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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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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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5고지-406고지 전투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개성-문산 전투

시기
1950년 6월 25일 ~ 6월 28일
장소
개성,문산,파주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고한조 제1대대장 대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정영홍 제2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재명 제3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전성호 제12연대장 대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한순화 제2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이무중 제3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익열 제13연대장 대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윤천태 제2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유재성 제3대대장 소령
파일:북한 국기.svg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파일:북한 국기.svg 황석 제1연대장 대좌
파일:북한 국기.svg 최현 제3경비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이창권 제3연대장 총좌
파일:북한 국기.svg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파일:북한 국기.svg 김순진 제13연대장 대좌
파일:북한 국기.svg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파일:북한 국기.svg 김현기 제15연대장 대좌
병력
병력 10,161명
105㎜ 곡사포 15문
57mm대전차포 18문
81mm박격포 36문
60mm박격포 54문
2.36인치 로켓포
각종 기관총 43정
병력 21,000명
122㎜ 곡사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총 화포 444문
전차 40대, 자주포 32대[1]
피해규모


결과
북한군의 개성, 문산 점령
국군 제1사단의 전략적 후퇴

1. 개요
2. 당시 상황
3. 부대 배치 상황
4. 개전 직전
4.1. 한국군
4.2. 북한군
5. 개전
5.1. 청단-배천 철수
5.2. 개성 철수
5.3. 문산 전투
5.4. 파평산 전투
5.5. 임진강 방어선 붕괴
5.6. 봉일천 전투
5.7. 행주 도하 작전
6. 평가
7. 여담



1. 개요[편집]


개성-문산 전투는 청단, 연백, 개성, 고랑포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203전차연대,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

2. 당시 상황[편집]


당시 1사단은 수비작전을 새로 짜면서 대대단위 훈련부터 다시 진행하던 상황이였다. 또한 개전 당시 부대 구성원 대부분이 휴가나 외박으로 인해 병력의 42%만 가지고 전투를 해야했다.

3. 부대 배치 상황[편집]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 km, 제13연대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4. 개전 직전[편집]



4.1. 한국군[편집]


한국군 1사단은 제11연대를 사단예비대로 사단사령부와 같이 수색에 배치하고 제12연대를 개성 연안 백천에, 제13연대를 문산 고랑포 일대에 배치하여 38선 일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1사단은 보유병력에 비해 담당 지역이 넓었기에 38도선의 경계진지에는 최소의 병력을 배치하고 임진강 남안을 좌우로 제2방어선을 지정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만일 제2방어선을 지탱할 수 없으면, 봉일천을 좌우로 제3방어선을 구축해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1사단은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진지 재편성으로 인해 교육훈련율이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11,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 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개전 전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과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결국 6월 25일 개전 당시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의 경우 80km에 이르는 방어 구역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제12연대 제3대대는 서쪽으로는 청단군 금학리 부근 하천인 읍천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2]까지 54 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제12연대 제2대대는 서쪽으로는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3연대는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3]에서부터 소반고개-판문점-두매리-조금리-고랑포리-원당리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또한 방어계획 수정으로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이동조치 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 60mm 및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4월 22일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 소재 보병학교로 이동해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기에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4.2. 북한군[편집]


북한군 1사단은 구화리로, 6사단은 고랑포 적성 방면을 주공으로 일거에 개성 연백지구의 아군을 공격 분산시키고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아군의 한강이남 후퇴를 차단, 일대격멸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북한군의 배치현황을 보면 북쪽의 137고지로부터 서쪽으로 282고지(대원리)-송악산-325고지(백천)-120고지(연안 북쪽)-98고지(청단 북쪽)등을 연하는 38도선상의 지형을 따라 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개성시가를 완전히 감쌀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벙커를 구축하는 한편, 제1 · 제2 · 제3 경비여단 후방 남천에는 북한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제1, 제2, 제3연대와 포병연대를 두고 있었다.

