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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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
날짜
우주력 668년, 제국력 359년 표준력 5월
장소
자유행성동맹
교전 당사자
파일:Goldenbaum-Dynasty.png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파일:Goldenbaum-Dynasty.png
파일:560px-Flag_of_the_Free_Planets_Alliance.svg.png 자유행성동맹 파일:560px-Flag_of_the_Free_Planets_Alliance.svg.png
지휘관
코르넬리우스 1세
원수 58명
불명
병력
은하제국군
불명[1]
자유행성동맹군
불명
피해 규모
함선 불명, 장병 불명
원수 35명 전사
불명
결과
자유행성동맹군의 승리
1. 개요
2. 배경
2.1. 원정 준비
2.2. 연전연승의 원정군
2.3. 내부로부터 날아든 비수
3. 결말
4. 의문점



1. 개요[편집]


  • 등장 작품
    • 은하영웅전설 외전 2권 <별을 부수는 자> 7장
  • 시기 : 우주력 668년, 제국력 359년 표준력 5월

은하영웅전설의 사건. 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 역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있었던 황제친정이며 자유행성동맹의 정복 성공 직전까지 간 전쟁이다.


2. 배경[편집]


우주력 640년, 제국력 331년 은하제국자유행성동맹이 처음으로 충돌한 다곤 성역 회전은 은하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원정을 주도한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패군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으며, 원정군 사령관이자 유력한 제위계승권자였던 헤르베르트 대공은 제위를 물려받기는 커녕 별궁에 유폐당했다. 유력한 후계자가 사라지자 제국은 '검붉은 6년'이라고 불리는 대혼란기에 접어들었지만 '청안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23대 황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는 20여년에 달하는 재위기간 동안 오스발트 폰 뮌처 같은 명신들을 중용했고 선대의 부정과 비리를 일소했으며, 열악유전자 배제법을 사문화하고 민생안정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자유행성동맹 원정을 계획했지만 '거리의 폭거'를 근거로 원정을 반대한 뮌처의 간언을 받아들여 원정계획을 파기하고 재위기간 동안 한 번도 대 동맹 원정에 나선 적이 없었다.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를 이어 은하제국 24대 황제로 즉위한 자는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육촌동생이자 양자였던 코르넬리우스였다.[2] 코르넬리우스 1세는 선제의 정책을 이어받고, 선제를 보좌한 중신들을 중용하여 나름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코르넬리우스 1세의 마음 속에는 골덴바움 왕조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선제를 뛰어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동맹을 정복하여 다곤 성역 회전의 패배를 씻고 전 인류를 통일하기 위해 동맹 원정을 준비했다.


2.1. 원정 준비[편집]


코르넬리우스 1세는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곤 성역 회전의 패인을 전략에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철저한 준비를 갖추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거라고 판단했다.

원정 직전, 코르넬리우스 1세는 야량을 보이기 위해 사자를 동맹에 세 차례 파견하여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맹 정부는 황제의 복종 요구를 거절했고, 사자에게 냉소를 퍼부어 긍지에 상처를 입혔다. 원작에서는 이에 대해 대등한 '외교'가 아닌 '복종'을 요구한 황제에게 죄가 있는지, 황제의 사자를 비웃은 동맹의 위정자에게 죄가 있는지라고 서술하고 있다.

동맹이 복종을 거부하자 코르넬리우스 1세는 우주력 668년, 제국력 359년 5월 다곤 성역 회전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출병을 명령했다. 그것도 황제 자신이 총지휘관이 되는 '친정'이었고, 동원 병력도 다곤 성역 회전 당시 제국이 동원한 병력을 웃돌았다. 이때 코르넬리우스 나이 28세였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서 화제가 된 것은 바로 황제를 따라나선 원수의 숫자였다. 코르넬리우스 1세는 기이하게도 원수 칭호를 남발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는 소함대 지휘관도 제국원수에 서임하고 제국원수장을 수여했으며, 원정에도 무려 58명에 달하는 원수가 따라나섰다. 그래서 코르넬리우스 1세에게는 '원수양산제'라는 별명이 붙었고, '황제는 원수 2개 소대를 이끌었다'라고 놀림받았다. 웃긴 것은 원수 칭호를 남발했으면서도 선제 때부터 중용받은 뮌처에게는 원수 칭호를 내리지 않고 상급대장에 두었다.[3]

뮌처는 선제 때와 마찬가지로 원정 중지를 건의했지만 코르넬리우스 1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뮌처는 직무를 사퇴하고 궁정에서 물러나려고 했고, 코르넬리우스 1세는 뮌처를 제국원수에 서임하려고 했지만 뮌처는 이를 고사했다. 원작에서는 이에 대해 "늙은 어깨에 무형의 명예만을 짊어진 채 정계에서 퇴장했다"고 평하고 있다.


