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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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현
2.1. 문헌에서의 단군 신화
2.2.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고학에서의 시각
2.3. 기원전 10세기~8세기, 요서 조양설
2.4. 기원전 6세기~4세기, 선양설
2.4.1. 평양 팽이형 토기 문화
4. 기자조선설
7. ·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
8.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
9. 준왕의 남하
10. 멸망이 미친 영향


1. 개요[편집]



고조선의 역사를 정리하는 문서.

2. 출현[편집]


고조선의 멸망이 기원전 108년이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지만[1]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강역 논란과 함께 고조선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논란이다. 이것에 따라 한국사의 길이 자체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2] 전통시대에는 기원전 2333년 무렵 건국되었다고 전하는 단군조선과 기원전 12세기 무렵 동래한 기자조선을 모두 조상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의 나이가 1,908세인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서거정이 '나이가 아니라 연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등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학설은 없었다. 이는 고고학이란 학문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역사서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에야 비로소 현대 역사학적으로 고조선 연구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고, 지금도 고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고조선은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시기이므로 사실상 고고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2.1. 문헌에서의 단군 신화[편집]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조선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2333년(요임금 재위 25년, 당요 무진년)이지만 이는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며 사서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일단 조선 건국 이전의 기록을 보자면 《고려사》 <백문보전>, 《제왕운기》와 《삼국유사》가 있다. 이들은 각각 건국 년도를 기원전 2361년, 기원전 2333년(무진년), 기원전 2308년 또는 기원전 2284년(경인년 또는 정사년)으로 언급했다.

문헌간 편차가 적어 사실성을 더해주는 듯 싶지만, 사실 이런 주장들은 별다른 근거없이 전부 중국의 요임금 즉위년을 기준으로 더하기 빼기를 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중국에서도 요임금의 즉위년을 두고 이런저런 주장이 많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심지어 요임금과 비교해 60갑자 연도조차 안 맞는다며 불평하고 있다.[3] 거기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500년을 통치하고, 기자에게 넘겨줬다고 나오는데 기자는 기원전 12세기 또는 11세기 사람으로 요임금 시대와의 간격이 1,500년이 안 된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송나라의 소강절이 지은 《황극경세력》에 나오는 <상원갑자법>(上元甲子法)에 근거하여 단군기원(단기)의 시작점을 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단군기원 문서에 나오듯, 이는 고조선의 건국이 과거에는 당요 즉위 25년 뒤요, 지금(조선)의 건국은 명 태조 홍무제 25년 뒤라는 주장에 근거한 듯하다. 일단 근세에도 요임금의 즉위년은 확실한 정설이 없었는데, 크게는 갑진년 또는 무진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유력했다. 이 중 임의로 갑진년을 요임금 원년으로 보고, 25년 뒤인 무진년이라고 서술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요임금의 즉위년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상하다. 당요의 다음 다음 왕인 하나라의 건국자인 우임금은 기원전 2070년에 즉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요•순은 둘이 합쳐서 300년간 다스렸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요임금은 기록상에 90년 이상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고, 순임금도 30여년 재위했다고는 하지만, 300년은 인간의 수명과는 거리가 멀다.[4] 다만 기원전 2070년은 현대 중국에서 추정한 것이고, 전통적으로는 하나라의 우임금이 기원전 2200년 전후에 즉위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기원전 2333년이나 그 비슷한 시기를 이 시기 고조선의 건국 연도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고고학적 고증에 따른 결과가 아니고 그냥 유학 사상과 요임금의 즉위년에 맞춰서 사상적으로 '기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유학에서 성군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요임금의 즉위년을 토대로 여러 갑자법을 도입하여 계산한 가상의 수치에 가깝다.


2.2.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고고학에서의 시각[편집]


일부 학계와 재야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연원에 대해 신석기 문화인 홍산 문화 등을 근거로 삼는다. 일부 재야사학계에서는 흥륭와 문화와 홍산 문화 등을 비롯한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일대의 일련된 신석기 문화들을 모두 고조선의 전신 유적으로 보고, 이를 "고조선 문명"이라 칭하나, 고고학적으로 이들 문화는 이후 고조선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요하 유역의 문화들과 별다른 접점이 없다.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발표된 내몽골 동부 사구지대 퇴적물 분석에 따르면, 기존에 100만 년 동안 사막지대였을 것으로 여겨진 적봉 일대는 12,000년 전쯤부터 4,000년 전 무렵까지 수자원이 풍부하고 깊은 호수와 숲이 존재했으나 약 4,200년 전 무렵(대략 기원전 2200년경)부터 시작된 기후 변화에 의해 사막화됐다고 한다.[5] 이에 따라 그 무렵부터 홍산 문화를 영유하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훗날의 중원 문화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6] 이후 기원전 2200년경을 전후하여 요서 일대에 유입된 사람들[7]은 이전 문화들을 토대로 하가점 하층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그 이전 문화들과의 직접적인 승습관계는 없다. 후술하듯 고조선은 홍산 문화와 그 이전 문화보다는 하가점 하층 문화와 더 관련있다는 것을 볼 때, 만에 하나 홍산 문화와 고조선 사이에 연관성이 있더라도 매우 적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홍산 문화 문서 참조.

다음으로 '기원전 10세기 이전 건국설'의 근거로서 제시된 것은 근래 연대가 조금 올라간 요서 지방의 초기 청동기 문화이자 농경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기원전 22세기[8][9] ~ 기원전 14세기[10], 적봉 일대)가 있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구전되어온 고조선의 건국 연대와 시기적으로 유사하여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필두로 많은 관심을 받은 청동기 문화이다. 대표적으로 서영수 교수는 2008년 하가점 하층 문화의 큰 특징인 산성 유적의 형태가 마치 고구려 산성과 흡사하기 때문에 고조선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이후 위영자 문화(기원전 15세기 ~ 10세기,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그 물질문화가 불연속적으로 승계되는데[11][12], 이후 요서 지방을 남북으로 가르는 큰 산인 노로아호산을 경계로 북쪽은 농경의 흔적이 없어 유목민의 문화(동호의 조상인 산융)로 추정되는 하가점 상층 문화(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7세기[13])가 자리잡고[14][15] 남쪽 조양 지역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는 농경 문화인 십이대영자 문화(기원전 9세기 ~ 기원전 8세기)가 자리잡는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같은 조양 지역의 위영자 문화를 승습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매우 강한데, 분포 지역이 완전히 합치하며, 연대로 봐도 서로 긴밀히 연결될 뿐 아니라 문화의 내포에서도 유사한 요소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16] 따라서 이러한 요서지역 청동기 문화의 승습관계를 따라서 분석한다면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 위영자 문화를 거쳐 십이대영자 문화로 연결되며 발전한 문화를 고조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동쪽의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요령성 심양시 일대) 같은 고조선 중기 문화의 유적에서는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성곽 유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서영수 교수도 언급하였듯 이 때문에 두 시대의 성곽 유적 사이에는 1,000여 년의 공백이 발생한다. 이 계통설이 주요 학설로 인정받으려면 이 긴 시간의 연결고리를 이어줄 더 확실한 유적과 연구 성과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학설의 핵심인 십이대영자 문화는 고조선 문화의 시류로 최근 주장되기는 하나, 후대의 정가와자 유형, 평양 지역의 고조선 후기 문화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역시 의문점이 많다. 이러한 1,500년 수준의 공백을 어찌 메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 가능한 사람이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 오랜 기간을 두고 상당히 다른 형태의 문화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하나의 계통으로 볼 수 있을지의 문제도 남는다.

