 일 없다는 것은 로이드 조지가 프랑스의 것보다 덜 강경한 조약을 들고 나온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눈에 띌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인데, 윌슨주의로 유명한 미국식 이상주의자로, 절대군주제의 노선이 전쟁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여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중서부 유럽의 제국을 해체하고 수십개의 단일 민족 공화국으로 유럽을 분할하면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공조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동맹국에 항복 조건으로 전제군주제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정치체제 변혁을 제외한 부분에서 독일을 심하게 대하면 나중에 다른 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고 14개조 평화원칙을 공표한다. 하지만 그 중 항해의 자유와 민족자결주의, 국가간 비밀 조약 폐기 등의 이상주의적인 조항은 당시 해양 강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30] 우드로 윌슨은 그나마 배상금 문제를[31] 제외하면 독일을 온건하게 대하자고 주장하던 사람이었고, 국제연맹도 사실상 그의 14개조 평화원칙 중 통과된 얼마 안 되는 조항 중의 하나다. 하지만 결국 미국 상원이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저지하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결국 미국은 국제연맹 아이디어를 내고도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국제연맹은 1929년까지는 그럭저럭 분쟁들을 꽤나 잘 해결했는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여러 국가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주의 노선을 타면서 사실상 1930년대에는 본디 목적을 상실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미국이 국제연맹 결성에 참가했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미국의 부재가 국제연맹이 반쪽 짜리로 남아있던 큰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백일 공세의 여파로 독일이 확실히 수세에 몰리자(종전 몇 개월 전), 윌슨은 독일에게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른 평화 협정을 제시했으나 독일은 거절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강경한 태도를 나타내자, 독일은 뒤늦게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른 평화 협정을 기대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꽤나 강경했고,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가 조약의 대부분을 작성했다. 아무래도 미국은 피해도 적게 입은 데다 본토에 공격은 전혀 받지 않았다.
상위 세 명에 대한 정보 출처는 영국 옥스퍼드 Oxford University Press 에서 편찬한 GCSE 역사 "20th Century History for Cambridge IGCSE"[32] 와 헨리 키신저가 집필한 <세계질서>에 있다.
사실 전후 회담에 참석한 국가 정상은 저 위의 세 명 외에 한 명이 더 있는데 바로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이다. 위의 그림에서는 백발에 콧수염을 기르고 맨 뒤에 서있다. 원래는 The Big Three가 아니라 The Big Four라고 하는 쪽이 옳으며 1차대전에 대해서는 그렇게 서술한 쪽이 더 많다. 이쪽은 독일 처벌에는 별 관심이 없고 1915년에 삼국 동맹에서 편을 바꾸면서 영국과 맺은 런던 밀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유한 미수복 이탈리아 지역(쥐트티롤, 달마티아 등)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1차대전에 기여한 바가 적기도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유고슬라비아에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하고 무엇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조약의 당사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의 이상주의적 원칙에 입각해 비밀 조약과 같은 것을 극도로 혐오했기에 이탈리아의 주장은 완전히 묵살되며 이스트리아 반도와 쥐트티롤은 챙겼지만 결국 달마티아는 유고슬라비아가 들고 갔다.[33] 이에 오를란도 총리는 회의장을 뛰쳐나가는 것으로 분노를 표현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고 귀국 후 고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실각했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받아야 할 영토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는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는 원동력이 되었다.
4.1. 너무 가혹하다[편집]
당시 영국 대표단의 일원이자 재무성의 일원이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협상국 지도자들의) 역겨운 언행을 참을 수 없다'면서 사표를 던졌다. 그 직후 펴낸 소책자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케인스는 전쟁배상금 개념 자체를 비난했다. 나중에는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로 일어났다.독일에게 불필요한 굴욕을 주어 그들이 복수할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현물배상액 가치 평가에 이견을 보이자 채무 불이행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라인 강을 넘어 바이마르 공화국 경제 심장부 루르 지역을 침략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생산수단 볼모정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조치를 시행하는데, 철도와 광산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액수의 상환액이 채워질 때까지 무상으로 양도할 것을 강요했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맞섰고 바이마르 정부에서도 못 본 체 했다. 이 과정에서 철도를 파괴하고 프랑스-벨기에군에 사보타주한 죄목으로 독일 민간인을 군사 재판으로 처형하자 미국, 영국은 물론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채무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타국을 침략하고, 점령지에서 평시에 민간인을 군사 재판으로 총살하는 것은 승전국이 좋아하는 국제법이나 정의는 밥말아먹은 행위였다.[35] 결국 프랑스-벨기에군은 국제 여론의 질타를 견디지 못하고 본전도 못 찾은 채 철수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의 발호에 영향을 주게 된다. 승전국이 단지 승전국이라는 이유만으로 패전국에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대하는 데서 이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4.2. 충분치 않다[편집]
프랑스의 경우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조약 내용이 너무 관대하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이런 평화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단지 20년간의 휴전 협정일 뿐이다." 라고 분노를 터트렸다. 포슈가 미래를 내다본 훌륭한 전략적 안목의 실례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64일 후에 발발했다.베르사유 조약의 경제 조항은 독소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내용이어서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발췌본》(윈스턴 처칠 지음) 한국어 번역판 p17
위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는 정 반대의 시각을 가졌으나 둘 다 내린 결론은 똑같았다.