2.2. 연전연승의 원정군[편집]


다곤에서의 참패를 교훈으로 삼아 철저하게 준비된 은하제국군과는 반대로 자유행성동맹군은 다곤에서의 대승에 도취되어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고 링 파오유수프 토패롤과 같은 명장들도 존재하지 않았다.[4]

이를 보아 단 30여년만에 동맹 정치인이나 장성들의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곤 성역 회전은 분명 자유행성동맹군의 승리지만 링 파오와 유수프 토패롤의 분석에서 보듯 이건 전적으로 지휘관이 압도적으로 무능한 멍청이여서 가능했지 자유행성동맹군이 특별히 대단해서 가능한게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제국과 동맹의 분위기를 보면 극명한데 제국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고생해도 설마 지겠냐는 반응이었고 반대로 동맹은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지며 동맹 정치인들은 과할 정도로 링 파오나 유수프 토패롤에게 기합을 주고 있었다. 실제로도 제국은 은하연방의 유산을 이어받고 그에 더하여 수백년간 국력과 군사력을 신장시킨 반면 동맹은 미개척지에서 시작해 이제 겨우 이제르론 회랑에 발을 들인 상태라서 국력과 군사력 차이가 너무 났다.

오만해져있던 동맹군은 자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은하제국군을 상대로 두 차례나 깨졌고 20명의 제국원수를 전사시키긴 했으나 몰려드는 제국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자유행성동맹은 다곤 성역에서 승리을 거둔지 불과 30여년도 안돼 다시금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2.3. 내부로부터 날아든 비수[편집]


코르넬리우스 1세는 불과 몇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사회의 재통합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은하제국 수도성 오딘의 황궁에서 궁정 쿠데타가 발생했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장기간 오딘을 비우자 물 밑에서 때를 기다리던 반역자들이 행동을 벌인 것이다.[5]

황제는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반역자들이 제국을 장악할 우려가 있었고 그렇게 되면 황제가 공들여 준비한 보급로가 차단되어 원정에 차질이 빚어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반역자들과 자유행성동맹에게 협공을 당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 결국 황제 코르넬리우스 1세는 울분을 억누르고 원정 함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으며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자유행성동맹은 남은 전력을 모두 결집시켜 퇴각하는 제국군의 후방을 타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코르넬리우스 1세는 돌아오는 길에서 15명의 원수를 잃었지만 오딘으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하고 반역자들을 모두 처단할 수 있었다.


3. 결말[편집]


원정군이 입은 피해, 원정 과정에서 소모된 물자가 막대했던 탓에 제국은 더 이상 재원정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결국 코르넬리우스 1세는 동맹을 정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집념은 역대 황제에 대대로 계승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동맹을 정복하고자 했던 코르넬리우스 1세와 달리 후대의 황제는 그러지 못했으며, 이후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 이전까지 은하제국이 동맹 멸망을 목표로 대규모 공세에 나서는 일도 없었다.

동맹 정복에 실패한 코르넬리우스 1세는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취미였던 원수 남발을 중단하고 죽을 때까지 새로 원수 계급을 내리지 않았다.

반면 제국군의 침공을 막은 자유행성동맹에는 새로운 신년인사말이 추가되었는데, 바로 "올해야말로 승리와 평화를!"이다. 친정 다음해 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4. 의문점[편집]


은하제국 역사상 첫번째로 동맹을 정복할뻔한 사건으로서 작중에서는 그 영향력은 그리 크지는 않아도[6] 의미는 있는 사건이지만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 어느 루트로 침공했는가?
제국과 동맹 양측이 통할 수 있는 길은 이제르론 회랑페잔 회랑 두 개다. 이 중에서 다곤 성역 회전때는 다곤 성역이 이제르론 회랑에 있었고 애초 이제르론 회랑이 먼저 발견되었으니 이제르론 회랑에서 벌어진 전투이지만 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은 어느 회랑을 통해 침공되었는지 명확히 묘사되지 않았다. 앞서 나왔듯 이제르론 회랑을 통한 침공이 더 유력하기는 하지만...

  • 어떻게 지리 정보를 얻었는가?
이것은 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 부분에서 밝혀지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점인데 코르넬리우스 1세로부터 1세기 이상 지난 후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 당시 첫 전투인 제9차 이제르론 공방전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페잔 점령 작전 당시 제국군이 기를 쓰고 확보하려고 한게 동맹령 방면의 항로도가 있는 페잔 항로국 지도였다. 문제는 이 때문에 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은 도대체 어떻게 그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느냐는 건데 앞서 이 일의 약 30년 전에 있었던 다곤 성역 회전 당시 제국군이 처한 문제점은 동맹령은 커녕 이제르론 회랑에 대한 지리정보마저도 모자랐던 것이고 이것이 참패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 30여년이 지난 코르넬리우스 1세의 친정에서는 전체 동맹령 항로도를 손에 넣었는지 동맹을 멸망 직전으로 몰리게 할 정도의 대성과를 거뒀다.[7] 그런데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두려면 이제르론 회랑이든 페잔 회랑이든 한쪽의 지리정보는 기본이고 동맹령 전체의 항로도 정도는 얻어야 가능했다. 문제는 그런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고[8] 어떤 방식으로든 항로도를 확보했다면 왜 라인하르트가 집권한 시기까지 그 정보가 남아있지 않는지가 의문이다.

