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영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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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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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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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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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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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 전투

· 백암산 전투

· 425고지-406고지 전투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창녕ㆍ영산전투
Battle of Nakdong Bulge

(낙동강 돌출부 전투)
파일:영산전투1.png
북한군에게 피탈된 진지를 되찾은 미군
파일:영산전투2.png
북한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포병
6.25전쟁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
날짜
1950년 8월 5일 ~ 1950년 9월 9일
장소
경상남도 창녕군 일대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결과
미군의 방어 성공
병력
총 41,788명
ㆍ1차 20,000명
ㆍ2차 21,788명
미 제2사단
미 제24사단
미 해병 제1임시여단
국군 제17연대
총 35,350명
ㆍ1차 7,000명
ㆍ2차 28,350명
제2사단
제4사단
제9사단
제10사단
피해
전사 600명
부상 1,200명
전사 1,300명
부상 2,500명
전차 7대

1. 개요
2. 배경
3. 전투
3.1. 1차전 : 8월 5일 ~ 8월 18일
3.2. 2차전 : 8월 31일 ~ 9월 9일
4. 결과



1. 개요[편집]


창녕·영산전투, 혹은 낙동강 돌출부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는 6.25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였던 창녕과 영산 일대에서 유엔군이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한 전투이다.


2. 배경[편집]


영산, 창녕 지역은 낙동강이 서쪽으로 반원형 형태로 굽어 흐르는 곳으로 미군은 이 지역을 낙동강 돌출부라고 불렀다. 미군은 해당 지역의 방어선을 견고히 하기 위해 강 우편의 언덕들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뒤에는 박격포 포대를 배치하여 화력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방호산이 지휘하는 6사단이 하동을 건너 진주를 점령하자 제4사단에게 낙동강을 도하하여 영산을 돌파해 밀양을 점령하도록 했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이 상대적으로 허술했던 서쪽을 돌파하여 대구지역의 유엔군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였다.


3. 전투[편집]



3.1. 1차전 : 8월 5일 ~ 8월 18일[편집]


8월 5일부터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가 시작되었다. 남쪽의 6사단은 마산 방면에서 도하하여 미군과 마산 전투를 시작했고 북한군 15사단은 왜관 방면에서 도하하여 왜관 전투를 치루었다. 이에 북한군 4사단도 영산방면에서 낙동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낙동강을 도하하기에 앞써 정찰을 통해 미군의 방어태세를 주시하였는데 돌출부 동북동의 시남리 일대의 오항나루터 부근이 방어가 취약한 것을 보고 기습적으로 상륙하였다. 당시 미군이 전투에 앞써 북한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교량들을 끊어버리고 피난민들이 뗏목으로 건너려는 것까지 통제했음에도 북한군의 기습을 허용한 이유는 강 동안의 고지들을 위주로 방어선을 짜다보니 정작 도하하기 좋은 지형인 나루터 주변의 평지에는 방어진지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북한군은 시남리 일대를 주공으로 삼는 한편 부곡일대에도 상륙하여 미군을 공격했다. 부곡일대의 경우 기관총으로 진지를 만들어 놓아 쉽게 격퇴했으나 시남리에 도하한 북한군은 빠르게 도하지 인근의 양 고지 사이를 돌파하여 미군의 진지들을 고립시켜 함락했으며 미군 방어선의 중점이였던 클로버고지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북한군은 일대의 미군을 감제할 수 있게되었다.

미군은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예비대를 충원하여 전력을 강화해 8월 6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역습을 가했지만 이미 중장비들을 도하시켜 방어진지를 강화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섰다. 미 24사단은 진지를 탈환하는 대신 제2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는데 북한군 4사단은 이 틈을 타서 일부부대를 미군진지 좌측으로 우회하도록 하여 남지일대를 점령하고 영산으로 진출했다. 미군은 뒤늦게 남지일대가 돌파된 사실을 알고 북한군을 쫒아갔으나 북한군 후속부대와 교전을 벌여야 했다.

