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릴 아이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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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국장.svg 러시아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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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0753060114025527238.jpg
파일:クリルアイヌの若者たち.jpg
파일:1054.jpg
  • 영어: Kuril Ainu (쿠릴 아이누)
  • 일본어: 千島アイヌ (치시마 아이누)
  • 아이누어: Ruru-tom-un-kuru (루루-톰-운-쿠루)

1. 개요
2. 역사
2.1. 북쿠릴
2.2. 남쿠릴
3. 문화
4. 언어
5. 기타



1. 개요[편집]


쿠릴 아이누는 아이누족의 한 분파로 보통 쿠릴 열도 우루프 섬 이북 지역의 아이누를 가리킬 때 쓴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쿠릴 남쪽에 위치한 쿠나시르와 이투루프에 사는 아이누는 홋카이도 아이누와 동계이지만 해당 문서에서는 편의를 위해 남쿠릴 열도의 아이누 역시 포괄한다.

1899년 일본의 민속학자 도리이 류조의 조사에 따르면 쿠릴 아이누들은 자신들을 서쪽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루톤 몬 구루(Ruton-mon-guru)라고 지칭했으며, 홋카이도 아이누를 남쪽 사람이라는 의미인 야무 구루(Yamu-guru) 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쿠릴 아이누들은 자신들을 루루토문쿠루(ruru-tom-un-kuru/바닷사람)로, 홋카이도 아이누를 야운쿠루(yaun-kuru/본토인)라고 불렀다.


2. 역사[편집]


이들은 홋카이도와 사할린 아이누에 비하면 형성된 시기가 늦은 편으로 15세기 이후에야 형성된 집단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아이누 도래 이전에 살던 오호츠크계 말갈인을 정복 및 동화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쿠릴 아이누들이 산출하는 해달 가죽은 다른 지역에선 얻을 수가 없는 희귀품이었다 하며 옛부터 교역을 통해 일본으로 수입되고 있었다.[1]

이들의 존재는 1695년 러시아의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를 기점으로 남하한 원정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2] 1700년카자크 부대가 쿠릴 열도를 처음 남하해 지금의 홋카이도 부근까지 도달했고, 1711년~1713년 사이에 일본인과 동행하여 쿠릴 열도를 탐험하면서 "쿠릴 열도 지도"를 제작했는데 이 지도 안에는 이투루프, 우루프, 쿠나시르, 홋카이도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1713년에 북쿠릴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1725년 카자크 부대의 코즈이레프스키는 중앙 정부에 보내는 캄차카 및 쿠릴 열도 조사서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투루프와 우루프, 쿠나시르에는 아이누가 살고 있으며, 이투루프와 우루프 지역의 아이누들은 자유민들이며, 쿠나시르의 아이누들은 마쓰마에와 교역하고 있지만, 마쓰마에의 신민인지는 알 수가 없다.[3]

- 1725년 카자크 부대의 코즈이레프스키

그 후 러시아 탐험대[4]1737년 6월부터 3차에 걸쳐서 쿠릴 열도를 조사[5]했는데, 이때 중앙에다가 이렇게 보고를 보내었다.

에퐁(일본)의 지배 하에 있는 곳은 마쓰마에도뿐이며, 그 이외의 섬들은 지배당하지 않았다.

만약 명령만 내리면 (중략) 북위 43도부터 46도까지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을 여제의 신하로 삼을 수 있고[6]

, 46도부터 마지막 섬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당장이라도 편입할 수 있다.

