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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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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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감독


파일:external/www.dfb.de/schoen2.jpg

이름
헬무트 쇤 GV
Helmut Schön GV[1]
출생
1915년 9월 15일 /
[[독일 제국|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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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센왕국 드레스덴시

사망
1996년 2월 23일 (향년 8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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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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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헤센주 비스바덴시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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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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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5cm | 체중 81kg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드레스드너 SC (1932~1944)
SG 드레스덴 프리드리히슈타트 (1946~1950)
장크트파울리 (1946~1947 / 임대)
헤르타 BSC (1950~1951)
감독
자를란트 대표팀 (1952~1956)
1. FC 자르브뤼켄 (1953~1954)
서독 대표팀 (1956~1964 / 수석코치)
서독 대표팀 (1964~1978)
국가대표
파일: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6경기 17골 (독일 / 1937~1941)






1. 개요[편집]


독일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4년부터 1978년까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쇤은 5세 무렵부터 드레스덴의 제보어슈타트(Seevorstadt) 거리에서 공을 다루며 축구를 접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선수 시절에 자신이 가졌던 특별한 재능이었던 공에 대한 감각 및 빠른 반사 신경을 이 아스팔트 축구를 즐기던 기간에 얻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예술품 딜러였던 그의 아버지 안톤 쇤(Anton Schön)은 축구에 대한 아들의 열정에 공감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쇤은 10살부터 드레스드너 SC의 유소년팀에서 뛰기 시작했고 같은 팀의 국가대표 공격수 리하르트 호프만을 우상으로 삼았다. 1928년부터 영국인 코치 지미 호건의 지도를 받으며 쇤은 기량을 키워나갔다. 호건은 쇤을 포함한 유소년 선수들에게 거칠기도 하지만 깨끗한 기술과 콤비네이션을 가르쳤고 이는 쇤이 후일의 감독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쇤은 15살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마티아스 신델라를 만나기도 했다.


2.2. 선수 경력[편집]



2.2.1. 클럽[편집]


쇤은 1932년 드레스드너 SC에서 데뷔했다. 이후 그는 드레스덴를 기반으로 하는 클럽인 드레스드너 SC와 SG 드레스덴 프리드이히슈타트에서 활동하며 팀의 1940년, 1941년의 독일 축구 챔피언십 2회 우승 및 1943년, 1944년의 참머포칼 2회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쇤은 두 번이나 반월판 연골 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에 부침을 겪었다. 이로 인해 수술을 받고 1938년 월드컵 출전도 물거품이 됨은 물론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불투명해지자 쇤은 축구가 아닌 의학의 길을 걷는 것도 잠시 고려하였으나 이내 포기하고 계속 축구에 집중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쇤은 당시 군 복무를 하면서 당시 독일군 내부의 축구팀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과 1945년에는 선수 생활을 일시중단하기도 했지만 쇤은 직접 전쟁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FC 샬케 04 선수들과 함께 드레스드너 선수들이 전쟁에 징집된 비율이 적었던 것을 감안하면 드레스덴 지방의 군관이자 독일 국방군 중장 카를 메너트(Karl Mehnert)가 베푼 나름의 특혜였다.

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나치당 가입을 계속 거절했고 '점점 더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무의미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들에게는 축구를 하기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평을 했다. 이는 쇤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많은 축구 선수들의 사고 방식과 일치한다.

쇤과 그의 가족들은 드레스덴 폭격에서 다행히 살아남았고 그는 1946년부터 SG 드레스덴 프리드이히슈타트[2]에서 뛰게 되었다. 중간에 쇤은 스위스의 FC 장크트파울리에서 잠시 임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그가 머무르던 드레스덴 지역이 소련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자 1950년 쇤은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탈출했다. 서독으로 탈출한 후 헤르타 BSC에서 플레잉 코치로 잠시 있던 쇤은 1951년에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편집]


쇤은 반월판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 제프 헤르베르거에게 발탁되어 국가대표으로 FIFA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쇤이 직접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1937년 5월 16일에 덴마크를 8대0으로 대파한 경기에서 그는 에른스트 레너, 오토 지플링, 프리츠 스체판, 아돌프 우어반 등 선배들의 플레이에 큰 인상을 받았다.

