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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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린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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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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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FIFA 월드컵 골든슈
[1]



베스트팀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가린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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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파일:Garrincha brazil 1.png

이름
가힌샤[1][2]
Garrincha
본명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산투스[3]
Manuel Francisco dos Santos
출생
1933년 10월 28일
리우데자네이루주 마제 파우그란지
사망
1983년 1월 20일 (향년 49세)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브라질|

브라질
display: none; display: 브라질"
행정구
]]

신체
169cm[4]
포지션
윙어 (아웃사이드 라이트)
주발
오른발
소속
유소년
SC 파우그란지 (1948~1952)
선수
보타포구 FR (1953~1965)
SC 코린치안스 (1966)
포르투게자 카리올라 (1967)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68)
CR 플라멩구 (1968~1969)
올라리아 AC (1972)
국가대표
50경기 12골 (브라질 / 1955~1966)

1. 개요
2. 생애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평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사생활
8. 여담
9. 가린샤에 대한 어록



1. 개요[편집]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본명은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 산투스(Manuel Francisco dos Santos). 별명인 가린샤(Garrincha)는 '작은 새'란 뜻이다. 일설에 따르면 가린샤란 이름이 작은 새라는 뜻이 아니라 가린샤란 새의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오른쪽 아웃사이드 포워드 혹은 오른쪽 윙어.

펠레, 니우통 산투스, 지우마르 등과 함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두 차례의 월드컵 타이틀을 선사했으며 특히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대단한 활약상을 남겼다. 사후 1998년 아르헨티나 최고 언론인 클라린에서 선정한 역대 월드컵 MVP에서 1962년 수상자로 그가 선정될 정도였다. 1983년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 생애[편집]


가린샤는 리우데자네이루슬럼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알코올 의존증자였고, 가린샤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당시 브라질 사람 상당수처럼 문맹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 소아마비를 겪었기 때문에 다리가 기형이었다.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굽고, 왼쪽 다리는 밖으로 굽은데다 오른쪽 다리보다 6cm나 짧았다. 오죽 장애가 심했으면 의사가 보조장치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라고 진단했다. 당시 외과의사가 무료로 수술을 해주어서 이정도다. 보험의 후유장애 기준을 보면 '한 다리가 5cm 이상 짧아진 때'를 30%의 장애로 본다. 그만큼 장애가 심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futebolthoughts.files.wordpress.com/garrincha21.jpg

가린샤의 다리[5]

그랬던 가린샤가 훗날 당대 최고의 축구 선수, 더구나 당대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라는 칭호까지 획득했다. 전통적으로 오른쪽에서 라인을 타며 돌파 후 크로스, 중앙으로 좁히며 드리블 후 패스, 슛 등 클래식 윙어로서의 모습에서 가린샤는 부동의 1인자다.

가린샤가 축구를 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마의 드리블을 하는 절름발이가 있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지만 이를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3. 선수 경력[편집]



3.1. 클럽 경력[편집]


그가 보타포구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을 때 그는 바로 첫 터치로 내 다리 사이에 공을 넣어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불쾌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난 거기 있던 임원들에게 그와 계약해야 한다고 말했고 다행히도 그들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니우통 산투스, 가린샤와의 첫 맞대결을 회상하면서.


가린샤가 프로 구단에 입단하고 싶어할 때 보타포구의 감독을 쫓아다니며 엄청나게 귀찮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리가 휘어있는데다 8살짜리 지능을 가진 사람[6]이 프로 축구단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아마 누구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아진 감독은 팀의 주전 레프트 백을 보내서 가린샤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주전 레프트 백은 단순한 주전이 아니라 전설적인 왼쪽 풀백 니우통 산투스였다. 2010년대를 기준으로 따지자면, 입단 테스트의 상대로 마르셀루다비드 알라바 정도 되는 월드 클래스급의 선수를 다리가 휜 장애인 상대로 붙여준 격이다.

다시 말해 테스트는 명분이고 "저기 있는 절름발이 녀석에게 니가 가서 본때를 보여주고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줘서 멀리 내쫓아 버려라!"는 뜻으로 테스트를 빙자한 가린샤 퇴치로 내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라고 니우통 산투스를 내보냈지만 오히려 가린샤와 1:1 에서 상대도 못 될 정도로 털려버린다. 심지어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는 굴욕적인 알까기까지 당하는 등, 그야말로 처참하게 패배했다.