만약 위의 설을 따를 경우, 《요사》의 일부 기록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고조선과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기자8조지교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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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권49(遼史 卷49)#}}}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38 <지리지>2(遼史卷38地理志2)#}}}

여기서 요나라(거란족)의 발원지가 요서 지역이고, 수도인 상경임황부가 현 적봉시 바린좌기(위치) 일대인 점을 고려하면, 같은 적봉 지역에서 발달한 하가점 하층 문화부터 가까운 조양 지역에서 발달한 위영자/십이대영자 문화를 고조선의 초기 문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에서 발원한 십이대영자 문화가 이후 기원전 6세기경에 고조선의 중기 문화로 여겨지는, 《요사》 <지리지>에서의 '동경요양부'에 해당하는 요하 유역의 정가와자 유형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점도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십이대영자 문화가 정가와자 유형과 남동구 유형으로 분화된 이후에도[17] 중원보다는 예맥 문화권으로 여겨지던 요서 지역에 기원전 4세기 이후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계열 중원 문화가 서서히 유입되는 경향이 나타나다가[18] 고조선-연 전쟁 이후로는 중원 문화가 완전히 잠식하게 되는 점으로 보아, 위 문헌을 근거로 한다면 기원전 4세기 이전에 발달한 정가와자 유형의 형성에 일조한 적봉 일대 및 요서 지역의 일련의 승습되는 문화들(하가점 하층 문화->위영자 문화->십이대영자 문화)을 고조선과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2.3. 기원전 10세기~8세기, 요서 조양설[편집]


최근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기원전 9세기 ~ 8세기경, 발호)를 고조선 문화로 보자는 견해가 고고학계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 비파형동검의 발상지라는 것과 선진적인 문화 그리고 비파형동검, 청동거울(다뉴기하학문경), 부채꼴형도끼가 나오고, 요동의 문화와 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또 이후 등장하는 요동 심양의 정가와자 문화와 연결된다는 것을 근거로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거기에 비파형동검 문화가 요서에서 먼저 발전하여 후대로 갈수록 동쪽으로 그 중심지역이 이동하는 양상을 보이는 점 또한 그 근거가 된다. 초기 1960년대에는 하가점 문화라 하여 (앞의 기원전 10세기 이전 설 참고) 내몽골 ~ 요서 지방의 문화권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저 동호족의 유적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최근 하가점 상층 문화와 십이대영자 문화를 별개의 문화로 주장하며, 고조선의 뿌리가 되는 집단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또한 십이대영자 유적은 동검, 청동거울, 장신구 등 정치적 엘리트 내지는 위계가 뚜렷한 지배자의 존재를 보여주며, 요서 및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계급제 사회의 흔적과 이로 인한 군장국가의 성립을 가정할 수 있는 점이 있어 신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국가로서의 고조선의 원류로 해석되어오고 있다. 다만 소위 십이대영자 문화는 그 분포범위가 매우 좁고, 유적간 분포 밀도도 조밀하지 못한 데다가 질적으로 우수한 유적군이 특정지역에 한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경주 일대만을 점유한 초기의 사로국이나 위례성과 그 근교를 차지하는 데 그친 백제국 등과 비슷한 수준의 도시국가(chiefdom) 단계일 것이다.

한편 요동반도 남단에서도 기원전 7세기 ~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상 무덤 및 누상 무덤에 100명 ~ 200명이 순장되었다는 과거 북한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가 출현에 대한 희망적 시각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덤 주위의 무덤을 순장묘로 생각하던 정황과 달리, 최근에는 순장묘가 아닌 시기차에 따른 무덤 배치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또한 요동반도 지역의 경우, 조양이나 선양의 기존 고조선 추정 유적과는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경략이 추정되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도 그 나름의 독자적 문화권을 이루며 서서히 중국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이 경우 해당 지역은 고조선에 속한 속국과 같은 존재였으며 연나라의 공격 이후 종주국을 바꾼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는 하다.

이에 대해 랴오닝성 일대의 후기 청동기 문화의 변화를 중심으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각 지역 물질 문화 전반에 적용 가능한 시대성이 분명한 유물 등을 기준으로 전기·중기·후기의 3단계로 획기된다.[19] 전기는 기원전 10~9세기의 기간으로, 이 시기 동안 각 지역 물질 문화의 초기 유형이 형성되었다. 중기는 기원전 8~7세기의 기간으로 이 시기 동안 각 지역 물질 문화의 전형이 갖추어졌다. 후기는 기원전 6~4세기의 기간으로, 이 시기 동안 요령의 청동기 문화가 기술적으로 더욱 성숙되었다. 기원전 4세기를 따로 떼어 말기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지역에 따라 후기 청동기 문화가 다시 한 번 새로운 지역 유형으로 변동되었다. 요령 지역 후기 청동기 문화의 전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이 지속적인 문화-간·지역-간 상호 작용을 통해 동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요령 지역이 동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전기 청동기 시대와 위영자 유형기까지만 해도 요서와 요동은 전혀 다른 문화와 상호 작용권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 또한 전기 청동기 시대에는 작은 지역 범위 내에서의 상호 작용 관계망만이 형성되었을 뿐, 요동 전역이 단일한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했다.

요령 지역이 후기 청동기 시대 동질적인 상호 작용권을 형성하게 된 것은 십이대영자 문화의 기술적 우위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중요한 작용을 했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왕팔개자 단계[20], 십이대영자 단계[21], 남동구-정가와자 단계[22]로 획기되고 있다. 앞의 두 단계는 십이대영자 유형(十二臺營子類型), 마지막 단계는 요서 지역의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선양시 중심의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이 형성되어 있었다. 십이대영자 유형기부터 요동·길림성 중부·한반도 지역이 십이대영자 문화의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를 모방하여 지역 형식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호 작용 관계는 기원전 6세기 심양시 일대에 후술할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혹은 정가와자 문화)이 형성되면서 더욱 긴밀해졌다.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의 형성을 계기로 요동 지역에 정가와자 유형을 상위로, 기타 요동의 토착 유형을 하위로 하는 상호 작용 관계망이 형성된 것이다. 이 상호 작용 관계망을 통해 요동 지역의 비파형동검 등이 십이대영자 문화 양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묘제 또한 십이대영자 문화류의 석곽묘와 토광묘가 각 지역의 토착 묘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요동 지역 토착 문화의 지형 또한 변모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쌍방 유형권(雙房類型圈)의 축소와 붕괴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한민족 문화에서 십이대영자 문화가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십이대영자 문화에 대해서는 십이대영자 유형, 정가와자 유형, 송산리 유형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계보가 고조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봄과 동시에, 기원전 6~3세기 초 요서 지역에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으로 대표되는 요서 고조선 연맹체(古朝鮮聯盟體)와 요동 지역에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으로 대표되는 요동 고조선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다가, 요서 고조선 연맹체와 전국연(戰國燕)이 전쟁을 하게 되면서 요동 고조선 연맹체까지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요동 고조선 연맹체의 핵심 주도 집단 일부가 평양(平壤)에 새로운 중심지를 건설하게 되면서 준왕(準王)의 고조선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기도 하다.#

