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경
덤프버전 :
1. 소개[편집]
낯선 지방의 생산물과 강과 육지의 풀, 나무, 새, 짐승, 곤충, 기린, 봉황이 사는 곳과 상서로운 조짐이 보이는 곳 및 이 세상 바깥으로 떨어진 나라나 색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백익께서는 토지에 따라 공물을 정하고 사물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여 이 책을 지으셨습니다.
상산해경표 中 유흠(劉歆)
산해경을 읽는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책이 황당무계하여 기피하고 유별난 말이 많기 때문에 의혹을 품지 않는 이가 없다.
천하에서 지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 산해경의 의미를 말하기 아렵다. 아! 통달하고 박식한 사람이 이를 거울로 삼을 것이다.
주산해경서 中 곽박(郭璞)
산과 내의 줄기를 탐색하여 아득한 경지를 두루 살피고 그 가운데에 괴변을 서술하여 백성이 현혹되지 않도록 하였으니, 아름답도다! 우의 공덕이여! 그 밝은 덕은 무궁하구나! 본래 신성한 존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책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독자들은 이 책을 괴이한 견문을 적은 기록과 비교하고 제해[1]
같은 책에 견주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산해경소서 中 郝懿行(학의행)
우 본기에 의하면 하수는 곤륜산에서 흘러나온다 하였다[2]
. 그 산은 높이가 이천 오백리며, 해와 달이 서로 피해 숨으며 빛을 발한다. 산의 정상에는 단물이 솟아나는 예천(醴泉)과 신선이 사는 요지(瑤池)가 있다고 한다. 장건이 대하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황하의 근원을 알아냈으니, 어찌 곤륜산을 본 사람이 있었겠는가? 구주(九州)의 산천에 관한 기록은 상서의 기록이 사실과 가깝다. 우 본기나 산해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이한 사물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노라.
山海經
중국 선진시대에 쓰인 것으로 기록된 신화집 및 지리서이다. 산해경 자체의 존재는 사마천 등의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도 언급하고 있으며, 저자가 누군지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라의 우(禹)임금과 계포 혹은 백익[3] 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설인데 이는 전한시대의 유흠이 주장한 이래 다른 중세의 학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계속 주장한 설이다.
하지만 후세로 내려가면 갈수록 이러한 의견들은 여러 번 지적을 받게 되고 드디어 현대에 오면서 하나라의 우나 백익 같은 태고시대에 살았던 전설적인 가상의 인물이 저술했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형성된 뒤, 근대와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대체로 춘추전국시대쯤에 작성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견해조차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된다.
산해경의 최초의 교정본은 유흠이 쓴 <상산해경표>로 그 당시 산해경의 기존 32편을 18편으로 정리하였으며, 현재의 산해경은 동진 시대의 곽박(郭璞)이 <주산해경서>라는 교정본을 내서 정리한 것으로 시작하여 청나라의 학의행이 <산해경소서>를 써서 다시금 교역한 것.
이외에도 명나라~청나라시기의 산해경 교정본으로 <산해경보주>, <산해경석의>, <산해경광주>, <산해경교본> 등이 있다.
2. 판본[편집]
산해경의 원문은 미지의 영역에 있지만 오랫동안 거론되어 온 책인 만큼 판본은 다양하다.
산해경의 여러 주석가와 판본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2.1. 유흠의 산해경[편집]
기록상으로는 최초로 산해경이라는 책을 정리해 놓은 판본이지만 그가 쓴 판본 전체는 현재 완전히 복구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쓴 산해경의 서문인 "상산해경표"만 후대의 여러 산해경 판본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산해경표는 산해경을 정리한 계기 등을 보고하듯이 써내린, 일종의 서론이다.
