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팀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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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이전
지역예선
조별 리그
1조 & 2조
3조 & 4조
결선 토너먼트
8강
4강
3·4위전
결승
대회 이후
팀별 리뷰


1. 소개
2. 16강 조별리그 팀
2.1. 스위스 {3패, 2조}
2.2. 프랑스 {1무 2패, 1조}
2.3. 멕시코 {2무 1패, 1조}
2.4. 스페인 {1승 2패, 2조}
2.5. 불가리아 {3패, 3조}
2.6. 브라질 {1승 2패, 3조}
2.7. 이탈리아 {1승 2패, 4조}
2.8. 칠레 {1무 2패, 4조}
3. 8강 진출 팀
4. BEST 4
4.1. 4위 : 소련
4.3. 준우승 : 서독
4.4. 우승 : 잉글랜드
5. 대륙별 총평


1. 소개[편집]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본선 무대에 참여했던 팀들의 행적 및 평가를 정리하는 항목.


2. 16강 조별리그 팀[편집]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순서대로 기록한다.


2.1. 스위스 {3패, 2조}[편집]


지난 대회인 1962 FIFA 월드컵 칠레에서 3전 전패를 기록하며 꼴찌를 하는 굴욕을 당했던 스위스. 이번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겠다며 야심차게 나섰지만 또 다시 3전 전패의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이 대회에 출전한 16개국 중 가장 먼저 탈락이 확정된 팀이 바로 이 스위스였다. 그 정도로 스위스는 이 대회에 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팀이었다.

1차전 서독과의 경기에선 헬무트 할러프란츠 베켄바워 두 사람에게 농락당할 대로 농락당한 끝에 각각 멀티골을 얻어맞으며 0 : 5로 대패를 기록하며 불안한 스타트를 끊었다. 2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선 전반 28분에 운 좋게 선제골을 넣었지만 후반전에 2골을 내리 얻어맞으며 1 : 2 역전패를 당해 결국 2패로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3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도 후반전에 2골을 내주며 0 : 2 완패를 당해 결국 3전 전패를 기록했다.

결국 최종 결과 스위스는 3전 전패, 1득점 9실점으로 16위를 기록해 지난 대회에 이어 2연속 꼴찌가 확정되었다. 동일한 팀이 2연속 꼴찌를 기록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FIFA 월드컵에 단 1번이라도 출전한 기록이 있는 팀들 중에서 가장 꼴찌를 많이 한 멕시코[1]조차도 2연속 꼴찌는 하지 않았다.[2]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위스는 역대급 암흑기에 빠져 1970년대와 1980년대엔 단 1번도 월드컵 본선에 오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스위스가 다시 월드컵 무대에 등장한 것은 이로부터 28년이 지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였다.


2.2. 프랑스 {1무 2패, 1조}[편집]


이번 대회에서 프랑스가 보여준 모습은 정말 형편 없었다. 사실 이 같은 프랑스의 모습은 이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당시까지 월드컵 최다 득점자였던 쥐스트 퐁텐이 1960년에 대표팀을 은퇴한 후 프랑스는 그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1962 칠레 월드컵 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그 정도로 프랑스는 혼란을 겪었다. 이번 대회 예선도 예선 상대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쉬웠던 덕에 손쉽게 올라올 수 있었다.

1차전에서 프랑스는 이 당시까지 월드컵에서 늘 꼴찌를 도맡아하던 북중미 약체팀 멕시코를 상대로 오히려 선제골을 먹으며 우왕좌왕하더니 결국 졸전 끝에 1 : 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2차전에선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를 상대로 먼저 페널티킥 선제골을 넣고도 결국 2골을 내리 먹히며 1 : 2 역전패를 당했다. 프랑스 입장에선 더욱 서러운 것이 당시 우루과이가 이 대회에서 기록한 유일한 승리가 바로 이 경기라는 것이다. 이 당시 우루과이는 1958 스웨덴 월드컵 때 예선 탈락을 한 이후 그 다음 대회인 1962 칠레 월드컵 때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여 8강 진출도 어려워 보인다는 평을 받았던 팀이었다. 결국 프랑스가 우루과이의 8강 진출에 1등 공신(?) 노릇을 해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3차전 상대는 바로 역사적 악연으로 얽힌 팀이자 이 대회 개최국인 잉글랜드였다. 프랑스로선 반드시 2점 차 이상으로 이겨야 8강 진출을 노릴 수 있었지만 도리어 잉글랜드에 0 : 2로 완패하며 결국 1무 2패, 조 최하위로 짐을 싸고 말았다. 이 때를 계기로 프랑스 축구도 암흑기가 도래하여 2개 대회 연속으로 예선 탈락을 하는 수모를 겪었고 그나마 진출했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에도 1승 2패에 그쳐 조별리그 탈락을 기록해 1970년대를 암흑기로 보내게 된다.

2.3. 멕시코 {2무 1패, 1조}[편집]


이전까지 월드컵 공식 승점자판기이자 샌드백이었던 멕시코는 지난 대회에서 비로소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3 : 1 역전승을 거두며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비록 그 당시에 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어쨌든 첫 승을 기록했기에 이번에야말로 8강 진출의 꿈을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조별리그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이 대회에서 멕시코는 축구종가라는 명성만 화려했던 개최국 잉글랜드와 암흑기가 도래한 우루과이, 프랑스와 함께 1조에 속했다.

1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멕시코는 선제골을 넣으며 선전했으나 끝내 아쉬운 1 : 1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나비효과로 되돌아오게 되고 말았다. 2차전 상대는 홈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은 개최국 잉글랜드였다. 멕시코는 홈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은 잉글랜드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0 : 2로 패배하며 1무 1패로 조 최하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2차전까지 중간 순위는 잉글랜드와 우루과이가 각각 1승 1무(승점 3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잉글랜드가 +2, 우루과이가 +1이었기에 잉글랜드가 1위, 우루과이가 2위에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멕시코가 1무 1패(승점 1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프랑스가 -1, 멕시코가 -2였기에 프랑스가 3위, 멕시코가 4위에 있었다.

이제 멕시코가 8강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최종전에서 우루과이를 2점 차 이상으로 꺾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이겨주어야만 했다. 3차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멕시코는 시종일관 공격적으로 나섰으나 비기기만 해도 올라갈 수 있는 우루과이가 그걸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우루과이는 끈적한 늪 축구로 멕시코를 괴롭히며 여유롭게 상대했다. 결국 이 운명의 경기에서 멕시코는 우루과이와 0 : 0으로 비기며 2무 1패(승점 2점)에 그쳐 또 다시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다음 날 열린 잉글랜드 VS 프랑스의 경기는 잉글랜드의 2 : 0 승리로 끝나며 프랑스가 조 최하위로 탈락했다. 결국 종합해 보면 1조의 최약체이자 승점자판기인 팀은 프랑스였고 멕시코 혼자 그 승점자판기인 프랑스를 못 이겨서 탈락한 셈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월드컵에서 밑바닥만 깔아주는 역할을 했던 멕시코는 홈에서 열린 다음 대회에서 8강 진출의 감격을 이루게 된다.

2.4. 스페인 {1승 2패, 2조}[편집]


1950 브라질 월드컵 때 4강 신화를 썼던 스페인은 이후 2연속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순식간에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다 12년 만인 1962 칠레 월드컵 때 다시 한 번 본선에 진출했지만 1승 2패에 그치며 조 3위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다시 한 번 4강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각오로 본선에 올랐다.

그러나 스페인은 1차전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1 : 2 석패를 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다. 그리고 2차전 상대는 승점자판기 스위스였는데 여기서 골 득실을 최대한으로 벌어두어야 했으나 스페인은 고작 2 : 1로 이기는데 그쳤다. 마지막 상대는 바로 서독이었다. 이 경기에서 이겨야 8강 진출을 노려볼 수 있는 스페인이었지만 스페인은 서독에 1 : 2로 패배하며 결국 또 다시 1승 2패로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 충격에서 못 벗어난 것인지 스페인은 다음엔 2연속으로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기까지 했다.

스페인이 1950년대~1970년대 월드컵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둔 이유는 당시 스페인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코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을 당시 스페인은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폐쇄적인 국가였는데 이 때문에 점점 세계 축구와의 교류도 줄어들어 흐름에 뒤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1975년에 프랑코가 죽은 후에 왕정 복고가 이뤄진 후엔 단 1번의 예선 탈락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프랑코 독재정권이 스페인 축구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름값을 못하는 모습은 여전하여 1950년 대회에서 4강 신화를 쓴 이후 무려 60년 동안 잘 가야 8강에 그칠 정도로 우승후보와는 살짝 거리가 먼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명장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의 지휘 아래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2.5. 불가리아 {3패, 3조}[편집]


지난 대회에 이어 연속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한 불가리아는 불운하게도 이번에도 오지게 빡센 죽음의 조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조별리그 상대가 디펜딩 챔피언이자 명실상부한 최강 우승후보였던 브라질, 신규 출전국이지만 흑표범 에우제비우와 괴물 마리우 콜루나가 굳건히 버티고 있던 포르투갈 그리고 플로리안 얼베르트, 페렌츠 베네 등 뛰어난 신예들의 등장으로 매직 마자르의 명성을 되찾고 있던 헝가리였다. 불가리아 또한 이반 콜레프, 디미타르 야키모프 그리고 유럽 전체를 뒤흔들 유망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던 게오르기 아스파루호프 등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 전 대회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낸 헝가리에 비하면 전력이 약했다.

1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선 펠레가린샤프리킥 2방을 맞으며 0 : 2로 참패하며 불안한 스타트를 끊었다. 불가리아의 전력은 브라질에 비해 너무 약했기에 불가리아가 취한 전술은 바로 극도로 악랄한 소림축구였다. 당시 경기에서 불가리아 선수들은 집요하게 펠레를 견제하며 살벌하게 압박하고 거친 파울도 불사하며 펠레를 막았다. 때문에 펠레는 이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고 다음 경기인 헝가리전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이는 대부분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던 브라질 대표팀에 악재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2차전 돌풍의 팀 포르투갈을 상대로도 전반 7분 만에 자책골을 넣으며 스스로 경기를 꼬더니 에우제비우에게 농락당하며 결국 0 : 3으로 대패했다.

2차전까지 포르투갈이 2승을 하며 조 1위를 했고 브라질과 헝가리가 각각 1승 1패를 기록했으며 불가리아가 2패를 기록했는데 마지막 경기가 포르투갈 VS 브라질, 헝가리 VS 불가리아였기에 비록 2패를 기록했어도 마지막 상대 헝가리를 이기고 동시에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이기면 경우의 수에 따라 8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전반 15분에 아스파루호프가 빠른 발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결국 내리 3골을 먹히며 1 : 3 역전패를 당해 결국 3전 전패의 수모를 겪고 말았다. 이후에도 불가리아는 3번 더 월드컵 본선에 나갔지만 여전히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그저 본선 진출국 머릿수 맞추는 역할만을 했다.

그러다가 28년이 지난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 4강 신화를 쓰는 기적을 일으키게 된다.


2.6. 브라질 {1승 2패, 3조}[편집]


1965년까지만 하더라도 브라질은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위풍당당한 팀이었다. 니우통 산투스지지가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백전노장 자우마 산투스지우마르, 가린샤[3] 등이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이미 세계 최고로 평가받던 '펠레'가 나날이 더 발전하고 있었다.

이 시기 브라질 내 최강의 팀은 산투스 FC였고,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산투스 선수들이 굉장히 많았다.[4] 오죽하면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월드컵 팀은 다른 팀들 균형도 좀 맞춰서 선발하라고 권고했을 정도로 산투스의 전력이 강했다.

1962년 월드컵 우승을 이끈 아이모레 모헤이라 감독에 이어 다시 한 번 브라질의 사령탑 자리에 오른 1958년의 영웅 비센치 페올라는 그런 권고를 듣고 고민하다가 산투스의 주전 라이트백이자 브라질 리그 이적료 기록을 경신한 특급 재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 선수들을 월드컵 준비 대표팀 명단에서 제하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기동력보다는 자우마 산투스의 풍부한 경험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경우, 훗날 인터뷰에서 페올라의 이 선택에 대해 개인적인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 자이르지뉴토스탕은 산투스보다는 세력이 작은 보타포구와 크루제이루의 선수였기 때문에 대표팀에 별 탈 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도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처럼 20세가 갓 넘거나 10대 후반에 불과한, 큰 대회 경험이 없고 미숙한 선수였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무튼 브라질은 매우 강한 팀이었고, 1966년 월드컵을 야심차게 준비한다. 특히 펠레, 지우마르 등 1958, 1962년의 우승을 함께했던 선수들에게 이번 월드컵은 전대미문의 월드컵 3연패를 노릴 일생일대의 기회였기 때문에 더욱 진지하게 임했다.