- 당시 러시아 탐험대의 보고에서

1760년경 러시아는 사할린연해주, 우루프, 이투루프, 하보마이, 앗케시, 소야, 루모이 주변까지 접근해 아이누족들을 살해하면서 식민지를 선언하였고[7], 1765년에는 우루프 섬을 완전히 정복했다.[8]

1771년[9] 우루프 섬에서 러시아인들과 이투루프 섬에서 온 아이누들이 충돌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인들의 쿠릴 열도 이주는 한층 강화되고, 쿠릴 아이누들에게 러시아 국적이 강제되었으며, 자유로운 모피 채취를 방해당하면서 야삭을 부과해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1772년 12월 이르쿠츠크시베리아 총독은 캄차카 사령관에게 앗케시에서 홋카이도에 들어가 일본인과 교역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캄차카 사령관은 쿠나시르의 아이누족들과 관계를 맺고,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를 하보마이, 시코탄, 앗케시에 보내어 일본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일본 내 사정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1776년 이르쿠츠크의 상인 샤바린이 우루프 섬의 아이누들과 화해했고, 이투루프와 쿠나시르에 들어가 아이누들에게 야삭을 부과했다. 이때 시베리아 총독은 중앙정부에다 이르쿠츠크의 상인이 1,500명의 아이누족들을 러시아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고했다. 1779년 4월 예카테리나 2세는 쿠릴 아이누족들을 야삭에서 해방시키고, 자유권을 부여하도록 명하였다.[10]

러시아 제국이 해당 지역에 대해 본격적으로 영토화 의지를 굳힌 건 1785년이다. 이때 러시아 제실 과학 아카데미는 "역사 지리 캘린더"를 발행해 "쿠릴 열도는 쿠릴의 로바트카라 불리는 캄차츠카 에서 일렬로 남서로 나열된 일본 마쓰마에도까지의 태평양 섬을 말한다"란 내용을 기재해 우루프, 이투루프, 쿠나시르, 시코탄, 하보마이를 러시아령으로 지정했다.

1787년 러시아 제국은 상업참의회 장관인 보론쵸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러시아 해군을 담당하고 있는 무로프츠키 해군대좌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지령했다.
  • 일본에서 캄차츠키의 로바트카에 이르는 모든 크고 작은 쿠릴 열도를 주항하여 지도에 기술할 것.
  • 마쓰마에에서 로바트카에 이르는 모든 섬을 러시아의 소령(所領)으로 편입할 것.
  • 최남단의 쿠릴 열도와 마쓰마에도(홋카이도)의 정확한 위치를 규정하고 그 상태를 기술할 것.
  • 아무르 강 하구에 있는 사할린을 주항하여 그 연안, 하구, 을 기술할 것.

러시아의 이러한 태도 변화의 원인은 무주지 탐험을 위해 북태평양으로 진출한 대영 제국의 쿡 함장에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항해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쿠릴 아이누들은 러일 양국의 영유권 분쟁에 적극적인 대항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양국에 분리 편입되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남하에 자극받은 일본의 에조 경영이 강화되고 일본과 러시아 간의 쿠릴 방면 국경 분쟁이 있었으나 1855년 시모다 조약과 뒤이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쿠릴 지역 아이누들은 3년 이내로 일본과 러시아 중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했고 대부분은 일본 국적을 택하였다.

1884년에 일본은 국방을 이유로 쿠릴 북부 아이누 97명을 시코탄 섬으로 이주시켜 농업목축에 종사시켰으나 익숙치 않은 생활 및 풍토로 인하여 인구는 격감했다. 이후 1898년에 이들을 군함에 태우고 북쪽 쿠릴 지역으로 재이주시켜 전통 어업에 종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1945년에 소련이 쿠릴 열도를 점령하면서 일본 국적의 아이누들은 일본 본토로 강제 이주당했고, 이로써 쿠릴 아이누 문화는 러시아령이 된 쿠릴 열도에서 완전히 끊겼으며 남하한 이들은 동계인 홋카이도 아이누의 정체성에 동화되었다.

