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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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내전
ο Eμφύλιος (Πόλεμος)[1]
Greek Civil War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Греций



기간
1944년 12월 3일 ~ 1945년 1월 11일 (1차)
1946년 3월 30일 ~ 1949년 10월 16일 (2차)
장소
그리스 전역
원인
인민해방전선과 정부 간의 이념 갈등
교전 및 지원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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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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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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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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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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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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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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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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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애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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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스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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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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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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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자하리아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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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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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바피아디스




병력
150,000명
51,000명
피해
15,268명 전사, 37,225명 부상, 3,843명 실종, 865명 탈영
38,839명 전사, 20,128명 포로
결과
그리스 왕국군의 승리
영향
발칸반도 전체의 공산화 방어
그리스 전역에서 난민 50~80만 명 발생
1. 개요
2. 배경
3. 내전으로의 길
4. 제1차 그리스 내전
5. 제2차 그리스 내전[2]
6. 영향
7. 같이 보기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44년에서 1949년 사이에 그리스 왕국에서 일어난 두 번의 내전을 통틀어 일컫는다.

미국, 영국자본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왕국군과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공산당(ΚΚΕ, KKE)의 군사 조직인 그리스 민주군(ΔΣΕ, DSE) 사이에서 치러진 내전이다.


2. 배경[편집]


그리스에서는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패전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제2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결국 왕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왕정 복고를 하고 총선을 치르니 제2공화정을 강력히 지지하던 자유당 등이 왕당파에 맞먹는 세력을 확보하여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공화파와 왕당파가 백중세로 씨름하는 틈을 타 공산주의자들은 공화파와 연정을 꾀해 세력을 늘려나갔다.[3] 그러자 1936년 왕당파 군인 중 한 명인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국왕을 무력화한 권위주의적인 군사 독재 정부(8월 4일 체제)를 수립했다. 국왕 요르요스 2세는 꼴도 보기 싫은 공화파와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보느니 메탁사스의 쿠데타를 지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메탁사스 정권에게 공화파와 공산주의자가 두들겨 맞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나치 독일이 유럽 대륙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던 것을 보고 배알이 꼴린 파시스트 이탈리아두체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리스를 자기네 세력권으로 편입하겠다며 1940년 겨울 그리스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이 워낙 못 싸우다 보니 핀도스 산맥 등 그리스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Αλέξανδρος Παπάγος) 장군의 그리스 왕국군에 막혀 진격이 지지부진해졌고 오히려 반격한 그리스군에게 격퇴당해 알바니아로의 진격을 허용하는 굴욕마저 당하게 되었다.[4] 이를 본 영국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를 도와 발칸 반도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영국의 유럽 대륙 내 교두보 확보를 우려한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발칸 반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시작으로 발칸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독일 국방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그리스를 침공했고 압도적인 독일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 그리스는 전 국토가 추축군에게 점령당했다.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혼란 속에 급사한 메탁사스의 뒤를 이은 총리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Αλέξανδρος Κορυζής)가 4월 18일 스스로 목숨을 끊자 메탁사스 정권의 반대파였던 에마누일 추데로스(Εμμανουήλ Τσουδερός)가 총리직을 승계했고 수송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수송로가 독일군에 의해 차단되자 알바니아 주둔 그리스 제1군 사령관 요르요스 촐라코글루(Γεώργιος Τσολάκογλου)는 독일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의 항복은 치욕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4월 20일 에피루스의 보토나시에서 독일군의 디트리히 장군에게 항복했다. 이틀 뒤에는 제2차 항복협정에 서명했으며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이에 만족하지 않자 결국 테살로니키로 날아가 이탈리아 장군 페레로와 독일군 장군 요들 앞에서 제3차 항복협정에 서명했다. 무려 300,000명의 그리스군 병력이 포로가 되거나 무장해제되었으며 그리스에 파견되었던 영국군 50,600명은 4월 23일에 그리스 본토에서 탈출했다. 4월 27일에는 수도 아테네에 독일군이 입성했다.[5]

