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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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자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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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양방송 로고_White.svg 연기대상 대상
이낙훈
장미희
(1978년)[1]

강부자
(1979년)


-[2]
(1980년)

파일:KBS 로고(1984-2023).svg 연기대상 대상
나문희
(1995년)

강부자
(1996년)


유동근
(1997년)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제12회
(1976년)


제13회
(1977년)


제14회
(1978년)

김혜자
(신부일기)
홍세미
(행복의 조건)

강부자
(결혼행진곡)
김윤경
(재회)


강효실
(문기와 수미)
김혜자
(당신)


파일:한국방송대상 심볼.svg 한국방송대상
탤런트상
장민호
나문희
(1996년)

박근형
강부자
(1997년)

유동근
최진실
(1998년)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강부자
姜富子 | Kang Booja


파일:external/thumb.mt.co.kr/2021021615254668877_1.jpg

출생
1941년 2월 8일 (83세)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진주 강씨#
신체
AB형
배우자
이묵원[2]
자녀
1남 1녀
학력
강경중앙초등학교 (졸업)
강경여자중학교 (졸업)
강경여자고등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 / 중퇴)
종교
불교 (법명: 보광화)[3]
데뷔
1962년 KBS 2기 공채 탤런트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4

1. 개요
2. 활동
2.1. 농심 아줌마
3. 이야깃거리
3.1. 축구 사랑
4. 출연 작품
4.1. 드라마
4.2. 영화
4.3. 연극
4.4. 방송
4.5. CF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배우이자 前 정치인.

1941년, 일곱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4], 충남 논산군 강경읍 중앙동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배우의 끼가 있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직접 쓴 각본으로 1인 3역을 해 전교생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대학생 때 탤런트 모집 공고를 봤고, 단박에 합격했다. 1962년 데뷔, 당시는 흑백TV였던 터라 스물두 살의 나이로 마흔다섯 살 역할을 맡았다. 예나 지금이나 촬영이 있는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다고 전해진다.

2. 활동[편집]


대전 KBS 성우로 잠시 활동한 후, 1962년[5] KBS 2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1964년 새로 개국한 TBC로 이적하였으며, 주조연을 넘나들며 수많은 히트작에 출연하였다. 사실상 TBC의 간판 배우였다.[6] 1980년 TBC 폐국 당시에는 생방송 중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똑같은 무대에서 눈물을 보여 한때 방송출연 정지까지 당한 가수 이은하와는 달리 방송출연 정지까지 먹진 않았다. 그래도 상당한 압력을 받긴 했다. 황인용과 함께 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며칠 강부자 없이 파행 진행되다가 시청자의 항의로 복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동네라는 TBC, KBS 합병기 최고 인기 프로그램의 주연이라서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었다. 종영 이후 요즘기준으로는 잠깐 휴식 수준의 공백을 가졌는데, 쉴새없이 신규 작품에 중복 투입되는 전속 시절엔 이 정도 패널티만 해도 배우에겐 큰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KBS 높으신 분들께 사과를 하란 압력을 쿨하게 무시하면서 청춘을 바친 TBC를 위해 그 정도 눈물도 못 흘리냐고 항변했고, 1981년 KBS에서 그를 재기용했다는 점은, 당시 권위주의적 시대를 감안할 때 강부자가 얼마나 큰 인기를 얻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후 1980년대엔 신구 등과 KBS를 대표하는 연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여전히 인기를 유지했다.

포털 프로필에는 논산시 출신이라고 적혀 있는데 정확히는 강경 출신.[7] 강경여고를 나왔다. 이후 방송프로 등에서 간간이 고향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남희석이나 최양락 정도는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이들도 충남이 고향이다. 남희석은 보령시(구 보령군), 최양락은 아산시(구 아산군).

드라마에서는 주로 불경을 외우는 할머니로 많이 나온다. 물론 프로필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 종교도 불교이다. 그리고 김수현 작가와 친분이 있어서 김수현표 드라마에 많이 출연하는 편.

