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7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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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단
2.1. 주나라의 봉건제(封建制),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
2.2. 한(漢)의 군국제(郡國制)
2.3. 기원전 177년 제북왕 흥거(興居)의 반란
2.4. 기원전 174년 회남려왕(淮南厲王)의 반란
3. 조정의 개혁
3.1. 원앙의 대책
3.2. 가의(賈誼)의 대책
3.3. 한경제의 즉위와 조조의 대책
4. 제후들의 반발
4.1. 대 제후왕 유비
4.2. 초왕 유무에 대한 탄압
5. 오초7국의 난
5.1. 동지를 모으는 유비
5.2. 7개 나라의 반란
5.3. 조정의 대응
5.4. 주아부의 계책
5.5. 장수들의 계책을 거부한 유비
5.6. 양왕의 분투와 주아부의 역습
5.7. 주구의 진격
5.8. 유비의 죽음과 반군의 궤멸
6. 결과
7. 관련 인물
8. 기타


1. 개요[편집]


파일:오초칠국의 난.jpg

吳楚七國의 亂
(吳楚)七國之亂, 七王之亂(현대 중국에서의 표기)
Rebellion of the Seven States

기원전 154년, 중국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시기에, 중앙 정부와 오왕 유비(劉濞)를 비롯한 제후왕들이 벌인 전쟁. 반란을 일으킨 일곱 제후국인 오(吳), 초(楚), 교서(膠西),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 조(趙) 중에 오나라와 초나라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기에 오초7국의 난이라고 불린다.[1] 현대 중국에서는 '오초'를 기재하지 않은 '칠국지란'이나 '칠왕지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반란의 진압을 기점으로 중국은 군현제를 확립하였고, 향후 2,000년간 이어지는 중앙 집권 시스템의 가장 기초가 되었다.


2. 발단[편집]



2.1. 주나라의 봉건제(封建制),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편집]


{商, 혹은 은(殷)}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차지한 주(周)봉건제를 통치 제도로 삼았다. 왕이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충성 및 군사적인 조력, 또는 일정한 세금을 상납받는 제도를 말한다.

이것이 서양의 'Feudalism'과 다른 점은 서양의 경우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 주종 구도였던 것에 비해 주나라는 혈연 관계를 기반으로 "모두 우리편" 같은 형태였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즉 왕과 제후들이 핏줄과 혼인으로 이어지고 제후의 임명에 관해서도 기존의 봉지로 부임시키는 것이 아닌, 허허벌판으로 파견보내 점령을 하고 그곳을 개발해서 살게했다는 점이다. 이때는 말 그대로 고대였다.

주나라가 제후들을 보내는 형태는 다음과 같았다. 하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아들인 천자(天子)가 제후에게 책명(策命)이라는 의식을 거행했다. 여기서 읍토(邑土)와 백성을 수여한다는 내용의 임명서인 간책(簡策)이 수여되었고, 동시에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서 이기(彛器:청동제의 제기)와 거마구(車馬具), 의복과 금옥의 장식, 깃발들이 주어졌다. 제후는 그것들을 받고 떠나 적과 싸우고 땅을 점령하여 읍들을 만들고, 혈족들을 경대부(卿大夫)라고 말하는 경과 대부로 나누며 정치를 직접 담당하는 고위 벼슬아치로 재책명(再冊命)하여 관리로 만들고 지방을 다스렸다. 이렇게 하면 천자부터 제후, 경, 대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혈족이 되는 것이었다.

주나라 조정은 이봉(移封)이라고 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제후들은 지역의 특산물을 공납으로 바쳐야만 했다. 또한 조근(朝覲)이라고 하여 일정 시기에 따라 조정으로 와서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주나라 천자는 틈이 나면 봉지를 둘러보면서 현지 사정을 보고 제후들에게 무력 시위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을 순수(巡狩)라고 했다.

이렇게 봉건제를 하면서 안전장치를 갖추어 놓은 이유는 사실 주나라도 봉건제를 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자기가 직접 자신의 땅을 다스리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데다가 주나라 또한 상나라의 제후국으로 반란을 일으켜 상나라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봉건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상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세력이 약해서 주변 제후국의 군대를 모아 연합군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끝에 승리하였으며, 상나라의 잔여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결국 상나라의 자성 왕족 중 그나마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던 미자 계를 제후로 삼아서 송나라를 만들어 분봉할 정도의 상황에서는 중앙 집권 따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봉건제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문명 수준과 그에 따른 통치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넓은 영토를 직접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봉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점점 약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동주(東周) 시대에 접어들면서 원래 수도였던 호경이 서융에게 개박살이 나서 낙양으로 도망쳐서 새로 나라를 일으킨 주 왕실의 권위와 힘이 떨어지자 제후들을 감시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제후들은 겉으로는 여전히 주나라 천자에게 복종했지만 실상은 천자와 다름없는 행세를 하며 서로 다툼을 일삼았다.[2] 이것이 춘추시대(春秋時代)인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면 기어코 주나라는 그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세상의 주인이 된 (秦)은 낡은 봉건제를 폐기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시켰는데 이것이 중앙집권체제인 군현제(郡縣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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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36개 군

군현제의 기초적인 모습은 춘추시대 때도 존재했지만 제대로 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BC 350년의 일로 진(秦) 효공(孝公)때 법가(法家) 사상가인 재상 상앙(商鞅)이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41개의 현으로 정리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군현제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황제의 명령을 받은 관리들이 임지로 떠나 중앙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지방분권적인 봉건 제도에 비해 황제의 의중을 정치에 좀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여섯 개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는 이사(李斯)의 계책을 받아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이 군현제를 제대로 시행해 보기도 전에 여러 실책과 악재가 겹치며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2.2. 한(漢)의 군국제(郡國制)[편집]


파일:hYb0dOl.jpg
군국제와 군현제를 나타낸 그림.
다만 한나라의 군국제는 위의 그림에 비해서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부분이 크다.

항우(項羽)는 거록대전에서 장한을 격파하고 진왕 자영을 자결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스스로를 패왕이라 일컫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일단 진 황실과 진나라의 제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시기였기도 하고, 항우 입장에선 자기를 따라 싸운 동맹 세력과 수하들에게 보답을 해 줘야 했다. 이리하여 장한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위표를 서위왕으로, 영포를 구강왕으로 임명하는 등 골고루 전부 왕을 시켜주었다.

항우에 의해 한왕이 된 유방은 항우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항우와 격돌하다 팽성전투에서 패배해 위기에 봉착한 유방은 장량역이기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때 역이기는 멸망한 6국의 후예에게 봉토를 내려 연합해 공격하자며 봉건제를 주장하여 유방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장량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봉건 제도를 쓰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독립적인 군단을 이끌고 있던 한신은 결국 원하는 대로 왕으로 봉해줬다.[3] 마침내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패배시키고 천하를 손에 넣은 유방은 이제 한나라의 통치 제도를 정하여야 했다. 봉건제를 쓸 마음이 없었던 유방이지만 자신을 따라 싸운 공신과 동맹 세력들을 푸대접한다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다.[4] 그리하여 기존에 있던 7왕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삼아 1개 현(縣)을 단위로 한 봉읍을 지급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과 후국(侯國)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본받아 다스렸다. 이리하여 봉건제와 군현제가 섞인 통치 체제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국제였다.

