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아벨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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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로베르 게랭
파일:프랑스 국기.svg
(1904~1906)
2대
대니얼 벌리 울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06~1918)
3대
쥘 리메
파일:프랑스 국기.svg
(1921~1954)
4대
루돌프 실드레이어스
파일:벨기에 국기.svg
(1954~1955)
5대
아서 드루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55~1961)
6대
스탠리 라우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61~1974)
7대
주앙 아벨란제
파일:브라질 국기.svg
(1974~1998)
8대
제프 블라터
파일:스위스 국기.svg
(1998~2016)
9대
잔니 인판티노
파일:스위스 국기.svg
(2016~ )







João Havelange
파일:external/img11.hostingpics.net/5808850UOLjoaohavelange.jpg
본명
장마리 포스탱 괴드프루아 드 아블랑주
(Jean-Marie Faustin Goedefroid de Havelange)
출생
1916년 5월 8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리우데자네이루
사망
2016년 8월 16일 (향년 100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브라질|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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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플루미넨스 법학 연방대학교
신체
183cm
재임
제7대 FIFA 회장
1974년 ~ 1998년
서명
파일:256px-João_Havelange_signature.svg.png

1. 소개
2. 과거 경력
3. 남미대륙 축구의 거물
4. FIFA 회장
4.1. 축구의 상업화를 진전시키다
4.2. 초장기 집권
4.3. 독재자들의 시녀
4.4. 몰락
5. 이후의 삶



1. 소개[편집]


"축구는 그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주었다."

게리 리네커 해설위원, 전 축구선수[1]


제7대 FIFA 회장. 젊은 시절에는 수영 및 수구 선수로도 활동했으며,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위원 및 브라질 스포츠 연합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경력들을 바탕으로, 1974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24년이나 FIFA 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33년 간 재임한 쥘 리메 이후 가장 오래 되었다. 그는 축구를 발전시키고 전 세계에 보급하고 상업화를 급속도로 이끌어내는 데 큰 공헌을, 기여를 했다. 그러나 독재자들과 너무 얽혔고, 지나친 권력욕으로 경쟁자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제거했다. 이제는 엄청난 뇌물까지 받은 사실도 탄로나서 망했다. 웃긴 점은 이런 아벨란제를 정면에서 비판한 이가 바로 제프 블라터.

대한민국에는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전 당시 대놓고 일본을 지지한 것 때문에 악감정과 이미지가 굉장히 나쁘다. 심지어 일본은 월드컵 유치경쟁 전부터 아벨란제에게 많은 뇌물을 바쳐서 아벨란제의 독재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많이 줬으며 아벨란제가 일본을 좋아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 많고 자기에게 뇌물을 많이 주는 나라였기 때문이며 일본에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심지어 월드컵 유치 경쟁중에는 2002년에는 한국에서 전쟁이 날 것이니만큼 한국의 월드컵 개최를 반대한다며 노골적으로 편항적인 말까지 공개적으로 내뱉었다. [2]


2. 과거 경력[편집]


1916년 5월 8일 리우데자네이루벨기에인 이민자 가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이었고, 플루미넨시 주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해 법률을 전공해서 24세에 졸업했다. 그는 버스를 판매하는 Auto Viação Jabaquara사의 법무 보좌관으로 일했고 금속과 화학 전문업체인, 전문회사인 Orwec Química e Metallurgia Ltda에서도 근무했다.

사실 그는 학창 시절에 여러 스포츠를 즐겼는데, 수구수영을 즐겨서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수영 선수로 출전했으며 1952 헬싱키 올림픽 때에도 수구 팀으로 출전해 13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멜버른에서 열린 1956 하계 올림픽에서 브라질 대표단의 사역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3. 남미대륙 축구의 거물[편집]


아벨란제는 1958년 브라질 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Union Cycliste Internationale에 입사했다. 그러다가 브라질 스포츠 연맹 부회장이 된 후, 그는 1958년에서 1973년까지 연맹 부회장직을 역임했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지만, 이 당시 주앙 아벨란제의 족적은 꽤나 거대한데, 1958 월드컵에서 펠레를 앞세운 브라질이 우승을 차지한 이후 남미대륙 축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UEFA와 손을 잡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인터컨티넨탈 컵의 창설을 주도했다.