그리스 왕국이 추축군에게 점령되자 그리스 왕실과 정부는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크레타로 도피했으나 크레타 섬 전투로 크레타마저 독일군에게 함락당한 후에는 이집트 왕국카이로로 도피해 망명정부를 꾸렸다. 그리고 점령당한 그리스 본토에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그리스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 장교들 다수는 1개 보병여단, 1개 특공대대, 2개 비행중대와 소수의 군함을 이끌고 왕실이 있는 카이로로 망명했지만, 추축군에 맞서 그리스군을 지휘한 파파고스 장군은 부하들을 두고 어딜 가겠느냐며 포로가 되었다. 한편 메탁사스 정권에게 얻어 터지던 공화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산으로 도망쳐 각기 저항 점조직을 구성하고 대독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3. 내전으로의 길[편집]


그리스의 반추축군 저항조직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조직은 그리스 공산당(KKE)이 이끌던 국민해방전선(ΕΑΜ, EAM)의 산하 무장단체였던 그리스 인민해방군(ΕΛΑΣ, ELAS)이었다. 두 번째로 큰 세력은 공화주의자들의 국민민주그리스연맹(ΕΔΕΣ, EDES)이었다.

EAM은 시작 자체는 그리스 공산당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나 이후에 다양한 저항조직들이 합류하면서 중도에서 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조직의 주류는 여전히 그리스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는 산악정부 해소 이후 연립 망명정부에 EAM 몫으로 할당된 여섯 자리의 장관직 대부분을 그리스 공산당이 차지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EAM의 세력 확장은 산하 단체의 자발적 참여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소규모 저항단체에게 제멋대로 해산을 명령하고 그 조직원을 흡수하는 강압적인 방식도 자주 사용되었다. 그 결과 EAM은 내전 발발 직전인 1943년 8월 시점에서 전투원 14,000명을 거느린 명실상부한 그리스 최대의 저항단체가 되었다. 같은 시기 EDES의 전투병력은 4,000여 명 규모였다.

반면에 EDES는 전직 장교 출신이었던 나폴레온 제르바스(Ναπολέων Ζέρβας) 대령과 동료들이 세운 단체로 주로 그리스 북부 이피로스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카이로의 망명정부에 친화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영국으로부터도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EDES 역시 한때는 EAM의 조직으로 공동 참여를 하려고 했으나 영국과 카이로 망명정부에 대한 태도 문제로 인해 불발되었다. 가급적 손실을 피하고 세력 확대에 골몰하던 EAM과 달리 적극적으로 독일군과의 교전에 임한 것도 영국 측의 호의를 샀다.

위의 두 집단은 협력적인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1942년의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 작전에서 ELAS 조직원 115명과 EDES 45명, 영국 SOE 요원 4명이 참여하여 철교를 폭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EAM은 피해가 큰 직접 타격 요구를 회피하다가 EDES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영국의 지원 감소를 우려해 뒤늦게 작전 참가를 요청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1943년에 수행된 동물 작전(Operation Aminals)에서도 두 조직은 영국과 함께 협력하여 독일군을 오판하게 만들면서 연합군의 이탈리아 공격에 대한 기만작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독일의 그리스 철수가 가시화된 1943년 중반부터 전후 그리스의 향방을 놓고 EAM과 여타 저항단체들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1943년 10월 9일 ELAS가 EDES의 북부 이피로스 거점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면서 그리스는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EDES는 우월한 장교단의 질을 활용해 초기 하천 방어선 구축에 성공했지만 1944년 1월 경에는 EAM의 물량 공세에 밀려 궤멸 위기에 놓인 채 북부 이피로스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규모 면에서 제3위의 저항조직이었던 국민사회해방운동(ΕΚΚΑ, EKKA)은 EAM의 공격으로 아예 조직 자체가 소멸했고 그 수장인 디미트리오스 프사로스(Δημήτριος Ψαρρός) 대령 역시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처럼 경쟁 단체를 모조리 무력화하거나 제거 혹은 흡수한 EAM-ELAS는 1944년 시점에서 전투 병력 50,000명, 지원 조직원 500,000명의 공룡 조직으로 몸집을 불린 뒤 1944년 3월 그리스 산악 지역에 국민해방정치위원회(ΠΕΕΑ, PEEA)라는 이름의 임시정부를 세워 그리스 국왕과 그의 카이로 망명정부를 무효화했다. 이미 독일군의 세계 대전 패배가 목전으로 다가온 시점이니 이후 벌어질 정권 쟁탈전에 대비해 미리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때 그리스 저항조직들이 받아먹은 지원물자로 추축군 대신 자기들끼리 죽여대는 꼴을 보다 못한 물주 영국과 소련이 개입했다. 이후 망명정부, EAM, 여타 저항단체는 상호 교전을 중지하고 망명정부에 EAM이 참가하는 연립내각을 구성한다는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간신히 사실상의 내전이 소강 상태에 도달했다. 물론 이 상태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모든 이들의 눈에 자명했다.

