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973-883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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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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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4thj4u.png

북한강에 놓인 부교를 건너는 5사단 병사들
1. 개요
2. 전투 이전 상황
3. 전투경과
3.1. 973고지와 883고지의 피탈 그리고 1차 역습
3.2. 2차 역습
3.3. 허울 뿐인 제3차 역습
3.4. 주저항선 붕괴
4. 전투 이후 상황
5. 결과
6. 여담


1. 개요[편집]


6월 금성전투 도중 일어난 또다른 전투

1953년 6월 10일에서 14일까지 진행된 전투로 금성 돌출부 황병동 부근에서 제5사단 27연대, 35연대, 26연대, 22연대[1]가 중공 제60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2. 전투 이전 상황[편집]


1953년 5월 26일 중공군은 제1차 하계공세가 끝내고 곧바로 6월 공세 준비에 들어갔다. 해당 공세에서 중공군은 6월 10일에 한국군 제5사단의 주저항선인 황병동 부근의 949고지, 974고지, 883고지와 한국군 8사단의 지형능선-수도고지 등을 공격하고자 했고 이에 중공군 사령부에서는 국군 제5사단 공격부대를 제20병단 예하 제60군으로 지정했다. 한편 이때 국군 제5사단의 부대 배치상황은 좌일선 949고지에 제36연대를, 우일선 973-883고지에 제27연대를 각각 배치하였으며 예비대는 제35연대로 두고 주둔지는 북한강 서안과 동안으로 두었다.[2]

그러나 이러한 진지 편성 도중 중공군은 5사단 정면에 지속적인 소규모 공격을 가해왔고 그 결과 50일이 지난 6월 10일, 5사단은 전체병력 11,272명 중 신병이 무려 36%나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비해 중공군 제18사단은 6월 8일 집계된 병력만 1만명이며 180사단은 8,011명으로 병력 숫자면에서도 앞설뿐만 아니라 전투력면에서도 앞서 있었다.

이렇게 열세인 상황에서 6월 10일이 되자 중공군은 60군 예하 181사단을 선두로 5사단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3. 전투경과[편집]



3.1. 973고지와 883고지의 피탈 그리고 1차 역습[편집]


파일:3g8938g.png
6월 10일 중공군 제181사단은 하오 송정-가바우골 일대에 집결했다가 날이 저물자 오봉능선 좌우로 전개하여 973고지를 공격하였다. 181사단은 국군 5사단을 기만하기 위해 좌일선 5사단 36연대 지역 949고지 북쪽으로 중대규모의 부대를 투입함으로서 견제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20시 부터에는 약 1만발의 포격을 퍼부으면서 21시를 기해 1개 연대 규모로 27연대가 주둔한 973고지 전방으로 돌격하였다. 전방에 배치된 전초부대들은 쇄도하는 중공군에 맞서 TOT 사격을 통해 이들을 격퇴시키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21시 15분 주진지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5사단 27연대는 중공군의 막대한 포격으로 인해 대대-중대 간의 유무선이 거의 두절되어 각 부대가 혼란에 빠졌다.

이리하여 전초선을 돌파한 중공군 181사단은 막대한 포격지원 하에 제27연대 1대대 3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937고지와 2대대 제6중대가 주둔한 883고지로 향하였다. 이때 5사단 제11포병단은 중공군을 막기 위해 접근로에 TOT 사격을 실시했으나 중공군은 포격이 멎은 틈을 타 다시 주저항선으로 돌격했고 23시경에는 주저항선의 핵심인 883고지, 937고지 일부가 돌파되었다. 이는 병력부족으로 인하여 돌파된 것이었다. 당시 사단은 사단의 넓은 전투정면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고지마다 1개 중대만을 배치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1개 연대규모로 몰려오는 중공군을 막기에는 매우 역부족이었으므로 결국 21시 40분 937고지가 피탈되고 10분 후에는 883고지마저 피탈되었다.


