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왕국
덤프버전 : (♥ 0)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가상의 왕국에 대한 내용은 그리스 왕국(파이브 스타 스토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근대 그리스 지역에 세워진 왕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을 거쳐 그리스가 독립하였고 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 왕국), 글뤽스부르크 왕조(덴마크 왕국)의 자손들이 그리스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3]
정부기가 따로 지정되어 국기가 2종류인 나라들도 있지만, 그리스 왕국의 경우 국기가 2종류인 데다 그에 맞는 정부기가 따로 있어, 합쳐서 4종류였다.
육상에서 쓰는 민간기로 1822년 채택됐다. 올림픽 대회에서 그리스 왕국 선수단은 주로 이 깃발을 앞세워 입장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이 1970년 폐지했다.[4]
육상에서 쓰는 정부기이자 군기(War flag)다. 1863년 채택. 하지만 이 역시 군부 정권이 1970년 폐지했다.
현 그리스 국기로, 외교업무에서 사용하거나 상선에서 게양하는 깃발로 사용되었다.
십자가의 교차점에 왕관 마크를 넣으면 해군기와 정부선(船)의 깃발이 된다. 1863년 채택.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5] 위대한 이상[6] )라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정책에 근거하여 점점 땅을 넓혀 나가는 것이 그리스 왕국의 국책이었다. 독립 직후 4만 7천 ㎢에 불과하던 영토가 1864년에는 코르푸 섬을 필두로 한 이오니아 제도를 영국으로부터 증여받고[7] , 1881년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테살리아 지방을 얻어 64,790㎢가 되었다.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913년에는 동로마 제국 제2의 도시였던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에피로스, 크레타 지방을 얻어 영토가 대폭 늘어난 12만 125 ㎢가 되었는데, 기존 영토이던 남부 그리스 지역(Παλαιά Ελλάδα)과는 이미 80년 넘게 다른 국가였기 때문에 새로운 땅(Νέες Χώρες)이라 불린 이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테살로니키에 마케도니아 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중앙의 행정과 어느 정도는 별개로 운영하였다.[8] 원래부터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그리스는 이렇게 영토를 늘려서 추가로 인구를 확보한 1913년에 54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어 참전할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국가를 분열시켰다.(국론 분열: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 국왕은 독일 출신이라 친독적 중립을 주장했고, 베니젤로스는 협상국 편을 들었는데 국왕의 총리 해임으로 인한 반발 등을 거쳐 결국 협상국으로 참전했고 (불가리아에게 발렸지만, 결국 협상국이 승리하며) 승전국이 되면서 1919년에는 불가리아로부터 서부 트라키아를, 이듬해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동부 트라키아(코스탄티니예 외곽) 지방을 연이어 쟁취하고, 이즈미르(스미르나) 주변을 점령하여 아나톨리아의 영토까지 사실상 확보하며 영토가 17만 3779 ㎢로 늘어났다.
내친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나톨리아까지 점령하려고 앙카라 근교까지 진격했다가 튀르키예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1923년에 이탈리아의 영토였던 도데카니사 제도를 제외한 에게 해 섬들을 차지하는 대신 동부 트라키아와 이즈미르 지방을 튀르키예에 반환했다. 게다가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일어나 동부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의 정교회 신자들이 아테네 근교와 북부 지역에 대거 정착하였다.
▲ 아테네의 그리스 왕실 근위대 병영의 입구. 군사 쿠데타 1달 전인 1967년 3월 25일 촬영.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좌절로 그리스는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제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결국 왕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왕정복고를 하고 총선을 치러보니 제2공화정을 강력히 지지하던 자유당 등이 왕당파에 맞먹을 세력을 확보하여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았고, 왕당파 군인 중 하나인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1936년에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국왕을 무력화한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 정부(8월 4일 체제)를 수립했다.
1940년 이탈리아 왕국의 그리스 침공에 이어 나치 독일의 점령을 겪었고, 왕국 정부는 카이로에서 망명 정부를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민투표로 지지를 얻어 요르요스 2세가 복고되었고 이탈리아로부터 도데카니사 제도를 획득하여 현재의 국경을 완성했다.(13만 1990 ㎢)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의 인구는 상당히 빠르게 증가해서 영토를 확정지은 1947년에는 760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왕당파를 중심으로 한 군부와 공화파를 중심으로 한 추축국에 맞섰던 공산군의 갈등으로 1949년까지 그리스 내전이 일어났다. 결국 공산군이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방면으로 축출되면서 왕당파가 완전히 승리했다.