포슈는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돌려받았으나 실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빈약한 상태와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을 통찰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라인란트를 프랑스가 점유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와 바이마르 공화국이 1:1로 싸울 수 없다는 점과 라인란트 대신 협상국에서 내세운 영국과 미국과의 동맹이 허상에 불구하다는 점과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군에 대한 제약이 허접한 수준임도 통찰했다. 즉, 20년 전부터 나치 독일의 재무장과 프랑스 침공의 결과를 어느 정도 들여다봤다는 소리. 한동안 국내에서는 포슈의 '20년 휴전' 발언을 "협상국 내부에서조차 베르사유 조약이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너무 가혹했다는 비판이 많았다"는 사례로 인용되었는데, 실제 포슈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해석한 셈. 덤으로 호랑이가 별명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그 본인이 베르사유 강화 회의의 의장으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내용이 '관대하게 망가지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실각하는 등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수행력을 결단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결단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36] 과 오스만 제국[37] 처럼 나라를 몇 개로 쪼개버리는 게 가장 좋기는 한데[38]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이른바 '라인 강 이서(以西) 공화국' 등의 건국을 추진하였으나, 정부 수반에 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등으로 실패하였으며, 결국 당시 협상국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을 쪼개는 데 구 독일 제국령에 속해있던 탄자니아, 카메룬, 나미비아 등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식민 지배권 박탈과 알자스-로렌 지역의 프랑스 할양, 북부 슐레스비히의 덴마크 반환, 폴란드의 분리독립, 라인란트의 비무장지대화 등으로 식민지나 독일과 인접한 지역의 영토를 찢거나 일부 지역에 대한 제제를 내리는 선에서 그친 것도 여기에서 기인되었다.
그렇게 독일은 분단되지 않았고, 비록 패전 후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이라는 굴욕을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광대한 영토와 인구[39] 그리고 제국 때 양성한 과학, 기술, 인재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부흥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 착취와 강매로 이루어지는 경제 구조를 가져 국력 향상에 한계가 있는 협상국에 비해,[40]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내수와 기술 발전 위주의 경제 구조를 유지하면서 20년 뒤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국력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독일 입장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협상국의 조건은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증오를 가져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4.3. 총평[편집]
삼니움 전쟁 당시였다. 로마와 이탈리아에서의 패권을 다투던 삼니움은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가두어 수많은 로마군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때 로마군 포로의 처우를 놓고 삼니움 부족장이 고민을 하던 와중에 부족장의 아버지가 "포로를 모두 처형해서 로마의 힘을 약하게 만들든지, 깔끔하게 모두 풀어줘서 로마로부터 호의를 얻고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는) 약소 세력들에게 강력함과 관대함을 보여주던지." 확실히 정할 것을 조언했으나, 족장은 조언을 따르지 않고 모욕은 모욕대로 주고 포로는 풀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덕분에 로마는 전력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었고, 모욕을 당하고 풀려난 로마 군단병들은 한층 더 복수심에 타올라 죽자 사자 싸웠으며 삼니움은 멸망하게 되었다.
결국 앞서 언급된 키신저의 평가와 같이 독일을 끝장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독일을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어정쩡한 조약으로 남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야기한 것이다.
이런 엉성한 처리에는 주요 협상국 3국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최대 피해자[41] 로, 전 국민이 대독 강경론을 펼쳤고,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은 그 자신도 독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을 뿐더러 프랑스 전체의 압박으로 인해 독일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전쟁 당시 독일과 싸우며 받은 막대한 피해와 그를 바탕으로 얻은 협상의 주도권을 고려해볼 때, 케인스가 주장한 대독 유화론의 가장 큰 걸림돌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배상금 문제뿐만 아니라 영토 문제에 있어서도 극단적이었는데, 라인 공화국 건립이나 자르 지역 할양 문제를 주장한 것에서 그러했다. 조약 이후 클레망소 수상은 1920년까지 재임하다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너무 많이 양보해 라인 강 일대에 대한 프랑스의 오랜 숙원을 못 이뤘다는 이유로 낙선할 정도로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증오는 극심했다. 즉 프랑스가 저렇게 나가는게 이해는 가는 셈. 그러나 그만큼 성과를 거두어, 알자스-로렌 지역, 토고, 시리아, 레바논, 자르 탄광 지역 15년 소유권, 메소포타미아 지역 석유 50% 등을 얻으며 나름대로 수혜국으로 거듭났다.