이에 제27연대장은 양측방 부대를 동원하여 돌파를 억제하도록 하고 돌파된 1대대와 2대대 병력을 수습해 저지선을 형성하려 하였다. 이후 제5사단장은 27연대 지휘소를 방문해 전황을 검토한 뒤 곧바로 사단예비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실시하는게 낫다고 판단, 6월 11일 오전 1시경 역습명령을 하달한다. 이 역습명령은 5사단 제35연대가 937고지를 탈환하고 제27연대는 사단수색중대와 35연대 수색중대를 배속받고 883고지를 탈환하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으로 27연대는 아직 병력수습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제2대대를 선두로 4시 30분경 역습을 실시하여 883고지로 근접해 수류탄을 치루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결국 물러선 뒤 급편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에 제27연대장은 제2대대로서는 883고지를 탈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7시 30분 경 각 대대는 현 접촉선을 유지하면서 부대를 정비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제2군단장 정일권은 11일 3시경 제5사단의 전황을 보고는 제3사단 22연대를 5사단에 배속하게 하고 피탈지역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제5사단장은 이에 의거해 제3사단 22연대를 배속 받고는 제35연대 2개 대대로 973고지를, 제22연대로 883고지를 탈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제35연대는 이 명령에 의거하여 제2,3대대로서 역습을 실시하였다. 당시 제1대대는 36연대에 배속됐기 때문이었다. 제2대대는 주둔지 황병동에서 8시 10분에 북동쪽 능선을 타고 973고지를 공격했고 제3대대는 7시 30분 805고지를 지나 동쪽으로 973고지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양 대대는 중공군의 저항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제2대대 예비대 제7중대가 투입되면서 양개 중대를 초월, 15시 40분 과감한 돌격을 전개하여 973고지를 탈환했다. 양 대대는 후속 2개 중대로서 남아있는 중공군을 소탕했고 그중 1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2대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제6중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해 제3대대의 진로를 좌측으로 막고 있는 1개 대대의 중공군을 배후에서 협공을 가하도록 출발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은 돈좌됐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반대편 제3대대 또한 중공군이 던지는 수류탄 공격으로 공격이 돈좌돼 불리한 상황에 처했으며 점차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18시 50분에는 937고지 주봉에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좌측방 805고지와 ㄱ자지점 돌출부를 타고 협공을 가하였다. 제2대대는 격돌 단 30분만에 붕괴되어 방어선이 무너졌고 10m 정도 물러나가 급편진지를 구축하였다.

한편 제5사단장은 제35연대에게 제27연대 2대대를, 26연대에게 3대대를 35연대에게 각각 배치시키도록 했고 동시에 각 연대는 공격을 일단 중지하고 야간방어에 들어가라는 내용의 명령문을 하달하였다. 이에 제35연대는 배속받은 제27연대 제3대대와 인계해 연대의 제3대대와 2대대로서 973고지 500m 후사면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우측의 883고지의 후사면의 제27연대와 연결하였다.

이때 제22연대는 11일 일출 직후 북한강을 건너 황병동에 집결했다. 당시 연대는 군단예비대로 있을 시 연대장이 바뀌고 대대장 2명, 중대장 7명, 사병 3분의 1이 휴가 또는 외출중에 있어서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연대장은 연대 수색중대를 제27연대 제2대대 지역으로 파견해 883고지에 대한 적정을 수집하도록 조치하는 한편 제3대대와 제1대대를 좌우일선으로 지정해 제2대대를 예비대로 883고지를 공격할 계획을 짰다. 양 대대는 이날 11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던 터라 항공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더둔다나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 세례, 그리고 기관총 화망으로 인하여 출동했던 병력 중 무려 3분의 1을 상실했다. 결국 연대는 19시를 기해 공격을 중단시키고 야간방어로 전환시켰다.

이와 같이 각 연대들이 격전을 치루는 동안 제2,3대대를 제35,22연대로 각각 차출한 제27연대는 낙오자를 수습하여 제1대대로 973고지 후방에 저지선을 형성하도록 하고 제2,3대대 낙오병은 돌파구의 양견부를 지탱하고 있는 본대로 복귀시켜 돌파구 확장을 저지함과 동시에 역습부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3.2. 2차 역습[편집]


6월 11일 1차 역습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5사단은 밤을 새면서 다음날의 역습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때 사단은 이미 많은 손실을 입었고 보급지원도 부재해 기동에 큰 제한이 있는가 하면 기상도 좋지 않아 항공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다음날 6월 12일 새벽 4시를 기해 제35연대와 제22연대로서 재역습을 시작하였다. 제35연대는 전날과 같이 제2,3대대로서 공격을 개시했으며 이중 제3대대는 805고지를 따라 9시 40분 마의 돌출능선을 점령하고 973고지 500m 전방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제2대대는 북동쪽 능선을 따라 973고지를 공격했지만 중공군의 저항으로 공격은 돈좌됐다. 제35연대의 공격이 돈좌되자 중공군은 2개 대대를 동원해 제2대대쪽으로 반격을 걸고 35연대와 22연대의 간격으로 일부 병력을 동원해 진출시킴과 동시에 973고지에 배치된 주력을 움직여 반격을 개시했다.