하지만 일단 봉건을 해주고 나서도, 유방은 성씨가 다른 공신과 동맹들이 왕이 된 것을 불안해 했다. 얼마 전까지도 난세였고, 부하들은 대단한 영웅호걸이다보니 언제 자신의 자리를 탐하여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편 제후왕들도 원래는 자신과 동급인 왕이었다가 황제가 된 유방을 경계했고, 결국 연왕 장도의 반란을 시작으로 유방과 이성 제후왕들은 점차 대립 관계로 돌아섰다. 유방은 팽월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제거했고, 남은 왕들은 팽월 꼴이 될 것을 염려해 차례차례 유방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제거됐다. 토사구팽을 거쳐서 다수의 공신들을 숙청한 것이다.[5]

하지만 여전히 많은 왕과 열후들이 남아 있었고, 제거된 왕들의 자리는 유방의 아들들이 대신했으므로 군국제의 큰 틀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방 사후 여후는 유씨 왕들을 제거하여 왕들을 자신과 성씨가 같은 여씨 친족들로 바꿨다. 그러나, 서슬퍼런 권력을 자랑하던 여후 자신이 죽은 뒤 여씨 왕들은 기존 공신들과 남은 유씨 왕들의 반격에 패하여, 유씨 일가의 인물들이 도로 왕위를 장악했다. 다른 열후는 몰라도 '왕은 유씨'라는 것이 관례화되었다.[6]


2.3. 기원전 177년 제북왕 흥거(興居)의 반란[편집]


하지만 동성(同姓)왕들, 즉 유방의 형제와 조카들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막강한 세력을 가지게 됨으로서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독자적인 힘과 세력을 가진 이들은 중앙 정부에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7]

게다가 황제와 성이 같으니, 이성 제후들과는 달리 황제에게 대적하더라도 일단 승리만 하면 역성혁명이 아니라 황족 내부의 권력다툼 정도로 인정되어 쉽게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중앙정부에 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미 제후왕을 지내던 문제가 황제로 즉위한 사례를 만들었고.[8]

유흥거는 여후의 일족을 제거하고 한문제가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워 양나라의 왕이 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문제는 유흥거가 본래 자기 형 제애왕(齊哀王) 양(襄)을 황제로 삼기로 했다는 것을 알고, 제나라의 두 개 군을 떼어 명목상의 왕 노릇을 하게 했다. 이에 유흥거는 불만이 생겼다.

기원전 177년인 문제 3년의 5월, 흉노의 군대가 노략질을 일삼자 문제는 8만명의 대군을 관영에게 주어 적을 물리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태원으로 떠났다. 흉노의 침입으로 군대도, 황제도 떠나자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유흥거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문제는 재빠르게 시무(柴武)를 대장으로 삼아 10만명의 대군으로 적을 막게 했다. 그리고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유흥거와 관련이 있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 모두, 항복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유흥거는 패배했고 반란은 진압당했다. 패배한 유흥거는 관군에게 붙잡혔고 압송되는 과정에서 자살했다. 이후 유흥거의 영지는 폐지되고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


2.4. 기원전 174년 회남려왕(淮南厲王)의 반란[편집]


회남려왕(淮南厲王) 장(長)은 고조 유방의 막내아들로 모친은 조나라 왕의 후궁이었다. 그녀는 유방을 모시다가 임신을 했는데 조나라가 반란에 연루되면서 같이 잡혀가게 되었다. 황제의 핏줄을 임신한 것을 알면 처벌을 면할 수 있었겠지만, 여후는 질투 때문에 일부러 유방에게 알리지 않았고, 유장을 낳은 어머니는 화가 나서 자결하였다. 후에 유장은 이 일에 미안해진 여후의 손에 길러지게 되면서 회남왕이 되었다.

하지만 성장 배경이 이러하니 유장이 바른 아이가 되기는 힘들었다. 특히 유장은 오만하고 포악해서 형인 문제가 즉위한 뒤에도 행패를 부리고 다녔는데, 문제는 형제가 모두 죽고 유장만이 남은지라 그래도 안타까워하며 항상 용서해주었다. 특히 유장이 심이기를 대놓고 죽인 적이 있었는데, 문제는 오히려 심이기가 여후의 측근이었던 것을 들어 그와 친했던 평원군(平原君) 주건(朱建)을 책망했다가 가족들이 연좌제로 엮일까봐 두려워한 주건이 자살을 택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유장은 심이기를 반가워하는척 하면서 그를 철퇴로 때려죽인것도 모자라 참수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잔혹 행위를 한것도 모자라 문제한테 심이기는 자신에게 죽을만한 죄가 있다고 말하며 그를 도적이라고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때문에 유장의 평판은 크게 나빠졌고 문제의 어머니인 효문태후 박씨와 황태자, 모든 조정 대신들이 유장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장은 그런 형 문제의 마음은 몰라주고 점점 더 사람됨이 난폭해져 갔다.

유장은 급기야 각 제후국의 재상과 고급 관리는 황제가 임명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조정의 관리를 쫒아내며 스스로 재상과 관리를 임명하려고 했다. 이건 반역에 해당되어 도를 넘은 행위였지만 문제는 동생을 총애해서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유장이 나중에 가면 교만함이 심해져 언행을 함부로 하며 살인 행각을 일삼아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된다. 이는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문제에게도 유장을 처벌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가 된다. 문제도 유장의 행패를 더는 용납할 수 없어 외척인 장군 박소[9]를 통해 편지를 보내 유장을 질책하며 당장 그만두고 자중하라며 적절하게 타일렀지만 이 망나니 동생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유장은 앙심을 품고 진짜로 반란을 일으켜려다가 들통나서 관군에게 조기 진압되어 잡혔다. 문제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정말 죽이고 싶지 않았기에 귀양을 보내려고 했는데, 유장을 문초하던 승상인 장창이 유장의 죄가 명백한 반역이며 그동안 유장이 많은 악행을 저지른만큼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원앙도 그 독한 성미로 하루아침에 몰락한 유장이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할 것이고, 자칫하면 문제 또한 오명을 쓸 것이라고 우려했기에 같이 사형을 주장했다. 이를 이해한 문제도 금방 유장을 불러들이려고 생각했으나 유장은 "내가 교만해서 이 지경이 되었지만, 앞으로 내내 이렇게 살 수는 없다."라며 압송되는 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진짜로 굶어 죽었다. 무엇보다 하필이면 유장의 막장스러운 인망 탓에 그가 굶어죽었을때도 아무도 수레 안을 살피지 않아 죽은 뒤에야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문제는 호송하던 병사들에게 책임을 물어 모두 사형에 처했지만 평생 이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또한 유장의 아들로 회남왕을 물려받은 유안은 《회남자》라는 책을 쓸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지만 무제 시절인 말년에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반란을 꾸미려다 발각되어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자살했고, 회남 지역은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

3. 조정의 개혁[편집]



3.1. 원앙의 대책[편집]


초나라 사람인 원앙(袁盎)은 주발과 친했는데 일찍이 회남왕 유장이 행패를 부릴 때 그의 봉토를 깎을 것을 주청하였다. 원앙은 "제후가 지나치게 힘이 세지고 교만하면 반드시 우환이 생긴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지만 문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결국 원앙의 말이 현실이 되어 유장은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했고 그의 아들인 유안도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통나서 자살했다.