반면 영국은 유화론과 강경론의 중간위치였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은 재무장관 출신으로 케인스와 똑같이 독일의 상황과 경제적 여건 등을 거의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으며 배상금 문제 역시 독일이 지금 영프가 주장하는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상금 문제에 있어서는 케인스의 주장처럼 유화책을 쓰지 못했는데, 로이드 조지 수상이 지난 총선에서 독일에게 배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얻어내겠다는 공약을 써서 역대 최다 표를 얻었다는 정치적인 문제와 프랑스 등의 압박 때문이었다. 군사적 문제에 있어도 강경했다. 프랑스와 함께 주도적으로 독일의 군축에 앞장섰으며 무난하게 합의를 이끌었다.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유화적이었다. 프랑스의 무리한 요구를 막고 라인강 점령 기한을 축소하며 독일 측 대표들과 합의를 하려 했다. 그러나 가장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오히려 독일을 끝장내려 했던 프랑스보다도 판단을 잘 내리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이번 조약의 수혜는 나미비아, 탄자니아, 뉴기니 섬 북동부 지역 등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과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 지역 등을 얻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와 프랑스, 영국보다는 독일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배상금 문제에 있어서는 똑같이 강경했다. 침략국들이 불순한 의도로 전쟁을 시도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또한 그들 스스로 주장한 이상-국제연맹 14개 원칙들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타협하여 독일 문제를 마무리지으면서 위선적이고 현실에 순응했다는 격렬한 비판에 시달렸다.[42] 다만 전반적인 기조는 매우 유화적인 편이었는데, 이는 영국과 같이 경제적인 이유라기보단 외교적인 이유였다.
이탈리아는 국가의 숙원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왔으나 오를란도 이탈리아 수상이 영어를 못해서 회의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미국에게 물먹으면서 회의에서 실패를 거두었다. 마지막에 승전국의 모든 합의를 엎으려 한 것을 제외하면 독일에 관해서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5. 사후 수습 - 배상금 경감[편집]
독일은 결코 협상국이 요구한 배상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라인란트 비무장화, 독일 대양함대 요구, 메멜과 폴란드 회랑의 동부영토 상실은 독일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베르사유 조약과 1차 세계 대전 휴전 협정에 서명한 독일 대표단은 11월의 배반자들이라는 멸칭이 붙으며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었다. 또한 전후 혼란을 틈타 독일의 공산주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단이 1월 봉기를 일으키며 사회를 더더욱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대한 배상금을 갚으려 했지만 경제는 날로 악화되어 1922년 말 디폴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분노한 벨기에와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해 독일의 최대 공업지대 루르 지방을 강제 점령하였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이런 행동은 독일인들을 더더욱 자극해 급격히 극좌우 세력들과 배후중상설이 자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독일 내부 공산당 세력과 극우 세력이 자라기 시작하자 독일 내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미국이 나서서 대규모 재건 계획을 시행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달랬고, 후에 캘빈 쿨리지 정권에 이르러서는 '도스 안(Dawes Plan)'이라는 것을 내놓아 독일의 배상금을 경감시켜주기도 하였다. 미국이 어느 정도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1921년 4월 27일 런던에서 배상금을 66억 파운드(= 320억 달러 = 1,320억 마르크)[43] 로 확정하고, 1924년 도스 안과 1929년 '영 안(Young Plan)'을 통해 조정되었다.[44]
그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8억 마르크의 차관을 빌려주고 순차적으로 첫해 10억 마르크에서 시작해 매해 20억 ~ 25억 마르크(= 4.73억 달러) 전후한 금액을 59년간 갚도록 책정했다(이렇게 하면 1,210억 마르크가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제적으로는 매해 10억 마르크대를 납부했고 이를 제안한 찰스 도스(Charles Dawes)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즈음 바이마르 공화국이 국제연맹에 복귀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일에 적대적이었던 프랑스의 반대[45] 로 매번 절충안들이 적시를 놓치거나 배상금 조정폭이 대폭 줄어들곤 했다. 결국 외화유출이 지속되고, 독일 중앙은행이 이에 화폐 찍어내기로 대응하면서 아직 초인플레이션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급격한 폭의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었다. 독일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영미의 절충안 제시 → 프랑스 반대 → 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국민 경제 불안정 → 독일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영미의 절충안 제시 → 프랑스 반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며 배후중상설과 반프랑스 감정이 확산되는 등 여러모로 사회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는데 결정타가 터졌다.
