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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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튀르키예의 키프로스 침공
Τουρκική εισβολή στην Κύπρο, Η Τουρκική εισβολή στην Κύπρο το 1974
Kıbrıs Harekâtı, Kıbrıs Barış Harekâtı

Turkish invasion of Cyprus

키프로스 문제의 일부
파일:external/www.kypros.org/pente_mili_apovasi_pezikou_500_bg.gif
키프로스 섬에 상륙하는 튀르키예군
기간
1974년 7월 20일 ~ 8월 14일
장소
키프로스
원인
그리스계 키프로스 주민과 튀르크계 키프로스 주민의 갈등
1974년 키프로스 쿠데타
교전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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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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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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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군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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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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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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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 저항 조직
지휘관
파일:키프로스 국기.svg Glafcos Clerides
파일:그리스 군사정권 국기.svg Dimitrios Ioannidis
파일:그리스 군사정권 국기.svg Phaedon Gizikis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파흐리 코루튀르크
영향
키프로스의 분단국가
그리스 군사정권의 붕괴
피해규모
파일:키프로스 국기.svg 키프로스
군인
* 309명 전사
파일:그리스 군사정권 국기.svg 그리스
군인
* 105명 전사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군인
* 498명 전사
파일:Türk_Mukavemet_Teşkilatı.png 튀르크 저항 조직
저항 조직원
*70명 전사
파일:UN기.svg UNFICYP
군인
*9명 전사
*65명 부상

1. 개요
2. 전개 과정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74년 튀르키예키프로스 문제에 개입하면서 튀르키예와 키프로스, 그리스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 튀르키예 측 명칭은 Kıbrıs Barış Harekâtı(키프로스 평화작전)이다.


2. 전개 과정[편집]


튀르키예그리스는 서로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지만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양국은 앙숙 그 자체였는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그리스인들을 400여년 동안 지배한 것이 바로 튀르크족이 세운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었고 근대 그리스 역사의 시작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왕국이 건국된 것부터였다. 독립 이후에도 양국은 제1차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여러 차례 충돌을 빚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 시절 고토를 회복한다는 미명 하에 튀르키예와 소위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벌이는 등 적대적 관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서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동유럽발칸반도를 적화시키는데 성공한 소련이 그리스와 튀르키예도 적화시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오랜 앙숙으로 대립하던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소련과 이웃의 공산권 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반공 동맹국이 되었고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는 등 두 나라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을 견제하게 됐다. 하지만 냉전이 한창인 1950년대와 60년대에도 양국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냉전 시대가 개막된 후에도 여러 차례 대립하던 그리스-튀르키예 관계는 1960년 키프로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본래 키프로스 섬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식민 정착을 하면서 전통적으로 그리스의 영역이었으나 16세기 쉴레이만 1세 시절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함에 따라 튀르키예인들이 이주해 와 정착하면서 독립 무렵에는 튀르키예인 인구가 15%, 그리스인 85%정도를 차지하였다. 식민지 시절에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은 독립이 아닌 그리스로의 편입을 원했지만 튀르키예계의 반발도 적지 않아 결국 독립하면서[1]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다수를 구성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사실상 소수민족인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들을 억누르면서 분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 사이에 민족 분쟁은 그리스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을 지원하고 튀르키예가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들을 지원하면서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대리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키프로스 문제는 1967년에 벌어진 키프로스 내 튀르키예계와 그리스계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지면서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에 전면전 가능성까지 고조되면서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1974년 7월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키프로스군 장교들이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튀르키예계와 그리스계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려던 마카리오스 3세(Γ' Μακαριος) 대통령을 몰아내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 반란군은 친그리스 성향의 니코스 삼프손(Νίκος Σαμψών)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였다.

