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포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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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덕수궁의 궁문으로 동북쪽 담장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현재의 덕수궁 동북쪽 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담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서쪽으로 물린 것으로, 포덕문 자리는 현재 태평로 한복판이다.
2. 이름[편집]
포덕 뜻은 ‘덕(德)을 널리 베푼다(布)’이다.# ‘포(布)’는 직역하면 ‘베’인데, ‘넓게 펼쳐 베푼다’로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했다.
3. 역사[편집]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 1897년(건양 2년) 궁으로 돌아갈 때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환궁을 경운궁으로 하려고 했는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공사를 실시했다.[2]
이 때 포덕문도 지은 듯 하다. 확실한 건립 연대는 모르나, 1896년(건양 원년) 9월 13일[3] 에 김철희를 포덕문 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그 무렵 완공한 듯 하다.# 이후 고종이 종묘 등 궁 밖에 나갈 때 주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덕수궁 동쪽 담과 포덕문을 서쪽으로 후퇴시켜 옮겨지었다.
현재는 없으며 언제 헐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1954년에 동국문화사에서 발행한 이철원이 지은 책 《왕궁사》에 실린 〈덕수궁지도〉에는 안보이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철거한 듯 하다.
헐린 후 현판은 쌩뚱맞게 덕수궁 서문에 걸렸다. 이 현판은 2010년 11월 이전에 떼어냈고[4]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4. 구조[편집]
1칸 짜리 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중앙 열에 문짝을 달았다.
5. 여담[편집]
- 1899년(광무 3년)에 황의수란 사람이 포덕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와 고종의 처소인 함녕전까지 가서 “나는 서교를 널리 선전해 천자가 될 것이다.”란 말을 해서 체포되었고,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천주교, 개신교의 포교가 허용받은 지 한참 지난 시기라 그 죄목으로 처형당한 건 아니었다. 궁에 무단 침입해 황제의 침전에서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고 한 게 문제.#
빼박 역적 인증
[1]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2]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3] 음력 8월 7일.[4] 2010년 11월에 카카오맵에서 촬영한 사진에는 현판이 안보인다.[5] 사진 출처 - 카카오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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