요서 조양설은 '고죽국'이 '조선'이 되었다는 견해와 유사하다. 1973년, 랴오닝성(지금의 요서지방) 카줘현[喀左縣]의 구산[孤山]에서 ‘고죽'(孤竹)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가 발굴되어 고죽국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도 발굴되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와 위치를 둘러싸고 학계의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朝鮮)으로 삼았다'''. 한(漢)이 이를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낙랑, 현도, 대방이라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상(商)왕조가 멸망한 뒤 기자(箕子)가 정착한 곳이 고죽국이고, 이 고죽국이 기자조선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카줘현에서 발굴되었던 '기후'명 청동기는 해당 지역에서만 단독으로 여러 개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국명이 쓰인 복수의 청동 기물들과 함께 1건 만이 발견되었고 중국 내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기후'명 청동기가 주변에 '기'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이나 이주 등으로 인해 우연히 '기후'명 청동기가 입수되었을 가능성을 던져준다. 이에 대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 또한 《수서》<배구전>은 고죽국이 멸망(기원전 664년)한 이후 1,200년이 넘는 시간 뒤에 쓰인 서술이며, 또 고죽국을 고조선에 대응시키는 기록은 여기에서 유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당시 요서 지역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 땅은 원래 중국 땅이었다'는 논리를 날조하려 했던 수나라 지배층의 사고 방식일 수 있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이후, 무려라 등 요서의 고구려 영토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당나라 초기에는 고죽국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한나라의 군현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만이 고구려 정벌론의 근거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는 뚜렷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에 위조되었던 논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2.4. 기원전 6세기~4세기, 선양설[편집]


기원전 7세기까지는 요동에 여러 유형의 문화권이 상존해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가 되면서 정가와자(鄭家窪子)(위치) 유형이라는 새로운 문화권이 요동에 나타나 하나로 아우르기 시작했다. 원래 요동은 이질성이 강한 문화 집단이 여럿 존재했으나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200년에 걸쳐 정가와자 유형으로 통합되는 모습을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4세기경 요동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은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객라심좌익몽고족 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심양시를 중심으로 요하 양안에 걸쳐 있던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으로 분화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6~4세기 요령 지역은 정가와자 유형을 매개로 하여 요서 지역의 남동구 유형과 요동 지역의 소규모 지역 문화가 동일한 상호 작용 관계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요동 지역에 정가와자 유형을 상위로, 기타 토착 문화를 하위로 하는 정가와자 유형 중심의 요동 지역 교류망이 형성되고, 이러한 교류망이 다시 정가와자 유형을 매개로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요령성, 길림성 중부, 한반도 지역이 완전한 예맥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점은 이 시기에 요령 지역의 청동기 양식이 완전히 일체화됨과 동시에 동일한 기술적 속성의 청동기가 유통되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를 비파형동검의 확산을 중심으로 설명하자면, 비파형 동검은 처음 요서 지역 십이대영자 문화권의 무기류로 제작되었다가 기원전 8세기 요동 지역의 이도하자 유형(二道河子類型)의 주요 집단이 십이대영자형 비파형동검을 모방하여 이도하자형 비파형동검을 제작했고, 그 직후 요동과 길림성 중부 및 한반도 지역으로 2·3차적인 교류 관계 속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요동 북부의 '이도하자 유형', 요동 남부의 '쌍방 유형'(雙房類型), 요동 반도 남단의 '강상 유형'(崗上類型), 길림성 중부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 서북한의 '신흥동 유형'(新興洞類型) 등의 비파형동검이 십이대영자형 정가와자식으로 일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 현상은 기원전 6세기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이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南洞溝類型)과 요동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鄭家窪子類型)으로 분화되고, 이러한 문화적 파동 속에서 요동 지역에 정가와자 유형을 상위로 하고 기존의 토착 문화를 하위로 하는 상호 작용 체계가 형성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정가와자 유형은 고고학적으로 선양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것이 고조선의 문화라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으로 위의 기원전 10세기 이전 설에서 인용한 《요사》의 일부 기록을 재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동경요양부(지금의 선양)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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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권38 <지리지>2(遼史 卷38 地理志2)#}}}

이렇게 볼 때 정가와자 유형이 바로 준왕 이전의 고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조선후(朝鮮侯) 관련 기사가 《위략》에 있다. 《위략》의 기사는 어환(魚豢)이 임의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 동한(東漢) 당대(當代)의 정사서(正史書)인 《동관한기》(東觀漢記) <지리지>(地理志)를 저본으로 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고조선과 연나라가 주변 정세 변화[23]와 맞물려 갈등을 빚다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공이 있게 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연나라와 갈등을 빚은 조선후의 고조선은 연나라는 물론 중국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대부(大夫)를 관직명으로 쓰는 등 중국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요령~서북한의 물질 문화 가운데 《위략》 조선후 기사와 가장 부합하는 것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 외에는 없다. 따라서 《위략》조선후 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다면 조선후의 고조선은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산리 유형(고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화)의 직접적인 계통적 기원은 남동구 유형이 아닌 정가와자 유형이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지게 된 배경은 십이대영자 문화권이 기원전 6~4세기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을 중심으로 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서쪽의 요서 지역[24]과 심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요하 유역[25]의 2개 연맹체로 재편된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기원전 4세기 연나라가 종전까지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일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하북성 북부 연산산지(燕山山地)의 동남구(東南溝)-옥황묘문화(玉皇廟文化) 집단을 완전히 복속시켜, 이 일대를 내지화(內地化)한 후, 바로 동쪽에 인접하게 된 객라심좌익몽고족자치현 중심의 '요서 고조선 연맹체'(편의상 표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요서 고조선 연맹체를 침공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요하 유역의 '요동 고조선 연맹체'의 존재도 파악하게 되어 이마저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사회 체제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진개의 침공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만 했고, 《위략》의 저본에서는 최초 공격 대상인 요서 고조선 연맹체의 고조선만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26][27]

이런 고고학적 성과를 문헌과 비교해 보자. 고조선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의 관중(생몰기간 :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라는 책이다. 그럼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이 확인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관자》라는 책 자체가 후대에 쓰여진 책이고, 비록 여러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늦어도 기원전 4세기경에는 쓰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늦어도 기원전 4세기에 확실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고조선을 언급한 쓸 만한 기록은 《전국책》(戰國策)[28]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蘇秦將爲從 北說燕 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沱·易水, … (생략) …。

소진이 합종책을 위해서 북으로 가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 · 누번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 · 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와 역수가 있습니다. … (중략. 조나라와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설득함)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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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 <연책편>}}}

연나라 문후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361년~333년이며,[29] 현재 하북성 근처에 위치한 연나라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의 위치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서다. 다만 본문의 '燕東有朝鮮·遼東'(연동유조선요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다른 방위의 서술을 따져볼 때 조선과 요동을 별도로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이 높지만, 조선은 국체이고, 요동은 지명인데 둘이 병렬되어 있는 것이 이례적이라 해석을 놓고 논란이 많다. 이를 놓고 '조선의 요동'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요동 지역에 별개의 공동체가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연나라의 가시권에 들어올 정도로 조선이 분명히 인식되었고, 연나라의 동쪽에 있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고조선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시기를 전하는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이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학설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학설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고조선에 대해 가장 의고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아래에서 언급하는 전국시대 고조선의 칭왕(기원전 4세기) 이후로 본격적인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보기도 한다.[30]