이에 미군은 영산에 진출한 북한군을 섬멸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여 미 8군의 27연대를 추가로 배치하여 영산에 진출한 북한군 일부를 격퇴했다. 이로써 전선을 다시 가다듬은 미군은 항공대와 포병 병력을 강화하고 M26 퍼싱을 투입하여 8월 14일 클로버고지에 대한 공세를 가하는 한편 미 해병 1여단에게 오봉리 일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북한군은 전차까지 투입하여 거세게 저항했으나 미군이 8월 17일 클로버고지와 오봉리를 탈환하면서 포위당했고 다음날까지 미군이 잔존 북한군을 소탕하면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3.2. 2차전 : 8월 31일 ~ 9월 9일[편집]


전투 이후 미 24사단은 일대를 미 2사단에게 넘겨주었다. 북한은 8월 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공세를 멈추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전력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낙동강 전선 동부 대신 비교적 성과가 있었던 서부지역에 부대를 증원하였다. 창녕에 북한군 2사단을, 영산에 북한군 9사단을, 현풍에 북한군 10사단을 배치한 북한군은 8월 31일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창녕방면에서 북한군 2사단이 도하했고 북한군 9사단은 영산방면으로 도하하여 공격을 가했다. 미 2사단은 각지에서 도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하였으나 북한군 2사단의 공격에 미 2사단 제23연대가 궤멸당하여 10km넘게 돌파당하면서 창녕이 포위되었다. 게다가 북한군 9사단이 9연대를 공격하여 영산방면으로 철수해야 했다. 미군은 창녕에 포위된 23연대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38연대를 투입하여 포위망을 해소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일부 중대가 북한군에게 포위섬멸 당하였다.

9월 2일 북한군 10사단까지 미 2사단 방어구역 북쪽의 현풍 대안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칫 낙동강 돌출부가 완전 포위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북한군 10사단은 낙동강을 도하하지 않은 채 더 이상의 기동을 멈추었다. 북한군은 후일 자신들의 공간사에서 이것이 유엔군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고 설명했지만, 북한군 10사단 정면에 그 정도의 대규모 유엔군 병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명백한 실책이었다. 북한군의 공세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병력을 추스른 미 8군은 극동군사령부로부터 단 이틀의 말미를 얻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승선중이던 미 제1임시해병여단[1]을 투입하고 미 24사단을 예비대로 준비했다. 9월 3일, 해병 1여단의 공격을 시작으로 역습에 나선 미군은 다음날 9연대가 영산을 탈환하고 5일에는 해병대가 오봉리 능선을 되찾으면서 낙동강 전선 붕괴 위기를 넘겼다. 곧이어 미군은 일제히 반격으로 전환, 북한군을 영산 서쪽으로 밀어냈다. 이후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기 위해 공격을 멈추면서 양측의 대규모 전투는 일단 끝을 마쳤다.


4. 결과[편집]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북한군은 1,300명이 전사하고 2,5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다수의 전차와 야포를 잃었다. 미군도 피해가 커서 6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200명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북한군은 미군의 예상보다 뛰어난 공세로 한때 미 2사단을 섬멸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미군의 빠른 재편성과 적극적인 역습, 그리고 보급문제로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특히 2차 공세에서 북한군은 3개 사단과 제16기갑여단까지 투입하였으나 결국 방어선 돌파에는 실패했다. 이렇듯 북한은 속전속결을 위해 해당 전투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 걸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이는 열흘 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군 역시 해당 전투에서 측면기동을 허용하여 포위당하고 섣부른 역습으로 되려 큰 피해를 입는 등 피해가 적은 것은 아니였으나 압도적인 화력과 공중지원 그리고 빠른 재편성을 통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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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 제5해병연대를 중심으로 전차, 공병, 의무 등등의 각종 전투/전투지원/전투근무지원 부대를 배속한 임시 편성 부대. 미 제1해병사단 내에서도 최정예라는 평가를 받던 5해병연대가 주축인만큼 극동군사령부에서도 금쪽같이 여기면서 애지중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