3.2. 가의(賈誼)의 대책[편집]


가의(기원전 200년 ~ 기원전 168년)는 고작 20세의 나이로 최연소 박사가 될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미래에 있을 동성 제후왕과의 다툼을 꿰뚫어 보고, 상소를 올려 개혁을 요구했다. 가의의 개혁 내용은 일단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는데, 왕들을 오히려 수십명을 더 봉하여 작게 갈라놓은 후, 힘이 약해진 이들을 조정이 관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개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의는 한발 물러서 문제의 아들이자 경제의 동생인 유무(劉武)를 양나라의 왕으로 삼으라고 주청했다. 유무는 황실에 대한 충성이 확고한터라 황태자인 경제가 훗날 황제가 될 때 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문제는 이 말을 따라 유무를 양왕으로 삼고, 40여 성을 지배하게 하였다. 이 유무는 훗날 오초7국의 난에서 관군을 이끌고 대활약을 벌임으로서 한경제가 제후왕들을 물리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문제는 가의의 개혁 자체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제후왕국을 폐지했다 부활하면서 분할하는 형식으로 가의의 개혁을 실천하기도 했다. 기원전 165년 제 문왕 유칙이 죽었을 때 제나라를 통째로 조정의 직할지로 회수했다가 기원전 164년에 기존 제나라를 제·교서·교동·치천·제북·제남 여섯으로 나누어 제 도혜왕의 여섯 아들들(문왕에게는 숙부)에게 나누어 봉했다. 또 회남 여왕 사후 그의 영토를 한나라에 흡수했다가 기원전 169년에 엉뚱하게도 성양 경왕의 아들인 성양 공왕을 회남으로 옮겨서 왕노릇하게 했는데 기원전 164년 제나라 분할과 동시에 회남도 회남·형산·여강 셋으로 나누어 회남 여왕의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봉했다.[10] 성양 공왕은 도로 성양으로 돌려보내줬다.


3.3. 한경제의 즉위와 조조의 대책[편집]


영천(潁川) 사람인 조조는 일찍이 신불해상앙법가를 배운 사람이었다.

문제 때 유가의 5경(五經) 중에 하나인 《서경》인 《상서》(尙書)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제나라의 복생(伏生)이란 인물이 옛 진(秦)나라의 박사(博士) 출신으로 《상서》에 정통했지만 나이가 이미 90이 넘어 불러올 수 없었다. 이에 황제는 태상에 명을 내려 적당한 사람을 파견해 그의 학문을 전수받게 했다. 이때 선발된 인물이 바로 조조였다.

복생에게서 《상서》를 배우고 돌아온 조조는 자주 《상서》를 인용해가며 국정에서 유익한 일을 하였고, 문제에게 신임을 받았다. 또한 그는 태자였던 유계에게도 신임을 받아 그의 꾀주머니로 통했다. 조조는 원앙과 마찬가지로 제후들의 봉토를 깎으라고 계속해서 주청하였지만 다툼을 싫어하는 문제는 원앙의 때와 마찬가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조가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조조의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

조조는 철두철미했으나 너무 비정했고 강직했으며 각박했는데 이른바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리하여 승상 신도가(申屠嘉)와 원앙 등 많은 대신들의 미움을 받았기에 조조는 자신의 뜻을 펴기가 쉽지 않았다.[11] 하지만 문제가 죽고 경제가 즉위하자 상황은 달라졌는데, 조조는 경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조조는 언제든지 주위의 신하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 경제와 독대하여 계책을 올릴 수가 있었다. 조조는 여러 신하들과 제후왕들을 감찰할 수 있는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자 바로 제후들의 죄와 과오를 묻고 봉토를 삭감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의 양이 무려 30여 장(張)에 이르렀다. 모든 신하들이 조조에 대한 황제의 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고, 오직 대장군 두영만이 반대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두영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조조의 아버지는 조조의 소식을 듣자 영천에서 올라왔다.

"황상께서 즉위한 뒤 네가 정사를 처리하면서, 제후들을 비판하고 깎아내려 골육 사이를 소원하게 하였다면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너를 원망하고 있더구나. 왜 그러느냐?"

"이러지 않으면 천자는 존귀해질 수 없고 종묘가 편안치 못할 것입니다."

"유씨는 평안해겠지만 조씨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반응이 없자) 나는 너를 떠나 돌아가야겠구나."

집으로 돌아온 조조의 아버지는 독약을 준비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는 것은 우리 집안에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조조의 아버지가 죽은 10일 뒤에 난이 일어났다.


4. 제후들의 반발[편집]



4.1. 대 제후왕 유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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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미인심계〉의 유비

조조의 상소문은 수많은 제후들을 분노하게 했는데 이 제후들 중에 가장 막강한 불만을 보인 사람이 오나라의 왕 유비였다. 사실 오왕 유비의 상황을 보면 그는 유달리 경제를 매우 미워했다고 한다. 그는 유방의 친형인 유중의 아들로, 20살의 나이부터 숙부인 유방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오왕이 됐으며, 봉지는 무려 3군(郡) 53성(城)에 다다랐다. 거기에 그 후로 40년간 꾸준히 세력을 키워 막강한 힘을 자랑하였다. 구리 광산을 개발해 동전을 주조하고[12] 염전을 개간해 소금을 생산해내서[13],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부과하지 않아도 재정이 넉넉할 정도로 풍족했다.[14] 또 다른 나라에서 오나라로 도망오는 사람이 있으면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주었다.[15]