2.2. 곽박의 판본 산해경서와 관련도서[편집]
현재까지 복원에 성공한 판본 중 가장 가장 오래된 판본은 바로 동진 시대 곽박[4] 의 산해경 판본이다. 산해경은 명나라~청나라 시기 때 후대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고 개편되었는데 산해경 개편본의 대부분은 이 곽박의 판본을 기본으로 하여 그 위에 각 학자가 자신의 주석을 덧붙인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에 출간된 정재서 교수의 산해경에서도 당연히 곽박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이 곽박의 산해경은 아래 소개될 <도장(道藏)>,<사부총간(四部叢刊>,<고금일사(古今逸史)>라는 총서에 수록되어 출판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것은 <고금일사>에 수록된 것이라고 한다.
곽박이 주석을 붙인 산해경을 원문을 살펴보면 동진시대 당시로서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다채롭게 주석을 붙여 놓았다. 옛 사람들에게도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던 산해경이라는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 주석을 붙여 놓은 것이다. 곽박이 주석을 붙여 놓은 문장과 그 주석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동해의 안쪽,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산다.[곽박주1]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곽박주2]
곤민국이 있는데 성은 구씨이고 (기장을)먹고 산다. 왕해라는 사람이 있어 두 손에 새를 잡고 지금 그 머리를 먹고 있다.[5]
왕해가 유역과 하백에게 기른 소를 맡겼는데 유영이 왕해를 죽이고 소를 차지했다.[곽박주3]
첫 번째 예문에서처럼 본문에서 강이나 산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그 지명에 대한 고증을 제시하기도 하고,두 번째 예문에서처럼 산해경에 나오는 기이한 동식물을 부르는 명칭을 정립하거나 추가적인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구미호의 명칭을 문헌에 최초로 기록한 것이 곽박이다. 세 번째 예문에서처럼 산해경 본문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고증을 시도한 흔적도 있다. 그리고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내용이 나오면 솔직하게 모르겠다는 식의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 도장(道藏)본
판식[9] 의 크기는 반곽[10] 이 세로 20.1,가로 13.2이고 선장본[11] 이다. 산하쌍면(上下雙邊)에 좌우에는 광곽[12] 계선(界線)이 없고 판심[13] 도 없다 주(注)는 쌍행[14] 으로 쓰여 있다.
편목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맨 앞에 곽박이 주석을 넣은 <산해경서> 를 수록해 놓고 <산해경목록>을 기록해 놓았는데, 먼저 총 18권의 본문 글자 수와 주석의 수 및 총 합계를 쌍행으로 기재해 놓고 이어서 유흠(劉歆)의 <상산해경표>[15] 를 수록해 놨다 마지막으로 곽박이 주석을 붙인 본문 18권을 실어 놓았는데 본문 가운데 14권과 15권이 누락되어 있다. 곽박이 고대에 유통되었던 삽화[16] 등을 보고 그 감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산해경도찬>(上山海圖讃)은 일반적으로 본문과는 별도로 수록되어 있으나 이 판본에서는 매 권에 본문뒤에 그 권을 지칭하는 산해경 도찬이 수록되어 있다.
- 사부총간(四部叢刊)본
장원제[19] 가 출판한 사부총간이라는 책에 자부[20] 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으며 총 18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세로 14, 가로 10이고 선장본이며 필사본이다. 도장본과 마찬가지로 곽박의 <산해경서>를 첫머리에 실어 놓고 그 뒷부분에는 별도로 간략하게 산해경서를 사부총간에 수록하게 된 이유와 시기 그리고 수록자의 이름을 행서체로 적어 놓았다.
뒤를 이어<산해경목> 과 유흠의 <상산해경표> 그리고 본문 18권을 기존에 전승되어 내려오던 순서대로 수록해 놓고 마지막으로 청시대의 학자인 황비열[21] 이 교차 검증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산해경교감기[22] >가 있어 정리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해 두었다.
- 고금일사(古今逸史)본
2.3. 왕숭경의 산해경석의(山海經釋義)[편집]
이 판본은 청나라시대 1690년에 [24] 판각된 목판본으로 중각(重刻)본이고 총 18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22.2 가로 13.8이고 사주단변을 이루고 있으며 반 페이지에 9행마다 19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계선이 있고 백구에 상혹어미가 있으며 주는 쌍행으로 쓰여 있다.