이렇듯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자 2대대는 곧바로 분산됐고 분산된 각 장병들은 절벽으로 향해 무작정 도망을 치기 바빴다. 3대대도 805고지쪽으로 밀려 나갔다. 제35연대장은 서둘러 이들로 하여금 저지선을 구축하고 배속된 제27연대 3대대에게 돌파구 확대를 막으라는 지시를 하였다. 같은 시각 883고지로 역습을 걸은 제22연대는 제1대대로 하여금 883고지 남쪽에서 중공군을 견제하고, 3대대는 남서쪽 능선을 따라 공격하며, 예비대 제2대대를 3대대 서측으로 우회시켜 937고지와 883고지 중간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점령해 883고지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제22연대 제2대대는 4시에 공격선을 출발하여 일출전까지 무명고지에 도달한 후 여러 차례 돌격을 반복하여 무명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그곳에는 이미 증강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자리를 잡고 있어 결국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중공군은 반격을 개시해 973고지를 넘어 883고지쪽까지 진격하였다. 이로인해 제2대대는 부대 자체가 와해된 채 남쪽으로 밀려나갔다.

제3대대도 마찬가지였다. 3대대는 883고지 200m까지 접근하여 수차례 걸쳐 돌격을 감행했지만 중공군의 반격으로 병력이 분산됐기에 공격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3대대는 다시 부대를 수습한 뒤 10시 25분에 재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혔고 또 중공군의 반격까지 얻어 맞은 터라 대부분의 대대병력이 분산되고 말았다. 결국 제22연대의 역습작전은 제35연대와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났다. 제22연대는 역습보다는 오히려 분산된 병력을 최우선적으로 수습해야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연대는 다시 전열을 갖추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할애해 11시에 재편성을 끝냈다.

이날 9시 30분 미 제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과 정일권 중장이 관계참모를 대동한 채 제5사단의 임시 지휘본부인 수동리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테일러 장군은 전황을 보고받은 뒤 사단장 최홍위 준장에게 계획을 물었는데 최홍휘 준장은 기필코 원진지를 회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이에 테일러 장군은 '그럼 잘해보라'고 답하였고 미 4.2인치 1개 대대를 5사단에 지원하여 주도록 군단장 정일권 중장에게 지시하며 자리에서 떠났다.

이로서 사단은 미 4.2인치 박격포 1개 대대를 군단으로부터 지원 받았고 사단 교육대를 전투대대로 편성 및 황병동으로 추진함과 동시에 제3전차중대와 제5중포대대를 재배치시켰다. 이후 사단장 최홍휘 준장은 각 연대에게 13시 30분을 기해 제3차 역습을 실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당시 각 연대의 상황은 절대 반격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제22연대만 하더라도 1,2차 역습 때 입은 피해로 인해 각 대대당 입은 인명손실이 각각 최소 150명 이상으로 이중 2대대는 무려 병력의 과반수를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각 사병들의 사기는 최하로 떨어져 있었고 보급도 제대로 오지 않아 전투력도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습은 이미 실행되었으므로 제22연대와 35연대는 곧장 반격을 가해야만 했다.


3.3. 허울 뿐인 제3차 역습[편집]


여러 불리한 상황이 다 겹쳐진 상황에서 실시된 이 3차 역습작전은 공격부대의 규모를 늘린 것도 아니고, 새로운 보병부대를 투입한 것도 아니며 기상회복으로 항공지원이 가능해진 것도 아니었다. 당장 현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고, 이미 두 번이나 실패한 같은 부대를 동일한 접근로를 따라 역습을 실시하게 한다는 것은 말이 좋아서 역습이지 실제로는 자살공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애시당초 성공을 기대하기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22연대는 눈물을 머금고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2대대를 예비대로 돌려 1대대와 3대대로서 공격에 나섰다. 제1대대는 883고지 정면에서, 제3대대는 남서능선에서 돌격선까지 진출하여 돌격을 감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도 역시 마찬가지, 양 대대는 포화를 뚫은 채 8부 능선에 돌입하고 곧이어 결사대가 선두에 나서 수류탄을 뿌리면서 총검전을 시도했지만 끝내 중공군의 포화와 수류탄 세례를 뚫지 못하였고 선두로 돌격하던 결사대만이 대거 희생될 뿐이었다.