쇤의 대표팀 데뷔전은 1937년 11월 21일에 있었던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 스웨덴전이었고 쇤은 두 골을 넣어 독일의 5대0 승리와 함께 독일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짓게 했다. 쇤 역시 독일의 월드컵 본선 엔트리 포함이 유력했지만 1주일 후인 11월 28일의 리그 경기에서 다시 반월판 부상을 입어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쇤이 대표팀에 다시 복귀한 것은 월드컵이 끝난 1938년 9월의 폴란드전이었다. 그래도 쇤은 복귀를 자축하는 골을 넣으며 독일의 4대1 승리에 기여했다.

1939년 10월 15일, 쇤은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대표팀 경력에서 유일하게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그는 1941년까지 대표팀에서 뛰었다.

1941년 10월 5일, 독일이 스웨덴에 2대4로 패한 경기를 끝으로 쇤은 대표팀 경기에 선수로는 다시 뛰지 못했고 그는 직접적으로 이 상황에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선 계속해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고 헤르베르거와 쇤이 한동안 불편한 관계가 된 것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이 꽤 지배적이었다.[3]


2.3. 감독 경력[편집]


파일:external/img.welt.de/Fussball-Weltmeisterschaft-1974-WM-Finale-Endspiel-Deutschland-gegen-Holland-Niederlande-2-1-Jubel-Sieg-Pokal-v.jpg
프란츠 베켄바워1974년 월드컵 우승을 자축하는 헬무트 쇤


2.3.1. 초기[편집]


은퇴 후 쇤은 비스바덴에 집을 마련했지만 1952년부터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자를란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 그는 오귀스트 조르당의 뒤를 이어 클럽을 방문하고 최고의 선수를 관찰하고 선발 팀을 구성했는데 이 일을 매우 좋아했다. 이 시기에 시야를 넓히고 유연해졌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강의를 하고, 팀 재구성과 아웃소싱을 하며 새로운 팀을 구축했다.

쇤은 자를란트를 이끌고 195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 참가하였으나 서독에 밀려 탈락했고 그 중간인 1953년과 1954년 1. FC 자르브뤼켄의 감독직도 병행했다.

그 뒤 1956년 자를란트가 서독에 합병되면서 쇤은 당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제프 헤르베르거의 수석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 쇤은 8년 동안 제프 헤르베르거를 보좌하며 1958년 월드컵1962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러다 1962년 월드컵에서 서독의 8강에 만족하지 못하는 축구팬들과 언론의 질타를 받다가 1964년에 헤르베르거가 사임하게 되고 쇤이 서독의 3번째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서독 내부의 리그는 지역 리그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963년, 분데스리가를 출범하면서 서독 축구계의 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2.3.2. 독일 대표팀[편집]



2.3.2.1.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편집]

쇤은 서독 대표팀의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친선 경기도 하나 치르지 못한 채 바로 1966년 월드컵 지역 예선을 치러야 했다. 당시 서독에는 우베 젤러,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호르스트 시마니아크, 볼프강 오베라트 등의 주축 선수들이 있었다. 서독은 같은 조에 속한 스웨덴과 1대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얻는 소득이 있었다.

서독은 키프로스를 6대0으로 개발살(...)내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본선에서는 아르헨티나, 스페인, 스위스와 2조에 배정되었다. 서독은 아르헨티나와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스페인, 스위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우루과이를 4대0으로, 4강에서는 레프 야신이 이끄는 소련을 상대로 2대1 승리를 거둬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잉글랜드. 엎치락뒤치락하다 후반 44분에 터진 볼프강 베버의 천금같은 동점골에 힘입어 양팀은 2대2 스코어로 연장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연장 6분에 묘한 상황이 나왔다. 제프 허스트가 슈팅한 공이 서독의 크로스바를 맞고 지면에 튕긴 다음 골문 밖으로 나왔지만 심판은 이것을 골로 인정했다. 서독 선수들의 강한 항의에도 득점 취소는 되지 않았다. 이것이 FIFA 월드컵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웸블리 골로 잉글랜드와 독일의 축구팬들은 이 득점이 "골이냐? 아니냐?"로 아직까지도 가끔씩 싸우고 있다. 이에 독일에서는 "실제로 그 위치에서 쏜 슛이 그런 상황으로 전개된다면 절대로 골이 될 수 없다."라는 주제로 논문까지 나왔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항목 참조.[4] 어찌됐든 득점은 인정되었고 결국 서독 선수들은 경기 속행에 대한 에너지를 상실해 잉글랜드에 2대4 패배를 당한다.

