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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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발단
2.2. 소련사할린 탈환
2.3. 소련 통치 하의 삶
3.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
3.1. 사할린 한인의 명칭
4. 귀향
5. 거주 지역
6. 사할린 한인 학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어
사할린 한인
러시아어
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цы
영어
Sakhalin Koreans
중국어
庫頁島朝鮮族

과거 일본령 사할린 섬 남부일제에 의해 노무자로 징발당해 끌려간 한국인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동포, 사할린 조선인, 사할린 한국인이라고도 한다.


2. 역사[편집]



2.1. 발단[편집]


19세기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 섬 북부로 넘어간 경우가 있었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전리품으로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차지하고 여기에 가라후토청을 세우자 일본 거주 조선인 중 일부가 사할린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원은 소수였고 더군다나 북사할린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고려인들과 함께 1930년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후 1930년대 말부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제의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얘기가 시작된다.

일제는 당시 관동군에 자국민인 일본인은 물론이고 조선인까지 징집해 닥치는 대로 끌어넣자 노동력 부족이 극심해졌다. 사할린 지역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가 직접 한국인을 대거 사할린 섬으로 강제 징발하면서 본격적인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들을 사할린의 탄광, 군수공장 등에서 혹사시켰다.

이러한 한인 노무자 강제 징발은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전쟁이 격화되면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징발 형태가 3단계 진화했다.

  • 일반적인 모집(1939년 9월 ~ 1942년 2월)
  • 관에 의한 조직적 알선(1942년 2월 ~ 1944년 9월)
  • 강제징용. 소위 조선인 사냥(1944년 9월 ~ 광복까지)

한편 사할린에서 물자 운반이 힘들자 조선인 노무자 1만명을 다시 일본 본토로 또 끌고 가서 혹사시키는 이중징용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는데 특히 1944년 8월 ~ 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한인 3200명의 생사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 # 게다가 사할린으로 끌려갔던 피해자들과 후손들은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


2.2. 소련사할린 탈환[편집]


1945년 8월 9일, 소련군8월 폭풍 작전이 시작되고 일본군은 엄청난 기세로 남하하는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며 만주에서 물러났다. 이런 상태의 관동군이니 사할린의 미래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다시 소련에 반환함으로서 일본의 사할린 통치가 종료되고 사할린은 완전히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1945년 9월 2일 시점에서 당시 가라후토, 사할린 남부의 인구는 39만 1천 명이었는데 이 중 일본인이 35만 8500명, 한인이 2만 3500명, 아이누, 니브히, 윌타 등 원주민이 대략 1천 명이었다.

1946년, 소련과 미국이 이들 일본인들을 다시 일본으로 추방하기로 합의했다.[1] 이에 따라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정작 조선인은 조선이 일본에서 독립했으니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이들을 방치했다. 광복 이후의 혼란으로 대한민국은 이들을 송환할 여력이 없었을 뿐더러 미군 신탁통치 하의 대한민국은 송환 대상을 광복 이후 일본 국민만으로 한정하는데 합의해 버렸다. 그리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공산권과 교류가 수십년간 거의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송환 협상은 없었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살아오던 1~2세대들 중 일부는 소련이 탈환하고 나서 통용화폐 단위가 소련 루블로 바뀌었음에도 통화명칭을 말할 때는 ~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2.3. 소련 통치 하의 삶[편집]


냉전으로 인해 대한민국과 소련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은 주변국들의 무관심 속에서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북한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으나 한반도 남부에 연고가 있는 대부분의 사할린 한인들은 북한 송환을 거부하였다. 고려인들과 달리 이들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 출신이다. 일제는 한반도 남부는 지리적으로 자신들과 가깝고 물자와 인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각종 물적 / 인적 자원의 수탈기지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국인들 중에는 제주도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는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으로 귀환을 바라던 1세대 대부분은 계속 무국적자로 남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소련 치하 사할린 한인의 인구는 3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섬 인구의 5%에 해당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사할린한인역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3.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편집]


고려인과는 다르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으로 이주하게 된 한반도 남부 출신 사할린 한인들과 달리 대륙의 한인들은 러시아 제국극동 지역을 식민화하기 전부터도 한반도에서 넘어가 그곳에 살았거나 1860년대 이후 아예 러시아 제국에 자발적으로 이주한데다가 출신도 주로 한반도 북부이기 때문이다.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할린 한인의 2세 이후 후손들은 러시아어가 모어이고 한국어는 많이 서투르다.


