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위치와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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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강역
3. 위치
3.1. 평양 중심설
3.2. 요동 중심설
3.3. 중심지 이동설
3.4. 기타


1. 개요[편집]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정리하는 문서.

2. 강역[편집]


파일:6차_국정교과서_고조선의 영역.jpg
과거 제 5-7차 국정 국사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고조선의 세력 범위. 현재는 '동이족의 분포'와 같은 정의는 사용하지 않으며, 탁자식 고인돌도 한반도 남부에서 추가 발견되어 개정되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문제는 사학계의 꾸준한 떡밥이다. 한국의 고대사가들에게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탁자식 고인돌, 거친 무늬 거울 등의 출토 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파악하는 태도가 있어 왔고, 다수설을 차지했으나 현재는 폐기되었다.

왜냐하면 탁자식 고인돌과 미송리식 토기의 발견 위치가 서로 상이하고, 이들을 같은 문화라고 보기에는 이질성이 매우 강해서 고조선이라는 한 집단의 표지로 삼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또한 비파형 동검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양식이 아니었으며, 토기 양식 또한 특정 문화의 파급 정도는 알 수 있어도, 국가의 영역을 파악하는 척도로 활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비파형 동검 자체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세 가지 이상의 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어느 문화권을 고조선의 문화권이라고 특정짓기가 매우 힘들다. 또한 고대에는 현대처럼 국경이 명확하지 않고 황무지, 또는 무인지대로 남겨져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강역 전체를 통치하지도 못했다.[1]

더불어 초기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요서에서 출발하여 전성기에는 현재의 랴오닝성 일대와 지린성, 그리고 북한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멸망할 때의 위치는 현대의 평양시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일부 지역 및 랴오동 반도 일부로 본다. 이는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영향권보다 요동 방면의 영역이 축소된 것인데, 대신 위만조선시대에 동남 지역으로 남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미송리식 토기를 고조선의 영향력과 문화권을 추측할 수 있는 유물로 보았다. 이 견해는 수십년 동안 다수설이었으며, 국정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현재는 폐기된 학설이지만 여전히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단편적 유물보다는 유적군의 분포 및 사서와의 교차 검증 등을 이용해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현재는 평안도 일대 및 랴오둥 내륙 지역이 주목받는다. 남한에 있는 마니산 참성단은 종교적으로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유적지로 추정되는 북한 지역에 대한 탐방이 불가능하고, 북한 학계에 대한 신용도도 높지 않아서[2] 한반도 지역 고조선 문화에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랴오닝 성과 그 근처 지방에서 초중기 시대의 고조선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기는 하나, 비교 검증할 만한 중국 사서에 남은 문자 기록이 단편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제나라 등 중국 동부 국가들과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할 수준은 되기는 하다. 그나마 기대할만한 문헌기록은 청대 《사고전서》 정도이나 너무 분량이 방대하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기록상에 등장하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이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한국의 사서들은 고려시대 이후 것만 남아있기 때문에[3]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여 단군왕검, 기자, 부왕, 준왕, 위만, 우거왕 등 몇몇 군주에 대한 기록만 단편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나마도 상당수는 중국 측 사서 기록을 인용한 내용들이다. 이는 타자에 의한 기록인 데다가 연대와 시각이 모두 제각각으로 교차 검증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일단 역사학에서는 다른 문헌과 비교했을 때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 문헌끼리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확인되는 이른바 '교차 검증'을 중요한 사료 검증의 방법으로 여기는데, 교차 검증을 진행하기에는 고조선 관련 기록을 모두 적어도 A4지 몇장 분량에 불과하다.

