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락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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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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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동락리전투
시기
1950년 음력 7월 5일~7월 8일
장소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일대
교전국
대한민국
북한
지휘관
6사단김종오
7연대임부택
1대대장 김용배
2대대장 김종수
3대대장 이남호
2군단장 김광협
48연대장 김치구
병력
1,750명
대포 48문
병력 규모 불명
피해 규모
피해 규모 불명
1,000 명 전사
포로 132 명
대포 15문 망실
기관총 14정 망실
소화기 2,000정 망실
장갑차 10 대 망실
차량 80여 대 망실
결과
북한군 15사단 공격 저지

파일:external/tv01.search.naver.net/%C7%F6%C3%E6%C5%BE.jpg
동락리 전투 승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김재옥 교사의 현충탑
1. 개요
2. 전투 직전 상황
4. 피해상황
5. 의의
6.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1950년 7월 5일부터 7월 8일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대한민국 육군 6사단 임부택 중령이 이끌던 7연대북한군 15사단 48연대에 맞서 승전한 전투.


2. 전투 직전 상황[편집]


북한군기습 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히 돌아가던 6월, 서울을 빼앗긴 한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대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히 춘천을 방어하던 6사단과 강릉지역을 방어하던 8사단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이 엄청난 선전을 하여 적 2군단의 진격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를 온전히 보전하고 철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육군은 19연대를 이천에, 2연대를 충주지역에, 7연대를 원주에 배치하여 저지토록 했지만 너무 넓은 면적을 6사단 홀로 방어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8사단이 후퇴하면서 원주내륙지방을 방어할수 있게되자 7연대를 음성지역으로 이동해 무극리일대를 점령한 후, 현재 육군정보학교, 육군특수전사령부, 제7기동군단, 제7공병여단, 국군교도소, 육군항공사령부 등이 있는 이천시 장호원읍을 확보하여 적을 저지하게 하였다.


3. 전투[편집]



3.1. 7월 5일[편집]


사단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7월 5일 충주를 출발하여 무극리 일대를 점령하고 이천시 장호원읍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3.2. 7월 6일[편집]


그리하여 음성에서 무극리로 이동하던 1대대는 오후 1시쯤에 조선인민군 육군과 대치하였다. 한편 2대대는 부용산을 선점하여 북한군의 진출로를 사전에 차단하였으며 3대대는 동락리에서 적 정찰대를 격퇴한후 생극으로 이동하였으나 북한군의 역습으로 포위될 상황에 이르자 유천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3.3. 7월 7일[편집]


이전 날의 전투로 아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으로 착각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정찰을 소홀히 한 채로 동락리를 통과하고 차량을 이용하여 용원리 일대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동락리에 진지를 구축한 3대대는 임부택 중령의 명령으로 이동중 03시쯤에 이동중이던 북한군을 발견하여 9중대가 먼저 교전을 실시하였으며 북한군 지휘부가 이를 소규모 부대의 소란 쯤으로 안 채로 차량 속에서 대기하고 있자 그 틈을 타서 나머지 2개 중대가 06시쯤에 적의 주력을 측면에서 기습하였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한 채로 분산되어 도주하였다. 그러자 3대대는 신덕저수지 북쪽으로 신속히 전개하여 적을 섬멸하였고 다수의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한편 북한군의 진출로를 차단하기 위해 부용산을 미리 선점하고 있었던 2대대는 당시 만 19세에 불과했던 동락국민학교의 초임 여교사 김재옥이 “국군은 멀리 후퇴했다”는 말로 동락국민학교에 숙영 중인 북한군을 안심시킨 뒤 몰래 4 km가 넘는 산길을 달려와 결정적 제보를 해 준 덕분에 북한군이 동락국민학교에서 숙영중인 사실과 그 규모, 무장 상태 등을 저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2대대가 북한군에 대한 은밀한 공격을 준비하던 중 새벽에 용원리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3대대가 공격 중인 것을 깨닫고 부용산 점령 임무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타격을 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위하여 즉시 동락국민학교로 진격하여 박격포 등으로 기습을 가했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당황한 북한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으며 국군은 운동장에 사열되어있던 적 장비 다수를 노획했다.


3.4. 7월 8일[편집]


비록 값진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날 아침 국군이 더 남쪽으로 후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선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후퇴하였다.


4. 피해상황[편집]


북한 육군은 1,000명이 전사하고 132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약 2,000명의 인적피해를 보았으며 대포 14문, 기관총 15정, 소화기 2,000정과 장갑차 10대, 차량 80여 대를 잃었다.


5. 의의[편집]


개전 이래 대한민국 국군이 최초로 거둔 육상전에서의 승전[1]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7연대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또한 소련제 장비 다수를 노획하며 소련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해 유엔 회원국 등이 유엔군을 결성해 이 전쟁에 참전하는데 결정적 이유를 제공했다. 이는 직후 진천 전투에서 미합중국 공군이 화력 지원을 하는 이유가 되었다.


6. 이야깃거리[편집]


승전 보고를 받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에 1계급 특진과 50만 원의 보상을 주었고, 연대 간부들에게는 태극무공훈장 등이 수여되었다.[2]

김일성은 안그래도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한테 호되게 당하는 바람에 초기작전이 물거품이 되버린 상황에서 또다시 6사단에게 패했다는 보고를 듣자 "남조선에는 6사단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그놈을 당장 섬멸해야 한다"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올린 7연대와 예하 대대[3]들은 아직까지도 6.25 전쟁 발발 이전의 부대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부대로 남아있다.[4]

결정적 제보로 승전에 기여한 동락국민학교 여교사였던 김재옥 여사(1931~1963)는 이 전투로 연이 닿아 당시 소위였던 이득주 중령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으나, 불과 32세였던 1963년 고재봉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당했다. 다만 김재옥, 이득주 부부의 큰아들 이훈 씨만은 마침 친척집에 가있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동락리 전투의 승전과 김재옥 교사의 일화는 1966년 ‘전장과 여교사’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현재도 동락초등학교에는 김재옥 교사를 기리는 기념관과 현충탑이 있다.

정부는 2012년 고 김재옥 교사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했으며,[5] 6.25 전쟁과 관련해 민간인에게 보국훈장이 수여된 첫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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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 전투들 중 첫 승전은 대한민국 해군이 거둔 옥계 전투이다.[2] 김재옥 교사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는 말이 떠돌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며, 전공을 세운 당사자들에게 수여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김재옥에게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2012년에야 보국훈장 삼일장이 사후추서되었다.[3] 1대대는 초산진격대대, 2대대는 음성무극전승대대, 3대대는 개천돌진대대.[4] 북한이 남침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길목인 철의 삼각지로 불리는 철원 지역을 지키고 있으며 GOP섹션도 맡고 있다.[5] 훈장은 위 살인사건에서 생존한 맏아들 이훈 씨에게 전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