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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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동명여중/선일여고 재학 시절
2.3. 선일여고 졸업후 데뷔 이전
2.4. 1988년 CF모델 데뷔와 신드롬
2.5. 1989년 배우 입문
2.6. 1990년 ~ 2002년
2.7. 2003년 ~ 2004년: 최초의 슬럼프
2.8. 2005년 ~ 2008년 화려한 복귀



1. 개요[편집]


배우 최진실의 생애와 커리어를 서술한 문서다.

# - 신동아 2005년 11월호 인터뷰. 최진실이 자신의 연예계 생활과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밝힌 인터뷰이니 이 문서와 같이 읽으면 좋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파일:최진실아기.jpg

(왼)돌사진 (오)4살무렵
1968년 12월 24일 새벽 2시 55분에 서대문구 현저동 성신병원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2]는 택시 운전을 하셨고 어머니[3][4][5]는 미용사였는데 두 살까지는 가족이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남동생 최진영이 태어나던 해, 세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일을 쉬면서 집안 형편이 갑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다고 한다.

네 살 무렵에는 '물푸렛골'이라 불리던 구파발의 산동네에 다 쓰러져가는 방 세 개짜리 판잣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고모 세분, 고모부,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모여 살았다.[6][7] 5살 되던 무렵 가난에 지친 어머니 정옥숙이 최진실과 남동생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뒷산에 올라가니 최진실이 “엄마, 우리 죽는 거야? 나 죽기 싫어, 무서워.”라며 우는 바람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8살, 9살 삼송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늘 밝고 활발하던 아이었지만 학교에서는 말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한다.[8] 너나없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동네 친구들과는 다르게 학교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은 부잣집 아이들도 꽤 많아 어린 나이에도 계층 의식을 크게 작용해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은연중에 자신의 처지와 가족에 대한 상대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 이때부터 자신과 타인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허나 워낙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집에 돌아오면 다시 '깨순이'로 돌아왔다.

10살 무렵 아버지가 사우디 근로자로 떠나 서울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를 하였고 불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생 때 류머티스성 관절염 진단을 받아 한동안 약을 먹기도 하였다. 최진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연기에도 재능을 보이는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한테 만화를 그려주고 용돈을 벌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고나면 그걸 따라하는 게 일이었다. '연기 놀이'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가족들이 다 자는 밤중에 큰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거울을 보며 혼자 '연기 놀이'를 하다가 그 거울이 넘어지는 바람에 자던 가족들이 크게 다칠 뻔한 적도 있다. 어렸을 적 즐겨먹었던 간식요구르트라면땅이라고 한다.


2.2. 동명여중/선일여고 재학 시절[편집]



파일:최진실중학교.jpg

동명여중 재학 시절
동명여중을 다니던 시절 미술교사로부터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던 배우 강수연[9]을 동경해 우상으로 삼는다. 최진실은 5살 때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강수연을 동경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교실 밖에서 강수연이 수업 듣는 것을 몰래 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강수연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할 정도. 중학생 때까지는 내성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동명여중을 졸업하고 선일여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2년 때까지 미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학창시절을 보낸다.[10] 하지만 집안 형편으로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되면서 희망을 잃게 되고 심장병이 생겨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엄마와 남동생과 거주하던 월세집에서도 세를 못내 쫓겨나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자 급기야 고등학교 2학년때 죽음을 결심하게 된다. 약국에 들러 쥐약을 달라고 한 뒤 조금씩 먹으며 신세지고 있던 친구 집에 도착해서 잠이 들었는데 친구의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뜨니 복통만 있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고 한다.[11] 이 때 이후로 최진실은 새 생명을 얻었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살고자 했다고 한다.[12] 최진실은 29살때까지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유년기에 부모님이 서로 고성을 오고가며 부부싸움을 하면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방구석에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고 이 버릇은 커서도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다가 30살이 지나 고쳤다고 한다.[13]


2.3. 선일여고 졸업후 데뷔 이전[편집]


최진실은 최진영과 연기합을 맞추며 연기력을 연마하다가 1986년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함께 합격한다. 하지만 정옥숙은 최진실의 연예계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방송사 연수비도 마련하지 못해 배우 꿈은 좌절되고 미대 진학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에 좌초되면서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7년 서울 시내 유명 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 하지만 배우 꿈을 접을 수 없어 1988년 호텔을 그만두게 되고 2달 동안의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 이 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최진영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정옥숙은 항복하게 되고 최진영도 최진실을 돕기로 한다. 최진영은 최진실의 프로필 사진도 직접 찍어주고 그 사진들을 들고 모델 에이전시들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가 최진영의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게 되고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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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모델 활동 시절