6. 조약의 파기[편집]
1920년대 중반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나마 미국이 제시한 도스 안덕에 루르도 돌려받고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시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된 독일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집권층의 오판에 따른 적절한 연정(+ 나치당의 힘을 총동원한 각지에서의 강경한 시위와 선거 유세)을 통해 기어이 집권에 성공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은 무효이니 독일은 배상금을 낼 필요가 없으며 재무장을 하겠다는 주장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결국 1935년 3월 16일 독일이 징병제 도입과 공군 확장을 골자로 한 재군비 선언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으로 파기하고 영국이 이를 공인함으로써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삽질로 기록되는 영국-독일 해군조약[46][47] 과 폴란드를 주적으로 가정한 육군 기동훈련에도 영국 대사와 무관들이 참관했으며 이는 동맹국인 프랑스를 경악시켰다. 이에 이어 아예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국방군을 비무장지대였던 라인란트에 진주하며 베르사유 조약을 완전히 끝장내버린다. 이때 영국은 아예 프랑스에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에 대해 무력 대응과 제재를 가하는것에 반대 의사를 전했으며 폴란드는 1934년 3월 2일부 발효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라인란트는 본래 독일 땅이었다며 1921년 프랑스를 돕기로 규정한 방위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가장 큰 관계자였던 프랑스는 동맹국들의 통수와 독일 국방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강경 대응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한편, 히틀러의 의견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동안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배상금을 깎아주는 유화책으로 진정시키려 했지만[48] 이 시점에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한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경제 파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산화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49] 공산화는 면하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독일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걱정한 공산화보다 더 끔찍한 나치즘으로 폭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이 때는 이런 유화책을 실시할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관대해야 할 때는 가혹하고, 강경해야 할 때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20년에 걸친 어리석은 외교로 마침내 결국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다.[50][51]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은 독일 국방군이 접수했고, 그 후 행방은 묘연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항복 문서를 작성했던 열차도 이때 나치 독일로 끌려가서 전쟁 말미에 박살이 나 버렸다. 박물관에 승전 기념으로 전시되어 있던 그 열차를 항복 조약을 서명한 그 장소로 끌고 가 똑같이 프랑스의 항복 조약을 받아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결국 어떻게 보면 2차 대전 발발을 위한 조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된 셈이 되었다. 만약 온건파 말대로 배상금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면 나치당 같은 급진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은 없었을 거고, 강경파 말대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작살내놓았다면 나치가 정권을 잡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테지만,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탓에 독일 민중의 반발심은 있는 대로 이끌어내면서도 전쟁 수행 능력까지 억제하지 못한 최악의 자충수가 되어 유럽은 다시금 6년간의 극심한 병화의 길에 빠져들게 되었다.
7. 잔재들[편집]
하지만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또 패배했다. 승리한 연합국은 향후 세계 질서를 감안해서 베르사유 조약처럼 아주 가혹한 규정은 두지 않았으나[52] 독일을 재기 불능에 빠뜨릴 종전 조약을 맺기로 하고, 이 조약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된 사항 중 일부를 약간 적용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된 관계로 금전 문제를 뺀 나머지 조항에 대해서는 서로 서독과 동독을 대규모 침공에 대한 방패막이 겸 우군으로 육성하기 위해 사실상 폐기했으며, 단지 배상금 항목만 상징적으로 남게 되었고, 또한 전후에 미국이 나서서 마셜 계획으로 유럽[53] 의 경제 재건에 막대한 원조를 해줬기 때문에 승전국들은 배상금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문제가 된 배상금의 경우, 2010년 10월 3일 독일 정부는 1차 대전의 전쟁 배상금을 유로화로 전부 갚았다고 발표했다. 참조기사 무려 92년 만이었다. 사실 배상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50년대에 배상금은 모두 채권으로 냈고, 일부 채권의 만료 시점을 통일 이후로 잡은 것이고 또 사실 이미 잊혀진지 오래인 문제라 굳이 갚지 않아도 되는 배상금이었다. 프랑스, 영국, 미국 그 어떤 나라도 독일은 자신들의 든든한 우방인 독일연방공화국이지 적국 독일 제국이 아니라고 이미 생각했기에 독촉하지도 않았다.