1952년에는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제21조에서는 왕국의 국체를 "왕관을 쓴 민주주의/왕관을 쓴 공화국(Βασιλευομένη Δημοκρατία)"[9] 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남성을 우선하되 남성이 없으면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왕위 계승 법칙이 개정되었다. 이는 당시 그리스 왕실에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있는 계승권자가 두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파블로스보다 앞서 즉위한 두 형은 아들이 없었는데 1952년 당시 파블로스에게는 아들이 왕세자 한 명뿐이었고 더 먼 남계 왕족은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국왕인 요르요스 1세의 자손들이었는데, 요르요스 1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차남 요르요스 왕자(1869~1957)[10] 의 외아들 페트로스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3남 니콜라오스 왕자는 딸만 셋이었고, 4남 안드레아스 왕자의 외아들 필리포스는 영국 왕실의 추정상속인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면서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왕위계승서열 3위이자 마지막 계승권자는 5남 흐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1939~)뿐이었다.(미하일은 계승법 변경 이후 1965년 귀천상혼으로 계승권 포기) 때문에 만일 왕세자가 아들을 얻지 못하고 미하일마저 계승권을 포기하거나 아들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계승법을 바꾸게 되었다.말하자면 현 일본 황실과 상황이 비슷했다.
그리스 공산당은 내전 이후 불법화되었고, 이후 우파 진영은 콘스탄디노스 파파고스 원수와 콘스탄디노스 카라만리스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집회(Ἑλληνικὸς Συναγερμός/Greek Rally, 1951~1955)와 그 후신인 국민급진연합(Ἐθνικὴ Ῥιζοσπαστικὴ Ἕνωσις/National Radical Union, 1956~1974)을 결성하여 여당으로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총선에서 좌파성향의 정당인 연합민주좌파(ΕΔΑ)가 선전하자 국가급진연합은 노골적으로 견제를 시도했고 1961년 총선에서는 야당인 중도연합과 좌파민주연합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에 대해 노골적인 투표방해와 체포협박 등의 부정 선거 공작이 일어났음을 이유로 불복하였다. 하지만 2년 후인 1963년 총선에서 중도연합이 정권교체에 성공하였고, 이듬해 총선에서도 중도연합이 과반을 확보,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총리가 계속 바뀌다가 급기야 1967년 4월 21일에 우파 주도의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좌파와 중도 정당은 물론이고 우파 정당들까지 강제해산당하며 7년간 군부가 집권했다.
원래부터 반공 정권을 지지하고 있던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군부정권을 지지했지만 점차 갈등이 표면화됐고, 끝내 1967년 12월 13일에 군사정권이 장악하던 아테네를 떠나 테살로니키 동쪽 카발라로 몽진,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해공군을 주축으로 한 왕당파 군인들과 함께 군사정권을 진압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이튿날 로마로 망명하면서 실질적으로 왕정이 끝장난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는 콘스탄티노스 2세를 쫓아내고는 섭정놀이를 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의 군사 반란 이후 왕당파가 민주화 세력과 연대해 반군사정권 투쟁을 벌인 것을 고깝게 여겨 1973년 7월 29일에 강압으로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고 콘스탄티노스 2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한다.
그러나 여전히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은 컸고, 군부는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1974년에 키프로스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배하면서 물러났다.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왕정복고 국민투표가 같은 해 12월 8일에 있었지만 7:3으로 공화파가 승리하여 그리스는 공화국이 된다.
섭정은 임시로 왕권을 대신 행사하는 직위라서, 대수를 세지 않는다.
1. 개요[편집]
근대 그리스 지역에 세워진 왕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을 거쳐 그리스가 독립하였고 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 왕국), 글뤽스부르크 왕조(덴마크 왕국)의 자손들이 그리스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3]
2. 국기[편집]
정부기가 따로 지정되어 국기가 2종류인 나라들도 있지만, 그리스 왕국의 경우 국기가 2종류인 데다 그에 맞는 정부기가 따로 있어, 합쳐서 4종류였다.
