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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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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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9-973-883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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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암산 전투

· 425고지-406고지 전투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파일:설악산전투전적비.png
속초시에 있는 설악산지구 전투 전적비

1. 개요
2. 편제
3. 전개
3.1. 중공군의 5차 공세
3.2. 가리봉 전투
3.3. 중공군의 6차 공세
3.3.1. 한계령-대청봉 전투
3.3.2. 대관령 전투
3.4. 유엔군의 반격
3.4.1. 강릉-양양-간성 진격전
3.4.2. 1079고지 전투
4. 결과



1. 개요[편집]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5ㆍ6차 공세에 맞서 수도사단제11 보병사단이 설악산과 부근지역에서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이 대승하면서 설악산을 비롯한 영북지역이 휴전선 이남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옛 소련군정 이였던 속초/양양/고성/인제 지역의 영유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설악신문 보도에 따르면 속초/고성지구 전투에서 인민군 10,948명을 섬멸하고 417명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363명의 아군 전사자를 내었다고 한다.


2. 편제[편집]


  • 유엔군 측
    • 국군 제1군단
      • 수도사단
        • 제1연대
        • 제26연대
        • 제1기갑연대
      • 제11사단
        • 제9연대
        • 제13연대
        • 제20연대

  • 공산군 측
    • 중공군 제27군
    • 북한군 제5군단


3. 전개[편집]



3.1. 중공군의 5차 공세[편집]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은 7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춘계공세를 실시한다. 공세 당시 동부는 북한군 6사단이 지원했다. 이후 공세가 둔화되자 유엔군은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중서부의 골든-노네임선을 탈환 후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5차공세로 잃은 중동부전선의 중요 전술도로인 홍천-인제-고성을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동해안의 국군에게 미주리선(대진리~신월리~가리산)을 향해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중동부에서는 9사단의 매봉·한석산 전투와 3ㆍ5사단의 소양강 전투가 발생했으며 수도사단과 11사단은 설악산을 목표로 공격을 실시하였다.


3.2. 가리봉 전투[편집]


5월 7일 ~ 5월 11일

삼척방향에서 태백산맥을 따라 올라오던 국군 11사단과 수도사단은 5월 7일부터 10일까지 기리봉과 주변의 972고지를 점령하고 백담사 일대의 북한군을 쫒아냈다. 5월 11일 북한군이 이든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기습공격을 하였으나 격퇴했으며 이들이 재편성 작업을 하기 전에 수도사단이 추격함으로써 북한군의 방어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3.3. 중공군의 6차 공세[편집]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펼친 중공군은 이번에는 중동부로 눈을 돌렸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 3군단과 북한군 5군단은 동부전선에서 한국군을 현리쪽으로 몰아넣기 위해 공세를 하였다. 중공군은 동부전선의 3군단(3사단, 9사단)과 1군단(수도사단, 11사단)을 섬멸하기 위해 현리쪽으로 국군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1군단은 남하하는 북한군 2군단을 맞아 저항하는데 성공했으나 3군단은 돌파당하면서 현리 전투에 돌입한다.


3.3.1. 한계령-대청봉 전투[편집]


5월 16일 ~ 5월 18일

중공군이 속사리를 목표로 공세를 하자 북한군 5군단 역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을 포위망에 집어넣기 위해 원통 부근에서 수도사단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공세 초기 북한군이 방어진지들을 점령하자 국군은 수도사단을 내설악에, 11사단을 외설악과 동해를 잇는 선에 배치하여 한계령과 대청봉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방어전을 시행했다.


3.3.2. 대관령 전투[편집]


5월 21일 ~ 5월 23일

현리 전투의 결과로 중부전선에 빵꾸가 나자 육군본부는 1군단에게 오대산과 대관령 일대로 후퇴하여 중공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한편 1군단장 백선엽은 중부전선이 돌파당한 상황에서 좌측의 3군단이 무너져버리면 중공군이 우측의 1군단을 포위하기 위해 대관령을 향해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수도사단 1연대와 11사단 20연대를 예비대로써 배치하였다. 5월 21일 중공군이 안개를 틈타 우측에서 공세를 하였으나 지연전을 벌이며 방어위치로 후퇴하였고 중공군은 3차례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1천명에 가까운 많은 피해를 입은채로 공세를 멈추었다.


3.4. 유엔군의 반격[편집]



3.4.1. 강릉-양양-간성 진격전[편집]


5월 26일 ~ 5월 30일

중공군의 6차 공세가 미 2사단의 한계 전투와 미 3사단의 신속한 속사리 전개로 저지되자 유엔군은 곧바로 반격을 하여 전선을 올리기로 하였다. 5월 23일 유엔군은 수세에서 전면공세 전환하였고 동해상의 1군단 역시 미해군의 지원을 받고 간성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받았다.

5월 26일 강릉을 출발한 1군단은 양양을 완전점령했으며 5월 29일 양양을 출발한 이후 4시간만에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거진읍까지 진출하였다.


3.4.2. 1079고지 전투[편집]


5월 30일 ~ 6월 12일

거진까지 진출하면서 동해안 해변을 따라 북진한 1군단은 수도사단에게 간성 서북쪽의 고지를, 11사단에게 설악산 쪽을 점령하게 하였고 수도사단은 향로봉, 11사단은 설악산 방어를 맡게 되었다. 한편 북한군 13사단은 서화리-산두곡산에 진지를 세웠다. 6월 8일 북한군이 향로봉 북쪽의 1079고지에 포격을 가했고 1개 기갑연대가 고지로 접근했다. 당시 방어진지의 국군은 안개가 짙게 끼여 적의 접근을 확인하지 못하다가 가까이 와서야 이를 알아채고 백병전을 동반한 근접전으로 적을 몰아냈다. 이후 북한군은 6월 9일과 6월 10일까지 8차례나 공격해왔지만 수도사단은 이를 전부 격퇴하였고 역습을 가하여 북한군의 거점이였던 산두곡산과 향로봉 서쪽의 940고지까지 점령했다.


4. 결과[편집]


수도사단과 11사단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파죽지세로 북진한 결과 동부전선은 38선보다 위로 올라갔으며 설악산과 속초, 고성, 양양 등 영북일대가 남한령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임진강-철원-김화-펀치볼-거진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한 유엔군은 공세를 멈추었으며 향후 2년간 전선이 고착화된 채로 양측의 고지전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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