요코하마국립대학 명예 교수이자 아이누어 연구자인 무라사키 쿄코(村崎 恭子, 1937 ~)가 과거 1962년에 홋카이도에 생존 중이던 4명[11]을 찾아내 조사를 실시하였지만, 부부 관계인 2명은 완전히 일본에 동화된지라 쿠릴 아이누 방언을 구사하지 못하였으며, 나머지 둘은 홋카이도 이주 이후, 남편에 의한 학대 등으로 힘든 생활을 보낸 탓에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현재 쿠릴 아이누의 정체성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2.1. 북쿠릴[편집]


주요 인구는 슘슈 섬에 살고 있었으며, 그 외에는 파라무시르 섬 등에 살고 있었다. 1860년 당시 인구는 221명. 이들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체결 전까지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그 영향으로 주민들은 러시아어가 유창하였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믿고 있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일본이 북쿠릴 지역을 차지한 이후 약 100명 정도가 러시아인 고용주와 함께 캄차카 반도로 도망갔으며 이후 캄차달인에 동화되었다.

남쿠릴 아이누와는 다르게 러시아의 영향권에 오래 속했던 연유로 일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였고, 이후 1941년에 소멸했다.


2.2. 남쿠릴[편집]


상술했듯 문화적으로는 홋카이도 아이누와 동류 집단이다.

남쿠릴 지역[12]에 속한 이들은 18세기 동안 인구가 거의 2,000명 정도였으나, 1884년에 이르러 500명으로 감소했다.

그나마 1941년에 남아있던 50명의 아이누들은 일본군에 의해 홋카이도로 피신하였다.

마지막 남은 순혈 남쿠릴 아이누족인 스야마 니사쿠는 1956년에 사망했고, 마지막 혼혈이었던 타나카 기누마저 1973년에 사망했다.


3. 문화[편집]


파일:1057.jpg
파일:1056.jpg
쿠릴 아이누의 수혈주거(竪穴住居)[13]

쿠릴 아이누 문화가 홋카이도 아이누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수혈 주거생활이다. 수혈 주거를 만들 땐 먼저 직사각형으로 구멍으로 판 뒤,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둘러서 가파른 지붕을 만들었다. 그 다음, 굴뚝 구멍을 남겨두고 건초이탄 등으로 막아서 창문과 입구를 정돈해 완성했다. 하지만 유리창 대신 해수방광을 펼친 것을 창문에다 붙였기 때문에 실내는 어두운 편이었다.

러시아가 쿠릴 열도로 진출하면서부터 주거생활에 사우나가 도입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사우나인 바냐를 흉내낸 것으로 달군 돌에다 물을 뿌려 증기를 냈다.

기록에 따르면 쿠릴 아이누는 거위의 털(rap-ur), 개가죽(seta-ur), 풀을 엮은 것(kera) 등의 재료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또한 우시시르 섬의 아이누들은 기러기 털에 물범가죽으로 가장한 통소매 옷가지를 입고 다녔다.

신발은 방수성이 높은 바다사자표범 가죽을 이용해 만든 장화를 신고 다녔으며, 겨울철에는 버드나무로 만든 동철(冬鐵)[14]을 달고 다녔다. 18세기 이후, 러시아의 영향으로 전통복장 대신 러시아제 모자셔츠를 입고 다녔다.

홋카이도-사할린 아이누에게는 없는 고유의 문화로 토기 제작이 19세기 전반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문화는 역시 러시아의 진출로 점차 사라졌다. 당연히 쿠릴 아이누 문화의 명맥이 끊긴 현재에는 없어졌다.

쿠릴 아이누의 물질 문화로는 텐키(テンキ)라 불리는 바구니가 있으며 긴키 풀을 재료로 코일링 기법으로 만든 바구니로 이는 미국 북서 해안에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통된 문화이다. 또한 목제 가면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려져있는데, 이 또한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 캄차카 지방의 민족들에게 영향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4. 언어[편집]


언어는 아이누어 방언에 속하는 쿠릴 아이누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당시 홋카이도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아이누어 연구자 무라사키 쿄코에 의해 1962년에 소멸이 확인됐다. 또한 홋카이도-사할린 아이누어에 비하면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5. 기타[편집]


아이누 신화에 나오는 크로복클이 이들이란 가설이 있다.[15]

근거로는
  1. 아이누와 크로복클은 커뮤니케이션이 부족. = 홋카이도쿠릴 열도 지역에 사는 각 아이누들은 양자가 침묵 교역을 했다고 한다.
  2. 소인들은 토기 제작을 위해 흙을 가져감. = 쿠릴 아이누는 토기를 만들었다.
  3. 소인들이 사는 곳은 독수리가 많다. = 쿠릴 열도엔 독수리가 산다.
  4. 소인들은 배를 타고 온다. = 쿠릴 아이누들은 교역을 위해 배를 타고 주변 지역을 이동했다.

