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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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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2. 생애[편집]
경남 동래군 장안면(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큰 포목점을 운영하고, 부농이었던, 아버지 최창민(1975년 사망)의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일항일학생의거 일명(노다이사건)에 간접 연루되었고, 동래 중학교 6년제(현 부산 동래고등학교)를 19회 졸업하였다.[4]
[5] [6]
1941년과 1942년 사이 무렵, 동래 중학교[現동래고등학교] 을 졸업하고,모교인 장안공립보통학교[現장안초등학교] 에 신설된 장안공립청년훈련소의 지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한다.
1945년 해방즈음, "광복된 조국을 위해 일을 하라는" 김범부 선생의 충고에 따라 1947년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에 입단하여, 조직책의 중요직을 맡았다. 1948년 조선민족청년단은 대동청년단과 함께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며, 대한청년단 부산결성대회 후, 청년단의 부산지역 책임자가 된다.[7]
[8]
1949년 이범석 장군이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겸임할때, 국방부 감찰과장으로 발탁되고, 1950년 5월 30일 경남 부산시 무구 선거구[부산무] 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당선 후, 동향 선거 지역구의 무소속 김범부 의원과 자유구락부 국민회계로의 교섭 단체 구성을 시도했지만, 의원 정수 부족으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활동을 하였다.
3. 정치인 최원봉[편집]
제2대 국회의원 역임 당시 무소속 의원으로 이승만 정부와 각종 정책에 대해 대립을 하였는데, 특히나 이승만 정부가 고수하던 귀속재산처리법에 대한 입찰경매제 방식에서 연고자 중심으로의 매각 개정안을 두고 2대 국회 개원부터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최원봉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 무소속 의원들은 현 귀속재산법 입찰경매제에서 연고자 우선 매각으로 개정하려 했다. 개정의 이유는 현 귀속재산처리법의 입찰경매제 방식은 특혜 또는 부정의 시비가 있어 개정하여야 하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를 하대 하려는 태도는 3천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무시하는 일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귀속재산처리법의 입찰경매제 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만민평등한 복리의 형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연고자 우선 매각 개정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국회의 개정안은 일부점유자의 이익만을 위하는 편견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귀속재산의 연고자점유자의 대부분이 입찰경매재에 반대하고, 충무로의 명동 일대의 상인들도 입찰경매제의 반대를 뜻하기 위해 상가를 일시 철시하였다. 이에 최원봉 의원은 2대 7회 2차 본회의에서 귀속 재산 처리법 방식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가는 정부를 따라 피난을 갔다.
1950년 11월 7일 정부의 전쟁 책임을 물어 국무위원 인책 및 사직 권고 결의안을 최원봉 의원 자신의 대표 발의 외 80여명의 의원들의 공동 발의와 85명의 의원 연서로 본회의에 대표 발의하여 상정 되었으나, 무슨 이유서인지 상정 토의 결과 국회의장 신익희 의원 등이 현재 국회에 세법이 상정 되어 있는데 정부와의 불협 화음을 막기 위함과 아직도 전방에선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결의안이 금년에 방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에 국론 분열로 미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서범석, 이종현 의원 등의 결의안 찬성 의원들의 찬성 토론이 있음에도 국무위원 인책 및 사직권고 결의안 안건이 71대 23으로 보류 처리 되었다.
다음은 국무위원 인책 및 사직 권고안을 대표 발인한 최원봉 의원의 결의안 대표 발언이다.
4. 의문의 죽음[편집]
이로부터 2일 후, 동년 11월 10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 가던중에 경상북도 김천군 황간 부근에서 북상하는 터키군 수송 차량의 갑작스런 도로 이탈로 충돌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국회는 1950년 11월 18일 제2대 국회 8회 52차 본 회의 도중 최원봉 의원의 자동차 사고사를 듣고 신익희 국회의장은 직접 애도사를 통해 조문을 표했다.
4.19 혁명 후, 최원봉 의원의 죽음에 대해 유족들이 정부에 강력한 진상 조사 요구가 있었지만, 번번히 이유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한다.뒷날 1997년에 방영된 토요미스테리 극장-어느 국회의원의 죽음-편을 통해 여동생 최옥순씨가 직접 출연하여 증언을 통해 오빠 최원봉 의원의 죽음에 대해 강력히 의문을 제기하였다.