2.4.1. 평양 팽이형 토기 문화[편집]


다만 첨언하자면, 과연 요동 지방의 이러한 나라가 <단군 신화>와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단군에 대해서는 평양 지역의 팽이형 토기 문화(신흥동 유형, 기원전 10~3세기, 청천강~강화도 지역)라는 별도의 한반도 고유 문화권과 연관이 있으며, 요동 지방에서 유입된 세력과의 대립 및 공존을 통해 어느 순간 조선과 융합되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31] 기원전 281년 진개의 동정 이후 평안도~황해도로 건너온 조선은 단순히 요동/요서 지방의 조선을 이식한 것이 아니라 토착 문화권과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같은 평양 대동강 유역의 고산리 유형이 앞서 설명한 이 지역 재래의 청동기 문화인 신흥동 유형[32]이 아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을 직접적인 계보로 하고 있기 때문에[33], 신흥동 유형이 평양 지역의 토착 물질문화 형성과 상기한 정가와자 유형과의 화학결합 양상 외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지에 대해선 미지수이다. 대체로 평양의 신흥동 유형 이후 시기, 물질 문화 양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정가와자 유형을 계승하는 고산리 유형이 바로 준왕(準王)의 고조선[34]위만조선(衛滿朝鮮)[35]의 문화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단군조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단군조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기자조선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자조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기원전 11세기경에 기자가 조선 지역에 와서 법과 예절을 가르치고 다스렸다는 기자조선설이 오랜 기간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20세기 이후의 현대 사학계에선 고고학적 탐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사실로 보지 않고 있다. 관련 내용은 기자조선 문서 참고.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한국사 역대 왕조가 기자조선설을 긍정하며, 각자 기자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도 있지만, 이건 근현대에 고고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기자조선설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 가장 이른 시기인 고구려 기준으로도 기자가 살던 시절이나 당시 고조선은 이미 수백 년 전이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으며, 문헌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기자동래설 기록을 고구려가 받아들여서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으로 따지면 국제연합에 가맹하는 것과 같은 위상을 지니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기자와 같은 현인이 조선에 도래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세계화 과정으로, 높이 평가받았다는 점도 한몫 했다. 그 외 한나라 시대 중국의 요동, 낙랑 정권과 접하며 중국 문물을 수입하던 과정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5. 춘추시대[편집]


고조선이 직접 언급된 것으로는 기원전 7세기의 인물 관중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관자》가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다만 저자가 관중이라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관자》는 관중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정되었다.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이 문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 현재의 판본은 한나라 시대의 유향이 정리한 것이며, 일부 내용에서는 전국시대 이후, '선현(先賢) 제환공의 어록'으로 가공된 흔적이 보이기에, 연대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계속해서 제시되는 상태였다. 그에 더해 제나라가 산둥 반도 동북쪽의 '내이'(萊夷)를 정복하고, 해당 지역을 차지하여 조선과 직접적으로 교역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원전 567년 이후로, 이 점을 고려하면 제환공 대에 제나라와 고조선이 직접 교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학설에 따라서는 이 단락 전체를 날릴 수도 있다. 다만 이를 긍정하는 설에서는 춘추시대 보배조개를 매개체로 랴오둥 반도 ~ 묘도 열도 ~ 산둥 반도에 이르는 교역이 수행된 것에 주목하며, 제나라와 고조선이 간접적으로 교역했더라도 중국의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아래의 서술을 보아도 고조선을 제나라와 직접 활발히 교역한 대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고조선이 '8,000리'나 되는 먼 거리에 위치한 거의 지상세계의 끝에 있는 외지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추론이 꼭 무리한 것만도 아니다. 이러한 추론엔 사실상 전혀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桓公問管子曰:「吾聞海內玉幣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陰山之礝䃉, 一筴也, 燕之紫山白金, 一筴也, 發·朝鮮之文皮, 一筴也, … (중략) … 此謂以寡爲多, 以狹爲廣. 天下之數, 盡於輕重矣.」

(제나라) 환공이 관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옥폐(玉幣)를 얻는 데 일곱 가지 길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자에 대답해 말하기를 "음산의 옥돌이 한 가지요, 연나라 자산(紫山)의 백금이 한 가지요, 발과 조선의 무늬 있는 가죽이 한 가지요, … (중략) … 이것들(일곱 가지의 옥폐)을 일컬어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당한다고 하고, 좁은 (곳에서 나는) 것으로 넓은 (곳에서 나는) 것을 당한다고 합니다. 천하를 셈하는 법이 경중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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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 <규도편>}}}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發·朝鮮不朝 請文皮毤【他臥切 落毛也。】服而以爲幣乎。 … (중략) …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 (중략) …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

(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발과 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36]

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과 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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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 <경중 갑 편>}}}
이때 조선은 '무늬있는 가죽'이라는 특산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편 조선의 앞에 꼭 '발'(發)이라는 글자가 붙어 등장하는데, 다른 문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方五千里 至于荒服南摭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 羌 北山戎息愼東長鳥夷 四海之內 咸戴帝舜之功。

사방 5,000리를 정복하여, 황복(荒服)에 이르러 남쪽으로 교지와 북발을, 서쪽으로 융과 석지와 거수와 강과 저를, 북쪽으로 산융과 과 식신을, 동쪽으로 장이와 오이를 위무하였다. 사해의 안에 모두 제순의 공이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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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오제본기>}}}
위에서 '황복'(荒服)이란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바깥 지역을 말한다. 중국은 공간적으로 5복(五服)의 세계관을 설정했다. '왕기'(王畿)와 함께 '전복'(甸服)이 존재하고, 그 밖에 제후국인 '후복'(侯服)과 '빈복'(賓服)이 존재하며, 그 밖에는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의 땅인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이 존재하는데, 순임금의 덕이 그까지 미쳤다고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기록은 직접 조선이 등장하는 기록은 아니지만, 앞서 《관자》에 등장한 '발'(發)이 산융과 식신의 사이에 등장하고 있다. 다만 《사기》 <오제본기>는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다소 떨어지지만, 적어도 연원이 제법 오래된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발'(發)이 고조선을 구성하거나 인근에 위치하던 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김한규 등은 이를 과 통한다고 보았다.[37]

稷慎大麈, 穢人前兒, 前兒若獮猴立行, 聲似小兒. … 解隃冠, 發人麃, 麃者, 若鹿迅走, 俞人雖馬. 青丘狐九尾. 周頭煇羝, 煇羝者, 羊也. … 孤竹距虛. 不令支玄獏. 不屠何青熊. 東胡黃羆. 山戎戎菽.