초기에는 최진영이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한다. 1988년 4월에 모델 박영선이 주인공인 광고에서 뒷배경 역할을 맡게 된 최진실은 추운 날씨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연속 촬영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되고 함께 동행한 최진영은 덜덜 떠는 최진실에게 수건을 덮어주며 "이렇게 힘든데도 계속 할거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최진영은 급한 마음에 컨셉 가리지 않고 일을 하려는 초짜 모델 최진실에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어야 한다"고 조언하며 최진실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배우로 성장하도록 이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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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단학 센시티브 광고
이후 배우 김희애가 주인공인 화장품 광고 '쥬단학'의 보조모델로 활동하다가 '센시티브'에 여러 조연 중 한 명으로 출연한다. 이게 A안이다. 근데 광고 감독 박경삼은 콘티에 변주를 줘서 김희애와 최진실 투톱인 B안을 만들어 본다. 사내에서 B안에 대한 선호도가 좋아 B안이 낙점되고 전파를 탄다. 신예 모델을 찾던 삼성전자 후배에게 박경삼은 지체없이 최진실을 추천하였고 최진실은 곧 삼성전자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2.4. 1988년 CF모델 데뷔와 신드롬[편집]




삼성전자 광고

남편 퇴근시간은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삼성전자 광고 카피. 최진실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그 카피다.


1988년 삼성전자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당시 출연한 광고가 엄청나게 히트하며 최진실 신드롬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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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대상으로 인기 요인을 연구한 ○○○ 신드롬 책이 나온 건 처음이다. 1988년 당시 처음보는 깜찍하고 발랄한 분위기와 선하고 귀여운 외모의 여자 광고모델 등장은 대중들은 물론 광고계와 연예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진실 신드롬은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불린다.[14] 1988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 경제가 도약을 하자 컬러TV가 널리 보급이 되고 대중문화도 활기를 띠는데 이 때 최진실이라는 캐릭터가 절묘했던 것. 실제로 삼성전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컬러TV 인지도를 크게 올리고 최진실을 통해서는 가전제품 판매 1위를 달성한다.###

초창기 광고 모델 시절에는 성우 권희덕이 목소리를 맡았는데, 권희덕이 목소리를 담당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대사는 널리 알려져 유행했다. 이 대사가 담긴 광고는 최진실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광고계에서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995년 제1회 '한국 모델 페스티벌'에서 CF 부문 대상을 수상한다. #


2.5. 1989년 배우 입문[편집]


광고모델로 인기가 치솟자 MBC 예능에도 출연을 하는데 방송사 대기실에서 MBC 드라마《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1988년) 조연출을 만난다. 이 조연출을 통해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PD 이병훈을 만나게 되고 배우 면접을 본다. 신인 배우가 필요했던 이병훈을 통해 1989년 MBC 특채 배우가 돼 한 해 전 1988년 10월부터 방영 중이던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에 1989년 2월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15]관련영상[16] 능력을 인정받아 같은 해 6월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후편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1989년)에 좀 더 비중있는 배역으로 출연하는데 주인공 박승도의 여동생 박선아 역을 맡았다.

방송사 특채 배우 1년차에 일복이 터지는데 영화계 입문까지 한다. 영화 남부군 출연이 확정된 후에는 섭외 요청이 많아져 1989년에는 MBC에서 주조연•조연급으로 계속 얼굴을 비친다. 1989년 4월 철학적이고 성찰적인 작품인 TV드라마 첫 주연작 MBC 베스트셀러극장 <시진읍>에 언어 장애인으로 출연했다. 또 MBC <잠들지 않는 나무>(1989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1989년), 추리 드라마 MBC <제5열>(1989년), MBC <당신의 축배>(1989년), 로드 드라마 MBC <서울 시나위>(1989년)에 출연했다.


2.6. 1990년 ~ 2002년[편집]


1990년 청소년특집드라마 MBC 《두 권의 일기》에서 자신의 발랄한 개성을 드러내며 주목을 받았다. 채시라와 공동 주연이었고 1부는 채시라, 2부는 최진실이 주인공을 맡았다.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퀴즈쇼 MBC 교양 <퀴즈 아카데미>에 게스트로 출연해 유쾌한 모습을 보여 줘 대학생들에게 큰 호감을 얻고 있었는데 이후 대학생들의 생활을 다룬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까지 출연하자 계속 상승 국면을 탔다. MBC 인기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서 가짜 대학생 '승미' 역을 맡아 입체적 연기를 보여주다가 백혈병 환자인 것으로 처리돼 드라마에서 하차를 하자 최진실의 연기를 더 보고 싶었던 시청자들은 아주 애간장이 타게 된다. 이 드라마로 공감과 인기를 얻어 청소년신세대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MBC에서도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이어 영화 《남부군》으로 대중들에게 광고스타가 아닌 영화 배우로서 이름을 알렸다.[17]