제1사단 및 제6사단의 병력은 도합 21,000명 내외이며 장비 122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그 밖에 그들의 총사령부 직할의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전차 40대와 기타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의 지원거리내에 집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5. 개전[편집]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전화를 받았다. 개성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1사단개성-문산 전투고랑포 전투, 봉일천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이후 김포반도 전투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5.1. 청단-배천 철수[편집]


파일:제12연대_제3대대의_배치.gif
제12연대 3대대가 지키는 청단군~개풍군 간 54 km 구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였다. 또한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였다. 북한은 12연대를 향해 이미 의정부와 개성이 함락됬다는 방송을 하는 등 심리전을 하였다. 당시 12연대 3대대가 담당하던 지역에 위치한 백천경찰서에서 연락이와 같이 투항하자고 하였지만 12연대는 이를 무시하였다.[4]

이런 상황에서 12연대 3대대는 지연전을 펼치다 어선을 타고 용매도-청룡 반도-백석포-강화도-김포반도 경로를 통해 최종적으로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 병력이 낙오되었다.

5.2. 개성 철수[편집]


개전직후,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2대대 한순화 대대장에게 송악산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잠시뒤, 북한군 제6사단 15연대는 전차 5~6대를 앞세우고 국도 제1호선을 따라 한국군 제12연대 제2대대가 방어하고 있는 개성 시내로 진격하였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2대대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 중위가 전사하여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같은 시각, 개성 시내의 만월국민학교에는 24일 밤 11시쯤 국군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야영을 하고 있다가 밤이 깊어지자 시내를 돌아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대 공격시간에 맞춰 후방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이미 개성으로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개풍군 여현리 일대를 경비하던 12연대 제2대대 제5중대도 개성이 함락됨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하였으며, 개성 송악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하던 제7중대도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7시경) 제2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으로 철수하게 되었다.(9시경)

한편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이날 09:00쯤 국도 제1호선이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제2대대는 개성 북쪽 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며 제1대대가 배치된 개풍군 고남리로 철수하고 있었다. 철수중이던 제2대대장과 만난 전성호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제2대대가 시간을 벌으라고 명령하였다. [5]

전성호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후임으로 김점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한편 연대본부가 철수할때까지 지연전을 명령받은12연대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시내 남대문에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를 경유, 김포반도의 강녕포[6]로 도하하여 통진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결국 개성은 개전 첫날에 함락되게 된다

5.3. 문산 전투[편집]


수색[7]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 예비대인 제11연대는 남침소식을 전달받고 6월 25일 8시 30분에 수색에사 출발하여 11시~15시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리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의 제1호 국도 좌우측에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 2대대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하여 방어전선을 구축하였다. 이후 연대가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귀대하여 병력은 1,500명으로 늘어났다.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개성지구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백선엽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그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군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경의도로를 침공로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도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한국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전차를 국도 제1호선 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오후 5시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국도 제1호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격퇴되었다.

그 뒤에도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한국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였다.

5.4. 파평산 전투[편집]


파일:Seoul_First_Battle.jpg
6월 25일 ~ 6월 26일의 전황

제1사단의 우전방으로써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방어하고 있던 제13연대는 1대대와 2대대를 파평면 파평산에 투입하여, 북한군이 백학면 노곡리[8] 가여울 - 적성면 - 문산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해오다 격멸되었다.

6월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9]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남하하였다. 이에 맞선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지만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여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겁을 먹은 듯 적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고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뒤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5.5. 임진강 방어선 붕괴[편집]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6월 26일에는 방어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측 인접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축석령 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러하여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한국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한국군 제1사단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북한군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6월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한국군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였다.

이후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잠시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기회라고 판단한 제11연대장은 지원온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투입한 역습으로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격퇴하였다.

하지만 같은시각 우측의 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으로 들어온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방어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5.6. 봉일천 전투[편집]


파일:봉일천 Internet.png
이 시기 11연대와 보병학교 교도대는 봉일천으로의 철수명령이 늦게 하달되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결국 11연대는 재편성, 교도대는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미리 도착해있던 증원부대 15연대 3대대와 20연대 3대대는 봉일천 방어선의 좌일선 배치되었고 12연대는 궤멸되어 분산철수한 가운데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금촌에서 재편성되었다. 의정부 지구의 7사단과 이를 증원하는 2사단은 이미 서울 미아리 부근으로 철수한 상태였다.