다만, 산투스는 이런 굴욕을 당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린샤를 같은 편으로 영입해야 한다고 프런트에다 역설했다. "이 친구와 같은 팀에서 뛰면 또 다시 그런 굴욕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게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경기가 끝나고 코치에게 "나는 저 선수를 상대 팀으로 맞대결하고 싶지 않으니까 꼭 영입해달라."라고 직접 요청을 했다.

결국, 가린샤는 1953년 보타포구 FR과 계약했고, 가린샤는 1957년 주립 리그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펠레산투스 FC에 입단한 뒤로 둘은 그야말로 라이벌로서 경쟁을 펼쳤는데 리그에서의 경쟁은 2000년대 말–2010년대의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생각하면 될 듯하다.

1962년 가린샤는 자신의 최전성기를 맞이하는데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끈 활약을 바탕으로 주립 리그,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거두는 등 클럽 축구 역사상 최초로 6관왕을 이끈다. 이후 1965년까지 581경기 232골을 기록했고, 이후 보타포구 FR을 떠나 SC 코린치안스에서 13경기 1골을 기록하고 포르투게자 카리올라, 후니오르 FC, CR 플라멩구에서 뛰다가 1972년 올라리아 AC에서 은퇴를 했다.


3.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55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가린샤는 펠레, 니우통 산투스, 마리우 자갈루와 함께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이 대회에서 가린샤는 펠레와 훌륭한 호흡을 보여 결승전에서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 쿠르트 함린이 이끄는 스웨덴을 상대로 동점골의 기점 역할을 하고 바바의 역전골을 직접 어시스트하면서 5:2 승리를 이끌어 우승을 차지한다. 가린샤의 순간적인 측면 돌파 후 크로스가 펠레의 발에 맞아 살짝 굴절되고 쇄도하던 바바가 골을 넣었던 것이다.

이후 1962 칠레 월드컵에도 참가했는데 4년전 우승 멤버들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브라질은 우승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펠레가 부상을 입어 아웃되고 무승부를 거두는 바람에, 사람들은 브라질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조별리그 세 번째 경기 스페인전에서 펠레를 대신하게 된 아마리우두가 멀티골을 터뜨리며 2:1 역전승을 거두어 브라질은 조별리그를 2승 1무로 통과한다. 이 스페인전에서 가린샤는 특유의 측면돌파 후 크로스로 아마리우두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했다.

8강 잉글랜드 전에서 가린샤는 코너킥 상황에서 헤더로 선제골을 기록, 강력한 프리킥 슈팅으로 만들어낸 세컨볼을 바바가 골로 연결하면서 두 번째 골의 기점이 되었으며, 이후 엄청난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쐐기골을 넣으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여담으로 경기 초반에 개 한 마리가 경기장에 난입해 경기가 중단됐고, 지미 그리브스가 네 발로 기어 개를 유인했다가 낚아채 보안 담당자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이 장면에 가린샤는 감명을 받았고 그 개를 애완동물 삼아 데려갔다고 한다.

4강 칠레전에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굴러온 세컨볼을 벼락같은 왼발슛으로 연결하며 선제골을 기록하고, 코너킥 상황에서 또 헤딩골을 기록하며, 후반전 초반에 코너킥으로 바바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4:2 승리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후반전 38분에 사건이 일어나는데 칠레의 수비수가 가린샤를 따라다니며 심판이 안보는 사이 가린샤에게 파울을 날렸고 가린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상대 수비수를 발로 걷어차다가 심판에게 걸려 퇴장당한 것이다.

다행히 징계가 풀려서 결승전에 출전할 수 있었고 요제프 마소푸스트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하며 브라질은 FIFA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다. 다만 결승전에서는 다소 부진하며 아쉬움을 조금 남기긴 했다. 이때 가린샤는 6경기 4골 2어시, 토너먼트 3경기에서만 4골 1어시로 뛰어난 활약을 통해 브라질을 우승시켰다.