3.1. 사할린 한인의 명칭[편집]


사할린 한인에 대해서는 '고려인'이나 '고려사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할린 한인들의 모든 기관(예: 사할린주한인협회,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사할린한인추모관 등) 및 대한민국 공공기관(예: 국회, 통일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주러시아 대한민국 대사관, 주 블라디보스톡 대한민국 총영사관, 사할린한국한인회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할린 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려인'이라는 명칭은 전 소련 고려인협회에서 만들어냈지만 이 협회 거의 모든 회원들이 연해주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이었고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구별을 하기 위해, 그리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고려'이란 명칭을 택했다고 한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던 당시 소련 정부의 입장상 제3의 명칭을 만들어내야 했던 배경과 '고려인협회'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지지한 부분도 있다. 북한에서도 '소련 고려인' 명칭을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과 연관을 맺고 있다. 독립국가연합(CIS)에서는 지금도 고려사람이라고 할 때 사할린 한인을 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한반도 북부지방 출신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사할린 한인들은 대부분 한반도 남부지방 출신이고 러시아에 들어와 살게 된 원인도 고려인보다 더 비자발적이었기 때문에 모국으로 북한이 아니라 남한을 말하고 있다. 원래 스스로 사할린 조선인이라고 부르다가 남한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사할린 한인'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할린에서 출판되는 '새고려신문'이 있긴 하지만 이 신문에서조차 '사할린한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소위 말하는 '사할린 고려인'은 1937년 당시 하바롭스크 시 기준 북쪽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면한 조선인들과 또 강제이주 이후 다시 극동지역으로 돌아온 고려인들 중 사할린에 정착한 이들을 칭하고 있는 명칭이다. 즉 다시 말하면 사할린 한인은 일제 강제동원이나 다른 목적으로 1945년 해방 이전 남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이고 사할린 고려인은 1945년 해방 이후 소련 다른 지역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사할린 한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소련이 북한과 소련의 조선인 정치부원들을 남사할린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 들어온 정치부원 중에는 나중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할린 한인들의 도움으로 소련 국적을 취득하면서 사할린 한인들처럼 생활했다. 그들도 역시 사할린 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4. 귀향[편집]



노태우정부 이전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할린 한인들 스스로가 일본인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사비를 털어 구원한 것이다.[2] 일제강점기에 남사할린 지역의 조선인들 가운데 일본인 남녀와 혼인한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대의 후반기에 소련 해군이 해상을 봉쇄한 사할린 섬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양국간 협의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귀국하는 해운항로가 열렸지만, 모스크바 연방정부는 조선인 가족들의 출국을 금지했다. 그런데 1956년 10월 19일에 일소공동성명을 발표한 덕택에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다! 남사할린 지역에서 조선인 남녀와 혼인한 일본인 남녀는 조선인 배우자와 자녀를 동반하고 조선인 배우자의 운송 비용을 사비로 부담해서 일본으로 귀환할 수가 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일본으로 돌아간 한인들이 전재산을 탈탈 털어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운동을 벌였으며, 소수의 한인들이 일본을 경유하여 일시 귀국하거나 영주 귀국하게 된 것이다. 사할린 한인의 영주 귀국운동을 펼친 초기의 지도자들(박노학 씨이희팔 씨심계섭 씨)이 결성한 사할린귀환재일한인회일본 국회에 오랫동안 로비하면서 우편교환(한국↔일본↔소련)을 최대한으로 활용했으니, 사할린과 일본에서 각각 엄청난 고생을 겪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을 경유해 귀국하는 절차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어렵게나마 순차로 실현된 것이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양국간의 친선우호와 화평을 도모하자, 사할린 한인의 모국 방문이 추진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함께 러시아 연방대한민국일본시민단체들의 집요한 요구에 굴복하면서 사할린 한인들 가운데 1세대(1945년 이전에 태어난 한인들)를 남한으로 송환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사할린 한인들을 대규모로 송환하기 시작했고, 2010년대까지 3500명이 귀국했는데, 사할린 한인은 비자발적으로 끌려갔고 남한 지역에 고향을 둔 경우가 많았기에 귀환을 원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을 남한으로 송환하는 사업은 대한적십자사일본적십자사합작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이렇게 귀국한 그들의 의식주한국인 청장년 저소득층 주민들과 비슷할 정도로 여전히 형편없는 수준이니, 보다 못한 몇몇 광역자치단체들의 몇몇 지방의회의원들이 발벗고 나서서 특별예산을 마련하여 재정착한 사할린 한인들의 의식주를 돌보는 현실이다.