그리고 평가전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일정이 혹독했다. 브라질 월드컵 팀은 1966년 6월 4일 페루전을 시작으로 6월 30일 스웨덴전까지 25일밖에 안 되는 기간동안 평가전을 무려 7경기나 진행했는데, 심지어 6월 8일에는 하루에 A매치 두 경기(vs 페루, vs 폴란드)를 진행하는 미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 다음 마라카낭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불러들여 진행한 2연전 일정은 3일 간격을 두고 진행되었기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브라질의 경기력이 감소하여 홈에서 2-2 무승부라는 결과를 얻는 등 팀 컨디션 자체가 상당히 불안해졌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지옥 같은 일정은 여기에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당연히 펠레를 비롯한 선수들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고, 스웨덴 원정 직후에는 또 잉글랜드로 향해 숙소에 머무르며 월드컵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브라질의 16강 조별리그 3경기 일정은 전부 구디슨 파크에 잡혀 있어서 또 브라질이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7월 초에 월드컵이 개막하고, 7월 12일 불가리아와 브라질의 경기가 진행되었다. 예상대로 펠레에게 심한 견제가 들어왔고, 가린샤 또한 33세의 노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견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레와 가린샤가 프리킥 골을 넣어 승리했지만, 펠레가 불가리아 수비수들의 거친 태클에 의해 헝가리전에 뛸 수 없게 되었다.[5]플로리안 얼베르트, 페렌츠 베네 등 무시무시한 스타 공격수를 내세운 헝가리는 당시 유럽에서 열 손가락 안에 거뜬히 들고도 남는 전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이것은 큰 악재였다.

헝가리전은 분위기부터가 싸했다. 포르투갈을 못 잡았기 때문에 브라질 상대로 승점을 따야 했던 헝가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나왔다. 펠레가 없는 브라질의 경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노쇠화 때문에 기동력이 좋지 않은 상태였던 가린샤는 거친 압박 수비 속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15살 가까이 차이 나는, 함께 몇 경기 뛰어보지도 않은 토스탕 같은 후배들과 함께 뛰기에는 가린샤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반면 헝가리의 플레이는 술술 풀렸다. 페렌츠 베네, 칼만 메스죌리, 야노스 파르카스, 플로리안 얼베르트 등의 엄청난 활약이 이어졌고, 브라질이 토스탕의 골로 한 골을 만회하며 3:1 스코어를 만들었지만 그게 한계였다. 결국 이 경기에서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명백하게 보여준 가린샤는 다음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자신의 A매치 마지막 경기에서 유일한 A매치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브라질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는 등 전성기였다. 페올라 감독은 지우마르와 자우마 산투스, 가린샤를 선발에서 내리고, 망가, 피델리스 등 비교적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고 부상에서 덜 회복한 펠레를 선발 라인업에 올리는 등 신선한 변화를 주었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구디슨 파크에 모인 팬들은 대부분 포르투갈이 아닌 브라질을 응원했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풋볼리아 같은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매 찬스마다 팬들이 브라질을 연호하는 소리가 매우 잘 들린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뛰었다.

그리고 펠레가 포르투갈 수비수 주앙 모라이스[6]에게 이른바 '더블 백태클'로 회자되는 그 더러운 반칙을 당해 경기장에서 아웃되게 된다. 포르투갈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맹공을 가했으며, 레프트윙 시몽이스가 득점에 성공한다. 브라질에게 조별리그 탈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펠레가 회복하여 경기장에 돌아온 후에도 경기는 계속 빠르게 진행되었고, 브라질은 자이르지뉴 등 젊은 선수들이 번번이 측면에서 활로를 찾으며 공격 찬스를 잡으려 했지만 마리우 콜루나, 자이메 그라샤 등 활동량이 뛰어난 포르투갈 미드필더들에게 차단당하거나 파울을 당하면서 별다른 찬스를 잡지 못했다. 브라질은 프리킥 찬스를 상당히 많이 잡았지만, 자신들이 잡은 세트피스 찬스를 한 개도 살리지 못하고 모조리 날려먹었다. 펠레는 부상으로 인해 너무 둔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에우제비우가 골문 앞에서 감각적인 헤더를 통해 추가골을 만들어낸다. 스코어 2-0. 몇 번의 신체적 충돌과 험악한 분위기가 지나갔지만, 별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전반전이 끝났다.

사실상 펠레는 필드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브라질 10명 대 포르투갈 11명이나 다름없는 상황. 후반전에서도 포르투갈이 거칠고 효율적인 수비를 통해 브라질을 잘 막아냈으며, 에우제비우가 장거리 프리킥으로 엄청난 골을 터뜨릴 뻔하기도 했지만 망가가 잘 막아냈다. 브라질은 역시 브라질인지, 경기 내내 별 찬스를 못 만들다가도 경기 70분이 지나 레프트백 히우두의 오버래핑에 이은 엄청난 슈팅으로 골망을 갈라 만회골을 득점한다. 구디슨 파크는 관중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브라질의 기쁨도 잠시. 브라질 진영에서 혼전 상황이 발생했고, 에우제비우가 이를 놓치지 않고 페널티 박스 안에서 회심의 발리슈팅을 날렸는데 슛 파워가 워낙 강했던지라 바로 골로 연결되었다. 스코어는 3:1이 되었고, 브라질은 마지막까지 열심히 플레이했지만 되려 포르투갈 공격수 주제 토히스에게 손가락 부상을 입히는 등 그 의욕이 안 좋은 쪽으로만 이어졌고, 경기 끝나기 3분 전 즈음에는 펠레가 포르투갈 선수에게 공과 관련없는 상황에 몸통박치기를 시전하는 등 비매너 플레이를 했다. 조지 맥케이브 주심은 싸움을 제대로 말리지 못했다. 경기장 분위기는 미친 듯이 험악해졌고, 포르투갈 주장 콜루나는 브라질의 그런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 흔히 이 경기가 포르투갈 선수들의 비매너 플레이로 알려져 있지만, 막상 경기 영상을 구해 보면 브라질도 엄청 심한 비매너 플레이들을 보여주었다. 펠레의 탈락이 드라마틱하게 왜곡되어 포르투갈이 정당하지 않은 비난을 받은 셈. 물론 모라이스의 태클은 악질 비매너 플레이가 맞지만, 그게 비판거리라면 펠레도 그런 종류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튼 경기는 그대로 끝났고, 흑표범 에우제비우는 브라질을 격침시킨 무자비한 포워드로 세계 전역에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펠레는 월드컵 3연패의 꿈을 마감했고, 국가대표팀에서 잠정 은퇴하게 된다.[7]

하지만 그 다음 대회에서, 펠레가 은퇴를 번복하고 브라질 국대에 돌아왔으며, 게다가 그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며 이때의 한을 씻어내는데 성공한다.

2.7. 이탈리아 {1승 2패, 4조}[편집]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2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이탈리아였지만 1949년에 있었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대표팀 주축을 이뤘던 토리노 FC 소속 선수들이 세상을 떠난 충격으로 인해 1950년대 월드컵 3개 대회를 모두 다 망치고 말았다.[8] 지난 대회인 1962 칠레 월드컵 때에도 개최국 칠레와 산티아고의 전투라 불리는 악랄한 난투극을 벌인 끝에 0 : 2로 완패해 또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을 정도로 몰락했다. 이 몰락한 대표팀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띠고 세리에 D 소속이었던 만토바 FC를 무려 세리에 A까지 승격시킨 40대 초반의 젊은 명장 에드몬도 파브리가 신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회 전 영국 도박사들은 이탈리아의 우승 확률을 브라질과 잉글랜드에 이어 3번째로 높이 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대회 전 이탈리아는 명실상부한 우승후보 중 하나였다. AC 밀란 소속의 패스 마스터 지아니 리베라, 그 리베라의 라이벌이자 인터 밀란 공격진의 에이스였던 산드로 마촐라[9], 1965년 발롱도르 2위에 빛나는 자친토 파케티, 최고의 중원 살림꾼인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 그리고 골잡이 파올로 바리손 등 선수 면면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플레이어들로 잔뜩 도배되어 있었으니 우승후보로 불리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였다.

첫 시작은 좋았다. 1차전 상대는 지난 대회 때 산티아고의 전투라는 악연으로 얽힌 남미의 칠레였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칠레를 상대로 산드로 마촐라파올로 바리손의 릴레이 골로 가볍게 2 : 0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선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후반 12분에 이고르 치슬렌코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 : 1로 패배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2차전까지 중간 순위는 소련이 2승으로 조 1위였고 이탈리아가 1승 1패로 조 2위, 칠레와 북한이 각각 1무 1패를 기록했으나 골 득실에서 1골이 더 앞선 칠레가 조 3위, 북한이 조 4위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3차전 상대는 아시아의 복병인 북한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폐쇄적인 체제 때문에 전력이 거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당시 영국 도박사들은 북한의 우승 확률을 단 1%로 예측했는데 이는 16개 출전국 중 최하위였다. 사실상 이번 대회 출전국 중 최약체로 꼽았던 팀인 셈이다. 이 당시까지 유럽 팀은 아시아 팀을 상대로 총 4전 전승을 거두고 있었다.[10] 이 때문에 당시 유럽 팀들은 아시아 팀을 승점자판기 취급한 건 물론이고 무조건 크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때 이탈리아 팀도 마찬가지였다.[11]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좀처럼 북한의 골문을 열지 못하며 쩔쩔매더니 전반 34분엔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가 북한의 미드필더 박승진을 상대로 태클을 걸었다가 도리어 자신이 부상을 당하며 이탈해 10명이서 뛰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반 42분, 북한의 역습 상황에서 북한 공격수 박두익이 오른발 땅볼 강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오히려 북한이 1 : 0으로 앞서갔다. 이후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맹공을 퍼부었으나 심리적 조급함으로 인해 조직력이 무너진 채 선수들 개인기에 의존하며 무리한 공격작업을 벌이다 준족인 박두익과 한봉진을 필두로 한 북한의 역습에 추가골까지 헌납할 뻔하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경기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북한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1 : 0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1승 2패(승점 2점)에 그쳐 다음 날 열릴 소련과 칠레의 경기에 관계 없이 1승 1무 1패(승점 3점)를 기록한 북한의 승점을 넘을 수 없으므로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이탈리아가 2개 대회 연속으로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것은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12년 만이었다. 이탈리아는 결국 1950년대는 물론 1960년대 월드컵까지 모조리 망치고 말았다. 이탈리아에게 더욱 서러운 것은 바로 이 경기가 2021년 현재까지 북한의 유일한 월드컵 승전이자 무실점 경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만 유일하게 북한을 상대로 진 것도 모자라 단 1골도 못 넣었다는 뜻이다.[12] 아울러 월드컵에서 최초로 아시아 팀에 패배한 팀이란 불명예까지 안게 되었다.

경기가 끝난 후 이탈리아 선수단은 성난 자국팬들의 난동이 두려워 귀국도 한밤 중에 몰래 그것도 공항까지 제노바로 바꿔가면서 귀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훌리건들은 대표팀 선수들이 올 가능성이 있는 모든 공항에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선수단이 오나 안 오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이 오자마자 썩은 토마토계란 세례를 퍼부으며 졸전을 펼치고 돌아온 선수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아울러 대표팀 감독이었던 에드몬도 파브리는 즉각 경질되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1년 간 어떤 팀 감독도 맡지 말고 근신하라는 처벌까지 받고 말았다. 이 때문에 에드몬도 파브리는 밀라노 참사의 원흉인 잔 피에로 벤투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려 50년이 넘도록 이탈리아 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란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 대회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다른 월드컵 우승국들과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아시아 팀을 상대로 힘을 못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13] 바로 다음 대회인 1970 멕시코 월드컵 때 역시 아시아 팀인 이스라엘과 한 조에서 만났는데 이 때도 졸전 끝에 0 : 0 무승부에 그쳤다. 그리고 16년 후인 1986 멕시코 월드컵아시아의 호랑이 대한민국과 한 조에서 만났다. 이 때도 졸전 끝에 당시 주심이었던 데이비드 소차의 편파 판정을 등에 업고 간신히 3 : 2로 이겼다. 그리고 16년이 또 지나서 2002 한일 월드컵 때 또다시 대한민국과 맞대결했는데 이 때도 격투기 수준의 질 낮은 더티 플레이를 일삼은 끝에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역전 골든골을 차례로 얻어맞으며 1 : 2로 역전패를 당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월드컵에서 아시아 팀을 상대로 4전 1승 1무 2패를 기록해 아시아 팀을 상대로 전적 열세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으며 아울러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 2회 패배한 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까지 쓰고 말았다.[14]

2.8. 칠레 {1무 2패, 4조}[편집]