1944년 5월 영국소련전후 발칸 반도 분할에 관해 논의한 끝에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세력권에, 그리스는 영국의 영향권 아래 둔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 퍼센트 합의에 따라 1944년 8월 EAM 본부로 파견된 소련 고문단은 영국 당국에게 협조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미 그리스 최대의 무장조직으로 떠오른 EAM-ELAS는 소련 고문단의 지령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대신 1944년 9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해 주둔 중이던 친독 보안대대들 대다수를 섬멸하고 해당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이피로스 북서부의 EDES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넣었다. 뒤이어 1944년 10월에는 철수를 시작한 독일군의 물자를 곳곳에서 탈취하여 정규전을 벌일 물적 기반까지 구축했다.


4. 제1차 그리스 내전[편집]


그리스가 추축국에 점령된 뒤부터 해방될 때까지 영국의 그리스 정책은 크게 2가지 원칙으로 구분된다. 첫째, 그리스 국왕과 망명정부는 그리스 국가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 둘째, 영국은 전쟁 시기에 그리스에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승인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은 그리스에 주둔한 독일군을 저지하고 타격을 입히기 위해 그리스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릴라 조직을 활용하는 군사적 편의주의와 전후 그리스를 영국의 영향권 안에 포함시키려는 정치적 아젠다 사이에서 정책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전후 그리스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해 그리스 국민들의 비난을 받는 국왕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p.118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하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그리스 망명정부는 영국군과 함께 아테네로 입성해 EAM과 EDES, 왕당파를 아우르는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연립 정부의 당면 과제는 공식적인 정규군 구성이었는데 EAM-ELAS,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 공산당은 자신들의 최대 권력기반이었던 ELAS에 대한 통제권을 순순히 내줄 생각이 없었다.

1944년 12월 1일 그리스 연립 정부와 영국군의 스코비 장군은 ELAS를 12월 10일까지 해산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EAM의 불만은 망명정부의 군대였던 신성대대 및 제3산악여단은 무장해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에 있었다. EAM은 양측 전체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12월 3일 아테네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총격으로 충돌이 시작되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데켐브리아나(Δεκεμβριανά, Dekemvriana)의 시작이었다. 경찰의 선제 사격이라는 명분까지 얻어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진 EAM-ELAS는 12월 3일 아테네에 3개 사단을 투입해 1개 보병여단과 1개 특공대대 규모의 자유 그리스군에 기반한 정부군을 가볍게 밀어내고 시가지 대부분을 점령했다. 제1차 그리스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EAM-ELAS는 그리스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반응은 신속했다. 12월 5일 이탈리아에서 2개 영국령 인도군 여단을 긴급 공수받은 영국군은 보급품과 증원부대가 들어올 아테네 시가지 활주로를 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버텨냈고, 12월 10일까지 이탈리아에 주둔중이던 제4인도보병사단 전체를 추가로 전개시키면서 형세를 역전시켰다. 그리스 정부 역시 구 친독 보안대대 구성원들을 사면하고 정규군에 편입하여 전력을 보강한 뒤 반격에 돌입했다. 격렬한 시가전이 12월 내내 이어졌지만 영국군-그리스 정부군은 수적 우위와 항공 지원에 힘입어 1월 초까지 EAM-ELAS를 아테네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로 인해 미국에서도 그리스의 분쟁 상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영국 언론사 보도에서도 게릴라와 영국군이 나란히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려를 표했다. 이와 같은 사태에 큰 위기감을 느낀 처칠은 직접 그리스까지 가게 되었다. 처칠의 방문과 EAM의 아테네에서의 패배로 인해 1945년 1월 15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ELAS는 파트라테살로니키에서 철수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동원을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EAM의 명백한 패배였다.