26일 오후, 1사단은 제2방어선마저 무너져 최후의 방어선인 봉일천으로 후퇴한 상황이였다.1사단은 연대별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위전리 일대에 배치된 15연대의 엄호하에 방호진지를 급편하였다. 봉일천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제6포병대대 2중대가 적 정찰대의 습격을 받아 105mm 포 4문이 소실되어 1사단의 지원화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사단이 방어진지를 편성한 위전리 문산천 일대는 방어에 유리한 반면, 도로가 발달되어 있어 적의 기갑부대 운용에도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감안하여 최후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1사단은 공세적인 반격계획을 세우고 기회저성에 주력하는 방법으로 태세를 바꾸었다.[10] 한편 북한군 1사단과 6사단은 문산리-법원리 일대까지 남하하여 공격을 위한 전투정찰을 실시하고 있었다.

27일 아침 10시, 북한국 6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대대 규모의 적 2개 부대가 각각 1번도로와 도로 좌측방에서 남하하였다. 좌측방의 적이 대대 좌일선인 9중대의 반대편 구릉을 점하고 9중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아군은 즉각 구원에 나섰는데 대대 중앙일선인 11중대로 하여금 62mm 박격포 화력지원을 하게 하고 대대 주력의 후방에 있던 중화기 중대장으로 하여금 81mm 박격포를 지원사격 하게 하여 공격하던 적을 30분만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전개로 1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적군도 산개하여 얼마간의 원거리 박격포 전을 벌이게 된다.

정오가 되자 전열을 가다듬은 북한군이 기마대와 18대의 전차를 앞세워 다시 남하하였다. 15얀대 3대대는 전차가 포진지 앞 300m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리가다가 로켓포 사격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이에따라 위전리 1번도로에 위치한 15연대 3대대장 최병순 소령은 육탄공격을 결심하였다. 최병순 소령은 22중대장에게 선두전차를 공격하라 명령하고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이끌고 전차에 접근하였다. 특공대가 일제히 전차를 향해 돌격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전차 기총사격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11중대장 이선도 대위도 전사하였다, 이후 11중대 2소대장 박종순 소위가 선두전차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격파하였으며 대대장도 후미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적 전차 6대를 모두 격파하는데 성공하였고 북한군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27일 밤, 북한군은 소나기를 틈타 야간공격을 하였다. 이 가운데 육본에서 파견된 작전지도반(반장 소장 김홍일)이 사단한테 한강도하 철수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작전지도반장은 재량권이 없었으므로 철수건의를 총참모장에게 전달할 것을 약속하고 사단전술지휘소를 떠났다. 다음날인 28일 아침, L-5 연락기가 사단전술지휘소에 연락통을 떨어뜨렸다. 그 속에는 "현 방어선을 고수하라" 는 육본의 명령이 담겨있을 뿐 철수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아침 8시 20분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따라 11연대는 큰 교전 없이 위전리~도내리선상 중간목표를 점령하고 최후방어선 좌측일부를 화복하였다. 반먄 우측 13연대는 북한군 1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반격을 할 수 없었다. 백선엽 사단장은 서울특별연대와 20연대 3대대를 투입하여 11연대와 13연대간 간격을 메우고 반격을 준비해나갔다.

5.7. 행주 도하 작전[편집]


6월 27일 제15연대의 철수에 따라 사단은 금촌 북쪽의 주진지 회복을 위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으나 밤 사이에 우회침투한 북한군의 양습으로 우일선 제13연대가 태반의 주진지를 상실하여 천명과 더불어 동거리 남쪽에서 저지진지를 편성케 되었다.

한편 제2선에 배치된 제11연대가 밤사이에 난데없이 주저항선 부대가 되어 이날 05:30에는 좌일선 제1대대가 북한군의 급습을 맞게 되었다. 이리하여 해대대는 1번도로상으로 집중하는 대대규모의 북한군을 진전에서 저지코자 전 화력을 집중시키는 동시에 포병화력까지 지원받아 이들의 충세를 꺾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또 한 무리의 추적이 서측을 위협하였다. 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대대로부터 긴급보고를 받자 금촌 북쪽에서 공격준비를 갖춘 김재명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로 하여금 예정된 공격개시시간보다 40분이 빠른 07:20에 제1대대 서측으로 기동케 하여 북한군을 측방으로부터 구축토록하는 한편 08:10에는 봉일천에 배치된 정영홍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를 등원리방향으로 공격케 하였다.