문헌 부족을 메워줄 설화와 전설도 고려시대 이후의 것이 확인되며[4]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신화와 전설이 전승되어 왔고, 그 특성상 후대의 시각이 적잖이 반영되어 있으며[5] 그 이후의 고조선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설화나 전설은 별로 전승되어 오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기원전 5세기 이전 고조선의 상황에 대해 연구하려면 중국의 문헌에 남은 단편적인 기록을 비판적이되 합리적인 방법으로 분석하고, 고고학적인 유적• 유물 발굴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東夷之國, 朝鮮爲大,

동이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출처

하지만 기록이 부실할지언정 오랜 기간 존속했다는 점이나 여러가지 면모를 보면 국력 자체는 건실한 나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초중반, 전국 7웅 중의 하나였던 연나라의 침략으로 요녕 일대를 잃고, 쇠락하던 시기가 있었더라도, 이 시기를 제외하면 영토 확장이나 주변 지역 복속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는 등 대체로 강성했던 편이었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중국과 교역하며 중국계 이주민 유입도 있었지만 그러면서 끝끝내 중국 문명권으로는 동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나[6] 다른 북방민족인 동호흉노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거나 복속되었다는 식의 기록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저력이 셌던 나라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단지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유물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반면 국가 체계 자체는 귀족들이 각 지역별로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는 형태의 연맹왕국으로 중앙집권화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아서 국란과 분열은 취약한 면이 있었다.[7]

3. 위치[편집]




3.1. 평양 중심설[편집]


기존의 사서 기록 및 평양 지역에 남은 다수의 설화, 발굴 작업으로 인해 평양에 고조선의 수도가 존재했다는 평양 중심설이 주류설이자 전통적인 인식이었다.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해석은 한나라 시대 이후 다수의 중국 문헌과 -《삼국사기》 이후 확인할 수 있는 한국의 다양한 전통 문헌 속에서 누차 확인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다수의 실학자들 또한 동의한 것이다. 또한 낙랑군의 치소가 '조선현'이었기 때문에, 군현의 이름이 대체로 현지의 지명에서 비롯하므로 상식적으로 조선현이 있는 낙랑군이 고조선의 중심지일 것이라는 추론이 일반적이다. 또한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대인 전한, 후한 시대의 기록 대다수도 낙랑군이 고조선의 옛 지역에 설치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일찍이 신채호는 '삼조선설'을 제시하여 고조선의 범주를 확장했으나, 삼조선설 자체가 사료의 오독에서 비롯되었고, 고고학적 근거보다는 본인의 추측에 의거하여 설을 전개하는 경향이 커 현재는 사장된 상태이다.

현재 앞서 언급하였듯 정가와자 문화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요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이 주목을 받고, 현대적인 '중심지 이동설'이 제시된 현재는 대체로 진개의 원정으로 인한 중심지 이동 이후에 평양이 수도로 자리잡았다는 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대 국내 고조선 연구를 대표하던 인물 중의 한 명인 한국교원대학교 송호정 교수[8]는 요동 지역의 정치적 중심성이 생각보다 미약하며, 한반도 서북부의 비파형 동검 문화와 세형 동검 문화의 연속성이 강하다는 입장에서 '평양 중심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2012년의 논문 또한 한국사의 초기 국가 형성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고려대학교의 박대재 교수 또한 진개의 원정 당시 점령된 지역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니라고 보면서, '중심지 이동설'에 대해 사료적 해석이 과잉되었을 수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친 바 있다. 2017년의 논문(클릭 시 다운로드)

다만 이와 같은 해석에는 정가와자 문화와 팽이형 토기 문화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며, 팽이형 토기 문화가 정가와자 문화보다 후진적이라는 점이 있어, '어떻게 팽이형 토기 문화에서 기원한 고조선이 정가와자 문화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복속시킬 수 있었나'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물론 송호정 교수 등도 세형 동검 문화의 발전을 봤을 때, 한반도 서북부가 후진적인 문화권이 아니었다는 입장에서 여러 반론을 펴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유물론적 실증주의 사관에 입각해 1950년대부터 '요동 중심설'을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중심지 이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동시에 단군릉 개건 등 민족주의적인 정치 사업을 벌이면서 의도적으로 '평양 중심설'을 정부의 공식 주장으로 내세웠다. 때문에 1980년대 이후 북한학계의 학설은 비학술적인 정치적 주장으로서, 학문적인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3.2. 요동 중심설[편집]


요동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었다는 주장은 조선 후기에도 드문드문 제시된 것으로 보이고(위에서 링크한 박대재 교수의 논문 참조), 1950년대 이후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등이 종합되면서 북한 학계에서 '요령 인근설'이 제시되었다. 이후 한국 사학계도 이를 받아들였으나, '평양 중심설' 또한 부정하기에는 많은 사료가 이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혼란상을 보였다. 고조선의 가설상의 위치를 요령 인근으로 옮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료 중의 하나가 기원전 4세기 《전국책》 <연 조>에 등장하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 기록에서 소진은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다"

고 했다. 해석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문면 그대로 해석하면 조선은 요동에 위치했거나 그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것이다.