  • 그 외에
동맹은 두 차례에 걸쳐 패배를 하여 하이네센이 위협당하게 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 그도 그럴게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에서 동맹군이 그토록 열세에 몰린건 제국령 침공작전에서 병력이 싹 날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동맹군은 다곤 성역 회전에서의 대승 이후 제국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코르넬리우스 1세의 선대 황제인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시기에는 큰 전투가 없어서 제국령 침공작전 이후의 동맹만큼 군사력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일 리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어째서 고작 두 번의 패배로 그 정도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의문. 물론 나름 명군이라는 양반이 철저히 준비해서 처들어 갔는데 원수 20명이 죽었다는 건 이들이 양산형이라는 걸 감안해도 초거대 결전이 벌어진 결과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은 동맹군이 이제르론 회랑이든 페잔 회랑이든 회랑 입구에서 먼저 전투를 벌였다가 대차게 깨진 후 란테마리오 같은 전략적 요충지 겸 유인성계 다수가 모인 지역에서 2차전을 벌였다가 대차게 깨졌다면 말이 된다. 한편으로는 또다른 문제점도 있는데 당시 동맹군이 어느 정도 깨졌느냐다. 동맹이 멸망 위기에 몰릴 정도였다면 동맹은 분명 대차게 깨졌을턴데 정작 코르넬리우스 1세가 후퇴할 때는 반격을 날렸다고 서술되어있다. 게다가 깨져도 제국령 침공작전 수준이었다면 동맹이 군사적 약세가 한동안 이어지거나 심하게는 은하제국이 2차 공격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묘사도 없다. 그렇다고 곧장 회복될 정도라면 국가가 멸망할 정도로 털린게 이해가 안 되고... 일단 제국이 못 쳐들어간건 내란이 발생했었다는 걸로 납득은 해볼 수 있다. 유능하다고 강조되던 코르넬리우스 1세가 내란대비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적은데 급하게 철수했다는 건 상당한 규모일 가능성이 있고 간신히 후퇴한 원정군으로 내란을 제압하고 원정+내란 사후처리를 하고나니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다면 적극적인 공세는 힘들었을 것이다.