4. FIFA 회장[편집]


1974년, 그는 브라질 스포츠 연맹 부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FIFA 회장직에 도전했다. 선거 결과, 아벨란제는 영국의 스텐리 로스를 물리치고 피파 회장이 되었다. 그는 역대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비유럽국 피파 회장으로 등극했다. 당시 그는 86개국에 로비 활동을 펼쳤고 종종 펠레와 함께 했다. 아벨란제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월드컵을 확대해 참여할 기회를 대폭 늘려주겠으며 청소년 월드컵을 개최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1. 축구의 상업화를 진전시키다[편집]


FIFA 회장에 당선된 후, 스포츠 마케팅 담당자 페트릭 넬리의 지원을 받아서 아디다스코카콜라를 FIFA 주관 대회의 주요 스폰서로 포섭했다. 이런 거대기업들의 후원으로 모인 엄청난 자금은 FIFA가 세계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줬다. 페트릭 넬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코카콜라를 통해 FIFA로 들어온 돈은 분명히 연맹의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아벨랑제는 취리히에 새로운 국제 본부를 지어 전문직의 전임 직원과 홍보 및 재정 인원을 임명하고 FIFA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줬다. 많은 사람들이 회장과 나 자신의 손에 따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또한 아벨란제 회장 시기에 방송 중계권 수입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1987년, FIFA 월드컵에 대한 유럽권의 TV 중계권은 4억 4천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그리고 1990년, 1994년, 1998년에 개막된 월드컵에 대한 비 미국권 TV 시청권은 22억 달러에 거래되었다. 아벨란제는 이렇듯 인기가 날로 상승하는 월드컵을 한층 발전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는 월드컵 참가국을 24개국에서 32개국으로 확대했으며 FIFA U-17 월드컵, FIFA U-20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 FIFA 여자 월드컵을 줄줄히 창설했다.


4.2. 초장기 집권[편집]


이렇듯 FIFA 회장으로서 월드컵을 발전시키고 축구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공헌한 아벨란제는 최장기 집권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1974년부터 1998년까지 24년동안이나 FIFA 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33년간 재임한 쥘 리메 이후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동안 그에 대해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의 입지는 끄떡 없었다.

심지어 그는 브라질의 전설 펠레와 불화를 빚고도 무사했다. 아벨란제의 딸 루시아는 브라질 축구 행정 담당자였던 리카르도 테세이라와 결혼해 30년 동안 해로하다가 1997년에 이혼했다. 이 테세이라는 브라질 축구 연맹의 총재로서 1989년부터 2012년까지 맡기도 했다. 그러던 1993년, 펠레는 자신의 텔레비전 회사가 국내 축구 시청 권리를 가지기 위해 콘테스트에 참여하려하다가 거절당하자 테세이라가 자신이 뒷돈을 주지 않아 콘테스트에서 탈락시킨 것이라며 그를 부패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테세이라의 장인인 아벨란제와 펠레와의 불화는 8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벨란제는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1994 FIFA 월드컵에서 펠레의 추첨을 금지했다.

그가 펠레의 추첨을 금지한 데에 많은 비판이 이어졌고 다음 회장 선거에서 낙선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벨란제는 월드컵 참가국을 확대하는 등 개발도상국에게 유리한 정책을 시행한 덕분에 CAF(아프리카 축구 연맹), AFC(아시아 축구 연맹), CONCACAF(중미,북미 및 카리브 축구연맹)의 표결을 확보하여 임기 연장에 성공했다.

그후 브라질 스포츠 장관이 된 펠레가 1997년 12월 브라질 의회 하원에 '펠레 법'이라는 별칭이 붙은 법안을 제출해 통과받았다. 이 법에 따르면 축구 클럽은 2년 이내에 컴퍼니가 되어야 하며 선수들에게 계약의 자유를 증폭시키고 브라질 축구 연맹의 권력을 제한했다. 이에 아벨란제는 다름 아닌 브라질 축구 연맹의 총재인 자기 사위의 권한이 약화되게 생겼다는 것에 분노했는지 만약 그 법이 통과된다면 브라질을 1998 프랑스 월드컵 출전 금지 조치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펠레 법은 도중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4.3. 독재자들의 시녀[편집]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아벨란제였지만 정작 독재자들 앞에서는 유화적인 태도로 나왔고 그들의 만행을 눈감아줬다. 예를 들어,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오마 액티스가 1976년 8월 암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이 자신들 말을 듣지 않는 액티스를 암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일었다. 그러나 아벨란제는 이에 대해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고 월드컵 유치를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묵살했다. 또한 액티스의 뒤를 이어 FIFA 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은 이는 라코스테였는데, 그는 다름아닌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사촌이었다. 그러나 아벨란제는 사실상 정권이 축구의 일에 깊숙이 개입한 것임에도 어떠한 제재도 하지 않고 눈감아줬다.