게다가 더 골치 아픈 것이 유비는 당시 황실에서도 최고의 웃어른이었고, 거기에 비하면 경제는 하룻강아지 수준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사실 유비가 경제에게 바득바득 이를 가는 것은 굳이 조조 때문이 아니라 사정이 복잡했다. 경제는 황태자 시절 오나라의 왕세자인 육촌형 유현과 친했고, 그와 육박[16]을 두었는데 이때 불리해지자 "한 수만 물러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부탁하지만 유현이 이걸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 경제와 말다툼을 했는데 경제가 "제발요. 형님, 이건 그냥 평범한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탁도 안됩니까?"라고 간절히 부탁을 거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내면서 "나 이번 놀이는 안 하겠다."라며 박차고 나가자 크게 빡친 경제가 화가 치밀어 유현에게 육박판을 던졌는데, 정통으로 유현의 머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다만 경제도 죽일 의도는 없었던지라 그의 머리에 육박판이 날아가 박히자 크게 당황하며 "아, 아니! 이럴수가!! 형님,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에 맞힐 의도는 없었는데...."라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육촌 형제들이 서로 놀다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살해해버린 것도 막장스러운 일이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 문제와 한나라 조정이 취한 조치는 더 막장이었다. 엄연히 황족인 오나라 세자 유현의 시신을 장례도 안 치러주고 관에 넣어서 그대로 아버지인 오왕 유비에게 보내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사망자의 거주지가 위치한 지역이 아니라 소속된 일족이나 가문의 본적지에서 장례를 치르기도 했는데, 유현은 황족이니 황족들의 본가(?)가 위치한 수도 장안에서 장례를 치러주어도 되는 일이었다.[17] 오왕 유비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은 것도 서러운데 황제가 장례도 안 치르고 자기보고 장례치르라며 그대로 시신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 자신을 황족 취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는지 크게 분노하여 아들의 시신을 다시 돌려보내 장안에서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들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형님께서 조금만 이해해주십시오."라며 사과하였지만, 아들을 잃고 모욕까지 당했다 생각한 유비는 그때부터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나라에만 머물렀고, 병을 핑계로 입조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유비가 고령이니 입조하지 않아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문제가 죽고 경제가 즉위한 후에도 이 명령은 유효했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가진 것이 조조였다.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태조(유방)께서 천하를 평정했을 시기에는 형제분들이 얼마 되지 않았고 황자들도 어렸기 때문에 커다란 영지를 다만 동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봉했습니다. 그리하여 첩복(妾腹)의 황자 유비(劉肥)[18]에게는 제(齊)의 70여 성을, 배다른 아우 유교에게는 초(楚)의 40여 성을, 다시 유비에게는 오(吳)의 50여 성을 내렸으니 이는 천하의 절반을 준 것입니다."
"헌데 지금 저 오왕 유비(劉濞)는 이전에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일로 원한을 품고 병을 핑계삼아 도무지 입조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형을 내려야만 마땅한 죄이나 선제(한문제)께서는 인자하시어 너그럽게 용서하시었습니다. 그 은덕은 가히 지극한 것이라 마땅히 오왕은 새 출발을 해야 할 터인데, 더욱 방자해져 화폐를 사사로이 주조하고 바닷물을 멋대로 제염(製鹽)하며, 천하의 도망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유비의 봉지를 삭감해도 반란이 일어날것이고, 삭감을 하지 않아도 반란은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점은 삭감하면 반란은 빨리 일어나나 피해는 적을 것이고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날 것이나 피해는 막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사기》 <오왕비열전> 中


4.2. 초왕 유무에 대한 탄압[편집]


경제는 조조의 말에 찬성했으나 제후왕들의 힘을 잘알기에 반란이 일어날까봐 쉽게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3월에 초왕 유무가 입조하자 이틈을 노려 조조는 황제에게 초왕의 허물을 간하였다. 왕년에 박태후(薄太后)를 위하여 상복을 입으면서, 몰래 복상하던 집에서 간음하였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경제는 초왕의 죄를 사면해주는 대신에 동해군(東海郡)을 삭감했다.

경제는 그후 조왕 유수가 죄를 지었다는 명목으로 상산군(常山郡)을 삭감했고, 교서왕 유앙이 사사롭게 작위를 팔았다는 이유로 6개 현을 삭감했다. 제후왕들에 대한 삭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조정에선 경제와 대신들이 모이면 끊임없이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하는 논의를 했고 모든 제후들은 불만스러워했다. 가장 불만이 심한 사람은 물론 오왕 유비였다.

유비 입장에선 아들을 잃은 것에 모욕까지 당했다 생각하니 가뜩이나 속이 상해 있는데 아들을 죽인 조카가 황제가 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나라 최대 수입원인 소금 생산지 회계군과 구리 생산지인 예장군을 조카가 몰수했으니 분노까지 폭발하고 말았다.
물론 유비는 가장 먼저 반발하며 반항하였지만 다른 나라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무위가 되고 말았지만.


5. 오초7국의 난[편집]



5.1. 동지를 모으는 유비[편집]


유비는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힘을 합칠 사람을 모으는 것이 문제였다. 중대부 응고(應高)는 용감하고 호전적인 교서왕을 추천했다. 교서왕 역시 봉지가 삭감당한 탓에 불만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유비는 응고를 파견해서 교서왕을 설득했다.

"황제께서는 간신들의 손아귀에서 조종되고 있습니다. 감언이설을 일삼는 이들은 제후들의 땅을 불법으로 빼앗고 선량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속담에 '쌀겨를 다 털어버리면 쌀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영지 삭감이 아니라 나라를 몽땅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찌 모반을 하겠소.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소."
"어사대부 조조는 폐하를 미혹하여 충신을 가리고 어진이를 막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를 미워하고 모든 제후들은 그를 증오합니다. 얼마 전에 불길한 징조인 혜성이 나타났고 메뚜기떼가 일어났으니 이제 거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왕께서는 안으로 조조를 죽이고 밖으로 대왕의 뒤를 쫓는다면 가는 곳마다 모두 항복할 것이며 복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기십니다."

이렇게 반란의 기본적인 명분은 '간신 조조 토벌'이었다. 교서왕이 뜻을 저버릴까 두려운 유비는 직접 교서왕을 만나서 맹약을 맺었다. 교서왕의 부하들 중에서는 이를 우려하면서 반란을 말리는 신하들도 있었다. 일이 잘 되지 못하면 망하는 일이고 잘 되더라도 결국 오왕과 더불어 두 왕이 싸우게 될 것이니 하나의 황제를 모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서왕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사신을 보내 제·치천·교동·제남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성양국(城陽國)은 여후의 일족을 앞장서서 때려잡은 자들이니[19] 함께할 수 없다. 일이 해결된 다음에 성양국을 분할해 가지겠다"며 성양을 배제했다.