전면적인 군사 공격으로 아테네 시가전을 촉발시킨 것도 모자라 도무지 변명할 길이 없는 참패를 당한 EAM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민투쟁보호단(OPLA)을 비롯한 산하 공산주의 계열 단체가 ULEN 정제소 일대와 페네오스 마을에서 그리스 정부 지지자들을 친독 부역자, 반동분자로 몰아 각각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은 그리스 대중의 반공 정서에 기름을 끼얹었다. EAM을 주도하던 그리스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급격한 하락을 면치 못했고 영향력 있는 비공산 계열 참가 단체 대부분은 아예 탈퇴를 결정했다. 이 시점에서 EAM은 정치적 진영을 막론한 범그리스적 저항조직이라는 허울마저 상실하고 그리스 공산당(KKE)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5. 제2차 그리스 내전[6][편집]


1945년 2월 바르키자 협정 체결의 영향으로 좌파 세력들에 대한 테러와 박해가 시작되었다. 좌파는 12월 봉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바르키자 협정 이후 나타난 정부-우파 연합 세력의 백색테러는 틸리가 말한 바와 같이 집권층이 질서의 이름으로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p.183


제1차 내전 후 1945년 2월 12일에 열린 회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EAM-ELAS를 해산하는 대신 그리스 공산당이 그리스에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합의를 맺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키사 협정이었다. 그러나 1차 내전 종결 직후부터 X단을 비롯한 친정부 극우 테러 단체들이 백색테러고문을 저질러댄 탓에 우익 정부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이 고조되었다. 1945년 연말까지 이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만 1,200명에 가까웠다. 특히 X단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온건 공화파를 비롯한 메탁사스 독재정권의 소극적 반대파까지 테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치안을 맡아야 할 그리스 정부군은 이를 방관했는데 장교단이 왕당파 아니면 EAM-ELAS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던 EDES 출신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1945년 12월 백색테러에 무력으로 대응할 필요성에 합의한 그리스 공산당(KKE)은 1946년 2월 1차 내전 패배 직후 북부 산악지대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빼돌려둔 구 EAM-ELAS 병력과 물자를 주축으로 그리스 민주군(DSE)을 창설했다. 소련이 발칸반도흑해 연안으로 남하하고 소련과 서방 국가 사이의 관계도 악화되는 징후가 뚜렷해지자 공산 진영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리스 공산당은 1946년 3월 31일의 그리스 총선 보이콧과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선거 바로 전날 밤 그리스 민주군의 소규모 분견대가 올림포스 산 인근의 작은 경찰서를 습격했다. 제2차 그리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마르코스 바피아디스 장군이 지휘하는 그리스 민주군은 1946년 여름 내내 고립된 전진 초소들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46년 12월에는 북부 그리스 대부분과 그리스의 산지가 20,000명이 넘는 규모로 불어난 공산 파르티잔의 손에 떨어졌다. 불어난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보급품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 인접 공산국가에서 지원하기로 합의되었다. 당시 그리스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의 지속으로 엉망진창었다. 그리스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더없이 호의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한편 그리스 정부의 뒷배 역할을 하던 영국은 호전될 기미가 없었던 경제 사정과 식민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분쟁들 때문에 그리스를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7] 1947년 2월 영국은 더 이상 그리스 원조 프로그램을 감당할 수 없다며 미국에게 통보했고 이전부터 소련의 발칸반도 정책을 의심스럽게 지켜보던 트루먼 행정부는 거리낌 없이 이 문제를 떠맡기로 결정했다. 1947년 3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튀르키예와 그리스에 대한 대규모 원조 프로그램 실시를 본격화했다.