한편 앞서 인용한 《사기》 <오제본기>에서도 약간의 단서가 있다. 조선의 구성원으로 추정되는 '발'(發)은 중국 기준의 북방에 존재했으며 산융과 식신 사이에 나타났는데, 산융이 요서 인근에서, 식신(숙신)이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대략 그 사이에 존재했을 것이다. 대략 중국의 동북방이므로, 이는 발을 동이로 파악한 《일주서》의 기록과도 어느 정도 합치한다.

그렇지만 위의 경우, 모두 한반도 서북부에 조선이 존재했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는 자료는 아니다. 어쨌거나 요동 근처에 있고, 산융과 식신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둘 다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심지 이동설'의 등장 이후에는 정가와자 유형 등의 고고학적 문화 또한 전기 고조선에 한정하여 설명할 수 있고, 평양에 관련된 자료 또한 후기 고조선에 한정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일한 '요동 중심설'의 세가 많이 위축된 모양새이다.

이외에 고조선이 요하 인근(요서 ~ 요동)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로는 연대 미상의 《산해경》이 있다. 다만 《산해경》은 굉장히 판타지한 서술 때문에 사료의 신뢰성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은 알아두어야 한다. 또한, 《산해경》의 특성상 이 구절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만들어져 삽입된 것인지 알기 어렵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산해경》 <해내북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어 이름을 조선 천독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산해경》 <해내경>}}}
각주에는 '지금의 낙랑현이며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이라고 하고 있으나, 평양에 고조선이 위치했을 경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라는 서술과 어긋나게 된다. 이 때문에 보하이 해 인근(요서~요동)에 고조선이 위치했으리라고 보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 <해내경>에서는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라고 해 확인사살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해', '북해'라고 하는 것이 꼭 '동쪽의 바다', '북쪽의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중국의 주변이 '사해(동해, 서해, 남해, 북해)'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는 고대 중국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표현이므로, 그냥 일반적인 '동방', '북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천독'(天毒)은 해석에 논란이 많다. 가장 신빙성있는 가설은, '독'(毒)이 갑골문에서 '어미 모'(母)와 어원이 같으며 따로 구별하지 않고 혼용해서 썼는데, '어미 모'(母)에 비녀를 꽂은 상형이 '독'(毒)에 해당하며 결혼해서 머리를 올린 유부녀를 뜻하기 때문에, '천모'(天母)로 해석하는 것이다.

"(조선은) 어머니를 하늘로 여기며[9]

, 물에서 살고 다른 사람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며 아낀다."

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해석은 한(漢)나라 시대에 '천독'은 'Sindu'로 음차되며, 인도를 나타내는 '천축'(天竺) 또는 '신독'(身毒)과 유사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조선'까지만이 본래 여기 있었던 본문이며, '천독' 이하의 구절은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후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昌遼, 故天遼, 屬遼西)

라는 대목이 나오는 데다, 선비족이었던 모용황이 이곳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공'에 임명되는 일도 있었다. 아래에서 인용한는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조-의 '험독'과 연관지어 보기도 한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오강원은 2015년에 '현도(玄兎)'를 의미하는 구절이라고 보기도 했다. # 어쨌든 이러한 재해석에 따르면 중국 동북쪽의 조선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이때의 중국 중심지인 중원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서북부 또한 동북쪽 해안 지역이 맞으므로, '평양 중심설'에 대해 완전히 반론이 되는 자료는 아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도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는 의외로 위만조선 시대의 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확실히 보고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고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의 유적지 또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기존에 주목받아 왔던 대동강 남쪽의 낙랑토성에서도 주를 이루는 것은 낙랑군 설치 이후의 유물이고, 낙랑군 설치 이전의 유물은 확실하지 않다.[10]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찍이 고조선의 후기 수도를 대동강 북쪽에서 찾았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전한의 군대가 고조선의 왕험성을 포위할 때의 서술을 할 때, 왕험성의 서북쪽에서 육군이, 왕험성의 남쪽에서 수군이 성을 포위했다고 했는데, 이 서술은 수군이 남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대동강 북쪽을 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강 북쪽에서도 국가 단계의 왕성이라고 할 만한 유적이 확실하지 않다. 때문에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아예 평양 일대에서 벗어나서 고조선의 수도 유적을 찾아야 한다는 입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2017년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낙랑군치와 왕험성이 무조건 일치해야한다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대동강 북안설'을 고고학적 시선으로 검증해보려는 시도로서 왕험성을 요동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