5.2. 7개 나라의 반란[편집]


드디어 오나라 왕 유비에게도 회계(會稽)와 장(鄣)[20]의 두 군을 삭감한다는 조서가 내려왔다. 이를 기회로 삼은 유비는 장안의 조정에서 파견나온 관리를 모두 죽였고, 곧이어 교서국에서는 정월 병오일에 조정에서 파견나온 2,000석 이하의 관리들을 주살했다. 다른 나라들도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은 반란에 가담한 왕들(밑줄로 표시)과 그 계보이다.
  • 유희(劉喜)
    • 오왕(吳王) 유비(劉濞)
  • 유방(劉邦)
    • 유비(劉肥)
      • 제왕(齊王) 장려(將閭)
      • 제남왕(濟南王) 벽광(辟光)
      • 제북왕(濟北王) 지(志)
      • 교서왕(膠西王) 앙(卬)
      • 치천왕(菑川王) 현(賢)[21]
      • 교동왕(膠東王) 웅거(熊渠)
    • 유장(劉長)
      • 회남왕(淮南王) 안(安)[22]
    • 유우(劉友)
      • 조왕(趙王) 수(遂)
  • 유교(劉交)
    • 영객(郢客)
      • 초왕(楚王) 무(戊)
하지만 제왕 장려는 뒤늦게 반란에 가담한 걸 후회하고 깃발을 바꿔 들었다. 또한 제북왕 지는 "이놈아, 부서진 성 수리도 안 했는데 무슨 출정이냐?" 는 신하들에 의해 감금당했다. 회남에서는 군대의 지휘를 맡은 회남상이 독단으로 조정 편에 붙었다. 결국 10국의 난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 7국의 난으로 줄었다. 어찌됐건 오왕 비는 총동원령을 내려 20만의 대군을 확보했고, 남쪽의 이민족인 민월과 동월에도 사람을 파견해 동맹을 맺었다. 이때 민월은 거부했고, 동월은 승낙했다. 또한 조왕 수는 흉노에 사자를 보내기까지 했다.


5.3. 조정의 대응[편집]


반란 소식은 장안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경제는 곧바로 주아부를 태위(太尉)로 삼고 36명의 장군들을 거느리고 나가 오, 초로 진격하게 했다. 그리고 역이기의 동생인 곡주후(曲周侯) 역상의 아들 역기(酈寄)에게 조나라를 치게 했으며, 또 장군 난포를 보내 제나라를 치게 했다. 대장군인 두영은 형양에 주둔시켜 제나라, 조나라의 군대를 감시하게 했다.

경제는 조조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자 조조는 "폐하께서 군대를 이끄시고, 저는 장안에 남아서 지원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유방과 소하의 역할을 하자는 것인데 문제는 경제가 전쟁 한번 안해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조조 역시 백성들과 신하들로부터 두루두루 인망이 좋은 소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이 의견은 대신들의 반대로 간단하게 기각되었다.

원앙은 제국상(齊國相)을 지내다 오국상(吳國相)으로 옮겼는데, 조카인 원종의 충고에 따라 술이나 마시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조조는 '원앙이 뇌물을 받아 오왕을 비호했다'며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여러가지로 무리수라서 시행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앙은 두영에게 황제를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고, 두영은 원앙을 황제 앞으로 데려왔다. 이때 경제는 조조와 의논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원앙이 오자 여러가지 사정을 물어보았다.

"그대는 오국상으로 있었는데, 오왕의 대장군인 전녹백이라는 자는 어떤 자요? 그리고 오·초의 반란은 진압될 수 있겠소?"

원앙은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오왕에게 붙을리가 없으니 그 수하들은 신경쓸 것이 없음.'이라고 말했고 조조 역시 동의하였다. 경제가 계책을 묻자 원앙은 신하들을 물려줄 것을 요청하여 모든 신하들이 나갔으나 조조만이 멀뚱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원앙은 조조 역시 물려주라고 부탁했고 조조는 투덜대며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원앙은 황제에게 말했다.

"반란군의 명분은 조조의 목숨이니, 조조를 죽이면 자연스럽게 해산될 것입니다."

황제는 조조를 좋아했기에 반대했지만 원앙은 이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며 계속 주청을 올렸다. 결국 경제도 어쩔 수 없이 그러하기로 하고 원앙을 유비의 조카인 유광과 함께 오나라로 보냈다.

황제는 중위를 시켜 조조를 불러내었고, 조조는 아무 것도 모른채 조복을 입고 나왔다. 그는 속아서 수레에 올랐고 장안의 저잣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조조는 조복을 입은 채로 처형되었다. 경제는 이것을 계속 마음에 걸려했다.

하지만 유비가 야망을 품은 지는 오래되었고, 그깟 조조의 목숨 하나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비는 원앙을 만나주지도 않은 채 죽든지 반란군의 장군이 되든지 결정하라고 협박하며 군사 500명을 동원해 포위하였다.

예전에 원앙이 오나라에 있던 시절에 그를 수행하던 사람이 원앙의 시녀와 정을 통하였는데, 원앙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살갑게 대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소식을 들은 수행원은 부끄러워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원앙은 쫒아가 그를 다시 데려오고 시녀를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 원앙을 감시하던 교위가 바로 그 때의 그 인물이었다. 그는 원앙에게 은혜를 갚기 위하여 감시병들에게 술을 먹여 재우고 원앙을 탈출시켰다. 절영지연과 유사한 전개.[23]

5.4. 주아부의 계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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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진압한 주아부

대군을 이끌고 적을 토벌하러 떠난 주아부는 도중에 낙양에서 극맹(劇孟)[24]을 부하로 삼게 되었다. 극맹을 얻은 것이 기쁜 주아부는 "반란군들이 이미 그대를 포섭한 줄 알았다. 이제 나는 적국 하나를 얻은 것과 같다."라며 좋아하였다.

회양에 도착한 주아부는 아버지 주발의 문객인 등도위(鄧都尉)를 만나 계책을 구했다. 등도위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직위인 도위를 붙여 등도위라고도 하고, 기록에 따라서는 그냥 등공(鄧公)이라고도 한다. 등도위는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 군대는 정예병이니 직접 싸우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장군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창읍(昌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보루를 높게 쌓고 버티면서 양나라에 일을 다 맡기십시오. 오군은 분명 정예부대를 총동원해서 양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그 기회에 회사구(淮泗口)를 공격해 오나라의 보급선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적은 지칠대로 지쳤을테니, 온전하고 강한 군대로 일거에 무너뜨리면 됩니다."

이 부분은 《사기》와 《한서》 양쪽의 <오왕 비전>에서는 등도위의 계책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주발의 <세가>·<열전>에 부속된 주아부의 개인 기록에서는 주아부가 직접 한경제에게 이러한 계책을 내놓은 것으로 나온다.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顔師古)는 "두 가지 설이 다른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썼다.

주아부는 군대를 끌고 패서에 이르렀다. 조섭(趙涉)이라는 사람이 주아부의 수레를 막고 나서면서 갑자기 말하였다.

"장군께서 동으로 오와 초를 주멸하는데, 승리하면 종묘가 편안해지나, 이기지 못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능히 신의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아부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수레에서 내려와 계책을 물었다. 조섭은 말했다.

"오왕 유비는 부유한데다 죽기를 각오한 용맹한 군사를 모은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태위께서 오신다는 것을 들었으니 필시 효관과 민지의 막히고 좁은 곳 사이에 매복을 두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여기서부터 조금 서쪽으로 가십시오. 그러한 다음 남전(藍田)으로 내달리고, 무관(武關)을 나와 낙양(雒陽)에 이르시면 그 사이는 늦어도 불과 하루이틀 차이밖에 되지 않는데, 바로 무고(武庫)로 들어가시어 북을 쳐서 울리십시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장군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길로 해서 급작스레 그들 앞에 서야 합니다" - 《한서》 <주아부전>

주아부는 그 계책을 따랐다. 낙양에 도착해서 효관과 민지 사이를 수색하니 예상대로 복병이 있었다.