원조 초기 미국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물적 지원에 한정했다. 경제가 원 궤도로 복귀하고 그리스 정부군에 충분한 장비가 갖춰진다면 공산 게릴라 정도야 자체 역량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육군은 1947년 차관과 공여를 합쳐 1억불이 넘는 물자 지원을 받았음에도 한 해 내내 졸전을 거듭하며 밀리기만 했고 특히 알바니아 국경 지대는 숫제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1947년 5월 24일 그리스에 도착했으며, 단장인 대리 레너 대령의 지휘 아래 그리스 육군과 공군, 헌병대의 장비 필요성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이들은 군인 40명과 민간인 2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1948년부터는 제임스 밴 플리트가 마셜에 의해 그리스 주재 미국 군사고문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고문단의 숫자는 밴 플리트 도착 7개월 만인 9월 말에 이르러 450명에 이르렀다.

1946년에서 1947년 겨울 군과 헌병을 포함한 정부군은 전체 165,000명인 반면 게릴라 세력은 28,000명으로 추정되었다. 게릴라들의 경우 산간지대에 의존했는데 지형이 험준해 정부군의 접근이 어려웠다. 산간마을들은 주민수가 50~2,000명으로 규모가 작았고 수풀이 무성한 계곡에 위치해 외부인들이 쉽게 근접할 수 없어 게릴라들의 근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그리스 정부군은 영국과 미국 군사 전문가들의 조언 속에 그리스 민주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공격계획을 작성했으며 이들은 북부 테살리의 민주군을 소탕하고, 이어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경선을 따라 산간 요새를 섬멸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정부군은 민주군 동조자로 의심되는 수천여 명의 민간인들을 무차별 체포하는 한편 산간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소개시켰다.[8]

1947년 말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북쪽 산악지대에 임시정부를 세웠고 아테네의 그리스 정부는 이를 막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아직 서구권과의 관계를 끝장내고 싶지는 않아 얄타 회담에서 그리스를 서구의 영향권에 두기로 한 것을 인정하고 코민테른이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9] 여기에 스탈린의 지령에 사사건건 반발하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의 갈등이 터지자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를 코민테른에서 제명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 공산당(KKE)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대부분의 지원을 담당하던 유고슬라비아 중 누구의 손을 잡을지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KKE는 소련의 손을 잡아 내부의 "티토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KKE는 바피아디스 같은 게릴라전 전문가들이 "티토주의자"라는 이유로 출당당하는 등[10][11] 전력을 스스로 깎아먹으며 내부 분열에 빠졌고 분노한 티토에 의해 지원도 끊기면서 물자 부족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948년부터는 미국이 단순 물자 지원을 넘어 그리스군의 작전 및 교육 훈련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250명으로 구성된 제임스 밴 플리트 휘하의 소수 고문단이 그리스 정부군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장교단의 질적 문제와 쿠데타 우려로 인한 제약으로 적극성이 결여된 오합지졸이던 그리스군은 이제는 일선 소부대까지 '조언'하기 위해 내려오는 미군 고문관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특히 새로 부임한 군사고문단의 단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 육군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에게 공격성이 결여돼 있다고 질타하면서 대담한 공격과 적극적인 추격을 주문했다. 1948년 겨울 양측의 교전이 중단되는 동계 기간 동안 그리스군에게 빡센 교육 훈련 커리큘럼을 소화하라는 지시도 하달했다. 여기에 그리스군의 대규모 확충 역시 이루어졌다.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의 지원 사격도 가세했다. 독일군의 침공 이전까지 이탈리아군을 잘 막아내 명성이 높았던 파파고스 장군의 밴 플리트 지지는 미군의 작전 간섭에 반감을 품은 그리스 장교단 내에서도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졌다.