또한 문헌학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듯 북한학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아래의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에 달린 응소의 주석 등을 근거로 '요동 중심설'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심지 이동설'이 제창된 이후에도, 2000년대에 조법종과 김남중 등이 통설에 이의를 제시한 바 있었다. 조법종은 《한서》 <지리지> 등에서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이 기원전 108년 설치된 것과 달리 현도군은 1년 늦은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고, <공신제후표>에서도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이 완료된 것이 기원전 107년으로 나타남에 주목했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도군이었기 때문에 군현이 가장 늦게 설치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2000년의 논문 2006년 출간한 책에 대한 2007년의 기사 김남중 또한 험독현이 전한 후기에는 흥경에 존재하다가 후한 시대에는 요동속국 자리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고조선의 왕성이 있었던 지역을 요동군 험독현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보았다. 2006년의 논문

위에서 몇 차례 언급했던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는 다음과 같다.

險瀆【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説是也浿音普大反。】

험독【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의 왕 (위)만이 도읍한 곳으로, 물이 험하여서 '험독'이라고 했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이 마땅히 험독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맞다. 패는 '보'와 '대'의 반절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조- 주석}}}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명백히 왕성이 아닌 곳에 왕성이라는 서술이 붙어 있어서, 새로운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료로 많은 주목을 받은 기록이다.

다만 이러한 설은 누차 언급했듯 정설은 명백히 아니며, 학계에서의 지지자는 극소수이다. 먼저 평양 지역의 경우, 늦어도 1980년대 이후에는 북한학계의 정치 논리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정상적인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문헌자료가 매우 빈약하여, 평양 지역의 고조선의 유적일 가능성이 있는 유적조차도 정확히 편년이 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때문에 아직은 정밀한 발굴을 기다려 볼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또 고조선과 낙랑군이 위치한 것으로 주류 설에서 보는 평양 지역(특히 대동강 북쪽의 평양성 터)은 고구려, 고려, 조선을 거쳐 현 북한에서 유수의 대도시로 자리잡으며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무덤은 깎여 없어지고 부장품은 도출 내지 유출되어 모조리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없는 것 자체가 논리의 근거가 되지는 않지만, 실제로 경주 시내의 유적이나 가야의 초기 고분군, 서울(현대 이전에는 하남)의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 고분 등 도심지에 위치한 유적, 특히 평지에 위치한 유적들은 이런 이유로 고고학자들의 손길이 닿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거칠게 말해, 요동 지역에도 고조선의 수도라고 할 만한 명백한 유적이 있느냐고 하면 확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11] 다시 말해 대안 가설이지만, 대안이 확실하지는 않다.