칠레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1950 브라질 월드컵 때 2번 출전했으나 2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던 팀으로 남미에서도 약체에 속하는 팀이었다. 그러나 홈에서 열린 지난 대회인 1962 칠레 월드컵 때 3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일약 강호로 떠오른 팀이었다. 하지만 홈에서 4강에 오른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기에 그들의 4강 신화는 타국에선 저평가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이 팀이 톱 시드 팀으로 선정되었을 때 이탈리아와 소련 같은 쟁쟁한 팀들을 제치고 톱 시드가 되었기에 그 문제로 말이 참 많았었다. 그렇기에 칠레로서는 지난 대회 4강 신화가 단지 홈 어드밴티지 덕분이 아니라 엄연히 자신들의 실력이었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러나 칠레는 1차전에서 지난 대회 때 산티아고의 전투라는 악연으로 얽힌 이탈리아를 맞아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0 : 2로 완패를 당하며 복수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2차전 경기는 승점자판기로 꼽힌 아시아의 신규 출전국인 북한이었다. 그런데 칠레는 이 북한을 맞아서도 졸전을 펼치며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전반 26분에 북한 대표팀 주장 신영규의 실책으로 페널티킥을 얻어 그 덕에 1 : 0으로 앞서갔지만 좀처럼 힘을 못 쓰며 북한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후반 43분에 끝내 박승진에게 동점골을 얻어 맞으며 1 : 1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2차전까지 중간 순위는 소련이 2승(승점 4점)으로 조 1위를 차지해 이미 8강 진출을 확정지었으며 이탈리아가 1승 1패(승점 2점)로 조 2위, 칠레와 북한이 1무 1패(승점 1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1골이 더 앞선 칠레가 3위, 북한이 4위가 되었다. 당시엔 조별리그 3차전이 동시에 개최되지 않았기에 북한 VS 이탈리아의 경기가 소련 VS 칠레보다 하루 더 먼저 열렸다. 먼저 열린 북한 VS 이탈리아의 경기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북한이 이탈리아를 1 : 0으로 꺾었다. 그리하여 1승 2패(승점 2점)에 그친 이탈리아는 소련 VS 칠레의 경기와 관계 없이 탈락이 확정되었다. 북한의 최종 골 득실이 -2였기에 칠레로서는 소련을 1 : 0으로만 이겨도 골 득실에서 앞서서 조 2위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칠레는 전반 28분에 발레리 포르쿠얀에게 선제골을 얻어 맞으며 불리한 출발을 했다. 칠레는 4분 후에 루벤 마르코스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렇게 계속해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칠레는 좀처럼 소련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후반 40분에 발레리 포르쿠얀에게 또 1골을 얻어 맞으며 결국 이 중요한 경기에서 소련에 1 : 2로 석패를 하며 1무 2패(승점 1점)에 그쳐 조 최하위로 탈락이 확정되었고 북한이 조 2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덕분에 지난 대회 4강 신화는 그저 홈 어드밴티지 빨이었다는 것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3. 8강 진출 팀[편집]



3.1. 북한[편집]


아시아의 신규 출전국 북한은 포르투갈과 더불어 이 대회 최고의 돌풍을 일으킨 팀이었다. 사실 대회 전만 하더라도 북한은 전력이 베일에 싸인 복병 팀 정도로나 취급받았을 뿐이었고 3경기에서 1골이라도 넣으면 엄청 선전한 것이란 평을 받을 정도로 저평가를 받고 있었다. 지역예선조차도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 팀이 모두 불참을 하는 바람에 호주와 단판승부를 치러 통과한 것이었다.[15] [16]그 덕에 북한은 당시 영국 도박사들로부터 우승확률 1%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16개 출전국 중 최하위였다. 다시 말해 대회 전 북한은 그야말로 승점자판기이자 출전국들 중 최약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북한은 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던 칠레, 동유럽의 강호 소련 그리고 왕년의 챔피언 이탈리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북한의 전력으로는 하나같이 모두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상대들이었다. 그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김일성은 직접 선수들을 불러 일일이 포옹하면서 "월드컵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것인만큼 가서 1~2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라."는 협박훈시를 내렸다. 북한 선수단은 김일성이 부여한 이 과업을 달성해야 한다는 사명을 안게 되었다. 이에 명례현 감독 이하 선수단 전원이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과 합숙을 통해 조직력을 다졌고 같은 공산권 국가인 동구권 국가들을 돌며 그곳 프로축구단과 평가전을 치르며 전력을 다졌다.

그리고 1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북한은 약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 그러나 피지컬과 완력에서 우세했던 소련 선수들은 거칠고 투박한 육탄전을 벌이며 북한 선수들을 두들겨 패다시피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경기에 나섰다.[17] 그 와중에 북한 공격수 강용운이 부상으로 이탈하여 10명이 뛰는[18] 불리한 상황에 놓이기까지 했다. 결국 경기는 소련의 3 : 0 승리로 끝났으나 피지컬과 완력 그리고 파울을 앞세운 끝에 이겼기에 오히려 소련 선수들이 영국 언론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았고 북한 선수들이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2차전 상대는 전 대회에서 3위를 했던 칠레였다. 당시 북한이 1차전에서 소련에 0 : 3으로 패했듯이 칠레 역시 이탈리아에 0 : 2로 패배했기에 두 팀 모두 1승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칠레를 상대로 대단히 공격적인 축구를 보이며 놀라게 했으나 전반 26분에 수비수 신영규의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허용해 0 : 1로 끌려갔다. 이후 북한은 수시로 칠레를 밀어붙이며 골을 노렸으나 좀처럼 칠레의 골문을 열지 못하고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후반 43분에 박승진의 극적인 중거리 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려 1 : 1 무승부를 거두게 된다. 참고로 박승진의 동점골은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시아 선수가 기록한 득점이었고, 이 때 북한이 획득한 승점 1점은 바로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기록한 최초의 승점이었다.

마지막 3차전 상대는 바로 사실상 톱 시드 국가로 여겨졌던 이탈리아였다. 당시 북한의 중간 전적은 1무 1패였고 이탈리아는 1승 1패였다. 이탈리아로서는 소련이 칠레에 지지만 않는다면 북한과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오를 수 있었지만 북한은 반드시 이탈리아를 이기고 동시에 다음 날 열릴 소련 vs 칠레의 경기에서 소련이 무승부 이상의 결과를 내야만 8강에 올라갈 수 있었다. 양 팀 전력으로 볼 때 이탈리아의 압도적 우세가 점쳐졌기에 북한 vs 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린 미들즈브러의 에이섬 파크엔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 관중들이 경기를 보러왔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력을 보이고도 좀처럼 북한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북한 선수들은 전원 수비로 나서며 이탈리아의 맹공을 분쇄했고 수문장 리찬명 골키퍼 또한 슈퍼 세이브로 팀을 구해냈다. 그리고 전반 42분에 북한의 역습 상황에서 림승휘가 띄운 볼을 이탈리아 수비수가 걷어냈지만 그 볼을 다시 수비수 하정원이 따내 헤더로 다시 전방으로 보내주었고 그 때 흐른 볼을 박두익이 받아 오른발 땅볼 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후 북한은 철저한 선수비 후역습 전략으로 이탈리아의 공세를 막아내고 또 막아낸 끝에 결국 이탈리아를 상대로 1 : 0으로 승리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거둔 첫 승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열린 소련 vs 칠레의 경기에서 소련이 2 : 1로 승리하면서 1승 1무 1패(승점 3점)를 기록한 북한은 조 2위를 차지해 아시아 팀 최초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8강 상대는 바로 옆인 3조에서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꺾었던 돌풍의 팀 포르투갈이었다. 즉, 돌풍의 팀 간 맞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비록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아직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포르투갈은 펠레가 건재한 브라질을 무려 3 : 1로 대파하는 파란을 일으킨 팀이었다. 같은 돌풍의 팀이라지만 북한보다는 포르투갈이 더 강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경기 전 예상으로는 북한이 포르투갈을 상대로 2점 차 이내로만 패배해도 굉장히 잘한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 양상은 이런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경기가 시작되자 단 23초 만에 북한의 미드필더 박승진이 중원에서 왼발 대포알 중거리슛을 날렸는데 그게 골로 들어가며 예상을 깨고 북한이 1 : 0으로 앞서갔다.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터뜨린 북한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서며 이탈리아를 이긴 것이 한낱 운이나 우연이 아닌 엄연히 자신들의 실력임을 입증해보였다. 마침내 전반 21분에 좌측에서 올린 양성국의 크로스를 포르투갈 골키퍼가 펀칭 미스로 오른쪽으로 볼을 흘렸고 이 볼을 우측에서 침투한 리동운이 재빨리 받아 제기차기 하듯이 차 넣어 스코어를 2 : 0으로 벌렸다. 그리고 불과 1분 후에 양성국이 중거리슛으로 또 1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무려 3 : 0으로 벌리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북한이 4강으로 가는 듯했지만 3골 차로 뒤진 그 시점부터 이 때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드디어 발톱을 드러내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반 27분과 42분에 차례로 에우제비우에게 만회골을 내주며 전반전을 3 : 2로 간신히 앞선 채로 마무리했다. 갑자기 2골을 내주며 쫓기기 시작한 탓인지 북한은 수비를 강화하며 시간을 끌고 지키기보다는 더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서며 골을 넣으려고 달려들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수비 조직력은 점점 흐트러졌고 이것은 곧 에우제비우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되었다. 그리고 후반 11분에 기어이 동점골을 넣으며 단 35분 만에 스코어를 3 : 3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불과 3분 후에 북한 수비수 림중선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반칙을 범해 또 페널티킥을 얻었고 이걸 에우제비우가 또 성공시키며 결국 에우제비우 혼자 4골이나 터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기어이 스코어를 4 : 3으로 뒤집었다. 이후 후반 33분에 포르투갈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아우구스투가 굿바이 헤더골을 터뜨리며 결국 포르투갈이 5 : 3 역전승을 거두었다.

북한은 3골을 넣어 3 : 0으로 앞서 있자 이번에도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에 도취한 나머지 수비 조직력이 흐트러지며 에우제비우를 풀어놓는 실책을 범하며 결국 5골을 뭉텅이로 얻어 맞고 3 : 5로 아쉬운 역전패를 당하고 8강 8위로 마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북한이 8강까지 올라올 것이란 것 자체를 예상 못했기에 비록 졌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많은 찬사를 받았다. 남한에서는 이 당시 출전했던 북한 선수들이 사창가에서 여자들 끼고 놀아났다는 게 밝혀져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둥 숙청 당했다는 둥 하는 루머가 나돌았지만 2002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서 당시 선수들이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있는 것이 밝혀져 그저 루머였을 뿐임이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북한이지만 이후 그들은 월드컵에서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폐쇄적인 국가 체제 탓에 세계 축구와의 교류가 적어서 세계 축구의 흐름에 점점 뒤처져 갔으며 그 탓에 예선 탈락과 불참을 반복했다. 고난의 행군 이후로는 점점 더 그런 모습이 짙어져 갔다.

그러다가 무려 44년이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 때에야 다시 한 번 월드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도 이 대회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월드컵 우승후보 브라질과 44년 전 악연으로 얽힌 포르투갈, 아프리카의 원 투 펀치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또 다시 죽음의 조인 G조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북한의 전력은 44년 전보다 오히려 더 약했기에 8강 신화 재현을 이루는 건 무리였다. 그나마 1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선 지윤남이 골을 터뜨리며 1 : 2 석패를 하며 선전했지만 2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선 44년 전의 복수를 이루기는커녕 0 : 7로 대패하며[19]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3차전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도 0 : 3으로 대패하며 결국 3전 전패로 대회 최하위를 기록하며 씁쓸하게 마무리했다.

한편, 당시 북한 대표팀의 주장이자 수비수였던 신영규 선수는 1996년 벨라루스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고, 천리마축구단에 출연하면서 당시를 술회한 미드필더 박승진 선수 또한 영화 촬영 9년 후인 2011년에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탈리아전 결승골의 주인공 박두익 선수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북한 대표팀 후배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2015년까지 간간히 인터뷰에 참여한 것이 확인되며 생존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엔 전혀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 생존 중인지도 불분명하다, 박두익은 1936년 생으로 생존해 있다면 현재 80을 훌쩍 넘긴 고령이다.


3.2. 우루과이[편집]


월드컵 초대 챔피언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보유한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지만 1950년대 중반 이후로 점점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20] 1954 스위스 월드컵 때엔 비로소 첫 패배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4강에 오르며 여전히 축구 강국의 명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1958 스웨덴 월드컵 때엔 사상 최초로 예선 탈락이라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고 그 다음 대회인 1962 칠레 월드컵 때에도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도 희소식이라면 자국 리그 최강의 팀 페냐롤에서 엄청난 재능 두 명이 나타났다는 것인데, 한 명은 골키퍼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나머지 한 명은 공격수와 미드필더 모두를 소화할 수 있는 페드로 로차였다. 마수르키에비치가 지키는 페냐롤은 매우 탄탄한 수비력을 자랑했고, 1965년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산투스를 잡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에는 그 페냐롤의 베테랑 주장인 네스토르 곤살베스도 있었는데, 동시기 보카 주니어스의 안토니오 라틴과 함께 남미 최고의 하프백으로 불리던 인물이다[21].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개최국 잉글랜드를 비롯해 프랑스, 멕시코와 함께 1조에 속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홈 관중들이 꽉꽉 들어차서 격렬한 야유를 퍼붓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우루과이는 놀랍게도 0 : 0 무승부를 기록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 덕분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오히려 야유를 들어야 했고 대회 전 8강도 어렵다던 우루과이는 순식간에 우승후보로까지 도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2 : 1 역전승을 거두어 8강 진출을 90% 이상 확정지었다. 마지막 3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선 비겨도 8강 진출에 성공하기에 큰 무리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0 : 0 무승부를 거두어 잉글랜드에 이어 조 2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8강 상대는 캡틴 우베 젤러가 이끄는 서독이었다.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비매너와 졸렬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경기 시작한 지 3분 만에 비매너 플레이가 나왔는데, 페드로 로차가 뒷걸음질치며 공을 끌어안고 있던 틸코프스키의 손을 고의적으로 밟는 장면이 나왔고 이에 빌리 슐츠를 비롯한 서독 수비진이 분개하였다. 그러나 짐 피니 주심은 로차에게 단순 구두주의를 주는 선에서 조치를 끝냈다.