직신은 주(麈, 큰 사슴)을 바쳤다. 예인은 전아를 바쳤는데, 전아는 원숭이처럼 서서 움직이고 목소리가 어린아이와 비슷했다. (중략) 해는 유관을 바쳤다. 발인은 포(麃)[38]

를 바쳤는데, 포는 사슴처럼 빨리 달린다. 수인은 수마를 바쳤다. 청구구미호를 바쳤다. 주두는 휘저를 바쳤는데, 휘저란 양이다. (중략) 고죽은 거허[39]를 바쳤다. 불령지는 검은 여우를 바쳤다. 부도하는 푸른 곰을 바쳤다. 동호는 누런 곰을 바쳤다. 산융은 융숙[40]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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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서》 <왕회해 편>}}}
이와 같이 '발'은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사기》의 기록과 합하면 중국의 동쪽 혹은 북쪽에 위치하므로, 우리가 짐작하는 고조선의 위치(요서 ~ 요동)와도 대략 합치한다. 더불어 가죽이 특산물인 것이나 사슴류의 사냥감을 잡아 바쳤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수렵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본 문서에서는 전반적으로 '발'이 '조선'과는 구별되는 공동체로 설명되고 있으나, 사료 부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깊이 연구되지 못한 측면이 많다.


6. 전국시대[편집]


고조선의 흔적이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고조선이 연나라와 접하기 시작한 기원전 4세기경의 기록이다. 서한 말의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서 유세객 소진연나라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열거하는데, 여기에 고조선이 등장한다. 이 무렵 연나라는 연쾌왕 때의 자지의 난의 여파로 제나라에게 크게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는데, 이를 틈타 조선도 대부 등의 관직을 두고 왕을 칭하는 등, 연나라와 맞섰다. 특히 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시대 당시에는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가 크다.[41] 이 당시 고조선은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요녕성과 길림성 일부 지역의 부족국가들을 복속시키며 통일시키고, 이후로도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까지 복속시키며, 칭왕을 할 무렵인 기원전 323년경에는 요녕성 전역과 길림성 일부 지역 및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까지 아우르는 현대의 남북한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상당히 넓은 국토와 강대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치고 (동)주 (희성)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여,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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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루어진 연 소왕의 개혁으로 연나라는 반전에 성공했다. 기원전 300년~282년 무렵 연나라는 명장 진개의 활약으로 동호 및 조선에게서 각각 패수(국경)로부터 1,000리, 2,000리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얻었다고 한다. (고조선-연 전쟁 항목을 볼 것) 대체로 동호 원정과 조선 원정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져 두 세력에게서 탈취한 지역에 5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조선이 잃었다는 이 2,000리가 정말 사실 그대로의 서술인지는 논란이 많으나, 어쨌건 막대한 타격을 고조선에게 안겼음은 분명하다.[42]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燕亦築長城自 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그 뒤에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 동호)에 인질로 갔는데 호가 그를 지극히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려, 동호가 1,000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찔러 죽이려 한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다. 연은 또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으며,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고 동호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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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흉노 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이후에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졌고,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선이 마침내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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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연의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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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 열전>}}}

이후 조선은 청천강 이남으로 영토가 줄어들었고, 고고학적인 자료를 볼 때 연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지역도 고조선의 지배영역에서 이탈하여 본래의 거점을 잃고, 한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정도의 영역만 지배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즉, 이 설을 따른다면 후발주자인 부여보다도 영토가 훨씬 작은 소국이 되어버린 셈이다.[43] 이렇게 고조선이 강대한 군사력을 지녔던 것과는 별개로 요동을 한번에 다 내주고, 연나라의 전성기가 지났을 무렵에도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 데에는 연맹왕국 체제의 한계가 작용한 것으로도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며[44] 연나라는 요동까지 군현제 지배를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 반도 곳곳에 연대가 기원전 2세기 ~ 3세기까지 올라가는, 연나라의 것으로 보이는 연화보-세죽리 청동기 문화 유적이 이를 뒷받침해준다.[45] 이 시기부터 명도전 등 중국계 화폐를 매개로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확인이 되고, 후대에도 화폐로 계승된다.

고고학적으로도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세기 초를 기점으로 획기적으로 변동된다. 이 시점 이후 요서 지역은 토착 문화 전통의 물질 문화가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전국연(戰國燕)의 지방 문화인 미안구 유형(眉眼溝類型)이 형성된다. 요동 지역은 요서 지역보다는 덜하였지만, 과거 정가와자 유형의 분포권과 요동 남부의 연해 지역이 전국연의 미안구 유형 분포권으로 변모된다. 이 시기 요령 지역의 전국연 문화 분포 지역은 대부분 기존의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십이 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옛 쌍방 유형·강상 유형과 정확하게 일치된다.

이와 동시에 요동 지역의 미안구 유형 외곽 지역에는 철령시(鐵嶺市)와 서풍현(西豊縣) 일대로부터 길림성 서남부의 동요하(東遼河) 유역에 걸친 지역에 '사가가 유형'(謝家街類型)이, 청원만족자치현(淸原滿族自治縣) 중북부에 '임가보 유형'(任家堡類型)이, 대련(大連) 시구를 중심으로 한 요동 반도 남부에 전국연 문화와 공존하고 있던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이, 태자하 중상류역 본계 시현(市縣) 일대에 '유가초 유형'(劉家哨類型)이, 혼강 중상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 동부 산간 지역에 '대전자 유형'(大甸子類型)이, 평양(平壤) 중심의 대동강(大同江)~재령강(載寧江) 유역에 '고산리 유형'(孤山里類型)과 같은 소규모 지역 문화가 형성된다.

기원전 3세기 요령과 서북한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 확인되는 전국연 문화와 기타 토착계 물질 문화 가운데 요령 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요한 유물 요소 가운데 하나인 동검이 중심적인 유물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윤가촌 유형·유가초 유형·대전자 유형·고산리 유형이다. 이 가운데 윤가촌 유형은 전국연 문화권 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연에 점령당한 지역 내 토착 집단의 문화로 볼 수 있다. 유가초 유형에는 조형병식(鳥形柄式) 동검 등 북방계 동검의 속성이 복합된 동검 또한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다뉴기하문경(多鈕幾何文鏡)의 제작이 사실상 중단된다. 이에 반해 요동 동부의 대전자 유형과 고산리 유형은 비파형동검의 후계 형식인 중세형동검(中細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 뿐만 아니라 다뉴기하문경 등의 청동기가 유물 복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요동과 서북한 지역의 물질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를 기점으로 새로운 유형으로 다시 한번 변동되는데, 대전자 유형은 부여계(夫餘系) 동병철검(銅柄鐵劍)과 적석묘(積石墓)로 상징되는 망강루 유형(望江樓類型)으로 전환되는 반면, 고산리 유형은 세형동검·목곽묘로 상징되는 정백동 유형(貞柏洞類型)으로 변모된다.

