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이로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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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이로테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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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9대



포르투갈의 前 축구감독


파일:페이로테우.jpg

이름
페르난두 바프티스타 드세이샤스 페이로테우 드바스콘셀루스
Fernando Baptista de Seixas Peyroteo de Vasconcelos
출생
1918년 3월 10일 /
[[포르투갈|

포르투갈
display: none; display: 포르투갈"
행정구
]]
포르투갈령 앙골라 움파타
사망
1978년 11월 28일 (향년 60세)
국적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 앙골라 파일:앙골라 국기.svg
포지션
공격수
신체
188cm | 체중 92kg
소속
선수
스포르팅 CP (1937~1949)
감독
포르투갈 대표팀 (1961)
국가대표
20경기 14골 (포르투갈 / 1938~1949)



1. 개요
2. 생애[1]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감독
2.4.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사생활
5. 수상
5.1. 클럽[2]
5.2. 개인



1. 개요[편집]


포르투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3][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페이로테우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포르투갈령 앙골라 출신의 백인이다. 페이로테우는 어린 시절 포르투갈령 앙골라에서 여러 운동을 접했고 그 중에 축구도 있었다. 어머니의 건강 문제로 인해 그의 가족은 1937년에 리스본으로 이주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페이로테우는 그의 가족의 친구이자 스포르팅 CP의 선수였던 아니발 파시엔시아(Aníbal Paciência)의 스카우트를 받아 1937년 6월, 스포르팅에 입단하게 되었다. FC 포르투SL 벤피카도 페이로테우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입전에 뛰어들었지만 페이로테우는 스포르팅을 선택했다.[4]

1937년 11월 15일, 페이로테우는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스포르팅의 감독 서보 요제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곧바로 스포르팅의 주전 중앙 공격수로 발돋움했고 한경기 9골 등을 기록하며 통산 경기당 1.68골이라는 압도적인 득점 페이스를 만들어냈다. 페이로테우는 프리메이라 디비장에서 6회 득점왕에 올랐고 그 중 하이라이트는 1946-47 시즌의 43골이었는데 이는 19경기만에 넣은 득점이다.[5] 이 과정에서 스포르팅의 우승 기록에 디비장과 타사 드 포르투갈에서 각각 5회씩을 추가시켰다.

이런 페이로테우에게도 다른 유럽 구단이 손을 내밀었다. 특히 지롱댕 드 보르도40년대에 후배 조제 트라바수스, 제주스 코헤이아 등과 함께 5개의 바이올린(Cinco Violinos) 공격진을 구성해 스포르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페이로테우와 후배들간의 나이차가 좀 있어서 바이올린 공격진이 실제로 돌아간 것은 1946년부터 1949년의 3년이었다. 그리고 페이로테우가 1949년, 31세의 나이에 리그에서 40골을 넣었음에도 축구 선수 은퇴를 선언하면서 바이올린 공격진은 가장 날카로운 창을 잃었다.

저는 국가의 스포츠에서 군인이었으며, 군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본분을 회피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제가 노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컨디션을 유지하고 클럽과 스포츠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축구 선수로서의 요구 사항을 더 이상 충족할 수 없습니다. 필드에 들어서면 열정으로 가득차게 되지만 대여섯 번 공을 차고 나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이 엄습합니다.

페이로테우의 은퇴사


페이로테우의 은퇴 경기에서 모인 수익은 그가 은퇴하면서 스포츠 매장을 개업할 때 생긴 빚을 갚는데 사용되었다.


2.2.2. 국가대표[편집]


페이로테우의 대표팀 데뷔전은 1938년 4월 2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전이었고 포르투갈은 독일과 1대1로 비겼다.

그의 다음 대표팀 경기는 스위스와의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 페이로테우는 후반 27분, 페널티 킥을 넣어 포르투갈이 한 골을 따라붙게 했지만 결국 1대2로 패해 포르투갈은 첫 FIFA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페이로테우는 1949년 3월까지 단 3회를 제외한 포르투갈의 A매치에 전부 출전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월드컵은 고사하고 A매치에도 많이 나갈 수 없었다. 결국 페이로테우는 대표팀에서 20경기 출전, 14골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2.3. 감독 [편집]


페이로테우는 선수 은퇴 후 개업했던 스포츠 매장이 망하면서 그의 고향인 포르투갈령 앙골라로 돌아갔다. 그러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와 1961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포르투갈 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았다. 페이로테우는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고 1962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단 두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이 2경기에서 페이로테우가 이끌던 포르투갈은 룩셈부르크에게 2대4로 뜬금패하는 개망신을 당하고 잉글랜드에게도 패하며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다. 당연히 페이로테우는 해임되었지만 개망신을 당했던 룩셈부르크전에서 그는 한 흑인 선수를 대표팀에 데뷔시켰다. 그 흑인 선수는 4년 후,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5년 후의 월드컵에서 대회 득점왕에 오르며 포르투갈을 4강에 진출시켜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한다.


2.4. 이후[편집]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을 끝으로 페이로테우는 완전히 축구계를 떠났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은퇴 선수들의 친선전에서 그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합병증으로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페이로테우는 리스본에서 1978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페이로테우는 188cm/92kg의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주력이 빨랐고 파워가 좋아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양발로 강력한 슈팅을 날릴 수 있었다. 그는 체구에 걸맞게 공중전에도 강했고 플레이메이킹도 가능한 팔방미인형 공격수였다.

그는 프리메이라 리가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스포르팅 CP 역대 최다 득점자이다. 하지만 페이로테우의 현역 시절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같은 타국간의 클럽 대항전도 없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FIFA 월드컵은커녕 A매치조차 많이 뛸 수 없었고 그는 그렇게 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페이로테우가 포르투갈 밖에서도 대단한 득점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는 각자의 상상의 영역에 맡길 수 밖에 없다.


4. 사생활[편집]


페이로테우는 그의 할아버지가 스페인 출신이라 이어져 내려온 성이다. 페이로테우의 종조부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93대 총독인 안토니우 세자르 드바스콘셀루스 코레이라(António César de Vasconcelos Correia)이고 드바스콘셀루스의 6촌 아우구스투는 포르투갈의 총리[6]였다.

그리고 FC 포르투 등에서 감독직을 수행한 조제 쿠세이루는 페이로테우의 조카 손자이다.


5. 수상[편집]



5.1. 클럽[7][편집]




5.2. 개인[편집]



[1] 출처: 위키백과, 11v11.com, 잊힌 스타, 페이로테우[2] 페이로테우는 스포르팅 CP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3] 출처: 위키백과, 11v11.com, 잊힌 스타, 페이로테우[4] 후에 에우제비우마리우 콜루나의 영입전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양상이 나왔는데 이 둘은 벤피카를 골랐다.[5] 나중에 스포르팅의 아르헨티나 출신 후배 엑토르 야잘데가 46골을 넣어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했지만 이 당시 야잘데는 29경기에 출전했다.[6] 나무위키의 틀에 의하면 56대, 위키백과에 의하면 57대 총리이다.[7] 페이로테우는 스포르팅 CP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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