육상에서 쓰는 민간기로 1822년 채택됐다. 올림픽 대회에서 그리스 왕국 선수단은 주로 이 깃발을 앞세워 입장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이 1970년 폐지했다.[4]
육상에서 쓰는 정부기이자 군기(War flag)다. 1863년 채택. 하지만 이 역시 군부 정권이 1970년 폐지했다.
현 그리스 국기로, 외교업무에서 사용하거나 상선에서 게양하는 깃발로 사용되었다.
십자가의 교차점에 왕관 마크를 넣으면 해군기와 정부선(船)의 깃발이 된다. 1863년 채택.
3. 역사[편집]
3.1. 메갈리 이데아[편집]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5] 위대한 이상[6] )라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정책에 근거하여 점점 땅을 넓혀 나가는 것이 그리스 왕국의 국책이었다. 독립 직후 4만 7천 ㎢에 불과하던 영토가 1864년에는 코르푸 섬을 필두로 한 이오니아 제도를 영국으로부터 증여받고[7] , 1881년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테살리아 지방을 얻어 64,790㎢가 되었다.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913년에는 동로마 제국 제2의 도시였던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에피로스, 크레타 지방을 얻어 영토가 대폭 늘어난 12만 125 ㎢가 되었는데, 기존 영토이던 남부 그리스 지역(Παλαιά Ελλάδα)과는 이미 80년 넘게 다른 국가였기 때문에 새로운 땅(Νέες Χώρες)이라 불린 이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테살로니키에 마케도니아 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중앙의 행정과 어느 정도는 별개로 운영하였다.[8] 원래부터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그리스는 이렇게 영토를 늘려서 추가로 인구를 확보한 1913년에 54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어 참전할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국가를 분열시켰다.(국론 분열: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 국왕은 독일 출신이라 친독적 중립을 주장했고, 베니젤로스는 협상국 편을 들었는데 국왕의 총리 해임으로 인한 반발 등을 거쳐 결국 협상국으로 참전했고 (불가리아에게 발렸지만, 결국 협상국이 승리하며) 승전국이 되면서 1919년에는 불가리아로부터 서부 트라키아를, 이듬해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동부 트라키아(코스탄티니예 외곽) 지방을 연이어 쟁취하고, 이즈미르(스미르나) 주변을 점령하여 아나톨리아의 영토까지 사실상 확보하며 영토가 17만 3779 ㎢로 늘어났다.
내친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나톨리아까지 점령하려고 앙카라 근교까지 진격했다가 튀르키예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1923년에 이탈리아의 영토였던 도데카니사 제도를 제외한 에게 해 섬들을 차지하는 대신 동부 트라키아와 이즈미르 지방을 튀르키예에 반환했다. 게다가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일어나 동부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의 정교회 신자들이 아테네 근교와 북부 지역에 대거 정착하였다.
3.2.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편집]
▲ 아테네의 그리스 왕실 근위대 병영의 입구. 군사 쿠데타 1달 전인 1967년 3월 25일 촬영.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좌절로 그리스는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제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결국 왕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왕정복고를 하고 총선을 치러보니 제2공화정을 강력히 지지하던 자유당 등이 왕당파에 맞먹을 세력을 확보하여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았고, 왕당파 군인 중 하나인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1936년에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국왕을 무력화한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 정부(8월 4일 체제)를 수립했다.
1940년 이탈리아 왕국의 그리스 침공에 이어 나치 독일의 점령을 겪었고, 왕국 정부는 카이로에서 망명 정부를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민투표로 지지를 얻어 요르요스 2세가 복고되었고 이탈리아로부터 도데카니사 제도를 획득하여 현재의 국경을 완성했다.(13만 1990 ㎢)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의 인구는 상당히 빠르게 증가해서 영토를 확정지은 1947년에는 760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왕당파를 중심으로 한 군부와 공화파를 중심으로 한 추축국에 맞섰던 공산군의 갈등으로 1949년까지 그리스 내전이 일어났다. 결국 공산군이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방면으로 축출되면서 왕당파가 완전히 승리했다.