《남부군》민자 역

영화 《남부군》의 첫 촬영은 1989년 3월이었고 최진실은 그 해 가을부터 합류해서 촬영하게 된다. 영화 촬영이 없는 기간에 정지영 감독의 허락 하에 삼성전자 광고 모델로 사이판에 갔다가 교통사고가 나 팔을 다쳐 피부이식수술 차 엉덩이 수술까지 하게 된다. 그런 몸 상태로 빨치산 역할을 묵묵히 잘해내 제작진을 놀라게 했다. 영화 시사회는 <대한극장>에서 있었고 영화가 끝난 후 극장 입구에서 사인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어 모두 배우 안성기의 팬이겠거니 했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영화는 3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 1990년 한국 영화 관객 동원 2위를 기록했다. 영화 《남부군》은 대한민국 최초로 냉전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6.25 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로 최진실은 청룡영화상에서 이 작품으로 '신인여우상'을 받는다. # 이 영화는 개봉되지 못할 뻔 했는데 'UIP 직배 반대 운동' 관련 정지영 감독이 극장에 뱀을 풀어넣는 테러를 감행했다가 나중에 수사가 시작되면서 영화 촬영 현장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남부군》 성공 이후에는 영화에서 쭉 주연 배우를 맡았다. 1990년 첫 주연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이 들면서 대박을 터뜨리자 영화계의 신예 스타로도 떠오름과 동시에 영화 배우로 완벽히 자리잡는다. 이 작품으로 최진실은 대종상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미영 역

1991년, 80년대 교복 자율화 세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에서 고등학생 '다혜' 역을 맡았고 이어 입양 문제를 다룬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에서 스웨덴 웁살라 대학 종교학과 학생 수잔 브링크(본명 신유숙)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스웨덴 로케이션 작품[18]으로 수잔 브링크는 실존 인물이다. 최진실은 이 작품에서 입양아 역할을 밀도있게 잘 표현해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고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른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스웨덴에 체류하면서 최진실은 스웨덴의 성평등 가정 문화를 경험한다. 또한, 스웨덴어로 연기한다든가 그때까지 해보지 않은 연기들을 다양하게 해보며 배우로서 한 단계 상승하는 시간도 갖는다.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해 개봉 일주일만에 서울 관객 10만 명을 돌파한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수잔 브링크 역

그 결과 최진실은 데뷔 2년 만에 전성기를 누리며 충무로의 돈 낳는 기계, '최진실 신드롬, 황금알을 낳는 오리 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사와 방송사의 섭외 요청도 빗발쳤다.



다큐 《인간시대》

1991년 11월, 최진실은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에 연예인으로서는 국민배우 안성기에 이어 두 번째로 출연했다. 이 방송은 43%의 시청률이 나오면서 대박이 나고 최진실은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친근한 서민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남녀노소 세대 불문 전 국민적 호감을 얻는다. [19]

1992년 1월, 최진실은 MBC 드라마 《약속》에 출연하여 최고시청률 41.5%를 이끌며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만드는 서막을 올리게 된다. 한편, 1992년 3월 9일부터는 배우 하희라 후임으로 MBC FM <0시의 데이트> DJ가 된다. 최진실은 CF 모델, 텔레비전 배우, 영화 배우까지 골고루 거친 후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던 차 였는데 라디오 DJ 제의가 들어오자 냉큼 수락을 한 것이다. 라디오는 매일 자정부터 1시간 동안 진행했다. 최진실은 발성상 비음이 약간 섞이고 발음이 부정확한 경향이 있어 음성 연기의 어려움도 경험하지만 자신의 실수조차 좋게 봐주는 청취자들 덕분에 힘을 얻는다. 라디오 진행을 맡은 지 2달이 지날 무렵 MBC 《질투》 출연 제의가 들어왔고 최진실은 두 일을 병행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드라마 촬영으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고 자정에 DJ 박스에 앉으면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급기야 드라마 촬영 후 귀가하는 차 안에서 졸도해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자 <0시의 데이트> 측에 양해를 구해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6월, 최진실은 MBC 드라마 《질투》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배우로서 강인한 인상을 남기고 최고의 인기스타로 대한민국을 흔들어 버린다. 《질투》의 최고시청률은 56.1%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드라마 흐름이 바뀌어 트렌디 드라마가 대거 제작된다. 《질투》는 윤명혜 원작 <내 사랑 기나긴 그림자>를 한국일보 기자 출신 최연지 작가가 각색한 작품으로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실감나게 그린 드라마였다. 최진실이 맡은 '유하경' 역은 여행사 직원으로 1989년 외국여행 전면 자유화 직후의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젊은이들이 매우 선망하는 직업군이었다. #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편의점, 피자 가게는 젊은이들을 흥분시켰고 내용에 걸맞는 경쾌한 OST도 대박이 나 싱어송라이터 유승범은 이 곡으로 가요 프로그램 1위도 한다.