이 대회는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가 출전한 대회였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리베로 베켄바워가 아닌 4-3-3 포메이션의 중앙 미드필더였다. 그리고 그는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의 에이스 바비 찰튼의 마크맨으로 출전해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2.3.2.2. UEFA 유로 1968[편집]

쇤 체제하의 유로 첫 대회인 유로 68에서 서독은 최종전 상대인 알바니아와 0대0으로 비겼다. 이 무승부로 인해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최종 예선에조차 진출하지 못한 채 탈락했고 쇤은 한동안 자국 축구팬들에게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어야 했다.


2.3.2.3.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편집]

서독의 축구팬들에게 갖은 욕을 먹으면서도 DFB는 쇤을 신임했고 그는 부담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멕시코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했다.

지역 예선에서 서독스코틀랜드, 오스트리아, 키프로스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서독은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를 앞세워 5승 1무의 성적으로 가볍게 본선에 진출했다.

서독은 본선 4조에서 페루, 불가리아, 모로코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이 조에서 서독의 맞수가 될 만한 팀은 없었으며 서독은 3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전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잉글랜드와의 리턴 매치가 열렸다. 서독은 먼저 2실점을 하며 0대2로 패배가 확실시되었지만 바비 찰튼이 빠지면서 서독은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베켄바워와 스트라이커 젤러의 골로 서독은 극적으로 2대2 동점을 만든 뒤 연장에서 반코트 경기로 잉글랜드를 몰아붙였다. 기력이 떨어진 잉글랜드를 상대로 연장 후반 3분, 서독은 뮐러의 골로 3대2 승리를 챙기며 전 대회의 복수와 함께 4강 진출에 성공했다.

판타스틱! 믿을 수 없어요! 경이롭고! 비범합니다! 잉글랜드를 상대로 거둔 서독의 승리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어 선택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레키프. 서독의 8강전 승리를 전하며


4강전에서 서독은 이탈리아와 맞붙었다. 지금까지도 FIFA 월드컵을 넘어 축구 역사 전체로 따져도 최고로 꼽힐 만한 명승부로 연장전 30분 동안 무려 다섯골이 그것도 역전-재동점-재역전-재재동점-추가골로 이어지는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베켄바워는 경기 중에 쇄골이 깨지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붕대 투혼을 보이며 연장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서독은 이탈리아에 3대4로 패하며 3위 결정전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서독은 3, 4위전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승리하며 월드컵 3위에 올랐다. 비록 서독은 월드컵 3위에 머물렀지만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같은 명선수들이 이 대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으며 이후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쇤은 젤러를 뮐러의 뒤에 둠으로써 둘의 공존 문제를 해결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2.3.2.4. UEFA 유로 1972[편집]

쇤에게 놓인 다음 시험대는 UEFA 유로 1972였다. 서독알바니아, 터키, 폴란드와의 지역 예선 1라운드를 통과했고 4강 본선 진출을 위해 잉글랜드와의 홈 앤드 어웨이 매치를 준비하게 되었다.

서독은 1972년 4월 29일, 웸블리 원정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3대1로 꺾어 본선 진출의 8부 능선을 선점했고 수비와 공격의 조화를 선보였다. 그리고 서독은 한달 후에 그들의 홈인 베를린에서 0대0 무승부를 거둬 잉글랜드에 다시 한번 물을 먹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진출한 본선에서 서독은 벨기에, 소련을 차례로 꺾으며 대표팀 역사상 처음으로 유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시기에 기존의 수비적 스타일에 한계를 느낀 헬무트 쇤은 유로 72부터 '리베로'를 새롭게 창안해 내면서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동하던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이 역할을 맡긴다. 최후방에 위치하여 수비를 전담하면서도 기습적으로 공격에 참가하여 상대를 교란시켜 득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은 베켄바워는 유로 72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보통 쇤의 감독 커리어를 대표하는 성과로는 2년 뒤에 나오는 1974년 월드컵 우승을 꼽는다. 하지만 경기력으로 보면 오히려 "세기(世紀)의 팀 (Jahrhundertelf)", "환상적인 팀 (Wunderelf)", "드림팀 (Traummannschaft)", "역사상 가장 뛰어난 독일 국가대표 (Die beste deutsche Nationalelf aller Zeiten)" 등등 세계로부터 온갖 찬사를 받았던 화려한 공격 축구 람바참바 푸스발(Ramba-Zamba-Fußball)을 선보인 1972년 이 때가 독일 축구의 최전성기로 볼 수 있다. 쇤 본인은 이 시기의 서독 대표팀에 대해 "나는 보루시아의 속도와 바바리아의 지능을 결합시켰다."라고 평했다.[5]

헬무트 쇤의 팀은 축구의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독일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어떤 교과서에도 없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렉산도르 포노마료프. 유로 72 결승전에서 패하고 난 후.