이리하여 연대의 각 제대가 일제히 전방에 나서게 되자 사단장은 해연대와 제13연대와의 벌어지게 될 간격을 보전하기 위하여 박희동 소령이 이끄는 제20연대 3대대를 제11연대의 동쪽에서, 그리고 서울특별연대의 혼성병력을 다시 그 동측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이렇게 이날 11:15에는 이들 제대가 내화산-79고지-두분동, 그리고 국도 동측의 둔전동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날(28일) 정오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고, 오후 2시경에는 녹번리에 적 전차가 나타나 도로를 차단하고[11]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북한군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영정리(영정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가 강화도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오류동으로 철수하자 뒤를 따라 김포지역을 침공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도하장의 선정에 대하여 선임연대장인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과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최경록 대령은 이산포를 최영희 대령은 행주나루터를 각각 건의하게 되었다.

이렇듯 2개 도하장을 보고받은 사단장은 사단의 주력을 동시에 철수시키려면 최소한 2개 도하장소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이들 양 연대장에게 세부적인 도하지점의 선정과 도하장의 사전준비를 위하여 현지를 실지정찰할 것을 지시하고, 사단장 자신도 이날 오후에 이산포와 행주등지를 돌아보았는데 행주의 도하준비를 맡은 최영희 대령은 그 부근의 창고를 헐어서 그 재목으로 선착장을 만들고 배 2척을 묶어서 차량을 운반할 수 있게끔 준비하였다.

또한 오재기 중위로 하여금 김포쪽에 대한 정찰을 시켰던 바 이미 대규모의 북한군이 비행장을 점령한 사실을 알게 되어 도하장 부근에 집결된 부대 중 병력 1개 소대를 뽑아 양대안과 차안변에 대한 경계에 임하도록 아어 조치하였다

결국 1사단은 한강 도하 철수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직시해 행주 나루터와 이산포 나루터를 도하지점으로 선정하고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철수 후 1사단은 6월 30일 08:00까지 시흥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한편 앞서 회의에서 철수명령이 내려지자 각부대별로 빠르게 철수한 부대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날 15:30에서 16:00사이에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다 공격중인 최전선부대까지 명령이 잘 전달 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즉 서울특별연대장 유해준 중령은 전방에 나갔다가 작전회의에 참석치 못한 관계로 철수에 관한 사정을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제20연대 3대대장 박희동 소령은 공격도중에 인접 부대가 없어진 것을 알고 뒤늦게 철수하여야만 하였다.

특히 이들 제5사단에서 증원된 부대들은 해지역의 그 지역의 군사지도를 보급받지 못한 채 전방에 투입된 까닭으로 철수시 병력수습에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만 하였다.

한편 제13연대장 김익열 대령은 사단의 작전회의가 끝난 뒤 고양 남쪽 하천 제방에서 연대 자체의 지휘관회의를 열고 철수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옥쇄하자고 제의한데 반하여 제2대대장 윤천봉 소령과 제3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삼각산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우군이 반격하여 올 때까지 항전하자고 하였다.

또한 작전주임 최대명 소령은 『사면초가인데 별수 있느냐, 차라리 부하들을 각개 행동케 하고 우리는 자결을 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결문제에 대하여서는 모두가 반대하였고 이때 미군 폭격기가 문산을 폭격하는 것을 보고 『미군이 참전한 이상 우리가 주저할 것이 없다. 한강을 건너서 싸우자.』고 연대장 김익열 대령이 결론을 내렸다.

우선 연대 헌병대장 박충치 소령으로 하여금 헌병을 지휘하여 행주에서 연대의 도하준비를 하도록 조치하고 부대의 철수는 제2, 1, 3대대 순으로 결정하였으며 제3대대는 연대본부 병력까지 통합 지휘하여 주력부대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에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각 대대는 철수하기 시작하고, 연대장 자신도 작전주임 최대명 소령을 대동하여 연대의 무선지휘망인 3/4톤 통신차 1대를 뒤따르게 하여 행주에 내려와 도하장을 확인한 다음 무전기로써 철수부대를 능곡-행주방향으로 유도하였으나 교신상태가 좋지않아 행주에서 다시 봉일천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능곡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봉일천-능속간의 312번도로가 철수차량과 병력등으로 길이 막혔으므로 능곡에서 내려오는 2개대대와 연대직할대를 행주로 유도하다가 이들과 함께 이날 밤 소형배 5척을 할당받아 도하하게 되었다.

한편, 제11연대는 사단의 작전회의가 끝나는 즉시 공격중인 전방대대에게 철수명령을 하달하는 등으로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이날 15:30이 되어 돌연 연대의 후방으로부터 북한군의 박격포사격을 받게 되었다.