《질투》하경 역

《질투》는 신세대, X세대, 신인류라는 신조어로 해석되던 1990년대 전반 젊은이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다룬다. 또한 이 드라마는 오늘날 한국 드라마 체계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킨 '트렌디 드라마'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이 드라마는 이전의 대다수 드라마와는 다른 관점으로 대중에게 다가간 신선함 그 자체인 작품이었다. 이전 드라마가 흔히 다루던 '재벌가의 감춰진 비극', '버림받은 여자의 복수극', '화목하지만 바람 잘 날 없는 대가족의 일상' 같은 레퍼토리를 거부했고, '인과응보', '권선징악' 이라고 불리는 고전과 동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교훈성'이라는 주제를 걷어차버린다. 대신 20살 중반부터 30살 초반 청년들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스케치했다. 수도 서울 번화가 몇 곳에만 존재하던 편의점이 이 드라마에 등장하자 수많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밤중에 그것도 음식뿐 아니라 생필품까지 갖춘 특이한 가게에서 라면, 김밥을 먹는 주인공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이 나누는 경쾌한 대화나 그들의 의식주를 따라 하고 싶은 욕구는 젊은이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질투》직후 출연한 MBC 드라마 《매혹》은 대학을 갓 졸업해서 사회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담았는데 사회적으로 한창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던 광고업을 배경으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동기동창생들끼리의 사랑과 우정을 빠른 속도로 그렸다. 하지만 시청률은 상당히 저조했고 흥행에 참패했다. 이어 최진실은 영화 《숲속의 방》에서 86세대를 상징하는 운동권 대학생 '소양' 역을 맡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그녀는 사회의식이 담긴 작품으로까지 활동 외연이 넓어진다. 드라마《매혹》에 이어서 영화 《숲속의 방》까지 흥행에 참패했지만 최진실의 무섭게 치솟는 위상과 인기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1993년 MBC 드라마 《폭풍의 계절》에서 배우 김희애와 투톱으로 출연하였다. 브라운관 트로이카였던 최진실과 김희애의 동반 출연으로 당시 홍보 문구가 '연기력의 김희애냐 vs 인기의 최진실이냐' 였을 정도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시청률은 평균 34.2% 최고 52.1%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최진실은 M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더 메인 주인공이었던 대선배 김희애는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최진실은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출연한다. 충무로 트로이카였던 심혜진과 투톱이었고 친구 사이임에도 성향이 전혀 다른 인물 연기를 보여줘서 이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1994년, 최진실은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 출연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소설가 양귀자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한국 페미니즘 영화사에 새 장을 연 작품이다. 최진실은 사회적으로 무게감 있는 작품에 출연함으로써 연기 변신을 꾀하여 청춘스타 이미지에 지적인 이미지까지 더하게 되고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는다. 이 작품의 스크립터가 훗날 네 멋대로 해라의 작가로 유명해진 인정옥이었다.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촬영을 끝낸 후인 1994년 2월, 최진실은 SBS와 출연 계약을 맺었다. TV 드라마 분야에서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 결과 최진실은 SBS 주말 드라마 《사랑의 향기》에 출연한다. 원래 그녀는 6촌 오빠 배우 최재성과 연기합을 맞출 뻔 했으나 불발되고 대신 배우 이병헌이 상대 배우로 선택되었다. 사랑의 향기는 전체 시청률 순위에서 SBS 프로그램 중 최고 등수인 4위를 기록하는 등 최진실은 SBS에서도 준수한 성과를 내 SBS 연기대상에서 2년 연속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어 배우 박중훈과 영화 《마누라 죽이기》로 두번째 호흡을 맞추며 커리우먼인 소영을 연기하였다. 영화는 1994년 12월 17일 개봉한 후 보름만에 관객 10만 명을 돌파해서 흥행에 대성공한다.[20] 최진실은 인기상만 주야장천 받다 이 작품으로 1995년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당시]

1995년 상반기에는 SBS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와 《째즈》,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와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에 출연한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미국 로케이션 작품이라 스케일이 컸고 최진실은 자동차 디자이너 오화련 역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했다. 그 결과 연말 SBS 연기대상에서 최진실은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에는 SBS 《째즈》와 《아스팔트 사나이》가 동남아시아에서 방영되고 좋은 반응이 나온다.

하반기에는 MBC 드라마 《아파트》에 채시라와 투톱으로 출연한다. 브라운관 트로이카 라이벌인 최진실과 채시라가 동반 출연한다 하여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됐었고 많은 기대를 받았다. 허나 시청률은 기대보다 중박 정도였고 반응도 미적지근하였다.

1995년 후반기에는 전문적으로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중앙대학교 예술전문대학원 공연예술학부 영화학과 지도자 코스에 진학한다.[21] 최진실은 연극영화학과에서 호흡이나 발성부터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데뷔 이후 강행군의 연속으로 지쳐있던 최진실은 책을 읽으며 에너지 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텔레비전보다 파급력이 적은 영화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때 선택한 영화가 '고스트 맘마'였다.

1996년 영화 《고스트 맘마》가 서울 관객 30만 명이 들어 흥행에 대성공한다. 이 영화는 웃기고 웃는 연기를 주로 해온 흐름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가 성공하자 CF 출연 섭외가 밀려들고 '최진실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 즈음 최진실은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실험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출연 제의를 받는다. 이 영화에서 강우석은 제작자였는데 최진실이 맡은 퇴폐적인 모습의 '호텔 전화 교환수' 역은 원래 배우 김남주의 몫이었으나 영화사와의 의견차이 때문에 도중하차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최진실에게 강우석이 부탁을 해서 성사된 출연이었다. 강우석은 파격적인 출연료로 최진실의 의리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배우 장동건, 배우 김민종, 배우 진희경 등도 출연한 영화로 1990년대 문화 아이콘 왕가위 감독의 연출 스타일로 만들어져 최진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된다.