1993년 3월부터 통일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8] 통일국민당이 신정치개혁당[9]과 합당하여 신민당이 되자 그대로 신민당 소속이었고 1995년 신민당이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자 그대로 자유민주연합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1996년 다시 정치계를 떠나서 연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통일국민당 시절의 인연으로 더불어민주당 조일현 전 의원[10]의 후원회장 역할을 맡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윤석열을 지지하는 헌정회원 300여명에 포함되었다.#


2.1. 농심 아줌마[편집]





농심이 라면 회사로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0년 넘게 라면제품 전속 모델로 활약하였다. 푸근한 이미지와 더불어 특유의 웃음소리와 편안한 느낌의 목소리 덕분에 농심 아줌마 라고 불리는 등 사실상 농심 라면 CF 모델의 영원한 어머니[11]라고 할 수 있다.[12] 신라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농심 육개장, 사리곰탕면 농심 너구리등 농심 라면 제품의 CF에 단골로 등장하여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농심 라면 CF들을 보면 그녀가 십중팔구 등장할 정도로 그 비중이 막강했다. 하지만 1993년에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 농심 측에서 부담을 느끼다가 결국 이듬해인 1994년 5월 전속모델 계약을 종료하게 된다.

그래도 농심라면 전속모델 답게 실생활에서도 농심에서 출시한 라면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며, 안성댁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자신이 출연한 CF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안성탕면에 대한 애착이 상당한 듯하다.[13] 그리고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전속 모델로서 책임감이 있었는지 모델로 활동하는 기간에 다른 회사 라면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14] 라면 CF모델의 대모로서 요즘 라면 CF들을 보면 못마땅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과거에 자신이 CF모델을 했을 때는 일부러 국물을 입 주변에 흘려가면서까지 맛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 CF들을 보면 그와 같은 열정을 찾아 보기 힘들어서라고. 라면은 농심 제품만 먹으며 다른 회사 라면은 입맛에 안 맞는다고.

2021년 3월 29일 본인이 13년동안 cf 모델로 활동한 농심그룹의 창업주인 신춘호 초대 회장이 별세하자 신춘호 회장의 빈소를 찾았다.

강부자는 "늘 존경해오던 분인데 안타깝다"고 고인을 애도했고 조문을 마치고 나서면서 "제가 13년간 농심에서 활동했는데, 신 회장님이 저를 예뻐했다고 들었다."면서 "요새 새로운 광고를 재생해도 옛날 광고를 보시면서 저를 생각했다고 들었다. 원래 뜻이 훌륭하시고, 사업 마인드가 훌륭해서 늘 존경해오던 분인데 안타깝고,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했다.


3. 이야깃거리[편집]


  • KBS 2기 탤런트 시험에 응시할 당시 한복저고리와 검은 통치마를 입고 질끈 묶은 머리로 면접장에 들어섰다.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차림새에 외모도 평범해서 면접관들이 바로 퇴짜를 놓으려 하자 강부자는 "나도 명색이 성우 출신인데 연기라도 한번 보고 나가라고 해야 할 것 아니냐" 며 당차게 항의했다. 면접관이 어디서 성우를 했냐고 묻자 "대전 KBS에서 성우로 활동했다"며 답했고 중앙방송국도 아닌 지방 출신 성우가 당돌하다며 혀를 찼지만 이렇게 된 거 목소리 연기라도 한번 들어보기로 했는데 막상 강부자는 제법 강렬하면서 개성있는 연기를 선보였고, 면접관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합격시켰다. 이후 강부자는 통치마 차림으로 뚝심있게 면접관들의 퇴짜를 뿌리쳤다며 한동안 방송국에서 강경 통치마 라는 별명으로 통하기도 했다.

  • KBS 공채 탤런트가 되어 3개월간 연기 교육을 받은 후 어느 드라마에 단역인 점쟁이 역할로 데뷔하게 되었는데, 도통 점쟁이 티도 안나는 허접한 연기에 PD가 "이따위로 하려거든 짐 싸서 나가라!!" 며 호통을 치자 강부자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강부자가 스튜디오에 나오지를 않자 PD는 힘들어서 그만둔 것으로 알고 다른 탤런트를 섭외하려던 찰나 아예 중년 여성으로 분장한 강부자가 나타났고, 할 수 없이 강부자를 출연시켰는데 그녀는 비록 단역일지언정 진짜 점쟁이가 빙의한 듯한 신들린 연기로 배우와 스태프들의 찬사를 샀다. 알고보니 강부자는 탑골공원 옆에서 점집을 하던 무당을 찾아가 점쟁이를 어떻게 하는건지 가르쳐 달라며 통 사정을 했고, 마지못해 허락한 무당으로부터 이틀동안 벼락공부를 받은 후 촬영장에 돌아온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부자는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 2017년 4월 29일, 강경고에 장학금을 무려 1억 원을 기탁했다.