이렇듯 독재자의 시녀 노릇을 하던 아벨란제는 불법 도박 협회의 책임자이자 브라질의 범죄자인 카스투르 지 안드라지와 깊은 관련이 있기도 했다. 이 자는 1994년 폭력 혐의로 6년을 복역하기도 했다. 아벨란제는 1987년 안드란데에 대해 "즐겁고 유쾌하며... 우월한 신체... 충성심... 좋은 가장이며... 헌신적인 친구, 그리고 스포츠 관리자로서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경찰은 안드라데를 조사하는 중 안드라데가 아벨란제에게 리오 카니발에 있는 '박스'를 제공했다는 증거를 확보하기도 했다.


4.4. 몰락[편집]


1998년, 82세의 고령이었던 아벨란제는 24년만에 FIFA 회장 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표했다. 또한 그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자신은 잉글랜드가 2006년 월드컵을 개최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자신의 후계자인 제프 블라터를 지지하는 것을 유도하기 위한 술책이었지만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이를 무시하고 레나트 요한슨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역시나 24년간 쌓아둔 기반이 어디 가는 게 아니어서, 아벨란제의 후계자로 지목받은 블래터는 111표 대 80표로 요한슨을 제치고 새 FIFA 회장에 취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벨란제는 자신의 후계자가 회장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여생을 보내도 되겠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계자가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다.

1999년, 영국의 저명한 언론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아벨란제가 1992 하계 올림픽 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부터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다이아몬드, 자전거, 스포츠 용품, 델프트 블루 도자기, 그림 및 예술 서적을 선물로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후 그가 뒤에서 뇌물을 받아 챙겼다는 정황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1년, 아벨란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이보다 앞서 1982년에 국제 스포츠 레저(이하 ISL)이 창설된 바 있다. 이 단체는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구매권을 시장에 내놓았다. 아벨란제는 이들의 활동을 후원했고 IOC 의장은 ISL이 월드컵 및 올림픽 계약을 유리하게 얻을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1990년, ISL은 너무 많은 돈을 쓴 나머지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고 말았고 2001년 파산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진실이 밝혀졌다. ISL이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스포츠에 대한 '개인 수수료로' 1억 8,500만 스위스 프랑을 지불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여기에 블래터가 끼여들어 아벨란제의 부패 혐의를 입증할 만한 여러 증거들을 폭로해 아벨란제를 더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결국 2008년, 아벨란제는 사기 및 부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2011년, IOC는 아벨란제가 ISL과 관련해 1,000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을 조사하기 위해 윤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윤리위원회가 생기기 전날 아벨란제는 건강 문제를 언급하며 IOC 위원 자리를 사임했다. 조사 결과, 아벨란제는 회원 자격을 2년간 정지시키는 징계를 받았다. 그후 2012년 7월, 아벨란제와 그의 전(前) 사위였던 테세이라는 재판에서 ISL의 뇌물 수행자로 지명되었다. 검사는 두 사람이 ISL에게 1992년부터 2000년까지 4,100만 스위스 프랑을 지급받은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를 공개했다. 결국 테세이라는 2012년 3월 FIFA 임원직을 사임했다. 아벨란제 또한 명예회장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5. 이후의 삶[편집]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난 아벨란제는 2014년 6월에 폐 감염으로 입원해 병원 치료를 받았고, 2015년 11월에는 호흡기 질환으로 재입원했다. 그 후 고향에서 열린 올림픽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인 2016년 8월 16일, 리우의 한 병원에서 향년 100세를 일기로 영욕으로 가득찬 생을 마쳤다.

2007년 리우데자네이루에 신축한 종합운동장은 본래 그의 이름을 따서 이스타지우 올림피쿠 주앙 아벨란제로 불렸으나, 그의 부패행각 때문에 2017년에 이스타지우 올림피쿠 니우통 산투스로 개칭했다.
[1] 아벨란제 사망이후 트위터에서 언급. 그 다음 트윗에 잘못 쓴 거 아니라고 쐐기를 박아버렸다.[2] 막판에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지만 월드컵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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