1952년에는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제21조에서는 왕국의 국체를 "왕관을 쓴 민주주의/왕관을 쓴 공화국(Βασιλευομένη Δημοκρατία)"[9] 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남성을 우선하되 남성이 없으면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왕위 계승 법칙이 개정되었다. 이는 당시 그리스 왕실에 자손을 남길 가능성이 있는 계승권자가 두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파블로스보다 앞서 즉위한 두 형은 아들이 없었는데 1952년 당시 파블로스에게는 아들이 왕세자 한 명뿐이었고 더 먼 남계 왕족은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국왕인 요르요스 1세의 자손들이었는데, 요르요스 1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차남 요르요스 왕자(1869~1957)[10] 의 외아들 페트로스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3남 니콜라오스 왕자는 딸만 셋이었고, 4남 안드레아스 왕자의 외아들 필리포스는 영국 왕실의 추정상속인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면서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왕위계승서열 3위이자 마지막 계승권자는 5남 흐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1939~)뿐이었다.(미하일은 계승법 변경 이후 1965년 귀천상혼으로 계승권 포기) 때문에 만일 왕세자가 아들을 얻지 못하고 미하일마저 계승권을 포기하거나 아들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계승법을 바꾸게 되었다.
3.3. 멸망[편집]
그리스 공산당은 내전 이후 불법화되었고, 이후 우파 진영은 콘스탄디노스 파파고스 원수와 콘스탄디노스 카라만리스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집회(Ἑλληνικὸς Συναγερμός/Greek Rally, 1951~1955)와 그 후신인 국민급진연합(Ἐθνικὴ Ῥιζοσπαστικὴ Ἕνωσις/National Radical Union, 1956~1974)을 결성하여 여당으로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총선에서 좌파성향의 정당인 연합민주좌파(ΕΔΑ)가 선전하자 국가급진연합은 노골적으로 견제를 시도했고 1961년 총선에서는 야당인 중도연합과 좌파민주연합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에 대해 노골적인 투표방해와 체포협박 등의 부정 선거 공작이 일어났음을 이유로 불복하였다. 하지만 2년 후인 1963년 총선에서 중도연합이 정권교체에 성공하였고, 이듬해 총선에서도 중도연합이 과반을 확보,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총리가 계속 바뀌다가 급기야 1967년 4월 21일에 우파 주도의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좌파와 중도 정당은 물론이고 우파 정당들까지 강제해산당하며 7년간 군부가 집권했다.
원래부터 반공 정권을 지지하고 있던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군부정권을 지지했지만 점차 갈등이 표면화됐고, 끝내 1967년 12월 13일에 군사정권이 장악하던 아테네를 떠나 테살로니키 동쪽 카발라로 몽진,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해공군을 주축으로 한 왕당파 군인들과 함께 군사정권을 진압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이튿날 로마로 망명하면서 실질적으로 왕정이 끝장난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는 콘스탄티노스 2세를 쫓아내고는 섭정놀이를 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의 군사 반란 이후 왕당파가 민주화 세력과 연대해 반군사정권 투쟁을 벌인 것을 고깝게 여겨 1973년 7월 29일에 강압으로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고 콘스탄티노스 2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한다.
그러나 여전히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은 컸고, 군부는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1974년에 키프로스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배하면서 물러났다.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왕정복고 국민투표가 같은 해 12월 8일에 있었지만 7:3으로 공화파가 승리하여 그리스는 공화국이 된다.
4. 연표[편집]
- 왕국 성립 이전
- 왕국 성립
- 1832년: 유럽 열강의 런던 회의,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톤이 왕위에 올라 그리스 왕국 성립.
- 1862년: 오톤 폐위.
- 1863년: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 아돌프 게오르그 공이 요르요스 1세로 왕위에 오름, 이오니아 제도를 영국으로부터 증여받음.
- 1881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테살리아 등 중부 그리스 지방 획득.
- 1897년: 오스만-그리스 전쟁 패배, 오스만 제국에 배상금을 지불했으나 열강의 중재로 크레타섬이 1898년 그리스 왕국의 괴뢰국으로서 독립, 크레타국은 1913년 그리스에 합병됨.
- 1912년: 발칸 전쟁 승리,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한 북부 그리스 지방 획득.
-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승리, 불가리아로부터 서부 트라키아 지방 획득.
- 1922년: 튀르키예 독립전쟁 패배, 그리스군의 반란, 콘스탄디노스 1세 폐위.
- 1923년: 콘스탄디노스 1세 사망, 요르요스 2세가 왕위를 이어받음.
- 그리스 제2공화국
- 1924년: 군주제 폐지, 공화정 정부 수립.