5.5. 장수들의 계책을 거부한 유비[편집]


오나라의 대장군 전녹백(田祿伯)은 유비에게 계책을 말했다.

"대군이 한 덩어리로 모여 가더라도 특별한 방법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5만명만 주시면 장강과 회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회남과 장수를 수중에 넣고, 다시 무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대왕과 합류하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책(奇策)입니다."

하지만 오나라의 태자는 반대 의견을 내었다.

"왕께서는 반군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데, 어찌 군대를 남에게 빌려주겠습니까. 만약 배신하면 큰 일이 날 것입니다. 더구나 병권을 갈라놓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오나라의 젊은 장수 환장군(桓將軍)은 또다른 계책을 내었다.

"오나라 군대에는 보병이 많은데 보병은 험난한 지형에서도 싸울 수 있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전차와 기병이 많은데 이들은 평지에서 싸워야만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진격하시며 항복하지 않은 성읍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창고부터 점령하십시오. 그리하면 오창의 양곡을 보급받고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한나라 군대를 막고 뭇 제후들을 호령하신다면, 관중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자기가 그 계책을 취하지 않을 경우를 물었다. 환장군은 '성읍을 전부 항복시키고 있다가는 한군의 전차와 기마대가 들판에서 아군을 패배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노장군들이 반대하여 환장군의 계책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5.6. 양왕의 분투와 주아부의 역습[편집]


유비가 초왕과 함께 회수를 건너 극벽(棘壁)을 공격할 때만 해도 반군이 승기를 잡고 있었다. 양나라 왕 유무는 이를 막기 위해 6명의 장군을 파견했지만 모두 대패하고 말았으며, 패전한 장수들은 양나라로 돌아왔다.

양왕은 주아부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지만 주아부는 때만 기다리면서 가만히 있었다. 창읍[25]에 틀어박힌 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주아부에게 양나라 왕은 대노해서 직접 사신을 보내 경제에게 따지기도 했지만 주아부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대신에 경기병들을 파견해서 적의 후방에 파견하여 보급로를 박살내었다.

양왕은 할 수 없이 죽은 초나라 재상 장상의 아우 장우와 한안국을 장군으로 삼고 결사적으로 적을 막았다. 양나라가 이렇게 버티자 반란군은 주아부의 주력군을 물리치기 위해 창읍으로 떠났지만 주아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란군은 남동쪽의 누벽을 엄청난 기세로 공격했다. 그러더니 밤이 되자 역으로 북서쪽의 누벽을 공격하였는데, 이는 주아부가 예측한 바였다. 주아부의 병사들은 오히려 밀고 나가 적을 대패시켰다. 식량이 떨어진 반란군은 서로 내분까지 일으키며 자멸하고 있었다. 이에 유비는 어쩔 수 없이 도망쳤고 주아부는 이걸 공격해서 대승을 거뒀다.


5.7. 주구의 진격[편집]


유비가 처음 군대를 이끌고 회수를 건너기 전에 여러 빈객들을 장군이니, 군후(君侯)니 하고 자리를 만들어 주었지만 오직 주구(周丘)만은 임명되지 못했다. 주구는 하비 사람이었는데 항상 술을 마시고 행동이 경박해서 유비는 그를 신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주구는 갑자기 유비를 찾아와서 말했다.

"제가 무능하여 임명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제가 장군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왕께서 가지고 계신 한나라의 절부(節符 : 관리의 증명서)를 한장만 주십시오.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유비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위조 절부를 내어주었고, 주구는 말을 타고 곧바로 하비로 달렸다. 하비에서는 오나라가 모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을 굳게 닫은지 오래였다. 주구는 위조 절부를 사용해 현령을 불러들이고는 곧바로 그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과 토호들을 불러 모은 다음 겁을 주었다.

"오나라의 반란군은 곧 당도할 터인데, 그러하면 이까짓 하비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오."

그리고 항복하면 살 수 있다고 말하여 하비성을 세치 혀로 함락시키고, 10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성양까지 진격해서 그곳의 중위를 격파했다. 그런데 유비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탄식하였다.

"내가 저토록 허술한 자와 대사를 논하려 했단 말이냐!"

그리고는 하비로 돌아가다가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5.8. 유비의 죽음과 반군의 궤멸[편집]


유비는 동월로 달아나 군사를 수습하며 훗날을 도모하려고 했다. 한나라에서는 정면 대결을 펼치기보다 동월을 매수하는 쪽을 택했고, 동월은 이미 한나라의 편이었기에 유비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유비가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미리 지시를 받은 한 동월의 병사가 미친 척을 하고 창으로 유비의 목을 찔러서 죽였다. 유비의 목은 그릇에 담겨 한나라의 조정으로 보내졌다.

반란은 3개월 만에 정리되었다. 사실 제후왕은 내부 분열도 원인이지만 힘이 중앙 정부와 맞서기엔 너무 약했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이전에 한나라 조정은 제후국을 우대해주는 듯하면서 백성을 관중으로 옮기는 등 중앙 집권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오며 조정의 힘을 강화시켰다.

초왕 무는 자살했고, 교서왕 앙은 웃옷을 벗고 물만 마시면서 맨발로 짚 위에 꿇어앉아 죄를 빌었으나 진압군에서 보낸 한퇴당(韓頹當)의 태도가 너무 완고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자 자결하였다. 교동왕 웅거, 치천왕 현, 제남왕 벽광도 자살했고 이들의 봉지는 한나라로 흡수되었다. 조나라만 10개월을 버티다가 역기에게 제압당했고 조왕 수 역시 자결하였다.

제왕 장려는 한때 반란에 가담하려 한 것에 대한 추궁이 두려워 자결했지만 경제는 이를 측은히 여겨 '효'(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아들 수(劉壽)를 습봉(襲封)하였다. 제북왕 지는 신하들에게 감금을 당한 연고로 반란에 참가하지 못했으므로 죽음을 면하고 치천왕으로 전봉(轉封)하는 행운을 누렸다.

주아부는 5년 후 승상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섰다. 경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동·교서·제북의 왕을 새로 세웠으나, 그 중 둘을 자기 아들에게 주었다. 새로운 교동왕은 4세밖에 되지 않은 자기 아들 유철이라 봉국에 가지도 않았다. 게다가 교서에서 북해군을, 교동에서 동래군을, 제북에서 평원군을 떼내어 세 나라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다. 형산왕(衡山王) 발(劉勃)이 오나라 곁에 있었으면서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포상으로 제북에 전봉했고, 교서를 자기 아들 유단(劉端)에게 주었다.