이러던 와중 제3대대 전방에서 중공군 500여명이 순식간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북쪽에서 포위공격을 가하여 3대대를 압박했는데 3대대는 이 공격으로 병력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공격선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에 연대는 급히 급편방어로 전환시켜 이들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이후 15시 10분 사단의 공격중지 명령이 하달되면서 제22연대는 포병지원사격 하에 공격 이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했다.

한편 제35연대는 역습개시 시간에도 재편성을 끝내지 못했다. 연대장은 공격부대를 949고지에 주둔중인 제27연대 제3대대로 지정했고 동시에 949고지를 35연대 3대대에게 넘겼다. 그러나 부대교대 도중 사단장 최홍휘 준장은 현 부대로서는 역습을 가하긴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동안 전투를 치루지 않은 제36연대로서 역습하기로 결심하였기에 이에 따른 공격중지 명령과 27연대로 하여금 사단의 좌일선 진지를 인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따라서 35연대는 사단장의 공격중지 명령으로 다행히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3.4. 주저항선 붕괴[편집]


파일:10-2-0043.png
제27연대는 13일 4시부터 기동을 개시해 포격을 받으면서 제36연대 진지인수를 마쳤다. 36연대는 황병동에 집결하여 일몰경 예하 각 대대를 973고지와 883고지를 공격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고 공격대기 지점으로 전개시켜 다음날 여명을 기해 공격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격준비 도중 중공군이 14일 오전 2시에 선제 야간공격을 가해 뜻하지 않은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당시 중공군은 제22연대 제2,3,1대대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 중앙부를 돌파하려 공격을 가했다. 이때 중공군은 제3대대 중앙에 배치된 제11중대 진지를 집중적으로 타격하여 참호선으로 돌입했으며 이로부터 40분 후에는 서측방인 9중대 진지로 돌격해 들어갔다. 여기서 제11포병단은 공격파쇄사격으로 883고지 북서 능선으로 쇄도한 중공군을 883고지쪽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재정비를 한 중공군은 4시 10분에 대대 규모로 증강되어 재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제2대대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으며 7중대가 공격을 받고 그 서측의 5중대 쪽에서도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하는가 하면 오전 5시에는 또다시 3대대쪽에서 나타나 혈투가 시작되는 등 연대의 중앙과 좌익에서 연쇄적으로 공방전이 계속 일어났다.

이러한 격돌은 1시간 20분 정도 지속되다가 중공군이 후속병력을 내보낸 6시 30분을 전후하여 제2대대 진지가 무너지면서 5,6중대가 복도시 북동쪽 능선으로 밀려나갔다. 이로인해 제6중대는 적중고립이 되어 고전을 치루게 되었다가 다행히 날이 밝으면서 포병의 지원사격에 힘 입어 6중대는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러나 연대는 883고지 1~1.3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쪽 능선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고 그곳에서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결국 사단장 최홍휘 준장은 역습을 중지하고 접촉선을 유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어 제36연대를 제27,35,22연대 총 3개 연대의 직후방 복도시-널우골의 제2선에서 방어종심을 강화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36연대를 제외한 각 연대 장병의 상황은 무리한 역습작전과 지속된 전투 및 보급부재로 인해 최소 3끼 이상을 굶어 허기진 데다가 중공군의 야간공격 등으로 수면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피로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인원손실까지 많았기에 사기도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3]

이런 와중에 중공군은 6월 14일 18시를 전후하여 또다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번 공격에 참전한 중공군 부대는 180사단 3개 연대와 새로 참전한 203사단의 1개 연대였다.

이때 5사단은 우일선 973고지-883고지 일대에 22연대를 배치했고, 중앙일선 805고지-949고지 일대에 35연대를, 좌일선 739-546고지 일대에 27연대를, 마지막으로 복도시-널우골 일대에 36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사단은 동측방이 돌파되었을 경우, 사단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을 대비하기 위하여 사단 공병대대 예하 1개 중대를 통선골에 배치하였다.

