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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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익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북한의 축구감독

파일:박두익.jpg
이름
박두익
朴斗翼 | Pak Doo-ik
출생
1936년 12월 17일 (87세)
북한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신체
171cm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평양시체육단 (1957~?)
감독
북한 대표팀(1969~1978)
북한 대표팀(1985~1989)
국가대표
6경기 2골 (북한 / 1959~1968)

1. 개요
2. 생애
3. 선수 경력
3.1. 선수생활 초기
3.2. 잉글랜드 월드컵
4. 감독 경력
5. 은퇴 후
6.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주리 군단을 격침시킨 북한축구의 영웅. 올드한 축구팬이라면 적어도 1번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1960년대 북한 축구 선수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36년 12월 17일에 평양부 경상리(현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의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했다. 위키백과에서는 과거 피파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생일인 1943년 12월 17일을 가져와서 적어놨지만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36년 12월 17일생이 맞다.[1] 이후 조선중앙통신도 박두익이 1936년 12월생이 맞다고 분명하게 보도했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고 1948년 8월, 평양 제2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중퇴했다.

3. 선수 경력[편집]



3.1. 선수생활 초기[편집]


1957년부터 전문체육단에서 축구를 배웠으며 1958년 7월에 조선체육대학 특설학과를 졸업하였다. 1959년부터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약해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 출전했다.


3.2. 잉글랜드 월드컵[편집]


파일:리즈시절 박두익.jpg

박두익이라는 이름 석 자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2]에서 보였던 활약상 덕분이다.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은 4-2-4 포메이션을 주로 썼는데[3] 그 때 박두익은 강용운과 함께 중앙 공격수로 활약했다.[4]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은 소련, 칠레, 이탈리아와 함께 16강 조별리그 4조에 속했다. 영국에서는 스포츠 도박이 합법이었는데 당시 도박사들의 예측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우승확률 50%였던 브라질이었고 그 다음은 우승확률 25%의 잉글랜드, 3번째가 20%의 이탈리아였다. 반면, 북한은 16개국 본선 진출국 중 가장 낮은 1%에 불과했다. 즉, 당시 북한은 언더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우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대표해서 16개국 본선에 진출하는 것인 만큼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가서 1~2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라."는 김일성부담백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3년 동안 선수단 전원이 합숙 훈련을 하고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체력과 조직력을 다지고 같은 공산권 국가인 동유럽을 돌며 꾸준히 전력을 다졌다. 그렇게 영국에 도착한 북한은 잉글랜드 북동부의 공업 도시 미들즈브러에서 소련과 1차전을 치렀다. 북한이 동유럽 국가들과 자주 평가전을 치렀다 보니 소련은 북한이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속공으로 나선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고 우세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완력을 앞세운 더티 플레이를 했다.[5] 결국, 북한은 소련에 허무하게 0 : 3으로 패배했다. 2차전 상대는 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남미의 강호 칠레였다. 북한은 칠레를 맞아 스피드를 앞세운 속공으로 괴롭혔으나 좀처럼 골을 넣지 못했고 오히려 전반 26분에 루벤 마르코스에게 페널티 킥 선제골을 허용해 0 : 1로 끌려갔다. 북한은 계속해서 공격적으로 칠레를 몰아붙였으나 골을 넣지 못했고 패색이 짙어지던 중 후반 43분, 박승진이 터뜨린 천금 같은 동점골로 1 : 1로 비겨 첫 승점을 획득했다.[6]

이제 운명의 3차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가 벌어졌다. 우승 확률이 3번째로 높은 팀과 우승 확률이 가장 낮은 팀의 대결. 한마디로 다윗골리앗의 싸움인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북한은 그 유명한 사다리 전법을 시전했다. 이 경기에 출전한 박두익은 우측 윙어 한봉진과 함께 빠른 주력으로 그 빗장수비로 이름 난 이탈리아 수비진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북한의 빠른 주력만 봉쇄하면 승리가 어렵지 않다고 판단해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에게 박두익을 봉쇄하도록 하고 좌측 풀백 자친토 파케티에게 한봉진을 봉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불가렐리와 파케티 모두 박두익, 한봉진의 주력을 따라잡지 못했다.[7]