- 왕정 복위
- 그리스 군사정권
- 1967년: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의 군사 반란으로 그리스 군사정권 설립, 콘스탄디노스 2세 군사 반란 시도하다 망명.
- 1973년: 그리스 군사정권,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 폐지.
- 1974년: 군사정권 전복, 왕정복고 투표 부결, 그리스 제3공화국 수립.
5. 역대 지도자[편집]
5.1. 국왕[편집]
5.2. 섭정[편집]
섭정은 임시로 왕권을 대신 행사하는 직위라서, 대수를 세지 않는다.
-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12][13] : 1920년 (군부)
-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14] : 1920년 (무소속)
- 요르요스 콘딜리스[A][B][15] : 1935년 (군부)
- 아테네 대주교 다마스키노스[16][17] : 1944년~1946년 (무소속)
- 요르요스 조이타키스[A][18] : 1967년~1972년 (군부)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B][19][20] : 1972년~1973년 (군부)
5.3. 총리[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4 20:08:16에 나무위키 그리스 왕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육상에서 쓰는 민간기이다. 하지만 1970년 군부에 의해 폐지되고, 마지막 3년간은 진파랑색을 쓴 현 그리스 국기 도안을 사용한다.[2] 문어체인 '카사레부사'와 구어체인 '디모티키'로 나뉘어 양층언어 현상이 있었다.[3] 타국의 오랜 지배로 독립시 왕조를 재건 혹은 개창할 만한 토착세력이 없어 외국에서 왕을 데려오는 케이스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유럽 왕실은 서로 통혼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그 지역의 영유권이 전혀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 왕조를 수입하는 것도 가능했던 것. 더구나 그리스는 열강들에 의해 독립이 된 만큼 열강의 입맛에 맞는 이를 군주로 세워야 했다.[4] 공화국 수립 후 짧은 기간 부활(1975~1978)하기도 했다.[5] 다소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대중들에게 익숙할 고전 발음으로 읽으면 '메갈레 이데아'이다.[6] 고대 그리스어의 Ιδέα(이데아)는 한자어 '형상'이나 고유어 '꼴'에 가까운 의미였으나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이상'이나 '관념'의 의미로 쓰인다.[7] 원래는 이오니아 제도 합중국이라는 영국의 괴뢰국으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영국 왕세자의 처남인 요르요스 1세(요르요스 1세의 바로 위 누나인 알렉산드라는 에드워드 7세와 혼인했다.)의 즉위 선물로 준 것이다.[8] 마케도니아 총독부는 1945년에 트라키아 총독부와 합쳐쳐 북부그리스 총독부로 바뀌었다. 1955년 북부그리스부(部)로 바뀌어 총독제도는 사라졌으며, 1988년 마케도니아-트라키아부(部)를 거쳐 2009년에 내무부 산하 조직으로 격하되어 지금까지도 존속 중이다(2012~2015년 한때 다시 부로 승격).[9] 그리스어에서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Δημοκρατία로 같다.[10] 이 때 살아있어서 왕위계승 서열 2위였지만 1952년 당시 나이가 83세였다.[11] 이 기간 동안 요르요스 2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망명정부를 이끌었다.[12] 해군 대장[13] 알렉산드로스 국왕이 사망하자 섭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에게 섭정직을 넘기고 물러났다.[14] 요르요스 1세의 아내이자 콘스탄티노스 1세의 모후였고, 망명 중이던 아들이 귀국하여 복위하기 전까지 섭정을 맡았다.[A] A B 육군 중장[B] A B 섭정 겸 총리[15] 왕정복고가 결정된 직후부터 요르요스 2세가 귀국하여 복위하기 전까지 섭정을 맡았다.[16] 본명은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레우(Damaskinos Papandreou).' 그리스의 국교인 그리스 교회의 수장으로서, 망명 중이던 요르요스 2세가 복위하기 전까지 섭정을 맡았다.[17] 1945년에는 일시적으로 총리를 겸직했다.[18] 1967년 콘스탄티노스 2세가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군사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역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해외로 망명하자, 파파도풀로스에 의해 섭정으로 옹립되었다.[19] 육군 대령[20] 1967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총리로서 군사정권을 이끌었고, 1972년부터 섭정을 역임하다가, 1973년에 공화정을 선포하고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