북한군 기마대가 연대 동측방에 있는 은골로부터 연대후방지역을 기습하는 한편 그들의 일부 보병부대가 철수시의 혼란을 틈타 이날 아침까지 제2대대가 확보하고 있던 봉일천의 111고지에 나타나, 연대 관측소가 있는 동측지 서측방의 독립고지와 107고지 남쪽에 있는 연대 지휘소 지역에 박격포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마치 연대가 적의 포위망 속에 갇히게 된 양 적 포탄이 후방으로부터 날아오자 일대 혼란을 빚게 되었다.

즉 관측소에서 철수준비 중이던 최일영대위는 재빠르게 관측소 요원을 인솔하여 적의 포격을 피하면서 일산으로 철수하고, 연대 지휘소 주변에서 보급품을 후송하려던 보급장교 한근호 중위는 보급하사관 윤기열 중사등과 같이 우선 대기시켜 놓은 차량에 총기류부터 적재하고 이어서 탄약과 식량(백미 100여입)을 차에 실으려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북한군 포탄이 그 옆에 쌓아둔 탄약상자에 낙탄하였으므로 이의 연쇄폭발을 피하여 그길로 차를 몰아 일산으로 빠져나왔다. 이무렵 사단 지휘소가 철수한 뒤의 봉일천 초등학교에서는 원인 모르는 화염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제 11연대의 주력은 이러한 광경을 멀리 바라보면서 일산을 거쳐 이날 저녁무렵에 이산포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부근에서 수집한 소형어선으로 도하하였는데 행주나루터나 이산포할 것 없이 운집한 각 부대의 전투요원들은 앞을 다투어 도하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요인은 배가 대안에 건너가기만 하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었으나 이보다도 소속을 달리하는 여러 부대가 통제를 무시하고 도하순서를 지키려 하지 않는 데에 근본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상류나 하류지역을 더듬어서 배를 구하여 도하하거나 뗏목을 만들어 건너는 등으로 아예 질서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개의 장교가 계급장을 떼고 있어 누가 장교인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느새 사복을 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니, 여기에는 상관이나 부하도 없었다.

더욱이 각부대의 철수차량이 이곳에 집중되어 유기되었던 관계로 차량으로 이곳까지 후송된 전상자에 대하여서도 도하의 우선권이나 이들을 위하여 손을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체념한 나머지 차내에서 자결하겠다며 수류탄을 달라고 했고 더러는 차라리 쏴달라도 호소하는 자도 있었다. 여기에는 다만 대등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면 배를 구하여 도하하느냐 하는 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삶의 추구만이 온 강변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제13연대 수색중대의 김호 소위, 제7중대의 김홍주 소위 그리고 고모 중위등은 행주를 목표로 철수하다가 전세의 불리를 개탄한 끝에 자결하였다.

김호 소위 선임하사관 홍원기 상사에게 먼저 가라고 한 다음 3명만이 운명을 같이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북한 공산치하에서 월남하여 언젠가는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구하겠다고 군문에 들어왔던 것인데 이제 북한군들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국군이 비참한 패퇴를 하는 마당에 우리의 갈곳이 어데냐고 서로 논의한 끝에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제13연대 3대대는 엄호부대의 임무를 마치고 야간철수를 하였는데, 다음날인 6월 29일 날이 밝을 무렵에 수색동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부대행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대대를 수색동 북쪽 산에 집합시켜 일방훈시로써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지금부터 대대는 소집단으로 행동하여 시흥 방면에 집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휴대무기를 그 부근에 이몰한 뒤 부대를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자신은 몇 명의 부하와 함께 사복으로써 이 날 밤 광장교로 빠져나갔다.