결국 이러한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는 인접한 튀르키예를 자극해 파흐리 코루튀르크(Fahri Korutürk) 당시 튀르키예 대통령은 런던 조약에 근거한 개입 명분 및 쿠데타로 인해 실각한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 정부의 수복[2], 그리고 키프로스 내 튀르키예계 주민들의 보호를 명목으로 키프로스 제압을 명령하면서 튀르키예군 병력이 곧바로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튀르키예는 튀르키예계 보호라는 명분으로 7월 20일 파병을 시작했다. 한편 튀르키예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자 그리스계 키프로스 반란군 세력들도 튀르키예군의 침공에 맞서 저항하였다. 그리스 역시 그리스계 키프로스 반란군 세력들을 지원하고자 공군과 해군을 파견하면서 키프로스는 튀르키예와 그리스, 키프로스 간 전쟁터로 돌변하였다. 한편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자체적 민병대를 조직해 침공 튀르키예군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계를 공격하였고 이에 그리스계 주민들도 민병대를 만들어 튀르키예계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복잡해졌다.

키프로스에 상륙한 튀르키예군 50연대는 M47 전차와 M113 장갑차로 이루어진 기계화부대였고 이보다 구세대의 장비를 운용하는 키프로스군의 T-34-85BTR-152는 상대가 되지 않았은 것처럼 보였지만... 키프로스군 T-34 전차들이 M47 전차를 상대로 분전해 동급의 피해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키프로스군은 그리스의 안전보장을 굳게 믿었고 장비를 현대화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덕에 결국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키프로스 반란군은 소련제 3M6 쉬멜(AT-1) 대전차 미사일로 튀르키예군 전차를 공격했지만 튀르키예군에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튀르키예 공군이 키프로스의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그나마 구식 장비로 한줌의 기계화부대를 운용하던 키프로스군은 폭격에 장비들이 망가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시작 이틀째가 되자 튀르키예군의 39보병사단이 상륙했고 이제 튀르키예군은 양과 질 모두에서 키프로스군을 앞서게 되었다. 튀르키예군은 키프로스 북부 전역과 니코시아 일부 지역을 장악하였고 키프로스군은 패퇴에 패퇴를 거듭하여 남부로 후퇴하였다. 키프로스군이 아군으로서 도우려던 그리스군 특공대가 탑승한 수송기를 오발로 격추시켜 33명의 그리스군 특공대원이 산화한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키프로스 측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한편 튀르키예도 오발 사고가 빈번했는데 상륙 과정에서 튀르키예군이 그리스군으로 착각하고 오인사격하는 바람에 튀르키예군 50연대장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던가 그리스 해군이 키프로스로 병력과 장비를 수송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달받아 키프로스 인근 해역에 매복 중이던 튀르키예 해군기어링급 구축함 전대를 그리스 해군으로 착각한 튀르키예 공군이 공격해[3] TCG 코자테페(TCG Kocatepe)가 침몰해 다른 두 척은 큰 피해를 입고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4] 그럼에도 튀르키예군은 그리스-키프로스 연합군을 압도했고 튀르키예는 영국군이 파병한 아야 나파 지역을 제외한 곳을 재빠르게 장악했다. 이와중에 3600명에 달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들은 약 6백명 정도가 사망 및 행방불명되었다.

이전에 튀르키예군의 침공을 두고 그리스나 키프로스 측은 튀르키예군 따위는 자발적인 시민군으로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헛소리였다. 그 시민군은 튀르키예군의 초반 폭격으로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기자 당황하여 달아나는데 급급했다. 무장과 병력 수 등 모든 것에서 불리한 일개 시민군이 튀르키예군을 막을 순 없었다. 부랴부랴 미국과 유럽이 중재하여 튀르키예군이 일부 물러났으나 튀르키예군이 침공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74년 8월 18일 튀르키예군은 키레니아 구 전역과 영국군이 파병한 최남단 일대를 제외한 파마구스타 구 전역, 니코시아 구 북부(키프로스 전 국토의 약 36.2%)를 장악했다. 키프로스는 키프로스 정부와 그리스군, 그리스계 민병대가 장악한 남부와 튀르키예군 및 튀르키예계 민병대가 장악한 북부로 완전히 동강났으며 더욱이 막강한 튀르키예군의 공세에 키프로스 그리스계 반란군 세력 지원에 나섰던 그리스군도 그리스 본국 이지키스 군사 정권의 명령을 거부하고[5] 키프로스에서 병력을 철수하면서 키프로스 전쟁은 튀르키예군의 완전한 승리로 종료되었다.