이 가운데 대동강~재령강 유역이 단연 주목된다. 그 이유는 고산리 유형이 이 지역 재래의 청동기 문화인 신흥동 유형[新興洞類型, 팽이형 토기 문화]이 아닌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을 직접적인 계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식(漢式)묘제 및 유물과 공반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의 중심이 형성되어 있었던 심양 지구에는 정가와자 유형의 유물 복합이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그 자리에 전국연 문화와 관련된 성지· 취락지· 매납 유구 등이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물질 문화 양상은 고산리 유형이 바로 준왕(準王)의 고조선[46]과 위만조선(衛滿朝鮮)[47]의 문화라는 것을 시사한다.#

다만 여기서 알아둬야 될 건, 진개가 국경으로 삼은 만번한은 한 개가 아닌 두 개를 합쳐서 표현한 것이며, 이 만번한의 위치는 요동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청천강 이남까지 밀려났다는 일부 설과 충돌하는데, 이에 노태돈 교수는 진개가 확장한 영토는 만번한까지지만 이후 세력이 급속도로 패퇴한 고조선의 영토를 연나라가 계속해서 먹다가 청천강에 이르렀다고 추정한다. 이때 개판이 된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마치 고구려 소수림왕이 나라의 시조를 바꾸고, <주몽 신화>를 <동명왕 신화>에서 배껴온 것처럼 <단군 신화>가 창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7. ·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편집]


고조선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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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 영토회복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위만의 정변
기원전 194년
위만군
준왕의 마한 정복
기원전 194년
마한
진번⋅임둔 정벌
기원전 2세기
진번국, 임둔국
1차 왕검성 전투
기원전 109년
한나라
2차 왕검성 전투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한나라




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퇴한 뒤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에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그 크기만으로도 압박이었을 중국의 통일 국가는 요동에 무언의 군사적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은 이에 스스로 '복속'하는 길을 택했다.《염철론》에서는 조선을 멸했다고 말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이 보장된 근거인 공지(空地)가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 발생한 대혼란으로 오히려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이 시기에 조선이 힘을 비축해 나가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否死 其子準立。

진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가 즉위했는데 진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자, 그 아들 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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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幷滅朝鮮 南取陸梁 北卻胡 狄 西略氐 羌 立帝號 朝四夷。

진이 이미 천하를 병탄한 뒤에, 동쪽으로 패수를 끊어 조선을 병탄하여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육량(백월 세력)을 취하고, 북쪽으로 호와 적을 물리쳤으며, 서쪽으로 강과 저를 약취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세우고, 사방의 오랑캐에게 조공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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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철론》 <주진편>}}}
그러다가 · 교체기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조선이 중흥에 성공했다. 이 시기 고조선은 공백이 생긴 서북쪽의 패수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한 듯하다.[48] 패수의 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요동군이 있는 요하 인근은 한나라가 장악하고 있었고, 청천강이 조선이 위축되었을 당시의 경계로 비정된다고 보면 압록강 설이 유력해진다. 단 이 경우를 떠나면 패수는 고대 한반도 북부 관련 기록에서 원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강 이름이 패수라기보다는 아예 '패'가 강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 [49]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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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철론》 <비호편>}}}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이 일어나자, 먼 곳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고쳐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짓고, (조선을) 연에 속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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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

二十餘年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나라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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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 열전>}}}

이 무렵 고조선은 연 · 제 · 조 등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나가며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 시기 연왕 노관의 반란을 틈타 조선에 망명해온 연나라 사람 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했다. 위만은 《사기》에서는 '만'이라고만 하고, 《위략》에서는 '위만'이라고 한다. 《잠부론》에서는 다른 한자로 위만이라고 한다. '위'(衛)는 성씨가 아니라 관직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남해군위(南海郡尉)였다가 남월의 건국자가 된 조타가 '위타'(尉陀)로도 불린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위만이 망명할 당시 상투를 트는 조선식 복색을 하고 있어서, 이병도 등은 위만이 처음부터 조선인이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학설이 강세이다. 어차피 당시에는 국적이나 명확하게 선그어지는 영토 및 국경도 없고, 특히 요동반도 같은 경우, 진개의 요동 경략 이후 연나라가 선양 등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재지세력과 연나라 사람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그냥 국가적 정체성이 모호한 변경 사람일 수도 있다. 너무 괘념치 말자.

위만이 유망민 세력을 결집한 데는 조선이 대륙의 혼란기에 획득한 옛 공지(空地)에 위만을 책봉하고, 중국 유망민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신흥 세력의 결집이 쉬웠던 것이 작용했던 듯하다. 위만은 한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거짓말로 준왕을 속인 후, 정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왕험(검)성으로 정했다.


8.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편집]


위만은 앞서 언급했듯 고조선 중심 계층의 입장에서는 외래인이었기에,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운영은 중국계 유이민을 포함한 위만 세력과 토착 세력인 '상'(相) 세력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아래에서 서술하듯 위만조선 정권 내부에 문제가 있을 때는 상(相) 세력이 자신들의 산하 세력을 온존하면서 위만조선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때문에 위만조선 단계까지도 고조선에서는 군현제와 같은 직접 통치에 입각해 제어한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50]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위만조선은 그것을 대외무역으로부터 찾았다.

위만은 즉위 직후 전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으로부터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아 철기가 아주 널리 쓰이거나 직접 제작되지는 못한 듯하다. 당시 한나라의 집권자였던 여후의 시대는 흉노에 시달려 외부 확장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위만조선은 안전을 보장받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한나라 방면의 안정과 선진문화의 전수를 바탕으로 위만은 진번, 임둔까지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고, 손자 대인 우거왕 대에는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진국, 중국으로 표현)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 태수가 곧 (위)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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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 열전>}}}
이렇게 주변을 복속시켰으나, 아래의 마한 왕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마한과는 마찰이 있었고, 후에 전쟁을 할 때도 주변국의 원조같은 것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에 대한 복속은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국가들도 초기에는 그랬듯이 일종의 연맹적인 성격을 가졌던 조선은 변방 세력이나 유력자들의 이탈이 때때로 일어나곤 했다. 기원전 128년 의 군장 남려가 이끄는 창해군이 이탈을 시도했고, 준왕의 몰락시에는 토착 군장 세력으로 추정되는 상(相)들 중에서도 이탈하는 사람이 있었다(역계경).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은 단연코 동북아의 패자로 떠오르는 전한이었다. 한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르면서 한나라의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더불어 《사기》 <위현전>에서는

東伐朝鮮 起玄菟 樂浪 以斷匈奴之左臂。西伐大宛 並三十六國 結烏孫 起敦煌 酒泉 張掖 以鬲婼羌 裂匈奴之右肩。 單于孤特 遠遁于幕北。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흉노와 조선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서술이 남아 있다.[51]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주는 다른 기록은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한무제가 조선 원정을 밀어붙인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이 흉노를 견제한다는 명분에서였음은 분명할 것이다.