물론 우루과이도 판정 피해를 입었다. 우루과이의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문 안으로 들어가는 헤더를 서독의 수비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가 손으로 쳐냈다. 1978년 마리오 켐페스, 2010년 루이스 수아레스의 싱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심판은 슈넬링어가 교묘하게 핸드볼 파울을 저지른 것을 보지 못했다. 슈넬링어 자체가 원체 이런 교묘한 눈속임에 능한 선수였고, 반칙을 쥐도새도 모르게 저지르는 데에 아주 도가 튼 선수였기 때문이다.[22] 우루과이 선수들이 슈넬링어의 핸드볼 파울에 대해 항의했으나 짐 피니는 쿨하게 씹어버렸다.[23]

그 후 몇 분 안 되어 헬무트 할러가 선제골을 득점한다. 경기 15분경에는 우베 젤러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백태클에 걸려 넘어졌지만 PK 선언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젤러는 별 항의 없이 프로답게 경기에 임했다. 경기 29분에는 슈넬링어가 특유의 끈질긴 태클 모션으로 공을 빼앗다가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노골적으로 걷어차였다. 그럼에도 슈넬링어가 맞은 티를 안 내서인지 주심은 서독에게 프리킥을 주지 않았다. 양 팀 모두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경기 분위기가 계속 험악해지다가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 1분에는 우루과이 좌측 진영에서 패스플레이를 이어가던 지기 헬트를 도밍고 페레스가 파울로 넘어뜨렸는데, 이후 페레스의 행동이 기가 막힌다. 헬트가 명백한 파울을 당해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헬트의 팔을 잡아끌고 강제로 일으키는 비매너 플레이를 한 것이 그것이다. 서독 선수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모두 달려들었고 경기장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후반 4분에는 서독의 에머리히가 압박을 하다가 발을 높게 들어 우루과이 주장 오라시오 트로체의 정강이를 찍어버렸다. 이미 공이 트로체의 발에서 떠난 상태였던지라 짐 피니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사태는 심각했다. 파울만 나왔다 하면 떼로 달려들어 주심에게 항의하는 서독 선수들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났던 트로체가 에머리히의 배를 걷어차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에머리히는 이때다 하고 맞은 티를 심하게 냈다. 네스토르 곤살베스가 다가와 일으키려고 했지만 주심에게 어필하려고 드러누운 건데 일어날 리가 없었다. 트로체의 비매너 플레이를 지켜본 서독 선수들이 일제히 다가가 주심에게 항의했고, 결국 트로체는 퇴장당했다. 나가면서 한 행동이 그야말로 압권인데, 상대팀 주장 우베 젤러가 자신을 쳐다보자 그의 뺨을 때려버렸다. 베테랑 우베 젤러는 이와 같은 트로체의 야만적인 행동에 응수하지 않고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5분 후에는 우루과이의 엑토르 실바와 오마르 카에타노가 소림축구를 제대로 보여주었는데, 앞뒤에서 달려들어 헬무트 할러를 둘러싸고 카에타노는 할러의 정강이 뒷부분을 걷어찼으며 엑토르 실바는 허벅지 쪽을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24] 엑토르 실바는 이미 전반전에 저지른 파울 때문에 피니 주심의 수첩에 적힌 상태였고, 거기에 더해 이런 비매너 행위까지 저지르자 결국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피니 주심은 단호했다.

후반 18분에는 우베 젤러가 페널티 박스에서 태클을 당해 넘어졌는데, 액션이 작아서 어필이 덜 되었는지는 몰라도 짐 피니 주심이 이를 파울로 받아들이지 않아 페널티킥이 선언되지 않았다. 젤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9명이 뛰게 된 우루과이는 중원이 텅텅 비게 되었고, 젤러의 간력한 슈팅과 베켄바우어의 통렬한 드리블에 완전히 유린당하며 0 : 3 으로 밀려났다.

후반 31분에는 젤러가 페널티 박스에서 공을 받다가 우루과이 수비수와 충돌했고, 이를 젤러의 파울로 간주한 주심이 휘슬을 부는데, 젤러는 이를 무시하고 몇 초 정도 더 공을 가지고 드리블하다가 수비수의 더블 백태클로 응징을 당한다. 펠레를 향했던 주앙 모라이스의 백태클과 다름없는 맹목적인 걷어차임을 당했음에도 젤러는 쿨하게 자신의 잘못(심판의 휘슬이 울렸음에도 드리블을 지속하며 시간을 끈 행위)을 인정하고 웃으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막판에는 스로인 상황에서 젤러와 할러가 원투패스를 시도했는데, 이 상황에서 뒷공간을 할러에게 완전히 내주며 순식간에 1:1 상황이 되었고 우루과이는 또 실점하였다. 결국 0 : 4 스코어로 자멸하여 8강에서 짐을 쌌다. 서독 선수들은 승리를 챙겼지만 너무 많은 반칙을 당했기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태클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헬무트 쇤, 당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 출처


우루과이 선수 중에는 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선수들이 또 있었는데, 라이트윙 훌리오 코르테스는 경기 종료 이후 심판을 걷어차 6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출처

이후로도 우루과이는 1970년, 1986년, 2010년까지 3번이나 독일을 만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

경기 내용과는 별개로, 우루과이 선수들은 귀국하는 길에서 만난 잉글랜드 꼬맹이들에게 싸인을 해 주는 대신 이 월드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내용의 쪽지를 스페인어로 써 주고 떠났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판 도둑"

"서독이 우루과이의 승리를 훔쳤다"


3.3. 헝가리[편집]


페렌츠 푸스카스, 히데그쿠티 난도르, 산도르 코츠시스 등을 앞세워 1954 스위스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동유럽의 강호였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는 1958 스웨덴 월드컵 때 충격적인 조별리그 탈락을 경험하며 점점 전력에 하락세가 오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헝가리에 유혈 사태가 발생하면서 더더욱 축구 전력에 악영향을 주었다. 이 와중에 페렌츠 푸스카스는 결국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스페인으로 귀화해 1962 칠레 월드컵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플로리안 얼베르트, 페렌츠 베네 등 뛰어난 신예들의 등장으로 다시 옛날 매직 마자르의 명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번 대회에서 헝가리는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고 있었던 처녀 출전국 포르투갈, 동유럽의 다크호스 불가리아와 함께 죽음의 조인 3조에 편성되는 불운을 겪었다. 1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선 당시 돌풍의 팀이었던 포르투갈의 힘에 밀리며 1 : 3으로 완패했다. 그러나 2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선 주포 펠레가 불가리아전 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결장한 틈을 타 페렌츠 베네를 앞세워 3 : 1로 완승해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지막 3차전 상대는 조 최약체인 불가리아였고 예상대로 헝가리가 3 : 1로 승리하여 2승 1패(승점 4점)의 전적으로 조 2위를 차지해 지난 대회에 이어 다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8강 상대는 4조 1위인 소련이었다. 헝가리로서는 역사적인 약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필사즉생의 각오로 나섰으나 결국 1 : 2로 석패하여 8강에서 행진을 마치고 말았다.

사실상 이 대회가 헝가리로서는 회광반조(回光返照)에 해당하는 대회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회가 헝가리가 FIFA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한 마지막 대회였기 때문이다. 이후 헝가리는 1970 멕시코 월드컵1974 서독 월드컵 때는 연달아 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이후 3회 연속으로 본선에 오르긴 했지만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엔 월드컵 준우승을 2번이나 했던 팀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졸전을 펼치며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프랑스에 차례로 패배하며 3전 전패의 수모를 겪었다. 1982 스페인 월드컵 때에도 북중미의 약체팀 엘살바도르를 상대로만 무려 10 : 1 대승을 거두었을 뿐 아르헨티나에 1 : 4로 패배하고 벨기에와 1 : 1로 비기며 아르헨티나에 승점 1점이 밀려 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86 멕시코 월드컵 때엔 대회 최약체 팀인 캐나다 하나만 2 : 0으로 이겼고 소련에 무려 0 : 6으로 대패했으며 프랑스에도 0 : 3으로 대패해 1승 2패에 그치며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5위에 그쳐 3개 대회 연속으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1986 멕시코 월드컵을 끝으로 헝가리는 현재까지 32년 째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공산 정권이 붕괴된 이후로는 단 1번도 본선에 올라오지 못했다.

3.4. 아르헨티나[편집]


이번 대회에서 가장 운이 나빴던 팀이자 오심의 진정한 피해자. 솔직히 다른 남미 팀인 브라질과 우루과이는 판정 문제를 다 떠나서 그냥 팀 내부적인 문제와 멘탈리티 때문에 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아르헨티나는 상황이 좀 다르다. 초반부터 포르투갈에게 털린 브라질, 서독에게 탈탈 털린 우루과이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경우 조별리그에서 서독과 비기고 서독과 똑같은 2승 1무로 8강에 진출했으며 라틴의 퇴장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박빙의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므로 정말 오심 때문에 졌다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아르헨티나는 조별리그에서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토니오 라틴은 중원을 완벽하게 지배했고, 니우통 산투스를 잇는 남미 최고의 레프트백 마르솔리니는 오른발 패스를 이용한 전개로 슈넬링어, 파케티 부럽지 않은 실력을 자랑하며 아르헨티나를 8강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8강전이었다.

잉글랜드도 강했지만, 아르헨티나도 아주 견고했다. 특히 주장 안토니오 라틴은 190cm가 넘는 신장을 활용해 완벽한 중원 장악력을 선보이며 찰튼, 피터스, 볼의 활약을 견제했다. 중간중간 거친 파울로 잉글랜드의 공격 흐름을 끊기도 했다.

경기 34분경, 프리킥 벽을 쌓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꾸 앞으로 걸어나와 크라이틀라인 주심에게 주의를 받는다. 라틴은 소소한 항의를 했다.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에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대. 라틴은 혼잣말을 하면서 주심의 말대로 했다. 약 2분 후, 경기가 진행 중이었던 상황에 라틴은 또 크라이틀라인 주심과 마주치고 대화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크라이틀라인 주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라틴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다.

"나는 그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잊고 싶다. 그 경기는 내가 주관한 모든 경기 중 가장 거칠었다. 끔찍했다. 수치스러웠다. 나는 라틴이 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퇴장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심판이 되려고 했다."[25]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라틴은 영문도 모른 채 퇴장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주심의 명령을 거부하며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독일인인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의 스페인어 항의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통역사와 진행위원, 경기장 경찰까지 경기장에 들어와 라틴을 설득한 후 라틴이 퇴장을 계속 거부하자 강제로 끌고 나갔다.[26]

경기 후 작성된 리포트를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이 날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라틴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잭 찰튼에게도 구두로 경고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를 쓰는 잉글랜드 선수 찰튼이 독일 주심 크라이틀라인의 독일어 구두경고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라틴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의 퇴장 사유에 대해 '언어 폭력(violence of the tongue)'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지만, 이로 인해 더 많은 의혹만 불러일으켰다. 세계 각지에서 이 판정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선수와 심판 간에 확실한 의사 표현 수단이 없을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아주 잘 보여준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보고 심각성을 인지한 잉글랜드의 전 심판 켄 애스턴이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탄생시켰다.

아무튼 전반 35분에 퇴장당한 라틴의 빈자리는 컸고, 라틴이 빠진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를 상대하기 버거워했다. 수비 진영에 머물러 있던 바비 무어가 공격 진영으로 오버래핑하여 아르헨티나의 수비가 더욱 힘들어졌다. 마르솔리니와 페레이로를 비롯한 수비진이 굉장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결국 피터스의 왼발 크로스를 기가 막히게 머리로 돌려놓은 허스트의 결승골로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두었다.

