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부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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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대외관계





1. 개요
2. 역사적 관계
3. 문화적 관계
4. 언어적 관계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조선부여의 대외관계를 다루는 문서.


2. 역사적 관계[편집]


대저 연(燕)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있는 【정의】 발해와 갈석산 서북쪽에 있다. 큰 고을이다. 남쪽으로는 제와 조에 통하고 동북으로는 (胡)와 경계한다. 상곡(上谷)에서 요동(遼東)까지는 땅이 멀고, 【색은】 유씨는 윗글자의 발음이 ‘탁(卓)’이다. 칙(勑)과 교(敎)의 반절로 발음하기도 한다. 멀리 도약하는 모습이다. 사람은 적으며 자주 노략질을 당한다. 대략 조(趙)와 대(代)의 풍속과 같으나 사람들은 재빠르며 사납고 【색은】 사람이 조한(雕悍)하다는 것은 쪼는 성격처럼 빠르고 사납다는 말이다. 생각이 얕다. 물고기, 소금, 대추, 밤이 많으며 북쪽으로는 오환(烏桓), 【색은】 린(鄰)은 '림(臨)'이라고 쓰기도 한다. 림(臨)이라는 것은 물리치고 등진다는 뜻인데, 그들이 이와 같은 부류이다. 부여(夫餘)와 이웃하고, 동쪽으로 예맥(穢貉), 【색은】 생각하건대, “동쪽으로 예맥을 옭아맨다”의 옭아맨다[綰]라는 것은 그 주요 나루터를 장악한다는 말인 즉, 위에서 임(臨)한다고 한 것은 오히려 이와 다르다. 조선(朝鮮), 진번(眞番)의 이익을 독점한다. 【정의】 번(番)의 발음은 '번(潘)'이다.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


고조선 멸망 이전인 기원전 108년보다 이른 시기의 부여에 관한 분명한 문헌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두 국가가 같은 시기에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으나, 《사기》 화식열전의 (燕)에 관한 기사에서 고조선과 부여가 함께 등장하며 또 해당 기록이 진시황 때의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므로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두 국가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문화적 관계[편집]


《위략》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매년 10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하고 춤췄다. 이름하여 무천이라고 했다. 군사의 출정에 앞서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쳤는데 갈라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다.

토원책부


(부여에서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그 길흉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소를 죽여서 굽의 모양을 보아 합하는 것을 길하다고 여겼고, 벌어지는 것은 흉한 것으로 여겼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 부여조


《위략》에 이르기를 … (고구려에서는) 군사가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잡아 굽을 보아서 길흉을 점쳤다.

《한원》 고려조


토원책부》 내용에선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만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는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행해졌으며 《삼국지》의 기록과 《토원책부》, 《한원》 등의 두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인용한 《위략》에 따르면 부여, 고조선, 고구려 모두 소뼈를 이용한 우제점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당시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선 공통적인 풍습이 자리잡고 있었음이 시사된다.

고고학적으로 이르게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요동 지역에도 정가와자유형의 출현을 계기로 군장사회라는 복합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 정가와자유형이 그 일대에 미친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상당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정가와자유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간 네트워크는 같은 시기 주변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쳐, 그 결과 기원전 5~4세기부터 주변의 여러 지역이 연쇄적으로 군장사회 단계에 진입하였다. 또 정가와자유형의 존속 기간인 기원전 5~4세기 무렵에 길림시 등지의 서단산문화 후석산기의 집단 또한 군장사회로 발전하기 때문에[1] 부여의 기층문화인 서단산문화 역시 요동의 물질문화와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부여의 재지층이 고조선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파일:유수노하심 부여 가면.jpg

특히 부여의 상징적 유물인 금동가면은 요녕성 탑만촌 출토 청동부 거푸집에 새겨진 인면상과 형태적으로 매우 유사한데, 이 거푸집 제작 연대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정가와자 단계이기에 당시 요동 지역의 고조선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거푸집에 새겨진 인물은 당시 요동에 거주하던 고조선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물상이 거푸집 제작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표현된 점에서 청동 주조를 담당한 장인들이 자신들의 주조를 신성시하고, 주술적인 의미로 고조선인이 숭배했던 대상을 새겨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부여의 금동 가면은 고조선 문화를 계승하고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2]

다만, 부여 초기 물질문화에는 고조선뿐만 아니라 북방초원문화의 영향 역시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부여가 출자한 지역이 눈강 하류 일대이며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서요하 유역 주민 집단과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해 서요하에 거주하던 동호흉노에 의해 와해되면서 유민 집단이 대거 대흥안령 동록을 따라 눈강 중하류 일대로 유입되면서 눈강 유역에 북방초원 문화 요소가 스며들었다. 이에 대한 한가지 예로, 한국 청동기문화권에서는 생소한 치병동도(齒柄銅刀)의 아이디어를 흡수하여 서단산문화만의 독특한 청동손칼 형식으로 발전시킨 사례를 들 수 있다.