  • 후배들에게는 엄하고 무섭게 대하는 이른바 군기 잡는 선배로 알려져 있다. 다른 중견 배우들에게는 적당히 인사하던 어린 연예인들이 강부자가 나타나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깍듯하게 인사하던 모습 때문인 듯. 이 무서운 선배라는 이야기에 대해 본인은 "자기들이 잘못한 게 있으니까 무섭다고 하는거지 안 그러면 내가 왜 무서워? 난 후배들에게 한 번도 권위를 내세운 적이 없어요."라는 말을 하기도...[15] 개그콘서트 10주년 특집 때는 분장실의 강선생님에 출연해서 군기 잡던 후배들을 전부 순한 양으로 만드는 개그를 선보였다. 특히 김미화에게는 "이주일 오빠 심부름도 제대로 못해서 맞고 산 주제에 아주 살판났구만!"이라는 드립을 쳤다. 이런 강부자에게 유일하게 개긴 사람이 다름 아닌 김희선으로, 2006년 삼화프로덕션 신현택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목욕탕집 남자들 촬영 당시에 김희선이 강부자 전용 의자에 앉아 강부자가 크게 혼을 냈지만 김희선은 되레 이름표라도 붙여놨느냐, 니 의자 내 의자가 어딨냐고 당돌하게 맞받아쳐서 촬영장이 뒤집혔고, 나중에 강부자 거울도 멋대로 써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여 학창시절 교장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 교장선생님의 나이가 100세인지라 살아계실지도 불확실했지만 결국 생존해 계신 것을 찾아냈고 정정한 모습으로 방송에 등장하였다.[16] 그리고 방송 나온 다음 해 교장선생님은 돌아가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참석을 하게 된다. 강부자가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벽에 기대어 기도를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영상

  • 용산 한강맨션아파트 1호 입주자로, 모델하우스에 가보고나서 이 당시까지만해도 생소했던 아파트를 보고나서 괜찮다고 생각해서 무리를 해서 하나 장만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대표되는 시민아파트의 부실공사로 아파트의 이미지가 위험한곳, 빈민층 사는곳으로 낙인찍힌지라, 이미지 쇄신에 나서려는 주공 및 건설회사측에서 강부자를 섭외해서 홍보대사로 널리 써먹기도 했다고.


3.1. 축구 사랑[편집]


힐링캠프에서 밝히기를 거의 50년 동안 축구를 봐왔다고 한다. 엄청난 축빠이며, 대한민국 축구사는 물론 해축에 역대 월드컵 역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으며, 또한 지식과 용어도 많이 알고 있다. 그 중 좋아하는 한국 선수는 기성용박주영, 염기훈. 2019년 3월 29일에 첫 방송된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조우종, 한준희와 함께 나와서 자신의 축구 지식을 뽐내기도 했다. 선수들 등번호를 보며 이름을 바로바로 맞추는 것은 물론 옛 시절의 축구썰, 자신의 꿈이 '축구 해설을 해보는 것'이라는 것, 호날두에 대한 마음까지 푸는 등 엄청난 지식을 뽐냈다. 이 정도면 전문 축구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히 축구 전문가 수준이다.

호날두는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자선도 많이 하고 사생활이 너무너무 깨끗하고[17]

... - 마리텔 시즌2 중에서


2019년 5월 5일 K리그1 10라운드 슈퍼매치수원염기훈 선수가 초대해서 시축을 했다.[18]

2019년 5월 18일 김동완, 조우종과 함께한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 트위치 라이브 때 에우제비우를 "유세비오"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19]\

2023년 1월 13일에는 이스타TV의 축구뒷담화에 나와서도 풀백의 오버래핑을 설명하는 등 과거부터 현대 축구에도 해박한 모습을 보여줬다. #

또 위의 힐링캠프나 2019년 마리텔 방송 녹화 등을 봤을 때 본인이 축구에 능통한 팬인데다 연예인 축구단과도 인연이 있는지라 현대가와 인연이 없을 래야 없을 수 없는 듯 하다. 통일국민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만 좋아하지는 않고, 다른 스포츠들도 좋아한다.