라틴 퇴장 이후 경기가 급속도로 거칠어졌고, 양 팀 통틀어 50개가 넘는 파울이 나온 경기였다. 라틴의 퇴장 거부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거친 파울에 격분한 알프 램지 감독안 경기가 끝나고 유니폼을 서로 교환하려는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잉글랜드 선수들을 직접 저지하기도 했으며,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Animals', 즉 짐승에 비유하기도 했다.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램지의 말은 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많은 파울을 저질렀다. 라틴의 경기 지연과 그로 인한 선수들 간 언쟁으로 인해 흥분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매우 거친 플레이를 펼쳤는데,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그런 플레이들을 몽땅 잡아내 칼같이 파울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경기는 '카드 제도'를 탄생시킨, 월드컵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경기 이후 분노하여 여러 폭력적인 행동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르헨티나의 로베르토 페레이로와 공격수 에르민도 오네가는 각각 주심과 피파 부회장 해리 카반을 공격하여 국제 경기에서 3경기 출장 정지 징계을 받았다. 한 아르헨티나 선수는 터널에 오줌을 누었고, 잉글랜드의 드레싱 룸에는 의자가 던져졌다. 아르헨티나 스쿼드는 잉글랜드 버스를 공격했고, 누군가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반쪽짜리 오렌지를 얼굴에 맞아야 했다.[27]


아르헨티나도 탈락하게 되면서 남미 팀들이 전부 떨어졌고, 라틴의 퇴장은 분명 논란이 될 만한 판정이었기에 남미에서는 이런 결과를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대회 전부터 시작된 기자들에 대한 차별 대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미 머리 끝까지 열 받은 상태였던 남미의 언론에서는 이때다 하고 판정의 불공정함에 대한 비판성 기사를 많이 쏟아냈고, 마침 이른 탈락 때문에 자존심을 구긴 이탈리아의 언론들에서도 이 월드컵의 권위를 떨어뜨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월드컵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떨어진 국가들의 언론에서는 잉글랜드 월드컵이 편파적인 월드컵이었다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별로 논란이 되지 않았던 부분까지 부풀려서 마구잡이로 까 댔다.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FIFA에 "공정하게 판정을 하지 않고 계속 유럽 편들기를 한다면 우린 앞으로 FIFA에서 탈퇴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기에 이르렀다.[28]

아르헨티나의 핵폭탄급 발언 이후 조별 리그에서 탈락당한 브라질 축구계의 수장 주앙 아벨란제마저 가세하여 이 월드컵의 판정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자 남미 전체(월드컵에 참여하지 않은 볼리비아에서도 잉글랜드를 비난했다)는 이 월드컵을 신나게 까는 분위기가 되었고,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유럽 축구계에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출처

아르헨티나는 아쉽게 떨어졌지만 그 선수 한 명 한 명의 기량이 매우 뛰어나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레프트백 실비오 마르솔리니와 라이트백 로베르토 페레이로가 뛰어난 기량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실제로 자신의 커리어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과 보카 주니어스를 몇 경기 상대하지도 않았던 바비 찰튼 경이 훗날 자신이 선정한 역대 베스트 XI에 마르솔리니를 포함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1966년 8강전의 만남은 강렬했다.

훌륭한 경기력을 통해 상대팀 잉글랜드 선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은 아르헨티나였지만, 1970년 월드컵에서는 허무하게 본선 진출에 실패하며 씁쓸함을 맛보았다.

4. BEST 4[편집]



4.1. 4위 : 소련[편집]


과거 소련은 축구 전문가들로부터 본선 진출 횟수와 팀 전력에 비해 성적이 낮은 팀이라는 평가를 받던 팀이었다. 그래서 대회 전에도 소련에 대한 예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명 수문장 레프 야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별리그에서 소련은 꽤 까다로운 조에 편성되었는데 월드컵 2회 우승을 경험해 브라질과 함께 월드컵 최다 우승국이었던 팀이자 이번 대회에서 영국 도박사들로부터 3번째로 우승 확률이 높다고 평가 받은 우승 후보 이탈리아, 지난 대회 때 3위를 차지했던 칠레 그리고 아시아의 복병 북한과 함께 4조에 편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회 전 소련은 칠레와 함께 2위 자리를 놓고 경합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칠레보다 확률이 더 처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1차전 아시아의 복병 북한과의 경기에선 키 작은 북한 선수들을 상대로 큰 떡대와 힘으로 밀어붙이는 추잡한 육탄전을 벌인 끝에 3 : 0 완승을 거두긴 했지만 워낙 추잡한 경기력으로 이겼기에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북한이란 팀이 대회 전에 16개 출전국 중 최약체로 평가 받았기에 "저런 약체 팀한테 겨우 3골 차로밖에 못 이기냐?"는 평가를 받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2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선 전력 상 열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우수한 경기력을 보인 끝에 후반 12분에 터진 이고르 치슬렌코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해 2승으로 일찌감치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3차전에서 칠레를 2 : 1로 물리치며 깔끔하게 3전 전승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그리고 8강전에서도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꺾고 올라온 3조 2위 팀 헝가리를 상대로 접전 끝에 2 : 1 승리를 거두며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것은 소련의 월드컵 진출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4강전에선 프란츠 베켄바우어 등이 버티는 우승 후보 서독을 상대로 이고르 치슬렌코가 퇴장 당하는 불운을 겪은 끝에 1 : 2로 석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3위 결정전에서도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는 돌풍의 팀 포르투갈에 1 : 2 역전패를 당하며 4위로 대회를 마쳤다. 그러나 소련의 이번 대회 성적은 그들이 기록한 역대 최고의 성적이었다. 심지어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된 이후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을 승계한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조차도 이 때 소련이 기록한 성적을 단 1번도 넘어서지 못했다. 그만큼 이번 대회 때 소련이 기록한 성적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 대회 이후로 소련 축구 역시 점점 하락세를 걷기 시작하는데 이른바 '침체의 시대\'라 불리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정권이 지속되면서 이것이 축구에도 영향을 주어 세대 교체 실패 및 국가의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소련 축구 대표팀의 전력도 점점 약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1970년대 월드컵 3개 대회 중에서 2번을 진출 실패했고 1980년대에도 잘 가봐야 2라운드에 그쳤을 정도였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란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출전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때엔 아예 조별리그 꼴찌에 그치며 유종의 미를 거두지도 못했다.[29]

4.2. 3위 : 포르투갈[편집]


포르투갈은 이번 대회에 처음으로 본선에 올라온 신규 출전국이었다.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고는 있었지만 조별리그 상대가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과 매직 마자르의 명성을 회복 중인 헝가리, 동유럽의 다크호스 불가리아 등 만만찮은 상대들이었기에 포르투갈의 호성적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당시 포르투갈은 그 악명 높은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정권 치하에 있었는데 북한과 마찬가지로 독재 정권의 체제 선전에 이 축구를 이용했다. 그렇기에 조별리그 통과를 못한다면 그것은 곧 선수들에게 죽음이나 다름 없었다.

1차전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포르투갈은 3 : 1 완승을 거두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리고 2차전 조 최약체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도 전반 7분에 터진 이반 부초프의 자책골을 시작으로 에우제비우의 추가골, 주제 토레스의 쐐기골을 합쳐 3 : 0 완승을 거두며 조 1위에 올라섰다. 2차전까지 중간 순위는 포르투갈이 2승(승점 4점)으로 조 1위, 브라질과 헝가리가 각각 1승 1패(승점 2점), 골 득실 0으로 동률을 이뤘으나 다득점과 승자승에서 모두 헝가리가 우위에 있었기에 헝가리가 2위, 브라질이 3위에 있었다. 그리고 불가리아가 2패(승점 0점)로 4위에 있었다. 마지막 3차전 경기가 포르투갈 VS 브라질, 헝가리 VS 불가리아였기에 2승을 한 포르투갈도 반대로 2패를 한 불가리아도 경우의 수에 따라 8강에 올라갈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때 포르투갈의 악명 높은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브라질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당근을 선사하기에 이른다. 8강 진출에 성공할 경우 선수단 전원에 두당 1만 달러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당연히 포르투갈 선수들은 이 살라자르가 지급하기로 약속한 보너스에 잔뜩 눈이 멀어 있었다. 탈락 위기에 몰려 있던 브라질은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던 펠레를 투입시키면서까지 사력을 다했는데 '한 조각의 양심도 없는 남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포르투갈 수비수 주앙 모라이스는 완전히 보너스에 눈이 멀어서 그 펠레를 향해 2단 백태클 같은 더러운 반칙을 해가면서 펠레의 다리를 작살내 버리며 사실상 펠레를 그냥 그라운드에 서 있는 허수아비 꼴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펠레를 담가버리면서 브라질을 3 : 1로 꺾고 조 1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30]

8강 상대는 우승 후보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 대표팀을 1 : 0으로 격침 시킨 같은 돌풍의 팀 아시아의 북한이었다. 경기 전 예상은 북한이 2점 차 이내로만 패배하면 굉장히 잘한 것이라 평할 정도로 포르투갈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포르투갈은 의외로 북한을 상대로 전반 22분 만에 박승진, 리동운, 양성국에게 차례로 실점하며 0 : 3으로 끌려갈 정도로 엄청나게 고전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조별리그에서 의외로 활약이 저조했던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전반 중반 이후에야 드디어 야성이 살아나며 전반 27분부터 홀로 4골을 터뜨리는 원맨쇼를 보인 끝에 간신히 5 : 3으로 역전승을 거두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4강 상대는 개최국 잉글랜드였고 영국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포르투갈은 영국 관중들의 격렬한 야유를 이기지 못하며 결국 1 : 2로 석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3위 결정전 상대는 소련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살라자르 독재 정권 치하에 있었는데 이 살라자르 정권은 옆 나라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과 마찬가지로 극우 반공 파시스트 정권이었다. 그러므로 소련은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였다. 훗날 1998 프랑스 월드컵 때 이란 VS 미국 경기 이전에 가장 정치적인 경기로 꼽힌 경기가 바로 이 경기였다. 이 3위 결정전에서 포르투갈은 전반전에 선제 실점을 하며 불리한 출발을 했지만 후반 막판에 2골을 넣으며 2 : 1 역전승을 거두며 3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2021년 현재까지 포르투갈이 월드컵에서 기록한 최고의 성적이었다.

이렇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포르투갈이지만 그 이후로 에우제비우가 대표팀을 은퇴하면서 급추락했고 포르투갈이 다시 한 번 월드컵에 등장하게 된 건 이로부터 20년이나 지난 1986 멕시코 월드컵 때였다.

4.3. 준우승 : 서독[편집]


1962-63 시즌부터 분데스리가를 출범시키며 진정한 축구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려 했던 서독은 1964 유러피언 챔피언십에 불참하는 바람에 별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66년 월드컵은 상황이 달랐다. 서독에서 어마어마한 재능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에서 올라온 한 선수가 독일 전역을 뒤흔들며 국가대표팀 주전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하며 무시무시한 포스를 뽐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선수가 바로 프란츠 베켄바우어였다.

거기에 대스타 우베 젤러도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유럽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평가 받던 슈넬링어도 여전한 기량을 뽐냈다. 빌리 슐츠나 볼프강 베버, 회트게스로 구성된 수비진도 대단했고, 미드필더진은 쾰른의 오베라트, 헬무트 할러와 베켄바우어로 구성되어 엄청난 견고함을 자랑했다. 대표팀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하던 도르트문트의 골키퍼 틸코프스키는 당시 야신 다음으로 유명한 골키퍼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팀 구성에 성공했으니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당연했다. 상대전적 7전 0승 1무 6패의 천적이자 이번 월드컵 개최국인 잉글랜드만 안 만난다면 호성적은 보장되어 있었다.

과연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1차전 상대 스위스를 무려 5 : 0으로 대파하며 순조롭게 출발했고 2차전에서는 아르헨티나와 0 : 0으로 비겼지만 3차전 상대 스페인을 2 : 1로 물리치며 2승 1무(승점 5점)로 아르헨티나와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3골이 더 앞서서 2조 1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8강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이 경기에서 서독은 주심 짐 피니의 어리바리한 경기 운영 및 판정 덕분에 오심의 이득을 보기도 하고 반대로 피해를 보기도 하면서 우루과이를 4 : 0으로 대파하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우루과이 선수들이 2명이나 퇴장 당할 정도로 엄청나게 거친 파울을 범했기에 경기를 이긴 서독도 출혈이 매우 컸다.[31]

4강전에서는 돌풍의 팀이자 명 수문장 레프 야신이 버티는 소련을 상대로 첫 멀티 실점을 안기며 2 : 1 승리를 거두어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12년 만에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 상대는 개최국이자 천적이었던 잉글랜드였다. 이 경기에서 서독은 이번에야말로 천적 잉글랜드를 꺾고 그들 땅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리라 다짐했다. 덕분에 경기는 매우 거칠게 흘러갔다. 그러나 결국 천적을 이기긴 힘들었고 제프 허스트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한 끝에 잉글랜드에 2 : 4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 다음 대회인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서독은 비로소 천적인 잉글랜드를 상대로 3 : 2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잉글랜드 징크스를 털어내는데 성공했지만 4강에서 아주리 징크스로 얽힌 또 다른 천적 이탈리아를 상대로 장군멍군을 주고 받는 명승부 끝에 3 : 4 역전패를 당하며 또 다시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아야 했다. 그리고 또 4년이 지나 자국에서 열린 1974 서독 월드컵 때에야 비로소 서독은 토탈 풋볼의 주역 요한 크루이프가 버티는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를 2 : 1로 꺾고 두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4.4. 우승 : 잉글랜드[편집]


잉글랜드는 1950년부터 계속되는 월드컵 본선 잔혹사, 그리고 웸블리 헝가리전 3:6 대패+원정 7:1 패배로 인해 자존심을 많이 구긴 상태였다. 1950년대 이후의 잉글랜드는 더 이상 1940년대까지 유럽을 씹어먹던 전설의 강팀[32]이 아니었다.

잉글랜드의 미래를 책임져 줄 것으로 보였던 맨유 3인방 던컨 에드워즈, 로저 번, 토미 테일러는 1958년 월드컵을 앞둔 상황에서 모두 참사에 휘말려 세상을 떠났고, 같은 팀 소속이었던 바비 찰튼은 살아남기는 했으나 월드컵에서 뛸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당해 월드컵에서 노장 빌리 라이트와 톰 피니가 고군분투하여 브라질과 무승부를 거두는 등 좋은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소련에게 패하며 결국 떨어졌다.