1997년 출연한 영화 《베이비 세일》은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지만 최진실이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 된다. 최진실은 이 영화에 임할 때 '마음 푹 놓고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고 그러자 이전보다 감정 잡는 것이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비로소 연기가 자연스럽고 편하게 느껴져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기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희열을 경험한다.

한편, 최진실은 상반기에는 MBC 미니시리즈 《별은 내 가슴에》, 하반기에는 MBC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 출연한다. 데뷔 10년차가 된 1997년, 나이로도 30대에 접어들면서 '최진실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SBS와의 계약 위반을 감수하면서 출연한 트렌디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서도 여전히 선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의상디자이너 이연이 역을 잘 소화해내 친정 MBC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시놉이 바뀌어[22] 극 전개에 허술함이 있음에도 눈빛, 말투, 몸짓, 제스처까지 이연이와 소피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최진실의 1인2역 연기는 완벽했다. 또한, 《별은 내 가슴에》는 최초의 한류 드라마라고 할 만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드라마이다. 안재욱은 이 드라마의 OST 《Foreverr》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뒤이어 출연한 MBC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서도 커리어우먼 윤수경 역으로 출연해 시청률 62.4%라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최진실은 트렌디 드라마의 발랄한 이미지와 주말 연속극의 중후한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1997년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다.중후한 이미지를 성공시켜 인기 연착륙에도 성공해 30대의 포문을 화려하게 열었다.

1997년 11월, 영화 《편지》가 개봉된다. 이 영화는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관객 80만 명이 넘게 들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1998년 청룡영화상에서 '한국영화최다관객상'을 받는다. 이 영화는 MBC <별은 내 가슴에>가 막 뜨고 있을 무렵인 1997년 4월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 영화 <고스트 맘마>로 워밍업을 했던 최진실이지만 최루 영화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수용한 이 영화에 대해 '울고 짜는 연기는 솔직히 좀 자신 없는데...' 입장이었다가 대본을 받아보니 서사가 흡인력이 있어 응낙했다.[23] 촬영지 '경강역'은 여행 장소로 각광 받고 삽입된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도 화제가 된다. 감정 소모가 많은 작품이라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나고 무척 지쳐 있을 무렵 MBC <그대 그리고 나>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1998년 6월 최진실은 MBC미니시리즈 《추억》에서 광고회사 직원 서인영 역을 맡는다. 이혼 금기 사회에서 '이혼녀' 이미지를 과감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한국 배우로 최진실이 뽑힌다. 여기에 1998년 10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자 최진실은 일본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일본으로 한류진출을 준비한다.

1998년 7월에는 자전에세이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가 발간된다. 이 책에는 최진실의 예술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24]

1999년 MBC주말연속극 《장미와 콩나물》에서 손미나 역을 맡는다. 배우 김혜자와의 연기 궁합이 좋아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후에 최진실은 김혜자와 영화 《마요네즈》로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다. 《마요네즈》는 기혼 여성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설 연휴 영화 쉬리 기간흥행 속에서 나름 선전했다.[25] 이 영화를 통해 최진실은 2000년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예술영화와의 접속에도 성공한다. 원작 소설 '마요네즈' 작가 전혜성이 직접 각본을 맡은 이 영화는 희생하는 여성이 아닌 욕망하는 여성을 테마로 다루었고 후에 연극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최진실은 실험 영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그래서 신인 감독과 작업을 하고 싶어 했다.# 《마요네즈》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자식들이 이 영화를 보게 하자는 의도로 기획한 영화였고 상대 배우로 김혜자가 먼저 캐스팅되는데 김혜자가 딸 역할을 진실이가 해줬음 좋겠다고 제안하여서 캐스팅됐다고 한다.#

2000년 11월 '판타지 로망 대서사시'로 홍보한 《단적비연수》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 시점 역대 최고 제작비가 투여된 한국 영화이며# 서울 관객 61만 명, 전국 관객은 177만 명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2000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4위를 기록하고 2001년 대종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했다. # 다만, 제작비 47억 원에 비해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고 작품 퀄리티나 평도 안 좋았다.

이처럼 최진실은 일찌감치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판단을 했고 1990년 영화 '꼭지딴', 1991년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2년 영화 '숲속의 방', 1994년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9년 영화 '마요네즈', 2000년 영화 '단적비연수' 등을 통해 캐릭터 다변화를 이뤘다.

이 때쯤 KBS의 <행복채널> 녹화를 하며 소개받은 야구선수 조성민과 2년 연애 끝에 2000년 12월 5일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최진실은 해외 진출과 영화 쪽에서 필모를 더 쌓을 계획이었지만, 조성민과의 결혼 이후 이러한 계획들을 포기했다.