파일:가린샤 62월드컵 드리블 횟수.jpg

옵타 방식으로 외국의 한 축덕이 세어본 결과 가린샤의 1962월드컵 드리블 횟수는 6경기(540분) 62회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1986 월드컵 마라도나가 7경기(630분) 53개, 2014 월드컵 메시가 7경기(720분, 연장전 3회 포함) 46개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다. 시대상을 어느정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드리블러로서의 출중한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임은 분명하다.

이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이때 가린샤는 이미 32살의 노장이었고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했기에 큰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다. 펠레 역시도 상대팀의 매우 거친 파울들로 부상을 겪으며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일단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선 펠레와 가린샤가 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거두었으나 펠레가 부상으로 빠지고 결국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토스탕이 1골을 넣는데 그치고 3:1로 패배했으며, 조별리그 마지막에선 펠레가 어찌어찌 복귀했지만 이번엔 가린샤가 경기를 뛰지 못하며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에게 3:1로 패해 무기력하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후 가린샤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

여담으로, 이 시기 브라질 국대는 가린샤와 펠레가 동시에 뛴 경기에선 불패였다. 가린샤가 뛰었던 마지막 경기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헝가리전이었고 거기서 패배한 게 가린샤의 유일한 A매치 패배기록이다.[7] 펠레는 이전 경기였던 불가리아전에서 부상으로 아웃됐고 포르투갈전에 억지로 복귀했지만 이때는 가린샤가 경기를 뛰지 않아서 결국 둘이 함께 뛴 경기들은 불패로 남게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과정에서 수훈갑이었던 선수답게 엄청난 재능을 자랑하던 축구선수였다. 가린샤의 피지컬은 좋지 않았다. 17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고,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기형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피드 역시 돋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피지컬적인 장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린샤가 이런 부분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냥 별 볼 일 없는 축구선수 A 정도로 평가받으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단점을 극복했다.

신체적인 면에서는 장점이 없었으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민첩한 몸놀림이다. 이 민첩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속임 동작을 사용했는데, 가린샤의 크고 작은 속임 동작들은 상대 수비수의 균형을 깨기에 그만이었다. 때문에 가린샤는 수비수와 1:1로 마주본 상태에서 돌파해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수비수 몇 명을 계속해서 제쳐내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가린샤의 한쪽 다리가 짧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다리 길이의 차이가 상대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가린샤를 상대하기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리듬을 타면서도 양발을 무리없이 사용하며 드리블하니 수비수 입장에서는 그 패턴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린샤는 수비수를 '농락'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가린샤의 별명인 'Alegria do povo'는 포르투갈어로 '사람들의 즐거움'이라는 뜻인데, 이는 가린샤가 매번 보여주는 트릭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상대 선수를 제치며 느끼는 희열'은 브라질 축구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이다. 브라질 축구를 다룬 여러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징가'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를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 선수가 다름아닌 가린샤였다.



특히 수비수와 마주 본 상황에서의 이런 드리블은 가린샤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역사상 최고로도 거론되는 드리블 능력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패스에도 아주 능했다. 가린샤는 측면에서 중앙의 선수들과 연계하여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크로스와 패스 등으로 센터 포워드에게 찬스 제공'이라는 아웃사이드 라이트의 전통적 임무에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상대 선수를 제치고 필요한 공간만 딱 만들어서 간결하게 크로스를 제공하는 플레이야말로 가린샤의 전매특허이다.

킥 능력 또한 뛰어났다. 측면에서 뛰는 클래식한 스타일의 윙어라서 중앙에서 슈팅을 때릴 찬스가 많지는 않았지만, 혹여 잠시 중앙에 머무르다 찬스가 찾아오면 지체 없이 냅다 슛을 때려갈겨 골망을 갈랐다. 골대와의 거리는 상관없었다. 가린샤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발목 힘의 소유자라서 슈팅의 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즉, 박스 안에서나 박스 밖에서나 위협적인 슈팅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골을 이런 상황에서만 넣었는데, 보타포구 FR에서만 200골이 넘는 골을 득점했다. 놀라운 기록이다. 코너킥을 주로 본인이 처리했으며 프리킥도 잘 찼다.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까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프리킥은 주로 지지, 펠레, 가린샤 이 3명이 도맡았다. 셋 다 월드컵에서 프리킥 골을 득점한 바 있다.