현도군이 분명히 낙랑군 등보다 1년 늦게 설치된 것은 사실인데, 주류 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고조선의 중심지여서 그렇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가령 그 지역이 고조선의 변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최우선 작전 지역이었던 고조선의 중심지 점령에 비해 복속이 늦어졌다고 보아도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다. <공신표>에서의 기록이 1년 늦는 것에 대해서는, 왕험성 함락 자체가 아니라 공훈의 보고와 포상 결정 절차가 1년 더 걸렸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신선한 지적이기는 했지만 다른 설명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또한,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될 평양의 대안 지역으로 요동 지역을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다. 당장 이러한 설에서 왕험성이 위치했을 대안 지역으로 언급하는 지역은 한나라 요동군의 지척에 위치하는 지역이며, 진개에 의한 점령 이후, 고조선의 세력 회복에 대해서도 조금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러한 가설에서 위만조선의 중심지라고 보는 지역은 후기 고조선이 주도한 문화로 비정되는 세형 동검 문화권의 중심지와도 괴리되어 있다. 여러 모로 기존 설을 뒤엎기 위해서는 여러 보강 설명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위험성 때문에 주류 설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험독현조-의 주석을 살펴보면, 응소의 주석만이 아니라 신찬의 주석도 달려 있다. 신찬의 주석은 왕험성=대동강 남쪽이라는 주장이고, 신찬이 말한 이곳 또한 평양시 낙랑구역에 대응하는 낙랑군 조선현을 의미한다. 당나라때의 안사고 또한 응소보다는 신찬의 설명이 설득력이 높다고 보았다. 이처럼 응소의 주석이 전근대에도 설득력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음은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중심지 이동설'의 입장에서는, 이 주석이 요동에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던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상황을 설명하는 자료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쩌다 보니 주류 설보다도 설명이 길어졌는데, 하여튼 결론만 다시 말하자면 현재로서는 주류 설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은 학계에서 정식으로 논문으로 공표되는, 일정한 내적 논리를 인정받은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평양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매장당한다'는 식의 이덕일류의 주장은 위와 같이 학계에서 고조선의 '평양 중심설'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는 데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입장에서 보는 경우에도 고조선이 하북 지역에 위치했다느니 하는 이덕일류의 설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사짜이다. 하북 지역의 경우 고조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중국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지역이며,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가 발전하는 기초 토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덕일류의 주장이 거시적인 맥락에서 볼 때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굳이 첨언하면, 하북이 조선의 영역이라는 주장은 대부분 ① 사료의 잘못된 해석이나 ② 낙랑군이 요서 지역으로 후퇴한 이후의 자료, 또는 ③ 기자조선설과 관련된 잘못된 자료를 가지고 아득바득 우기는 모습을 보인다. 이 항목에 덧붙여진 다음과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동방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서 간다.

《회남자》(淮南子)


먼저 ①의 대표적인 사료이다. 《회남자》에서는 (중국적 세계관의) 동쪽 끝이 갈석과 조선을 지나서라고 되어 있다. 갈석(산)은 하북성(河北省) 창려현에 있으며 노룡현(盧龍縣)과 같은 부근의 지역이라고 해서 조선이 하북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독해 자체가 잘못되었다. 갈석산에는 '~부터(自)'라는 표현이 붙어 있으므로 여기서 출발해서 조선을 지나가는(過) 동방 행로를 나타낸 것이다. 조선에 갈석산이 속해 있다는 주장이 아니며, 그런 류의 주장은 7세기에 《진서》를 편찬하면서 수집된 잘못된 자료에서 비롯한다.

盧龍縣 : 朝鮮城,即殷箕子受封之地,今有廢城。

노룡현 : 조선성, 즉 은나라 기자가 봉함을 받은 영지이다. 지금은 폐성廢城 이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노룡현>(盧龍縣)


송나라때의 역사 지리서인 《태평환우기》에는 하북성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③의 유형으로 '기자조선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보인다. 하북 지역에서 조선과 관련된 자료는 대개 이처럼 기자 전승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서주~춘추시대에 중국의 동북방 강역이 하북 지역을 끝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 전승도 그 근처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기자 전승이 조선과 관련된 것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이후로, 진개의 조선 정벌 이후이며 특히 진나라의 성립 이후에 유행하여 조선의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승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당대 자료로서 이용하기 어려운 것이다.[12]

이처럼 '하북설'의 나름대로 근거랍시고 제시되는 자료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 있는 사람이면 왜 '요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라도 '하북설'은 따르지 않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3.3. 중심지 이동설[편집]