  • 다만 코르넬리우스 1세 시대의 자유행성동맹은 아직 은하제국과 동등한 규모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런 의문점 중 상당부분에 대해 나름 납득 가능한 대답이 가능하기는 하다. 작중 설정을 보더라도 제국은 일단 성립 시기 자체가 동맹보다 200년 이상 일찍인데다 제국 성립 이전 은하연방 시대로부터 축적되어 온 기반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거의 제로에서 건국한 동맹이 불과 250여년만에 제국과 동등한[9] 규모까지 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동맹이 폭발적으로 빠르게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그 빠른 성장속도에 비례하여 양국의 국력격차가 더 컸으리라 예상할 수 있는 것. 다곤 성역 회전 이후 동맹의 존재가 인식되면서 제국에서 탈출한 망명자들로 인해 동맹이 더욱 급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 역시, 제국의 공격을 한번 격퇴하여 존재감을 드러낸 동맹이 헤르베르트 같은 멍청이도 아니고 나름 명군축에 드는 황제가 총력을 기울여 친정했는데도 어찌저찌 위태롭게나마 그 공격을 격퇴하고 생존에 성공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안'으로써 존재감을 더욱 명확히 했다고 본다면 코르넬리우스의 친정 실패 자체가 제국에서 유출된 망명자들의 유입으로 인한 동맹의 성장세를 더욱 가속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따라서 코르넬리우스의 친정 당시 동맹의 국력이 제국에 비해 많이 열세였다고 본다면, 위 의문점 중 상당수에 대해 그럭저럭 개연성있는 대답이 가능하다. 동맹령의 지리정보(항로도)가 없으면 동맹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는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동맹이 제국과 동등한 세력으로 성장한 라인하르트 시대와는 달리 군사력 뿐 아니라 인구나 경제력 등 총체적 국력에서 제국이 큰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면 지리적 불리함을 위력으로 찍어눌러 밀고나가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압도적인 우위로 동맹을 밀어붙였다면서도 이십여명의 원수들이 전사했다는 것 역시 이 가능성의 뒷받침이 될 수 있는데, 제대로 된 지리정보가 없는 지역에서 진격해야 할 경우 소부대를 미리 내보내 위력정찰을 시행하면서 안전이 확보된 영역과 경로를 따라 본대를 전진시키는 것이 가장 안전한 대응방법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경우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여 길을 열어야 하는 선발대에는 그만큼 큰 위험이 집중된다. 즉 제국측은 지리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다수의 소규모 분함대를 선발대로 삼아 주변 지역의 정보를 확보하면서 느리지만 튼튼하게 밀고 들어가는 전략을 채택했고[10], 이에 맞서 동맹측은 지리적 이점을 무기삼아 선발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여 지휘관까지 전사시켰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본대의 압박에는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고 보면 나름 아귀가 맞아들어간다. 게다가 제국측이 느리지만 튼튼한 진격 전략을 채택했다면 그만큼 원정이 장기화되고, 출정 전에 나름 준비를 해 두었더라도 본토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져 결국 궁정 반란이 일어날 빈틈을 보이게 되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리고 이 전제에 따라 보면 <양산형이라도 원수인데 20여명이 전사할 정도라면 대규모 회전이 벌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거나 <동맹군이 그렇게 깨졌다면 어떻게 퇴각하는 제국군에게 반격을 했으며, 왜 장기간의 군사적 약세에 시달리지 않았느냐>와 같은 질문에도 나름 대답이 가능하다.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시대에는 별다른 군사적 충돌이 없어 동맹군이 온전한 상태였더라도 양국의 국력과 그로 인한 군사력 격차가 크다면 본편 시기의 대규모 회전보다 규모가 작은 교전에서 두 번 패배하는 것만으로 핀치에 몰릴 수 있는 것. 사실 라인하르트의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 당시에도 양 웬리의 유격전을 제외하면 대규모 회전은 제1차 란테마리오 성역 회전 한 번 뿐이었으니 이 쪽 역시 양 웬리의 실력이 모자랐다면 대충 2번의 회전으로 정리될 뻔 했던 것이다. 단지 본편 시간대의 동맹은 제국령 대침공 작전의 실패로 멀쩡하던 국력을 말아먹어서 열세에 빠진 데 비해 코르넬리우스 시기의 동맹은 애초부터 국력 열세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 뿐이다. 그리고 이후 퇴각하는 제국군에게 그 남은 전력으로나마 큰 타격을 입힌 것 역시,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서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코르넬리우스의 입장에서는 안전한 후퇴보다는 빠른 후퇴를 우선시 할 수 밖에 없기에 동맹측은 제국과 맞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으로 밀리던 전력으로라도 추격과 역습이 가능했을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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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곤 성역 회전 당시 제국군 원정함대보다 수가 많았다고 한다.[2]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많았거나 황위계승을 위해 나이차를 무시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막시밀리안 요제프에게는 헤르베르트와 리하르트라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사망년대를 보면 이 둘이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사촌으로서 계승하면 정통성이 취약했을 것이다.[3] 어차피 원수 칭호 남발 외엔 비교적 정상인이었던 황제였고 강직한 뮌처였던 만큼 뮌처가 남발하는 원수 계급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고 코르넬리우스 1세도 이 때문에 원수 칭호를 내리지 않았을 수 있다.[4] 이때 이제르론 회랑으로 침공했는지 페잔 회랑으로 침공했는지 애매하나, 이제르론 회랑으로 진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르론 회랑에서 희대의 패전 다곤 성역 회전이 있었기는 하지만, 페잔 회랑으로 침공했다고 보기엔 제국 내에서 페잔 회랑을 통한 침공의 사례로 든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5] 후일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자유행성동맹을 침공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미 정치적 반대파인 문벌귀족을 싹 정리해놨고 남아있는 이들은 전부 라인하르트에게 충성하는 이들뿐이라서 가능했다.[6] 반면 수십년 전 있었던 제2차 티아마트 성역 회전은 본편 시간대에도 심지어 작품이 끝나는 그 순간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7] 이는 앞서 말했듯 라인하르트의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 이전에는 최대의 성과였다. 그나마도 버밀리온에서 죽을 뻔한 라인하르트와 비교해보면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는 거의 대등한 성과다.[8] 제1차 라그나로크 작전 당시 제국군은 페잔의 항로국 지도를 얻었다고 했는데 페잔의 페잔 자치령은 설립 때부터 중개무역 등으로 발전했기에 제국, 동맹 양측에 대한 항로도가 있는게 당연하다.[9] 페잔의 분석에 따르면 48:40이므로, 제국이 다소 우위이기는 하나 그렇저럭 동등한 경쟁이 가능한 구도라 볼 수 있다.[10] 제5차 초공작전 당시 국민당군이 채택한 전략이 이와 유사하다. 장정 1만 광년의 사례에서 보듯 본작을 쓸 당시 다나카 요시키가 국공내전기의 역사적 자료를 적잖게 참고했음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