6. 결과[편집]


이 오초7국의 반란은 내전이었지만 오히려 반란이 평정됨으로써 한나라의 군현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군국제가 사실상 끝장나면서 황제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BC 127년 한무제는 주보언(主父偃)[26]의 헌책에 따라 제후왕국의 봉지를 모든 자제들에게 분봉(分封)토록 하는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하였다. 그 전까지는 제후국이 적장자 1명에게만 승계되므로 각 제후국이 대대로 힘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으나, 이제 천자가 제후들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적장자는 물론 모든 자식들에게까지 영지를 나누게 되니 다음 세대가 되면 아들 수만큼 제후국이 잘게 쪼개지는 셈이고, 이런 작아진 제후국들이 더 이상 장안의 한나라 중앙정부에 대항해 힘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연히 제후왕들에게는 전혀 은혜롭지 않은 처분이었으나, 적장자가 아닌 왕족들은 당연히 원하고 반겼고 오초7국의 난을 거치면서 크게 약화된 제후왕들은 감히 이것을 거스를 수 없어 결국 군국제는 유명무실해졌다. 문제 때 가의가 주장한 제도가 결국 2대 뒤인 무제 때 도입된 것이다. 결국 한무제 때쯤이면 전국시대부터 부침을 겪으며 이어져 온 기존 제후왕국들은 사실상 거의 다 소멸했다.

한나라 조정이 친척들이라서 대우 잘해줬더니 주제넘게 황제의 자리를 넘보네?라고 하며 제후국을 대놓고 탄압[27]한 것이다. 영지를 일개 군현 수준으로 삭감시킨 것은 기본이고 예하 막료들은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등 그들을 철저하게 억압한다. 이전까지 제후왕의 봉국(封國)은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이후 제후왕은 단지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실제 행정은 군현(郡縣)과 다르지 않게 된다. 단적으로 후한 말 난세가 시작됐을 때는 예전과 달리 왕·공·후 등이 아니라 주 목(州牧)·주 자사(州刺史), 군 태수(郡太守), 아니면 중앙 조정의 재상 직위를 가진 동탁[28]·조조 등이 지역 군벌로 떠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조비 부자, 유비, 손권[29] 등이 왕이 되고 개중엔 황제에 오르기도 하지만 과거의 왕들이 제후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후한 말에 새로 등장한 왕들은 어디까지나 왕이 되기 전에 세력을 구축한 상태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왕에 등극했기 때문에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오초7국의 난 때는 제후들이 왕이라서 지방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면, 후한 말~삼국시대에는 지방 군벌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원인과 결과가 뒤집혔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정착된 군현제는 그후 2,000년 가까이 중국 통치 체제의 규범이 되어 내려오게 된다. 한나라는 군현제로 중앙 집권를 강화하고, 문경지치로 인한 재화를 통해 고대 로마 제국과 함께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물론 이후 중국은 중앙 정부가 지방에 힘을 쓰지 못하는 시기들이 여럿 있긴 했고, 심하면 위진남북조시대처럼 수백년 동안 분열된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거대한 통일국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7. 관련 인물[편집]


오초7국의 난을 제압하여 군현제를 확립시켰다.
제후왕들을 견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살해당한다.
어사대부가 되어 제후왕들을 견제하여 반란을 도발시켰고, 원앙에게 참소받아 처형된다.
제후왕들의 봉지를 삭감할 것을 주장하고, 조조를 참소해 죽게 만든다.
창읍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어 반란군을 무너뜨린다.
  • 양왕 유무
오, 초나라 군대가 공격하자 주아부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지원이 오지 않자 힘껏 싸워 막아내었다.
  • 주구
유비에게 절부를 하나 빌려 하비성으로 가 성을 함락시키고 성양까지 진군하지만 사망한다.
오초7국의 난 진압에 공훈을 세웠으나 정작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한문제에게 제후왕들의 견제책을 올리고, 유무를 양왕으로 삼을 것을 주청했다.
  • 전녹백
오나라 대장군으로 유비에게 별동대를 파견하라는 계책을 올리나, 거절당했다.
  • 관하(灌何)
관영의 아들. 반란 진압에 종군하였다.
  • 장맹(張孟)
관영의 시종이었던 인물. 관하를 따라서 출정하였으나, 오나라 군에게 죽고 만다.
  • 관부(灌夫)
장맹의 아들. 본래 장씨였으나 아버지와 관씨 집안의 인연때문에 성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죽자 군중에서 수십명의 장사들을 모집하여, 오군을 기습하였다.
  • 난포(欒布)[30][31]
황제의 명으로 제나라를 평정했다. 이 공으로 유후(兪侯)에 봉해졌다. 조나라 평정에 어려움을 겪는 역기를 지원했다.
  • 역기
역상의 아들. 황제의 명으로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10개월이 넘도록 함락을 시키질 못했다. 난포의 도움으로 간신히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8. 기타[편집]


주요 인물로 유비, 조조에 오나라도 있다보니 《삼국지》와 엮는 개드립도 좀 있다. 다만 이건 한자 발음이 같은 한국 한정으로, 중국어로는 삼국시대 유비, 조조와 전한의 유비, 조조는 독음이 다르기 때문에 안 엮인다.