거기다 이탈리아가 초반에 잡았던 3번의 결정적인 기회도 북한 골키퍼 리찬명의 선방에 가로막혀 무위로 돌아갔고 설상가상으로 전반 34분, 이탈리아의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가 북한의 미드필더 박승진을 향해 태클을 걸었다가 도리어 부상을 당해 퇴장하게 되어[8] 10명이서 뛰어야 했다.[9]

이는 곧 단순한 수적 열세를 넘어 박두익의 전담 마크맨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가렐리가 실려 나가자 박두익은 훨훨 날아다니게 되었고 마침내 전반 41분, 림승휘가 센터서클에서 전방으로 높이 띄운 볼을 페널티 에어리어에 있던 이탈리아 수비수가 먼저 볼을 처리해 다시 센터서클 쪽으로 날아갔고 그걸 북한의 우측 풀백 하정원이 이탈리아 선수를 제치고 헤딩으로 따냈다. 하정원이 따낸 볼은 한 번 바운드가 되어 페널티 박스로 흘렀고 그걸 박두익이 받아 오른발 논스톱 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이후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북한을 몰아붙였지만 북한은 밀집수비를 구축해 이탈리아의 공격을 막아냈고 빠른 주력을 앞세운 역습으로 이탈리아를 괴롭혔다. 결국, 경기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북한의 1 : 0 승리로 돌아갔다. 대어 이탈리아를 낚은 북한은 단숨에 승점 2점을[10] 추가해 소련에 이어 조 2위로 성큼 올라서 8강에 진출했다.

한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성난 팬들의 난동이 무서워 밤 중에 입국하는 공항까지 바꿔가며 몰래 귀국했으나 이미 팬들은 그곳에도 진을 치고 있었고 썩은 토마토와 계란 등의 오물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당시 국가대표팀을 이끈 감독은 1년 동안 근신 처분을 받은 건 물론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인 불가렐리를 비롯한 일부 선수들은 영구제명까지 당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이렇게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박두익은 동양의 진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는 저주의 이름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지금도 이탈리아 노인들이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 이탈리아인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말이 필요없을 듯.

박두익은 8강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도 출전해 90분 동안 분전했지만 별 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 득점도 올리지 못했다.[11] 북한은 전반 22분까지 3골을 넣으며 세계최강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깨고 8강에 올라온 포르투갈을 상대로 3 : 0으로 크게 앞서갔으나 이후 승리에 도취된 탓인지 계속해서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서다 결국 에우제비우에게 일격을 당해 3 : 5로 역전패를 당해 8강에서 행진을 멈추었고 박두익의 월드컵 도전사도 여기서 막을 내렸다. 어쨌거나 월드컵에서 대활약한 공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이 박두익을 직접 불러다 만났으며 1966년에 인민체육인 칭호 및 국기훈장 1급을 수여하였다.

그 후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응원단이 플랜카드로 AGAIN 1966 이라는 문구를 만들며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수들을 자극시켰고, 이탈리아는 이에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16강에서 이탈리아는 패배했다.

4. 감독 경력[편집]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앞에서 인용한 차범근의 칼럼과 영화 천리마축구단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선수 은퇴 후 1970년에는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참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도 맞대결을 한 바 있었다. 1986년~1989년에 두번째 A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참고로 대한민국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 차범근도 선수 시절에 박두익이 이끄는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은 적이 있었다고 직접 칼럼에서 밝힌 바 있다.

90년대에는 체육지도위원회 축구련맹 처장으로 일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1996년 11월, 김정일이 측근들에게 박두익의 근황을 알아보라고 한 후에 박두익의 환갑상을 내려주며 "박두익동무는 우리 나라 축구발전에 큰 공을 세운 동무이며, 제8차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이름을 날린 공로있는 동무"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카더라.

5. 은퇴 후[편집]


2002년에는 영국의 대니얼 고든 감독이 제작,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 출연하여 1966년 월드컵 당시의 일에 대해 인터뷰를 한 바 있다.