《세계 게릴라전사》의 저자인 로버트 에스프레이에 따르면 미국이 지원한 그리스 정규군은 23,000명 규모의 ELAS쪽 게릴라를 쉽게 이겼어야만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각 지방 수비대의 방어태세가 개선되어 게릴라측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정부군의 대규모 수색 및 소탕 작전은 제한된 성과 밖에 거두지 못했다. 1948년 6월의 정부군 40,000명이 그라모스 산맥에 있는 8,000여 명의 게릴라를 공격했다. 2개월 간의 전투에서 정부 측은 8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5,000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 반면 게릴라측은 3,000명이 전사하고 6,000명이 부상당했으며 589명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주장했으나, 마르코스 바피아디스가 이끄는 13,000명의 게릴라 병력은 50,000명의 그리스 정부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상당한 희생을 치른 끝에 정부군을 물리쳤다.[12]

그와 동시에 1947년 가을부터 그리스 정부는 좌파에 대한 색출 공작을 감행했는데 이에 대해 아래의 내용을 보자.

1947년 가을에 그리스 정부는 미국 측의 강력한 재촉에 의해 공산분자의 검거를 재개했다. 정부의 조치에는 '전면적' 징집과 좌익 및 공산분자의 영구적 구금 등이 포함되었다. 경찰은 공산계 신문사들을 폐쇄하고, 공산주의 혐의자들을 공직에서 숙청하는 한편 근로자의 파업권을 폐지했다. 이러한 억압 정책은 그해 겨울 동안 계속되었다. 2월에는 공산주의자 65명을 공개 처형했다. 5월에 들어 공산 테러 분자들이 아테네에서 법무상을 살해하자 정부측은 피비린내나는 보복을 가했다. 이 보복은 너무나도 가혹하여 영국과 미국조차도 항의했을 정도였다.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 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p.101

그리스 정부는 민간 부문에서도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복 활동 혐의자 체포를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기소하거나 처형했는데 1948년 2월 7일에는 29명이 총살되었고, 2월 22일에는 19명이 총살되었다. 3월 1일에는 그리스 해군 60명이 전복 음모로 체포되었으며, 3월 13일에는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2명과 《리조스파티스》 편집장을 포함한 공산주의자 14명이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우익 경찰도 아테네, 피래우스, 테살로니키의 공산주의 세포들을 와해시키고, 2월에는 남부 지방의 지하에서 활동 중이던 세포 200여 명을 체포했다.[13] UP통신은 그리스 정부가 5월 5일 그리스 전역에서 '데켐브리아나'와 관련된 살인 혐의자 152명을 처형했다고 보도했는데 아테네에서 24명, 에기나 섬에서 37명, 라미아에서 12명, 테살로니키에서 23명을 처형했고, 나머지는 칼키스, 트리폴리스, 스파르타, 칼라마타에서 처형했다고 밝혔다.[14]

미군이 지원한 네이팜탄도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냈다.

밴 플리트는 5월 초부터 민주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그리스군 일반 참모부 및 합동군사고문단 참모진과 함께 민주군의 근거지인 북부 지방의 그람모스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크라운 작전(Operation Crown)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그람모스 북동서쪽의 세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그리스 정부군이 시도한 최대 규모의 공세작전이었다. 그람모스는 현지 주민들도 꺼리는 험준한 산악지역이었다. 알바니아와 인접한 그람모스 지역은 해발 1,300~2,000m 높이의 고봉으로 이뤄졌으며, 암석과 산림이 무성한 급경사 지형이었다. 민주군은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렀다. 그리스 정부군은 6월 초 민주군의 후방을 분쇄하기 위해 그람모스 산악지대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전개했다. 그리스 공군은 6월 20일 그람모스 산악지대의 민주군 집결지에 처음으로 미국의 네이팜탄을 사용했는데, 내전 지역에서 네이팜탄의 사용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 사절단은 심지어 네이팜탄 사용으로 인해 민주군과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의 이런 선전활동에 흔들리면 치명적이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네이팜탄의 희생자들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7