여하간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된 6월 14일 저녁인 18시 20분 사단의 우익인 22연대 1대대 지역에서 2개 대대규모의 중공군이 출현했다. 그런데 이것이 시작이었던지 중앙일선, 좌일선인 3,2대대에서도 중공군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는 총 5개 대대 정도였고 출현하는 족족 진지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에 22연대는 포병사격과 격렬한 저항으로서 한 차례의 공세를 막아냈으나 20시가 넘어가면서 전세는 크게 기울어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제3대대가 혼전에 빠졌으며, 좌우 대대마저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후 20시 30분에는 1대대 진지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무너져 널우골 부근으로 후퇴하고 22시 50분에는 3대대 진지마저 중공군에게 점령 당하게 되면서 제22연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때 사단의 중앙인 제35연대도 949고지에서 5개 대대의 중공군과 싸우다가 23시 40분을 전후하여 주저항선이 붕괴되었다. 또한 사단 좌익인 제27연대도 2개 연대의 중공군과 싸우다가 단 40분만에 부대가 와해되었고 각 장병들이 후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제2대대 병력이 548고지 남쪽으로까지 밀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22연대장은 즉시 1대대를 뽑아 629고지로 이동시켜 그곳에 제2저지선을 구축함으로서 일선대대 병력의 철수를 엄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통신이 모두 두절된 상태인데다 날마저 어두운 야음인 상황인 탓에 이같은 조치는 사실상 무의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철수하는 각 장병들은 부대통제가 없는 틈을 타 무작정 북한강에 가설된 도보교를 향해 밀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사단장은 급히 36연대를 호출해 철수를 엄호하도록 했다. 하지만 23시를 전후해서 전 전선에서 돌파구가 무려 9개나 확장되는 참사 가 벌어졌으며 이로인해 사단의 모든 병력이 황병동 계곡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사단장은 그 즉시 629고지에 설치된 케이블카를 폭파하는 조치를 취하고 동시에 제36연대장에게 1개 중대를 629고지 남쪽으로 급파하여 미 제461중포 대대 진지를 경계하도록 하는가 하면 공병대대장 오성룡 소령에게 북한강에 가설된 교량을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그러는 사이 사단의 전투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결국 군단장 정일권 중장이 직접 나서서 5사단에게 신 방어선으로 후퇴하라는 지시를 하달한다. 이에 사단장 최홍위는 군단장의 명령에 의거해 이같은 지시를 하달하였다.

1. 사단은 15일 00.50을 기하여 현 미주리선에서 아이슬란드 선으로 철수하는 즉시, 748고지-후동-북한강 서안-462고지 간에 신 진지를 편성하려 한다.

2. 제27연대는 북한강 서안으로 철수하여 후동-462고지 간의 아이슬란드 선을 점령, 방어하라. 좌인접인 제8사단과 462고지에서 접촉을 유지하라.

3. 제35연대는 현지에서 철수하여 전석에 집결하는 즉시로 폴라선을 점령하라.

4. 제36연대는 748고지-319고지 간의 아이슬란드 선으로 전진하여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는 동시에 우인접인 제62연대 진지에 연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라 .

5. 제22연대는 북한강 서안으로 도하하여 광동-780고지-수곶지 간을 점령, 방어하라.

6. 공병대대는 각 연대에 분할 배속중인 각 중대를 피배속 부대와 동도철수케하고, 별도지시에 의하여 교량 및 도로를 폭파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7. 제5중포 중대는 전석으로 이동하여 제36연대를 지원하라.

8. 제3전차중대는 주력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전석으로 이동하여 제36연대를 지원하라.

9. 통신중대는 신 진지를 점령하는 즉시로 유선의 소통이 가능케하라.

10. 사단지휘소는 세죽보에 위치한다.


그러나 예하 연대들이 철수하고 있을 때인 2시에 낡은터 북쪽의 도보교와 황병동-후동 간의 도보교가 폭파되고, 같은 시각 군단의 제1103야전공병단에 의해 낡은터 북동쪽의 철판교가 폭파됐으며 3시에는 M4A1 문교와 M2 단정 다리마저 폭파되었다. 결국 다리가 폭파되자 철수할 길이 끊긴 병사들은 북한강을 어떻게든 건너기 위해 보조물과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36연대 2대대장이 익사하고, 나머지 대원들마저 실패하거나 익사하면서 이같은 시도는 얼마가지 못했다.[4] 이후 대부분의 주력은 북한강 동안을 따라 우인접인 국군 7사단의 엄호 하에 군돌-감우리를 거쳐 가는대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철수부대는 교량이 폭파되자 도강시킬 수 없는 중장비들을 파괴하고 무기까지 전부 버리고 후퇴했다.