2001년 8월 3일, 첫 아들 최환희 군이 태어났다. 환희는 첫 아이라 너무 기쁘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2002년, 최진실은 결혼 후 첫 작품으로 MBC 《그대를 알고부터》에서 무역회사 직원 이옥화 역을 맡았다. 중국에서 성장하고 대학까지 나온 조선족인 옥화가 한국에 와서 겪는 문화적 충격과 좌충우돌이 연기의 포인트다. 이 때 최진실은 실감나는 연번어 구사를 위해 친구인 정선희의 도음을 받았다고 하며, 이 인연으로 둘이 같이 광고도 찍게 되었다. 반년 정도 방영된 이 드라마는 좋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중간에 월드컵과 겹쳐서 잠시 시청률이 하락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류시원과 함께 커플로 호흡을 맞췄고, 김혜자와 다시 한번 더 연기를 했다.[26]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몽준 의원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강부자, 백일섭, 남궁원 등 여러 연기자 선배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적극적인 지지활동을 하지는 않았다.[27]

2.7. 2003년 ~ 2004년: 최초의 슬럼프[편집]


2002년 12월 조성민이 이혼을 요구하며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를 계기로 2003년부터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가게 된다. 조성민은 최진실이 자신을 의심하고 한번도 내조를 해주지 않았다며 이혼을 요구했고, 최진실은 이혼을 거부하며 당시 조성민의 내연녀로 심모 씨를 지목하면서 팽팽하게 법정공방을 벌이게 된다. 길게 이어진 공방으로 최진실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을 입었고, 사회적인 위상도 추락하며 활동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쉬게 되었다. 이 당시 이혼합의서 초안이 유출되고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계속 보도되면서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2003년 3월 1일, 둘째 딸인 최준희(당시 이름은 수민)가 태어났다. 첫째와 달리 강남의 한 산부인과에서 조용히 출산이 이루어졌으며 조성민이 출산 5일 뒤에 동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했다.



37살 당시

2004년, 최진실은 MBC 《장미의 전쟁》에서 산부인과 의사 오미연 역을 맡았다. 의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최수종과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비혼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장미의 전쟁》를 방영할 때 KBS2에서는 비슷한 시간대에 채시라 주연의 <애정의 조건>을 방영했다. 주말 저녁 8시대 다수 시청자들은 산부인과 의사 최진실과 전업주부 채시라 중에 전업주부 채시라를 선택해서 <애정의 조건>은 최고 시청률 45.4%를 기록했다.[28] PD 이창순은 배우 최수종도 동반 출연하는 김에 드라마를 MBC <질투>(1992년)의 시퀄처럼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질투>의 주제가와 장면을 예고로 내보내기도 했다. # 이 드라마는 지각 대본 문제로 김선영 작가에서 노유경 작가로 교체된다. 작가 교체는 극 전개나 캐릭터의 색깔을 뒤흔드는 모험이자 무리수라 평균 시청률도 12.5%에 머문다. 하지만 OST인 가수 린애의 '특별한 이유'는 인터넷 음악사이트에서 가장 많은 클릭수를 자랑했다.

2004년 8월, 조성민이 최진실을 폭행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전까지 이혼을 머뭇거렸던 최진실 역시 폭행사건 이후 이혼에 동의하게 되었고, 2004년 9월 1일 합의이혼하며 조성민과 최종적으로 결별하였다. 이 때 조성민은 친권과 양육권을 최진실에게 넘겼고, 이 대가로 빵집 비어드 파파를 창업할 때 빌렸던 채무 1억원을 변제받으며 합의를 마무리지었다.

이 시기는 최진실 데뷔 이래 처음 겪는 암흑기였다. 이혼 사태와 드라마 작품까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최진실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라는 평이 지배했다. 때문에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 역으로 출연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레 하차했고, 이어 영화 메모리의 가영 역으로 출연 예정이었지만 영화 제작까지 무산되었다. 또, 영화 '실종'으로 싸이코패스 혜정역을 연기할 예정이었으나 이 영화 또한 제작이 무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진실은 영화계가 날 버린 것 같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룡영화제측에서는 최진실에게 꽃다발을 보내거나 시상자로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고 한다. #

훗날 인터뷰에서 <장미의 전쟁> 종영 이후 1년여의 시기가 본인 인생에서 가장 슬픈 시기였다고 털어놓았다. #


2.8. 2005년 ~ 2008년 화려한 복귀[편집]


그러나 최진실은 2005년 8월 KBS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맹순이 역을 맡아 적나라한 실감나는 서민 연기와 암환자 연기로 대중을 감동시키고 복귀에 대성공한다.[29] 그 결과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올해를 빛낸 탤런트'에서 전 성별, 연령층에서 1위를 차지했고#,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과 인기상, 2006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다.