결국 이 전쟁은 그리스와 튀르키예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스는 이 전쟁에서의 군사적 패배로 키프로스 분쟁에 개입하였던 이오아니디스 군사 정권이 붕괴되어 민주화 달성의 주요 계기가 되었다. 친그리스파 극우 테러의 단체 중역이었던 니코스 삼프손(1935.12.16~2001.5.9) 키프로스 대통령도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재임 1년도 안 되어 사임해야 했으며 극우 단체를 이끌고 튀르키예계 말고도 좌익 세력에 행한 테러 혐의 및 권력 남용으로 구속된 후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프랑스로 튀었다가 1990년에 돌아와 3년만에 가석방되어 조용히 살아갔다.

반대로 튀르키예는 키프로스 전쟁 개입의 성공으로 군부 세력들의 힘이 차츰 강해져 6년 뒤인 1980년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 정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군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국제사회는 튀르키예를 비난했으며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에 대한 제재 조치는 물론이고 미국은 튀르키예에 대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무기금수조치를 단행했다. 튀르키예군이 운용하던 대다수의 군사장비가 미국제였던 상황에서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튀르키예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조치였다. 비록 이란 혁명으로 친미 정권이 몰락하면서 다시금 튀르키예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미국의 금수제재는 해제되긴 했지만 튀르키예에게 자극을 주긴 충분했던 조치였고 이후 튀르키예는 방위산업을 육성하게 되었다.

한편 분단된 키프로스의 북부에는 튀르키예의 지원으로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Kuzey Kıbrıs Türk Cumhuriyeti)이 들어섰고 결국 다시 복권된 마카리오스 3세가 다시금 양측간의 중재를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결국 현재까지 키프로스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 2004년에 남북통일 투표를 한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리스계가 반대해서 결국 좌절되었다. 다만 한국과 달리 남북키프로스의 주민들은 상호 왕래가 가능하며 남키프로스에서 일하는 북키프로스 주민도 많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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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 당시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과 튀르키예, 그리스 3국은 런던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키프로스를 그리스와 튀르키예 양국이 후원하며 만약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질 경우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중재하는 것을 약속했다. 실제로 전쟁 당시 양국의 개입 명분이 바로 런던 조약이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양측 민족주의자들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2] 이 부분은 남북키프로스의 입장이 엇갈린다. 남키프로스에서는 당시 마카리오스 3세가 튀르키예에 군사개입을 요청했음은 인정하지만 이로인한 개입은 1차 전쟁만이고 이후는 명분이 없다고 주장하고 튀르키예는 마카리오스가 복권될때까지 해당 명분은 유효하다고 주장한다.[3] 당시 그리스도 친미 국가라 튀르키예와 마찬가지로 기어링급 구축함을 운용했기 때문에 오인하기 쉬웠다.[4]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작 튀르키예 해군이 노리던 그리스 해군은 사실 키프로스가 아니라 로도스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 더 골때리는 건 튀르키예군 정찰기가 정찰로 그걸 파악하고 상부에 보고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찰 보고가 하부부대로는 전파가 안 됐고 문제의 해역에서 튀르키예 국기를 단 함정을 발견해 당황한 튀르키예군 파일럿들이 상부에 확인을 요청해 왔고 정찰 보고를 받지 못한 작전사령부는 해군으로부터 "해당 해역에 아군 함정은 없다"는 답변을 듣자 "쟤들은 튀르키예군 행세를 하는 그리스 놈들이니 그냥 공격해라"(...)고 명령했다. 난데없이 아군의 공습을 두드려 맞기 시작한 튀르키예군 함정들은 다급하게 공습 중단 무전을 보냈지만 공군은 "닥쳐라 그리스 놈들아"로 일관하며 그걸 씹었고(...) 그렇게 튀르키예군 함정들은 장장 5시간 동안 아군한테 두들겨 맞았다.[5] 애당초 전쟁에서 질 게 뻔해서 그렇다. 물론 튀르키예가 그리스로 직접 쳐들어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결사 항전했겠지만 이 시점의 튀르키예는 키프로스 장악 이상으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