고조선을 요령에 비정할 경우,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지목하던 기존의 사료들이 붕 떠버리게 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부터 제시된 것이 일종의 절충설인 중심지 이동설이었다. '이동설'에 따르면 요령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이 평양으로 옮겨가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연나라와의 충돌이었다. 이는 후대에 나온 설이니만큼 양측 설과 고고학 유물에 따른 세력권에 대한 포괄이 가능해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학설 내에서도 연나라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동설'은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조선을 쳐 강역 2,000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에 의거하며, 이는 청천강 이남으로 제한된 세형동검의 출토 범위,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 연나라의 흔적(연화보 - 세죽리 문화권)과도 대강 합치한다. 이는 연나라가 최종적으로 획득했다는 '만번한'을 평안북도 박천에 비정한 이병도 이래의 통설이었다. 다시 말해 청천강 이남 지역을 고조선이 후퇴한 영역으로, 청천강 이북~요동 지역을 고조선으로부터 연나라가 빼앗은 지역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정밀한 고고학 자료가 다수 보강되면서 청천강 이북~천산산맥 지역을 일종의 점이 지대로 보는 경우도 늘어났다. 비판의 핵심은 해당 지역의 일부 거점에서만 중국계 유물이 확인되고, 그나마도 토착 세력의 유물과 혼재되어 나타나므로, 연나라의 군현이 설치된 지역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종의 교역 거점 지역이나 군현이 명목상 설치되었으나 실제로는 토착 세력과 협력하여 운영되었을 지역이 많다는 것이다.

파일:/storage/upload/2008/12/55/87992996_1228746681.jpg

“만번한은 문현과 번한현을 연칭한 것이 만번한으로 보인 것입니다. 문현의 위치는 지금의 계주 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번한현이 어디있냐 했을 때 문현과 번한현은 소위 인접한 지역으로 상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번한현의 위치도 청천강 유역에서 찾기 보다는 오히려 요동 반도 쪽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번한현은 《성경통지》에 의하면 대체로 지금 해성 지역으로 보입니다.”

서울대 노태돈 교수


현재도 이런 입장은 적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2017년 이후석 숭실대 교수는 고조선의 강역과 만번한, 패수의 위치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만번한은 천산 산맥 서변의 자연계선이고, 패수는 압록강이라고 주장했다. 고고학적으로 물질 문화를 살펴보면, 천산 산맥이라는 자연 경계를 기점으로 연나라의 물질 문화와 고조선의 물질 문화가 구분되어 나타난다. 또한 압록강을 기점으로 전한의 물질 문화 분포와 위만조선의 물질 문화 분포가 구분된다. 관련정보

2010년대 들어서 연나라 군현에 해당하는 요서 ~ 요동 일대의 미안구 유형 유적과 주변의 연나라 군현에 해당하지 않는 요동 지역 중앙 지역의 유적 / 유물 간 비교 조사를 통해 요하 일대의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을 최대한 확실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 기존의 문헌과 추측에 의존한 연구에 비해 정확한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13] 위 논문을 기초로 만들어진 지도 링크. 연나라의 영역이 청천강 근처까지 뻗어있지만, 동시에 요동 지역 상당수를 토착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오히려 2010년대 들어 '중심지 이동설'의 새로운 해석은 후기 고조선 시기가 아니라, 전기 고조선의 성립을 논해야 할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시기와 관련하여 나오고 있다. 맨 위에서 언급했듯 요서 지역, 대릉하 유역 십이대영자 문화가 정가와자 문화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이에 대해 문화적 영향력이 미친 것으로만 보고, 이들 집단이 직접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으나, 2010년대 이후 등장하는 요서 → 요동 → 평양으로의 2차에 걸친 '중심지 이동설'에서는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십이대영자 문화가 기원전 6세기 이후 정가와자 문화로 직접 계승되었다고 본다. 그 경우, 앞에서 난해하다고 했던 《산해경》 <해내북경>도 '산의 남쪽, 바다의 북쪽'을 '산의 서남쪽, 바다의 동북쪽' 식으로 의역하는 것을 넘어 문구 그대로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다만 안 그래도 고조선 관련 문헌이 부족한 와중에 요서 → 요동으로의 이동은 문헌에서 뒷받침해 주는 것이 더욱 적기 때문에 아직은 주목받는 신설로 남아 있다.