그 결과 최진실의 네임밸류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최진실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매니지먼트사들이 10억 원대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딜을 해왔다.# 이 때 최진실이 새로 계약을 맺은 매니지먼트사가 최진실과의 계약 성사 직후 코스닥 등록업체 <라이브코드>의 인수 대상이 되면서 최진실의 네임밸류는 또 다시 높이 평가받았다.#. 한편, 최진실은 이 시기 에어컨 전문브랜드 <캐리어코리아>와 전속 광고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캐리어코리아>는 최진실을 20대와 중장년층에까지 폭넓은 호감을 받고 있는 배우로 평가했다.

이로 인해 최진실은 국민배우 명성을 다시 되찾는다. 악플러 운운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시대를 생각해봐도 헛소리다.

2007년, 최진실은 MBC 드라마《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 보육원 원장 역할 이세영 역으로 출연하였다. 이 드라마에서 최진실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재룡과 호흡을 맞췄고, 최고시청률 24.6%로 선방하며 호흡이 긴 일일드라마를 잘 리드해 준수한 시청률로 MBC에 보답한다. MBC 사장 최문순도 그런 최진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140부작이라 MBC와의 전속 계약 시간을 한번에 처리하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었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홍선희 역
2008년에는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출연하여 적나라한 서민 연기, 최진실표 코믹 연기, 세련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첫 트렌디 드라마의 주역인 최진실은 중년 트렌디 드라마[30]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흥행에도 성공한다.# 중년층을 겨냥한 드라마였지만 젊은층까지 시청자 범위가 넓어져 10대, 20대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디시인사이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갤러리'에서는 '최트루' 최진실이 연일 화제가 되고 팬들은 최진실의 싸이월드에까지 날아가 디시에 방문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최진실 본인이 직접 디시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OST인 가수 변진섭의 '사랑이 올까요'도 경쾌한 멜로디로 인기를 끌었으며 가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는 2005년 곡인데 3년 후 이 작품에 삽입되면서 재조명을 받게 되고 2008년·2009년 연속으로 노래방 애창곡 1위에 오르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라드 곡으로 자리매김한다.

결과 그해 말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2008년을 빛낸 탤런트' 부문 5위를 했다. #