당연히 위에 언급된 곽박의 <산해경서>를 첫머리에 놓고 그뒤에 왕숭경 자신이 그 위에 주석과 자신의 의견을 덧붙[25] <서산해경석의>를 실어 놓았다 한유[26] 들의 <重刻산해경釋義서>와 유흠(劉歆)의 <상산해경표>,그리고 <산해경총목(總目)>을 순서대로 수록해 놓았으며, 그 뒤를 이어 조유원[27] 쓴 <산해경석의발[28] >을 실어 놓았다.
그 뒤에는 <도상산해경[29] >을 수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산해경의 삽화 75폭이 추가되었고, 그 당시까지의 산해경의 삽화집이 하나의 캐릭터에 대해 특징만을 잡아내어 간결하게 그려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 추가된 75폭의 그림은 캐릭터를 좀더 정밀하게 묘사하고 배경까지 그려넣고 있다.
그리고 이 <도상산해경>의 뒤를 이어 <산해경석의>가 18권이 실려 있다. 왕숭경의 <산해경석의>의 구성은 [원문/곽박 주/왕숭경 주] 식으로 역시 다른 산해경 판본과 다름없이 원문과 곽박의 주석을 기본으로 하여 그 위에 자신의 주석을 달아놓았고, 왕숭경의 주석 및 그 주석이 달린 문장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산경>의 첫머리는 작산이라는 곳이다. 작산의 첫머리는 소요산이라는 곳인데 서해변에 임해 있으며 계수나무가 많이 자라고 금과 옥이 많이 난다.(중략) 이곳의 어떤 나무는 생김새가 닥나무 같은데 겉이 검다.[왕숭경주1]
(중략) 여궤수가 여기에서 나와 서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데 그 속에는 육패가 많고 이것을 몸에 차면 기생충 병이 없어진다.[곽박주4]
[왕숭경주2]
왕숭경은 정통적인 유학관을 지녔던 인물이였던지라 산해경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식물, 문화 등에서는 대부분 그런 게 실제로 있을 턱이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산해경의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해 나름의 실증적이면서 현실적인 해석을 제시한 게 유의해 볼 만한 점이다. 더 예를 들면,
다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녹오산이라는 곳인데 산 위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고 금과 돌이 많다. 이곳에 이름을 고조(蠱雕)하는 짐승이 있는데, 생김새가 수리 같고 뿔이 있다. 그 소리가 어린애 음성 같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왕숭경주3]
그러니까 산해경에 있는 상상의 동물에 대해 실제로 그런 동물이 존재할 리 없고 사람들이 실제 있는 동물을 보고 착각했다는 식으로 주석했다. 유교적인 논리 하에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을 한 것이다.
이런 해석이 담긴 주석은 너무 딱딱하며 오히려 왕숭경 본인의 편향적이고 주관적인 서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단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왕숭경의 <산해경석의>는 동진 시대 곽박의 판본 <산해경서> 이후 천여 년의 공백기를 깨고 두 번째로 나온 산해경 판본이라는 큰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왕숭격의 <산해경석의>는 명나라 때 유행한 수많은 산해경 판본 출시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볼 수 있다.
2.4. 양신의 산해경보주[편집]
양신 역시 곽박의 산해경을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주석을 붙여 <산해경보주(山海經補注)>라는 판본을 만들었다 이 산해경 보주와 관련된 판본은 숭문서국[30] 에서 판각한 <백자전서(百子全書)>본 <승암외집(升庵外集)>본 <함해(函海)>본 <심기도설(藝海珠塵)>본 그리고 일본 마에가와 대학교 영당 산해경이라는 제목 그대로 판각한 판본 등이 있다.