그리고 레키프는 이 시기의 귄터 네처를 유럽 최고의 선수로 칭하기도 했다.


2.3.2.5. 1974 FIFA 월드컵 서독[편집]

자국에서 열린 1974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개최국 자격으로 지역 예선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독은 약간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먼저 귄터 네처레알 마드리드 CF로 떠나고 2년 전 유로 우승 멤버 중 일부는 기량이 떨어져 세대 교체가 필요했다.

본선에서 서독은 동독, 칠레, 호주1조에 편성되었다. 무난히 2라운드에 진출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서독은 칠레와의 1차전에서 엘리아스 피게로아의 대활약때문에 1대0으로 간신히 이겼고 최종전에서는 동독에게 일격을 얻어맞았다. 쇤 감독은 동독에게 패배하였다는 이유로 대회 중간에 TV쇼에 나와 서독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쇤은 밖에서는 사과를 했지만 안으로는 선수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최선을 다해 뛰지 않는 선수들이 있다며 강하게 선수단에 질책했고 대표팀 주장 프란츠 베켄바워는 그에 동조했다. 그 결과 동독전에서 뛰었던 울리 회네스, 위르겐 그라보프스키, 하인츠 플로헤, 베른트 쿨만2라운드 유고슬라비아전에서 빠지게 되었다.[6]

월드컵 우승의 기회는 동독에 패한 후에야 찾아왔습니다. 쇤은 이 게임을 모욕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팀이 동독에 진 것에 대해 분개했고 다음 날 우리에게 아예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훈계하거나 처벌을 내리는 대신 이런 식으로 깊은 실망감을 느끼게 한 것은 선수단 모두를 극도로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죠. 감독은 큰 소리로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기분을 상하게 함으로써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마치 선수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팀 전체가 부끄러웠죠. 그런 다음 베켄바워는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중간 라운드에서 선발 라인업에서 회네스를 교체해야 한다고 쇤에게 투표했습니다. 대신 본호프, 헤어초크비머가 선발 명단에 합류했습니다. 나중에 베켄바워가 이때 쇤을 해임시키려했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었는데 그건 넌센스예요. 쇤은 팀을 꾸렸지만 당시의 다른 감독들과 달리 논쟁을 저울질하고 다른 의견들을 수용했습니다.

베른트 횔첸바인


이 월드컵은 8강에서 토너먼트가 아닌 다시 2개조로 나뉘어 경기를 치렀고 조 1위팀이 결승, 조 2위팀이 3위 결정전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7] 서독은 2라운드 B조에 폴란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와 편성이 되었다. 서독은 3전 전승, 조 1위로 8년 만에 월드컵 결승전에 다시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토털 풋볼 네덜란드. 이 대결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데 토털 풋볼의 창시자 리뉘스 미헐스와 리베로 시스템을 극대화 한 헬무트 쇤이라는 극과극 전술 성향의 감독 대결과 이 두 감독의 전술 철학을 실제로 구현해낸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의 맞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열릴 당시에는 최고의 선수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의 우승을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정작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는 전반에 페널티 킥을 얻어낸 것을 빼면 베르티 포크츠에게 완벽히 막혀 버렸다.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로프 렌센브링크를, 라이너 본호프빔 판하네험을 상대했다. 반면 서독은 프란츠 베켄바워의 지휘아래 네덜란드를 상대로 2대1 승리를 거두어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3.2.6. UEFA 유로 1976[편집]

UEFA 유로 1976을 준비하고 참가해야 할 서독의 전력은 분명히 2년 전의 월드컵 때보다 약해져 있었다. 게르트 뮐러볼프강 오베라트는 대표팀에서 은퇴했고 월드컵을 끝내자마자 파울 브라이트너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다. 당시 서독은 브라이트너같이 외국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표팀에 잘 선발하지 않았고 이들의 공백을 메울 만한 인재들은 아무리 서독이라도 결코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1974년 11월부터 당장 예선을 치러야 하는 쇤에겐 한탄하거나 핑계를 댈 시간 따윈 없었다.