드라마 팬덤이 형성되자 2008년 후반기에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시즌2 제작이 확정된다. 그러나 최진실의 사망으로 드라마 제작이 무산되었다. 한편, 최진실은 OBS경인TV에서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토크쇼 MC직을 수락했다. 최진실의 첫 TV 예능 진행이라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았고 흥행에도 성공하여 시즌2 제작이 예정되었다. 최진실은 유재석보다 많은 회당 출연료로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은 것은 물론 프로그램 홍보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받았는데 OBS 최대 주주 <영안모자>의 계열사 <대우버스>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대우버스 4700대에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이미지를 랩핑해 홍보에 나섰다. #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는 광고 시장 불황 속에서도 방송 6회 만에 광고가 완판되는 성과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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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은 경찰 공무원이었던 친할아버지께서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며 지어주셨고 최진실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2] 정옥숙보다 9살 연상인 최국현은 경복고등학교 시절 연극을 하고 KBS 탤런트 공채 1기였다고 하나 부친의 극심한 반대로 운수업에 종사하게 된다. 배우 최재성은 6촌 오빠였고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국현의 사촌 형 최상현은 연극배우 출신의 KBS 연출가였다. #[3] 경상북도 상주시 출생 정옥숙의 외가는 시골에서는 부자에 속하는 집안이었다.[4] 어머니 정옥숙은 그림과 시에 소질이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설광이었으며 신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는 미용사로 일했는데 이후에도 그런 재능을 살려 어린 최진실에게 직접 근사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멋진 시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며 최진실의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5] 정옥숙의 자매 중에 소설가가 된 막내 여동생 정현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최진실은 자신보다 5살 연상인 정현숙을 이모들 중 가장 좋아했다. 정현숙은 1991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편에도 최진실, 정옥숙과 같이 출연하여 최진실의 친구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운동 경험이 있던 정현숙은 '숲속의 방' 캐릭터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6] 아버지에게는 이미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 사실을 결혼 후에 알았다. 이 결혼이 아버지의 재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1985년부터 13년간 별거하다가 1998년 이혼한다.[7]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언급 : 남편에게는 벌써 애가 둘이었다. 느닷없이 나는 낳지도 않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일곱 살과 다섯 살 먹은 아이들이었는데 낳은 엄마도 서로 달랐다. 일곱 살 아들은 이미 시어머니께서 막내아들처럼 키우고 계셨고, 다섯 살 아들은 결혼 후 남편이 갑자기 데리고 왔다.[8] 오죽하면 벙어리라는 소문이 돌아 아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을 정도.[9] 결국 2022년 5월 갑작스럽게도 강수연은 병으로 별세하고 말았고 최진실보다 14년을 더 오래 살았다.[10] 추리소설 매니아이기도 했다. #[11] 약사는 최진실이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채고 다른 약을 주면서 쥐약이라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최진실은 자서전을 통해 그때 약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12]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쫄쫄 굶고 있는 최진실을 보고 안쓰러워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며 만원을 쥐어주셨는데 '끼'가 다분했던 엉뚱한 최진실은 맛있는 것을 사 먹는 대신에 멋을 부리는 핑클 파마를 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의 어이없다는 표정은 아직도 기억한다며 자서전에 서술하기도. 이 에피소드로 최진실이 과거에 날라리였다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다.[13] 대본을 외울 때, 무서운 영화를 볼 때, 촬영에 들어가기 전 긴장할 때 자신도 모르게 물어뜯었다고 했다.[14] 대중문화 연구자인 마정미에 의해 <최진실 신드롬>(청하, 1993)이라는 서적이 발간된다. 이 책은 '최진실과 에로티시즘', '최진실이 지닌 상품미학', '최진실로 상징되는 신세대론', '최진실이 출연한 광고와 자본주의의 상관성' 등을 분석한다. 마정미는 최진실이 연예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전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문화 분석을 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최진실의 전체가 아닌 일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대중문화예술인과 관련한 전문서적이 전무하던 시절에 마정미는 대중스타 분석 이론서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현실문화 분석이 새로운 출판 경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대상황에서 탄생했다.[15] 평양 기생 '장미' 역으로 의대증(衣帶症) 환자 사도세자 최수종에 이끌려 궁궐에 입성하게 되는데 의대증 발광으로 사도세자한테 살해당한다.[16] 이 영상에는 자막에 최진실 역이 '경빈 박씨'로 돼 있으나 오타. '경빈 박씨'는 궁녀 '빙애'로 배우 최현미가 맡았다.[17] 당시 최진실 첫 등장 장면에서 극장 안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고 한다.[18] 이 스웨덴 여행은 정옥숙, 최진실, 최진영이 함께 한 첫 외국 여행이었다. 정옥숙은 첫 외국 여행이라 설렜고 최진실은 정서적 지지, 매니저 역할 등을 잘해준 정옥숙한테 선물이 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교포 2세, 한국인 입양아 등 젊은이들이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팀을 관심있게 지켜봤고 입양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데 연대감을 느껴 조력자가 돼 준다. 스웨덴 웁살라 숙소는 교포들의 집이었고 그들의 환대를 받는다. 촬영을 끝내고 스웨덴을 떠나는 날 교감을 나눈 입양아 중에는 공항까지 나와 준 사람도 있었는데, "영화 촬영이 위안이 되었다"고 말한다.[19] 특히 중장년층들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되어 많은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고 이후 야무진 똑순이 이미지가 각인되어 더욱더 사랑을 받았다.[20] 사실 이 영화는 개봉되지 못할 뻔 했다. 왜냐하면 당시 주연 배우 박중훈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당시] 최진실은 SBS <아스팔트 사나이>(1995년) 미국 로케이션 촬영 중이라 어머니 정옥숙이 대신 수상했다.[21] 동문이 아니다.[22] 이연이와 소피아가 쌍둥이 입양아 설정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준희(차인표)와 소피아는 연인 사이었고, 소피아의 쌍둥이 동생인 이연이와 이준희가 이어지는 설정이었다는 것. 이연이와 이준희가 이어지고 강민(안재욱)과 양순애(전도연)가 이어지는 것이 원본 시놉이었으나 강민 캐릭터가 신드롬급으로 인기가 많아지자 시놉이 완전히 바뀌게 되어 이준희, 소피아, 양순애 캐릭터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으며 이연이 캐릭터 또 한 디자이너로서 성공하는 성장 스토리가 흐지부지되었다.[23] 당시 신인배우였던 상대 배우 박신양은 일면식이 없던 연기자였지만 같이 연기를 하면서 실력에 놀라게 되고 매력적인 배우라고 평가한다.[24] 최진실 사망 직후에 재출간되었으나 최진영이 출판사에 항의해서 모두 회수되었다.[25] 전국 관객 약 25만 명 추정. [26] 두 사람은 <당신의 축배>,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마요네즈>, <그대를 알고부터> 등 총 5편의 작품에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생전 함께 연기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는데, 김혜자는 훗날 인터뷰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후배로 최진실을 뽑기도 했었다.[27] 정몽준은 대선 직전 새천년민주당노무현 후보와 단일화를 하며 후보직을 사퇴했다.[28] <애정의 조건> 작가 문영남은 다음 해 2005년에는 최진실을 통해 시청률 재미를 또 톡톡히 보게 된다.[29] MBC 전속 배우였는데 KBS 드라마에 출연한 것으로 그 해 MBC 드라마 출연 계획이 없어 경영진과의 딜 끝에 KBS에 한 해 잠깐 출연한 건데 여기서도 잘해낸 것. 그래서 KBS 사장 정연주도 최진실에게 고마워한다. #[30] 이듬해 2009년 MBC 내조의 여왕도 흥행에 성공하며 중년 트렌디 드라마 장르는 대세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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