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로 마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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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마촐라의 역임 직책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주장
마리오 코르소
(1967~1970)

산드로 마촐라
(1970~1977)

자친토 파케티
(1977~1978)


산드로 마촐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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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1965 · 1967 · 1968 · 1971 ·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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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산드로 마촐라
3위
조지 베스트



산드로 마촐라의 기타 정보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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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산드로 마촐라
Sandro Mazzola
본명
알레산드로 마촐라
Alessandro Mazzola
출생
1942년 11월 11일(81세) /
이탈리아 토리노
국적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신체
179cm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1]
소속팀
인테르나치오날레 (1960~1977)
국가대표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70경기 22골 (이탈리아 / 1963~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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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후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전 축구선수. 1960~1970년대 인테르이탈리아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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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노와 어린 산드로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부모가 이혼했고 거기에 얼마 뒤 아버지였던 발렌티노 마촐라비행기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축구에 대한 재능은 구단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고 주세페 메아차에게 발견되어 평생을 보내게 될 인터 밀란의 유스팀에 입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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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데뷔 당시에 인터 밀란에는 엘레니오 에레라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고 마촐라와 인터 밀란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위대한 인테르'라 불리는 이 시기의 인터 밀란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트로피를 수집했으며 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다. 1962-63 시즌 마촐라는 인테르에서 첫번째 리그 타이틀을 들어올렸고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다.

그 다음 시즌인 1963-64 시즌에는 유로피언컵에서 7골을 넣으며 페렌츠 푸스카스, 블라디카 코바체비치와 함께 득점왕을 수상했고 결승전에서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 CF를 박살내버렸다.[2] 인테르는 1964-65 시즌 스쿠데토빅 이어를 모두 들어올렸고 마촐라는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1966-67 시즌 인테르는 다시 한 번 유러피언 컵 우승에 도전했으나 셀틱 FC에게 슈팅 폭격을 맞으며 실패했다. 물론 이 패배로 마촐라와 인테르의 활약에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촐라는 국가대표팀에서 비상했고 1971년에는 발롱도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0년부터 마리오 코르소의 뒤를 이어 주장직을 수행한 마촐라는 1977년 그 자리를 자친토 파케티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565경기 출장 160골이라는 기록을 남긴 채.[3]


2.2. 국가대표[편집]


1963년부터 1974년까지 70경기 22골을 기록했다. 메이저 대회로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UEFA 유로 1968, 1970년 멕시코 월드컵, 1974년 서독 월드컵에 참가했다.

1963년 브라질을 상대로 데뷔했으며, 데뷔전에서 PK로 데뷔골까지 뽑아냈다. 3번째 A매치 경기는 소련전이었는데, 여기서 레프 야신의 그 유명한 페널티 킥 선방 장면의 키커가 바로 마촐라였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는 조별리그 3경기 모두 출전했으나 북한전에서 박두익에게 일격을 당하며 충격적으로 탈락했다.[4] UEFA 유로 1968에서는 첫 경기였던 소련전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부가 나지 않았고 운 좋게 코인 토스에서 승리하며 결승전에 진출했다.[5] 결승전에서는 재경기에 출전해[6] 2-0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했고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유로 대회에서 우승했다. 마촐라는 이 대회에서 베스트 XI에 이름을 올렸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마촐라는 주전 자리를 놓고 잔니 리베라와 경쟁해야 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유럽을 휩쓸던 마촐라가 국가대표팀에서 좀 더 우위에 있었으나 1969년 리베라가 AC 밀란을 유럽 최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하자 이탈리아 대표팀의 페루초 발카레지 감독은 둘을 활용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1970년 대회의 큰 특징은 선수 교체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었고, 발카레지 감독은 이를 이용했다. 이에 등장한 것이 '스타페타' 전술.[7] 이 전술에 의해 월드컵에서 마촐라는 전반전을, 리베라는 후반전과 연장전 돌입 시 연장전을 책임졌다.

마촐라나 리베라나 45분은 그들이 무언가를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고 이 전술은 마촐라가 결승전 막판까지 뛰며 붕괴되었다. 팀은 결승전에서 브라질에게 1-4로 패배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도 마촐라와 리베라는 시간을 양분했으나 골득실에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마촐라는 이 대회가 끝나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전방 공격을 포괄적으로 담당했으며 최전방 공격수, 인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도 뛰면서 득점와 플레이메이킹을 담당했다. 테크니션으로, 시야, 패싱, 플레이메이킹, 득점, 드리블에 모두 능했다.


4. 은퇴 후[편집]


  • 은퇴 이후로는 친정팀인 인테르를 비롯해 제노아, 토리노 등 여러 팀의 단장직에 있었다. 해설자로도 활동 중이다. 2002년엔 영국인 감독 다니엘 고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 당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연해 1966년 월드컵 당시를 회고했다.

  • 2013년엔 동생 페루치오가 사망했다.


  • 2022/23 시즌 초반 인테르의 부진에 대해 쓴소리를 날렸으며, 이것 때문에 시모네 인자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듯하다. 대놓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루치아노 스팔레티를 도로 데려오고 싶다고 했을 정도.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1]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이나 당시에 카테나치오라는 전술 아래에서 어찌보면 프리롤 역할을 맡았었다. 정통적인 10번 롤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최전방 포워드, 우측면 윙어 등 다양한 위치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쳤었다.[2] 이때 상대팀 레알 마드리드의 푸스카스는 경기가 끝난 후 마촐라에게 다가와 "난 자네 부친과 대결해본적이 있지. 자네는 부친을 자랑스럽게 하는군. 여기 내 셔츠일세"라고 극찬하며 유니폼 교환을 신청했다.[3] 출장, 득점 모두 인테르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4]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이 귀환했을때 팬들이 그들에게 썩은 토마토를 던졌는데, 발이 빠르기로 유명했던 마촐라는 단 한개도 맞지않고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5] 이 당시에는 승부차기 제도가 없었다.[6]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1-1로 승부가 나지 않자 이틀 뒤 재경기를 치뤘다.[7] 이탈리아어로 교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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