1962년에도 잉글랜드는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33] 기대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에 갓 데뷔한 신예 바비 무어가 주전 레프트 하프로 기용되고, 바비 찰튼이 참사의 악영향에서 벗어나 잉글랜드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완전히 자리잡았고, 지미 암필드가 이 대회를 통해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이라는 찬사를 받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가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브라질에게 밀려 탈락했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고전적인 WM 포메이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 대회 이후 얼마 못 가 감독이 월터 윈터바텀에서 알프 램지로 바뀌었다. 신임 감독 램지는 기자회견에서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램지는 자신의 입맛대로 선수를 기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램지에게 큰 권한을 주지 않았다. 결국 선수 선발 권한은 램지가 아닌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계속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런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고지식함은 또 한 번의 참사를 불러온다. 1964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예선에서 '이빨[34]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프랑스에게 5:2 대패를 당하며 탈락의 굴욕을 또 맛본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그제서야 램지에게 입맛대로 선수를 기용할 권한을 주었다.[35]고삐 풀린 램지는 프랑스전 대패 당시 엄청나게 많은 실수를 저지른 론 스프링겟 골키퍼부터 내치고 새 골키퍼를 탐색했다. 램지의 레이더에 마침 딱 걸린 선수가 한 명 있었다. 이 선수는 당시 리그와 FA컵에서 돌풍[36]을 일으키던 레스터 시티의 수문장이었다. 램지는 과감하게 1963년 4월부터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 자리에 이 선수를 앉히는데, 그가 바로 고든 뱅크스이다.

램지는 바비 무어, 바비 찰튼, 고든 뱅크스를 중심적으로 기용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팀을 짰다. 전술 실험도 다양하게 해 보았다. 램지의 팀은 쉽게 지지 않았지만, 뱅크스가 부상으로 결장했던 1964년 브라질전에서는 5:1로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여전히 자주 흔들렸다. 램지는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 팀에 딱 맞는 전술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1965년, 잉글랜드 풋볼 리그를 새롭게 강타한 무시무시한 팀이 나타났다. 바로 리즈 유나이티드 FC이다. 리즈가 2부 리그에서 올라오자마자 좋은 성적을 내자 리즈에 소속된 선수들 또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 당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재키 찰튼이다. 바비 찰튼의 친형이기도 한 재키 찰튼은 키가 크면서도 기술적이고 공격 가담 능력이 좋은 센터 하프였다. 재키 찰튼은 이미 30세나 된 노장 선수였지만, 램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키를 국가대표팀에 승선시킨다. 그리고 기존 센터 하프였던 모리스 노먼 대신 재키 찰튼을 주전 센터 하프로 기용하기 시작했고, 사실상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하고 있던 레프트 하프 바비 무어의 위치를 뒤로 끌어내려 포백 비슷한 형태를 만들었다. 무어와 찰튼은 센터백 듀오가 되었다. 1930년대에 쓰이던 WM전술을 1960년대 초반까지도 우려먹었던 잉글랜드[37]에서 '포백'의 형태가 완성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장 바비 무어는 단순 센터백이 아닌 레프트 하프와 센터백의 애매한 경계에 놓이게 되었다. 소속팀 웨스트햄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했던 무어는 이런 역할에 곧잘 적응했고, 평소에는 수비라인을 야무지게 맞추며 굳건한 수비력을 보여주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오버래핑하여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거나 중장거리 패스로 팀의 공격 템포를 조절하는 역할까지 했다.

그리고 이 전술은 대성공을 거둔다. 재키 찰튼이 출전하고 난 후부터 잉글랜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65년 10월 오스트리아전 패배를 마지막으로 잉글랜드는 '패하지 않는 팀'이 되었다. 1965년 11월 북아일랜드전을 시작으로 월드컵 직전까지 무패행진을 달렸다.

그렇게 램지 감독의 4-1-3-2 전술이 완성되었다. 지미 암필드가 기용될 수도 있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고, 조지 코헨이 결국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램지가 구상한 초기 포메이션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에서 존 코넬리는 맨유의 레프트윙이었고, 앨런 볼은 블랙풀에서 활약하던 20세의 멀티 미드필더 자원이었다. 여기에 리버풀의 이안 캘러한과 사우스햄튼의 테리 페인[38]이라는 괜찮은 클래식 라이트윙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볼이 부상당하더라도 다음 경기에서 페인이나 캘러한을 기용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이 전술은 잘 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조별리그 첫 경기 우루과이전에서 램지는 이 전술로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다. 남미 최강 페냐롤의 주축 멤버 네스토르 곤살베스, 페드로 로차 등으로 구성된 우루과이 팀 자체가 강했던 것도 있지만, 이 전술을 그대로 가져가면 중앙의 그리브스와 헌트가 자꾸 고립되었던 것이다. 결국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짓고 말았다. 그래도 앨런 볼의 드리블 실력이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 제대로 증명된 경기(우루과이 수비진을 혼자 미친듯이 돌파해 들어가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라는 점, 그리고 막강한 포백 라인의 수비력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잉글랜드가 얻어 간 게 아예 없는 경기라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개최국의 체면을 못 살리고 빈공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램지는 대책이 필요했다. 결국 아껴 뒀던 웨스트햄의 만능 미드필더 마틴 피터스 카드를 꺼내든다. 피터스는 하프백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여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인사이드 포워드, 센터 포워드, 풀백, 여차하면 골키퍼까지 소화했던 괴물 멀티플레이어였다. 조별리그 2차전이었던 멕시코전에서는 피터스가 코넬리의 자리를 대체하였고, 볼은 캘러한과 바뀌어 기용되었다.

멕시코전은 성공적이었다. 바비 찰튼의 시원한 중거리포, 그리고 로저 헌트의 탁월한 위치선정에 이은 깔끔한 마무리로 잉글랜드가 2-0 승리를 거두었다.

피터스의 효과가 확실히 증명되었다. 피터스는 코넬리보다 중앙 지향적으로 움직였고, 그렇게 해서 생긴 빈 공간을 무어와 윌슨이 오버래핑으로 잘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라이트윙이었다. 공격력이 엄청난 조지 코헨이 라이트윙과 동선이 겹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램지는 페인과 볼, 그리고 캘러한을 계속해서 저울질했다. 다음 경기인 프랑스전은 지난 유로 예선 탈락의 아픔을 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경기였다. 램지는 이번 경기에서 라이트윙으로 캘러한을 기용했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독기를 품고 경기에 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프랑스전에서도 잉글랜드는 2-0 승리를 거두었다. 바비 찰튼의 정당한 골이 오프사이드로 취소되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런데, 간판 스트라이커 지미 그리브스가 상대 선수의 거친 태클에 시달리다가 부상을 당해 다음 경기에서 뛸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잉글랜드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지미 그리브스의 유연한 드리블 능력과 완벽한 피니시 능력까지 겸비한 대체자는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백업 공격수라고는 웨스트햄에서 국가대표팀에 승선한 지도 얼마 안 된 제프 허스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선수 부상 회복 기간을 고려하겠다고 월드컵 기간을 늘릴 수는 없는 법. 램지는 결국 신예 허스트를 8강전에 기용하게 된다. 그리브스가 없다는 것은 곧 팀에 드리블러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드리블 실력이 보다 뛰어나고 활동량이 더 많은 앨런 볼이 라이트윙 자리에 다시 기용되었다. 램지는 볼에게 예전보다 중앙지향적으로 움직일 것을 요구했고, 중앙 미드필더 유형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피터스&찰튼&볼이 함께 2선에서 뛴 잉글랜드는 클래식 윙어가 없는 특이한 포메이션을 구축하게 된다. 이게 바로 'Wingless Wonders'의 시발점이다.

허스트는 그리브스보다 훨씬 투박한 공격수였다. 골 결정력이나 스피드는 확실히 그리브스보다 별로였지만, 덩치를 활용한 몸싸움 및 공중볼 처리에는 훨씬 능했다. 그래서였을까? 바비 무어의 롱패스 능력이 8강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소속팀에서 심심하면 받아먹던 무어의 롱패스를 국가대표팀에서도 받게 되자 허스트는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아주 견고했다. 특히 주장 안토니오 라틴은 190cm가 넘는 신장을 활용해 완벽한 중원 장악력을 선보이며 찰튼, 피터스, 볼의 활약을 견제했다. 중간중간 거친 파울로 잉글랜드의 공격 흐름을 끊기도 했다.

경기 34분경, 프리킥 벽을 쌓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꾸 앞으로 걸어나와 크라이틀라인 주심에게 주의를 받는다. 라틴은 소소한 항의를 했다.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에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대. 라틴은 혼잣말을 하면서 주심의 말대로 했다. 약 2분 후, 경기가 진행 중이었던 상황에 라틴은 또 크라이틀라인 주심과 마주치고 대화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크라이틀라인 주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라틴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다. 라틴은 영문도 모른 채 퇴장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주심의 명령을 거부하며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독일인인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의 스페인어 항의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통역사와 진행위원, 경기장 경찰까지 경기장에 들어와 라틴을 설득한 후 라틴이 퇴장을 계속 거부하자 강제로 끌고 나갔다.[39]

경기 후 작성된 리포트를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이 날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라틴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잭 찰튼에게도 구두로 경고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를 쓰는 잉글랜드 선수 찰튼이 독일 주심 크라이틀라인의 독일어 구두경고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라틴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이틀라인은 라틴의 퇴장 사유에 대해 '언어 폭력(violence of the tongue)'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지만, 이로 인해 더 많은 의혹만 불러일으켰다. 아무튼 이 사건은 선수와 심판 간에 확실한 의사 표현 수단이 없을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아주 잘 보여준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보고 심각성을 인지한 잉글랜드의 켄 애스턴 심판이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탄생시켰다.

아무튼 전반 35분에 퇴장당한 라틴의 빈자리는 컸고, 라틴이 빠진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를 상대하기 버거워했다. 수비 진영에 머물러 있던 바비 무어가 공격 진영으로 오버래핑하여 아르헨티나의 수비가 더욱 힘들어졌다. 마르솔리니와 페레이로를 비롯한 수비진이 굉장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결국 피터스의 왼발 크로스를 기가 막히게 머리로 돌려놓은 허스트의 결승골로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두었다.

라틴 퇴장 이후 경기가 급속도로 거칠어졌고, 양 팀 통틀어 50개가 넘는 파울이 나온 경기였다. 라틴의 퇴장 거부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거친 파울에 격분한 알프 램지 감독안 경기가 끝나고 유니폼을 서로 교환하려는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잉글랜드 선수들을 직접 저지하기도 했으며,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Animals', 즉 짐승에 비유하기도 했다.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램지의 말은 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많은 파울을 저질렀다. 라틴의 경기 지연과 그로 인한 선수들 간 언쟁으로 인해 흥분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매우 거친 플레이를 펼쳤는데,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그런 플레이들을 몽땅 잡아내 칼같이 파울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경기는 '카드 제도'를 탄생시킨, 월드컵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로 남아 있다.

4강에 진출한 잉글랜드의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8강전에서 승리를 맛본 램지는 4강전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라인업을 내보냈다. 포르투갈 대표팀은 대부분 에우제비우와 콜루나를 비롯한 벤피카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막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4-2-4 전술에서 공격진은 클래식 윙어인 주제 아우구스투와 시몽이스, 그리고 센터 포워드인 에우제비우와 주제 토히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주축은 물론 에우제비우였지만, 그 옆에서 뛰던 주제 토히스도 전술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다. 190cm가 넘는 신장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에우제비우에게 슈팅 찬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피지컬의 공격수를 제어할 수 있는 수비수는 당시 많지 않았고, 브라질이나 불가리아, 북한은 그래서 토히스와 에우제비우의 막강한 투톱 조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주제 토히스가 이 월드컵에서 얼마나 헤더 경합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무려 75회의 공중볼 경합에서 41회의 승리를 따냈다.. 그것도 공격수가!!

이런 토히스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단 하나, 비슷한 신장을 가진 수비수를 통해 공중볼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것이었다. 마침 잉글랜드의 주전 센터백은 키 191cm의 재키 찰튼이었다. 찰튼의 존재는 이미 잉글랜드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문제는 이제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에우제비우 그 자체를 어떻게 막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램지는 노비 스타일스에게 특별한 주문을 한다. 에우제비우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이었다. 노비 스타일스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끈질긴 수비를 펼치는 '투지의 상징'으로 유명했다. 조금 현대의 선수와 비교하자면 젠나로 가투소 타입의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스타일스는 램지 감독의 주문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에우제비우에게는 설상가상이었던 것이, 스타일스를 어떻게든 떨쳐 내더라도 앞에 무어와 찰튼이 버티고 있었던지라 아예 봉쇄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에우제비우는 유효슈팅을 몇 번 날리지도 못하며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결국 전방으로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한 바비 찰튼이 혼자 두 골을 득점하는 등 원맨쇼를 펼쳤다. 잉글랜드는 또 무실점을 기록할 뻔했으나, 경기 내내 좋은 수비를 펼치던 재키 찰튼이 경기 81분 갑자기 손을 뻗어 골대로 향하던 포르투갈의 크로스를 쳐냈다. 지금 같았으면 바로 퇴장을 당했겠지만, 당시에는 핸들링 파울에 대한 처벌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에 페널티킥만 주어졌다.[40] 에우제비우는 뱅크스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2:1 추격을 시도했으나, 남은 시간 잉글랜드가 텐백 모드에 돌입하며 뒷문을 단단히 걸어잠갔다. 정말 위험천만한 찬스가 몇 번 나왔지만, 뱅크스가 잘 막아냈다. 결국 잉글랜드는 또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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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포메이션
남은 경기는 결승전. 결승전 상대는 서독이었다. 서독은 강한 팀이었지만 잉글랜드 상대로 홈에서든 원정에서든 이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41]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잉글랜드는 똑같은 포메이션을 한번 더 가지고 나왔다. 당시 원래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지미 그리브스가 램지에게 찾아와 자신이 결승전에서 뛸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미 허스트가 지난 두 경기에서 매우 뛰어난 활약으로 팀의 승리에 기여했기 때문에 램지 감독은 허스트를 그대로 기용했다. 로저 헌트도 마찬가지로 계속 기용했다.