2016년 탈북한 태영호의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그의 행적이 잠시 언급되었다. 2003년 8월 당시, 평양 주재 유럽국가 대사관팀과 북한 외무성의 친선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전반전이 끝나는 시점에 북한 외무성이 0 : 2의 점수로 끌려가고 있었다. 김정일에게 보고해야 하기에 절대로 질 수 없었던 외무성은 북한 국가대표 선수를 3명 투입하였고, 결국 2 : 2로 비겼다. 유럽 외교관들이 심판에게 항의했지만 심판은 외무성에서 나온 선수들이 맞다고 끝까지 우겼다. 그 심판이 바로 박두익이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에는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도전하는 후배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근데 16강은 너무 뜬금없는 전망이었다. 또 2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앞두고 재조명되기도 했다. 현재 그는 80을 바라보는 고령이라 그런지 축구 일선에서는 모두 은퇴한 듯하며 천리마축구단 출연 당시 갖가지 훈장들을 받은 것으로 보아 북한 내부에서 상당한 고위층으로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015년까지는 간간이 인터뷰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생존해 있었던 듯한데 현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오늘날에서도 북한은 박두익을 '동방의 진주'라고 부르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6. 여담[편집]


2000년 초반에 이탈리아로 가서 주방 보조를 맡으며 파스타나 여러 본토 음식을 만들던 한국인 이탈리아 조리사인 박찬일씨의 성이 박씨라고 하자 같이 일하던 나이가 든 주방장이 즉시 박두이크[12]랑 같은 성씨네? 라고 하는 등 당시 이미 40년 가까이 지난 일을 아직까지 잊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나이가 든 이탈리아인들에게 북한 박두이크라고 질문하면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1] 조선향토대백과사전은 북한에서 받은 자료를 일부 활용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생일이 적혀 있는 것이다. 피파에 잘못된 생일이 기재되어 있는 것은 북한이 피파 측에 가짜 생일을 제공했거나 박두익의 호적 등록일일 가능성이 있다. 박두익과 비슷한 연배나 그 이전 세대들 노인 중에는 호적 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2] 당시 16개국 본선[3] 단 딱 하나 예외인 경기가 있다. 그 경기가 바로 그 유명한 이탈리아와의 경기다. 그 때 북한은 그 이름도 유명한 사다리 전법을 써먹었다. 많은 이들이 사다리 전법을 평균 신장이 165cm밖에 안 되어 제공권 싸움에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간 차로 점프하는 모습이 마치 사다리를 타는 것 같아 그것이 사다리 전법이라고 알고 있는데(심지어 이는 축구전문가로 통하는 박문성도 범한 실수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 사다리 전법이란 일반적인 3선 포메이션 -Ex) 4-4-2 포메이션-이나 4선 포메이션 -Ex) 4-2-3-1 포메이션- 등이 아닌 극단적인 2선 포메이션을 말한다. 즉, 5-5나 4-6 같은 포메이션을 말하는 것이다.[4] 1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강용운이 크게 부상을 입어 출전할 수 없게 된 후로는 계속 리동운과 호흡을 맞췄다고 한다.[5] 그 덕에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은 영국 언론의 맹비난을 받았다고 한다.[6] 참고로 이것은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기록한 승점이다.[7] 특히 한봉진의 주력은 번개와 같아서 발이 느렸던 이탈리아 수비진들이 좀처럼 막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천리마축구단에서도 당시 북한 감독이었던 명례현 씨가 한봉진을 가리켜 "속도가 아주 빨라서 우리 팀의 많은 공격 기회를 만들었다."고 했으니 이만하면 말 다한 듯 싶다.[8] 1966년 대회까지 선수 교체는 허용되지 않았다. 즉, 선발 출전한 선수 11명은 무조건 90분 풀타임을 소화해야 했고 부상을 당해 경기를 뛸 수가 없게 되면 그 선수가 빠진 채로 뛰어야 했다. 한마디로 부상당하면 팀에 손해를 끼치는 셈이다.[9] 이후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프란체스코 토티송종국과의 경합 후 페널티 박스 안에서 쓰러졌는데 주심은 이를 시뮬레이션으로 판단해 경고 누적으로 퇴장시켰다.[10] 1993년까지 승리 시 승점은 2점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1승 2패를 기록한 팀과 2무 1패를 기록한 팀의 승점이 같아지게 되고 득실을 비교할 때 후자가 더 유리하기 때문에 3위 간 싸움에서 불리하다는 지적이 높아져 1994 FIFA 월드컵 미국부터 승리 시 승점을 3점으로 상향 조정했다.[11]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북한 측 득점자는 박승진, 리동운, 양성국이다.[12] 이탈리아 발음으로 익이 안되어 이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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