3.4. 기타[편집]


이외에 조선이 '요하' 인근에 위치했다는 추정에서 시작해, 《산해경》< 해내경>에서

'요수가 위고의 동쪽으로부터 나서, 동남으로 흘러 발해 방향으로 흘러 요양으로 들어간다(潦水出衛皋東, 東南注渤海, 入潦陽)'

라고 한 것을 근거로 조선이 '동남쪽으로 흐르는' 대릉하 인근에 위치한다는 재야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요하가 어떻게 흐르는지 찾아보지도 않은 주장이다. 요하의 상류는 내몽골 지역에서 발원해, 현재의 랴오둥 성 권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말 동쪽으로 흘러간다. 지도 참조. 발원지를 기준으로 하면 요하는 발원지의 동남쪽에서 발해로 들어가는 것이 맞다.

한편 3세기 무렵 저술된 《수경》의 <패수조>를 들어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가 요동~서북한 지역이 아니라고 보기도 하는데, 척 보기에도 황당한 가설이지만, 일단 그 원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고,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6세기, 북위의 역사가인 역도원(酈道元)은 위와 같이 읽고 자신이 들은 내용을 주석으로 달았는데 이것이 수록된 책이 《수경주》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이 패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패수는 난하나 대릉하다'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 (중략) …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 以朝鮮為遠 (循)'脩'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허신이 말하기를 '패수가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도 한다.'고 하였다.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남쪽에서 나와 누방을 지나는 것이다. … (중략) …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무제 원봉 2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하여 우거를 토벌하였는데, 패수에서 우거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땅이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는데, 내가 번국의 사신에게 물어보니 성이 패수의 남쪽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의 조선현을 지나가므로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곳이며 한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패수는) 서북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한서》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패수가 서쪽에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이다. 또 한나라가 흥할 때 조선이 멀었다고 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지금과 옛 것을 고증해보면 차이가 있고 그릇된 것은, 아마 《수경》이 틀린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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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본 결과 《수경》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미 6세기부터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고구려의 수도인 대동강 유역에 비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낙랑군과 직접 싸웠던 고구려가 틀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부의 주장으로는 동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생기고 서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안생기냐면서 역도원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일단 허신이나 《십삼주지》에서 말하고 있는 패수는 명백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역도원 당시에는 이미 패수는 다른 하천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14] 역도원 당시의 패수는 한반도 부근의 강을 지칭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반도의 강이 동쪽으로 흘러가면, 굳이 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고, 서쪽으로 흘러야만 강을 건너서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을 고구려 사람들에게 확인했고 그래서 《수경》이 틀렸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하여 해석을 달리 했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東 入於海。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어렵지 않게 풀린다.

이외에도, <패수조>가 수록된 《수경주》 권 14에서는 이 앞에 대릉하에 대응하는 유수와 요하, 혼하에 대응하는 대요수, 소요수 등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그 순서는 하북 지역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다. 패수는 대요수, 소요수의 뒤에 나오며, 대요수, 소요수는 명백히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요하 인근 지역임이 분명한 대요수, 소요수 뒤에 있는 패수가 갑자기 하북 지역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책의 체제와도 맞지 않는 설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인용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을 조선, 동부여, 북부여, 남·북 옥저, 예맥, 고구려, 신라까지도 포괄하는 강역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단군고기》(檀君古記)


이외의 설이나 이 부분의 내용은 이쪽을 참고. 대동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부분을 입해지로 보기도 한다.