뛰어난 활동량과 수비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가린샤의 플레이 모습을 보면 풀백과 협력 수비하는 장면, 상대 수비수들을 압박해서 공을 빼앗아내는 장면 등 당시의 윙어들에게서 보기 힘든 수비적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크로스를 헤딩으로 처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어서 꽤 많은 헤딩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당시 축구의 수준과 천부적인 축구 재능이 합쳐져서 덕에 못하는 게 없는 선수였다.

경기 중 여러 가지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던 선수였다. 수비진과 골키퍼를 제치고 빈골대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다 수비진이 달려오자 그를 다시 제치고 골을 넣기도 했고, 1962 칠레 월드컵 4강전 경기에서 2골이나 넣으며 상대 수비진을 부수다가도 상대 수비수가 알짱거리는게 짜증나서 그를 발로 찼다가 퇴장 당하는 일도 있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을 제패한 후 가린샤에게 우승 소감을 묻자 "여섯 경기만 이기고도 우승이라니, 이상해요."라고 말했다.[8]


5. 평가[편집]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상이자, 축구선수로서 일생일대의 영광을 누렸고, 반면 불우했던 출생과 유소년기를 반영하듯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등 축구계에서도 보기 드문 파란만장한 선수. 또한 마라도나, 메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이자 역대 최고의 윙어로서 온갖 축구 전설들을 배출한 브라질에서도 수십 년째 '가린샤의 재림'이란 칭호를 받은 선수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전경기 득점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레전드 윙어 자이르지뉴와 2000년대 중반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호나우지뉴 정도를 제외하면 가린샤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브라질 출신 윙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보다 확실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브라질 선수는 브라질을 넘어 축구사 전체에서 최정상인 펠레 뿐이고 역대 선수들 랭킹에서 TOP 10위의 수문장격인 멤버들이자 역대 브라질 2티어급 선수들인 지쿠호나우두를 가린샤와 비교해도 그들이 가린샤보다 확실하게 낫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어떤 면에선 저평가 되는 선수인데, 월드컵 2연패에 그중에 칠레 월드컵에선 득점왕+MVP+우승이라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마라도나 못지 않는 활약과 공헌도를 올렸지만 당대의 브라질 대표팀의 수준에 묻혀 역대 최고선수 떡밥에 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남미에서 가린샤는 펠레, 마라도나의 경지에 이른 선수로 추앙받으며, 당시 펠레의 부상으로 흔들리던 1962 칠레 월드컵 우승을 위한 브라질의 대답이라고 할정도로 펠레에 못지 않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선 펠레가 부상을 입어 벤치 신세를 지는 바람에 사실상 가린샤+심판의 오심 행운이 우승시킨 것이나 다름 없다. 여담으로 펠레는 이 월드컵을 모티브로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 직전에 당시 척추 골절이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네이마르 없이도 브라질이 우승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물론 실상은...

가린샤는 역대 10위권에 간간히 랭크되고 20위권 안에는 거의 무조건 들어가는 레전드로 칭송받는다. 보통 미셸 플라티니, 지쿠, 에우제비우와 함께 묶여 거론된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 FIFA 월드컵 골든슈: 1962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2
  • 발롱도르 드림팀 2군[9]: 2020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10]: 2021
  • IFFHS 올타임 브라질 드림팀: 2021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7. 사생활[편집]


그라운드에서의 화려한 모습처럼 사생활 역시 좋지 않은 의미로 화려했다.

절제 없는 성생활을 즐겼으며,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아내가 6명에 자녀가 최소 14명이었다고 한다. 펠레의 자서전에서 24살 때 이미 자녀가 6명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 있으며, 은퇴 후 불과 49세의 나이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했다.