1948년 봄이 되자 그리스 정부군은 132,000명의 병력과 각종 포 및 장갑차, 2개 비행편대 등을 소유하게 되었고 국가경비대도 50,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5월에 이르러 그리스 정부군은 공군이 6,500명에서 7,200명으로, 해군은 13,000명에서 14,300명으로, 나머지 15,000명은 육군에서의 증강이 허용되어 전체 병력이 168,000명으로 늘어났다.

아무튼 트루먼 행정부가 보낸 제임스 밴 플리트의 진두지휘 아래 그리스군의 전력 확충과 엄격한 교육훈련, 장교단의 질적 향상이 본궤도에 오르자 드디어 일선에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9년 초 겨울에서 봄부터 그리스군은 연이은 산악지대 포위 및 소탕 작전을 펼치면서 매번 수천 명 단위의 사살 및 포로 획득 전과를 올렸고 내부에서 분열한 데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의 지원도 끊긴 그리스 민주군은 정부군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 해가 가기 전에 붕괴되었다. 그리스 정부군은 1949년 1월 19일 공식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수색작전의 기초가 될 비둘기 작전(Operation Pigeon)을 앞두고 게릴라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밴 플리트는

게릴라전에서 정부는 적 동조세력으로 의심받고 있는 사람에 관한 한 군인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

고 주장했다. 아무튼 그리스 정부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게릴라 부대와 싸우는 동안 일부 군 지휘관들은 미군의 장비를 그리스 공산당에 넘겼고 그들에게 누가 공산주의자인지를 결정할 심판권과 처리권을 주었다. 1949년 2월 11일 3,000명 이상의 게릴라들이 플로니라를 기습해 북쪽 고지를 점령했지만 정부군은 공군의 지원과 함께 인근 지역의 탱크 및 장갑차 등을 동원해 반격했다. 이 전투에서 최소 500명 이상의 게릴라가 전사하고, 35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결과적으로 민주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상실한 뒤 비치 지역으로 퇴각했다.[15]

1949년 9월 정부군은 공산당 임시정부의 소재지였던 그라모스산을 함락시켰고 그해 10월 16일 그리스 공산당 방송국은

"그리스의 완전한 파탄을 막기 위한 일시적인 휴전"

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패전 선언을 하면서 제2차 내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949년 10월부터 1950년 사이 게릴라들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밴 플리트는 1950년 5월 2일 워싱턴에

'게릴라의 총인원은 500여 명 이하의 소규모 집단이며, 생존이 유일한 목적일 정도로 그들의 환경은 열악하다.'

고 보고했다. 패전 이후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웃나라인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으로 도망쳤다. 또 내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뒤 소련 선박들이 알바니아 항구로 들어왔고 민주군의 잔여 병력을 태웠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소련의 오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6. 영향[편집]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간 치뤄진 내전으로 100,000~150,000명이 사망하고 최소 800,000명에서 1,000,000명의 그리스인이 난민으로 전락하는 대재앙이 일어났다.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페허가 된 그리스는 이 내전으로 기둥 뿌리까지 파괴되어 버렸다.