양신의 판본은 주석의 방식이 당시로서는 특이했는데, 기존의 주석가인 곽박이나 왕숭경이 원문 아래에 주석을 덧붙이는 행태를 취한 것과는 달리, 원문을 통째로 따로 수록해놓고 자신이 쓴 <산해경보주>에다가 [원문에서 주석할 일부 문장 발췌/곽박의 주석/양신 자신의 주석] 이 형식으로 글을 써 본문과 분리된 책 한 권을 따로 더 써낸 것. 그리고 양신이 주석한 산해경의 문장과 그 주석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천지산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토끼 같은데 쥐의 머리를 하고 그 등으로 날며 비서(飛鼠)라고 한다.[곽박주5]
[양신주1]
곤륜허는 처제의 하계의 도읍이다. 여덟 구석의 바위굴과 적수의 물가가 있는데 동이[31]
의 예[32] 같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이 구름의 바위에 오를 수 없다.[곽박주6][양신주]
필원[33] 은 양신의 주석본에 대해 충분히 실증하지 않은 채로 서술했다고 비판했다. 곽박은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서적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뢰감 있고 객관적으로 주석을 달았던 반면, 양신은 믿을 만한 서적에서 정보를 인용하거나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개인적인 추측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인 독자연구를 나열해 산해경을 주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런 내용적인 한계도 있지만, 주석의 형태나 구조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며 서문에서 하나라 우임금의 구정[34] 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산해경>이라는 견해에 반박하면서 산해경의 성립 시기 및 성립 방식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여 이후 <산해경>의 정확한 유래를 연구하는 데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승암외집 본
- 함해 본
- 백자전서(百子全書)본
위에 서술한 다른 산해경보주본과 달리 유흠의 <상산해경표>는 물론 곽박이 쓴 <산해경서>까지 수록해 놓았다, 그리고 양신 본인이 산해경의 주석가가 된 이유를 간략하게 <산해경후서>에다가 서술해 놓았다. <산해경후서>의 내용은 첫째, 전설속의 인물인 하나라의 우 임금이 그 나라의 기이한 산과 동식물의 형상을 그려놓은 그림이 <산해도>고 그 그림을 글로 표현한 것이 <산해경>이라는 논지를 제시함으로써 <산해경>의 성립 시기와 성립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산해경이 청대에 이르러 구판은 사라지고 그림과 도교 경문에 실린 글만이 남아서 후대로 전승되고 있는 산해경의 유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후대의 사람들이 <산해경>이 실제 지명과 맞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산해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우 임금이 지어냈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한 현실이 안타까워[45] 후대 학자들에게 <산해경>의 근본을 일깨워 주고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주석을 붙이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양신 자신이 산해경보주를 간행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산해경후서>의 뒤를 이어 총 18권으로 구성된 <산해경> 본문과 <산해경도찬>을 수록해 놓았고, 양신의 주석이 담긴 <산해경보주>가 마지막으로 실려있다.
- 심기도설(藝海珠塵)본
이 판본 또한 위에서 언급한 함해본과 마찬가지로 <산해경>의 본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고 <산해경보주>와 <산해경도찬>이 각각 <사부/지매류[49] > <사부/도찬류[50] >에 나누어져 수록되어 있다.
- 일본 산해경본
이 판본은 일본에서 유통된 판본으로 양신의 서문인 <산해경후서>를 <산해경도서>라는 명칭으로 개명해 수록했으며, 일본의 독자들이 쉽게 판본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자와 행 사이에 가타가나를 판각해 좋았다. 일본에 수출된 이 판본의 가장 큰 특징은 산해경의 내용보다는 삽화에 더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산해경은 글과 그림이 따로 분리되어 출간되어 왔는데 이 판본의 경우 글 사이사이에 글의 내용과 관련된 삽화가 삽입되어 있다. 그림을 중요시하는 만큼 당연히 왕숭경의 산해경 석의에서 추가된 75폭의 섬세한 그림도 수록되어 있다.