8. 기타[편집]
- 이 문서는 환율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는데, 당시 일반적으로 순금 1kg은 2790 골트마르크 = 136.588 파운드 스털링 = 664.7 미국 달러[54] 로 1달러는 4.197 마르크, 1파운드는 20.426 마르크이자 4.867 달러가 된다. 인용
- 암모니아 제법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프리츠 하버는 국가의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바다에서 금을 뽑는 아이디어를 실행했으나 1928년까지 뻘짓만 하다가 바닷물에 포함된 금의 양이 극히 적어 채산성이 전혀 안 나와서 돈만 날리고 포기했다.
- 하라 다카시 내각 아래 일본은 사이온지 긴모치, 마키노 노부아키 등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참가해 1919년 6월 28일에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산둥반도의 옛 독일 권익을 계승하고 적도 이북의 옛 독일령 남양제도의 통치권을 얻었다.[55]
9. 만평[편집]
10. 같이 보기[편집]
- 틸지트 조약 - 19세기판 베르사유 조약. 게다가 당사국도 독일과 프랑스로 동일하다. 조약으로 뜯기는 나라가 독일이고(그 당시 프로이센) 삥뜯는 나라가 프랑스.[56]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독일 제국과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종전 협정.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면서 사실상 폐기됐다. 그리고 이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이 양심적으로 보일 정도로 더 가혹한 조약이다. 하지만 1918년 동맹국이 항복하면서 전면 무효화되었다.
- 부쿠레슈티 조약 - 동맹국과 루마니아 왕국 간의 항복 협정. 북도브루자의 남부 지역을 불가리아에 할양하고 플로에슈티 유전을 2008년까지 독일에 빌려주며, 카르파티아 산맥을 지나는 주요 교통로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할양, 동맹국이 루마니아의 철도, 통신, 우편을 통제하며 동맹국이 루마니아에 주둔하고 그 주둔 비용을 루마니아가 떠맡으며 잉여 농산물을 동맹국이 요구하는 가격에 동맹국이 요구하는 양만큼 조공으로 바치고, 거부권,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인 고문을 루마니아 정부에 두도록 하는 등 가혹한 조항을 단 항복 협정이었다.[57] 그러나 국왕 페르디난드 1세는 조약 승인을 거부했고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거의 귀결된 1918년 10월, 루마니아는 조약을 파기하고 협상국으로 재참전한다.
- 21개조 요구 - 일본의 산둥성 조차와 관련된 내용. 5.4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 강용석의 고소한 19 - 137회 방영분 지적 허세 경제편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설명할 때 나무위키의 베르사유 조약 내용을 캡처해서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58]
- 생제르맹 조약 - 오스트리아와 맺은 조약. 이 조약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된다.
- 트리아농 조약 - 헝가리와 맺은 조약. 상당한 영토 상실은 덤.
- 뇌이 조약 - 불가리아와 맺은 조약
- 로카르노 조약
- 세브르 조약 - 오스만 제국과 맺은 조약.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 일부만을 건사할 뻔 했지만 튀르키예 독립전쟁 이후 파기되고 로잔 조약으로 개정.
- 제2차 콩피에뉴 휴전협정 - 1940년 독일에게 패배한 프랑스 정부가 독일과 체결한 휴전협정이다. 이 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은 독일이 다시 가져갔으며, 파 드 칼레 지방은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부에 귀속되었고, 프랑스 영토의 3/5에 달하는 북프랑스 지역에는 프랑스 군정청이 세워졌다. 이탈리아가 점령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프랑스 지역에는 프랑스국이 세워진다. 또한 하루에 4억 프랑이나 되는 독일군 주둔 비용을 모두 프랑스가 부담해야만 했으며, 프랑스국 육군은 전차, 장갑차 등을 소유할 수 없었고 최소한의 무장만을 허용받았다. 다만 해군은 무장을 해제당하긴 했으나 크릭스마리네에 함선을 이양하거나 배를 스크랩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지 않고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59] 당시 프랑스 성인 남성 인구의 약 10% 정도나 되는 약 180만 여명의 프랑스군 포로들은 독일의 공장, 광산, 농장에서 혹독한 노예노동에 시달리며 독일을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피해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들이나 정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정치인들의 신변 또한 독일에 넘겨줘야만 했다.
- 마셜 계획 - 베르사유 조약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연합군 진영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의 전범 청산과는 별개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반에 걸쳐 대규모 경기 부양과 원조를 제공한다.
- 코메콘 - 이쪽은 소련이 마셜 계획에 대항하여 진행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공산진영에 대한 대규모 원조에 해당한다.
- 영어 위키피디아의 베르사유 조약 문서
- The Weimar Republic signed the Treaty of Versailles. - 베르사유 조약과 이에 조인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영어 소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