1952년 국회에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납북, 행방 불명 또는 사망으로 인해 공석된 이들 국회의원에 대해 국회의원 제적수에 관한 특별법으로 제명 처리 되었으며, 최원봉 의원의 사망으로공석된 경남 부산 무구 지역구는 전쟁 중 행방 불명 또는 의문사 사망한 경북 달성의 권오훈 의원, 충남 공주의 김명동 의원, 충남 연기의 이긍종 의원, 전남 구레의 이판열 의원 등의 지역구 4곳과 함께 재보궐선거를 치루었다. 최원봉 의원의 선거구였던 경남 부산 무구의 재보궐 선거 당선자는 노동 운동가 유명한 전진한 의원이다.
5. 최원봉 의원이 발의한 법안[편집]
1950년 5월 30일 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최원봉 의원은 동년 11월 10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짦은 의정 생활이었지만, 의미 있는 법안들을 대표 발의 또는 공동 발의자로 의정 활동에 임했다.
- 1950-07-27 임시특별위원회설치에관한결의안(의안 020719호)
- 1950-07-28 2대 8회 본회의 의결(부결) 대표 발의자 이시묵, 공종 발의자 이시묵 김범부 김봉재 김익기 김형덕 노기용 윤성순 정헌주 최원봉
- 1950-07-31 국민총력동원선언에관한결의안(의안 020726호)
- 1950-07-31 2대 8회 본회의 의결(부결) 대표 발의자 김범부, 공동 발의자 김범부 김명수 김지태 박정규 배상연 서상국 서이환 이갑성 이병홍 이진수 정기면 최면수 최원봉
- 1950-08-01 휴회에관한건 발의자
- 1950-09-03 유엔총회및미국등예방의원파견의건 발의자
- 1950-09-06 대통령에게요청하는결의안 발의자
- 1950-09-12 피난민구호에대한임시조치법안 발의자
- 1950-09-16 회기재연기에관한건 발의자
- 1950-11-01 국무위원인책사직권고에관한결의안 대표발의자
- 1950-11-01 추곡매상에관한건의안 발의자
- 1950-11-02 이북탈환지역실정동사위문단파견에관한건 발의자
- 1950-11-02 이북애국동포에게멧세-지발송의건 발의자
- 1950-11-07 국민학교후원회비징수폐지요구에관한건의안 발의자
6. 여담[편집]
독립 운동가라는 평가 외에 당시 장안면 좌천리의 지역 유지로써, 1940년대 일제의 징용.징병에 협력했다는 현 생존해 있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직접 청취 하였다. 단순 협력인지, 적극 협력인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좌천리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현지 주민들 중 일부는 최원봉 의원이 당시 좌천리 마을 유지로써 1940년대 일제의 전쟁의 징용.징병에 협력하여 당시 마을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확실히 그의 당시 행동에 있어 판단하기는 현재 어렵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최원봉 후보가 부산 무구(현 부산 영도구) 선거에서 유세 발언 중 일부분이다.
7. 선거 이력[편집]
8. 둘러보기[편집]
9. 아들 최백호[편집]
최원봉 의원의 아들은 가수 최백호씨이다. 최백호씨는 뉴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최원봉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2011년 3월. 한국정책방송 KTV의 한 대담 토크쇼에서 아버지 최원봉 의원에 대해서 태어난지 5달이 채 되지 않아 자동차 사고로 돌아 가셨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기억은 없지만, 1950년 11월10일 삼촌들 및 지인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 오던 중 경북 김천 부근 다리에서 마주 오던 터키군 수송 차량의 갑작스로운 도로 이탈로 추돌 사고를 당해 사망 하였다고 증언 하였다. 이에 아버지 최원봉 의원 죽음에 의문점을 내비쳤으며, 이 사건 이후, 할아버지 최창민 등 친가와 인연을 끊게 되었다. 이후 가수 최백호씨가 자신의 그림 전시회에 찾아온 아버지의 지인에 의해 다시 한번 아버지 최원봉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10. 대중 매체에서[편집]
파일:정하완최원봉.jpg
* 토요미스테리 극장(어느 국회의원의 죽음) 편(SBS, 1998년 6월 20일) - 정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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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現장안초등학교] A B C [現동래고등학교] A B [2] 대한청년단으로 통합[3] 임기 중 사망.1950년 5월 30일 ~ 1950년 11월 10일[4] 기장사람들. 공태도 엮음 290p[5] 1939년 5월 24일 동아일보 3면.父 최창민님에 대한 기사.[6] 기장군보. 기장사람들 2017년 2월호[7] 기장사람들. 공태도 엮음 290p~292p[8] 11950년 6월 20일 경향신문 3면.최원봉 후보 당선 기사.[부산무] 現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교로4~5가 대평동1~2가, 남항동1~3가, 소선동1~4가, 신선동1~3가, 봉래동1~5가, 청학동, 동삼동[9] 국회의원 임기 1950년 5월 30일 ~ 1950년 11월 10일