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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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객이라 불렸던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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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LG 트윈스 코치 시절.

이름
노찬엽(盧燦曄 / Chan-yeup Noh)
생년월일
1965년 1월 15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학력
한양초 - 배재중 - 배재고 - 고려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7년 1차 1순위
소속팀
농협[1] (1988)
MBC 청룡 - LG 트윈스 (1989~1997)
지도자
LG 트윈스 육성군 수비코치 (1999~2002)
LG 트윈스 1군 작전•주루코치 (2003~2006)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06~2007)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08~2009)
LG 트윈스 2군 감독 (2012~2013)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15)
LG 트윈스 육성군 총괄코치 (2015~2016)
연천 미라클 타격•주루코치 (2017~)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0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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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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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6
1987
1988~1993
이종도

이해창
김재박
이광은
?

1994~1997
1998
1999
2000
2001
노찬엽

김동수

송유석
김선진
양준혁
2002
2003
2004
2005
2006
서용빈유지현

이상훈
이병규
조인성
서용빈
2007~2008
2009
2010~2011
2012~2013
2014~2015
이종열
조인성
박용택
이병규
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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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9~2021
2022~

류제국
박용택
김현수
오지환
{{{-2 김민성 (임시 주장)
김현수 (임시 주장)}}}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트리비아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편집]


선수 시절에는 '서울의 검객'으로 불리던 교타자
그러나 코치로서는 수비, 주루, 타격 등의 다양한 보직을 거치면서, 어디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실패 사례.

MBC 청룡-LG 트윈스의 선수이자 전 LG 트윈스의 코치.


2. 선수 시절[편집]


파일:LG4인방.jpg
왼쪽부터 정삼흠, 노찬엽, 김용수, 김상훈

1987년 MBC 청룡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위해 실업 농협에 입단했다. 아마시절 노찬엽은 강기웅과 더불어 최고의 타자였으며, 서울올림픽에서도 대표팀 4번타자로 활약했다.

올림픽을 마친 후 1989년 MBC 청룡에 입단하였다. 이해 신인왕 경쟁은 박정현, 이강철, 류명선, 송진우 등의 투수들이 강세였는데, 노찬엽은 강기웅과 함께 신인 타자의 대표 주자로 활약했다. 데뷔 시즌부터 MBC의 중심 타자로 맹활약한 그는 1990년, 한대화, 이강돈과 사상 초유의 시즌 막판 타격왕 경쟁을 하며 주목을 받았지만,[2] 타격왕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이강돈을 불과 1만분의 1 차이로 제친 한대화가 차지했다. 연말에는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후보로도 올랐지만, 그 해에 홈런 3위를 기록하며 뒤늦은 전성기를 맞이한 삼성의 베테랑 박승호가 골든글러브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해인 1991년에 2년 연속 3할을 치며 잠실야구장 우중간을 가르는 2,3루타가 트레이드 마크로 '서울의 검객' 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그러다 1993년 5월 해태의 투수 양승철에게 머리에 맞는 사구를 당했는데, 이 부상으로 공이 두 개로 보이는 후유증을 겪으며 2달 동안 1군에서 제외되었다. 프로데뷔 이후 최악의 시즌이었다[3] . 그래도. OB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4번타자로 출장하였다. 93시즌 최고의 활약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나왔다. 0-0으로 시소게임을 벌이던 중, 6회초 삼성 박충식으로부터 결승 2타점 적시타를 뽑아내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1994년에는 주로 5번타자로 활약하며[4], 데뷔 후 처음 두자리수 홈런(10개)을 기록하는 등 주장으로서 팀을 잘 이끌며 팀의 완전 우승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본인도 생애 첫 골든글러브(외야수 부분)를 노려볼만 했으나 3할대 초반까지 올라갔던 타율이 막판 대부진으로 하락(.279)한 바람에 쌍방울 박노준(.303)에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당시는 3할타자가 1년에 10명정도 밖에 안나오던 시절이라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이 3할 타율에 매우 민감했었다. 노찬엽 개인으로선 1990년과 1991년에 이어 아쉽게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한 셈이었는데, 95년에는 또 다시 헤드샷 부상을 당했고, 결국 97년 은퇴할때까지 이렇다 할 수상 실적없이 은퇴하였다.