한나라와의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비왕(裨王)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는 처벌은 커녕 도리어 섭하를 요동 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으로 평가되는데, 과연 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전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했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군의 장군 측에서 평화 관계를 제안해왔으나, 한나라가 고조선의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이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개시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1년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의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니계상 혹은 참(參)에 의해 우거왕이 시해되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했다(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 이후 평양의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며, 산하에 존재했을 읍락국가들이 대두되면서 한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9. 준왕의 남하[편집]


한편 준왕이 삼한 지역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이후의 대표적인 기록인 《정사 삼국지》 등에 따르면 그 대가 끊어져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 '마한 왕'이 백제신라에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온조왕이 이를 멸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를 재야사학 등에서는 준왕의 왕계로 추정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백제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마한은 한번에 멸망하지도 않았고, 한 나라도 아니었다. 이에 더해서, 만일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내려와서 마한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에도 마한 왕 작위가 이어진다고 한들, 온조왕 시대인 200년 후까지 그 왕가가 보존되었으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래의 《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의 내용은 전설적 내용으로서 비슷한 시기의 <해모수 신화>나 삼국의 건국신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맞다. 《삼국사기》의 초기 국가 이름 역시 믿을 게 못 되는데, 주변 소국들을 대략 뭉뚱그려서 말갈/마한/왜 등으로 후대에 윤색한 흔적이 보인다. 《삼국지》 -동이전-만 해도 삼한 지역에 최소 80개의 소국이 등장하는데, 《삼국사기》 초기의 등장국가들은 다 백제, 신라, 낙랑, 말갈, 가야계 국가들, 왜 뿐이라는 것부터가...[52]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 及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준왕은) 그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략》에서 이르기를, 기자와 그 친족들이 나라에 있으면서 한씨를 사칭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그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韓)인들 중에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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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재위 38년(기원전 20)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 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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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신라본기> -박혁거세- }}}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서기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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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박혁거세-}}}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王慙遂壞其柵。

재위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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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唇14)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 錦峴二城 固守不下。

재위 26년(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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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온조왕-}}}


10. 멸망이 미친 영향[편집]