남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요충지로 삼았던 것, 몽골계 유목제국과 동맹이었던 것, 중화권 국가와 투쟁했다는 것, 쿠데타 및 내분을 거쳐 통일 중화제국에게 멸망했다는 점에서는 여러모로 고구려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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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초에 유목민족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도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무인지대에서 목축을 했기 때문이었다.[2] 북한에서도 고조선 유적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어 1960년대에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1960년대 중후반에 고고학계에 한 차례 숙청 바람이 분 이후에 여러 문제로 신뢰성이 낮아졌다. 물론 이후로도 고조선 시대의 유적이나 유물 발굴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단군릉 개건을 엉망진창으로 한 여파로 인해 남한학계로부터 그리 신뢰를 받지 못하는 편이다.[3] 고조선에 대해 서술한 《단군고기》와 《삼한고기》가 조선 초기까지 전해졌지만 《삼국유사》에 인용된 부분을 볼 때 설화성이 강하고, 주로 초기부분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마찬가지라 한계성이 있었던 듯 하다.[4] 그러나 고구려에서도 고조선을 인식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고구려/종교 항목 참고.[5] 예컨대 환인이라는 신의 이름은 불교의 인드라가 투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는 것은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다 보니 조선에서는 이를 단군 수십 명의 재위기간을 합산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을 정도였다.[6] 당시 장강 이남 지역은 중국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백월'이라고 싸잡혀 불린 동남아-폴리네시아 계통 이민족들이 살던 땅이었다. 또한 태국의 타이족, 미얀마의 버마족, 라오스의 라오족들도 이 당시 중국 남부에 거주했다. 또한 장강 지역 국가들도 원래는 중원과 별개의 정체성을 지녔던 지역이었는데 이후에는 비록 중화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엔 중원 국가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장강 유역의 국가들이 중원으로까지 진출하며, 중원인들을 다소 포함한 결과, 중화문명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고, 장강 이남 지역 또한 한나라가 400여 년 동안 장기 지배하고, 전란 등의 이유로 북방에서 몰려들어온 한족과 통혼을 통해 융합되어가면서 지금의 한족 인구로 이어지게 되었다.[7] 물론 이 당시 중국도 중앙집권화가 완전하지는 않아서 비단 고조선만의 문제점은 아니기는 했다. 진나라가 무리하게 중앙집권화를 밀어붙혔다가 통일 15년 만에 멸망하기도 했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초한전쟁부터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되기 전까지 봉건제와 중앙집권제를 혼합한 군국제로 나라를 운영했다.[8] 이후 설명하는 서울대학교 노태돈 교수의 제자인데, 입장을 서로 완전히 달리한다. 환빠들의 주장과 달리 학계에서 새롭고 타당성이 있는 학설이라면, 지도교수라 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9] 天을 동사로 생각하면 母는 명사가 되면서 목적어가 되기 때문에 '어머니를 하늘로 생각하다'는 뜻이 되며, 母를 동사로 생각하면 天이 명사가 되어 주어가 되기 때문에(앞에 있으므로) '하늘이 어머니 같아서'or '하늘은 어머니다워서'라는 뜻이 된다. 후자는 차라리 母天이라고 해야지 '하늘을 어머니로 여겨서'로 해석 가능하다. 또한 天과 母 둘 다 명사로 본다면 '하늘이 어머니이다'or '(조선은) 하늘의 어머니이다' 라고 단정짓는 듯한 말도 될 수 있지만, 문맥상 이상할 뿐더러 <단군신화>에 따르면 하늘은 아버지이다. 이렇게 하늘을 주어로 둔 해석은 문맥상•역사상 맥락으로 볼 때 이상하므로 母를 목적어로 둔 제일 처음의 해석을 따른다. 그러므로 '조선은 어머니를 하늘로 여기며'가 가장 바른 해석이다.[10] 북한학계에서는 일부 유물을 고조선 시대까지 소급시켜 보기도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학계는 1980년대 이후 정치의 노예화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 이외에 주관적인 해석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고조선 시대의 제단이나 청동기, 철기 유물이 발굴되었기는 했지만 걸리적 거리는 것이 있으니 인정하기에는 뭐하다는 얘기이다. 물론 한국학계에서 '거기 위만조선 때 자료가 나올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 두는 것이다.[11] 조법종 교수의 2016년 발표에서도 낙랑토성이 왕험성이 아닐 수 있다는 본인의 논지는 전개하면서도, 요령 지역에서 왕험성에 비정할 뚜렷한 유적이 없다는 것은 인정한 바 있다.[12] 한국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에 이와 같은 '기자조선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체로 '기자조선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있다. 만일 이런 사료를 다 인정하면 고조선은 기자가 세운 전형적인 중국계 왕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약점을 묻기 위해 유사역사학자들이 내놓은 것이 '은나라 동이설'인데, 거짓말을 덮기 위해 눈덩이 굴리듯 거짓말이 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13] 관련 논문: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 문화의 관계> / 오강원, 《한국 상고사 학보》 / 2011년[14]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예 패수란 명칭을 가지는 하천 자체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