가린샤의 범국민적인 인기 때문에 가린샤의 아내들은 팜므파탈, 가린샤는 순진한 축구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악녀로 꼽히는 2번째 부인 엘자가 가린샤와 이혼한 이유는 가린샤가 그녀를 마구 발로 찼었기 때문. 지적장애인 중 이런 케이스는 꽤나 많다. 교육을 해도 폭력이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힘들어할 뿐더러, 나쁘다는 걸 간신히 알아도 정신력이 부족하여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반 가정폭행범들은 상대와 자신의 신체능력을 고려해서 힘조절을 하지만 지적장애인은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동거인이나 보호자가 중상을 입을 때까지 폭행하는 경우도 많다. 더군다나 가린샤는 프로 축구선수이므로 체력이 매우 강하여 폭행의 강도 또한 매우 강하기에 이혼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8. 여담[편집]


  • 한국에선 20세기만 해도 인지도가 많이 낮았고 기껏해야 펠레의 오른팔 정도 인상이었지만 오히려 21세기 들어 넷상에서 회자되며 인지도가 꽤 올라갔다. 물론 가린샤 클럽처럼 애매한 용어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게 함정이지만.


  • 1958년 월드컵 당시의 일화이다. 가린샤는 스웨덴에서 100달러를 주고 라디오를 샀다.[11] 곧 사소한 문제가 생겼는데 스웨덴에서 라디오를 사온 거니 포르투갈어가 아닌 스웨덴어로 된 방송만 나오는 것이다. 당황한 가린샤는 마사지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라디오가 탐났던 마사지사는 가린샤에게 사기당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라디오를 넘긴다면 이 일을 묻어두겠다고 약속했다. 100달러라는 비싼 가격에 산 라디오를 넘기는 것을 머뭇거리던 가린샤에게 마사지사는 브라질 국대 선수가 이국에서 사기를 당한 사실이 알려지는게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고, 결국 가린샤는 라디오를 마사지사에게 넘기고 말았다.

  • FIFA 20에 신규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축구 게임에서는 처음으로 나왔다.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선수.png }}}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선수 3위에 이름을 올렸다.



9. 가린샤에 대한 어록[편집]


많은 형제들 중의 누군가가, 쓸모없고 흉하게 생긴 새의 이름인 '가린샤'라는 이름을 그에게 지어주었다.

그가 축구를 시작했을 때, 의사들은 그에게 X표를 그었다. 소아마비에, 허기에 굶주리고, 유아 수준의 지능에, 척추는 S자로 휘고, 두 다리는 한쪽으로 휘었고, 절름발이 노새를 닮은 이 불쌍하고 비정상적인 젊은이는 절대로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오른쪽 윙어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Pelé and Garrincha - Gods of Brazil

펠레와 가린샤 - 브라질의 신들

BBC 다큐멘터리


"메시는 가린샤와 펠레의 수준에 다가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 두 브라질리언들은 내가 살면서 본 축구선수 중 최고였다."

후안 호세 피수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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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PA는 /ɡaˈʁĩʃɐ/로 실제로는 가'힝'샤에 가깝게 발음한다.[2] 어두가 아닐 때 r이 ㅎ발음이 나는 경우는 자음 뒤에 오거나 r이 연속으로 올 때 뿐이다.[3]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4] 공식 프로필 상 키이다만 가린샤는 양쪽 다리 길이 차이가 심해 명확하게 키를 측정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5] 왼쪽 다리(사진에서는 오른쪽)가 짧아서 들려 있는 게 선명히 보인다.[6] 흔히 IQ 33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당시 정확하지 못한 지능 테스트에 의한 잘못된 결과일 것이 자명하다. 참고로 저 테스트 인용하는 문건들 보면 펠레의 IQ도 68이 나왔다. 가린샤가 지적장애인이었던 것은 맞지만 IQ 33은 아니다. 진짜로 그 정도 IQ를 갖고 있었다면 인터뷰는 커녕 제대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하다. 가린샤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IQ 50–70의 지적장애 3급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것은 지적장애 문서를 참조.[7] 여담으로 가린샤 없이 펠레 혼자서 뛴 경기에서는 11패를 기록했다.[8] 실제로 32국이 출전하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후의 월드컵도 한 팀이 우승까지 겪어야 할 경기 수는 고작 7경기(조별리그 3경기, 토너먼트 4경기) 뿐이다. 물론 본선에 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많은 예선경기는 논외다.[9] RW 2위[10] B팀[11]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900불 정도 된다.[12]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출신으로 1959 코파아메리카 우승을, 감독으로 1967년 라싱을 남미 챔스 우승, 세계최초의 트레블팀 셀틱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이기고 우승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