본문 및 글자 수의 합계를 통계해 놓은 <산해경목>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밖에 곽박의 <산해경서> 또한 수록되어 있고 유흠의 <상산해경표>가 수록되어 있지만 양신의 서문을 빌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양신이 주석을 한 <산해경보주>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2.5. 오임신의 산해경광주[편집]
- 이 판본은 청의 乾隆 51년 (1712)에 진창[51] 의 화업당(書業堂)에서 판각한 목본으로,<산해경> 본문 18권과 <산해경도> 1권이 총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19.1,가로 12.4cm이고 선장본이다. 좌우쌍변에 문무변란을 이루고 있으며 반 페이지에 9행, 행마다 22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계선이 있고 백구에 어미는 없으며, 주는 쌍행으로 쓰여있다.
오임신의 <산해경광주>는 곽박이 주석을 붙인 <산해경>을 바탕으로 하여 작자의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그 주석을 보충/보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 구조는 [원문/곽박 주/오임신 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남산경>에 있는 그의 주석과 그 문장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동쪽으로 300리를 가면 靑邱山이라는 곳이다.[곽박주7]
[오임신주]
<사고전서(四庫全書_>에서는 이 주석본에 대해 "사물의 이름과 형상, 훈과, 산과 내, 길과 거리를 모두 바로 잡았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임신이 기이하고 박식한 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구구절절이 나열한 인용문들이 조금 번잡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산해경광주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부한 인용문을 주석으로 덫붙여 놓은 것이며, 다른 명나라 시대의 주석본들과는 달리 개인의 주관적인 사상을 담은 게 아니라 고대의 서적들을 두루 인용하여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 주석이 설명충스러운 게 단점이자 장점. 이렇게 주관적인 의견이 아닌 기존의 서적을 이용한 주석 방식은 명나라 때는 드문 방식이었으며, 앞으로 등장할 청나라 시대 <산해경> 주석서들의 기본적인 주석 방식이 된다.
2.6. 서지사항[편집]
곽박이 쓴 산해경 최초의 판본인 도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황동경부터 해인경까지는 후대에 쓰여 산해경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3. 산해경의 기원에 대한 견해들[편집]
4. 정체불명의 책[편집]
지은이 뿐만 아니라 그 실체 역시 오리무중이다.[60] 이런저런 설들이 나오고 있지만 산해경 자체와 산해경의 존재에 대한 언급 이외에는 산해경에 대한 자료도 거의 없으며, 현재까지 여전히 정체불명의 책이다. #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 전한 시대부터 이미 황당무계한 판타지 소설 취급을 받았으며, 곽박 역시 이런 평가를 염두에 두는 모습을 보인다. #
이름이 산해경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산과 강, 바다 등의 지형과 지리에 대한 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지형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특정 위치를 설명할 때, 어디서부터 가야 하는지 출발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동쪽으로 500리, 서쪽으로 1천 리를 가다보면 00가 있고 그 00에는 XX한 동물이 사는데 그 동물은 @@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각 지역에 대한 설명도 그 곳에 사는 상상의 동물에 대한 기이한 설명이 주류라서 많은 사람들이 산해경은 주변 세상의 풍물을 상상하여 써놓은 중국 신화서 혹은 상상의 동물 도감으로 간주한다. 당연하게도 실제 지리서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으며, 그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중심지역인지, 장강 유역인지, 중국 남부지역인지, 중국 동북 발해만 일대인지조차 불분명해 각 지역이 원류라는 많은 설들이 공존한다. 당연히 도대체 어느 시대의 신화나 전설이 반영된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일단 성립시기는 전국시대 후기로 보이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영향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동주-서주시대 때 편찬되지 않았냐는 주장도 있다. [61]
단순히 누군가 쓴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지리서의 형태인데다 내용도 뒤죽박죽이고 읽기에 쉽지 않은 형식이라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대체 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단순히 장난 삼아 쓰인 글이나 민담의 모음집이라기엔 산해경이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춘추전국시대(선진시대)는 '글을 알고' 어떠한 지식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희귀했던 시대[62] 라는 점이 문제.