또한 6월 27일 밤 금촌 북쪽에서 철수한 최병순 소령이 이끄는 15연대 5대대는 흩어진 병력을 봉일천 남쪽에서 수집하다가 7월 18일에야 능곡 부근까지 내려간 병력을 겨우 수집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대대는 이날의 반격에도 제외된 채 철수도 타부대보다 빠를 수가 있었다. 이들은 이날 주간에 수색역을 거쳐 난지도로 나왔는데, 대대의 병력은 수색에서 수집한 타 부대의 병력까지를 합하여 1200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강변에서 병력을 풀어 배를 찾게하는 한편 이 무렵 난지도내 도처에서 원인 모르게 불타고 있는 집들 주인이 없는 초가를 헐게하여 여기서 얻은 판자나 통나무 한 개씩을 전원이 갖게한 뒤 도하조를 편성하여 이날 19:00에 영등포의 염창동쪽으로 도하하였다. 그러나 판자나 통나무에 매어달린 채 건넌 관계로 대부분이 물에 떠내려가 55고지(염창동 북쪽 1.5km)아래 강변에서 상륙하였는데 개인병기는 전원이 휴대한 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밖의 부대도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사이에 행주와 이산포로 도하하였으며, 사단장 백선엽 대령도 사단 사령부와 함께 행주나루를 건너 철수하였다.

그런데 앞서 6월 27일에 사단을 방문한 김홍일 소장은 당일 육군본부에 복귀하는 즉시 제1사단의 철수문제를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에게 구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무렵 북한군의 주공이 미아리 지역으로 집중되어 수도방수의 성패가 경해지간에 놓여있는 초긴박한 상황하에 몰려있었으므로 총참모장 스스로가 이에 대한 명확한 지시조차 내리지 못한채로 수원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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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사단 및 중원부대의 한강도하 상황
    • 사단사령부 및 직할대, 제15연대본부 및 직할대 : 제1차로 행주나루터에서 대소 선박 5~6척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으로 철수하였다.
    • 서울특별연대(-), 제20연대 3대대(-) 제12연대의 일부병력 : 행주나루터에 뒤늦게 도착하여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밤사이에 한강을 도하하였으나 일부병력은 분산되었다.
    • 제13연대 : 연대 주력은 제3대대의 엄호 하에 능곡을 경유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는 야간 철수중 방향을 잃고 헤매다 6월 29일 아침 수색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대대장은 대대를 해산시켜 소규모단위로 분산 철수하여 시흥에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 제11연대 : 위전리~봉일천에서 사단주력의 철수를 엄호한 후 일산을 경유하여 이산포 나루터에서 제 12연대(-)와 기타부대의 낙오병을 수습하여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때에는 이미 김포 반도에 북한군이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단위로 분산되어 시흥과 수원으로 철수하였다.
      • 제13연대 후발대와 기타연대 낙오병 130명은 어선에 승선하여 한강 하구를 거쳐 군산으로 항해한 끝에 7월 5일 증평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 제15연대 3대대 : 6월 28일 오후 타부대보다 한발 먼저 철수를 개시하여 수색 부근에서 낙오병을 수습해 병력이 1200명으로 증가되었다. 대대는 난지도로 건너가 초가집을 헐어서 그 목재로 뗏목을 만들어 한강을 도하, 영등포에 집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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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사단의 한강 도하는 철수계획의 미비와 전면철수라는 긴박한 사태속에 대혼란이 야기되어 도하시간은 계속해서 지연되어갔다. 게다가 북한군은 6월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김포 하성면 봉성리의 봉성산(129m)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월동에 있는 지양산(138m)을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한 상태였다.

결국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불시 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6. 평가[편집]


1사단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개성에서 후퇴하였지만, 의정부나 서울에서 개박살이 나버린 다른 사단들과 달리 편제를 유지하면서 후퇴하였다. 덕분에 한강 도하 과정에서 병력이 흩어졌음에도 빠르게 재집결 및 재편성이 가능했고, 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김포반도 전투 당시 유일하게 제11, 12, 13연대의 원 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싸울 수 있었다.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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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05기갑여단 제203전차연대[2] 현재 개풍군 연강리[3] 현재 개성시 룡흥동 일부[4] 이후 해당 연락 또한 북한군의 심리전이였던 것으로 밝혀진다[5] 연대 예비인 제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와해되어 철수중이던 제2대대에 연대장이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6] 현재 월곶면 용강리[7] 현재 서을특별시 은평구 수색동[8] 당시의 노곡리는 38선 경계 바로 밑, 즉 최북단 지역이었다.[9] 청송로[10] 다만 통신두절로 주변 부대의 상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11] 사단의 환자후송차량이 서울시내에 들어가다가 녹번리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단으로 되돌아왔고, 수색에 탄약수령차 갔던 보급차량이 도중에 사격을 받고 돌아오는 등으로 서울에 이르는 후방도로가 차단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