냉전 시대 군사 대립의 시작을 연 전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미군이 그리스군에 제공한 네이팜탄이 전장에서 사용되는 등 훗날의 6.25 전쟁베트남 전쟁을 연상하게 만드는 광경이 여럿 등장하기도 했다. 역사상 최초의 네이팜탄 사용이 이뤄진 전쟁이 그리스 내전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실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이미 사용되었으며, 유럽 전선에서도 독일군 점령지역 폭격에 사용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제1세계 진영은 그리스 내전의 승리로 발칸 반도 전체의 공산화와 공산주의 세력의 지중해 진출을 막을 수 있었으며, 제2세계 진영은 제1세계 국가인 튀르키예가 막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 대신 그리스아드리아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했으나 내전의 패배로 인해 지중해 진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그리스 정부는 종전 1년 후인 1950년6.25 전쟁이 벌어지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또 내전의 원흉 취급을 받게 된 그리스 공산당은 바로 불법화되었다. 이후 기존의 공산당 지지자들은 연합민주좌파를 지지하였고, 일부 전직 그리스 공산당원들도 참여하였다. 불법화 조치는 1974년에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면서 해제되었으며 그리스 공산당은 1974년 총선에서 연합좌파에 참여해서 5석의 의석을 얻고 원내정당이 되었다. 1981년에는 내전으로 그리스를 떠난 이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귀국을 허용하면서 아직 생존해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로 귀국했다.

한편으로 내전은 그리스 북부에 살던 소수민족들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차지한 그리스 북부를 자국민이 살고 있는 엄연한 자국 영토로 인식했지만 사실 그리스 북부는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슬라브계 마케도니아인은 물론, 알바니아인, 아로마니아인[16], 포마크인, 튀르키예인 등 다른 민족들도 많이 거주했다. 전간기 그리스 정부는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 동화를 시도했는데 이 때문에 소수민족들은 그리스 정부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래서 이들은 민족 자결을 주장한 그리스 공산당에 대거 가담했는데 특히 집중적인 박해 대상이었던 마케도니아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가뜩이나 소수민족들 꼴보기도 싫은데 "빨갱이"라는 좋은 명분이 생긴 그리스 정부군은 인정사정 볼 거 없이 소수민족 거주지역들을 초토화시켰고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유고슬라비아나 알바니아 및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후 그리스에 남은 소수민족들은 "공산당 부역자"라는 혐의로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1981년의 사면령 당시에도 그리스 정부는 귀국 허용 대상을 "그리스인 혈통"으로 한정하고 비그리스계 소수민족들의 귀향은 불허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7. 같이 보기[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영어로 'The Civil War' 정도로 직역될 수 있다.[2] 흔히 '그리스 내전'이라고 하면 이 제2차 내전을 말한다.[3] 당시 그리스 공산당에는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로 이주하여 '튀르키예인' 취급받으면서 겉돌던 그리스인들이 대거 참여했다.[4] 아이러니한 사실은 메탁사스가 이탈리아 왕국군의 침공을 받기 전까지 추축국에 우호적인 친독 성향의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무솔리니가 쓸데없이 판을 벌리는 바람에 알아서 적을 하나 더 만들어 버린 것이다.[5] 《그리스와 제주, 비국의 역사와 그 후》 p.100[6] 흔히 '그리스 내전'이라고 하면 이 제2차 내전을 말한다.[7] 클레멘트 애틀리영국 노동당 정부는 전후 대규모 군축을 실시했다.[8]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3[9] 물론 소련이 그리스 공산당을 아예 지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KKE와 DSE에게 10만 달러와 60개의 대포를 지원했다. 관련 문서[10] 바피아디스 등 "티토주의자"라는 이유로 숙청당한 이들은 정규전으로는 당연히 정부군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게릴라전으로 노선을 정하여 성과를 내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련에서 꿀이나 빤 덕분에 현실 파악도 못 하고 정규전을 요구하던 KKE 지도부와 갈등이 심했다.[11] 여담으로 바피아디스는 출당 후 다시 복귀했으나 1964년에 2번째로 출당당했고 결국 공산주의를 버린 후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지지자가 되었다.[12]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 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p.100~101[13]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3[14]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4[15]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p.258[16] 루마니아인과 근연관계인 동로망스어군에 속한 소수민족으로 종교도 정교회임에도 발칸 지역에서 어느 나라에도 동화하지 않아 시달림을 받아 왔다. 2020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가 300,000명 정도이며 그리스에 40,000명~100,000명이 거주하여 가장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