최종 예선에서 스페인을 만난 서독은 1976년 4월 24일, 마드리드에서 1대1로 비겼고 뮌헨에서 2차전은 2대0으로 이겼다. 그렇게 디펜딩 챔피언은 유고슬라비아에 갈 수 있었다.

서독은 디터 뮐러해트 트릭에 힘입어 호스트 유고슬라비아를 4대2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서독은 대회 사상 최초 2연패를 하는가 싶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 2대2 동점으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5번째 키커였던 미드필더 안토닌 파넨카파넨카 킥으로 골키퍼 제프 마이어를 농락하고 골을 넣는 바람에 준우승에 머무른다.

이때 쇤의 서독은 유럽 축구계를 대표하는 강팀 중 하나임은 분명했지만 압도적인 강자라고 불리기엔 부족했다.


2.3.2.7.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편집]

전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1978년 월드컵 지역 예선을 면제받고 서독은 곧바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이저가 1977년 뉴욕 코스모스로 떠나면서 서독은 위대한 주장 없이 아르헨티나로 가야 했다. 그럼에도 서독은 4월 27일, 북아일랜드를 5대0으로 깨버리면서 베켄바워 없이도 성공적인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6월의 남미 투어에서 서독은 아르헨티나에 1대3, 우루과이에 0대2로 패하며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그래도 서독은 브라질과 1대1, 멕시코와 2대2로 비겼지만 불안한 기운은 해소되지 않았다. 뒤이어 1978년 4월 5일, 서독은 함부르크에서 브라질에 0대1, 19일에는 스톡홀름 원정 경기에서 스웨덴에 1대3으로 패하며 아르헨티나 월드컵 출정식에 찬물만 얻어맞은 채 출발해야 했다. 서독에서는 베켄바워, 브라이트너, 슈틸리케 등을 대표팀에 포함시켜 아르헨티나에 데려가야 한다는 요구가 들끓었지만 개인적 사유 등 각종 이유들로 이들 중 누구도 아르헨티나에 동행하지 못했다.

서독은 1차 본선에서 폴란드, 튀니지, 멕시코 등 한 수 아래의 팀들과 같은 조에 편성되었음에도 멕시코에만 6대0 대승을 거두며 1승 2무, 2위로 간신히 2차 본선에 진출했다. 1차 본선에서 나왔던 서독의 무기력한 모습은 2차 본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서독은 이탈리아, 네덜란드와는 간신히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둘과의 경기에서 너무 힘을 썼는지 서독이 3골차 이상으로 지지 않는 한 조 꼴찌가 확정된 오스트리아에 2대3으로 패배했다. 이탈리아가 네덜란드에 1대2로 패해서 서독이 오스트리아를 잡았다면 3, 4위전에라도 진출할 수 있었지만 서독은 조 3위에 그쳐 결승은커녕 3,4위전 진출에도 실패했다.


2.4. 그 후[편집]


쇤은 1978년 월드컵을 끝으로 서독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을 공표했다. 대회를 치르면서 그는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 현실적으로 3, 4위전을 은퇴 무대로 잡고 싶어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63세의 노감독은 그의 발표대로 월드컵이 끝나고 1978년 11월 1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A매치에서 국가대표팀과 DFB, 축구팬들에게 공식적으로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그의 고별 경기는 60분 밖에 치러지지 않았고 점수가 0대0이 되었을 때 중단되었다.

축구 감독에서 은퇴한 이후 쇤은 비스바덴에서 아내와 함께 조용히 여생을 보내며 가끔 대외 활동도 했다. 1983년 5월 31일, 뮌헨에서 열린 파울 브라이트너의 은퇴 경기에서 후임 대표팀 감독 유프 데어발과 함께 FC 바이에른 뮌헨과 세계 올스타의 친선 경기를 감독했다. 그리고 그의 75번째 생일을 맞아 1990년 비스바덴에 1974년 월드컵 우승 멤버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쇤은 알츠하이머로 투병 생활을 했고 1996년 2월 23일, 비스바덴에서 사망했다.


3. 스타일 & 평가[편집]



3.1. 감독[편집]


많은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은 쇤이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엄격한 전술적 조치를 내리는 대신 많은 자유와 발언권을 주었다는 사실을 짚었다. 이것은 보통 쇤의 장점으로 간주되지만 일부에서는 약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UEFA 유로 1972 당시 보여준 람바참바 푸스발을 이끌면서 쇤은 선수들이 책임있는 플레이를 하도록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많은 권위주의적인 감독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는 미드필더진에서의 볼 소유와 질서를 팀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지만 선을 지나치게 넘지 않는다면 선수들의 모험이나 장난도 융통성 있게 받아들였다.