그리고 대회 내내 4골이나 득점한 상대 핵심 미드필더 베켄바우어를 어떻게 제어할지가 굉장한 문제였는데, 램지는 미드필더진의 에이스 찰튼에게 경기 내내 베켄바우어를 1:1 마킹할 것을 요구했다. 재밌는 것은,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도 잉글랜드의 에이스 찰튼을 제어하기 위해 베켄바우어에게 1:1 수비를 주문했다는 것이다.

경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잉글랜드의 강력했던 수비진은 이른 시간 문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헬무트 할러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그러나 몇 분 후, 공격 진영으로 오버래핑하다가 오베라트의 파울로 쓰러진 무어가 완벽한 롱패스 어시스트로 허스트의 헤더 동점골을 도우며 동점을 만들었다. 베켄바우어와 찰튼은 서로를 신나게 마킹하다가 사이좋게 지워져서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는 전반적으로 잉글랜드가 우세했는데, 바비 무어와 앨런 볼이 미친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독은 잉글랜드의 견고한 수비진을 좀처럼 뚫어내지 못했으며, 서독 역시 매우 견고한 수비를 뽐냈다. 특히 볼프강 베버와 빌리 슐츠의 활약이 대단했다.

후반전에는 회트게스의 붕 뜬 클리어링을 날렵하게 캐치한 마틴 피터스가 발리슛으로 역전골을 넣었고, 후반 종료 직전 서독이 얻은 마지막 찬스에서 에머리히의 킥이 굴절되어 베버에게 흘렀고[42] 베버가 뱅크스보다 먼저 위치를 잡으며 동점골을 집어넣었다. 뱅크스와 무어는 슈넬링어의 핸드볼 파울에 대해 거센 항의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3]결국 경기는 연장전으로 흘러갔다.

연장전에서는 허스트가 그 유명한 논란의 골을 터뜨린다. 골대 맞고 골라인 을 때린 뒤 다시 골대를 치고 떨어진 공을 본 주심은 처음에는 이 슈팅을 골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러시아 출신 토피크 바하라모프 부심이 이를 두고 골이라고 이야기하자 판정을 번복하여 잉글랜드의 골을 선언한다. 이후 공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서독이었지만 잉글랜드는 좀처럼 찬스를 내주지 않았고, 이후 경기 119분 바비 무어가 제프 허스트에게 또 긴 패스를 통해 어시스트를 제공하며 잉글랜드가 4:2 승리를 거둔다. 이 때 서독 진영의 코너 쪽에서 흥분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가 오심 이득을 본 것도 맞고, 엄청난 수의 웸블리 홈 팬들을 등에 업고 이동거리 없이 경기하는 등 개최국으로서 매우 큰 어드밴티지를 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편파판정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 대회에서 잉글랜드도 주심들의 판정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면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당장 바비 찰튼의 골 취소만 봐도 알 수 있고, 결승전에서도 슈넬링어의 핸드볼 및 오베라트의 비매너 태클 등 잉글랜드를 상대한 팀들의 강도 높은 파울도 전부 무시되었고, 때문에 잉글랜드도 고스란히 오심의 피해를 봤다. 단순히 결승전에서 골라인 판독기도 없던 시절 라인에 걸친 슈팅 하나 잘못 본 걸 가지고 편파판정이라고 비난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안토니오 라틴 퇴장 사건도 누가 개입했다는 근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동일한 경기에서 재키 찰튼도 똑같이 구두 경고를 받아 피해를 입을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 오심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고, 편파 판정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수는 없다. 실제로, 당시 서독의 주축 선수였던 베켄바우어도 이 경기 결과에 대해 별 미련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잉글랜드가 많은 홈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우승했던 것은 맞지만, 잉글랜드가 서독보다 더 나은 팀이었고 잉글랜드에게 우승할 자격이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출처

우승팀 잉글랜드는 이 월드컵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그 전까지는 '애매한 강팀'이었으나, 이 월드컵을 기점으로 국제 축구계 최강의 팀이 되었다. 실제로 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직후 Elo 레이팅 1위 자리에 올랐고, 1970년 6월 월드컵 서독전 3:2 패배 직전까지 단 한 차례도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출처 그만큼 꾸준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윙어가 없는 전술을 썼다는 것을 빼면 전술적으로 특이한 점은 없었지만, 실제로 당대 최강의 국가대표팀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브라질과 이탈리아는 이 월드컵에서의 부진 이후 본궤도로 돌아갔으나 월드컵에서 점수를 너무 많이 빼앗긴 터라 Elo 레이팅 같은 지표에서는 잉글랜드와 포인트 차이가 컸고, 상대적으로 월드컵에서 잘 한 서독은 친선전에서 가끔 다크호스들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곤 했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WM 포메이션을 사용하는 팀이 거의 다 사라졌고, 그로 인해 포백 축구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었으며, 그런 토대 위에서 토털 풋볼이 태동했기 때문에 전술적인 의미에서도 나름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대회이다.


5. 대륙별 총평[편집]



5.1. AFC[편집]


총 전적 : 1승 1무 2패

이번 대회에서 FIFA는 지난 1962 칠레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제 3대륙을 향해 노골적으로 차별을 가했다. 사건의 발단은 1962 칠레 월드컵 때 브라질이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입김이 커진 남미가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3장의 출전권을 보장해 달라고 한 것이 원인이었다. 개최국으로서 자동 출전이 확정된 잉글랜드, 전 대회 우승국으로서 역시 자동 출전이 확정된 브라질을 제외하고 지역예선에 걸린 출전권은 총 14장이었다. 이 중 9장을 유럽이 먹었고 또 3장을 남미가 먹으면서 제 3대륙에 배당된 출전권은 단 2장만이 남게 되었다. 이 중 1장을 북중미에 배당하면서 나머지 1장만이 남게 되었다. 이 1장이 바로 나머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3개 대륙에 배당 되었다.

이런 FIFA의 노골적인 차별 행위로 인해 1960년대에 들어 대거 독립의 감격을 누렸던 아프리카 팀들은 전원 보이콧을 선언하며 월드컵 출전을 거부했다. 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월드컵 출전을 거부했으며 한국과 일본 또한 신흥 강호로 떠오르던 북한과의 맞대결을 부담스러워하여 벌금을 물면서까지 출전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북한과 호주 단 두 팀만이 예선에 출전하게 되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플레이오프 형식으로 2경기를 모두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이 때 북한은 놀랍게도 1차전에서 호주를 6 : 1로 대파했고 2차전에서도 3 : 1 완승을 거두어 2전 전승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다.

북한의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김일성은 직접 선수들을 초대하여 일일이 포옹을 하며 공로를 치하했고 아울러 "월드컵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크나큰 영광이지만 우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것인만큼 가서 1~2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도록 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이렇게 김일성이 부여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명례현 감독 이하 북한 대표팀 선수 전원은 합숙하며 조직력을 다지고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전력을 다졌다. 당시 북한은 우승후보 이탈리아와 함께 동유럽의 강호 소련, 전 대회 3위를 기록한 칠레 등 결코 만만찮은 상대들과 함께 4조에 속했다.

평균 신장 165cm에 불과한 부족한 피지컬, 알려진 게 없다시피 한 정보, 도박사들의 예측으로 우승 확률 1%에 불과한 16개 출전국 중 명실상부한 최약체 팀. 이 팀이 바로 북한이었다. 사실상 북한이 그나마 내세울 만한 거리는 11명의 마라토너들이 축구를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 그리고 오랜 합숙 훈련으로 다진 조직력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북한을 상대하는 팀 감독들은 북한 선수들의 빠른 스피드만 봉쇄하면 승리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1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북한 선수들은 대단히 선전했으나 전력 차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0 : 3으로 완패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소련 선수들이 우세한 피지컬과 완력을 앞세워 북한 선수들을 무지막지하게 찍어 누르는 지저분한 육탄전을 벌였기에 오히려 패배한 북한 선수들이 영국 현지 관중들로부터 칭찬과 동정을 받았고 승리한 소련 선수들은 맹비난을 받았다. 2차전 상대는 전 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던 남미의 칠레였다. 이 경기에서 북한은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주며 불리하게 출발했지만 마치 태엽 인형 같이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뛰어난 조직력으로 칠레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후반 43분에 박승진이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려 1 : 1 무승부를 기록해 첫 득점과 첫 승점을 동시에 기록했다.

그리고 3차전 상대는 바로 사실상 톱시드 팀[44]이었던 팀이자 영국 도박사들이 브라질과 잉글랜드에 이어 3번째로 우승 확률을 높이 보고 있었던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였다. 영화 천리마축구단에 나온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한 선수들과 이탈리아 선수들의 피지컬 차이는 엄청나게 컸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위치 선정과 촘촘한 수비 조직력, 수문장 리찬명의 슈퍼 세이브 그리고 빠른 스피드를 앞세워 이탈리아에 그리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역습 상황에서 박두익이 결승골을 터뜨려 우승 후보 이탈리아를 1 : 0으로 꺾는 이변을 일으켜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것이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거둔 첫 승이자 첫 번째 토너먼트 진출이었다.

8강 상대는 옆 조에서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3 : 1로 물리쳤던 같은 돌풍의 팀 포르투갈이었다. 경기 전 예상으로 포르투갈 상대로 2점 차 이내로만 지면 잘한 것이란 평을 받았으나 북한 선수들은 초반부터 강한 공격으로 포르투갈을 밀어붙이며 오히려 경기 시작 23초 만에 박승진이 선제골을 터뜨리며 앞서갔다. 그리고 전반 21분에 리동운의 추가골 또 불과 1분 후인 전반 22분에 양성국의 쐐기골까지 터지면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무려 3 : 0으로 앞서 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탓인지 이후 북한의 조직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데다 이 때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전반 중반 이후부터 야성을 회복해 전반 27분부터 홀로 4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한 끝에 3 : 5 역전패를 당해 결국 월드컵 8위로 4강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북한이 8강까지 오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관중들은 훌륭하게 잘 싸운 북한 선수들을 상대로 칭찬을 보냈다. 특히 이 대회에서 보였던 북한 대표팀과 미들즈브러 시민들이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모습을 통해 영국 내 북한의 이미지도 어느 정도 개선되는 효과를 보였다. 또 북한의 선전은 이후 대회에서 영향을 주게 되는데 FIFA는 유럽과 남미가 너무 출전권을 많이 갖고 있다는 지적을 수용하며 잉글랜드의 자동 출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티켓을 더 늘리지 않고 9장으로 고정했고 남미도 3장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북중미에 2장,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 1장, 아프리카에도 1장을 나눠주며 티켓 배분을 이전에 비해 제 3대륙을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편 첫 출전에 8강 신화를 썼을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북한이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 상황도 슬슬 나빠지기 시작한 데다 폐쇄적인 국가 사정 그리고 맹방인 동구권의 붕괴 등으로 인해 점점 세계 축구와의 교류가 줄어들며 전력이 약화되었다. 그로 인해 월드컵 무대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로는 예선 탈락과 불참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첫 출전을 하고 무려 44년이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 때에야 다시 한 번 월드컵 무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 때만큼의 활약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브라질, 포르투갈, 코트디부아르에 차례로 패배하며 3전 전패로 대회를 마쳤다.

5.2. CONCACAF[편집]


총 전적 : 2무 1패

이번 대회 역시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이 유일한 북중미 대륙의 대표로 출전했다. 지금이야 멕시코는 어느 조에 속해도 늘 꾸준히 16강에 오르는 팀이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멕시코는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다른 팀에 승점을 알아서 퍼주는 승점자판기 노릇이나 하던 약체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62 칠레 월드컵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3 : 1 역전승을 거두며 월드컵 출전 32년 만에 첫 승을 신고했다.[46]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첫 승을 신고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멕시코는 이번 대회에서는 반드시 오랜 숙원이었던 8강 진출의 꿈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조 편성이 다소 불운했다. 개최국이자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축구종가 잉글랜드, 월드컵 초대 챔피언 우루과이, 역시 유럽의 강호인 프랑스와 함께 1조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3팀 모두 멕시코보다 전력 상 우위에 있는 팀이었다.