팀의 장시간 침체기였던 시기에 주포로 활약했으며, 리즈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엔 한대화와 더불어 찬스에 강한 타자로 불려졌으며 노쇠화와 부상이 있던 시기를 제외하면 50타점 이상을 꾸준히 올렸다. 3루타 순위에 있어서도 1989, 1993~1994년 1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1990년 기록한 0.333의 타율은 역대 LG 우타자들 중 최고 타율이다. 수비 또한 송구능력만 제외하면 준수한 편이었다. 통산 BB/K 비율도 1이 넘을 정도로 준수한 선구안도 가진 타자였다. KBO 단일시즌 BB/K 기록 보유자로, 1989년에 3.79의 기록을 남겼다. 다만 유리몸저질체력이어서 한시즌 100경기를 간신히 넘길 정도로 내구력이 약했다. 안면사구 이후에 정교함도 퇴색되긴 했지만, 원체가 내구성이 떨어지는 몸이라 기량 하락도 급격히 진행됐다.


3. 지도자 시절[편집]


서용빈과 함께, 선수 시절의 명성을 지도자로서 갉아먹은 대표적 사례

은퇴 후 작전코치, 주루코치, 타격코치 등 LG에서 코치직을 맡았으나 이 시기부터 실적은 하나도 못 남기고 6668587667 시기가 진행중이었던 2007년 짤리고 5886899가 시작되던 한화 코치로 영입되어 김인식 감독 밑에서 3루 베이스 코치[5]를 하다가 한대화가 감독을 맡게 되면서 물러났다. LG 트윈스가 코치진을 출신들을 많이 기용함에도 다시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코치로써도 확실하게 실적이 없다보니...

그런데 2011년 11월 4일 부로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어째 신통치 않아서 팬들에게 욕을 잔뜩 먹고 있다. 감독으로 있던 2012 시즌 2군에서 4할대 승률로 고전하였고, 2013시즌에도 5할대 근처에 머물렀다.

일신상의 사유로 2013년 시즌 후 LG 트윈스 2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가 2015 코칭스탭 재편과정에서 1군 타격코치로 팀에 복귀하였다. 양상문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2군 선수진들을 알고 있어서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왔지만, 팬들은 능력도 없는 철밥통이 돌아왔다고 부정적으로 본다. 그나마 LG팬들이 위안을 삼는 점은 신경식처럼 쓸데없이 우타자를 좌타나 스위치로 바꾸는 행위를 하지 않고, 선수의 타격 폼을 웬만하면 안 건드리는 주의라는 점은 그래도 환영받는 편이긴 하다.

2012년 차명석이 1군 투수코치를 맡았을 때 투수들 제구력 잡는다고 구속이나 10km씩 떨구지 말라고 기대도 못 받았었던 상황을 본인의 철저한 노력과 공부로 LG 팬들에게 최고의 투수코치로 발돋움했듯이 노찬엽 코치도 공부하는 자세로 노력을 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고 LG 타자들이 집단 슬럼프를 겪으면서 부진하자, 말그대로 미친 듯이 까이고 있다. 특히 경기 중에 보이지도 않고, 신인급 타자들은 오히려 작년보다 퇴보한 모습을 보이면서 타격코치는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 하다못해 서빙고라고 욕 먹은 서용빈이 낫다는 말까지 나왔다.[6]

인터뷰에서는 여전히 선수 자신감 탓+사이클 탓+잠실구장 탓를 대며 무능코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루빨리 떠나 달라는 분위기.[7]

덧붙여 노찬엽이 강조한 선구안 장착과 신중한 접근법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치려는 공을 보려고 너무 기다리다 보니 팀 피삼진이 많아졌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타격 상황에서 양상문 감독이 직접 지시하는 장면까지 방송에서 잡히면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결국 2015년 6월 15일에 서용빈과 보직을 맞바꿔 육성총괄코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귀신같이 득점상황에서의 집중력이 살아났다(...)