2019년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사할린 섬으로 끌려갔던 한인 희생자 14명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17대 국회부터 표류 중이던 사할린동포 특별법이 2020년에 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결되자 본회의 통과가 어느 때보다 희망적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4월 30일에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후, 박순옥 러시아 사할린한인협회장은 국회에서 통과된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에 역사기념관과 양로원 건립은 물론 사할린 잔류 1세와 차세대를 위한 실질적인 지원과 혜택을 주는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 담겼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2020년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소련과 수교 이전에 비밀리에 귀향 추진이 있었다.# 또 러시아가 실종된 25명의 사할린 한인들을 찾는 중이라고 한다.#

9월 26일에 지구촌 동포연대는 사할린 동포에게 보낼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2021' 제작을 위한 모금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11월 11일에 박순옥 사할린한인협회 회장이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서 동포의 정의를 확대 해석해 달라고 호소했다.#

2021년 1월 1일부터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됐다.#

한국 국적의 유가족으로 한정한 신청자 자격을 현지 국적 후손까지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2021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할린 한국인의 수가 총 35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대한민국으로 영주 귀국할 사할린 동포가 350명으로 확정됐다.#

2022년 12월 26일, 사할린 한인협회 회장에 오진하 고문이 선출됐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비행편이 끊겨져 귀향길이 막혔다.#


5. 거주 지역[편집]


러시아 사할린 주에 3만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 중 50%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산다. 러시아 외에 대한민국에 3500여 명이 귀환했다. 주로 경기도 안양시에 많이 정착했으며, 안양시에서 가끔 러시아어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이들 때문이다. 안양시뿐만 아니라 안산시에도 많이 정착했다. 주로 한대앞역 앞 고향마을에서 거주한다. 이 외 부산광역시정관신도시에도 정착했다.

한편 과거 냉전 시대에 남한으로 갈 수 없던 시절에 북한행을 택한 사람도 있어서 북한에도 1천여 명이 산다고 한다.


6. 사할린 한인 학살[편집]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일본의 학살은 미즈호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한인 27명을 학살한 사건 외에는 그동안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2008년에 러시아 연방보안국 간부가 조선인 학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출간하면서 일본의 사할린 한인 학살이 추가로 알려졌다. # 2012년에는 일본이 사할린 한인들을 대량학살했을 것이라는 소련 정부 보고서 초안이 공개되었다. # 심지어 6개월 갓난아이까지 학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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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일본은 무조건 항복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까지 독자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사실상 국방과 외교를 운용할 수 없고 오로지 승전국들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2] 반면에 이스라엘 정부와 서독 연방정부는 1948년부터 1993년까지 필사적으로 협상하면서 소비에트 연방폴란드 인민공화국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고생하는 동유럽계 유대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을 수십년간의 누적합계로 각각 100만 명만큼 집요하게 출국시켜 본국으로 모셔왔다. 서독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동유럽 나라들과 단교했고, 이스라엘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공산권 나라들과 단교했다. 이렇게 돌아간 형편에서 양국은 동유럽 공산권 나라들과 끈질기게 협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