4. 전투 이후 상황[편집]


이렇게 철수한 제5사단은 다행히 6월 15일 7시까지 신 방어선을 편성하여 안정을 되찾았다. 중공군은 더 이상의 공세를 가하지 않았고 또 날씨마저 회복되었기에 미 제5공군과 해군 제77특별기동부대가 전 항공력을 동원하여 5사단 지구에 있는 중공군들을 타격하였다. 이날 유엔공군은 2,143회를 출격함으로서 한국전쟁 참전 이래 1일 출격횟수로 역대 최대 기록을 남겼다. 이중 75%는 근접항공지원이었다. 여하튼 이로써 전선의 안정을 되찾은 5사단은 군단으로부터 약 25만 파운드의 군수물자를 수령받고 인원을 보충한 뒤 군단작명 제2호에 의거해 제2군단에 복귀하여 소대별 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 무렵에 들어 중공군은 다시한번 공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5사단은 또다시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바로 백암산 전투

5. 결과[편집]


파일:4995.png
5사단 전투경과요도

해당 전투로 인해 5사단은 미주리 선상에 있는 모든 진지를 상실하고 후퇴하였다. 한국군 제5사단은 이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지만 격퇴당했고 오히려 중공군의 역공격에 당해 아이슬란드 선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5사단은 2,590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수많은 진지를 내주었다. 이같은 참패의 이유로는 당시 중공군의 파상공세와 사단장의 무리한 역습작전 때문이었다. 당시 사단은 첫날 전투를 겪은 부대로서 3번이나 같은 역습을 진행하도록 했는데 이 역습작전 하나마다 피해가 너무 많이 발생한 터라 결국 사기저하와 급격한 피로로 제대로 된 전투 하나 진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중공군이 또다시 공세를 감행했으니 그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더군다나 사단장 최홍위 준장은 반격에 앞서 각 부대들이 보충병력조차 매우 적어 병력이 전부 피로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개시하도록 했다. 당시 5사단의 피해와 보충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구분
손실
보충병력
3사단
752
597
5사단
2,518
750
8사단
2,630
2,266
출처:戰訓 第9號, 第二軍團司令部

이 통계대로 고작 750명 정도를 받고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식량지원도 격렬한 전투가 끝나서야 제대로 보급됐기 때문에 그 이전에 보급은 매우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이 전투는 사단의 여러 실책과 중공군의 치밀한 대공세로 빚어진 참패라 볼 수 있다. 다만 초기 전투에서는 사단도 불리한 지형조건이 있었으며 애초에 5사단이 담당한 구역자체가 광정면이라는 문제점 등도 고려해야 하기에 적어도 초기 전투에서는 무조건 사단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러 불리한 상황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

한편 중공군은 이 전투로 인해 최소 2,635명이 전사한걸로 보이며 8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피해를 입었고 PPSH 기관단총 14정, 기관총 12정, 중기관총 2정, 99식 파괴통 2개가 국군에게 노획됐다.

6. 여담[편집]


전투도중 5사단 장병들이 북한강에서 벗어날 때 수많은 장비를 버리고 후퇴하여 수많은 장비들이 중공군에게 노획됐다고 한다. 당시 전선이 워낙 빠르게 무너졌기 때문.

금번 전투에서 지형상으로 보면 뒤를 북한강이 가로막혀 철수로를 차단하고 있어 부득이 병기 및 중장비를 버리고 온 병사가 대부분이나 그 중에는 끝까지 개인이 가진 장비 및 병기를 휴대하고 철수한 병사도 있음. 각 기관에서는 여차한 지형상에 있어서의 각개 병사들의 무기 운반요령 등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요망됨.

제5사단 전투상보 中


본래 기존에 치뤘던 고지전은 백병전과 수류탄전이 자주 일어났으나 이번 전투에서는 동굴화된 진지와 강력한 포병지원 사격 때문에 백병전과 수류탄전을 꺼려 했다고 한다. 오히려 이 때문에 전투에 악 영향을 끼쳤다고 문제 삼을 정도.

전투 발생 직후 5사단의 각 장병들은 상부에게 정확한 보고를 올리지 않아 전황판단이 굉장히 곤란했다고 한다. 물론 통신의 문제도 상당했지만 통신의 문제가 없어도 과장,왜곡보고를 하는 것이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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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3사단 소속이었으나 당시 군단의 지침 때문에 임시로 5사단에 배속됨.[2] 총 3개 대대중 2개 대대를 배치했는데 나머지 1개 대대는 좌일선 연대인 제36연대로 보냈다.[3] 22연대의 경우 3일에 걸친 역습작전으로 인해 500명이 날라갔다.[4] 물론 극히 일부 병사들은 도강하는데 성공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