이걸 순수한 허구의 창작으로 보지 않는 결정적 이유는, 그 내용 중에는 기원전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고 그 일부 내용이 다른 사서 등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정확한 역사서나 지리서로 보기는 어렵지만 또 순수한 허구도 아닌 셈. 한국에 관련된 대표적인 서술로는 조선, 숙신, 예맥, 삼한 등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청구국, 군자국, 대인국, 백민국, 삼위산, 불함산(=백두산) 등 한국 관련 지리적 언급이 나오고 고조선을 최초로 언급한 책이 산해경이다. 한반도의 무궁화나 동방예의지국 이라는 개념, 백두산 천지에 산다는 뱀 같은 괴수설도 산해경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것.
그리고 산해경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판본이 내려오고 내려왔기에 산해경 판본의 변천의 역사는 중국 인쇄의 역사나 서지학의 역사와 한 궤를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왕궈웨이가 산해경에 언급된 왕해(王亥)가 은대 갑골 문자에 나오는 왕해와 동일인물임을 밝혀내었다. 왕궈웨이는 또한 산해경에 나오는 제준(帝俊)의 俊 글자가 갑골문에서도 판독된다고 보았다.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전해지지 않은 모종의 고대의 지식이 반영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전해져 내려 온 고전 서적치고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과거에는 별로 연구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유교의 가르침으로는 이런 서적은 빼도박도 못하는 괴력난신에 해당하고 공자는 이런 환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군자답지 못한 짓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63] 애초에 고대 전한시대때 부터 판타지 소설로 취급 받았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 자체가 전근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판타지스러웠기에 진지하게 연구할 가치조차 느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근래에는 고대 중국인의 지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가치나 신화집으로서의 성격이 주목받는다. 현대까지도 전해져 오는 수많은 떡밥(치우, 황제의 싸움 등)의 원전으로서 가치가 높으며 번역판도 제법 있는 편. 한국어로는 정재서 교수의 역본이 있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인용한 이야기를 사기에 써 고대사 떡밥의 원인을 만들기도 했다.
5. 기타[편집]
오만가지 환상종들이 등장하는 책으로의 가치도 높다. 또한 신이경(神異經)이라고 하는 유사한 책이 후대에 나오기도 했다. 아마 산해경의 내용을 기반으로 중국풍의 환상적 현대적 TRPG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요약하면, 중국 판타지의 원류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포켓몬 GO가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자 중국에서 산해경에 등장하는 요괴들을 포획하는 짝퉁 게임 산해경 GO가 출시 됐다. 긴고아[64] 를 이용해 요괴들을 잡는다고 한다.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가 읽고 있는 책이다.
황지우 시인은 <산경山徑>이라는 제목의 <산해경>을 패러디한 시를 쓰기도 했다. 황지우의 시 중 독보적인 길이를 자랑하며, 산해경의 형식을 빌어 당시 80년대 군사정권 하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것이 일품.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에 수록.
전문 보러가기
블루 아카이브에서 산해경의 이름을 딴 산해경 고급중학교가 등장한다.
6. 외부 링크[편집]
-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제공하는 산해경 일부 삽화 목록.[66] 해당 페이지 아래 '연관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콘텐츠닷컴이 섭종을 했다....
7. 관련 문서[편집]
- 신화 관련 정보
- 중국 신화
- 무계국
- 산해경/남산경
- 산해경/서산경
- 산해경/북산경
- 산해경/동산경
- 산해경/중산경
- 해외남경
- 해외서경
- 해외북경
- 해외동경
- 해내남경
- 해내서경
- 해내북경
- 해내동경
- 대황동경
- 대황남경
- 대황서경
- 대황북경
- 해내경
- 산해경 GO
- 호랑이형님
- 낭선기환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