그래도 육성군에서는 그럭저럭 하는 모양.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61008184531657899_99_20161008185604.jpg
2016년 10월 8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최종전에 시타자로 등장하여 이날 시구자 이상훈과 함께 LG의 예전 원정 유니폼인 검정색 유니폼을 입고 인사를 나누며 오랜만에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8] 하지만 이상훈의 시구에 완전히 묻혔다. 워낙 코치로 말아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2016년 시즌 종료 후 구단과 재계약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연천 미라클 타격/주루코치를 맡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4. 트리비아[편집]


  • 구본무 LG그룹 회장[9]이 무척 총애하는 인물이다. 구본무는 노찬엽이 현역 시절 팀의 주장[10]으로서 보인 리더십에 많은 감명을 받아 "노찬엽은 미래의 LG 감독이다."라고 까지 말한 적이 있었고, 그만큼 많이 밀어 줬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게다가 외야수 출신이라 감독감으로는(...)

  • 2016년 10월 8일 잠실 두산전에서 시구자 이상훈과 함께 시타자로 나섰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현재의 LG팬들에게는 검객보다는 타격코치 때의 그 처절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서인 듯(...) 등번호는 91번.

  • LG 우승 이듬해인 1991년 나이키의 광고를 찍었다. 이는 한국야구선수 최초로 나이키 모델이 된 사례였다![11]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MBC 청룡
102
352
.287
101
18
6
(1위)
1
56
54
13
54
.381
.374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LG 트윈스
105
327
.333
(3위)
109
11
6
(3위)
5
51
47
8
43
.450
.403
(2위)
1991
115
417
.317
132
(4위)
22
8
(4위)
3
58
45
12
52
.429
.388
1992
109
405
.272
110
21
2
6
50
52
6
53
.378
.354
1993
73
234
.244
57
5
8
(1위)
2
20
27
4
26
.359
.317
1994
107
340
.279
95
13
6
(1위)
10
59
53
7
45
.441
.357
1995
99
293
.253
74
14
0
9
41
38
4
27
.392
.310
1996
105
305
.243
74
11
2
5
28
37
5
41
.341
.328
1997
69
115
.226
26
6
0
2
17
15
0
14
.330
.308
KBO 통산(9시즌)
884
2788
.279
778
121
38
43
380
368
59
308
.396
.346

[1] 서울 올림픽 출전으로 프로 진출이 유보되면서 임시로 몸담았다.[2] 이때 규정타석을 간신히 채운 노찬엽은 결혼식을 하고 난 뒤 경기에 출전하였으며 해당 경기가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가 버렸다. 거기다 결혼식날은 자신의 타격왕과 LG의 정규시즌 1위가 달려있는 마지막 경기였는데, 팀은 이겼지만 OB의 고의사구 2개에 힘입어 무안타에 그치며 타격왕을 날렸다. 이날 OB는 시즌 최하위가 이미 확정된 상태였는데, 라이벌팀에서 타격왕이 나오는걸 막기 위해 4차례 타석중에 딱 1차례밖에 타격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머지 3차례 타석은 거의 고의성 볼넷이었다. 그나마 그 1번의 타격기회도 투수 구동우를 상대로 제대로 맞은 라이너 타구를 날렸으나, OB 좌익수 곽연수의 믿기지 않은 호수비에 걸려 아웃되었다. 이게 빠졌다면 타격왕에 등극했을 수도 있었을 듯 하다.[3] 결국 노찬엽은 그 해 73경기 출전에 그쳤으나 3루타 8개로 공동 1위를 마크했다[4] 줄곧 지키던 우익수 자리에는 92년 시즌 중 태평양에서 이적한 박준태가 93년부터 주전을 맡아왔던 탓인지 중견수를 봤는데 전년도 신인으로 주전 중견수를 차지한 김경하가 방위복무로 출전이 불가피해지자 어쩔 수 없이 포지션을 변경했다[5] 기존에는 유지훤 수석코치가 3루코치를 겸했다.[6] 적어도 서용빈은 메인 코치로 있었을 때 2010년 팀 타율, 팀 홈런 3위를 찍었다.[7] 같이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두산 베어스는 이미 팀 타율 3위에 평균득점 4위를 하고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지며 싸이클로 따지자면 엘지 트윈스는 4월부터 5월까지 쭈욱 못 치고 있다.(...) 게다가 작년에 1군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최승준. 채은성 역시 폭망하면서 자신감 탓으로도 보기가 힘들다.[8] 노찬엽과 이상훈은 LG의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고 노찬엽은 우승 당시 팀의 주장이었다.[9] 실질적인 LG 트윈스의 소유주이다.[10]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주장이었다.[11] 해당 제품은 미국에서 보 잭슨의 'Bo Knows' 광고로 유명한 Cross Training Footwea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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