이러한 특징들을 볼때 크로복클 = 쿠릴 아이누란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 더욱이 홋카이도와 사할린 지역에 내려져 오던 크로복클 전설은 쿠릴 열도 지역에서만 알려져 있지 않았다.[16]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1 03:15:25에 나무위키 쿠릴 아이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들은 17세기까지도 일본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도 시대 중기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의 존재는 중계 무역을 담당하던 홋카이도 아이누들을 통해서 전해졌다.[2] 같은 시기에 캄차카 서해안 지역에서 표류한 일본인을 발견했는데, 이때 처음 일본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3] 이 조사에 의거하여 1726년에 15도를 표시한 "캄차카 반도 해도"가 작성되었다. 여기서 15도란 시무시르 섬으로 북변 4도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섬들을 의미한다.[4] 이중에 덴마크인 1명(시판베르크)과 영국인 1명(올튼)도 포함되어 있었다.[5] 당시 러시아측은 아이누 모시르를 무주지로 간주하였고, 영유권 흭득의 의사를 가지고 탐험대를 파견한 것이다.[6] 쿠나시르, 이투루프, 우루프, 시코탄, 하보마이 및 홋카이도 북부를 의미하며 이중에 우루프와 홋카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들이 현재 쿠릴 열도 분쟁의 핵심이다. 홋카이도 북부가 포함된 이유는 오류일 수도 있지만 홋카이도 내 일본의 영향력은 알고 있었음에도 부동항에 목말라 있던 러시아가 마츠마에의 영지와 거리가 좀 멀어 비교적 일본의 영향력이 느슨한 홋카이도 북부까지도 욕심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홋카이도에 대한 러시아의 욕심은 훗날 2차 대전 당시 스탈린이 홋카이도를 반분한 요구까지 이어진다.[7] 다만 식민지 선언은 러시아 중앙 정부의 뜻이 아닌 카자크인들이 단독으로 선언한 거라 정식적인 영토 편입 조치라 보긴 힘들다. 사실 이 무렵에는 이미 홋카이도의 전 영역이 사실상 일본의 영역권에 복속된 상태였다.[8] 하지만 아이누족들은 이를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때 사룬구루 지역에서 1,000명의 아이누들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러시아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1766~1767년 사이에 카자크들이 우루프, 이투루프, 하보마이, 홋카이도의 앗케시까지 들어가 다른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했던 것처럼 야삭(ясак; 모피, 가축 등의 현물세)을 부과하고, 강제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1769년 9월에 카자크가 철수하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아이누족들은 그 틈을 타 러시아인들을 살해하는 등 반감을 보이기도 했다.[9] 또는 1772년.[10] 즉 다시 말하자면 시베리아의 총독은 시코탄을 포함한 우루프, 이투루프, 쿠나시르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 조치한 것으로 인식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영토 복속과 아이누의 편입보다 일본과의 교역에 더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다소 인식에 차이가 있었다.[11] 2명은 부부, 나머지 둘은 고령의 여성.[12] 쿠나시르, 이투루프, 우루프.[13] 지면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평면을 만들어 그 위에 천막이나 지붕을 만든 주거를 의미한다.[14] 겨울에 얼음 위를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아니하도록 나막신의 굽이나 말의 편자에 박는 .[15] 예시:『勢州船北海漂着記』[16] 다만 쿠릴 아이누에 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고 위 주장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속하기 때문에 확정적인 정설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