4. 출연 작품[편집]



4.1. 드라마[편집]




4.2. 영화[편집]


  • 1966년 《만져만 봅시다》
  • 1967년 《공주님의 짝사랑》
  • 1967년 《일지매 삼검객》
  • 1967년 《위험은 가득히》
  • 1969년 《겨울 부인》
  • 1969년 《남편》
  • 1969년 《원님댁》
  • 1970년 《구혼 작전》
  • 1971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 말숙
  • 1979년 《우리는 밤차를 탔읍니다》
  • 1983년 《아내》
  • 1992년 《사랑과 눈물》
  • 2003년 《오구》 ... 황씨 할매 역
  • 2005년 《초승달과 밤배》 ... 할머니


4.3. 연극[편집]


  • 2008년 ~ 《오구》
  • 2009년 ~ 《친정엄마와 2박3일》 ... 최여사(엄마) - 딸 역 고전미선과 오래 같이 했으며, 2019년 사망 당시에도 같이 하고 있었다. 이후 역시 아역 출신인 윤유선등 여러 배우와 함께 부녀로 호흡을 맞추며 2023년 10월 현재도 전국을 돌면서 계속 공연을 하고 있다. 사실상 강부자의 연극 대표작.


4.4. 방송[편집]


  • 1978년~1992년 KBS 제2라디오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DJ
  • 1983년 KBS1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MC
  • 1992년 BBS 라디오 《강부자의 아침저널》 DJ
  • 1993년 KBS 제1라디오 《환경일기》 DJ
  • 1993년 BBS 《피안을 향하여》 MC
  • 1996년 KBS1 《TV는 사랑을 싣고》 게스트
  • 1997년 SBS 라디오 《안녕하세요 강부자 송승환입니다》 DJ
  • 2011년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 343회
  • 2011년 KBS2 《다큐멘터리 3일》 220회 : 웃당뫼의 가을걷이 - 전남 진도군 소포마을 - 내레이션
  • 2011년 MBC 《고향을 부탁해》 내레이션
  • 2013년 JTBC 《패티김 쇼》 13회
  • 2014년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143회
  • 2014년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139회 3~5부
  • 2014년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179회
  • 2015년 MBN 《울엄마》 MC
  • 2017년 KBS1 《KBS 스페셜》 859회 : <석가탄신일 기획> 돌고 돌아 봄 - 불영사에서 나누다 - 내레이션
  • 2019년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
  • 2020년 MBC every1 《비디오스타》
  • 2021년 MBC 《생방송 행복드림 로또 6/45》- 게스트 962회
  • 2022년 KBS1 《다 어린이》- 출연
  • 2023년 KBS1 《동네 한 바퀴》- 내레이션

4.5. CF[편집]


  • 마마전기 (1977년 ~ 1982년)
  • 오양맛살 (1983년)
  • 해태음료 써니텐 (1985년)
  • 농심 (1985년 ~ 1993년)
  • SK케미칼 트라스트 (1996년 ~ 1997년)
  • 롯데칠성음료 콜드주스 (1997년)
  • LG정유 보너스카드 (1998년)
  • 제일약품 케펜텍 (1999년)
  • 차티스 (2008년)
  • 리치리치:부자되는법 (2019년)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1992 - 1994
정계 입문

파일:신민당(1994년) 흰색 로고타입.svg

1994 - 1995
합당[21]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6
합당[22]

[[무소속|
무소속
]]