결국 멕시코는 예상대로 이번에도 8강 진출에 실패했다.

5.3. CONMEBOL[편집]



5.4. UEFA[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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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 우루과이 월드컵, 1958 스웨덴 월드컵,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까지 총 3번 꼴찌를 기록했다.[2] 이후 스위스와 동일하게 2연속 3전 전패를 기록한 카메룬2010 남아공 월드컵 때엔 북한 덕에 전체 꼴찌는 면했다.[3] 다만 가린샤의 경우 잦은 부상으로 인해 1962년 월드컵 이후로는 대표팀 경기에 자주 나오지 못했다.[4] 일례로 1963년 5월 5일 서독과의 경기에서 2-1로 승리한 브라질 선발 팀 중 무려 8명이 산투스 소속이었다. 지우마르, 리마, 지투, 도르바우, 멩가우비우, 코치뉴, 펠레, 페페까지... [5] 이걸 심판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당시에는 상대 선수에게 파울을 해도 그냥 프리킥으로 끝이지 제어할 수단이 딱히 없었고, 어지간한 파울 가지고는 퇴장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럽은 남미보다 파울콜이 더 관대한 편이라서 태클로 인해 누군가의 다리가 부러져도 그 선수가 실려나간 후에는 파울 선수에 대한 제제 없이 단순 프리킥으로 경기가 다시 전개되었다. 이게 뭔 말인가 싶으면 196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를 보자. 경기 5분만에 잉글랜드 공격수 바비 스미스의 태클에 의해 스코틀랜드 캡틴 에릭 칼도우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그냥 들것에 실려나간 후 스미스에 대한 제제 없이 경기가 진행되었다. 칼도우는 이 부상 때문에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물론 대놓고 주먹질을 하거나 패싸움을 하면 당시에도 얄짤없이 퇴장이었다.[6] 참고로 이 주앙 모라이스는 별명이 '한 조각의 양심도 없는 남자'인데 그 이유가 상대 선수에게 정말 지저분한 파울을 즐겨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양반의 파울 기술을 보면 이탈리아의 더티 플레이, 중국의 소림축구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7] 풋복싱이라고 언급하며 유럽 선수들의 파울을 비난했다는 내용도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지는 의문이다.[8] 1950 브라질 월드컵1954 스위스 월드컵 때엔 조별리그 탈락, 1958 스웨덴 월드컵 때는 아예 지역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9] 당시 인터 밀란 중원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였다.[10] 1938 프랑스 월드컵 - 헝가리 6 : 0 네덜란드령 동인도
1954 스위스 월드컵 - 헝가리 9 : 0 대한민국/튀르키예 7 : 0 대한민국
1966 잉글랜드 월드컵 - 소련 3 : 0 북한
[11] 실제로 훗날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 출연했던 지아니 리베라산드로 마촐라 모두 경기 전에 북한을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며 무조건 이길 것이라 믿었다고 밝혔다.[12] 1명이 부상으로 빠진 10명인 상태로 경기를 진행해서 패했다는 변명도 불가한게 48년 뒤 브라질 월드컵 대한민국vs벨기에 경기에서도 벨기에에서 1명이 퇴장당해 수적 열세에 놓였지만 경기를 압도한 쪽과 승리한 쪽은 벨기에였기 때문이다.[13] 독일의 경우 상대가 대한민국인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아시아 팀들을 압도한다. 그런데 2022년에는?[14] 나중에 독일2018년2022년에 잇달아 아시아 팀에게 패배하고 그로 인한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을 겪음으로써 이탈리아의 그 전철을 밟게 되었다.[15] 원래라면 홈 & 어웨이로 치러야 하는데 이 당시는 냉전 체제였고 북한과 호주는 서로 적성국이었기에 서로가 상대 국가에 가는 걸 거부했다. 그리하여 FIFA는 중립 지역 경기로 결정하고 캄보디아프놈펜에서 2경기를 모두 치르도록 했다.[16] 다만 당시 북한 축구 대표팀 전력이 점점 올라오기는 하던 상황이었다. 66년 월드컵 앞두고 북한이 치른 A매치 전적이 몇 경기 무패행진을 거듭하는 등(물론 그 호성적이 유럽, 남미 국가들을 만나서 한 건 아니고 제 3세계 국가들과의 대결이었겠지만) 제 3 세계 나라들 중에서는 상당 수준으로 올라가는 사이클 주기였고 거기에 북한과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 당시 한국(남한)과 일본은 더 처참한 수준이라 만일 지역예선에서 붙었다고 한 들 호주는 만만치 않아 모른다고 하더라도 정말 예선에서 붙었어도 북한이 한국과 일본은 손쉽게 이겼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1966년 대회에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 및 아프리카 국가들이 안나간 이유가 예선 본선 진출 티켓이 너무 적다고 이건 노골적 비 유럽 차별이라고 난리칠 때 북한하고 붙어서 질 게 뻔하니 못나갈거 같다 라고 하던 상황이었다. 물론 그 당시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남북한이 극심하던 때라 북한한테 질 건 뻔한데 진게 확인사살되면 국가적으로 큰 후폭풍이 몰아 닥치기에 한국(남한) 입장에선 최대한 북한과의 전력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긴 했다. 일본이야 한국한테도 상대전적서 밀리고 전력도 더 약한 팀이었으니 당시 북일전을 했다면 그 결과야 뻔했을 것이고.[17] 당시 영국 언론들은 사망자가 안 나온 게 다행이였다. 라고 표현하는 곳이 있을 정도로 그 경기가 처절했다.[18] 당시에는 월드컵에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19] 재밌는 건 이 당시 포르투갈 전력도 개허접이어서 오로지 북한만 이겼고 북한 상대로만 골을 넣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대회 때 포르투갈은 북한 없었으면 절대 16강에 못 가는 팀이었다. 다만 포르투갈이 개허접이었어도 북한이 그보다 훨씬 더 약했기에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20] 사실 우루과이의 인구는 2021년 현재도 350만 명이 채 안 되는 소국이다. 이렇게 인구가 너무 턱없이 적기에 이웃나라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처럼 인재가 수시로 벌충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어서 한 번 세대교체에 실패하면 필연적으로 긴 암흑기를 거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우루과이가 이런 적은 인구로도 여전히 세계 축구 강호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는 게 더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21] 1966년에는 '월드 사커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1967년에도 이탈리아의 '로 스포르트 일루스트라로'가 선정한 세계 베스트 XI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22] 이 대회 결승전에서도 슈넬링어는 침투하는 앨런 볼에게 슬그머니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놓고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했는데, 관중들은 이를 보자마자 야유를 퍼부었지만 주심을 비롯한 심판진은 이걸 보지도 못했다. [23] 이게 편파판정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억지 주장이다. 단순 오심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1986년 마라도나 신의 손 득점도 편파판정이라는 괴상한 결론이 나온다.[24] 고추를 붙잡고 늘어지는 반칙을 저질렀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악질적인 파울이었다.[25] 기사 원문: I just want to forget the whole dreadful experience, The match was the roughest I have ever refereed. It was terrible. A disgrace. I sent Rattín off because he was following me and shouting at me. I had no option. He was trying to be the referee. 기사 출처:https://www.google.com/amp/s/amp.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jul/24/1966-world-cup-final-conspiracy-refereeing-50-years[26] 각목으로 맞고 이빨이 부러진 채 끌려나갔다는 헛소문도 있는데, 말 그대로 완전 헛소문이다. 라틴은 그냥 소소하게 유니언 잭을 한 번 비틀어 쥐고 평온하게 끌려 나갔다.[27] 원문: Argentina’s Roberto Ferreiro attacked the referee and the forward Ermindo Onega spat in the face of the Fifa vice-president, Harry Cavan, both earning three-match international bans. An Argentinian player urinated in the tunnel and a chair was thrown into the England dressing room. The Argentinian squad then attacked the England bus and, when someone tried to stop them, he had half an orange squeezed in his face. 출처[28]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월드컵인 1970년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출신 앙헬 노르베르토 코에레사 주심이 잉글랜드와 서독의 8강전 연장 후반에 나온 베켄바우어의 반칙성 태클(앨런 볼을 향했는데, 공은 하나도 못 건드리고 선수를 대놓고 걷어찬 꼴이었다. 레드카드를 줘도 할 말이 없었던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상큼하게 씹어주면서 잉글랜드가 동점 페널티킥 찬스를 얻지 못해 그대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29] 그런데 그 와중에 소련은 유일하게 그 조에서 돌풍의 팀 카메룬을 4 : 0으로 쳐뭉개는 업적을 달성했다. 물론 그 때 카메룬은 이미 16강 진출이 확정되었기에 대충대충 경기에 임했지만.[30] 경기 이후 브라질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였다는 말이 있다.[31] 특히 헬무트 할러는 우루과이 선수 엑토르 실바가 고추를 붙잡고 늘어지는 반칙을 범했기에 경기 중에 잠시 쓰러졌다가 정신력으로 버티며 끝까지 뛰었으나 결국 경기 후에 병원에 실려가야 했다고 한다.[32] 1948년까지만 해도 잉글랜드의 적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당시 월드컵 2연속 챔피언인 이탈리아만 해도 잉글랜드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게 1973년이다. 로마, 즉 이탈리아의 홈에서 열린 1948년 경기에서는 무려 0:4로 잉글랜드에게 패했고, 프리메이라 리가를 씹어먹었던 페르난두 페이로테우를 보유하고 있던 당시 포르투갈도 잉글랜드를 자신들의 홈인 리스본으로 초대했지만 0:10으로 처참하게 패했을 정도로 잉글랜드가 강했다. 그랬던 강팀의 주축이 바로 스탠리 매튜스톰 피니, 그리고 수비 진영의 닐 프랭클린이었다. 아직 꼬꼬마였던 빌리 라이트스탄 모르텐슨도 있었다.[33] 당시 잉글랜드 캡틴 조니 헤인스는 풀럼 FC 소속으로 1961년 그 어렵다는 발롱도르 포디움에 오르기도 했다.[34] 이 '이빨'에 비유될 만한 선수로는 레몽 코파, 쥐스트 퐁텐, 로저 피앙토니, 장 뱅상, 로베르 종케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한 데다가 제대로 된 후계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35] 사실 팀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당연히 감독이고, 그런 감독이 팀의 선수들을 직접 뽑고 전술을 짜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축구협회와 감독의 특이한 관계로 인해 감독이 팀을 직접 뽑지 않았던 잉글랜드가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36] 리그에서 치열하게 우승 경쟁을 하다가 뒷심 부족으로 4위를 기록했고, FA컵에서는 맨유에 밀려 준우승했다.[37] 다만 다른 국가대표팀들도 1960년대까지 WM 포메이션을 자주 사용했다. 4-2-4를 도입한 벨라 구트만 감독이나 브라질의 비센치 페올라 감독이 굉장히시대를 앞서나갔을 뿐...[38] 사우스햄튼이 2부 리그 시절일 때부터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얼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고, 결국 마틴 치버스와 함께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켰다. 참고로 현재까지 사우스햄튼 유니폼을 입고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한 선수이기도 하다.[39] 각목으로 맞고 이빨이 부러진 채 끌려나갔다는 헛소문도 있는데, 말 그대로 완전 헛소문이다. 라틴은 그냥 소소하게 유니언 잭을 한 번 비틀어 쥐고 평온하게 끌려 나갔다.[40] 당시 핸드볼 파울에 대한 처벌 기준을 알 수 있는 장면은 여럿 있는데, 1968년 브라질 vs 서독 경기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가 대놓고 패스를 손으로 잡아 경기 흐름을 끊는 장면이 나왔으나 주심은 구두주의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1974년 월드컵 칠레와 서독의 경기에서도 칠레 선수가 베켄바우어의 로빙패스를 손으로 직접 잡으며 가로챘다가 옐로카드만 받고 끝나는, 지금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핸들링 파울에 대해 굉장히 엄격해진 것이다.[41] 1968년 하노버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서 베켄바우어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둔 것이 잉글랜드 상대 첫 승이었고, 1972년 유로 플레이오프 1:3 승리가 웸블리에서의 첫 승이었다.[42] 이 과정에서 슈넬링어의 손에 맞았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프리킥이 선언되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43] 이는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이 '편파판정'이 아닌 '오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주심이 처음부터 잉글랜드 손을 들어 줄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무어와 뱅크스의 항의를 받아들여 판정을 번복하고 베버의 골을 취소했을 텐데, 오브레보 쫓아가는 미하엘 발락처럼 무섭게 자신을 따라온 바비 무어를 쿨하게 무시하며 베버의 골을 인정했다.[44] '사실상'이란 말이 붙은 이유는 실제 이 조의 톱 시드 팀이 칠레였기 때문이다.[45] 실제로 북한 선수들과 이탈리아 선수들이 입장할 때 영상을 보면 이탈리아 선수들이 북한 선수들보다 거의 머리 하나가 더 큰 정도였다.[46] 다만 이 경기를 치르기 전에 이미 체코슬로바키아는 8강 진출이 확정된 상태였고 멕시코는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다. 한 마디로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냥 경기를 내다버린 것이고 멕시코는 그 틈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