훗날 오초7국의 난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바로 명나라 초기인 홍무제~건문제 시기로[32] 오초7국의 난과는 달리 정난의 변을 일으킨 주체는 성공했다. 청나라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삼번의 난이 있었으나[33], 천고일제라 불린 명군 강희제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이를 진압함으로서 청나라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1] 즉 굳이 따지자면 오나라와 초나라 등 일곱 제후국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의미.[2] 이 시기부터 약소한 제후국들은 강대한 제후국에게 먹히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망한 제후국을 되살려주거나 망해가는 제후국을 다른 제후국이 지켜주고 웬만한 제후국은 힘만 꺾어놓고 망하게는 하지 않는 등 최소한의 존중 정도는 남아있었다.[3] 물론 좋아서 해준 것은 아니고 상황이 불리하다보니 어쩔 수 없어서 그를 제왕에 봉한 것이었다. 역이기를 통해 제를 한에 항복시키는 데에 거의 성공한 상태였는데, 한신이 제를 무력으로 복속시켰고, 쓸데없이 인력과 물자, 역이기라는 중신을 잃게 된 상황. 애초에 한신은 유방의 직속부하였고, 그가 끌고 간 군대는 물론 조참 같은 주요장수도 죄다 유방의 사람이건만, 유방과 대등하게 대해달라고 하는 것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후 해하전투에서 다시 한신은 딜을 걸어서 봉토를 추가로 얻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유방에게 한번 처벌을 받고 초왕으로 전봉하였다.[4] 위에서 한번 처벌을 위해 해하전투 직후 한신을 사로잡았으면서도 처형하지 않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전봉하는 것으로 끝난 것도 결국은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신과 팽월이 죽자 영포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는 이미 고제(유방)의 힘이 훨씬 더 컸으므로 영포의 난을 진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5] 소설 초한지의 영향으로 유방의 토사구팽을 매우 비열한 배신 행위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제후왕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키거나 책잡힐 행위를 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장도, 진희, 영포, 노관 등은 먼저 반란을 일으켜 유방을 배신했고, 국사무쌍 한신은 반란은 안 했을지언정 이미 배신과 준하는 행위를 수도 없이 벌인 작자였다. 그나마 억울한 케이스가 팽월이지만, 그 팽월조차도 고릉 전투 때 명령 불복종으로 유방을 엿먹인 전적이 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셈.[6] 당시 생각 이상으로 유방과 유씨들에 대한 지지가 강했기 때문에 여씨들은 여후가 죽자 바로 숙청된 것이다. 애시당초 여씨들은 한나라 건국에 무슨 공을 세운 것도 아니기도 했고.[7] 이는 혈연관계가 가까워도 멀어도 문제인데 가까우면 제위를 찬탈하기 위해, 멀면 독립하기 위해 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8] 물론 이 때는 사정이 있었는데 사실 혜제 이후 황제들은 나이도 어린 데다가 애시당초 여후에 의해 즉위한 터라 유씨가 아닌 여씨라는 의혹이 있었다.[9] 문제의 외삼촌이다.[10] 제나라 분할 당시 제 도혜왕의 아들 중 살아 있는 인물이 여섯 명이었는데 이 아들들은 모두 왕국을 하나씩 분배받은 것이고, 먼저 죽은 일곱 아들 중 후사가 끊긴 제애왕과 제북왕의 집안 및 왕위를 지키고 있는 성양 경왕의 집안을 제외하면 열후를 계승한 손자들이 네 아들마다 하나씩 있었으나 이 손자들에게는 왕국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 네 손자들 중 셋은 오초7국의 난에 가담했기에 모두 주살됐고, 한 명만 오초7국의 난과는 별도의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회남국 분할 역시 당시 회남 여왕의 아들 중 살아 있는 셋에게 모두 왕국을 하나씩 분배한 것이다.[11] 이는 훗날 북송의 왕안석이 생각나기도 한다.[12] 공방전에서 '당시 오왕 비가 교만하고 분수에 넘는 짓을 잘해 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를 꼬집어 얘기한 것이다.[13] 옛날 중국에는 소금이 귀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전매 사업으로 소금 생산(제염)과 판매를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왕 유비는 화폐를 맘대로 만들 뿐만 아니라 소금도 맘대로 만들어서 부를 쌓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 이 경제력을 기반으로 군사를 양성하여 중앙에 반기를 들 수도 있으니 조조가 이를 간파하여 사전에 방지하자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14] 물론 당시 한나라는 조세 비중에서 토지세인 전정의 비중은 인두세보다 작기는 했다.[15] 웬만한 도망자들은 싸움 깨나 하는 이들일 텐데, 오왕이 그들을 끌어 모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다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런 자들을 유력자가 식객으로 끌어모아서 불순한 의도로(좋은 예로 반란) 써먹는 경우가 대단히 흔했다. 그 예가 전국사군자였다. 당연히 이것도 중앙정부에 대해 대단히 위협적인 조치다. 게다가 여기에 들어있는 함의는 군국제 초기 시절 아직 각 제후국간의 경계가 그저 국내 행정구역 경계 정도보다 조금 더 확실했음을 뜻하기도 한다.[16] 윷놀이와 비슷한 중국의 전통 놀이로 윷놀이와는 다르게 6개의 막대기를 쓴다.[17]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의 시신을 관에 넣어 고향에 보내주는 건 고인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황족의 예에 준해서 충분히 장례를 치르고 오왕 유비를 위로해줄 수 있었다.[18] 삼국시대 촉한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도 아니고 좀 전에 언급된 오왕 유비(劉濞)도 아니다(...).(발음은 현대는 류페이(liúféi), 당시는 르우부이
[lɨubʉi]
두 유비보다 이전 시대 사람이다. 유방의 장남이지만 첩복의 황자, 말 그대로 서자였기 때문에 후계에서 밀려난 사람이다.
[19] 성양왕이 여씨를 주살할 때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유장의 아들인 유희(劉喜)였다.[20] 《사기》와 《한서》의 원문은 예장(豫章)이나 예장군은 여강국의 지군이기 때문에, 오나라의 지군인 장군의 오자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단양군.[21] 위에서 언급한 오나라 태자와는 한자 표기도 같지만 동일인이 아니다. 전한 황실에 이 이름은 매우 흔했다.[22]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23] 원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여성과 몰래 정을 통한다는 것은 그 높은 사람의 권위를 무시하는 짓이므로(물론 일반적으로 치정관계도 있겠지만) 대부분 처형이나 반역으로 결과가 끝나게 마련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탁과 여포. 그래서 이런 경우가 더 유명한 것이다. 원래 처형했어야 하는 인물을 통크게 용서해준 것이기 때문.[24] 당대의 유명한 협객으로 《사기》 <유협열전>에 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원앙도 극맹을 만났을 때 극진히 대접했을 정도니 상당한 네임드였던 듯.[25] 양나라 영토로 지금의 제녕시 금향현에 있다.[26] 성이 '주보'이고 이름이 '언'이다. 여기서 父는 아비 '부'가 아니고 미칭인 甫와 동일한 의미라 '보'로 읽는다.[27] 물론 실제로는 이전에도 제후의 권한을 은근히 약화시켰다.[28] 물론 동탁의 집권 초기에는 지역 군벌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18로 제후와의 전투 이후로는 지역 군벌 세력의 하나처럼 되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29] 손권의 경우 위나라 황제 조비에 의해 오왕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 오나라 황제를 자칭했다.[30] 팽월의 친구이자 모사이던 그 사람 맞다. 목숨을 걸고 팽월의 목을 수습했는데, 한고조 유방이 그의 간언을 듣고 도위로 다시 임명하였다. 이후 연나라 재상으로 지내다가 참전했다.[31] 근데 팽월과 마찬가지로 생년일은 안 나와 있지만, 무지막지하게 장수했다. 젋은 시절에 팽월과 같이 술집 일을 했었고, 기원전 202년에 팽월이 대부로 삼았다는 거 보면 그 당시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30대였을텐데, 기원전 145년에 사망했다. 즉 오초7국의 난에서 공을 세울 당시 70~80대였다는 의미가 되고, 사망 당시 나이는 심지어 90대였을 수도 있다는 의미. 고대 기준으로는 믿기지 않을 수준의 장수다. 어찌보면 대단한 사람이다. 전국시대 말 진나라의 통일전쟁, 시황제와 2세 황제의 폭정, 초한전쟁, 이성 왕 숙청, 오초7국의 난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32] 건문제 시기 젊은 황제를 보좌하던 제태나 황자징 등은 현 상황이 오초7국의 난이 벌어졌던 전한 초기와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인지 제후국들의 영지를 축소하고자 했던 조조와 마찬가지로 제후왕들을 견제하거나 없애는 삭번정책을 건문제의 지지속에서 진행했고, 이에 반발해 연왕 주체가 들고 일어나서 벌어진 것이 정난의 변이었다.[33] 제후왕이 황족이었던 한, 명나라와는 다르게 항장출신들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지방의 제후왕이 강해질수록 변란의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이를 약화시키려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발한 난의 발생이라는 부분에서는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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