1996 -
탈당
정계 은퇴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3,574,419 (17.37%)
승계 (8번)
초선[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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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2] KBS 공채 동기라고 힐링캠프에서 밝혔다. 부부가 같이 CF도 찍은 적이 있다.[3] 김용림, 전원주와 더불어 연예계에서도 알아주는 대표 불자이기도 하다.[4] 부친은 기름집 사업이 대박나서 일본까지 건너갔을 정도로 큰 사업가로, 그 덕에 강부자 본인은 어린 시절을 부유하게 지냈으며, 2023년 8월 11일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본인을 금수저를 넘어선 다이아수저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래서 이름도 '부자'라고 한다.#[5] KBS TV가 개국한 1961년 12월에 국내 최초의 TV탤런트인 1기생을 뽑고 3개월 만인 1962년 3월에 2기생을 뽑았다고 한다.[6] 초기엔 곽규석 등이 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7] 국사책에 나오는 것처럼,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충청권 대표적 물산 집산지이다. 이렇듯, 강경이 대대로 잘 살았던 지역인 지라 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강경 사람들은 누가 고향을 물어봐도 대부분 "강경 출신"이라고 말하지, 논산을 먼저 말하지 않는 편이다.[8] 1992년 총선 당시는 낙선했는데 전국구로 당선되었던 정주영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하여 기존에 결정된 비례대표 순번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승계한 것이다.[9] 박찬종이 1992년 창당한 정당.[10] 현 더불어민주당 홍천군·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 지역위원장. 1992년 당시 통일국민당으로 홍천군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고 2000년까지 자민련에 남았으나(이후 두 번의 선거는 모두 낙선), 2004년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당선되고(열린우리당 붕괴 당시는 탈당) 지금까지 민주당계 정당에 남아 있다.[11] 이와 더불어 코미디언 구봉서 역시 동시기에 농심라면 전속모델로 활약하여 농심 아저씨로 불렸는데, 물론 강부자와 부부사이로 설정되어 출연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12] 실제 이 당시에 다시다김혜자, 미원고두심 등과 함께 식품계 CF 전속모델 트로이카를 이루었다.[13] 2011년 오랜만에 출연한 안성탕면 CF 촬영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 모두 점심식사로 밥을 먹을 동안 본인 혼자 안성탕면을 끓여 먹기도 했을 정도. 식품 CF 촬영 현장의 실상을 알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데, 먹는 장면을 최대한 맛깔나게 촬영하는 것 때문에 CF 모델은 해당 제품을 수십번 먹어야 하는 것이 기본인지라 아무리 맛있는 라면이라 할지라도 질리다 못해 입에 대기도 싫을 정도 수준이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부자는 이걸 점심으로 따로 먹고 싶다고 자처 할 정도니 보통 내공이 아닌 것이다.[14] 본인이 밝힌 일화로 1980년대 초반 경쟁사인 삼양식품에서 컵라면을 국내 최초로 출시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어 컵라면 먹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끼니를 떼우기 위해 차를 타고 같이 가던 사람들이 자판기에서 컵라면을 뽑아서 먹을 때 강부자는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에 농심은 아직 컵라면을 출시하지 못했고 강부자 자신은 농심 라면 모델이니 다른 회사 라면을 먹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거부한 것.[15] 아무래도 여성 연기자 중에는 이제 선배가 몇 없을만큼 고참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16] 강부자 또한 선생님이 아닌 교장선생님인지라 아무리 낮게 잡아도 90세는 넘으셨을 거라 할 정도로 걱정을 많이 했다. 1996년 평균수명이 65~70살 정도로 지금보다 10~15년 낮았고, 80세만 되어도 드물고 현재도 90대 이상이 생존해 있을 확률이 매우 낮으니 당시는 극히 드물어 찾을 때까지 엄청 걱정했으나 다행히 정정한 모습으로 방송국에 나오셨다. 교장선생님은 1897년생이다.[17] 사생활이 깨끗하다고 말한 이유는 주기적으로 헌혈하고, 난치병 소아환자들을 찾아가 위로를 하기 때문이라고... 물론 탈세 혐의나 여성 편력 문제가 있긴 하지만 좋은 일도 많이 하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태도의 논란과 함께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이미지가 더 강해졌다.[18] 염기훈은 강부자와 동향이기도 하다.[19] 말이 헛나온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당시에는 그게 언론의 표기 방법이었다. 영어권 외 다른 나라 사람들 이름이나 발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시절이며, 주로 일본을 통해 알려지면서 외래어, 인명, 지명 발음이 더욱 왜곡되었던 때다.[20] 남편 이묵원정일형역으로 출연해 부부가 역사적 부부역을 맡게 되었다.[21] 신정치개혁당과 신설 합당[22] 자유민주연합에 흡수 합당(법적으로는 신설)[23] 1993.2.9. 의원직 승계
(전국구 3번 정주영의 대선 패배에 따른 의원직 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