고조선 후기부터 기원전 108년의 멸망 시기까지 많은 고조선 유이민들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삼한에서는 전기부터 고조선계 예맥인들이 다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삼국사기》에는 고조선 유민들이 신라 건국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고, <박혁거세 설화>는 '북쪽 유민들의 남하'라는 해석이 존재하며, 고고학적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보이기 때문에 고조선 유민들이 신라 건국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남하하지 않은 고조선 유이민들은 부여로도 상당수 흡수되었으며, 한사군 가운데서도 일부는 복속에 실패하여 동예옥저가 따로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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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현도군이 세워진 연도가 기원전 107년이라는 것을 근거로 왕검성은 현도군 지역에 있었으며, 고조선의 멸망 연도도 기원전 107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대표적으로 조법종이 이 주장을 한다.[2] 다만 이런 관점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초에 역사는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데, 사실 자료도 부족하고 시대적 한계도 있는 고대국가의 강역이나 길이 문제는 답없는 논쟁이라 잘못하면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만 봐도 알 수 있듯 한 나라 역사의 길고 짧음은 그 나라의 번영과는 큰 관련없다.[3] 《삼국유사》는 주석으로 "고조선이 요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건국되었으나...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다." 라고 서술했다.[4]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잔 루이즈 칼망으로 122년을 살았다.그리고 이보다 더 오래 산 프란체스카 수사노는 124년을 살았다.[5] Xiaoping Yang, Louis A. Scuderi 외, 2015, "Groundwater sapping as the cause of irreversible desertification of Hunshandake Sandy Lands, Inner Mongolia, northern China"[6] "New Thoughts on the Impact of Climate Change in Neolithic China", 미 Archaeology 학술지 해설기사 참조 #[7] 기후 하강으로 인해 홍산 문화가 해체되었으므로 홍산 문화 지역이나 몽골 고원 등의 북부로부터 요서 지역으로 인구가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일단 요서 지역을 대표하는 하가점(샤자덴) 하층 문화의 문화적 특성 자체를 보면 나무 판재로 무덤곽을 짜서 매장하는 등 용산 문화(龍山文化, 황하 문명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요서 지역 인골의 체질인류학적 분석에서도 하가점 하층 문화 이전에는 고동북 유형 인골이 일관되게 발굴되다가 하가점 하층 문화 이후로는 고화북 유형과 고동북 유형의 인골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등 용산 문화의 영향을 뒷받침한다.(<요서지구 선진시기 거주민의 체질인류학과 분자고고학연구>, 2009, 지린대학교) 종합하자면 요서 지역에는 토착문화였던 소하연(샤오허옌) 문화가 먼저 자리잡고 있다가 쇠퇴로 인한 인구 유출과 용산 문화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겹쳐 소하연 문화에 용산 문화의 요소가 일부 가미되어 형성된 것이 하가점 하층 문화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8] Shelach, Gideon, 1999, "Leadership Strategies, Economic Activity, and Interregional Interaction: Social Complexity in Northeast China", Springer[9] 김재윤, 2005,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전환기 연구>[10] 烏恩岳斯圖, 2007,<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究-靑銅時代至早期鐵器時代>, 科學出版社, 본 문헌에서 하가점 하층 문화와 상층 문화의 지층구조와 연대를 분석하며 하층 문화의 하한 연대를 상대 중기인 기원전 14세기로 분석한 바 있다.[11] 궈다순(郭大順), 1987, <試論魏營子類型>, 위영자 문화는 하가점 하층 문화 말기의 문화와 도기의 문식(紋飾)과 기형(器型), 홍도의 비례적 증가 경향이 매우 유사하며, 청동기 제조방식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여 승습관계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궈다순은 "시간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문화 관계에서 변화가 비교적 크더라도, 두 문화 간의 승습 맥락을 찾을 수 있다"라 한 바 있다.[12] 그러나 위영자 문화는 앞서 얘기한 하가점 하층 문화와 연속되는 문화는 아니다. 기존의 하가점 하층 문화가 소멸한 후 약 1~2세기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재결합 과정을 거친 문화이며, 따라서 공간적으로도 산맥 하나를 경계로 미묘하게 다른 위치에 있다.[13] 烏恩岳斯圖, 2007,<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究-靑銅時代至早期鐵器時代>, 科學出版社[14] 유목민족인 산융족의 문화로 추정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위치만 비슷하지 하가점 상층 문화는 하가점 하층 문화와 연속되는 문화가 아니다. 이 역시 기후 변화가 원인인데, 기원전 14세기경 기후가 한랭•건조해지며 온난한 지역이 남하하여 하층 문화를 영위하던 민족은 상나라의 중원 문화권 및 조양 일대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유목민족이 몽골 초원을 통해 동진하여 성립된 문화가 하가점 상층 문화라는 것이 중론이다.(배진영, 2012, <"기후변화와 동북아시아 고고문화의 변천 - 燕山 南北 지역을 중심으로 -">)[15] 일부 유사역사학계에서는 하가점 상/하층 문화를 모두 고조선의 문화로 판단하기도 하나 상층 문화는 유목적인 성격이 강해 농경문화로 여겨지는 고조선의 문화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상층 문화에서는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라 볼 수 있는 비파형 동검이 굉장히 많고, 조밀하게 발견되어 관련성을 단순히 무시할 수만은 없긴 하다.[16] 烏恩岳斯圖, 2007,<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究-靑銅時代至早期鐵器時代>, 科學出版社[17] 십이대영자 문화는 기원전 6~4세기 허베이성 북부의 동남구(東南溝)~옥황묘 문화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후기 북방계 문화의 요소를 수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교류 과정 속에서 일부 집단이 십이대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유형(기원전 8세기~7세기경)의 중심지역이었던 조양 일대에서 조양시 서부인 객라심(카르친) 좌익몽골족자치현 일대로 옮겨가며, 남동구 석곽묘로 대표되는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이 형성되었다. 그러던 중 십이대영자 유형의 전통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일부 집단이 요하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심양 일대에 중심을 둔 십이대영자 문화 정가와자 유형이 형성된다. 한편 연구자에 따라 남동구 유형을 정가와자 유형을 중심으로 요하 유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고조선 연맹체에 대비된 또 하나의 고조선계 연맹체로 보고, 이 고조선계 연맹체를 《위략》에 언급되어 있는 '조선후(朝鮮侯)의 고조선'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18] 십이대영자 문화 남동구 유형 말기의 동대장자 유적이 이러한 연나라 문화에 대한 동화 경향을 보여준다.[19] 오강원,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청계, 2006)[20] 기원전 9세기[21] 기원전 8~7세기[22] 기원전 6~4세기[23] 주(周)나라의 쇠퇴와 연나라의 칭왕(稱王)[24] 남동구 유형[25] 정가와자 유형[26] 오강원,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청계, 2006)[27] 김정배, 《한국 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고려대학교 출판부, 1986)[28] 중국 전국시대 각국의 역사 중 귀감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책.[29] 문제는 소진의 활동 연대 또한 후대의 착오 내지 의도적인 재배치로 인해 끌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30] 2016년 심재훈 단국대학교 교수에 대한 기사 참조. 심재훈은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을 비롯해 기자조선설 등 중국 측의 역사적 공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고조선에 대해서도 기원전 4세기 이전을 '국가' 단계로 설정하는 데 비판적인 입장이며, 이러한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국가가 아니라 지역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위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요동'이라는 말 또한 '요동'이라는 지역이 있었음을 말해줄 뿐, '요동'이라는 국가가 있었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는 학계 내에서 건전하게 논의되는 수준에서 가장 비판적인 입장 중의 하나이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이전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 단계로 발돋움했다고 보고는 있다.[31] 다만 조선의 국호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 지방의 선대 고조선 문화는 오히려 한반도 남부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반도 북부는 고유의 문화적 양상이 비교적 보존된다는 점은 아직까지는 미스터리이다.[32] 新興洞類型, 팽이형 토기 문화[33] 고산리 유형은 이뿐만 아니라 고조선 멸망기인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식(漢式) 묘제 및 유물과 공반하는 경향을 보여 고조선 말기의 유적으로 유력하다.[34] 고산리 유형 고산리류(孤山里類)[35] 고산리 유형 송산리류(松山里類)[36] 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37] '발'과 '맥'이 서로 통한다고 보는 근거는, 후대의 고구려를 토번에서는 '무쿠리', 돌궐에서는 '뵈클리'라고 표기했는데 '무쿠리'와 '뵈클리' 모두 '맥고려'의 음차일 것이라고 언어학계에서 추정하는 데 있다.[38] 상고한어 발음은 (정장팡상 재구 기준) /*braːw/나 /*pʰrawʔ/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어떤 동물 이름의 음차로 보인다. 머리는 뿔 달린 사슴과 닮고, 다리(灬)는 말(馬)에 가까운 어떤 동물을 형상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동역사》에서는 발음은 같으나 자형이 다른 麅(포)라는 동물이 조선에 많다고 쓰고 있는데,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서식이 확인된 바 있는 노루(많은 《옥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나 사불상, 와피티사슴 등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을 끊어읽기를 잘못해서 麃麃로 생각해 '씩씩하다'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오역이다.[39]여씨춘추》, 《한서》 <사마상여전> 등에도 언급되는 동물이다.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공공(蛩蛩)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더 작다고 하며, 공공과 거허는 서로 의지하여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蛩은 오늘날 한자문화권에서는 귀뚜라미를 뜻하는 글자로 쓰인다.[40] 대두로 추정된다. 산융이 사는 곳에서 나는 특산물이었다고 한다.[41] 당시 '황제' 칭호는 없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제를 처음 자칭한 것은 진시황이며, 왕은 주 천자의 칭호에서 유래한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칭호였다. 다만 전국시대에는 이른바 '전국 7웅'이 모두 칭왕하는 등 호칭의 인플레이션이 이미 진행된 이후였기 때문에, 이를 후대 중국 통일 왕조의 황제와 비견하는 것은 무리이고, '연나라에 밀리지 않는 독자적인 군주'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미 10만명 단위의 대병력을 동원하던 전국시대 국가들의 체급을 고려하면 그것도 만만치 않은 선언이었다. 물론 선언이 곧 국력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당장 원술이 황제를 자칭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황제취급 해 주던가. 물론 당시의 고조선이 상당히 강대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맞다.[42] 중국 기록, 특히 고대에 가까워지는 기록일수록 1,000 혹은 10,000이라는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혹은 "강하다!"라는 개념이지 실제로 정확한 수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또한 영토의 경우에도 자신들이 어림잡아 판단한 근거로 기술한 경우가 많다. 《위략》이 쓰여진 시기로부터 수백년이 흐른 뒤 저술된 《신당서》에는 신라의 영토를 "횡으로는 1,000리, 종으로는 3,000리이다.(橫千里, 縱三千里)원문)"라고 기록해 놓기도 했다.[43] 후에 백제가 본래의 거점인 위례성과 한강 일대를 상실하고, 한동안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만을 지배하는 국가로 영토가 크게 축소된 것과 모양새가 비슷하다.[44] 물론 중앙집권 국가였다는 전제도 성 2개만 빼놓고 죄다 연나라 장수 악의에게 내주는 사태가 일어났었다. 하지만 전단의 활약으로 연 소왕 사후에 죄다 탈환하기는 했다.[45] 요동 반도 전체를 연나라가 점령했다는 것이 과거 학계의 중론이었지만, 최근에는 고고학의 성과로 인해 요동 반도 곳곳에 아직도 상당수의 연나라 문화와 결합한 토착 문화가 남아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연나라가 요동 반도의 중요 거점만 장악하고, 나머지 지역은 토착세력과 연대를 강화해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46] 고산리 유형 고산리류(孤山里類)[47] 고산리 유형 송산리류(松山里類)[48] 다만 이러한 기사들은 이민족의 침탈을 강조하는 기사로서 고조선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49] 춘추전국시대 당시 (河)는 황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 (江)은 장강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으며, 대개 일반적인 강은 낙수, 역수, 회수, 분수 등 (水)로 끝나는 경향을 보이기에 다른 문명권이었던 조선에서 '패'라는 고유명사로 하천을 지칭했던 것이 큰 무리가 있는 가설은 아닌 것이다. [50] 이는 이후 고조선의 영역이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개 군으로 나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낙랑군을 제외한 군현들은 고조선에 대한 한무제의 정복전쟁 이후에도 아직까지 세력이 꺾이지 않은 현지인의 반발로 폐지되거나 축소, 후퇴, 통폐합되었다.[51] 이에 대해 조선의 관직으로 나타나는 비왕(裨王)이 흉노의 관직 중 하나인 비소왕(裨小王)과 유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먼 훗날 백제 개로왕 대에도 흉노의 좌현왕·우현왕 제도를 수입하는 것이 확인되는 등, 설령 이러한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흉노와 직접적인 정치적 관계가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서 급진적인 설 중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52] 고고학적 발굴로 추정하기로는 건마국과 목지국이 특정시점에 고조선계 유민이 대량으로 유입된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면 연대순으로 따지면 건마국에서 목지국으로 퍼지는 형태이기에 준왕은 건마국에서 자리잡고 지속적으로 유입된 고조선 유민이 목지국을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문헌과 고고학 기록을 보면 삼한을 아우르는 마한왕or진왕은 목지국이 겸했으므로 준왕계가 계속 마한왕을 유지했을 확률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