쇤은 무려 14년 동안 서독 대표팀을 이끌며 조국에 두번째 월드컵첫번째 유로컵을 안긴 감독으로 FIFA 월드컵대륙 대회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자 비센테 델보스케와 더불어 현재까지도 단 둘 밖에 없는 감독이다.[8] 단일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4번이나 FIFA 월드컵에 참가, 잉글랜드 대표팀 초대 감독 월터 윈터바텀, 전임 제프 헤르베르거와 더불어 단일 국가대표팀 소속 FIFA 월드컵에 최다 참가 감독이기도 하다.[9] 또한 그가 지휘한 월드컵 25경기 중 16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최다 경기 및 최다 승리 감독'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10]

쇤은 독일 대표팀의 황금기를 지휘한 감독이자 대표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세부 기록을 살펴보면 서독은 쇤의 재임기인 1964년 11월 4일부터 1978년 6월 21일까지 총 139번의 국제 경기를 치르며 87승 30무 22패 승률 62.6%, 292득점 107실점으로 골득실에서 +185를 달성했다. 이 기간에 팀은 50회의 클린 시트를 기록했다.

헬무트 쇤은 아마도 돈이 아니라 축구를 전면에 내세운 감독의 마지막 대표자일 것입니다. 그의 주된 원동력은 수입이 아니라 일의 재미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그런 것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트거 슐체(Ludger Schulze)



4. 뒷이야기[편집]


  • 쇤은 선수 생활 당시 독일 축구계가 프로화가 되지 않아 투잡을 뛰었다. 그는 1935년 부활절까지 드레스덴에 있는 성베노 고등학교에 다녔고 아비투르 시험을 쳤다. 그에게는 자연과학보다 언어가 훨씬 더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1935년, 쇤은 드레스덴의 작손 주립 은행에서 견습 은행원 일을 하기도 했다.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는 1945년까지 드레스덴 근처 라데보일(Radebeul)의 제약 공장에서 일했다.


5. 경력[편집]



5.1. 선수[편집]



5.1.1. 클럽[편집]


  • 드레스드너 SC (1932 - 1944, 1946 - 1950)
    • 독일 분데스리가[11] (2): 1942/43, 1943/44
    • 참머포칼 (2): 1939/40, 1940/41
    • 중부 독일 챔피언십 (1): 1933
    • 가우리가 작센 (6): 1933/34, 1938/39, 1939/40, 1940/41, 1942/43, 1943/44


5.1.2. 개인[편집]




5.2. 감독[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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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4년 수훈, 독일 대공로십자장 Großes Verdienstkreuz[2] 드레스덴이 독일의 소련 점령지여서 드레스드너 SC가 소련에 의해 "부르주아 클럽이자 독일의 상징"으로 금지되어 드레스드너 선수들은 이 클럽에서 뛰었다.[3]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가 독일 대표팀에서 뛰게 되면서 경쟁에서 밀려 쇤이 대표팀에서 멀어졌다는 시각도 있다.[4] 44년 뒤의 월드컵 16강에서 독일은 잉글랜드를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프랭크 램파드의 완벽한 득점이 인정되지 않아 잉글랜드는 44년 만에 제대로 복수를 당했다. 이 경기도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골이 인정이 되었으면 독일을 추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골로 인정되지 않아 추격의지를 상실한 잉글랜드는 4대1 대패를 당했다.[5] 실제로 당대 분데스리가를 지배했던 양대 팀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7명의 선수,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6명의 선수를 각각 차출했고, 대회에서도 주전 9명은 모두 이 두 팀 소속이었으며, 나머지 2명의 선수도 묀헨글라트바흐 유스 출신의 로컬 보이였다.[6] 하지만 회네스는 스웨덴전부터 다시 서독의 스쿼드에서 중용되었고 쿨만은 스웨덴전에 교체 투입은 되었다.[7] 이렇게 조별 리그를 두 번 치르는 방식은 1982년 대회까지 유지된다.[8] 대륙 대회의 범위를 남미까지 범위를 넓히면 마리우 자갈루리오넬 스칼로니도 포함된다.[9] 지휘하는 국가가 바뀐 경우까지 포함하면 브라질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가 6회로 최다이다.[10] 2위는 14승을 기록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이다.[11] 개편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