또 동북아시아의 촉각식검이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길림에서 등장하는데 검의 형식, 제작 연대, 지리적 분포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유럽의 할슈타트 촉각식검과도 연결되는 오르도스 촉각식검과 관련이 있어 고조선과 부여가 오르도스 초원지대의 주민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길림 일대에서 먼저 만들어진 촉각식검은 차례로 요동, 평양, 연해주 지역에서 제작됐고, 이후 일본의 쓰시마와 규슈 지역에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촉각식검을 통해 위만조선부여가 교류한 사실이 입증되었음은 물론이고 해당 교역망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서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3]


4. 언어적 관계[편집]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 쪽 다리를 끌고, 걸을 때는 모두 뛰어다닌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후한서》에 따르면 고구려부여의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다고 언급된다. 다만, 표면상으론 고구려가 고조선보단 부여에 대해서 직접적인 계승 의식을 표방하였기에 부여와 문화적으로 연관성이 강할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고구려의 유적 중 환인 망강루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노하심, 서차구 유적과 비슷한 형식이 많은 것과[4] 오동령구문(五道嶺溝門) 고분에서 나온 도끼날형 화살촉과 기상참(氣象站) 유적에서 나온 좁고 긴 창끝 등이 유수 노하심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흡사한 점 등을 제외하면 고구려의 물질문화는 부여보단 대부분 고조선과 유사하다.

파일:망강루 4호분 및 6호분 출토 금제 귀걸이.jpg
파일:유수노하심 귀걸이 사본.jpg
▲ 망강루 4호분 도면(왼쪽) 및 망강루 6호분 출토 금제 귀걸이(오른쪽)
▲ 유수 노하심 출토 금제 귀걸이

또 길림성 통화 지역의 만발발자 유적에서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물질문화적 증거가 발견되었는데, 고조선의 물질문화로 알려진 세형동검문화 요소와 방단석광적석묘와 같은 고구려 초기 물질문화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타나 둘 사이의 연관성이 확인되며 무덤 양식인 묘제와 관련해 고조선의 대개석묘(고인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으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적석시설을 한 고인돌' 단계인 대개석적석묘(고인돌의 덮개돌을 한 적석묘)와 무기단석광적석묘가 발견되었다.

특히, 무기단석광적석묘는 '돌무지무덤'으로 불리는 고구려 적석총의 원형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적석총은 중국 동북 여타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무덤 형식이며 또 다양한 묘제와 화장 등 장례 습속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한 주거지에는 구들의 초기 형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무순 연화보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연화보 유적은 고조선 후기 유적으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이고, 구들은 고구려 주거시설로 계승되었다.[5]

즉, 고구려의 언어는 부여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두 국가의 언어가 비슷하다는 기록이 남은 것이 아니라 정황상 고구려어 자체가 고조선어와 유사했을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고조선어 역시 부여의 언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고[6] 또 고조선 지명 '홀(忽)'은 고조선의 계승국인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언어에서 나타나며[7] 그 외에도 지명, 인명, 관직명 등에서 고조선어와 고구려어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게다가 부여 역시 인명과 관직명에서 사용되는 '가(加)', '해(解)' 등이 고구려어에도 나타나며 특히, 부여의 국왕 간위거(簡位居)와 대사(大使) 위거(位居), 고구려의 고추가 박위거(駮位居) 및 동천왕의 이름인 우위거(優位居) 등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위거(位居)의 발음인 *ɦwi ka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右渠)의 발음인 *ɦwɨʔ ga와 매우 유사하기에[8] 이를 통해 부여어가 고구려어는 물론이고 고조선어와도 언어적 유사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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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강원, 2012,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2] 이종수, 2021, 『부여의 얼굴』, 동북아역사재단[3] Park Sun Mi, 2020, 「Antenna-Style Daggers in Northeast Asia from the Perspective of Interregional Interaction」[4] 하단 사진 참고, 원본-고구려 왕릉 문서[5] 박선미 외 6명, 2021, 『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 동북아역사재단[6]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오랜 기간동안 요동의 물질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7] 김인희 외 5명, 2018, 『고조선의 언어계통 연구: 양웅의 『방언』수록 고조선어 분석』, 동북아역사재단[8] 조승복 교수는 이 명칭들이 모두 우두머리를 뜻하는 칭호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